기독교, 한국에 살다



한국 최초의 근대 학교는 배재학당이다. 배재학당은 1885년 8월 3일 미북감리회의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아편설라) 선교사에 의해 시작됐다. 1885년 4월 5일 내한했던 그는 조선 정세의 불안정으로 3월 13일 일본으로 돌아가 한국어를 공부하고 6월 21일 다시 제물포항에 도착한다. 그리고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시란돈)의 집 2칸 방에서 8월 3일부터 한국 학생 이겸라, 고영필 두 사람에게 영어를 가르쳤는데, 이것이 배재학당의 출발점이다. 아펜젤러는 미국 공사관을 통해 정식 학교 설립을 한국 정부에 요청, 1885년 11월에 ‘영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배재학당이 정식으로 문을 연 것은 1886년 6월 8일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들쭉날쭉했고, 예수교를 한다고 박해받지는 않을까 두려워해서 학생들이 기피하기도 했다. 이에 왕실의 인정을 받는 것이 지름길이라 생각한 선교사들은 왕실의 환심을 살 계획을 세우고 1887년 1월 16일 덕수궁 얼음 연못에서 스케이트 대회를 열었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참석한 가운데 선교사들이 스케이트를 타 보였고, 명성황후는 선교사들에게 특별 음식을 내렸다. 그리고 한 달 후인 1887년 2월 21일에 고종이 지어 보낸 학교 이름을 받았다. 배재학당이란 ‘유능한 인재를 기르는 집’이란 뜻이다. 선교사 학교에 고종이 직접 이름을 하사했다는 소문이 나면서 전국에서 학생들이 오기 시작했다. 배재학당은 나라에서 인정한 학교이자 출세의 지름길로 인식이 된 것이다. 새로운 교사를 신축할 필요성을 느낀 아펜젤러는 1887년초 양옥 교사를 착공, 그해 9월에 100여 평 단층 르네상스식 벽돌건물(강의실, 도서실, 예배실 구비)을 준공했다. 


배재학당 당훈은 ‘욕위대자 당위인역’(慾爲大子 當爲人役)이다.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다른 사람의 부림을 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 (마 20:26)는 말씀의 정신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현재 정동 배재학당 자리에 남아 있는 건물은 ‘동관’(東館)으로 불리는데, 1916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지금 이 건물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동관 뒤에는 550년 된 향나무가 있다. 나무에는 큰 못이 하나 박혀 있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말을 매려고 못질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나무는 배재학당 출신의 시인 김소월이 사랑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동관 앞으로 나오면 ‘최초의 신문사 터’(삼문출판사 터)라고 새겨진 작은 돌비석이 있다.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 학교인 이화학당은 스크랜턴의 어머니인 스크랜턴 대부인(Mary F. Scranton)에 의해 시작됐다. 1885년 6월 20일, 아들보다 한 달 늦게 서울에 도착한 스크랜턴 대부인은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하지만 배우려는 한국 여성이 나타나지 않았다. 여성 교육을 등한시하는 봉건적 사회 질서와 서양인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었다. 이에 스크랜턴 대부인은 정동의 미국 공사관 건너편 언덕에 초가집 19채를 구입해서 200여 칸 되는 한옥 기와집을 짓기 시작했다. 


학교를 건축 중이던 1886년 5월 31일, 정부 관리의 첩 ‘김씨 부인’이 찾아와 첫 번째 학생이 됐다. 그녀는 영어를 배워 명성황후의 통역을 맡아 남편의 출세를 도우려는 의도에서 찾아왔는데, 3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6월에는 8살짜리 복순이가 어머니의 손에 끌려서 찾아왔다. 복순이네 집은 너무나 가난했는데, 그의 어머니는 학교에 보내면 공짜로 먹여주고 입혀 주고 가르쳐 준다는 얘기를 듣고 복순이를 맡기러 온 것이다. 이화학당의 세 번째 학생은 4살짜리 별단이다. 별단이는 전염병에 걸려서 어머니와 함께 성벽 아래 버려졌는데, 스크랜턴 대부인이 이 버려진 모녀를 데리고 온 것이다. 1886년 11월 기숙사를 갖춘 교사가 완공되자 이곳은 가난하고 소외된 여성들의 안식 처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887년이 되면서 학생 수가 46명으로 늘었고, 그해 10월에는 두 번째 여교사 로드와일러(Louisa. C. Rothweiler)가 부임했다. 1887년 가을에는 명성황후로부터 이화학당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배꽃(梨花)은 조선 왕실의 문양이자 동양 미인을 상징하는 꽃이었다. 배재학당처험 왕실에서 이름을 지어줌으로 인해 나라에서 전적으로 인정하는 학교가 되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나라의 인정뿐만 아니라 한국 여성들의 마음이 열려서 선교사들이 하는 일을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851년 충청도 홍주에서 가난한 선비의 딸로 태어난 이경숙은 신혼 3일 만에 청상과부가 되었다가 친척의 소개로 스크랜턴 대부인을 만났다. 그녀는 천대 받던 과부를 정중하게 대하는 스크랜턴 대부인의 마음에 녹아 이화학당에서 공부한 뒤 1889년 4월부터 한국인 최초의 교사가 됐다. 이화학당의 흔적은 이화여고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현재 한옥 교사 자리는 이화여고 본관 앞 잔디밭에 해당된다. 잔디 밭 안에는 스크랜턴 대부인의 흉상이 있다. 그리고 유관순 열사가 빨래했다는 우물과 손탁호텔 터, 그리고 옛 성벽 일부가 학교 안에 남아 있다. 학교 동문 왼편에 심슨홀이 있는데 1915년에 건축한 이화학당 교사이다. 


경신학당은 미북장로회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 선교사에 의해 1886년 5월 11일 세워진 근대 학교이다. 언더우드는 처음에 고아원 형태로 학교를 시작했다. 제중원에서 영어를 배우러 찾아오는 학생을 가르치던 언더우드는 1886년 1월부터 고아원 설립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고아나 극빈자 아동들을 수용해서 기술을 가르치는 일종의 기숙학교 형태였다. 그해 5월 11일 정동에 한옥을 구입해 수리하고 학생 1명으로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최초의 교명은 언더우드 학당이었으며, 예수교학당, 민로아학당, 구세학당 등으로 불리다가, 1901년 미북장로회 게일(James. S. Gale, 기일)이 교장으로 부임한 뒤인 1905년 경신학당으로 개칭했다. 경신이란 ‘새로운 것을 깨우친다’는 의미이다. 1913년 쿤스(Edwin. W. Koons, 군예빈)가 8대 교장으로 취임한 뒤, ‘자유·평등·박애’를 교훈으로 정했다.


1915년 4월 초대 교장인 언더우드의 노력으로 경신학교 대학부가 설립되고, 이 대학부를 모체로 2년 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가 설립됐다. 1938년 미북장로회 선교부는 총독부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 부하고 폐교를 결정했다. 이때 경신 동창들과 교사,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1939년 선교회가 교육 경영에서 물러나고 운영권이 황해도 안악교인 김홍량, 김원량 등의 김씨 문중으로 넘어갔다. 최태영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교장에 취임했다. 1940년 4월에는 교사를 정릉으로 이전했지만, 1952년 화재로 정릉 교사가 소실되자 1957년 혜화동 현 교사로 이전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알렌(Horace. N. Allen, 안련) 선교사가 살던 정동 집에는 1886년부터 간호사 엘러스(Ellers A. Bunker, 방거부인), 호턴(Lillas S. Horton, 나중에 언더우드 부인), 헤이든(Mary E. Hayden, 나중에 기포드 부인) 등 독신 여선교사들이 들어와 살았다. 정신여학당은 여기서 시작됐다. 1887년 6월 엘러스가 제중원에서 5살 고아 정네를 데려와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정동여학당의 출발이다. 


1895년 10월 정동여학당은 종로구 연지동에 새 교사를 마련하고 연동여학교로 개칭했다가 1909년 8월 11일 정신여학교로 개칭하였다. 1906년 연동교회 뒤 언덕에 2층 벽돌 양옥을 짓고 기숙사 겸 교사로 사용하다 1910년 670평 규모의 3층 르네상스 양식 건물을 지었는데, 미국의 자선사업가 세브란스(L. H. Severance)가 건축비를 부담하여 세브란스관이라 불렀다. 당시 건물 규모와 시설에서 서울에서는 최신식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지금도 남아 있다. 1904년 고종이 처음 정동여학당 자리로 거처를 옮기면서 중명전이 됐다. 중명전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뜻이다.



(사진 - (위)초기 배재학당 교사와 배재학당 학생들 / (아래)연지동에 설립된 경신학교 전경 )



한국의 기독교 선교는 학교, 병원, 교회의 삼각 구조로 이루어졌다. 선교사들은 한국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서와 교리 교육을 시켜 교회 지도자로 세웠다. 교회와 선교 학교에서 교인과 학생들에게 성서와 교리 교육을 보다 집중적으로 하게 된 것이 한국 신학교의 출발점이 다. 


미북감리회의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아편설라) 선교사는 정동에 배재학당(1885)을 설립하고 영문학부, 한문학부, 신학부를 운영하려 했다. 영문학부와 한문학부는 순조롭게 시작했으나, 신학부는 공개적으로 시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성서와 기독교 교리를 배우려고 찾아온 한용경, 박중상에게 성서와 교리 교육을 시키고 세례를 주었다. 


1887년 9월 배재학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신학 공부를 위한 공간으로 한옥을 구입하고‘베델예배당’으로 명명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학생들 가운데 말씀을 배우려는 열심 있는 학생 8명을 방과 후 별도로 모아 놓고”성서와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감리교신학대학교는 1888년 미북감리회 해외선교부 연례보고서에 따라 1887년 9월을 학교의 설립 년도로 본다. 정식 신학교 형태는 아니었지만, 배재학당 학생들로 시작된 신학 수업이 한국 땅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신학 교육이었다.


