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한국에 살다



한국 최초의 근대 학교는 배재학당이다. 배재학당은 1885년 8월 3일 미북감리회의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아편설라) 선교사에 의해 시작됐다. 1885년 4월 5일 내한했던 그는 조선 정세의 불안정으로 3월 13일 일본으로 돌아가 한국어를 공부하고 6월 21일 다시 제물포항에 도착한다. 그리고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시란돈)의 집 2칸 방에서 8월 3일부터 한국 학생 이겸라, 고영필 두 사람에게 영어를 가르쳤는데, 이것이 배재학당의 출발점이다. 아펜젤러는 미국 공사관을 통해 정식 학교 설립을 한국 정부에 요청, 1885년 11월에 ‘영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배재학당이 정식으로 문을 연 것은 1886년 6월 8일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들쭉날쭉했고, 예수교를 한다고 박해받지는 않을까 두려워해서 학생들이 기피하기도 했다. 이에 왕실의 인정을 받는 것이 지름길이라 생각한 선교사들은 왕실의 환심을 살 계획을 세우고 1887년 1월 16일 덕수궁 얼음 연못에서 스케이트 대회를 열었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참석한 가운데 선교사들이 스케이트를 타 보였고, 명성황후는 선교사들에게 특별 음식을 내렸다. 그리고 한 달 후인 1887년 2월 21일에 고종이 지어 보낸 학교 이름을 받았다. 배재학당이란 ‘유능한 인재를 기르는 집’이란 뜻이다. 선교사 학교에 고종이 직접 이름을 하사했다는 소문이 나면서 전국에서 학생들이 오기 시작했다. 배재학당은 나라에서 인정한 학교이자 출세의 지름길로 인식이 된 것이다. 새로운 교사를 신축할 필요성을 느낀 아펜젤러는 1887년초 양옥 교사를 착공, 그해 9월에 100여 평 단층 르네상스식 벽돌건물(강의실, 도서실, 예배실 구비)을 준공했다. 


배재학당 당훈은 ‘욕위대자 당위인역’(慾爲大子 當爲人役)이다.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다른 사람의 부림을 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 (마 20:26)는 말씀의 정신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현재 정동 배재학당 자리에 남아 있는 건물은 ‘동관’(東館)으로 불리는데, 1916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지금 이 건물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동관 뒤에는 550년 된 향나무가 있다. 나무에는 큰 못이 하나 박혀 있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말을 매려고 못질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나무는 배재학당 출신의 시인 김소월이 사랑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동관 앞으로 나오면 ‘최초의 신문사 터’(삼문출판사 터)라고 새겨진 작은 돌비석이 있다.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 학교인 이화학당은 스크랜턴의 어머니인 스크랜턴 대부인(Mary F. Scranton)에 의해 시작됐다. 1885년 6월 20일, 아들보다 한 달 늦게 서울에 도착한 스크랜턴 대부인은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하지만 배우려는 한국 여성이 나타나지 않았다. 여성 교육을 등한시하는 봉건적 사회 질서와 서양인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었다. 이에 스크랜턴 대부인은 정동의 미국 공사관 건너편 언덕에 초가집 19채를 구입해서 200여 칸 되는 한옥 기와집을 짓기 시작했다. 


학교를 건축 중이던 1886년 5월 31일, 정부 관리의 첩 ‘김씨 부인’이 찾아와 첫 번째 학생이 됐다. 그녀는 영어를 배워 명성황후의 통역을 맡아 남편의 출세를 도우려는 의도에서 찾아왔는데, 3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6월에는 8살짜리 복순이가 어머니의 손에 끌려서 찾아왔다. 복순이네 집은 너무나 가난했는데, 그의 어머니는 학교에 보내면 공짜로 먹여주고 입혀 주고 가르쳐 준다는 얘기를 듣고 복순이를 맡기러 온 것이다. 이화학당의 세 번째 학생은 4살짜리 별단이다. 별단이는 전염병에 걸려서 어머니와 함께 성벽 아래 버려졌는데, 스크랜턴 대부인이 이 버려진 모녀를 데리고 온 것이다. 1886년 11월 기숙사를 갖춘 교사가 완공되자 이곳은 가난하고 소외된 여성들의 안식 처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887년이 되면서 학생 수가 46명으로 늘었고, 그해 10월에는 두 번째 여교사 로드와일러(Louisa. C. Rothweiler)가 부임했다. 1887년 가을에는 명성황후로부터 이화학당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배꽃(梨花)은 조선 왕실의 문양이자 동양 미인을 상징하는 꽃이었다. 배재학당처험 왕실에서 이름을 지어줌으로 인해 나라에서 전적으로 인정하는 학교가 되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나라의 인정뿐만 아니라 한국 여성들의 마음이 열려서 선교사들이 하는 일을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851년 충청도 홍주에서 가난한 선비의 딸로 태어난 이경숙은 신혼 3일 만에 청상과부가 되었다가 친척의 소개로 스크랜턴 대부인을 만났다. 그녀는 천대 받던 과부를 정중하게 대하는 스크랜턴 대부인의 마음에 녹아 이화학당에서 공부한 뒤 1889년 4월부터 한국인 최초의 교사가 됐다. 이화학당의 흔적은 이화여고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현재 한옥 교사 자리는 이화여고 본관 앞 잔디밭에 해당된다. 잔디 밭 안에는 스크랜턴 대부인의 흉상이 있다. 그리고 유관순 열사가 빨래했다는 우물과 손탁호텔 터, 그리고 옛 성벽 일부가 학교 안에 남아 있다. 학교 동문 왼편에 심슨홀이 있는데 1915년에 건축한 이화학당 교사이다. 


경신학당은 미북장로회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 선교사에 의해 1886년 5월 11일 세워진 근대 학교이다. 언더우드는 처음에 고아원 형태로 학교를 시작했다. 제중원에서 영어를 배우러 찾아오는 학생을 가르치던 언더우드는 1886년 1월부터 고아원 설립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고아나 극빈자 아동들을 수용해서 기술을 가르치는 일종의 기숙학교 형태였다. 그해 5월 11일 정동에 한옥을 구입해 수리하고 학생 1명으로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최초의 교명은 언더우드 학당이었으며, 예수교학당, 민로아학당, 구세학당 등으로 불리다가, 1901년 미북장로회 게일(James. S. Gale, 기일)이 교장으로 부임한 뒤인 1905년 경신학당으로 개칭했다. 경신이란 ‘새로운 것을 깨우친다’는 의미이다. 1913년 쿤스(Edwin. W. Koons, 군예빈)가 8대 교장으로 취임한 뒤, ‘자유·평등·박애’를 교훈으로 정했다.


1915년 4월 초대 교장인 언더우드의 노력으로 경신학교 대학부가 설립되고, 이 대학부를 모체로 2년 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가 설립됐다. 1938년 미북장로회 선교부는 총독부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 부하고 폐교를 결정했다. 이때 경신 동창들과 교사,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1939년 선교회가 교육 경영에서 물러나고 운영권이 황해도 안악교인 김홍량, 김원량 등의 김씨 문중으로 넘어갔다. 최태영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교장에 취임했다. 1940년 4월에는 교사를 정릉으로 이전했지만, 1952년 화재로 정릉 교사가 소실되자 1957년 혜화동 현 교사로 이전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알렌(Horace. N. Allen, 안련) 선교사가 살던 정동 집에는 1886년부터 간호사 엘러스(Ellers A. Bunker, 방거부인), 호턴(Lillas S. Horton, 나중에 언더우드 부인), 헤이든(Mary E. Hayden, 나중에 기포드 부인) 등 독신 여선교사들이 들어와 살았다. 정신여학당은 여기서 시작됐다. 1887년 6월 엘러스가 제중원에서 5살 고아 정네를 데려와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정동여학당의 출발이다. 


1895년 10월 정동여학당은 종로구 연지동에 새 교사를 마련하고 연동여학교로 개칭했다가 1909년 8월 11일 정신여학교로 개칭하였다. 1906년 연동교회 뒤 언덕에 2층 벽돌 양옥을 짓고 기숙사 겸 교사로 사용하다 1910년 670평 규모의 3층 르네상스 양식 건물을 지었는데, 미국의 자선사업가 세브란스(L. H. Severance)가 건축비를 부담하여 세브란스관이라 불렀다. 당시 건물 규모와 시설에서 서울에서는 최신식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지금도 남아 있다. 1904년 고종이 처음 정동여학당 자리로 거처를 옮기면서 중명전이 됐다. 중명전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뜻이다.



(사진 - (위)초기 배재학당 교사와 배재학당 학생들 / (아래)연지동에 설립된 경신학교 전경 )



한국의 기독교 선교는 학교, 병원, 교회의 삼각 구조로 이루어졌다. 선교사들은 한국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서와 교리 교육을 시켜 교회 지도자로 세웠다. 교회와 선교 학교에서 교인과 학생들에게 성서와 교리 교육을 보다 집중적으로 하게 된 것이 한국 신학교의 출발점이 다. 


미북감리회의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아편설라) 선교사는 정동에 배재학당(1885)을 설립하고 영문학부, 한문학부, 신학부를 운영하려 했다. 영문학부와 한문학부는 순조롭게 시작했으나, 신학부는 공개적으로 시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성서와 기독교 교리를 배우려고 찾아온 한용경, 박중상에게 성서와 교리 교육을 시키고 세례를 주었다. 


1887년 9월 배재학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신학 공부를 위한 공간으로 한옥을 구입하고‘베델예배당’으로 명명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학생들 가운데 말씀을 배우려는 열심 있는 학생 8명을 방과 후 별도로 모아 놓고”성서와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감리교신학대학교는 1888년 미북감리회 해외선교부 연례보고서에 따라 1887년 9월을 학교의 설립 년도로 본다. 정식 신학교 형태는 아니었지만, 배재학당 학생들로 시작된 신학 수업이 한국 땅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신학 교육이었다.


이후 1888년 4월 명동성당 건축사건과 영아소동으로 선교사들의 선교활동과 종교집회가 금지되자 베델예배당 집회와 배재학당도 한 때 문을 닫았다. 1890년대에 들어서 조선인 목회자 양성이 필요해짐 으로 인해 미북감리회 조선선교연회 안에 목회자 양성 과정이 개설되면서 정규 신학 과정이 마련됐다. 이 과정을‘신학회’로 불렀고, 더욱 체계적인 신학 교육을 하게 됐다. 


전담 교수진이나 독자 건물은 없었지만 서울, 평양, 인천 등지를 돌며 농한기에 조선 전도인들을 모아 신학을 가르치는‘단기 집중 교육과정’의 형태였다. 이 신학회 과정을 거친 전도인들이 연회 자격심사를 거쳐 1901년 5월에 김창식과 김기범이, 이듬해 연회에서는 최병헌이 각각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1903년 원산 부흥운동 이후 교세가 확장되는 것을 계기로 한국인 목회 지망생들이 더욱 늘어났으며, 정규‘신학교’설립이 필요하게 됐다.  


이러한 시기에 1902년 아펜젤러가 해상 사고로 순직했고, 이로 인 해 신학 교육도 큰 위기에 빠졌다. 아펜젤러의 뒤를 이어 신학 교육을 담당한 이는 존스(George H. Jones, 조원시) 선교사였다. 1890년대 부터 신학회 교수로 활약해 온 존스는, 아펜젤러 사후 이를 맡아 관리 하다가 신학교 설립 운동을 적극 추진했다. 그 노력의 결과로, 1907년 미북감리회 선교부와 미남감리회 선교부가 합동으로 협성성경학원 (協成聖經學院, Union Biblical Institute)을 설립하고 존스가 초대 원 장으로 취임했다. 협성성경학원에서는 매년 2학기씩 5년 교육과정으로 신학 교육을 해 나갔다. 1910년에 냉천동 31번지에 학교 부지를 마 련하고 감리교협성신학교(Union Methodist Theological Seminary)로 교명을 변경했다. 


1908년 2월에는 전도부인 양성 교육을 위해 서울 종로 인사동에 마련한 한옥 건물에서‘부인성서학원’(婦人聖書學院)이 시작됐다. 부인성서학원도 1917년 봄 죽첨정(현 충정로 3가) 언덕에 독자적으로 3층짜리 회색 벽돌 건물을 마련했다. 여성 신학 교육에 있어서도 미북감리회와 미남감리회 여선교부가 1921년부터 연합으로 여자 신학교를 운영하기로 합의하고 그때부터 부인성서학원을 감리교협성여 자신학교(Union Woman’s Bible Training School)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1년 12월에 냉천골 언덕에 있던 협성신학교와 죽첨정에 있던 협성여자신학교가 통합해 감리교신학교(Methodist Theological Seminary)가 됐다.


미북장로회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 선교사는 1890년 신학반을 개설해 16명의 사람들에게 성서 공부를 시켰다. 장로회 선교부는 1891년부터‘선교사는 누구든지 자기 선교지역 안에 성서 학습과정을 만들고 직접 가르쳐야 한다’는 규칙을 정했다. 이것이 한국 교회 사경회의 기초가 됐고, 몇 사람들을 선발해 신학 교육을 시킨 것이 신학교의 바탕이 됐다. 


1893년 미북장로회, 미남장로회, 호주장로회,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로 조직된 선교사연합공의회는, 늘어나는 교인들을 감당하고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 신학교를 세워 한국 교회를 독립체제로 전환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1890년 언더우드가 개설한 신학반은 1890년 말 평양선교부에서 활발히 추진되었다. 마펫(Samuel A. Moffett, 마포삼열) 선교사를 비롯한 베어드(Willam. M. Baird, 배위량), 스왈른(William L. Swallen, 소안론), 그래함 리(Graham Lee, 이길성) 등 맥코믹 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에 의해 교육의 열기가 고조 됐다. 1900년 마펫은 신학교 설립을 구체화하고 미북장로회 선교부에 신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알리고 건립 기금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선교부의 설립 허가와 함께 신학교 설립을 위임받은 마펫은 1901년 신학반에서 공부하던 사람 중 장대현교회 장로 방기창, 김종섭 2인을 목사 지원자로 받아 신학 교육을 하기 시작했다. 선교사연합공의회는 1903년 1월에 평양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신학교를 정식 개교하고 신학 교육을 받고 있던 방기창, 김종섭 외에 양전백, 길선주, 이기풍, 송인 서 4명을 신학교에 합류시켰다. 서경조, 한석진은 선교사에게 받았던 개인지도를 인정받아 3학년에 편입했다. 이들이 한국 장로교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는 일제강점기인 1938년 신사참배로 인해 사실상 폐교됐지만, 이 학교를 모태로 여러 신학교들이 생겨났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총신대학교 등의 모태가 된 것이다.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는 서울 승동교회에서 1940년 개교했다. 


감리회의 협성신학교가 서울에 있었고 진보적이었으며, 장로회의 평양신학교는 평양에 있었고 보수적이었다. 또한 협성신학교는 수준 높은 신학 교육을 지향한 반면, 평양신학교는 목회하는 데 필요한 정도의 낮은 신학 교육을 지향하였다. 이것이 한국 교회 초기 신학자 중에 감리회 출신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같은 교파와 신학적인 차이는 한국 교회의 갈등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성결교회는 1907년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의 한국 선교로 시작됐다. 카우만(Charles E. Cowman)과 킬보른(Ernest A. Kilbourne, 길보륜)에 의해 시작된 동양선교회는 도쿄성서학원을 설립했다. 김상준(金相潛), 정빈(鄭撚)이 도쿄성서학원에서 공부하면서 동양선교회를 만났고, 이들이 졸업한 뒤 한국에 돌아와서 종로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개설하고 전도를 시작했다. 복음전도관의 시 작과 함께 성경반을 열었다. 성경반을 운영하면서 성서학원 설립을 준비하여 1911년 3월 13일 무교동에 경성성서학원을 개교했고, 원장으 로 존 토머스(John Thomas)가 취임했다. 1940년에 경성신학교로 개칭하고 교장에 이명직(李明稙) 목사가 취임했다. 해방 후 다시 서울신 학교로 개칭했으며 현재의 서울신학대학교가 됐다. 성결대학교도 그 뿌리는 경성성서학원이라고 할 수 있다. 