이후 1888년 4월 명동성당 건축사건과 영아소동으로 선교사들의 선교활동과 종교집회가 금지되자 베델예배당 집회와 배재학당도 한 때 문을 닫았다. 1890년대에 들어서 조선인 목회자 양성이 필요해짐 으로 인해 미북감리회 조선선교연회 안에 목회자 양성 과정이 개설되면서 정규 신학 과정이 마련됐다. 이 과정을‘신학회’로 불렀고, 더욱 체계적인 신학 교육을 하게 됐다. 


전담 교수진이나 독자 건물은 없었지만 서울, 평양, 인천 등지를 돌며 농한기에 조선 전도인들을 모아 신학을 가르치는‘단기 집중 교육과정’의 형태였다. 이 신학회 과정을 거친 전도인들이 연회 자격심사를 거쳐 1901년 5월에 김창식과 김기범이, 이듬해 연회에서는 최병헌이 각각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1903년 원산 부흥운동 이후 교세가 확장되는 것을 계기로 한국인 목회 지망생들이 더욱 늘어났으며, 정규‘신학교’설립이 필요하게 됐다.  


이러한 시기에 1902년 아펜젤러가 해상 사고로 순직했고, 이로 인 해 신학 교육도 큰 위기에 빠졌다. 아펜젤러의 뒤를 이어 신학 교육을 담당한 이는 존스(George H. Jones, 조원시) 선교사였다. 1890년대 부터 신학회 교수로 활약해 온 존스는, 아펜젤러 사후 이를 맡아 관리 하다가 신학교 설립 운동을 적극 추진했다. 그 노력의 결과로, 1907년 미북감리회 선교부와 미남감리회 선교부가 합동으로 협성성경학원 (協成聖經學院, Union Biblical Institute)을 설립하고 존스가 초대 원 장으로 취임했다. 협성성경학원에서는 매년 2학기씩 5년 교육과정으로 신학 교육을 해 나갔다. 1910년에 냉천동 31번지에 학교 부지를 마 련하고 감리교협성신학교(Union Methodist Theological Seminary)로 교명을 변경했다. 


1908년 2월에는 전도부인 양성 교육을 위해 서울 종로 인사동에 마련한 한옥 건물에서‘부인성서학원’(婦人聖書學院)이 시작됐다. 부인성서학원도 1917년 봄 죽첨정(현 충정로 3가) 언덕에 독자적으로 3층짜리 회색 벽돌 건물을 마련했다. 여성 신학 교육에 있어서도 미북감리회와 미남감리회 여선교부가 1921년부터 연합으로 여자 신학교를 운영하기로 합의하고 그때부터 부인성서학원을 감리교협성여 자신학교(Union Woman’s Bible Training School)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1년 12월에 냉천골 언덕에 있던 협성신학교와 죽첨정에 있던 협성여자신학교가 통합해 감리교신학교(Methodist Theological Seminary)가 됐다.


미북장로회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 선교사는 1890년 신학반을 개설해 16명의 사람들에게 성서 공부를 시켰다. 장로회 선교부는 1891년부터‘선교사는 누구든지 자기 선교지역 안에 성서 학습과정을 만들고 직접 가르쳐야 한다’는 규칙을 정했다. 이것이 한국 교회 사경회의 기초가 됐고, 몇 사람들을 선발해 신학 교육을 시킨 것이 신학교의 바탕이 됐다. 


1893년 미북장로회, 미남장로회, 호주장로회,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로 조직된 선교사연합공의회는, 늘어나는 교인들을 감당하고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 신학교를 세워 한국 교회를 독립체제로 전환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1890년 언더우드가 개설한 신학반은 1890년 말 평양선교부에서 활발히 추진되었다. 마펫(Samuel A. Moffett, 마포삼열) 선교사를 비롯한 베어드(Willam. M. Baird, 배위량), 스왈른(William L. Swallen, 소안론), 그래함 리(Graham Lee, 이길성) 등 맥코믹 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에 의해 교육의 열기가 고조 됐다. 1900년 마펫은 신학교 설립을 구체화하고 미북장로회 선교부에 신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알리고 건립 기금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선교부의 설립 허가와 함께 신학교 설립을 위임받은 마펫은 1901년 신학반에서 공부하던 사람 중 장대현교회 장로 방기창, 김종섭 2인을 목사 지원자로 받아 신학 교육을 하기 시작했다. 선교사연합공의회는 1903년 1월에 평양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신학교를 정식 개교하고 신학 교육을 받고 있던 방기창, 김종섭 외에 양전백, 길선주, 이기풍, 송인 서 4명을 신학교에 합류시켰다. 서경조, 한석진은 선교사에게 받았던 개인지도를 인정받아 3학년에 편입했다. 이들이 한국 장로교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는 일제강점기인 1938년 신사참배로 인해 사실상 폐교됐지만, 이 학교를 모태로 여러 신학교들이 생겨났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총신대학교 등의 모태가 된 것이다.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는 서울 승동교회에서 1940년 개교했다. 


감리회의 협성신학교가 서울에 있었고 진보적이었으며, 장로회의 평양신학교는 평양에 있었고 보수적이었다. 또한 협성신학교는 수준 높은 신학 교육을 지향한 반면, 평양신학교는 목회하는 데 필요한 정도의 낮은 신학 교육을 지향하였다. 이것이 한국 교회 초기 신학자 중에 감리회 출신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같은 교파와 신학적인 차이는 한국 교회의 갈등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성결교회는 1907년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의 한국 선교로 시작됐다. 카우만(Charles E. Cowman)과 킬보른(Ernest A. Kilbourne, 길보륜)에 의해 시작된 동양선교회는 도쿄성서학원을 설립했다. 김상준(金相潛), 정빈(鄭撚)이 도쿄성서학원에서 공부하면서 동양선교회를 만났고, 이들이 졸업한 뒤 한국에 돌아와서 종로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개설하고 전도를 시작했다. 복음전도관의 시 작과 함께 성경반을 열었다. 성경반을 운영하면서 성서학원 설립을 준비하여 1911년 3월 13일 무교동에 경성성서학원을 개교했고, 원장으 로 존 토머스(John Thomas)가 취임했다. 1940년에 경성신학교로 개칭하고 교장에 이명직(李明稙) 목사가 취임했다. 해방 후 다시 서울신 학교로 개칭했으며 현재의 서울신학대학교가 됐다. 성결대학교도 그 뿌리는 경성성서학원이라고 할 수 있다. 


구세군은 1910년 2월 종로구 평동에서 구세군성경대학을 개교해 1912년 구세군사관학교로 개칭했다.


성공회는 1914년 4월 강화에서 성 미카엘신학원을 열어 천신신학교로 개칭했다. 이것이 성공회신학대학교를 거쳐 지금의 성공회대학교가 됐다. 


하나님의성회는 1953년 5월 10일 미국 하나님의성회 순복음신학교 를 개교하고, 교장에 아서 체스넛(Arthur Chesnut)이 취임했다. 순복음신학대학과 순신대학교를 거쳐 오늘의 한세대학교가 됐다. 


(사진 - 감리교 협성신학교 전경 / 초기 장로회 평양신학교 학생들과 교수들[1905] /  성결교 경성신학교 전경)


 


1894년 로제타 홀(Rosetta S. Hall, 허을)은 평양에 들어오자마자 환자를 돌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유독 환자 중에 장님, 벙어리, 귀머거리들이 많았다. 그 당시 조선의 장님, 벙어리, 귀머거리들 은 매우 처참한 상태에 있었다. 장님들은 주로 점쟁이나 무당이 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것도 부모들이 돈이 있어서 훈련을 시킬 수 있는 경우에만 가능했다. 대부분 먹고 살 길이 막막하여 결국에는 걷기조차 어려운 지경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현실을 지켜 본 홀 은, 세상에서 쓸모없다 는 세간의 그릇된 관념을 깨뜨리기 위해서라도 맹인 교육이 시급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홀은 눈먼 어린이들을 어떤 방법으로든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 의 눈초리였다. 조선 사람들이 그녀의 의도를 잘못 이해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긴장된 상황 속에서 자칫 잘못하면 1888년에 파급되었던 유언비어처럼,“의사들이 약을 만 들기 위해 아이들의 눈을 뽑았다”는 모함으로 이용될 수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기회가 생겼다. 평양에서 홀의 첫 신자가 된 사람 이 오석형이었는데, 그에게는 앞 못 보는 어린 딸‘봉래’가 있었다. 홀은 오석형의 딸이 장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맹인교육 시작할 용기가 생겼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신실한 기독교인이니 자신의 의도를 오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드디어 홀이 봉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봉래는 총명했다. 거기다 높은 열성을 가지고 좋은 반응을 보였다. 홀은 일기에 “나는 봉래를 가르치기 위해 조선 기름종이에 바늘로 점을 찍어 일종의 점자를 고 안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홀은 맹인을 교육시킬 수 있는 지식이 있으면 봉래에게 점자를 읽게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이 분야 에 대해 좀 더 공부하기로 생각하던 중에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1894년 9월 15일 평양에 청일 전쟁 발발했을 때, 남편인 윌리엄 홀(William J. Hall, 하락)이 헌신적으로 환자와 부상자 돌보다가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결국 11월 24일 죽음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이때 홀은 둘째아이 임신 7개월째였다. 11월 27일 노블(William A. Noble, 노보을) 목사가 집례한 장례식을 마치고, 홀은 12월 16일 제물포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듬해인 1895년 1 월 18일 에디스 마가렛이 태어났다. 홀은 미국으로 돌아 갈 때 의학공 부를 하고 싶어 하는 박에스더와 그녀의 남편을 데리고 갔다. 


홀은 남편 홀 기념병원 건축을 위한 모금을 위해 1897년 8월 미국에서‘윌리엄 제임스 홀의 생애’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기금으로 1897년 2월 1일 평양에 남편을 기념하는‘평양 기홀병원’이 세워졌다.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홀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숙제는 조선의 맹인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녀는 곧 맹인교육에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프랑스 파리의 맹인 교사인 루이스 (Louis Braille)가 개발하여 1829년에 출판된 점자책이 있었다. 또한 1860년 뉴욕 맹인 교육학원의 원장인 윌리엄 웨이트(William B. Wait) 가 개발한‘뉴욕 포인트’란 점자도 있었다. 홀은 웨이트 원장을 방문 하여 점자 구조를 배웠다. 여러 점자 구조들을 비교해 본 그녀는‘뉴 욕 포인트’가 조선어에 가장 적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1897년 가을, 홀은 조선의 부름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조선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남편이 시작한 사업을 성사시키기로 결심했다. 감리회의 여성 해외선교회는 보구여관에서 일하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홀은 두 아이를 데리고 1897년 10월 11일 미국을 떠나 1897년 11월 10일 제물포에 도착했다. 한국을 떠난 지 2년 10개월만이었다. 5개월 남짓 보구여관에서 의료활동을 하다가 1898년 4월 29일 서울을 떠나 제물포에서 배편으로 5월 1일에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에 도착한지 20여일만인 1898년 5월 23일 딸 에디스 마저도 이질로 잃게 되었다.


슬픔도 잠시, 1898년 6월 18일에 평양 여성치료소 광혜여원을 개원 해 환자를 돌보기 시작했다. 1898년 8월에는 에디스 마가렛 기념 병원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이 병원은 특별히 어린이를 위한 병동을 갖춘 병원이었다. 그 당시 해외여선교회에서는 여성병원을 설립하기 위한 기금을 모으고 있었다. 에디스 마가렛의 어머니였던 홀은 이 새 병원 부속으로‘에디스 마가렛 병원’을 짓기 원했던 것이다. 친척들과 친구들이 보내준 돈과 얼마 되지 않던 에디스의 저금을 합쳤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1899년에는 어린이 병동을 지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해 졌다. 이 때 홀은 후원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냈다 


"작년(1898년) 8월 우리는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평양의 모든 건물들은 선교사들의 집들까지도 조선식 건물입니다. 단층집으로 흙벽에 기와지붕입니다. 어린이 병동은 평양에서는 처음으로 지어진 이층집 입니다. 나무판자로 누비듯이 벽을 만들고 양철 지붕과 벽돌로 굴뚝을 세운 것으로 역시 첫 번째가 됩니다. 조선에서는 제재소가 없어 모든 재목은 손으로 켜야 합니다. 이런 건물은 이곳의 일류 목수들까지도 처음 보는 것임을 아신다면 이 어린이 병동을 짓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실 하나와 부엌, 조수실 하나가 완성되었으니 이 겨울을 지나기에는 충분합니다. 내년 봄 까지는 방안의 페인트칠과 도배 작업이 다 끝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어진 어린이 병동은 홀에게 있어서 상당히 소중한 장소였다. 눈먼 소녀들을 가르치기 위한 장소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본격적인 맹인교육이 시작된 것이다.‘에디스 마가렛 기념 어린이 병동(Edith Margaret Children’s Ward)’이 세워졌을 때, 방 하나를 맹인소녀들을 위해 마련했다. 소녀들의 부모들은 거의 가난했다. 아이들은 매우 행복하게 잘 배웠다. 이곳에서의 수업은 1906년 11월 병원이 화재로 전부 타버릴 때까지 계속됐다. 화재 후 맹인반은 매일 학교 교실 하나를 얻어 옮겨갔다. 매일학교 건물에서 가운데 두 개의 큰 방은 매일학교가 사용했고, 'L'의 작은 방들은 새로 세워진 연합 아카데미의 감리회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로 사용됐다. 나머지 방을 맹인소녀들이 사용했다.


교재는‘뉴욕점자’를 조선말에 맞게 고친 것이었다. 조선에 돌아 온 해(1898년) 겨울, 로제타 홀은 여가를 이용하여 조선어 교재를 점자법으로 복사했다. 교재는 조선말의 알파벳인 가, 나, 다, 라와, 조지 히버 존즈 여사가 지은‘조선어 기도서’와 십계명이었다. 카드보드와 비슷하게 빳빳한 조선 기름종이에 바늘로 찍어 점자를 만들었다. 다시 오씨의 딸 맹인 봉래를 데리고 교육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점자 교육이 진도가 느리고 지루했다. 그러나 봉래가 점자로 조선 알파벳을 해득한 뒤에는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진도가 빨라졌다. 일 년 만 에 봉래는 준비한 모든 교재들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곧이어 그녀는 점자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고 말하는 것을 받아 자신이 점자 교습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홀은 봉래에게 글자 뿐 아니라 뜨개질까지 가르쳤다. 


봉래가 글도 배우고 행복해진 것을 본 병원 환자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다른 맹인 소녀들도 받아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다. 맹인 교육에 대한 좋은 인식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조선에서는 첫 번째 맹인학교가 생기게 되었다. 평양여학교가 설립된 후에는 맹인반이 추가됐다. 홀은 맹인소녀들도 정상적인 소녀들과 함께 배워야 하며 여러 운동이나 놀이에도 똑같이 참여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가장 절실한 것은 초보 학생을 위한 특수교사를 양성해 일반 교사들과 같은 교사진에 넣는 일이었다. 결국 소망대로 첫 제자 봉래가 나중에 특수교사가 됐고, 맹인학교는 계속 커져서 농아까지도 수 용하게 된다.


최초의 농아학교 역시 1909년 홀에 의해 설립됐다. 홀이 1892년 결 혼하고 신혼여행으로 1개월간 중국 치푸(Chefoo, 芝罘)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이 때 동료 선교사들이 경영하고 있던 농아학교를 시찰할 기회가 있었다. 맹인교육 뿐 아니라 농아교육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던 홀은 농아학교 설립을 위해 이 학교에 교사 양성을 의뢰했다. 농아 학교 설립에 대해 백낙준은 『한국개신교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09년 홀여사는 중국 치푸에 이익민을 파견하여 농아 교육방법을 배우게 하였고 이씨는 귀국할 때 그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던 그의 조카를 데리고 왔다. 이 두 사람의 도움으로 홀여사는 한국최초로 귀머 거리학교를 설립하였다."


(사진 - 로제타 홀 선교사  / 평양 맹학교 졸업생들과 함께 한 로제타 홀 선교사)




기독교는 한국의 근대 고등교육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결과적으로는 소학교 졸업생들의 진학을 위해 중등학교의 설립이 필요한 상황이 전개되고, 또한 중등학교 졸업생들의 진학을 위해 고등 교육기관이 필요하게 되는 상황으로 이어진 측면도 있지만, 한국에서의 고등교육기관 설립은 비교적 처음 단계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기독교 고등교육기관의 설립과정에서 나타나는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은, 처음에는 교단별로 설립됐지만 이후 다른 교단과 연합하게 되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연합의 차원에서 설립됐다는 점이다. 이는 개별 교단 차원의 계획과 노력을 통해 시작된 고등교육기관이, 이후 실질적으로 운영되는 상황에서는 다른 교단과의 연합이 필요하게 될 정도로 크게 발전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의학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이나 아니면 일반 고등교육기관, 그리고 신학을 위한 고등교육기관 모두에서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한국의 근대 고등교육은 처음부터 외국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가령 구한국 정부에서 설립한 육영공원의 경우 교사로 초빙된 사람들은 길모어 (George W. Gilmore, 길모), 번커(Dalziel A. Bunker, 방거), 헐버트(Homer B. Hulbert, 흘법, 할보)로, 이들은 모두 기 독교 선교와 관련이 깊은 사람들이었 다. 그리고 처음부터 한국에서 기독교 는 교육과 의료 분야에 국한해서 허락 을 받았기 때문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교육을 전담하는 선교사로서의 역할이 컸다. 한국에서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고자 했던 선교사들은, 처음에는 각자의 교단 차원에서 이를 시도했다. 그리고 입학 조건을 기독교인으로 한정했다.  


이렇게 설립된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숭실대학이 있었다. 평양에서 시작된 숭실대학은 한국 최초의 일반 고등교육기관으로, 장로회의 교육전문 선교사 베어드(William M. Baird, 배위량)에 의해 설립됐다. 대학의 운영을 일개 교단 차원에서 지원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선교사들 사이에 연합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시점에서는 장로회와 감리회가 공동으로 운영에 참여해 연합고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설립된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제중원의학교가 있다. 설립된 이후 첫 번째 졸업생을 배출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시기상으로는 가장 먼저 설립된 고등교육기관이었고, 의학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의학교였다. 이 학교는 이후 세브란스의과대학으로 발전하여 기독교 사립대학으로서 한국의 의학과 병원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일제가 기독교 기관을 전면적으로 통제하고 탄압하는 상황에서도 세브 란스의과대학은 의학과 의료를 통해 많은 한국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여기에는 간호사를 양성하기 위한 간호대학도 병설되어 의료 사업에 있 어서 여성의 참여를 전폭적으로 확대했다. 특히 경성여자의과대학은 여 성 전문의를 배출하기 위한 고등교육기관으로, 의료사업에서 여의사의 활약이 크게 요청되는 상황에 따라 설립됐다. 


 한편 한국의 여성들을 위한 교육사업도 크게 발전해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화여자전문학교는 이러한 한국의 여성들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으로 설립됐다. 이화여자대학교는 한국에 설립된 최초의 여성들을 위한 대학으로, 여성들의 삶과 지위의 향상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한국 근대 여성운동의 요람이었다. 이화여자대학교 역시 처음에는 미북감리회의 지원으로 설립되고 운영됐지만, 이후 미남 감리회와 연합으로 운영됐다. 