구세군은 1910년 2월 종로구 평동에서 구세군성경대학을 개교해 1912년 구세군사관학교로 개칭했다.


성공회는 1914년 4월 강화에서 성 미카엘신학원을 열어 천신신학교로 개칭했다. 이것이 성공회신학대학교를 거쳐 지금의 성공회대학교가 됐다. 


하나님의성회는 1953년 5월 10일 미국 하나님의성회 순복음신학교 를 개교하고, 교장에 아서 체스넛(Arthur Chesnut)이 취임했다. 순복음신학대학과 순신대학교를 거쳐 오늘의 한세대학교가 됐다. 


(사진 - 감리교 협성신학교 전경 / 초기 장로회 평양신학교 학생들과 교수들[1905] /  성결교 경성신학교 전경)


 


1894년 로제타 홀(Rosetta S. Hall, 허을)은 평양에 들어오자마자 환자를 돌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유독 환자 중에 장님, 벙어리, 귀머거리들이 많았다. 그 당시 조선의 장님, 벙어리, 귀머거리들 은 매우 처참한 상태에 있었다. 장님들은 주로 점쟁이나 무당이 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것도 부모들이 돈이 있어서 훈련을 시킬 수 있는 경우에만 가능했다. 대부분 먹고 살 길이 막막하여 결국에는 걷기조차 어려운 지경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현실을 지켜 본 홀 은, 세상에서 쓸모없다 는 세간의 그릇된 관념을 깨뜨리기 위해서라도 맹인 교육이 시급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홀은 눈먼 어린이들을 어떤 방법으로든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 의 눈초리였다. 조선 사람들이 그녀의 의도를 잘못 이해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긴장된 상황 속에서 자칫 잘못하면 1888년에 파급되었던 유언비어처럼,“의사들이 약을 만 들기 위해 아이들의 눈을 뽑았다”는 모함으로 이용될 수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기회가 생겼다. 평양에서 홀의 첫 신자가 된 사람 이 오석형이었는데, 그에게는 앞 못 보는 어린 딸‘봉래’가 있었다. 홀은 오석형의 딸이 장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맹인교육 시작할 용기가 생겼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신실한 기독교인이니 자신의 의도를 오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드디어 홀이 봉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봉래는 총명했다. 거기다 높은 열성을 가지고 좋은 반응을 보였다. 홀은 일기에 “나는 봉래를 가르치기 위해 조선 기름종이에 바늘로 점을 찍어 일종의 점자를 고 안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홀은 맹인을 교육시킬 수 있는 지식이 있으면 봉래에게 점자를 읽게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이 분야 에 대해 좀 더 공부하기로 생각하던 중에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1894년 9월 15일 평양에 청일 전쟁 발발했을 때, 남편인 윌리엄 홀(William J. Hall, 하락)이 헌신적으로 환자와 부상자 돌보다가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결국 11월 24일 죽음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이때 홀은 둘째아이 임신 7개월째였다. 11월 27일 노블(William A. Noble, 노보을) 목사가 집례한 장례식을 마치고, 홀은 12월 16일 제물포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듬해인 1895년 1 월 18일 에디스 마가렛이 태어났다. 홀은 미국으로 돌아 갈 때 의학공 부를 하고 싶어 하는 박에스더와 그녀의 남편을 데리고 갔다. 


홀은 남편 홀 기념병원 건축을 위한 모금을 위해 1897년 8월 미국에서‘윌리엄 제임스 홀의 생애’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기금으로 1897년 2월 1일 평양에 남편을 기념하는‘평양 기홀병원’이 세워졌다.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홀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숙제는 조선의 맹인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녀는 곧 맹인교육에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프랑스 파리의 맹인 교사인 루이스 (Louis Braille)가 개발하여 1829년에 출판된 점자책이 있었다. 또한 1860년 뉴욕 맹인 교육학원의 원장인 윌리엄 웨이트(William B. Wait) 가 개발한‘뉴욕 포인트’란 점자도 있었다. 홀은 웨이트 원장을 방문 하여 점자 구조를 배웠다. 여러 점자 구조들을 비교해 본 그녀는‘뉴 욕 포인트’가 조선어에 가장 적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1897년 가을, 홀은 조선의 부름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조선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남편이 시작한 사업을 성사시키기로 결심했다. 감리회의 여성 해외선교회는 보구여관에서 일하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홀은 두 아이를 데리고 1897년 10월 11일 미국을 떠나 1897년 11월 10일 제물포에 도착했다. 한국을 떠난 지 2년 10개월만이었다. 5개월 남짓 보구여관에서 의료활동을 하다가 1898년 4월 29일 서울을 떠나 제물포에서 배편으로 5월 1일에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에 도착한지 20여일만인 1898년 5월 23일 딸 에디스 마저도 이질로 잃게 되었다.


슬픔도 잠시, 1898년 6월 18일에 평양 여성치료소 광혜여원을 개원 해 환자를 돌보기 시작했다. 1898년 8월에는 에디스 마가렛 기념 병원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이 병원은 특별히 어린이를 위한 병동을 갖춘 병원이었다. 그 당시 해외여선교회에서는 여성병원을 설립하기 위한 기금을 모으고 있었다. 에디스 마가렛의 어머니였던 홀은 이 새 병원 부속으로‘에디스 마가렛 병원’을 짓기 원했던 것이다. 친척들과 친구들이 보내준 돈과 얼마 되지 않던 에디스의 저금을 합쳤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1899년에는 어린이 병동을 지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해 졌다. 이 때 홀은 후원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냈다 


"작년(1898년) 8월 우리는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평양의 모든 건물들은 선교사들의 집들까지도 조선식 건물입니다. 단층집으로 흙벽에 기와지붕입니다. 어린이 병동은 평양에서는 처음으로 지어진 이층집 입니다. 나무판자로 누비듯이 벽을 만들고 양철 지붕과 벽돌로 굴뚝을 세운 것으로 역시 첫 번째가 됩니다. 조선에서는 제재소가 없어 모든 재목은 손으로 켜야 합니다. 이런 건물은 이곳의 일류 목수들까지도 처음 보는 것임을 아신다면 이 어린이 병동을 짓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실 하나와 부엌, 조수실 하나가 완성되었으니 이 겨울을 지나기에는 충분합니다. 내년 봄 까지는 방안의 페인트칠과 도배 작업이 다 끝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어진 어린이 병동은 홀에게 있어서 상당히 소중한 장소였다. 눈먼 소녀들을 가르치기 위한 장소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본격적인 맹인교육이 시작된 것이다.‘에디스 마가렛 기념 어린이 병동(Edith Margaret Children’s Ward)’이 세워졌을 때, 방 하나를 맹인소녀들을 위해 마련했다. 소녀들의 부모들은 거의 가난했다. 아이들은 매우 행복하게 잘 배웠다. 이곳에서의 수업은 1906년 11월 병원이 화재로 전부 타버릴 때까지 계속됐다. 화재 후 맹인반은 매일 학교 교실 하나를 얻어 옮겨갔다. 매일학교 건물에서 가운데 두 개의 큰 방은 매일학교가 사용했고, 'L'의 작은 방들은 새로 세워진 연합 아카데미의 감리회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로 사용됐다. 나머지 방을 맹인소녀들이 사용했다.


교재는‘뉴욕점자’를 조선말에 맞게 고친 것이었다. 조선에 돌아 온 해(1898년) 겨울, 로제타 홀은 여가를 이용하여 조선어 교재를 점자법으로 복사했다. 교재는 조선말의 알파벳인 가, 나, 다, 라와, 조지 히버 존즈 여사가 지은‘조선어 기도서’와 십계명이었다. 카드보드와 비슷하게 빳빳한 조선 기름종이에 바늘로 찍어 점자를 만들었다. 다시 오씨의 딸 맹인 봉래를 데리고 교육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점자 교육이 진도가 느리고 지루했다. 그러나 봉래가 점자로 조선 알파벳을 해득한 뒤에는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진도가 빨라졌다. 일 년 만 에 봉래는 준비한 모든 교재들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곧이어 그녀는 점자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고 말하는 것을 받아 자신이 점자 교습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홀은 봉래에게 글자 뿐 아니라 뜨개질까지 가르쳤다. 


봉래가 글도 배우고 행복해진 것을 본 병원 환자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다른 맹인 소녀들도 받아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다. 맹인 교육에 대한 좋은 인식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조선에서는 첫 번째 맹인학교가 생기게 되었다. 평양여학교가 설립된 후에는 맹인반이 추가됐다. 홀은 맹인소녀들도 정상적인 소녀들과 함께 배워야 하며 여러 운동이나 놀이에도 똑같이 참여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가장 절실한 것은 초보 학생을 위한 특수교사를 양성해 일반 교사들과 같은 교사진에 넣는 일이었다. 결국 소망대로 첫 제자 봉래가 나중에 특수교사가 됐고, 맹인학교는 계속 커져서 농아까지도 수 용하게 된다.


최초의 농아학교 역시 1909년 홀에 의해 설립됐다. 홀이 1892년 결 혼하고 신혼여행으로 1개월간 중국 치푸(Chefoo, 芝罘)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이 때 동료 선교사들이 경영하고 있던 농아학교를 시찰할 기회가 있었다. 맹인교육 뿐 아니라 농아교육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던 홀은 농아학교 설립을 위해 이 학교에 교사 양성을 의뢰했다. 농아 학교 설립에 대해 백낙준은 『한국개신교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09년 홀여사는 중국 치푸에 이익민을 파견하여 농아 교육방법을 배우게 하였고 이씨는 귀국할 때 그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던 그의 조카를 데리고 왔다. 이 두 사람의 도움으로 홀여사는 한국최초로 귀머 거리학교를 설립하였다."


(사진 - 로제타 홀 선교사  / 평양 맹학교 졸업생들과 함께 한 로제타 홀 선교사)




기독교는 한국의 근대 고등교육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결과적으로는 소학교 졸업생들의 진학을 위해 중등학교의 설립이 필요한 상황이 전개되고, 또한 중등학교 졸업생들의 진학을 위해 고등 교육기관이 필요하게 되는 상황으로 이어진 측면도 있지만, 한국에서의 고등교육기관 설립은 비교적 처음 단계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기독교 고등교육기관의 설립과정에서 나타나는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은, 처음에는 교단별로 설립됐지만 이후 다른 교단과 연합하게 되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연합의 차원에서 설립됐다는 점이다. 이는 개별 교단 차원의 계획과 노력을 통해 시작된 고등교육기관이, 이후 실질적으로 운영되는 상황에서는 다른 교단과의 연합이 필요하게 될 정도로 크게 발전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의학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이나 아니면 일반 고등교육기관, 그리고 신학을 위한 고등교육기관 모두에서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한국의 근대 고등교육은 처음부터 외국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가령 구한국 정부에서 설립한 육영공원의 경우 교사로 초빙된 사람들은 길모어 (George W. Gilmore, 길모), 번커(Dalziel A. Bunker, 방거), 헐버트(Homer B. Hulbert, 흘법, 할보)로, 이들은 모두 기 독교 선교와 관련이 깊은 사람들이었 다. 그리고 처음부터 한국에서 기독교 는 교육과 의료 분야에 국한해서 허락 을 받았기 때문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교육을 전담하는 선교사로서의 역할이 컸다. 한국에서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고자 했던 선교사들은, 처음에는 각자의 교단 차원에서 이를 시도했다. 그리고 입학 조건을 기독교인으로 한정했다.  


이렇게 설립된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숭실대학이 있었다. 평양에서 시작된 숭실대학은 한국 최초의 일반 고등교육기관으로, 장로회의 교육전문 선교사 베어드(William M. Baird, 배위량)에 의해 설립됐다. 대학의 운영을 일개 교단 차원에서 지원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선교사들 사이에 연합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시점에서는 장로회와 감리회가 공동으로 운영에 참여해 연합고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설립된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제중원의학교가 있다. 설립된 이후 첫 번째 졸업생을 배출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시기상으로는 가장 먼저 설립된 고등교육기관이었고, 의학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의학교였다. 이 학교는 이후 세브란스의과대학으로 발전하여 기독교 사립대학으로서 한국의 의학과 병원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일제가 기독교 기관을 전면적으로 통제하고 탄압하는 상황에서도 세브 란스의과대학은 의학과 의료를 통해 많은 한국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여기에는 간호사를 양성하기 위한 간호대학도 병설되어 의료 사업에 있 어서 여성의 참여를 전폭적으로 확대했다. 특히 경성여자의과대학은 여 성 전문의를 배출하기 위한 고등교육기관으로, 의료사업에서 여의사의 활약이 크게 요청되는 상황에 따라 설립됐다. 


 한편 한국의 여성들을 위한 교육사업도 크게 발전해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화여자전문학교는 이러한 한국의 여성들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으로 설립됐다. 이화여자대학교는 한국에 설립된 최초의 여성들을 위한 대학으로, 여성들의 삶과 지위의 향상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한국 근대 여성운동의 요람이었다. 이화여자대학교 역시 처음에는 미북감리회의 지원으로 설립되고 운영됐지만, 이후 미남 감리회와 연합으로 운영됐다. 


이에 반해 연희전문학교는 처음 미북장로회에서 설립을 계획하였지만, 교단 안팎에서 학교 설립에 대한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설립 단계에서부터 연합학교로 추진됐다. 연희전문학교는 미북장로회의 경신학교 대학부와 미북감리회의 배재학당 대학부가 연합해 하나의 대학을 형성한 것인데, 여기에 미북장로회, 미북감리회, 미남감리회가 우선적으로 참여했고, 이후에는 미남장로회와 캐나다장로회가 참여 했다. 이로써 연희전문학교는 한국의 대표적인 교단이 공동으로 협력 하여 운영하는 연합고등교육기관으로 발전했다.


한국의 초창기 고등교육기관에는 신학교를 포함시켜야 한다. 대표 적으로는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와 서울의 감리교협성신학교, 평신도를 위한 신학교육기관으로 설립된 피어선 기념 성경학원이 있다. 이 학교들에 대해 연합의 차원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장로회신학교의 경우 미북장로회, 호주장로회, 미남장로회, 캐나다장로회가 연합해서 설립하고 운영하는 신학교육기관으로, 하나의 신학교를 위해 네 개의 선교부가 협력하는 형태였다. 그리고 감 리교협성신학교의 경우도 미북감리회와 미남감리회가 공동으로 참여하여 협력하는 연합신학교였다. 피어선 기념 성경학원은, 평신도를 대상으로 하는 성경학원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에서 해외선교에 있어서 연합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피어선(Arthur T. Pierson, 피어 선)의 유지를 통해 서울에 설립된 고등교육기관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연합의 형태로 설립돼야 한다는 점이 크게 강조되고 있었다. 미북 장로회와 미북감리회, 그리고 미남감리회가 공동으로 참여하여 학교를 운영하였고, 본래의 취지에 걸맞게 평신도를 위한 신학교육기관으로 시적하고 발전해 나갔다.