이에 반해 연희전문학교는 처음 미북장로회에서 설립을 계획하였지만, 교단 안팎에서 학교 설립에 대한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설립 단계에서부터 연합학교로 추진됐다. 연희전문학교는 미북장로회의 경신학교 대학부와 미북감리회의 배재학당 대학부가 연합해 하나의 대학을 형성한 것인데, 여기에 미북장로회, 미북감리회, 미남감리회가 우선적으로 참여했고, 이후에는 미남장로회와 캐나다장로회가 참여 했다. 이로써 연희전문학교는 한국의 대표적인 교단이 공동으로 협력 하여 운영하는 연합고등교육기관으로 발전했다.


한국의 초창기 고등교육기관에는 신학교를 포함시켜야 한다. 대표 적으로는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와 서울의 감리교협성신학교, 평신도를 위한 신학교육기관으로 설립된 피어선 기념 성경학원이 있다. 이 학교들에 대해 연합의 차원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장로회신학교의 경우 미북장로회, 호주장로회, 미남장로회, 캐나다장로회가 연합해서 설립하고 운영하는 신학교육기관으로, 하나의 신학교를 위해 네 개의 선교부가 협력하는 형태였다. 그리고 감 리교협성신학교의 경우도 미북감리회와 미남감리회가 공동으로 참여하여 협력하는 연합신학교였다. 피어선 기념 성경학원은, 평신도를 대상으로 하는 성경학원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에서 해외선교에 있어서 연합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피어선(Arthur T. Pierson, 피어 선)의 유지를 통해 서울에 설립된 고등교육기관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연합의 형태로 설립돼야 한다는 점이 크게 강조되고 있었다. 미북 장로회와 미북감리회, 그리고 미남감리회가 공동으로 참여하여 학교를 운영하였고, 본래의 취지에 걸맞게 평신도를 위한 신학교육기관으로 시적하고 발전해 나갔다.


이외에도 기독교가 한국의 근대 고등교육의 발전에 기여한 부분으로 전국적으로 퍼져있는 기독교계 사립대학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살 펴볼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지면상 생략했다. 또한 이 학교들은 고등 교육기관의 설립과 운영을 위한 연합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는 부분 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초기부터 기독교는 한국의 근대교육기관, 즉 대학의 설립을 주도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명문 사학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점은, 이미 지적한 바 있지만, 연합이라는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대학이 특정 교단의 설립 취지나 운영 방침에 전적으로 얽매이지 않으면서, 대학 본연의 학문적 활동을 최대한 보장 받는 상태로 발전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제 신학대학을 포함한 기독교 대학들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각자 의 정체성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상황을 맞고 있다. 말하자면, 그 역사를 다시 되돌아봐야 하는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사진 - 숭실학교 초기 학생들과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사 / 연희전문학교 스팀슨관 준공식[1921] / 이화여전 전경) 





사실 한반도에서 근대적 서양식 의료행위가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가장 먼저 시작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선교사들이 의료선교 사업에 착수하기 이전에 일본 침략세력에 의해 먼저 병원이 설립·운영됐기 때문이다. 1876년 일본과 한국이 수교조약을 맺고 개항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일본에 의해 근대식 의료기관들이 설립·운영된 것이다. 그러나 이 병원들에서 소수의 한국인들이 진료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제국주의 침략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으로 본격적인 서양의술의 도입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일본병원은 재한 일본인들을 치료하고, 한국인들에게 친일적 성향을 갖도록 독려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설립·운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1885년 광혜원의 설립을 시작으로 펼쳐진 개신교의 의료선교는 한국인들과 민중들을 위한 것으로 성격 자체가 전혀 달랐다. 


미국 공사관 의사 자격으로 입국한 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안련)은 갑신정변에서 크게 다친 민영익을 헌신적으로 치료해 소생 시킨 것을 계기로 고종으로부터 ‘조선왕립병원’설립을 윤허받을 수 있었다. 고종은 근대병원의 설립을 매우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렌이 선교사라는 것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협조할 의향을 갖고 있었으며, 고종의 이러한 확고한 의지 덕분에 여러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1885년 4월 10일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인 왕립 광혜원(제중원)이 개원 될 수 있었다.


제중원은 재정, 행정, 운영은 조선정부에서, 의료는 미북장로회 선교부가 각각 담당하는 반국영의 성격으로 의료사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당시 정부가 서양식 의료사업을 외국 문화를 수입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제중원은 외교와 통상업무를 관장하던 통리교섭통상사 무아문에 소속돼 있었다. 제중원은 설립 첫해부터 한국인에 대한 의학교육을 실시했다. 16명의 학생을 예과로 받아 그 중 12명을 본과생으로 선발하여 교육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초기 의학교육은 뚜렷한 성과를 얻지는 못한 채 끝나버렸다. 1890년대 중반에 에비슨(Oliver R. Avison, 어비신)에 의해 다시 의학교육이 시도돼 1908년 7명의 첫 조선인 의사를 배출했다. 이 첫 조선인 의사들 중에는 백정 출신의 박서양이 포함돼 있어 당시 기독교가 한국의 신분제도를 뛰어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미북장로회의 선교사들이 정부와의 협조 속에 제중원을 통해 의료선교를 실시한 것과는 달리, 미북감리회의 선교사들은 민간병원을 설립했다. 가장 먼저 생긴 병원은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시란돈)이 1885년 10월 9일 세운 시병원이었다. 스크랜턴은 한 달 정도 제중원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내한한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에서 미리 보낸 의료기구와 의약품이 도착하자 곧 미 공사관 근처에 있는 그의 사저에 간판을 달고 시약소를 열었다. 그 간판에는 영어와 한글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병 있는 사람은 누구나 어느 날이든지 낮 10시에 빈 병을 가지고 와서 미국 의원에게 보이시오”라고 쓰여 있었 다. 시병원은 민간병원이었기 때문에 왕실에서 운영하는 제중원에 비해 일반인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 더 많은 비중을 둘 수 있었고, 스크랜턴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로부터는 정해진 치료비를 받는 대신 가난한 사람들은 적은 진료비 혹은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덕분에(?) 시병원의 개원 첫해 수입은 34.83달러에 불과 했다.  


가난한 민중에 대한 의료선교에 깊은 관심이 있었던 스크랜턴은 아예 버려진 환자들을 위해 전액 무료로 운영되는 ‘선한 사마리아 병원 (Good Samaritan’s Hospital)’을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이 병원은 성 밖에 버려져 있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애오개, 상동, 동대문 등 각 성문 근처의 빈민지역에 세워졌다. 그중 동대문에 설립된 볼드윈 진료소는 훗날 보구여관과 통합돼 동대문부인 병원(현 이화여자대학교 병원)으로 발전했고, 동대문부인병원이 세운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는 현재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으로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보구여관은 스크랜턴 모자가 당시 한국 여성들이 남녀유별의 질서로 인해 더욱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며 1887년 10월 설립한 한국 최초의 여성전용 병원이다. 보구여관이라는 이름은 여성을 보호하고 치료하는 기관이라는 뜻으로 명성왕후가 하사한 것 이며, 영어로는 Salvation for All Women Hospital이었다. 이름 그대로 빈부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여성을 진료한다는 목적을 가진 이 병원의 설립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여의사 메타 하워드(Meta Howard)의 내한이었다. 하워드는 2년간 8천명을 진료하며 헌신적으로 한국인들을 돌보았지만, 무리한 일정 때문에 자신의 몸은 돌보지 못해 그만 건강을 잃은 채 1889년 9월 귀국길에 올랐다. 이후 보구여관은 시병원의 관리 아래 운영되다가, 로제타 홀(Rosetta S. Hall, 허을)이 내한하면서 다시 독립적인 의료활동에 나섰다.  


제중원이 설립 첫해부터 한국인에 대한 의료교육에 관심을 가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보구여관 역시‘여성을 위한 의료사업은 여성의 힘 으로’라는 표어를 내걸고 의료강습반을 개설, 한국 여성들에 대한 제중원이 설립 첫해부터 한국인에 대한 의료교육에 관심을 가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보구여관 역시 ‘여성을 위한 의료사업은 여성의 힘 으로’라는 표어를 내걸고 의료강습반을 개설, 한국 여성들에 대한 


1890년대부터는 선교사들에 의해 지방 의료기관이 속속 생겨났다. 정로회, 감리회, 성공회 선교사들이 부산, 평양, 대구, 군산, 전주, 목 포, 원산, 개성, 제물포, 강화 등지에 병원과 진료소를 개설한 것이다. 이중 1899년 10월 대구에서 시작된 대구‘제중원’은 현재 대구 동산병원으로, 1897년 전주에서 개소된 부녀진료소는 전주 예수병원으로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1913년에 이르면 총 33개의 의료기관이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져 있었고, 지역적으로도 강계, 선천, 재령, 청주, 안동, 순천, 회령, 성진, 함흥, 진주, 통영, 영변, 해주, 공주, 송도, 춘천, 순안 등지로 더욱 확산돼 나갔다. 이렇게 한국에 근대의료가 도입돼 기틀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의료 선교사들이 격무와 과로로 건강을 잃어 일시 혹은 영구 귀국하였으며, 헤론(John W. Heron, 혜 론), 윌리엄 홀(William J. Hall, 하락/홀), 오웬(Clement C. Owen, 오 기원), 랜디스(E. B. Landis), 제이콥슨(Anna P. Jacobson, 차각선) 등 은 그만 순직하고 말았다.


기독교에 의한 근대의료 도입과 병원 설립 과정에서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세브란스병원의 신축을 두고 어떤 선교사들은 종합 병원과 같은 큰 기관들이 한국의 복음화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마펫(Samuel A. Moffet, 마포삼열)을 비롯한 선교에 대한 보수 적인 입장을 가진 선교사들이 ‘입에 의한 말씀 전파만이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사업’이며 병원을 짓는 것은‘세속적 수단을 위해 영적 수 단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의료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활동은, 당시의 한국인들이 ‘외국인들만큼 우리는 우리의 백성을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만큼 한국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결과적으로 선교에도 매우 효과적이었다. 한국인들이 선교사들의 의료 활동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종종 조선 정부에 의해 선교 활동에 대한 금지령이 내려지더라도 의료선교는 문제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스크랜턴으로부터 치료를 받다가 안타깝게 숨진 한 청년이 스크랜턴에게 한 말은 당시 한국인들이 선교사들에게 가졌던 감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드릴 말씀이 있으니 잠깐 기다려 주세요. 저는 제가 살지 죽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죽는다 하더라도 제 어머니와 가족들이 저에게 선생님이 저 때문에 많이 수고하셨다는 것과 저의 어머님께서 선생님이 그렇게 오랫동안 저를 도와주신 데 대해 감사하고 있음을 말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저의 어머님은 아들을 치료하는 의사 선생님이 한국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오셨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답니다."


(사진 - 한국 최초의 근대 서양식 의료기관인 제중원 /  첫 여성전문병원인 보구여관 / 세브란스병원에서의 환자 진료모습[1917])






"기독교의 병원은 영리주의가 아니다. 수지가 맞지 않는다. 밑져 가면 서 사업정신으로 해가는 것이다. 전라도의 나병원은 정부로서도 아직 힘쓰지 못한 사업에 힘을 쏟고 있다. 이 구료 사업은 기독교의 큰 공 적이다."


인륜까지도 저버리게하는 슬픔, 한센병(Hansen)은 나병(癩病)이라 고도 하는 전염병으로 구약성서에서는 야훼께서 내리시는 천벌로 묘 사되고 있으며, 한국의 경우‘문둥이’라는 말이 전라도나 경상도 지 방의 욕설일 정도로 옛날부터 멸시의 대상이었다. 현재는 항생제를 투여하여 한센병의 원인이 되는 나균의 박멸이 가능하지만, 근대 이 전에는 항상 사회적 소외감과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떠안고 있어야  했던 병이며, 그 신체의 증상 및 전염성에 대한 공포로 인해 일반인들 뿐만이 아니라 가족에게까지도 외면당하는 병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으로 인하여 한센병 환자는 일반인에게 받는 소 외감 및 환자생활에서 오는 고립감에서 벗어나고자 보통 질병에 걸린 사람보다 생존 의지가 높았다. 그러기에 한센병 환자는 병의 치료를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는데, 처음에는 보통의 질병 이 가진 순차적이고 단계적인 극복과정에서 시작하여 심한 경우에는 인륜을 넘어서는 비상식적인 방법도 동원되었다. 대표적인 것이‘사 람의 고기를 먹으며 낫는다’,‘사람의 간을 먹으면 낫는다’와 같은 풍 문에서 기인된 인육을 위한 살인이다.(癩病患者四名이 五歲女兒를 慘 殺참살, 동아일보 1933년 9월 12일 사회 2면 기사) 시인 서정주는 한 센병 환자와 관련된 이런 엽기적인 사회상을 자신의 詩 속에 다음과 같이 형상화했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詩人部落』 창간호, 1936.11  


한센병은 이처럼 환자의 육체뿐 아니라 그 정신은 물론 사회적 관계망까지도 파괴했던 절망과 공포의 질병이었다.

한국에서 한센병자들만을 위한 병원은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시작됐다. 이는 대부분의 한센병 환자들이 분포하거나 발생하던 지역 이 주로 전남과 경북, 경남과 같은 한반도 남단의 장로교 선교구역이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한센병 전문병원이었던 광주 나병원은 1909년 광주 제중병원장 윌슨(Robert M. Wilson, 우일선/우월선)에 의해 설립됐고, 1911년 스코틀랜드 선교사 매캔지(James N. McKenzie, 매견시)가 부산 나병원을, 그리고 1913년에는 캐나다 선교사 플레처(Archibald G. Fletcher, 별이추)가 대구 나병원을 설립했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소외되고 버림받았던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사역은 사람들에게 기독교 가 기존의 전통종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래서 천도교 잡지『개벽』에서도 이것을‘기독교의 큰 공적’이라고 칭송했 고, 조선인들은 한센병 치료기관이 설립되자“조선 천지에 처음 있는 일”이라 반응하면서“아름다운 일”이라고 놀라워했다. 

선교사들이 주로 사용한 치료법은 대풍자유를 지속적으로 투여해 증세를 완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치료하기 위해서는 환자들을 일정한 장소에 장기간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한센병 환 자들은 대개 일정한 주거 없이 배회하거나 집단을 이루어 구걸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을 치료기관에 수용하는 행위는 단순히 치료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생활환경 자체를 제공하는 구료의 성격이 짙은 것이었다. 

환자들을 일정한 장소에서 장기간 안정적으로 수용, 치료하는 데에는 상당한 비용이 들었다. 일제 당시 환자 1인당 매월 주사비와 주거비를 합쳐 약 7원의 경비가 소요됐는데, 이것을 전액 광주의 미남장로회 선교부가 부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 나병원의 경우 정원 600명을 훨씬 초과한 인원이 몰려와 병원 밖에 진을 치고 기다리는 상황이 지속돼 인도적 입장에서 이들을 추가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선교회가 그 치료비를 모두 마련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이처럼 막대한 재정적 부담까지 감수하며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하고자 했던 선교사들의 노고는, ‘빛고을 광주에 혐오가 되는 한센병원이 있는 것은 좋지 않다’며 연일 철거시위를 했던 광주시민들의 모습과 비교할 때 더욱 그 가치가 빛난다.

이후 광주 나병원은 총독부의 주선으로 1925년 전남 여천군 율촌면으로 옮겨 1936년부터 애양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운영해 오다가 1939년 7월 14일 김응규 목사의 후임으로 손양원 목사가 부임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한센병 환자들은 더 이상 일반인과 격리돼 치료받아야 할 질병공동체가 아닌, 기독교적 사랑의 가치가 실현되는 신앙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1950년대 초 국내에 DDS라는 신약이 국내에 보급되면서 의학적으로 한센병 완치의 가능성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에 정부는 1961년 완치자를 뜻하는 균음성자 정착사업 실시 등을 내용으로 하는‘나관리 5개년 계획’을 수립, 발표했다. 그 내용은 완치된 한센병 환자들이 사회에 복귀하여 정착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 구라사업이었다. 이처럼 정부가‘정착 사업’을 적극 추진함에 따라 남장로회 선교부도 정착 대상자를 선발하기로 하고, 1962년에 먼저 애양원 피수용자 1,149명 중 540명을 가려내 여천·남원 등지로 이주시켰다. 남은 환자들도 1959년 부임한 토플 원장이 이들에게 애양원 내부지를 불하하고 독립시킨다는 구상을 내놓음에 따라 단계적으로 모두 애양원의 보호· 관리를 벗어나 독립된 정착생활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사진 - 초기의 광주 나병원 전경 / 최흥종이 땅 1천평을 기증해 설립한 광주나병원.  최흥종은 1909년 포사이드 선교사가 죽어가는 나환자를 위해 정성껏 치료, 간병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아 평생동안 ‘헌신’을 실천하는 성자의 길로 들어선다. 1911년 최흥종은 광주 봉선리에 있는 자기 소유의 땅 1천평을 기증해 한국 최초의 나환자 수용시설인 광주 나병원을 설립토록 도왔다.)



1876년 개항이후 서양 의술이 한국에 직접 수입되면서 서양식 병원 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초기 서양식 병원에서 한국인들은 비전문적 인 보조 인력으로 의무, 약무, 간호 등의 일을 했지만, 병원이 점차 발 전함에 따라 한국인들도 더욱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인력으로 성장하 게 됐다. 1903년 보구여관을 시작으로 세브란스의원, 동인의원, 대한 의원, 사립 조산부 양성소 등에서 정규 간호교육이 시작돼 1910년까지 4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한국 최초의 근대 서구식 병원 제중원의 경우도 전문적인 인력으로서 의 간호사는 고려하지 않았다. 제중원 설립 직후 간호사로 일한 것은 언 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였다. 언더우드는 전문적인 간호교 육을 받지 않았지만, 타고난 성품으로 인해 간호능력이 탁월해‘부드럽 고, 점잖고, 조용하고, 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기민하고, 겸손’하다 는 평가와 함께‘돌봄’으로서의 간호에 적합한 인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제중원에 여성 의료인이 필요해졌다. 남 녀간의 접촉을 금하는 한국의 엄격한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다. 말하 자면 자유롭게 남녀간을 왕래할 수 있는 인력이 필요해진 것인데, 알 렌(Horace N. Allen, 안련)은 한국인의 조언을 얻어 기생을 채용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당시에는 남성과 접촉할 수 있는, 남녀의 내 외법에 적용되지 않는 유일한 여성이 기생이었기 때문이다. 알렌의 요청을 받은 정부는 황해도와 평안도에 공문을 보내 관기를 차출했 다. 이에 따라 1885년 8월 5일, 다섯 명의 소녀들이 선발돼 여자 의학 생이 됐고, 알렌은 이들에게 간호부와 약제사의 임무를 맡겼다. 그러 나 5명 중 2명은‘병원 안에 혼란을 가져온다’는 이유로 알렌의 요청 에 따라 해직됐고, 나머지 3명은 12월 1일자로 청나라 장수 원세개에 게 팔려가게 되면서 여성의료인의 활동은 4개월도 못가서 끝나고 말았다.