이외에도 기독교가 한국의 근대 고등교육의 발전에 기여한 부분으로 전국적으로 퍼져있는 기독교계 사립대학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살 펴볼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지면상 생략했다. 또한 이 학교들은 고등 교육기관의 설립과 운영을 위한 연합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는 부분 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초기부터 기독교는 한국의 근대교육기관, 즉 대학의 설립을 주도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명문 사학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점은, 이미 지적한 바 있지만, 연합이라는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대학이 특정 교단의 설립 취지나 운영 방침에 전적으로 얽매이지 않으면서, 대학 본연의 학문적 활동을 최대한 보장 받는 상태로 발전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제 신학대학을 포함한 기독교 대학들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각자 의 정체성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상황을 맞고 있다. 말하자면, 그 역사를 다시 되돌아봐야 하는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사진 - 숭실학교 초기 학생들과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사 / 연희전문학교 스팀슨관 준공식[1921] / 이화여전 전경) 





사실 한반도에서 근대적 서양식 의료행위가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가장 먼저 시작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선교사들이 의료선교 사업에 착수하기 이전에 일본 침략세력에 의해 먼저 병원이 설립·운영됐기 때문이다. 1876년 일본과 한국이 수교조약을 맺고 개항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일본에 의해 근대식 의료기관들이 설립·운영된 것이다. 그러나 이 병원들에서 소수의 한국인들이 진료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제국주의 침략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으로 본격적인 서양의술의 도입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일본병원은 재한 일본인들을 치료하고, 한국인들에게 친일적 성향을 갖도록 독려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설립·운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1885년 광혜원의 설립을 시작으로 펼쳐진 개신교의 의료선교는 한국인들과 민중들을 위한 것으로 성격 자체가 전혀 달랐다. 


미국 공사관 의사 자격으로 입국한 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안련)은 갑신정변에서 크게 다친 민영익을 헌신적으로 치료해 소생 시킨 것을 계기로 고종으로부터 ‘조선왕립병원’설립을 윤허받을 수 있었다. 고종은 근대병원의 설립을 매우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렌이 선교사라는 것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협조할 의향을 갖고 있었으며, 고종의 이러한 확고한 의지 덕분에 여러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1885년 4월 10일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인 왕립 광혜원(제중원)이 개원 될 수 있었다.


제중원은 재정, 행정, 운영은 조선정부에서, 의료는 미북장로회 선교부가 각각 담당하는 반국영의 성격으로 의료사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당시 정부가 서양식 의료사업을 외국 문화를 수입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제중원은 외교와 통상업무를 관장하던 통리교섭통상사 무아문에 소속돼 있었다. 제중원은 설립 첫해부터 한국인에 대한 의학교육을 실시했다. 16명의 학생을 예과로 받아 그 중 12명을 본과생으로 선발하여 교육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초기 의학교육은 뚜렷한 성과를 얻지는 못한 채 끝나버렸다. 1890년대 중반에 에비슨(Oliver R. Avison, 어비신)에 의해 다시 의학교육이 시도돼 1908년 7명의 첫 조선인 의사를 배출했다. 이 첫 조선인 의사들 중에는 백정 출신의 박서양이 포함돼 있어 당시 기독교가 한국의 신분제도를 뛰어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미북장로회의 선교사들이 정부와의 협조 속에 제중원을 통해 의료선교를 실시한 것과는 달리, 미북감리회의 선교사들은 민간병원을 설립했다. 가장 먼저 생긴 병원은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시란돈)이 1885년 10월 9일 세운 시병원이었다. 스크랜턴은 한 달 정도 제중원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내한한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에서 미리 보낸 의료기구와 의약품이 도착하자 곧 미 공사관 근처에 있는 그의 사저에 간판을 달고 시약소를 열었다. 그 간판에는 영어와 한글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병 있는 사람은 누구나 어느 날이든지 낮 10시에 빈 병을 가지고 와서 미국 의원에게 보이시오”라고 쓰여 있었 다. 시병원은 민간병원이었기 때문에 왕실에서 운영하는 제중원에 비해 일반인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 더 많은 비중을 둘 수 있었고, 스크랜턴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로부터는 정해진 치료비를 받는 대신 가난한 사람들은 적은 진료비 혹은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덕분에(?) 시병원의 개원 첫해 수입은 34.83달러에 불과 했다.  


가난한 민중에 대한 의료선교에 깊은 관심이 있었던 스크랜턴은 아예 버려진 환자들을 위해 전액 무료로 운영되는 ‘선한 사마리아 병원 (Good Samaritan’s Hospital)’을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이 병원은 성 밖에 버려져 있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애오개, 상동, 동대문 등 각 성문 근처의 빈민지역에 세워졌다. 그중 동대문에 설립된 볼드윈 진료소는 훗날 보구여관과 통합돼 동대문부인 병원(현 이화여자대학교 병원)으로 발전했고, 동대문부인병원이 세운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는 현재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으로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보구여관은 스크랜턴 모자가 당시 한국 여성들이 남녀유별의 질서로 인해 더욱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며 1887년 10월 설립한 한국 최초의 여성전용 병원이다. 보구여관이라는 이름은 여성을 보호하고 치료하는 기관이라는 뜻으로 명성왕후가 하사한 것 이며, 영어로는 Salvation for All Women Hospital이었다. 이름 그대로 빈부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여성을 진료한다는 목적을 가진 이 병원의 설립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여의사 메타 하워드(Meta Howard)의 내한이었다. 하워드는 2년간 8천명을 진료하며 헌신적으로 한국인들을 돌보았지만, 무리한 일정 때문에 자신의 몸은 돌보지 못해 그만 건강을 잃은 채 1889년 9월 귀국길에 올랐다. 이후 보구여관은 시병원의 관리 아래 운영되다가, 로제타 홀(Rosetta S. Hall, 허을)이 내한하면서 다시 독립적인 의료활동에 나섰다.  


제중원이 설립 첫해부터 한국인에 대한 의료교육에 관심을 가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보구여관 역시‘여성을 위한 의료사업은 여성의 힘 으로’라는 표어를 내걸고 의료강습반을 개설, 한국 여성들에 대한 제중원이 설립 첫해부터 한국인에 대한 의료교육에 관심을 가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보구여관 역시 ‘여성을 위한 의료사업은 여성의 힘 으로’라는 표어를 내걸고 의료강습반을 개설, 한국 여성들에 대한 


1890년대부터는 선교사들에 의해 지방 의료기관이 속속 생겨났다. 정로회, 감리회, 성공회 선교사들이 부산, 평양, 대구, 군산, 전주, 목 포, 원산, 개성, 제물포, 강화 등지에 병원과 진료소를 개설한 것이다. 이중 1899년 10월 대구에서 시작된 대구‘제중원’은 현재 대구 동산병원으로, 1897년 전주에서 개소된 부녀진료소는 전주 예수병원으로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1913년에 이르면 총 33개의 의료기관이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져 있었고, 지역적으로도 강계, 선천, 재령, 청주, 안동, 순천, 회령, 성진, 함흥, 진주, 통영, 영변, 해주, 공주, 송도, 춘천, 순안 등지로 더욱 확산돼 나갔다. 이렇게 한국에 근대의료가 도입돼 기틀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의료 선교사들이 격무와 과로로 건강을 잃어 일시 혹은 영구 귀국하였으며, 헤론(John W. Heron, 혜 론), 윌리엄 홀(William J. Hall, 하락/홀), 오웬(Clement C. Owen, 오 기원), 랜디스(E. B. Landis), 제이콥슨(Anna P. Jacobson, 차각선) 등 은 그만 순직하고 말았다.


기독교에 의한 근대의료 도입과 병원 설립 과정에서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세브란스병원의 신축을 두고 어떤 선교사들은 종합 병원과 같은 큰 기관들이 한국의 복음화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마펫(Samuel A. Moffet, 마포삼열)을 비롯한 선교에 대한 보수 적인 입장을 가진 선교사들이 ‘입에 의한 말씀 전파만이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사업’이며 병원을 짓는 것은‘세속적 수단을 위해 영적 수 단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의료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활동은, 당시의 한국인들이 ‘외국인들만큼 우리는 우리의 백성을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만큼 한국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결과적으로 선교에도 매우 효과적이었다. 한국인들이 선교사들의 의료 활동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종종 조선 정부에 의해 선교 활동에 대한 금지령이 내려지더라도 의료선교는 문제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스크랜턴으로부터 치료를 받다가 안타깝게 숨진 한 청년이 스크랜턴에게 한 말은 당시 한국인들이 선교사들에게 가졌던 감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드릴 말씀이 있으니 잠깐 기다려 주세요. 저는 제가 살지 죽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죽는다 하더라도 제 어머니와 가족들이 저에게 선생님이 저 때문에 많이 수고하셨다는 것과 저의 어머님께서 선생님이 그렇게 오랫동안 저를 도와주신 데 대해 감사하고 있음을 말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저의 어머님은 아들을 치료하는 의사 선생님이 한국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오셨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답니다."


(사진 - 한국 최초의 근대 서양식 의료기관인 제중원 /  첫 여성전문병원인 보구여관 / 세브란스병원에서의 환자 진료모습[1917])






"기독교의 병원은 영리주의가 아니다. 수지가 맞지 않는다. 밑져 가면 서 사업정신으로 해가는 것이다. 전라도의 나병원은 정부로서도 아직 힘쓰지 못한 사업에 힘을 쏟고 있다. 이 구료 사업은 기독교의 큰 공 적이다."


인륜까지도 저버리게하는 슬픔, 한센병(Hansen)은 나병(癩病)이라 고도 하는 전염병으로 구약성서에서는 야훼께서 내리시는 천벌로 묘 사되고 있으며, 한국의 경우‘문둥이’라는 말이 전라도나 경상도 지 방의 욕설일 정도로 옛날부터 멸시의 대상이었다. 현재는 항생제를 투여하여 한센병의 원인이 되는 나균의 박멸이 가능하지만, 근대 이 전에는 항상 사회적 소외감과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떠안고 있어야  했던 병이며, 그 신체의 증상 및 전염성에 대한 공포로 인해 일반인들 뿐만이 아니라 가족에게까지도 외면당하는 병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으로 인하여 한센병 환자는 일반인에게 받는 소 외감 및 환자생활에서 오는 고립감에서 벗어나고자 보통 질병에 걸린 사람보다 생존 의지가 높았다. 그러기에 한센병 환자는 병의 치료를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는데, 처음에는 보통의 질병 이 가진 순차적이고 단계적인 극복과정에서 시작하여 심한 경우에는 인륜을 넘어서는 비상식적인 방법도 동원되었다. 대표적인 것이‘사 람의 고기를 먹으며 낫는다’,‘사람의 간을 먹으면 낫는다’와 같은 풍 문에서 기인된 인육을 위한 살인이다.(癩病患者四名이 五歲女兒를 慘 殺참살, 동아일보 1933년 9월 12일 사회 2면 기사) 시인 서정주는 한 센병 환자와 관련된 이런 엽기적인 사회상을 자신의 詩 속에 다음과 같이 형상화했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詩人部落』 창간호, 1936.11  


한센병은 이처럼 환자의 육체뿐 아니라 그 정신은 물론 사회적 관계망까지도 파괴했던 절망과 공포의 질병이었다.

한국에서 한센병자들만을 위한 병원은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시작됐다. 이는 대부분의 한센병 환자들이 분포하거나 발생하던 지역 이 주로 전남과 경북, 경남과 같은 한반도 남단의 장로교 선교구역이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한센병 전문병원이었던 광주 나병원은 1909년 광주 제중병원장 윌슨(Robert M. Wilson, 우일선/우월선)에 의해 설립됐고, 1911년 스코틀랜드 선교사 매캔지(James N. McKenzie, 매견시)가 부산 나병원을, 그리고 1913년에는 캐나다 선교사 플레처(Archibald G. Fletcher, 별이추)가 대구 나병원을 설립했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소외되고 버림받았던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사역은 사람들에게 기독교 가 기존의 전통종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래서 천도교 잡지『개벽』에서도 이것을‘기독교의 큰 공적’이라고 칭송했 고, 조선인들은 한센병 치료기관이 설립되자“조선 천지에 처음 있는 일”이라 반응하면서“아름다운 일”이라고 놀라워했다. 

선교사들이 주로 사용한 치료법은 대풍자유를 지속적으로 투여해 증세를 완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치료하기 위해서는 환자들을 일정한 장소에 장기간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한센병 환 자들은 대개 일정한 주거 없이 배회하거나 집단을 이루어 구걸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을 치료기관에 수용하는 행위는 단순히 치료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생활환경 자체를 제공하는 구료의 성격이 짙은 것이었다. 

환자들을 일정한 장소에서 장기간 안정적으로 수용, 치료하는 데에는 상당한 비용이 들었다. 일제 당시 환자 1인당 매월 주사비와 주거비를 합쳐 약 7원의 경비가 소요됐는데, 이것을 전액 광주의 미남장로회 선교부가 부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 나병원의 경우 정원 600명을 훨씬 초과한 인원이 몰려와 병원 밖에 진을 치고 기다리는 상황이 지속돼 인도적 입장에서 이들을 추가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선교회가 그 치료비를 모두 마련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이처럼 막대한 재정적 부담까지 감수하며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하고자 했던 선교사들의 노고는, ‘빛고을 광주에 혐오가 되는 한센병원이 있는 것은 좋지 않다’며 연일 철거시위를 했던 광주시민들의 모습과 비교할 때 더욱 그 가치가 빛난다.

이후 광주 나병원은 총독부의 주선으로 1925년 전남 여천군 율촌면으로 옮겨 1936년부터 애양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운영해 오다가 1939년 7월 14일 김응규 목사의 후임으로 손양원 목사가 부임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한센병 환자들은 더 이상 일반인과 격리돼 치료받아야 할 질병공동체가 아닌, 기독교적 사랑의 가치가 실현되는 신앙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1950년대 초 국내에 DDS라는 신약이 국내에 보급되면서 의학적으로 한센병 완치의 가능성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에 정부는 1961년 완치자를 뜻하는 균음성자 정착사업 실시 등을 내용으로 하는‘나관리 5개년 계획’을 수립, 발표했다. 그 내용은 완치된 한센병 환자들이 사회에 복귀하여 정착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 구라사업이었다. 이처럼 정부가‘정착 사업’을 적극 추진함에 따라 남장로회 선교부도 정착 대상자를 선발하기로 하고, 1962년에 먼저 애양원 피수용자 1,149명 중 540명을 가려내 여천·남원 등지로 이주시켰다. 남은 환자들도 1959년 부임한 토플 원장이 이들에게 애양원 내부지를 불하하고 독립시킨다는 구상을 내놓음에 따라 단계적으로 모두 애양원의 보호· 관리를 벗어나 독립된 정착생활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사진 - 초기의 광주 나병원 전경 / 최흥종이 땅 1천평을 기증해 설립한 광주나병원.  최흥종은 1909년 포사이드 선교사가 죽어가는 나환자를 위해 정성껏 치료, 간병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아 평생동안 ‘헌신’을 실천하는 성자의 길로 들어선다. 1911년 최흥종은 광주 봉선리에 있는 자기 소유의 땅 1천평을 기증해 한국 최초의 나환자 수용시설인 광주 나병원을 설립토록 도왔다.)



1876년 개항이후 서양 의술이 한국에 직접 수입되면서 서양식 병원 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초기 서양식 병원에서 한국인들은 비전문적 인 보조 인력으로 의무, 약무, 간호 등의 일을 했지만, 병원이 점차 발 전함에 따라 한국인들도 더욱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인력으로 성장하 게 됐다. 1903년 보구여관을 시작으로 세브란스의원, 동인의원, 대한 의원, 사립 조산부 양성소 등에서 정규 간호교육이 시작돼 1910년까지 4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한국 최초의 근대 서구식 병원 제중원의 경우도 전문적인 인력으로서 의 간호사는 고려하지 않았다. 제중원 설립 직후 간호사로 일한 것은 언 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였다. 언더우드는 전문적인 간호교 육을 받지 않았지만, 타고난 성품으로 인해 간호능력이 탁월해‘부드럽 고, 점잖고, 조용하고, 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기민하고, 겸손’하다 는 평가와 함께‘돌봄’으로서의 간호에 적합한 인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제중원에 여성 의료인이 필요해졌다. 남 녀간의 접촉을 금하는 한국의 엄격한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다. 말하 자면 자유롭게 남녀간을 왕래할 수 있는 인력이 필요해진 것인데, 알 렌(Horace N. Allen, 안련)은 한국인의 조언을 얻어 기생을 채용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당시에는 남성과 접촉할 수 있는, 남녀의 내 외법에 적용되지 않는 유일한 여성이 기생이었기 때문이다. 알렌의 요청을 받은 정부는 황해도와 평안도에 공문을 보내 관기를 차출했 다. 이에 따라 1885년 8월 5일, 다섯 명의 소녀들이 선발돼 여자 의학 생이 됐고, 알렌은 이들에게 간호부와 약제사의 임무를 맡겼다. 그러 나 5명 중 2명은‘병원 안에 혼란을 가져온다’는 이유로 알렌의 요청 에 따라 해직됐고, 나머지 3명은 12월 1일자로 청나라 장수 원세개에 게 팔려가게 되면서 여성의료인의 활동은 4개월도 못가서 끝나고 말았다.


1895년, 콜레라가 기승을 부리자 정부는 의주, 인천, 평양에 검역소 와 피병원을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 비록 간호 인력에 대한 인식이 잡 무를 맡아 보는 것에 머물러 있었고 간호 인력을 의미하는‘간호부’ 라는 단어가 남성에 한정된 의미이기는 했지만, 이때부터‘간호’라는 단어가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정부에서 근대적인 간 호교육을 시작한 것은 대한제국 시기인 1907년이었다. 이 해에 정부 산하기관으로 대한의원을 설치하고 간호사와 조산사를 양성하는 제 도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간호교육은 정부에서 전문적 인 간호사를 양성하기 이전에 이미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돼 있었다. 


한국에서 근대적 의미의 간호교육은 1903년 에드먼즈(Margaret J. Edmunds)에 의해 보구여관에‘간호원 양성학교’가 설립되면서 시작 됐다. 이때 처음으로‘간호원’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데, 당 시 환자를 돌보는 직업의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 없어 선교사들이 한자를 바탕으로 만든 말이었다. 하지만 보구여관이 3년 과정의 간호원 양성소를 시작하고 입학생을 모집했음에도 불구하고, 직업 간호가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데다가 여성의 직업 교육은 기생을 제외하고는 거 의 이루어지지 않던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모집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이전에 병원이나 시약소의 조수로 일했던 한국인 여 성 6명이 지원했다. 이들 간호학생들은 매학년 수업료를 납부했고, 학 교는 이들에게 기숙비, 세탁, 간호복, 책 등을 제공했다. 2개월간의 수습을 거쳐 정식 계약을 맺은 후부터 근무시간에는 정규 간호복을 착용하게 했는데, 이 옷은 한복과 양장을 복합한 디자인으로 활동성 을 보강한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 제복으로 알려져 있다. 


입학 첫해에는 간호사의 자격, 인체골격, 순환, 혈액검사, 병원규칙, 찜찔, 침상만들기, 환기, 수술준비, 저명인사의 일생회고 등의 과목을 수업했고, 다음 해에는 응급, 치과, 식이요법, 산과, 해부, 나이팅게일의 생애가 준비됐다. 마지막 해에는 위생, 이비인후과, 열, 수술, 외과드레싱 준비 등을 학습하게 되어 있었다. 초기에는 12시간 근무를 기본으로 강의와 실습을 병행했으며, 붕대법, 침상만들기, 목욕법, 투약, 간단한 식이준비, 활력증상측정 실습 등과 같은 간호학 실습 과목들이 더욱 세분화되어 첨가됐고, 전공 이외에 성경, 음악, 수학, 국어, 한문, 영어 등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보구여관의 시설이 학생을 가르치기에는 다소 열악했기 때문에, 학생들의 보다 많은 실습 경험을 위해 1905년 2명의 학생을 일본 나가사키병원으로 보내 연수를 받도록 하는 한편, 다른 여러 병원들을 견학하도록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6명의 학생 중 김 마르다와 이그레이스 등 2명이 1906년 1월 25일 간호원 모자 수여식(수관식)을 한 뒤 수료증을 받았다. 보구여관 대기실에서 한미 양국의 국기를 꽂고 내외국인 여성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 최초의 간호원 수관식이 진행됐다. 에드먼즈가 모자를 수여하고 의사와 간호사들은 합창과 축도로 간호학생들의 전문직 교육을 격려했다. 하지만 수관식 이후에도 두 학생에 대한 교육이 이어졌기 때문에 이들의 정식 졸업은 2년 후인 1908년 11월 5일에 이루어졌다. 두 번째 수관식은 1907년 정동교회에서 보구여관 간호원 양성소와 세브란스병원 간호원 양성소 합동으로 열렸다. 당시만 해도 모자는 남성이 성인이 될 때 수여되는 것으로 남성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여성이 모자를 쓴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회적 주목을 받았다.


세브란스병원에 간호부 양성소가 설립된 것은 1906년 9월이었다. 세브란스병원의 간호를 담당하고 있던 선교사 쉴즈(Esther L. Shields, 수일사)와 보구여관의 에드먼즈가 만나 각자의 전문성을 살리고 폭넓은 임상경험을 할 수 있도록 공동의 간호학교를 설립하자는 논의를 했지만 이루어지지는 못했고, 대신 운영은 별개로 하되 강의와 실습을 공유하기로 했다. 1909년에 세브란스의 간호원 양성소에서 는 양 기관의 학생들의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때의 교과과정은 해부생리, 증상관찰, 식이요법, 안과, 내과, 질량 측정, 현미경을 이용한 미생물 관찰, 간호실무의 8개 과목으로 구성돼 있었다.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양성소의 제1회 졸업식은 1910년 6월 12일에 이루어져 1 명의 졸업생(김배세)을 배출했다.  


초기의 한국 간호학생들은 엄격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남성들을 간호할 수 없었다. 그런데 1907년의 일제에 의한 한국 군대 해산 과정에서 한국군의 격렬한 저항이 있었고, 8월 1일 한국군 시위대는 서울 시내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자 간호 학생들이 처음으로 남성을 간호하기 시작했다. 사회적 관습을 뛰어넘는 전문인으로서의 여성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애비슨(Oliver R. Avison, 어비신)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한국의 간호사들은 남자 환자를 돌보기를 꺼렸다. 젊은 여자 간호사들은 한 번도 남자 환자를 맡아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모여 들어서 이렇게 많은 부상병들이 누워있는 것을 구경만 하더니, 그들이 바로 자기들과 민족을 위해 싸우다 부상 당해 쓰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중 한 사람이 그 오랜 인습을 깨뜨리고 부상자를 돌보려고 나서자 모두가 따라 나섰다. … 한국인 간호사들은 그날 밤새도록 그리고 그 다음날도 종일 부상병을 간호했다. 그때서야 그들은 자기들이 간호한 것이 남성 환자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한 번 해본 이상 또 다시 못할 것도 없었다. … 떠나는 병사들도 울고 보내는 한국 간호사들도 울었다. … 이 사건이 있었으므로 우리 병원의 남자 환자들은 그 후로 보다 나은 간호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 해왔던 것처럼 남자가 간호를 하자면 훌륭한 간호를 해주기 힘들었을 텐데 여성들이 드디어 남자환자를 돌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진 - 초기 세브란스간호학교 졸업생들과 졸업증서 /  세브란스 간호학교 졸업앨범의 학생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아편설라)가 내한하기 전에 이미 한국에는 일본과 중국을 통하여 기독교가 들어와 있었고, 한글 성경과 번역된 찬송가도 소통되고 있었다. 중국과 일본에서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들이 국내에 돌아와 전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과 찬송가도 어떤 방식으로 든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소래교회를 세운 서상륜, 의주교회를 세운 백홍준 등은 예배 때 중국 찬송가를 그대로 사용해 중국어 음으로 노래하거나 한글식 음역으로 불렀다. 당시의 찬송가는 이렇게 중국 찬송가를 번역 혹은 자역한 것이었다. 이런 중국 찬송가의 문제는 무엇 보다, 한국의 문인들조차 이해하기 힘든 중국식 표현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가사의 의미전달이 명확하지 못하다는 점에 있었다. 


선교사가 공식적으로 입국하면서 영어 찬송가들이 번역돼 불리기 시작했다. 한국 최초의 찬송가인 감리교의 『찬미가』(1892)와 장로교의 『찬양가』(1894)가 발행되던 시기까지 번역된 영어 찬송가는 약 50 편에 이르는 것으로 추측되지만, 어떤 곡들이 불렸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선교 초기에 개별적으로 번역돼 불린 이 찬송가들을 한 국인들이 익힐 수 있는 기회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선교사들이 전국 의 많은 교회를 매 주일 찾아가 예배를 드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일 년에 한두 차례 열리는 사경회에서 찬송가의 교습이 정례적으로 이루어졌다. 서양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들이 제한된 교습 기회에서 곡을 외워야 했던 현실 때문에, 찬송가의 곡조는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커(William C. Kerr, 공위량) 역시“특별히 훈련된 음악인 집단이 아니고서는 아직 곡 그대로 부르는 찬송을 들어 본 일이 없다”라고 말 했다.


선교가 진행되면서 신자의 수가 늘어나자 곧 책으로 된 찬송가가 필요해졌다. 먼저 감리회에서 당시 불리던 번역 찬송가 27편을 모아 한국 최초의 찬송가인『찬미가』를 발행했다. 편집은 1888년 5월에 한국에 와서 배재학당 교사와 문서선교에 헌신하고 주로 인천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존스(George. H. Jones, 조원시)와, 이화학당에서 활동 중이던 로드와일러(Louisa. C. Rothweiler)가 맡았다. 감리회 전용으로 제작된『찬미가』는 악보가 없는 형태로 편집됐으며, 목적은 주로 복음의 주제를 종합적으로 표현하고 교회 절기에 사용될 노래들을 정리하는 것에 있었다. 이후 찬미가는 여러 차례 증보됐는데, 1895년 증보판 『찬미가』의 서문에는 번역 찬송가에 대한 선교사들의 고민이 드러나고 있었다.


"번역으로 적절하고도 납득이 가능한 찬송가가 나타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한 찬송가의 번역을 가지고 줄곧 며칠씩 골치를 앓으 며 애쓰고, 겨우 한 줄 정도 해놓고 불완에 그친 경험들을 다하고 나서, 우리는 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곧 이 한국 사람들 틈에서 그들 마 음 그대로 솟구치는 가락으로 노래할, 그들 자신의 찬송가 작곡, 작사자들이 나와야 하겠다." 


한편, 장로회와 감리회가 합동으로 찬송가를 편찬하기로 하고 장로회의 언더우드와 감리회의 존스가 책임을 맡아 사업을 진행하던 중, 1894년 존스의 미국 체류에 지친 언더우드가 감리교와 상의 없이 단독으로 찬송가를 간행하는 일이 발생했다.『찬양가』가 출간된 것 이다. 언더우드의 독단적인 처사에 반발한 감리회는 『찬양가』사용을 거부하고『찬미가』를 증보하여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언더우드가 『찬양가』에서“여호와”또는“아버지”와 같은 감리회와 합의되지 않은 하나님의 명칭을 사용한 것도 중요한 문제가 됐다. 반대로 감리회가 주장하던“하나님”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감리회의 입장에 서는『찬양가』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찬양가』는 한국 최초의 4성부 악보가 포함된 음악책으로 한국 서양음악사에서도 효시적인 위치를 차지할 뿐 아니라, 총 117장의 찬송가가 수록돼 규모와 형식을 제대로 갖춘 첫 찬송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찬양가』의 초판이 악보판으로 출간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2판부터는 모두 악보가 삭제되고 세로줄의 한글가사만이 수록된 가사판으로 출간됐다. 당시 악보를 읽을 수 있는 한국인이 드물어 악보판 찬송가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초의 한글 음악통론인 『음악대해』가 악보를 읽지 못하는 성가대와 교인들을 위해 출판 된 것이 1923년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1890년대에 서양식 악보를 읽을 수 있는 한국인은 거의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언더우드는 한국에 빨리 서양의 음악체계와 이론을 소개하고 싶어했지 만, 한국인들은 언더우드의 열정을 소화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것 이다.


한편『찬양가』에서 7장의 한국인 작사곡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번역된 찬송가였는데, 언더우드 역시 서문에서“곡조에 맞게 하려니 글자 수가 안 맞고”라며 번역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게일 역시 1895년『찬미가』와『찬양가』의 곡과 가사들을 보고“서양 음악조 글에 억지로 맞추어 놓은 조작된 가사의 인상이 가실 길 없고, 따라서 전인적 혼의 감회가 결여된 공백 때문에 찬송 본래의 의미가 시든 다”고 탄식했다. 곡조와 가사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찬송 번역과 편집에 참여하였던 밀러(Frederich. S. Miller, 민로아)는 못갖춘마디 때문에 곤란을 겪기도 했다. 


"가장 컸던 난관은 한국어가 약강조 운율에는 맞지 않게 되어 있다 는 점이다. 둘째 음절에 악센트가 있는 단어가 거의 없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한 음절의 단어를 거의 모든 행의 첫머리에 놓아두게 되었다. 단조로울 것이야 두말할 것 없다. 차라리 모든 약강조의 찬송을 빼어 버렸더라면 좋을 뻔 하였다."


영어에는 관사가 있어서 못갖춘마디를 사용해 두 번째 음절에 오는 명사에 악센트를 주는 반면, 한국어에는 정관사가 없기 때문에 한국 전통 음악에는 못갖춘마디의 음악이 없었다. 그래서 찬송가 번역을 하는 사람들이 못갖춘마디의 정관사 부분에 한 음절의 단어를 넣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경우는 다음과 같이 불리게 되었다. 


나 / 같은 / 죄인 / 살리 / 신 주 / 은혜 / 놀라 / 워

잃 / 었던 / 생명 / 찾았 / 고 광 / 명을 / 얻었 / 네


우리말의 자연스러운 노래라면 다음과 같이 되어야했다. 


나 같은 / 죄인 / 살리신 / 주 은혜 / 놀라워

잃었던 / 생명 / 찾았고 / 광명을 / 얻었네  


이런 번역상의 문제 때문에 선교사들이 골머리를 앓은 것과 대조적으로, 찬송가는 한국인들이 한글을 깨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찬송가의 가사가 전부 한글로 돼 있었고, 찬송가의 문장은 성경보다 간단하여 외우기가 쉬웠기 때문에, 찬송가는 성경보다 앞서 한글을 보급하는 수단이 됐다. 한국인들은 서양 악보도 모르고 한글 가사 도 모르는 상태에서 찬송가를 외우는 방식으로 노래를 배웠는데, 이미 외우고 있는 찬송가를 찾아 한글 가사를 보면서 확인하면 한글을 익히기가 쉬웠다.


"교인들은 신약성서를 통해 배우는 것보다 암기하면서 찬송가를 읽는 법을 배우는 것이 쉬워서, 곧 찬송가집은 교인들의 가장 인기 있는 독본이 되었다. 주목할 것은 이 때문에 어떤 작가들은 성경의 일부분을 선택하여 시가 형태로 만들어 내놓기도 했다." 


이렇듯 찬송가가 한국인들의 우리말 습득을 위한 주요한 교재가 되면서, 1935년 장로교의 『신편찬송가』가 출간될 때 1933년「조선어학회」에서 제정한‘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적용하지 않자 이는 문화적으로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하였다.