1895년, 콜레라가 기승을 부리자 정부는 의주, 인천, 평양에 검역소 와 피병원을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 비록 간호 인력에 대한 인식이 잡 무를 맡아 보는 것에 머물러 있었고 간호 인력을 의미하는‘간호부’ 라는 단어가 남성에 한정된 의미이기는 했지만, 이때부터‘간호’라는 단어가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정부에서 근대적인 간 호교육을 시작한 것은 대한제국 시기인 1907년이었다. 이 해에 정부 산하기관으로 대한의원을 설치하고 간호사와 조산사를 양성하는 제 도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간호교육은 정부에서 전문적 인 간호사를 양성하기 이전에 이미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돼 있었다. 


한국에서 근대적 의미의 간호교육은 1903년 에드먼즈(Margaret J. Edmunds)에 의해 보구여관에‘간호원 양성학교’가 설립되면서 시작 됐다. 이때 처음으로‘간호원’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데, 당 시 환자를 돌보는 직업의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 없어 선교사들이 한자를 바탕으로 만든 말이었다. 하지만 보구여관이 3년 과정의 간호원 양성소를 시작하고 입학생을 모집했음에도 불구하고, 직업 간호가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데다가 여성의 직업 교육은 기생을 제외하고는 거 의 이루어지지 않던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모집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이전에 병원이나 시약소의 조수로 일했던 한국인 여 성 6명이 지원했다. 이들 간호학생들은 매학년 수업료를 납부했고, 학 교는 이들에게 기숙비, 세탁, 간호복, 책 등을 제공했다. 2개월간의 수습을 거쳐 정식 계약을 맺은 후부터 근무시간에는 정규 간호복을 착용하게 했는데, 이 옷은 한복과 양장을 복합한 디자인으로 활동성 을 보강한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 제복으로 알려져 있다. 


입학 첫해에는 간호사의 자격, 인체골격, 순환, 혈액검사, 병원규칙, 찜찔, 침상만들기, 환기, 수술준비, 저명인사의 일생회고 등의 과목을 수업했고, 다음 해에는 응급, 치과, 식이요법, 산과, 해부, 나이팅게일의 생애가 준비됐다. 마지막 해에는 위생, 이비인후과, 열, 수술, 외과드레싱 준비 등을 학습하게 되어 있었다. 초기에는 12시간 근무를 기본으로 강의와 실습을 병행했으며, 붕대법, 침상만들기, 목욕법, 투약, 간단한 식이준비, 활력증상측정 실습 등과 같은 간호학 실습 과목들이 더욱 세분화되어 첨가됐고, 전공 이외에 성경, 음악, 수학, 국어, 한문, 영어 등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보구여관의 시설이 학생을 가르치기에는 다소 열악했기 때문에, 학생들의 보다 많은 실습 경험을 위해 1905년 2명의 학생을 일본 나가사키병원으로 보내 연수를 받도록 하는 한편, 다른 여러 병원들을 견학하도록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6명의 학생 중 김 마르다와 이그레이스 등 2명이 1906년 1월 25일 간호원 모자 수여식(수관식)을 한 뒤 수료증을 받았다. 보구여관 대기실에서 한미 양국의 국기를 꽂고 내외국인 여성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 최초의 간호원 수관식이 진행됐다. 에드먼즈가 모자를 수여하고 의사와 간호사들은 합창과 축도로 간호학생들의 전문직 교육을 격려했다. 하지만 수관식 이후에도 두 학생에 대한 교육이 이어졌기 때문에 이들의 정식 졸업은 2년 후인 1908년 11월 5일에 이루어졌다. 두 번째 수관식은 1907년 정동교회에서 보구여관 간호원 양성소와 세브란스병원 간호원 양성소 합동으로 열렸다. 당시만 해도 모자는 남성이 성인이 될 때 수여되는 것으로 남성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여성이 모자를 쓴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회적 주목을 받았다.


세브란스병원에 간호부 양성소가 설립된 것은 1906년 9월이었다. 세브란스병원의 간호를 담당하고 있던 선교사 쉴즈(Esther L. Shields, 수일사)와 보구여관의 에드먼즈가 만나 각자의 전문성을 살리고 폭넓은 임상경험을 할 수 있도록 공동의 간호학교를 설립하자는 논의를 했지만 이루어지지는 못했고, 대신 운영은 별개로 하되 강의와 실습을 공유하기로 했다. 1909년에 세브란스의 간호원 양성소에서 는 양 기관의 학생들의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때의 교과과정은 해부생리, 증상관찰, 식이요법, 안과, 내과, 질량 측정, 현미경을 이용한 미생물 관찰, 간호실무의 8개 과목으로 구성돼 있었다.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양성소의 제1회 졸업식은 1910년 6월 12일에 이루어져 1 명의 졸업생(김배세)을 배출했다.  


초기의 한국 간호학생들은 엄격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남성들을 간호할 수 없었다. 그런데 1907년의 일제에 의한 한국 군대 해산 과정에서 한국군의 격렬한 저항이 있었고, 8월 1일 한국군 시위대는 서울 시내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자 간호 학생들이 처음으로 남성을 간호하기 시작했다. 사회적 관습을 뛰어넘는 전문인으로서의 여성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애비슨(Oliver R. Avison, 어비신)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한국의 간호사들은 남자 환자를 돌보기를 꺼렸다. 젊은 여자 간호사들은 한 번도 남자 환자를 맡아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모여 들어서 이렇게 많은 부상병들이 누워있는 것을 구경만 하더니, 그들이 바로 자기들과 민족을 위해 싸우다 부상 당해 쓰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중 한 사람이 그 오랜 인습을 깨뜨리고 부상자를 돌보려고 나서자 모두가 따라 나섰다. … 한국인 간호사들은 그날 밤새도록 그리고 그 다음날도 종일 부상병을 간호했다. 그때서야 그들은 자기들이 간호한 것이 남성 환자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한 번 해본 이상 또 다시 못할 것도 없었다. … 떠나는 병사들도 울고 보내는 한국 간호사들도 울었다. … 이 사건이 있었으므로 우리 병원의 남자 환자들은 그 후로 보다 나은 간호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 해왔던 것처럼 남자가 간호를 하자면 훌륭한 간호를 해주기 힘들었을 텐데 여성들이 드디어 남자환자를 돌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진 - 초기 세브란스간호학교 졸업생들과 졸업증서 /  세브란스 간호학교 졸업앨범의 학생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아편설라)가 내한하기 전에 이미 한국에는 일본과 중국을 통하여 기독교가 들어와 있었고, 한글 성경과 번역된 찬송가도 소통되고 있었다. 중국과 일본에서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들이 국내에 돌아와 전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과 찬송가도 어떤 방식으로 든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소래교회를 세운 서상륜, 의주교회를 세운 백홍준 등은 예배 때 중국 찬송가를 그대로 사용해 중국어 음으로 노래하거나 한글식 음역으로 불렀다. 당시의 찬송가는 이렇게 중국 찬송가를 번역 혹은 자역한 것이었다. 이런 중국 찬송가의 문제는 무엇 보다, 한국의 문인들조차 이해하기 힘든 중국식 표현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가사의 의미전달이 명확하지 못하다는 점에 있었다. 


선교사가 공식적으로 입국하면서 영어 찬송가들이 번역돼 불리기 시작했다. 한국 최초의 찬송가인 감리교의 『찬미가』(1892)와 장로교의 『찬양가』(1894)가 발행되던 시기까지 번역된 영어 찬송가는 약 50 편에 이르는 것으로 추측되지만, 어떤 곡들이 불렸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선교 초기에 개별적으로 번역돼 불린 이 찬송가들을 한 국인들이 익힐 수 있는 기회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선교사들이 전국 의 많은 교회를 매 주일 찾아가 예배를 드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일 년에 한두 차례 열리는 사경회에서 찬송가의 교습이 정례적으로 이루어졌다. 서양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들이 제한된 교습 기회에서 곡을 외워야 했던 현실 때문에, 찬송가의 곡조는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커(William C. Kerr, 공위량) 역시“특별히 훈련된 음악인 집단이 아니고서는 아직 곡 그대로 부르는 찬송을 들어 본 일이 없다”라고 말 했다.


선교가 진행되면서 신자의 수가 늘어나자 곧 책으로 된 찬송가가 필요해졌다. 먼저 감리회에서 당시 불리던 번역 찬송가 27편을 모아 한국 최초의 찬송가인『찬미가』를 발행했다. 편집은 1888년 5월에 한국에 와서 배재학당 교사와 문서선교에 헌신하고 주로 인천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존스(George. H. Jones, 조원시)와, 이화학당에서 활동 중이던 로드와일러(Louisa. C. Rothweiler)가 맡았다. 감리회 전용으로 제작된『찬미가』는 악보가 없는 형태로 편집됐으며, 목적은 주로 복음의 주제를 종합적으로 표현하고 교회 절기에 사용될 노래들을 정리하는 것에 있었다. 이후 찬미가는 여러 차례 증보됐는데, 1895년 증보판 『찬미가』의 서문에는 번역 찬송가에 대한 선교사들의 고민이 드러나고 있었다.


"번역으로 적절하고도 납득이 가능한 찬송가가 나타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한 찬송가의 번역을 가지고 줄곧 며칠씩 골치를 앓으 며 애쓰고, 겨우 한 줄 정도 해놓고 불완에 그친 경험들을 다하고 나서, 우리는 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곧 이 한국 사람들 틈에서 그들 마 음 그대로 솟구치는 가락으로 노래할, 그들 자신의 찬송가 작곡, 작사자들이 나와야 하겠다." 


한편, 장로회와 감리회가 합동으로 찬송가를 편찬하기로 하고 장로회의 언더우드와 감리회의 존스가 책임을 맡아 사업을 진행하던 중, 1894년 존스의 미국 체류에 지친 언더우드가 감리교와 상의 없이 단독으로 찬송가를 간행하는 일이 발생했다.『찬양가』가 출간된 것 이다. 언더우드의 독단적인 처사에 반발한 감리회는 『찬양가』사용을 거부하고『찬미가』를 증보하여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언더우드가 『찬양가』에서“여호와”또는“아버지”와 같은 감리회와 합의되지 않은 하나님의 명칭을 사용한 것도 중요한 문제가 됐다. 반대로 감리회가 주장하던“하나님”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감리회의 입장에 서는『찬양가』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찬양가』는 한국 최초의 4성부 악보가 포함된 음악책으로 한국 서양음악사에서도 효시적인 위치를 차지할 뿐 아니라, 총 117장의 찬송가가 수록돼 규모와 형식을 제대로 갖춘 첫 찬송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찬양가』의 초판이 악보판으로 출간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2판부터는 모두 악보가 삭제되고 세로줄의 한글가사만이 수록된 가사판으로 출간됐다. 당시 악보를 읽을 수 있는 한국인이 드물어 악보판 찬송가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초의 한글 음악통론인 『음악대해』가 악보를 읽지 못하는 성가대와 교인들을 위해 출판 된 것이 1923년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1890년대에 서양식 악보를 읽을 수 있는 한국인은 거의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언더우드는 한국에 빨리 서양의 음악체계와 이론을 소개하고 싶어했지 만, 한국인들은 언더우드의 열정을 소화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것 이다.


한편『찬양가』에서 7장의 한국인 작사곡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번역된 찬송가였는데, 언더우드 역시 서문에서“곡조에 맞게 하려니 글자 수가 안 맞고”라며 번역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게일 역시 1895년『찬미가』와『찬양가』의 곡과 가사들을 보고“서양 음악조 글에 억지로 맞추어 놓은 조작된 가사의 인상이 가실 길 없고, 따라서 전인적 혼의 감회가 결여된 공백 때문에 찬송 본래의 의미가 시든 다”고 탄식했다. 곡조와 가사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찬송 번역과 편집에 참여하였던 밀러(Frederich. S. Miller, 민로아)는 못갖춘마디 때문에 곤란을 겪기도 했다. 


"가장 컸던 난관은 한국어가 약강조 운율에는 맞지 않게 되어 있다 는 점이다. 둘째 음절에 악센트가 있는 단어가 거의 없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한 음절의 단어를 거의 모든 행의 첫머리에 놓아두게 되었다. 단조로울 것이야 두말할 것 없다. 차라리 모든 약강조의 찬송을 빼어 버렸더라면 좋을 뻔 하였다."


영어에는 관사가 있어서 못갖춘마디를 사용해 두 번째 음절에 오는 명사에 악센트를 주는 반면, 한국어에는 정관사가 없기 때문에 한국 전통 음악에는 못갖춘마디의 음악이 없었다. 그래서 찬송가 번역을 하는 사람들이 못갖춘마디의 정관사 부분에 한 음절의 단어를 넣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경우는 다음과 같이 불리게 되었다. 


나 / 같은 / 죄인 / 살리 / 신 주 / 은혜 / 놀라 / 워

잃 / 었던 / 생명 / 찾았 / 고 광 / 명을 / 얻었 / 네


우리말의 자연스러운 노래라면 다음과 같이 되어야했다. 


나 같은 / 죄인 / 살리신 / 주 은혜 / 놀라워

잃었던 / 생명 / 찾았고 / 광명을 / 얻었네  


이런 번역상의 문제 때문에 선교사들이 골머리를 앓은 것과 대조적으로, 찬송가는 한국인들이 한글을 깨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찬송가의 가사가 전부 한글로 돼 있었고, 찬송가의 문장은 성경보다 간단하여 외우기가 쉬웠기 때문에, 찬송가는 성경보다 앞서 한글을 보급하는 수단이 됐다. 한국인들은 서양 악보도 모르고 한글 가사 도 모르는 상태에서 찬송가를 외우는 방식으로 노래를 배웠는데, 이미 외우고 있는 찬송가를 찾아 한글 가사를 보면서 확인하면 한글을 익히기가 쉬웠다.


"교인들은 신약성서를 통해 배우는 것보다 암기하면서 찬송가를 읽는 법을 배우는 것이 쉬워서, 곧 찬송가집은 교인들의 가장 인기 있는 독본이 되었다. 주목할 것은 이 때문에 어떤 작가들은 성경의 일부분을 선택하여 시가 형태로 만들어 내놓기도 했다." 


이렇듯 찬송가가 한국인들의 우리말 습득을 위한 주요한 교재가 되면서, 1935년 장로교의 『신편찬송가』가 출간될 때 1933년「조선어학회」에서 제정한‘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적용하지 않자 이는 문화적으로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하였다.


"기독교의 출판물이란 학교 교과서와 함께 조선의 문화적 발전 단계 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최근 발행된 신편찬송가는 교회가 통일안을 채용한 이래 총회에서 발행한 최초의 대형 출판물이라고 생각된다. … 그러나 신편찬송가는 너무나 이상하게도 대외적으로 새로운 철자법 통일안과 거의 맞지 않으며 대내적으로 여러 모순을 내포하였다. … 근대 조선 문화사적 발전 단계에 있어 선구자였던 기독교 문화가 요즘에는 한 반역적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장로회 총회가 1937년 『신편찬송가』에‘한글맞춤법통일안’을 채용하기로 결의하자 1937년 9월 19일자 「동아일보」는 이를 환영하면 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과 찬송가는 기독교 문화 발달뿐이 아니라 여명기의 조선에서 문맹 퇴치, 문화 향상에 거대한 공헌을 끼친 터로써 금후 한글 철자법 통일안을 채용하게 되면 한글철자법통일안의 지지와 그 보급에 새로 삼십만 명 이상이 가담한 것이라 할 것이다." 



(사진 - 찬미가 / 찬양가) 



한국에 전해진 기독교의 특징은 처음부터‘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직접 읽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특별한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다는데 있다. 즉 공식적으로 기독교 선교가 허락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미 한 글로 번역된 성경이 전국에 널리 전파돼 있었고, 그 결과 곳곳에 자생적 교회가 설립됐다는 뜻이다.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미 리 한글 성경이 준비돼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자발적인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점은 한국 가톨릭의 경우에 도 해당된다. 이와 같이 한국에서 기독교는 주체적으로 수용됐다. 


기독교가 한국에 성경을 전해주려 한 일은 의주 국경 넘어‘고려 문’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여기에는 오래 전부터 한국 선교를 준비하던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한 노력들이 하 나로 모아져 낯선 곳에서 한글 성경이 탄생했다. 그것이 바로 로스역 성경이다. 이 성경이 나오게 된 계기는 로스(John Ross, 나약한)에게 한국에 대해 이야기해 준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의 권고였다. 그저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가져 보라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로스의 마음 깊은 곳에 각인돼 있었다. 스코틀랜드 장로회 소속의 선교사였던 로스는 1872년 8월 중국에 도착한 직후 한국인들이 많이 있다는 만주의 개항장 영구를 찾았다. 일단 탐색을 해 본 것이다. 이어 로스는 1874년 10월 첫 번째 고려문 여행에 나섰다. 고려문은 봉황성 아래의 작은 마을로, 당시 중국과 조선의 국경이자 양국 사이의 합법적인 교역이 이뤄지던 관문이었다. 이 여행에서 로스는 한국인 상인을 만나 한국어를 배워 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한문 신약성경을 선물로 주었다. 예상했던 대로 고려문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있었고, 그들을 통해 한국 선교를 시작할 가능성을 발견했다. 로스는 일단 다시 영구로 돌아가 좀 더 많은 준비를 하고자 했다. 그런데 로스에게 신약 성경을 받아 한국으로 돌아간 상인이 자신의 아들과 친구들에게 성경을 소개한 결과, 그들 가운데서 한국 개신교의 첫 번 째 세례자가 나왔다. 한 보고에 의하면 그 상인은 바로 백홍준의 아버지였다.


1876년 일본과의 조약으로 한국의 문호가 개방됐다는 소식을 들은 로스는 즉각 두 번째 고려문 방문길에 올랐다. 이 방문에서 로스는 어학교사로 의주상인 이응찬을 만났다. 당시 로스는 성경을 한글로 번 역하겠다는 계획을 세워 놓은 상태였다. 로스는 계획대로 한글 성경 번역을 시작했고, 이응찬을 포함해서 여기에 참여한 다른 한국인의 도움으로 1878년 봄에는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했다. 로스의 한글 성경 번역에 참여한 이들은‘자립적 중산층(independent middle class)’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한문과 만주어에 능통한 것은 물론 개방 적이고 독립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한국에 성경을 전해주는 기독교 수용의 통로 역할을 했다.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에 참여했던 한국인들은 점점 기독교의 진 리를 알게 됐으며, 차례로 세례를 받았다.  


로스가 안식년을 맞아 봉천에 가 있는 동안 백홍준과 이응찬 을 포함한 네 명의 한국인이 매 킨타이어(John MacIntyre, 마륵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들 가 운데 한 사람은 백홍준의 부친에 게서 얻은 성경을 몇 년간 읽고 난 뒤 영구에 와서 세례를 요청 했다. 이것이 1879년 1월에 있었던 한국개신교 최초의 한국인 수세 사건이다. 이 청년에 이어 백홍준 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 다음으로 이응찬이 7월에 세례를 받았고, 그 와 함께 왔던 의사 출신의 친척도 몇 개월 번역 사업에 동참하다 12월 경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1879년에만 모두 네 명의 한국인이 세례를 받았으며, 이들은 한국 기독교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 


로스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은 한국인들과 함께 성경을 한 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한글의 장점을 알게 됐다. 그리고 한글 성경 번역 작업이 앞으로 한국 선교에 기여할 가능성을 확신했다. 로스는 이미 1877년에 선교사를 위한 한국어 교재로『한국어 첫걸음』Corean Primer이라는 저술을 남긴 바 있었다. 