"기독교의 출판물이란 학교 교과서와 함께 조선의 문화적 발전 단계 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최근 발행된 신편찬송가는 교회가 통일안을 채용한 이래 총회에서 발행한 최초의 대형 출판물이라고 생각된다. … 그러나 신편찬송가는 너무나 이상하게도 대외적으로 새로운 철자법 통일안과 거의 맞지 않으며 대내적으로 여러 모순을 내포하였다. … 근대 조선 문화사적 발전 단계에 있어 선구자였던 기독교 문화가 요즘에는 한 반역적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장로회 총회가 1937년 『신편찬송가』에‘한글맞춤법통일안’을 채용하기로 결의하자 1937년 9월 19일자 「동아일보」는 이를 환영하면 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과 찬송가는 기독교 문화 발달뿐이 아니라 여명기의 조선에서 문맹 퇴치, 문화 향상에 거대한 공헌을 끼친 터로써 금후 한글 철자법 통일안을 채용하게 되면 한글철자법통일안의 지지와 그 보급에 새로 삼십만 명 이상이 가담한 것이라 할 것이다." 



(사진 - 찬미가 / 찬양가) 



한국에 전해진 기독교의 특징은 처음부터‘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직접 읽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특별한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다는데 있다. 즉 공식적으로 기독교 선교가 허락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미 한 글로 번역된 성경이 전국에 널리 전파돼 있었고, 그 결과 곳곳에 자생적 교회가 설립됐다는 뜻이다.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미 리 한글 성경이 준비돼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자발적인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점은 한국 가톨릭의 경우에 도 해당된다. 이와 같이 한국에서 기독교는 주체적으로 수용됐다. 


기독교가 한국에 성경을 전해주려 한 일은 의주 국경 넘어‘고려 문’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여기에는 오래 전부터 한국 선교를 준비하던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한 노력들이 하 나로 모아져 낯선 곳에서 한글 성경이 탄생했다. 그것이 바로 로스역 성경이다. 이 성경이 나오게 된 계기는 로스(John Ross, 나약한)에게 한국에 대해 이야기해 준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의 권고였다. 그저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가져 보라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로스의 마음 깊은 곳에 각인돼 있었다. 스코틀랜드 장로회 소속의 선교사였던 로스는 1872년 8월 중국에 도착한 직후 한국인들이 많이 있다는 만주의 개항장 영구를 찾았다. 일단 탐색을 해 본 것이다. 이어 로스는 1874년 10월 첫 번째 고려문 여행에 나섰다. 고려문은 봉황성 아래의 작은 마을로, 당시 중국과 조선의 국경이자 양국 사이의 합법적인 교역이 이뤄지던 관문이었다. 이 여행에서 로스는 한국인 상인을 만나 한국어를 배워 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한문 신약성경을 선물로 주었다. 예상했던 대로 고려문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있었고, 그들을 통해 한국 선교를 시작할 가능성을 발견했다. 로스는 일단 다시 영구로 돌아가 좀 더 많은 준비를 하고자 했다. 그런데 로스에게 신약 성경을 받아 한국으로 돌아간 상인이 자신의 아들과 친구들에게 성경을 소개한 결과, 그들 가운데서 한국 개신교의 첫 번 째 세례자가 나왔다. 한 보고에 의하면 그 상인은 바로 백홍준의 아버지였다.


1876년 일본과의 조약으로 한국의 문호가 개방됐다는 소식을 들은 로스는 즉각 두 번째 고려문 방문길에 올랐다. 이 방문에서 로스는 어학교사로 의주상인 이응찬을 만났다. 당시 로스는 성경을 한글로 번 역하겠다는 계획을 세워 놓은 상태였다. 로스는 계획대로 한글 성경 번역을 시작했고, 이응찬을 포함해서 여기에 참여한 다른 한국인의 도움으로 1878년 봄에는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했다. 로스의 한글 성경 번역에 참여한 이들은‘자립적 중산층(independent middle class)’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한문과 만주어에 능통한 것은 물론 개방 적이고 독립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한국에 성경을 전해주는 기독교 수용의 통로 역할을 했다.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에 참여했던 한국인들은 점점 기독교의 진 리를 알게 됐으며, 차례로 세례를 받았다.  


로스가 안식년을 맞아 봉천에 가 있는 동안 백홍준과 이응찬 을 포함한 네 명의 한국인이 매 킨타이어(John MacIntyre, 마륵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들 가 운데 한 사람은 백홍준의 부친에 게서 얻은 성경을 몇 년간 읽고 난 뒤 영구에 와서 세례를 요청 했다. 이것이 1879년 1월에 있었던 한국개신교 최초의 한국인 수세 사건이다. 이 청년에 이어 백홍준 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 다음으로 이응찬이 7월에 세례를 받았고, 그 와 함께 왔던 의사 출신의 친척도 몇 개월 번역 사업에 동참하다 12월 경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1879년에만 모두 네 명의 한국인이 세례를 받았으며, 이들은 한국 기독교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 


로스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은 한국인들과 함께 성경을 한 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한글의 장점을 알게 됐다. 그리고 한글 성경 번역 작업이 앞으로 한국 선교에 기여할 가능성을 확신했다. 로스는 이미 1877년에 선교사를 위한 한국어 교재로『한국어 첫걸음』Corean Primer이라는 저술을 남긴 바 있었다. 


"한글 자모는 아름다운 음성문자로, 너무나 간단해서 모든 남녀노소 가 읽을 수 있습니다. 소리글자이므로 한글로 인쇄된 어떤 책이든 자 모만 배우면 읽을 수 있습니다. 1,200만 명 내지 1,500만 명이 사용하는 이 언어에 대한 성경 번역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로스의 한글 성경은 본문의 뜻과 일치하면서 한국어 어법에 맞는 절대 직역을 하며, 영어보다는 그리스어 성경을 모본으로 한다는 두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번역 방법으로는 관리 출신의 학자가 한 문성경에서 1차 번역을 하면, 로스와 이응찬이 그리스어 성경을 참고 하여 2차 번역을 하고, 이것을 제1번역인이 정서하면 다시 로스와 이 응찬이 재수정(3차 번역)하고, 로스가 그리스어 성경과 그리스어 성구 사전 및 메이어 주석을 참고 대조하면서 어휘를 통일한(4차 번역) 후 식자공에게 넘기는 방법을 사용했다. 


『예수셩교젼셔』가 출판되기 이전에『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가 1882년 초 먼저 소책자로 출판됐다. 이어 5월에는『예수셩교 요안내 복음젼셔』가, 그리고 10월에는『예수셩교 누가복음 뎨자행적』과 『예 수셩교셩셔 요안내복음』이 발행됐다. 1884년에는『예수셩교셩셔 맛 대복음』과『예수셩교셩셔 말코복음』이 출간됐고, 1885년에는『예수 셩교 요안내복음 이비쇼서신』이 출간됐다. 이렇게 단편이나 합본으로 발행되던 신약 성경은 남은 서신서를 추가하여 1887년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인『예수셩교젼셔』로 출간됐다. 그러나 이 로스역 한글 신약 성경은 1891년을 끝으로 발간을 중단하게 되는데, 이는 한국 선교사에 의해 성서번역위원회가 조직되고 성경번역이 다시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로스는 계속해서 구약도 번역하고 싶었지만, 그 사명은 한국의 선교사들에게 넘겼다. 


그렇지만, 로스역 신약성경은 한국인 개종자들과 권서인들에 의해 전국적으로 배포됐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선교사들이 직접 한국에 들어오기 이전인 1880년대 초반에 만주와 국내에 여러 신앙공동체가 조직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로스역 성경은 최초의 한글 성경이라는 기념비적 의미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전함으로써 한국 교회 를 세운 초석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와 함께 로스역 성경은,‘하나 님의 말씀’이 한국 문화와 한글의 몸을 입는 신학의 토착화와 성육신 이었다는 점, 그리고 민중의 언어인 입말이 순수한 한글로 정리되어 표현된 것이라는 점에서 한국 교회의 신학과 한글 문화의 기초가 됐다.

로스역 성경과 또 다른 성경의 한글 번역 작업이 일본에서 이뤄졌다. 이 번역 또한 한국에 공식적으로 선교사가 파송되기 이전의 일이 었다. 당시 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선박은 일본을 경유해야 했는데, 이 경로를 거쳐 온 첫 선교사들이 일본에서 이수정이 번역한 한 글 성경을 받아 한국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수정이 번역 한 한글 성경이었다. 


이수정은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다녀 온 친구로부터 일본의 기독교인이자 유명한 농학자 쓰다 센(津田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꼭 한 번 그를 만나겠다고 결심했다. 1882년 9월 이수정은 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의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할 수 있었다. 이때 이수정은 곧바로 쓰다 센을 찾아갔다. 쓰다 센은 이수정과 기독교에 대한 이야 기를 나눴고, 한문 신약성경 한 권을 주었다. 


이수정은 그 성경을 탐독하며 기독교에 대한 공부를 하던 중 12월에는 도쿄의 쓰키지교회(築地敎會, 도쿄제일장로교회)의 성탄축하예배에 참석했고, 이후 쓰다 센이 소개한 오사다(長田時行)의 도움으로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했다. 이를 통해 이수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다. 이수정이 세례를 받은 곳은 쓰키지교회가 설립한 로케쓰초교회(露月町敎會)였으며, 세례문답은 미국 선교사 녹스(G. W. Knox)에 의해 진행됐다.


1883년 4월 29일 주일, 이수정은 일본에 간지 7개월 만에 일본에서 세례를 받은 첫 번째 한국인 기독교 신자가 됐다. 이후 이수정은 도쿄 에서 열린 제3회 전국기독교 대친목회에 초빙돼 한국어로 공중기도를 하기도 했고, 요한복음 15장을 중심으로 자신의 신앙을 대중 앞에서 고백했다. 한문 700여 자로 된 이 고백문은 현존하는 한국인의 신앙 고백으로는 최초의 것이어서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릇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 한 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감응 하는 이치(神人相感之理)를 가리킴이며,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이루어 진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비유하여 이르시기를 ‘내 아버지는 포도원 주인이요, 나는 포도나무이며 너희는 가지라’ 하셨 으니, 그 이치는 쉽게 곧바로 이해될 것이어늘 번거로이 천착하지 않을 것이므로 제가 이제 무슨 말로 밝힐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심이 소리가 종이 있는 것과 같아 치면 응하고 때리면 소리 나는 것이 니, 종과 망치가 구비되어 있더라도 각기 다른 곳에 달려 있다면 소리가 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큰 심지로 등잔이 타면 빛이 크고 조그만 망치로 치면 소리가 적으니 곧 많이 구하면 많이 얻고 적게 믿으면 적게 이룬다는 뜻이요 오직 이루지 못함이 없다는 이치입니다."


이러한 이수정의 활약을 통해 당시 일본에 주재하는 해외 선교사들 은 조심스럽게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전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에서 이수정은 재일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Henry Loomis)의 제안으로 성경 번역을 시작하는 동시에, 일본에 와 있던 30여 명의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전도를 하기 시작했다. 1883년 말에는 이수정을 통해 세례 받은 유학생 김익승, 박명화, 박영선, 이경필, 이계필, 이주필 등 7-8명의 한국인 수세자를 중심으로 한 신앙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었다. 이것이 도쿄에 세워진 최초의 한인교회였다. 


이 과정에서 이수정은 해외선교 잡지에 한국 선교를 촉구하는 글을 쓰기도 했고, 이수정의 이야기는 여러 선교사들의 글을 통해 전 세계 교계에 널리 알려졌다. 특히 이수정의 선교사 한국 초치 활동을 통해 미국의 해외선교 주관 단체에서는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을 높였고, 결국 미국의 여러 해외선교 단체에서 직접 한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 게 되는 출발점이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수정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었다. 이수정은 자신이 자기의 민족에게 성경을 줄 수 있다는 큰 소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1883년 5월부터 성서 번역에 착수 했다. 한문성경에 한국 지식층에서 널리 사용되던 토를 달아 현토성경(縣吐聖經)으로 만드는 방식이었다. 한문 본문에 토를 달면 되는 용 이한 과정이었기 때문에, 이수정의 현토성경은 11월 출판에 들어가 『신약성서마가전』을 비롯한 5권의 단편 한한성경으로 출간됐다.


이수정 현토성경은 당시 도쿄의 한국인 유학생과 국내 지식층으로부터 널리 환영을 받았으며, 한글성경 번역을 시도하는 계기가 되기 도 했다. 이수정의 한글성경 번역은 마가복음으로부터 시작됐다. 출 간됐던 로스역 성서를 참고해 가면서 1884년 4월 마가복음의 번역을 끝냈다. 미국성서공회는 요코하마에서 이수정의 마가복음 6천부를 간 행했다.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 온 언더우드나 아펜젤러가 일본에서 받아 들고 온 한글 성경이 바로 이 이수정의 마가복음이었다. 


이수정의 마가복음은 로스의 예수셩교전서와 달리 국한문 혼용체였다. 한글 번역에서 뜻이 잘 전달되지 않는 문제를 보완하면서, 지식 층을 전도 대상으로 한 번역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문 투의 단어 와 문장이 많았다. 그리고 고유명사가 헬라어나 히브리어 원어에 가깝게 표기돼 있었다. 이후 이수정은 누가복음서를 비롯한 다른 신약 성서도 번역하고자 했지만, 출판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수정은 갑신정변의 여파로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 등을 최대한 멀리하며 지내던 중, 자객에 의해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 일로 인해 이수정의 다른 번역 계획은 모두 취소됐고, 이수정은 국내로 들어와 은거하는 동안 병사하고 말았다. 


이수정은 1882년 9월 일본에 건너간 이래 1886년 6월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성경을 번역했으며, 동경 유학생을 중 심으로 한인교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선교사가 한국에 오도록 촉구함으로써 한국선교에 대한 자극과 열의를 북돋아 한국교회의 출발을 가능하게 했다. 이수정의 한글 성경은 이후 한국인들의 손에 전달돼 많은 사람들이 읽고 전했으며, 그로 인해 개종자가 생겨나 한국교회 출 발에 한 기초가 됐다. 특히 이수정의 현토한한성경은 한문성경을 선호하는 지식층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상황에서 인기를 얻어, 서울과 인천을 중심으로 주변에 널리 배포될 수 있었다. 또한 이수정의 마가복음서언해는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인들에게 전해지는 한편, 1884년 부산에 설치된 대영성서공회 성경보급소와 그 권서들을 통해 부산일 대와 영남지역에 상당량이 배포됐다.


 로스역 한글 성경이 북쪽 지방에서 널리 배포된 것과 대조적으로, 서울과 부산 대구 등 중부 이남 지역에서는 이수정의 한글 성경이 널 리 배포됐다. 이것은 로스역과 이수정역이 서로 상보적인 관계에서 전체적으로 한국교회의 기초적인 반석이 됐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로스역 한글 성경과 이수정역 한글 성경은 한국에 온 선교사들에 의해 새롭게 번역된 한글 성경으로 대체됐다.



만주에서 번역된 로스역 한글 성경과 일본에서 번역된 이수정역 한글 성경은, 공식적인 선교사의 내한 이전에 전국 곳곳에 배포됨으로써 한국인 스스로의 주체적인 복음 수용을 통한 기독교 신앙공동체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을 통해서 성경의 한글 번역이 지니는 중요성이 입증됐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성경 말씀 자체가 지닌 효과가 확인됐다. 따라서 성경의 한글 번역을 완성하고자 하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추진됐다. 당시 한국에서는 한글 성경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었지만, 로스역과 이수정역은 한국 전체를 아우르는 표준적인 한글성경으로서는 다소 아쉬운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스의 한글 성경은 평안도 사투리가 반영돼 있었고, 이수정의 한 글 성경도 단편에 불과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한글 성경의 새로운 번역을 검토했다. 선교사들은 1887년 성경번역위원회(Committee for Translating the Bible into the Korean Language)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번역 사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성경을 새롭게 번역하는 일은 시간 이 오래 걸리는 사업이었기 때문에 기존에 발간된 한글 성경을 조금씩 수정하여 출판하는 한편, 신약 전체가 번역된 로스역 한글 성경을 기반으로 개정작업을 해 나갔다. 그런데 로스역 개정 작업은 얼마 후 중단되고 말았다.


"1889년 국내에서 선교사들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로스역 성경을 개 정하려는 노력이 있은 후 위원들은 철자법을 수정하는데 완전히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결국 2년이나 헛수고를 한 셈이었다. 문제는 철자 법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용된 언어들과 딱딱한 문제, 불분명한 표 현 및 책의 고전적 형태 등도 문제였다. 그래서 1890년 누가복음 및 로마서 개정이 끝나자 로스역 성경을 개정하는 일은 중단되었고, 로스역 성경은 선반 위에 놓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위원회는 로스역 성경의 수정을 포기한 뒤 가능하면 신 속하게 신약전서를 새로 번역하기로 하고, 1890년 6월 11일에는 2년 이내에 신약성경 번역 사업을 끝낼 목적으로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와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시란돈)이 특별히 성경번역에만 전념하기로 결정한다. 상임성서위원회의 이 결정 은 한글 성경 번역사에 하나에 획을 긋는 중대한 결정이었다. 즉, 이 결정이 순수 국내 번역의 신기원이 된 것이다. 국내 선교사들에 의해 1890년부터 시작된 한글성경번역 작업은 이후 10년 만에 신약전서를, 그리고 다시 10년 후에는 구약전서를 완역해 1911년 마침내 성경전서로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1893년에는 이 조직을 상임성경실행위원회(Permanent Executive Bible Committee)로 개편하고 그 산하에 성경번역자회를 조직해 체계적인 원칙에 따라 공동번역에 착수했다. 선교사들은 헬라어성경과 개정판 영어성경을, 한국인 조사들은 대표자역본 한문성경을 저본으로 채택했다. 이 번역자회의 의견을 거친 성경을 시험역본(Tentative Version)이라 했고, 이것을 3년간 사용하면서 개정해 낸 것을 공인역본(Authorized Version)이라 불렀다. 


1895년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이 시험역본으 로 발행된 후 신약의 단편성경들이 꾸준하게 간행돼 1900년에는 신약 전체가 한 권으로 묶여 나왔다. 신약 전체가 번역되기는 했지만, 엄밀 하게 말해서 마태복음부터 로마서까지는 시험역본이고 나머지는 번역자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은 개인역본이었다. 이렇게 서둘러 간행한 것은 한국교인들의 열화 같은 요구 때문이었다. 그 후 곧 신약의 개정 작업에 착수해 1904년 1차 개정본이 간행됐고, 1906년에 비로소 공인 역본 신약전서가 발간됐다. 


구약의 번역과 발간은 신약보다 늦었다. 1898년 미국성서공회 권서였던 유태계의 피터스(Alexander A. Pieters, 피득)가 시편의 절반 정 도를 번역,‘시편촬요’라는 이름으로 간행하기는 했지만 개인번역에 불과한 것이었다. 본격적인 구약 번역은 신약번역이 끝난 1900년에 시작됐지만, 선교사의 잦은 이동과 다른 업무로 인해 진척이 없다가, 1907년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이눌서)와 감정삼, 이승두 등 3인이 번역작업에만 집중해 1910년 구약 전체를 번역해 냈다. 이로써 성경 전체가 번역돼 그 이듬해 출간됐다. 


이렇게 오랜 기간에 걸쳐 성경이 번역되는 동안 한국교회 교인들은 신속하게 성경이 번역되기를 기다려 왔다. 한문 성경 이외에는 제한적으로 성경을 읽을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한국인 신자들 의 간곡한 요청이 쇄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바쁜 일정에 도 불구하고 성경을 빨리 번역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1900년 신약전서가 단권으로 묶여 나오기 전까지 성경을 요구하는 한 국인 독자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번역자회를 통과한 단편 성경 들을 먼저 출판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러한 신약 단편 성경이 한 권으로 묶여 출간된 것이다. 


"신약을 지금 대한서와 국문으로 출판하였는데 사복음과 여러 가지 편지와 합이 이십칠권을 합부하였는데 값은 사십전이요 복음과 각 편 지를 각권으로도 판매하되 값은 이전 광고한 값과 같으니 경향 각처 에 무론 남녀 교우하고 성경 출판되기를 오래 고대하였더니 지금은 족이 해갈을 하겠으니 대단이 즐거운 일이 될지라"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대적인 출판기념회가 여러 곳에서 성황리에 거행되기도 했다. 한편, 1910년 구약성경 번역이 완료되기까지는 더욱 힘든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드디어 구약 전체의 한글 번역도 끝 나는 날이 있었다.


이박사와 같이 전주에 가서 구약번역의 노고를 한 가지로 한 이는 이승두, 김정삼 양씨였다. 구약 중에 이박사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 은 오직 예레미야 한 책뿐인데 예레미야는 기일박사가 번역하고 원두 우박사가 교열하였다. 1910년 4월 2일에 구약의 끝 절을 역료(譯了)하고, 그들은 성경번역을 무사히 마쳤다는 감사한 정서와 방학 일을 당 한 소학생의 작약적(雀躍的) 희열로써 하나님께 감사한 기도를 올리고 휴회하였다. 


이 성경은 개역 과정을 거쳐 지금 한국 교회가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성경의 모체가 되었다. 로스역과 이수정역, 그리고 성경번역 위원회의 한글 성경은 초기 한국 기독교의 특징을‘성경 기독교’로 자리 잡게 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또한 한글 성경의 번역 과정을 통해서 한글의 가치 또한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사진 - 초기 성서번역위원회 모습 / 신약전셔[1900]와 신약젼셔[1911])




기독교는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늦은 시기에 한국에 들어왔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해외선교를 주도하던 기관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얻은 해외선교 방법과 경험을 최대한 살려 한국의 선교 현장에 적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의 경험, 특히 중국이나 인도, 일본 등에서의 경험과 노하우는 한국 선교에 있어서 오히려 한국적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사실은 1905년의 ‘대한 예수교회’ 논의를 통해 단적으로 드러난다. ‘대한예수교회’는 본국 교회의 영향을 직접 받지 않고 교파의 구별도 없는, 독립적인 현지의 토착적 교회를 의미했다. 그 경위는 대개 다음과 같이 알려져 있다.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일찍이 1905년 6월 25일에 서울에서 한 위원회를 조직하고, 남장로교 선교부의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이눌서)의 동의를 만장일치로 가결한 바가 있었다. 그 동의에 의하면“이제 때가 성숙하였으니, 하나의 민족교회를 창설하여 그 이름을‘한국기독교회’로 하리라”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기운에 밀려서‘선교사연합공의회’(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에 서도 복음주의적 단일한 한국교회의 설립을 기필코 성사시킨다는 목표를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사항이 보완돼야 한다. 첫째는 하나의 민 족교회 창설 동의가 레이놀즈에 의해 처음 발의된 것 같은 인상에 대 한 것이다. 하지만 단일 현지교회 설립에 대한 논의가 갑작스럽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가능한 빨리 자립, 자전, 자치의 현지 교회를 설립하는 것’(establishing a self-support, self-propagating, and self-governing native church)이 해외선교의 최종적인 목표라는 것은 당시 세계적으로 공통된 견해였다. 각 지역의 현지 교회가 신속하게 스스로 모든 운영의 주체가 돼야 하고, 선교의 대상이 아니라 선교의 주체로 거듭나야 하며, 또한 교회의 내외적인 모든 문제를 스스로 처리해야 하는 독립적이고 토착적인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해외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적인 대명제로서의 해외선교의 목적과 함께, 한 국에서 일정기간 동안 활동했던 초기 선교사들은 대부분 실제 한국에 서 첨예한 교파의 구별이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깨닫게 됐다. 이런 생 각은 한국의 선교사들이 처음부터 확실하게 느낀 바였다. 따라서 선 교사들은 한국에서 교파를 강조하기 보다는, 현지의 상황에 주목해 협력과 일치를 위한 선교 방법을 공동으로 추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남달리 각별하게 지냈던 장로회 선교부들의 공의회 (Council of Presbyterian Missions in Korea)에서는 장로회만의 단일 교회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해외선교의 궁극적 목적인‘단일 현지교회의 설립’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또, 장로회 소속의 선교사들 가운데서 도 단일 한국장로교회의 설립보다는 다른 교파들도 함께 참여하는 일치된 단일 한국교회의 설립을 원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런 상황 속 에서 미북장로회 한국선교 20주년 기념식이 개최됐는데, 여기에서 다 음과 같은 의견이 나왔다. 


"저에게는 기독교 가정, 기독교 사회, 기독교 지도자, 기독교 영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끌고, 관리하며 영향을 주는 능력 있는 하나의 조직교회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 훈련되고 철저하게 성별 된 현지 목회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그리고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은 하나로 연합된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제안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거쳐 1905년‘대한예수교 회’의 설립에 대한 견해가 모아졌다. 당시 150여 명의 선교사들이 모 여 한국 단일교회 설립 안에 찬성했다는 것은 이러한‘꿈’에 대한 열 의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준다.‘대한예수교회’에 대한 논의는 국 내에서 커다란 가능성을 확신하며 전개됐고, 해외선교 현장으로 널리 전해졌다.


그 다음으로 보완되어야 할 것은 단일교회의 명칭이다. 당시 선교사들이 회의를 통해 결정한 한국의 단일교회는‘한국기독교회’가 아 니라‘대한예수교회’였다. 이는 단일교회 설립을 위해 구성된‘재 한개신교선교부공의회’(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통해 결정된 공식적인 한글 명칭이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선교부공의회의 목적이‘복음주의적 한국 단일교 회의 설립’이라는 점이다. 여기서‘복음주의적’이라고 해석되는 ‘evangelical’이라는 단어는 당시 개신교를 의미하는‘Protestant’를 지칭하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개념이었다. 


하지만 교파의 구별이 없는 한국 단일교회‘대한예수교회’를 설립 하려는 강력한 의지의‘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장로회 독노회가 창설되기 이전에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는 점과 장로회와 감리회가 역사적으로 서로 달랐다는 점, 그리고 여러 교파의 해외선교 시스템 상 현실성이 없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 한 원인은‘자립, 자전, 자치의 토착교회’에 대한 해외선교본부의 입 장과 현지 선교사들의 입장이 달랐다는 점이었다. 


즉, 목적은 같았지만 그 목적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랐던 것이다. 해 외선교본부의 입장에서는 한국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있었던 비슷한 시도와 그 결과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있었다. 인도, 중국, 일본 등 의 아시아 지역을 포함해서 기타 다른 지역에서 설립된 토착교회의 경우, 기독교로서의 정체성 자체가 문제시되기도 하는 상황이었기 때 문이다. 그런 견해는 다음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렇게 ‘대한예수교회’의 꿈은 사라져 가고 말았다. 


"특정 교파에서 훈련 받은 선교사는 해외선교 현장에서 교파적 특성을 그대로 답습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쉬운 경향이 있다. 그러나 좀 더 명확하게 각 기독교 공동체가 저들을 위해 결정하는 사안에 대한 자율적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또한 거기에 놓여있는 위험들 을 무시할 수도 없다. 이는 때때로 심각한 걱정의 원인이 된다. 일본 의 교회, 중국의 교회, 인도의 교회들이 복음적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라면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 건전성에 대해 누가 판단할 수 있겠는가?"


교파의 구별이 없는 독립적인 단일교회로 구상된‘대한예수교 회’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1905년‘재한개신교선교부공의회’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가 조 직됐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논의는 그해 6월에 있었던 미북감리회 총 회에서 시작됐다. 감리회 선교사들은 다른 선교부 소속의 선교사들을 초청해 한국 선교를 위한 연합의 문제를 상세하게 다룰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당시 한국 기독교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지만, 그 에 비해 개별 선교부의 입장에서는 인력과 재정이 충분하게 확보되지 못해 한국 기독교의 빠른 성장 속도를 감당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미북감리회 총회 석상에서는 미북장로회의 베어드(William. M. Baird, 배위량)가 연설을 통해 경신학교와 배재학당이 연합해 전국 최고 수준의 교육기관으로 발전한 사실을 앞세워 교육 사업에 있어 연합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또한 감리회 부인병원을 책임지고 있었던 의사 커틀러(Mary M. Cutler, 거달리)는 새 병원을 짓기 위한 계획을 설명하면서 연합을 통해 최선의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음을 밝혔다. 이화학당 책임자였던 힐먼(Mary R. Hillman)도 학교의 시설 확충과 운영을 위해 장로회와 협력할 것을 주장했다. 다른 선교사들도 이들의 주장에 적극 동조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미북감리회 총회는 구체적 으로 연합사업을 추진할 위원들을 선출하고 장로회 측과 회담에 들어 갔다. 


준비는 발빠르게 진행됐다. 총회 직후인 6월 26일 벙커(Dalziel A. Bunker, 방거)의 집에 장로회와 감리회 선교사들이 모여 앞으로 진행 될 연합사업의 목표를 설정했다. 이때 결의된 내용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한국에 단일 개신교회를 만들며 그 이름을‘대한예수교회’라고 한다는 것이었고. 이는「1905년‘대한예수 교회’논의」라는 글에서 자세하게 살펴본 바 있다. 둘째는 기독교 세력들이 각종 선교 사업을 하는데 있어 힘을 합한다는 것이었다. 이 자 리에서 연합에 대한 분위기가 고조돼 여러 가지 새로운 안건들이 나 오는 가운데 스크랜턴은 이런 일들을 위해‘개신교선교부공의회’ (Council of Protestant Missions)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선교사들은 연합 사업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감리회와 장로회의 연합 위원회를 구성하는 한편, 모든 개신교 선교사들이 모이는 집회를 열기로 결의했다. 이 전체 집회는 준비기간을 거쳐 9월 11일 저녁 이화학당 예배당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언더우드 (Horace G. Underwood, 원두우)가 집회의 회장으로, 벙커가 총무로 선출됐다. 이어진 발표와 토론 시간에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시란돈)은 '복음적 선교부 공의회'(Evangelical Council of Missions)를 결성하자고 동의했다. 이 동의안이 받아들여져 참석했던 선교사들이 회원이 되는 형식으로 즉석에서 공의회가 결성됐다. 언더우드와 벙커 는 계속해서 그 직을 맡기로 하고 이 새로운 조직을 위한 회칙과 규정 들을 정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협의회를 중심으로 우선 단일교회 설립을 위한 교리문제를 포함한 제도상의 일치를 논의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크고 작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됐다. 결국 1910년에는‘한국에서 하나로 조직된 교회가 취할 완벽한 정치체제를 제시하기보다는, 실제적인 면에서 가능 한 것부터 조화를 추구해 나감으로써 우리 교회생활을 정착시키고 우리가 취하고 있는 초교파적 협력관계에 있어서 야기될 수도 있는 마찰의 요인을 제거하는 데 즉각적인 효력을 얻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로써 단일교회의 설립은 사실상 포기 단 계에 들어섰고, 1911년에는 기구의 명칭도‘재한개신교선교부연합공의회’(Federal Council of Protestant Missions)로 바뀌었다.  


비록 단일교회 설립을 위한 교파 사이의 일치는 실패로 끝이 났지 만,‘재한개신교선교부공의회’는 각종 선교 사업에서 연합활동을 추진, 한국 에큐메니칼운동의 실질적인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 구체적 인 내용은 다음 글에 잘 요약돼 있다. 