"한글 자모는 아름다운 음성문자로, 너무나 간단해서 모든 남녀노소 가 읽을 수 있습니다. 소리글자이므로 한글로 인쇄된 어떤 책이든 자 모만 배우면 읽을 수 있습니다. 1,200만 명 내지 1,500만 명이 사용하는 이 언어에 대한 성경 번역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로스의 한글 성경은 본문의 뜻과 일치하면서 한국어 어법에 맞는 절대 직역을 하며, 영어보다는 그리스어 성경을 모본으로 한다는 두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번역 방법으로는 관리 출신의 학자가 한 문성경에서 1차 번역을 하면, 로스와 이응찬이 그리스어 성경을 참고 하여 2차 번역을 하고, 이것을 제1번역인이 정서하면 다시 로스와 이 응찬이 재수정(3차 번역)하고, 로스가 그리스어 성경과 그리스어 성구 사전 및 메이어 주석을 참고 대조하면서 어휘를 통일한(4차 번역) 후 식자공에게 넘기는 방법을 사용했다. 


『예수셩교젼셔』가 출판되기 이전에『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가 1882년 초 먼저 소책자로 출판됐다. 이어 5월에는『예수셩교 요안내 복음젼셔』가, 그리고 10월에는『예수셩교 누가복음 뎨자행적』과 『예 수셩교셩셔 요안내복음』이 발행됐다. 1884년에는『예수셩교셩셔 맛 대복음』과『예수셩교셩셔 말코복음』이 출간됐고, 1885년에는『예수 셩교 요안내복음 이비쇼서신』이 출간됐다. 이렇게 단편이나 합본으로 발행되던 신약 성경은 남은 서신서를 추가하여 1887년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인『예수셩교젼셔』로 출간됐다. 그러나 이 로스역 한글 신약 성경은 1891년을 끝으로 발간을 중단하게 되는데, 이는 한국 선교사에 의해 성서번역위원회가 조직되고 성경번역이 다시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로스는 계속해서 구약도 번역하고 싶었지만, 그 사명은 한국의 선교사들에게 넘겼다. 


그렇지만, 로스역 신약성경은 한국인 개종자들과 권서인들에 의해 전국적으로 배포됐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선교사들이 직접 한국에 들어오기 이전인 1880년대 초반에 만주와 국내에 여러 신앙공동체가 조직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로스역 성경은 최초의 한글 성경이라는 기념비적 의미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전함으로써 한국 교회 를 세운 초석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와 함께 로스역 성경은,‘하나 님의 말씀’이 한국 문화와 한글의 몸을 입는 신학의 토착화와 성육신 이었다는 점, 그리고 민중의 언어인 입말이 순수한 한글로 정리되어 표현된 것이라는 점에서 한국 교회의 신학과 한글 문화의 기초가 됐다.

로스역 성경과 또 다른 성경의 한글 번역 작업이 일본에서 이뤄졌다. 이 번역 또한 한국에 공식적으로 선교사가 파송되기 이전의 일이 었다. 당시 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선박은 일본을 경유해야 했는데, 이 경로를 거쳐 온 첫 선교사들이 일본에서 이수정이 번역한 한 글 성경을 받아 한국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수정이 번역 한 한글 성경이었다. 


이수정은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다녀 온 친구로부터 일본의 기독교인이자 유명한 농학자 쓰다 센(津田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꼭 한 번 그를 만나겠다고 결심했다. 1882년 9월 이수정은 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의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할 수 있었다. 이때 이수정은 곧바로 쓰다 센을 찾아갔다. 쓰다 센은 이수정과 기독교에 대한 이야 기를 나눴고, 한문 신약성경 한 권을 주었다. 


이수정은 그 성경을 탐독하며 기독교에 대한 공부를 하던 중 12월에는 도쿄의 쓰키지교회(築地敎會, 도쿄제일장로교회)의 성탄축하예배에 참석했고, 이후 쓰다 센이 소개한 오사다(長田時行)의 도움으로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했다. 이를 통해 이수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다. 이수정이 세례를 받은 곳은 쓰키지교회가 설립한 로케쓰초교회(露月町敎會)였으며, 세례문답은 미국 선교사 녹스(G. W. Knox)에 의해 진행됐다.


1883년 4월 29일 주일, 이수정은 일본에 간지 7개월 만에 일본에서 세례를 받은 첫 번째 한국인 기독교 신자가 됐다. 이후 이수정은 도쿄 에서 열린 제3회 전국기독교 대친목회에 초빙돼 한국어로 공중기도를 하기도 했고, 요한복음 15장을 중심으로 자신의 신앙을 대중 앞에서 고백했다. 한문 700여 자로 된 이 고백문은 현존하는 한국인의 신앙 고백으로는 최초의 것이어서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릇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 한 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감응 하는 이치(神人相感之理)를 가리킴이며,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이루어 진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비유하여 이르시기를 ‘내 아버지는 포도원 주인이요, 나는 포도나무이며 너희는 가지라’ 하셨 으니, 그 이치는 쉽게 곧바로 이해될 것이어늘 번거로이 천착하지 않을 것이므로 제가 이제 무슨 말로 밝힐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심이 소리가 종이 있는 것과 같아 치면 응하고 때리면 소리 나는 것이 니, 종과 망치가 구비되어 있더라도 각기 다른 곳에 달려 있다면 소리가 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큰 심지로 등잔이 타면 빛이 크고 조그만 망치로 치면 소리가 적으니 곧 많이 구하면 많이 얻고 적게 믿으면 적게 이룬다는 뜻이요 오직 이루지 못함이 없다는 이치입니다."


이러한 이수정의 활약을 통해 당시 일본에 주재하는 해외 선교사들 은 조심스럽게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전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에서 이수정은 재일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Henry Loomis)의 제안으로 성경 번역을 시작하는 동시에, 일본에 와 있던 30여 명의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전도를 하기 시작했다. 1883년 말에는 이수정을 통해 세례 받은 유학생 김익승, 박명화, 박영선, 이경필, 이계필, 이주필 등 7-8명의 한국인 수세자를 중심으로 한 신앙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었다. 이것이 도쿄에 세워진 최초의 한인교회였다. 


이 과정에서 이수정은 해외선교 잡지에 한국 선교를 촉구하는 글을 쓰기도 했고, 이수정의 이야기는 여러 선교사들의 글을 통해 전 세계 교계에 널리 알려졌다. 특히 이수정의 선교사 한국 초치 활동을 통해 미국의 해외선교 주관 단체에서는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을 높였고, 결국 미국의 여러 해외선교 단체에서 직접 한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 게 되는 출발점이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수정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었다. 이수정은 자신이 자기의 민족에게 성경을 줄 수 있다는 큰 소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1883년 5월부터 성서 번역에 착수 했다. 한문성경에 한국 지식층에서 널리 사용되던 토를 달아 현토성경(縣吐聖經)으로 만드는 방식이었다. 한문 본문에 토를 달면 되는 용 이한 과정이었기 때문에, 이수정의 현토성경은 11월 출판에 들어가 『신약성서마가전』을 비롯한 5권의 단편 한한성경으로 출간됐다.


이수정 현토성경은 당시 도쿄의 한국인 유학생과 국내 지식층으로부터 널리 환영을 받았으며, 한글성경 번역을 시도하는 계기가 되기 도 했다. 이수정의 한글성경 번역은 마가복음으로부터 시작됐다. 출 간됐던 로스역 성서를 참고해 가면서 1884년 4월 마가복음의 번역을 끝냈다. 미국성서공회는 요코하마에서 이수정의 마가복음 6천부를 간 행했다.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 온 언더우드나 아펜젤러가 일본에서 받아 들고 온 한글 성경이 바로 이 이수정의 마가복음이었다. 


이수정의 마가복음은 로스의 예수셩교전서와 달리 국한문 혼용체였다. 한글 번역에서 뜻이 잘 전달되지 않는 문제를 보완하면서, 지식 층을 전도 대상으로 한 번역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문 투의 단어 와 문장이 많았다. 그리고 고유명사가 헬라어나 히브리어 원어에 가깝게 표기돼 있었다. 이후 이수정은 누가복음서를 비롯한 다른 신약 성서도 번역하고자 했지만, 출판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수정은 갑신정변의 여파로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 등을 최대한 멀리하며 지내던 중, 자객에 의해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 일로 인해 이수정의 다른 번역 계획은 모두 취소됐고, 이수정은 국내로 들어와 은거하는 동안 병사하고 말았다. 


이수정은 1882년 9월 일본에 건너간 이래 1886년 6월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성경을 번역했으며, 동경 유학생을 중 심으로 한인교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선교사가 한국에 오도록 촉구함으로써 한국선교에 대한 자극과 열의를 북돋아 한국교회의 출발을 가능하게 했다. 이수정의 한글 성경은 이후 한국인들의 손에 전달돼 많은 사람들이 읽고 전했으며, 그로 인해 개종자가 생겨나 한국교회 출 발에 한 기초가 됐다. 특히 이수정의 현토한한성경은 한문성경을 선호하는 지식층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상황에서 인기를 얻어, 서울과 인천을 중심으로 주변에 널리 배포될 수 있었다. 또한 이수정의 마가복음서언해는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인들에게 전해지는 한편, 1884년 부산에 설치된 대영성서공회 성경보급소와 그 권서들을 통해 부산일 대와 영남지역에 상당량이 배포됐다.


 로스역 한글 성경이 북쪽 지방에서 널리 배포된 것과 대조적으로, 서울과 부산 대구 등 중부 이남 지역에서는 이수정의 한글 성경이 널 리 배포됐다. 이것은 로스역과 이수정역이 서로 상보적인 관계에서 전체적으로 한국교회의 기초적인 반석이 됐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로스역 한글 성경과 이수정역 한글 성경은 한국에 온 선교사들에 의해 새롭게 번역된 한글 성경으로 대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