"서울에서는 감리교의 배재학교와 장로교의 경신학교가 합동 운영 을 모색하였고, 세브란스병원과 의학교도 연합 기관이 되었으며, 초 교파 신학교로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이 설립되었다. 평양에서도 두 교 회 연합으로 숭실학교와 숭의여학교를 운영하였고, 감리교 병원이 던 기홀병원도 연합병원이 되었다. 그리고 감리교의 찬미가와 장로교 의 찬양가가 합하여 찬숑가가 되었고, 장로교의 그리스도신문과 감리 교의 그리스도인회보가 통합되었고, 선교사들의 영문잡지인 감리교 의 The Korea Methodist와 장로교의 The Korea Field도 합하여 The Korea Mission Field가 되었다."


우선 교육 사업에서의 연합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교육 사업 은 특히 고등교육사업에 있어서 연합이 필수적이었다. 여기에 나타나 지는 않지만, 연희전문학교의 경우 미북장로회 차원의 대학으로 설립 될 수 없는 상황에서 미북감리회, 미남감리회가 연합하여 학교를 시 작했고, 이후 미남장로회와 캐나다 장로회가 인력과 재정을 연합하여 높은 수준의 학교로 발전할 수 있었다. 


특히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의 경우에는, 이미 평양 장로회신학교가 장로회 선교부 연합으로 운영되고 있고 또 감리교협성신학교가 감리회 선교부 연합으로 운영되는 상황에서, 평신도를 위한 새로운 신학교육기관으로 설립돼 당시 교계에서 요구되는 다양한 영역의 지도자 들을 배출했다. 재한개신교선교부공의회는 이 피어선기념성경학원에 서 많은 모임을 가졌다. 그밖에 의료 사업을 포함한 대부분의 연합사업에 있어 재한개신교선교부의 공헌은 매우 컸다. 그러나 이 협의회 의는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일제 치하라는 특수한 현실 속에서 선교사들과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입장은 서로 달랐다. 우선 한국의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견해에 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선교사 중심의 연합기구가 구체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사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교회의 내외적인 변화에 걸맞게 1918년 한국교회인 장로교회 와 두 개의 감리교회가‘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Korean Church Federal Council)를 구성한다. 이는 선교사가 아닌 한국교회가 중심이 된 교회협의회였다. 이로써 한국교회가 교회일치운동의 새로운 주체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와 재한개신교선교부연합 공의회가 공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에큐메니칼 기구의 일원화에 대 한 요구가 대두됐다. 결국 1922년부터 통합 논의가 적극 추진됨으로 써 1924년 9월 24일에는 새문안교회에서‘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Korean National Christian Council)가 창설된다.  


(사진 - 1901년 구리개 제중원에서 개최된 장로교공의회 모습. / 1910년 경 확정된 한반도 선교구역분할협정 지도)




소래교회 (松川敎會) 

우리나라에 기독교 전래가 이루어진 것은 1884년 가을 미국 선교 사이자 의사인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n, 안련)이 도착하면서부터였다. 그러면 처음 세워진 교회는 어떤 교회였을까? 그것은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인 소래(솔래)교회다. 마을의 이름은 원래 소나무 샘을 뜻하는 솔샘(松泉)어었으나, 소나무 내라는 의미의 솔내(松川)에서 마지막 소래로 바뀌었다.


기독교가 전파될 때 이 마을에는 약 70 가구가 살고 있었다. 원래 우리나라 전통 촌락은 한 성을 가진 사람들이 집성촌을 이루는데, 이 마을은 여러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독특한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 1870년대부터 이주한 서씨 가문이 소래에 기독교를 전파한 사람들이다. 


서상륜이라는 사람이 그의 동생 서경조와 함께 1878년 만주 영구라는 곳에 가서 행상을 하다가 열병에 걸려 눕게 됐다. 그런데 마침 만 주에 와 있던 스코틀랜드 선교사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마륵태) 에게 치료를 받고 나았다. 그 후 존 로스(John Ross, 나약한)를 만나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함께 세례를 받은 이응찬, 백홍준, 김진기 등과 선교사들이 함께 성경을 번역, 1883년에 한글성경을 간행하게 된 다. 이들은 이 성경을 가지고 국내에 들어와 전도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국경 검문소에서 발각돼 구사일생으로 한글 성경 열권을 가지고 도망했다. 


그래서 피신한 곳이 바로 황해도 소래였다. 1884년과 1885년 서상 륜과 서경조의 가족들은 소래로 이주했고, 1884년 가을부터 소래에서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소래에 최초의 한국인 기 독교 공동체, 예배 공동체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1885년 9월에는 언더우드 목사가 소래를 방문하여 세례를 베풀었다.


소래교회의 예배당은 전통 한옥을 한 채 사용했다. 구조를 전혀 변경하지 않은 전통한옥 이었다. 다만 지붕 꼭대기에 십자가를 달아 이 곳이 교회당임을 표시했다. 소래는 한국을 방문한 선교사들에게 놀라 운 기독교의 발상지가 됐고, 선교 초기의 한국 선교사들은 의례 이곳을 방문했다. 미북장로회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 동아기독교를 설립한 캐나다 사람 펜윅(Malcolm C. Fenwick, 편위익), 그리고 캐나다 사람으로 소래에서 사역하다가 순교한 매켄지(William J. McKenzie, 매견시) 등이 소래를 떠나지 않고 교회를 짓고 생활하였다. 고독과 외로움에 맥켄지 선교사는 세상을 떠났고, 그 후 한국을 찾아온 선교사들은 소래에 들러 소래교회와 맥켄지의 집을 방문했다. 


소래는 지역교회의 거점이 됐다. 그래서 장연 부근의 송화 은율 풍천 문화 해주 옹진 등지에 수십개의 교회가 연달아 세워졌다. 1902년에는 해서교안 사건이 일어나 소래 일대의 교회들이 박해를 당하기도 했다. 해서교안은 기독교보다 백여년 먼저 들어와 있었던 천주교회가 기독교 의 급속한 부흥을 시기하고 프랑스 신부들의 위세에 기대 황해도 일대 기독교도들을 습격하고 교회당을 탈취하려 시도한 사건이었다. 황해도 일대 교회들이 처했던 이러한 위기는 언더우드에게 연락이 됐고, 그를 통해 정부에 호소해 정부의 개입으로 진압될 수 있었다. 1907년 평양신 학교를 졸업한 서상륜이 소래교회의 초대 목사가 됐고, 그 후 서울에 올라와 언더우드와 함께 새문안교회의 동사 목사가 되었다. 서경조 이후 에는 김두헌 목사, 장응곤 목사 그리고 허간 목사 등이 시무하였다. 소래교회는 한국 기독교의 요람으로 알려져 있다.


새문안교회 

새문안교회는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서울노회에 소속된 교회이다. 종로구 신문로 1가에 있던 초대 정동지역 선교부에 가깝게 위치해 있다. 사실 한국 개신교에서는 최초의 조직교회라고 할 수 있다. 1897년 9월 27일 미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가 서상륜, 백홍준 등 한국인 장로들과 교회를 시작했다. 그날은 주일이 아니고 화요일 이었다. 첫 교인들은 모두 14명이었다. 그중 13명은 이미 매서인 서상륜에 의해서 기독교 신앙에 입문해 있는 사람들이었다.  


새문안교회의 태동은 만주 주재 영국성서공회 선교사들과 한국인 매서인들, 그리고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 등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새문안교회는 원래 정동장로교회 또는 서대문장로교회라 불렸으나, 위치한 곳이 새문(新門 敦義門) 안쪽이었기 때문에 새문안 (新門內)교회가 되었다. 


원래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가 사택으로 구입한 정승 강노의 집에 사랑채를 열어 시작했다. 한옥의 사랑채를 개방한 가정교회였던 것이 다. 그리고 그 집에서 1886년 7월에 노도사라는 언더우드의 한국어 교사가 세례를 받기도 했다. 초기의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 목사에게 부과된 일이 너무 많아 교회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 1886년 고아를 데려다가 가르치기 시작한 구세학당에서 발전하여 경신학교가 됐고, 그것을 기초로 현재의 연세대학교로 이어지는 교육 사업이 시작 됐다. 이러한 학교의 발전과 함께 새문안교회도 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경건운동인 사경회도 새문안교회에서 시작됐 다. 철저한 하나님의 말씀 중심인 장로회의 전통에 따라 1890년 다함께 성경을 읽는 사경회가 처음 시작됐다. 1892년에는 새문안교회 교인뿐 아니라 전국에서 상경한 사람들을 모아 사경회를 개최했다. 모두 16인이 모여 들었는데, 이들은 준사역자 수준의 성경연구와 교리 문답에 이를 만큼 수준 높은 성경공부를 했다. 


새문안교회의 건축은 1895년에 시작됐다. 기퍼드(Daniel. L. Gifford)와 홍정후가 건축 책임을 맡았고, 교인들의 노동과 헌신으로 한옥예배당을 준공했다. 당시 한국인의 월급이 4달러였는데, 교인들은 모두 250달러를 건축 헌금으로 냈다. 건물이 완공되고 나자 새문안교회는 서울 전역에 18개소의 성서강습소를 개설해 선교활동에 나 섰고, 매 주일마다 35개소에서 40개소에 이르는 곳에 집회소를 설치 하고 정규적인 강습회를 열었다. 그렇게 해서 서쪽으로 서교동교회 김포교회 등 교세의 지속적인 확장이 이루어졌고, 남쪽으로는 영등포교회 시흥교회 등으로 확장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성장한 새문안교회는 1907년에 이르면 교세가 600명에 이르게 된다. 빠른 교회 성장으로 예배당이 협소해져 1907년 현 경희궁 옆에 교회 터를 새로 잡고 교회를 건축하게 됐다. 1901년 5월 22일 새로운 예배당이 준공됐다. 장식을 극도로 줄인, 칼빈주의적 신학이 강조된 절제된 건축미의 예배당이었다. 


1910년 서경조 목사가 언더우드의 전도목사로 새문안교회에 부임 했고 1911년에 언더우드의 동사 목사가 됐다. 1911년 평북에서 차재명을 조사로 초빙했는데, 이것은 새문안교회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서북과의 깊은 연고 때문이었다. 차재명은 1920년에 새문안교회의 시무목사가 됐다. 한국인 목사가 부임하면서 교회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되어 주일학교, 면려회, 여전도회, 유치원, 찬양대 등의 활동이 활발해 졌다. 서울 안에 있는 서북계열의 교회로서, 1930년대 중반 서울 지역 교역자들과 서북계가 대립하는 경중노회 사건에 새문안교회가 연관 되기도 했다. 


해방 후 새문안교회는 한국교회의 어머니 교회로서 역할을 충분히 해 왔다. 남부대회 장소로 새문안교회가 제공됐고, 한국전쟁의 와중 속에서도 교회는 부흥했다. 1955년부터 강신명 목사가 취임하여 1981 년 퇴임할 때까지 크게 발전했고, 이후에도 한국교회의 모교회로서 위상을 잃지 않고 그 역할을 감당해 오고 있다. 


정동제일감리교회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첫 번째 설립된 조직교회 정동제일교회 는 1887년 10월 9일 최초의 미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아편설라)가 서울 중구 정동의 현재 자리에서 시작했다. 아펜젤러는 1885년 기독교 학교이자 한국인의 숙원이던 근대식 교육 기관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887년에는 교회를 설립 했다. 장로교회가 한옥교회가 많았던 것과는 달리, 감리교회는 서구식 양식으로 교회를 건축했다. 정동제일교회는 서구식 건축이자 최초의 감리교회 예배당이었다. 교회 근처에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있었기 때문에 초창기부터 성장할 수 있었다.  


정동제일교회는 구한국의 근대화 요구에 부응하는 선교를 펼쳤다. 개화운동과 반일민족독립운동, 그리고 복음전도를 함께 해 나갔던 것 이다. 그래서 정동제일교회는 개화와 민족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운동 단체인 독립협회를 설립한 것은 갑신정변으로 피신했다가 1895년 귀국한 서재필이었다. 그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집에 기숙했기 때문에 정동제일교회나 배재학당과 깊은 관련을 가지게 됐다. 1896년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간행했을 때, 그 인쇄소는 배재학당 지하의 삼문인쇄소였다. 또 같은 해부터 서재필은 배재학당에서 세계지리, 역사학, 정치학 등을 강의했다.


1896년 배재학당에는 협성회라는 조직이 구성돼 민주주의에 대한 토론과 교육이 이루어졌는데, 그 중심 인물은 노병선, 이승만, 신흥우 등 정동제일교회의 청년들이었다. 이처럼 개혁적인 인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청년회는 외부의 수구적인 세력들로부터 위협과 압력을 받았다. 그 결과 1905년에는 을사조약 반대운동으로 인해 청년회가 해산 되기도 했다. 


1895년에 예배당 건축을 시작해 1897년 완성됐다. 고전적 고딕 양 식을 재해석한 양식의 간결한 디자인으로, 강단이 정서쪽을 향하도록 건축됐다. 12월 26일에 봉헌된 이 건물은 명동성당과 함께 서울의 명 소가 됐다. 


초기 신도들 중 이화학당 학생이나 관계자들이 많아 정동교회는 한국 초기 여성운동의 중심지가 됐다. 여성 신도들은 청년회를 통해 축첩반대, 조혼반대, 여아 매매 금지, 여성교육의 장려 등 여성의 의식 개혁과 구습타파에 앞장섰다. 


정동교회의 성가대는 그 수준이 최고였는데, 그 이유는 성가대원들 이 대개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의 학생들이인 데다가, 지휘자도 연희전 문이나 이화여전의 음악과 학생들이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에는 이 화여전의 음악과장인 영(Mary E. Young, 미리영)이 지휘를 맡아 성가 대의 황금시대를 열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정동교회의 담임 이필주 목사가 민족대표 33인중의 하나였고, 박동완 장로도 33인 중에 하나였다. 소속 목사인 김진호 목사와 정득성 장로도 3.1 운동에 크게 기여한 인물 이었다. 교회 청년 홍호는 독립신문이라는 전단지를 만들어 독립에 관한 소식과 독립운동 상황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렇게 독립운동에 대거 참여함에 따라 여러 명의 교인이 수감됐고, 일제의 감시가 심해 져 1919년 가을까지 저녁집회를 중지해야 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감리교회가 재건파와 부흥파로 갈라지는 분 열을 겪었지만, 정동교회는 모교회로서 위치를 지키며 두 파가 1949년 정동교회에서 합동총회를 열도록 함으로써 교단의 일치를 선도했 다. 한국전쟁 중에는 폭격으로 예배당이 파괴되는 큰 손실을 입었다. 1976년 첫 예배당이 사적 제256호로 지정돼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고 1979년 4월 15일 봉헌했다. 정동교회는 지금도 국내 및 해외선교 그리고 방송, 교도소, 직장인 등 한국사회 내에서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진 - 한국 최초의 자생적 교회이자 한옥예배당인 황해도 장연의 소래교회 / 한국의 첫 서양식 개신교 종교건축인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 /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


 



세계 교회사를 통해 볼 때 그리스도교는 세 개의 큰 물줄기를 형성 해 왔다.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정교회,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그것이 다. 초대교회에서는 로마,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 노플 등의 다섯 교회가 중심교회로서 리더십을 행사했다. 교회는 지 역에 따라 다양한 신학적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 서 일체감을 형성했다. 이 중 로마교회는 로마제국의 중심지에 있어 주도적인 위치를 점해갔고, 결국 로마 가톨릭교회로 발전해 간다. 그 러나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중심으로 한 로마제국의 동쪽에 있었던 여러 교회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는 다른 신학과 전통을 발전시켜 나 갔고, 결국 1054년 동방정교회로 분열하고 말았다.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 기독교(Protestant)가 갈라져 나 가면서 그리스도교는 세 개의 큰 전통을 형성해 나갔던 것이다. 


현재 기독교 안에는 현재 다양한 교파가 존재하고 있다. 이는 각 시대마다 다양한 신앙운동이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종교개혁으로 루터 파와 개혁파가 형성된 것처럼, 영적 부흥과 성화를 중시하는 영국의 성공회 신자들을 중심으로 감리교가 형성됐다. 또한 감리교 내에서는 성결을 강조하는 성결교가 태동했다. 이처럼 기독교는 다양한 영적 흐름을 대변하고 생동감 있는 변화들을 만들어갈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는 반면, 교파분열에는 취약한 구조 또한 내포하고 있다. 기독교 는 각 개인의 성서해석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효과적인 리더십이 없기 때문에, 다양한 교파가 형성될 수 있었다. 기독교의 이같은 다양한 교파와 교회분열 때문에, 교회사에서는 성서의 가르침으로 모든 교회가 하나될 것을 주장했던 미국의 환원운동 (Restoration movement)이나 교회의 가시적 일치와 연합운동을 주도 하는 에큐메니칼운동이 나타나기도 했다.


한국교회의 다양한 교파는 미국에서 전해졌다. 한국교회는 그 시작부터 교파교회로 출발했다. 각기 교파적 배경을 달리하는 선교사들이 자신들이 속한 교파를 이 땅에 이식한 것이다. 이는 한국교회가 하나 의 교회가 아니라 여러 교파로 분열된 가운데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 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연합운동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서구 선교사들 중에는 미국 선교사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알렌 (Horace N. Allen, 안련)이 입국한 1884년 가을부터 선교사들이 강제 출국으로 조선을 완전히 떠난 1942년 여름까지 약 60년 동안, 1,500 명이 넘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입국했고, 이들 중 미국 선교사들은 약 70%를 차지하고 있다. 교파별로는 장로회(45.4%), 감리회(28.3%)가 다른 교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선교사 인력을 갖고 있었다. 이는 한국교회의 지형도가 처음부터 장로회와 감리회 중심으로 고착화될 가능성이 컸다는 것을 말해 준다. 또 초기의 연합활동 역시 장로회와 감리회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후발주자로 한국 선교에 나섰던 다른 교파들은 한국 선교의 주도권을 미국의 장감선교사들에게 빼앗기고 말았으며, 연합활동에서도 배제되고 있었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연합활동을 펼쳤다. 이는 선교 초기라는 시 대적 상황을 통해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선교사들 입장에서 한국 은 개척해 나가야 할 광야와도 같았고 선교사들의 인력은 절대 부족 했기 때문에, 선교적인 협력은 불가피했다. 한국에는 서양 사람들도 많지 않아 이들은 자연스럽게 함께 교제하며 협력했다. 여기에 서구 개신교 선교운동에 나타난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와 초교파주의 (inter-denominationalism) 등의 영향도 컸다. 


선교사들의 연합활동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것은 한국에 교파와 상 관없는 하나의 개신교회를 설립하고자 했던 노력이다. 1905년에 장로회 4개 선교부(미국 남·북 장로회, 캐나다장로회, 호주장로회), 감 리회의 2개 선교부(미북감리회, 미남감리회)가 함께 재한개신교선교 부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 in Korea)를 결성했는데, 이 연합공의회는 향후 한국에 하나 된 기독교 회를 설립할 것을 표방했다. 이 하나 된 기독교회는‘하나의 토착 복 음주의 교회’(one native evangelical Church)로서 교회 이름도 ‘대한 예수교회’ ‘그리스도교회’(Church of Christ)가 언급됐다. 이들의 꿈 이 실현됐다면 한국에는 장로회와 감리회가 하나된 연합교회가 설립 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선교사들을 한국까지 파견했던 각 선교부로서는 이에 찬성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한 재한 선교사들도 모두 뜻을 같이하지는 않았다. 한국에서도 이를 주도할만한 리더십이 없었기 때문에 단일교회 설립은 한국교회사의 이상(理想)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공의회는 다양한 연합활동을 추진함으로써 연합운동의 효시가 됐다. 이미 오래전부터 추진돼 오던 성경번역과‘조선성교서 회’를 통한 문서사업은 물론이고 몇 가지 정기간행물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The Korea Mission Field(1905),「그리스도신문」(1906),『찬숑 가』(1908) 등의 통합·발간이 그것이다.


초기 선교사들의 주목할 만한 두 번째 연합활동은 장감 선교부를 통해 이루어졌던 선교지 분할이다(comity arrangement). 분할협정은 1892년 미북감리회와 미북장로회 사이에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협정 의 내용은, 5천 명 인구가 사는 개항장과 도시는 양 선교부가 공동으로 점유하고, 5천명 이하일 때는 도시에 이미 지부를 설립한 선교부가 점유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었다. 또 교파를 이적할 때는 소속 교회의 추천서를 받아야 하는 등 8개 항에 합의했다. 이 협정이 1893년 8월에 열린 미북감리회 선교연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후 두 선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선교회들 사이에서도 선교지 분할의 기본 원칙으로 인식됐다. 선교지 분할로 인해서 선교부의 중복투자와 경 쟁은 상당부분 사라지게 됐다. 그러나 장감 이외의 교파는 이 선교협 정에 참여하지 못해 후발주자나 군소교파들은 이 협정을 ‘빅 투(big two)의 선교 담합’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었다. 


세 번째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모체인 조선예수교연합 공의회(1924)이다. 이는 일종의 교회연합 기구로서 한국의 장로회, 감 리회뿐만 아니라 4개 장로회 선교부, 2개 감리회 선교부, 그리고 대영 성서공회와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등이 참여했다. 이 공의회는 각 교파의 정체성과 교리적인 문제에 절대 관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이는 각 교파의 신학을 인정하면서 교회의 연합과 협력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후에 한국기독교교회 협의회(NCCK)로 발전했고, 오늘날까지 한국 개신교 교회일치운동의 중심기구로 유지되고 있으며 에큐메니칼 운동과 사회참여 신학을 중 시하고 있다. 


교파교회 성격이 강한 한국교회에서 선교사들의 연합활동은 한국 교회의 소중한 역사적 자산이다. 복음전도와 연합활동에 서로 협력했던 이들의 소중한 유산은 한국교회에 계승 발전돼야 한다. 오늘날 한 국교회의 교파 이기주의, 또한 이를 넘어서는 개교회주의는 한국교회 전체의 건강성을 생각할 때 사라져야 할 유산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지 적하고 싶은 것은, 선교사들의 연합활동이 장로회와 감리회를 중심으 로 이루어지면서 후발 주자들에게는 하나의 선교상의 장애물이 되기 도 했다는 점이다. 또한 장로회와 감리회가 단일교회를 형성하려 했 던 것은 바람직한 것으로 보이나, 이것이 실현됐다면 교회의 발전과 성장에 반드시 긍정적이었으리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서구교회에서 여러 교파나 교회가 연합한 후 오히려 교회성장 면에서는 쇠퇴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연합활동은 다양성의 일치 속에서 성숙하 게 그리고 역사적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것이 중요하는 것이다.  


(사진 - 첫 내한선교사회의 모습[1893] / 한국기독교연합회()KNCC)의 제11회 총회 모습[승동교회, 1957])



19세기 말 이후 외국인 선교사들이 활동했던 전국 주요 도시의 선교 거점(station)에는 그들의 묘역이 조성돼 있다. 


먼저 서울의 경우, 양화진에 그 묘역이 조성돼 있다. 전철 2호선 합 정역 7번 출구로 나와 양화진길로 200m 정도 들어가면 깔끔하게 단장된 외국인 공동묘지(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145-8)가 보인다. 묘지 의 총 면적은 13,224㎡ 이다. 여기에 안장된 외국인은 417명이며, 이 중 선교사(가족 포함)는 145명이다. 


이 묘지는 미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내한해 헌신적으로 활동하다 전염성 이질에 걸려 죽은 헤론(John W. Heron, 혜론)이 1890년 7월 이 곳에 묻히면서 시작되었다. 헤론이 죽자 당시 서울의 외국인들은 묘 지를 요구했고, 조선 정부는 이곳 약 280평을 매입하여 외국인묘역으로 조성했다. 일제 말 선교사들의 강제 출국으로 묘역이 방치되다가, 6.25 전쟁 중에는 묘비에 총탄 자국이 생겨 비문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더욱 황폐화됐다. 그러다가 1985년‘100주년기업사업협의회’가 이곳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면서 성역으로 재탄생했다. 이 묘역의 명칭은 양화진외인묘지(楊花津外人墓地), 경성구미인묘지(京城歐美人墓 地), 서울외국인묘지공원 등으로 변경되다가 2006년 5월 현재의 명칭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묘역 안에는 2005년 100주년기념교회가 설립 돼 묘역 관리 및 운영을 맡고 있다.


부산과 경남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호주 선교사들은 지난 2010년 10월 문을 연 창원시 창원공원묘원 내에 있는‘경남선교 120주년 기 념관’바로 옆‘순직 호주 선교사묘원’에 묻혀 있다. 2009년 조성 된 묘원에는 모두 8명의 선교사 기념비와 함께 경남 출신의 순교자 인 주기철·손양원 목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8명의 선교사는 데이 비스(Joseph H. Davies, 덕배시, 1890, 부산), 맥케이 부인(James H. Mackay, 1892, 부산), 아담슨 부인(Mrs. Andrew Adamson, 1895, 부 산), 라이트 부인(Mrs. Albert C. Wright, 1927, 진주), 알렌(Arthur W. Allen, 안란, 1932, 진주), 네피어((Miss Gertrude Napier, 남성진, 1936, 진주), 테일러(William Taylor, 위대연, 1938, 진주), 맥피((Miss Ida McPhee, 1912, 미희) 등이다. 


대구선교사묘역인‘은혜의 정원’(Garden of Mercy)은 대구 동산병원 구내에 있다. 원래 동산병원 동쪽 지금의 제일교회 담 밑에 방치돼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재정비한 것이다.‘은혜의 정원’에는 현재 12개의 묘석(墓石)이 자리 잡고 있는데, 모두 대구·경북 지방에서 활동한 선교사와 그 자녀들이다. 


그 중 몇 명만 살펴보면, 앞 줄 맨 왼쪽의 마르다 브루엔(Martha S. Bruen, 부마태)은 헨리 브루엔(Henry M. Bruen, 부해리)의 부인으로 1902년 남편과 함께 대구에 부임하여 신명여학교를 설립하는 등 여성 교육과 여성선교에 헌신하다가 1930년 10월 20일 55세를 일기로 운 명했다. 앞줄 가운데 누워 있는 스와이처(Martha Switzer, 성마리태)는 독신 여성선교사로 1911년 대구에 와서 신명여학교 교사로 활동 하다가 1929년 과로로 별세했다. 그 앞의 도우슨(John Dawson) 무덤 은 이 묘역에서 가장 최근인 2008년 11월 11일에 조성됐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동산병원 외과 과장을 지낸 도우슨은 지난 2007년 2월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60년 의사 생활 중 한국에서의 시절이 가장 행복했었다고 유언했다. 뒷줄에는 대구스테이션을 개척한 아담스 (James E. Adams, 안의와)의 부인 넬리 딕(Nellie Dick Adams, 탁넬리)의 무덤이 있다. 1866년생인 그녀는 1895년 3개월 된 아들 에드워 드(Edward A. Adams, 안두화)를 안고 태평양을 건너와 남편과 함께 초창기 대구스테이션의 아동·여성 선교에 헌신했다. 1909년 10월 31 일 넷째아이 유산 후유증으로 43세의 나이에 운명해 대구에 묻힌 첫 외국인이 됐다. 


충북 청주시 일신여고 구내에는 모두 3개의 묘비와 1개의 기념비 가 나란히 서 있는 묘지 동산이 있다. 그 작은 동산의 맨 왼쪽에 있 는 묘비가 바로 청주 선교의 개척자 밀러의 것이고, 그 다음에는 퍼디 (Jason G. Purdy, 부례선)의 무덤이 있다. 1923년 청주에 부임한 퍼디 는 보은, 옥천, 영동 등 충북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26 년 황간에서 전염병에 걸려 29세의 나이로 순직했다. 세 번째의 작 은 묘비는 1918년부터 1937년까지 20년간 충북 선교에 헌신한 솔타우 (Stanley T. Soltau, 소열도)의 아들 데오도라(Theodora G. Soltau)의 것이다. 그는 1922년 두 살의 나이로 청주에서 사망했다. 


충남 공주시 영명고등학교(충남 공주시 중동 318번지) 강당 뒤편 산 중턱에 조성돼 있는 공주 선교사 묘지에서는 모두 5개의 묘비를 만 나 볼 수 있다. 그 중 가장 큰 것이 샤프(Robert A. Sharp)의 무덤이다. 1903년 내한한 샤프 선교사는 먼저 배재학당과 정동교회에서 일했는 데 그 사이에 여선교사 앨리스(Hammond J. Allice, 사애리시)와 결혼 했다. 1904년 충청구역 책임자로 임명된 그는 1905년 공주로 내려와 공주 최초의 양옥집을 짓고 이주했다. 하지만 1906년 2월 논산지방을 순회 전도하다가 발진티프스에 감염돼 순직했다. 악천후를 피해 잠깐 머물렀던 곳이 바로 상여집이었는데, 그 상여를 만진 것이 감염의 원 인이 된 것이다. 부인의 정성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샤프는 1906년 3 월 15일 34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 이곳에 묻혔다. 샤프의 무덤 외에 나머지는 선교사 2세의 무덤들이다.


‘전주 선교사 묘역’은 전북 전주시 예수병원(전북 전주시 완산구서 원로 68) 맞은편 의학박물관 건물 뒷산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 이곳에는 모두 17기의 무덤이 안장돼 있다. 그 중 입구에 있는 묘비 6개만을 소개하기로 한다. 1892년 미남장로회 첫 선교사로 내한했던 데이비스(Linnie F. Davis, 후에 해리슨 선교사와 결혼)는 전주에서 환자들을 돌보다가 병이 전염돼 1903년 6월 19일 순직했다. 그 옆의 전킨 (William M. Junckin, 전위렴) 역시 남장로교의 처음 선교사로 내한 해 군산에서 사역하다 건강이 악화돼 1904년 전주로 임지를 옮겼지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지방 순회에 몰두하다가 결국 1908년 1 월 운명했다. 전킨 묘비 앞에 있는 조그만 돌 세 개는 어려서 군산에서 사망한 전킨의 세 아들 시드니(Sidney), 프랜시스(Francis), 조지 (George)의 묘비석이다.  


‘미남장로회 광주 선교사 묘지’는 현재 광주광역시 호남신학대학 구내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여기에는 12기의 무덤이 있었는데, 순천과 목포스테이션이 정리되면서 그곳에 있던 묘지들을 지난 1979년 이곳으로 이장(移葬)해 그 규모가 크게 늘어났다. 지금은 순천 에서 온 10개와 목포에서 옮겨진 4개 등을 합해 모두 26기의 무덤이 이곳 묘역에 있다. 그 중 몇 개의 무덤들만 소개하면, 맨 앞 오른쪽에 묻혀 있는 폴 크레인(Paul S. Crane, 1889-1919)은 순천스테이션 소 속 선교사였던 존 크레인(John C. Crane, 구례인)의 동생으로 형보다 2년 늦은 1916년부터 목포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교 3년 만인 1919년 3월 26일 벨(Eugene Bell, 배유지)이 몰던 승용차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오던 중 수원을 지나 병점의 건널목에서 그만 열차와 충돌하는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그 바로 옆의 오웬(Clement C. Owen, 오기원)은 벨과 함께 전남 선교를 개 척한 인물로 1909년 순천 전도에 나섰다가 폐렴에 걸려 42세의 나이로 순직했다. 그는 양림동 동산에 묻힌 첫 선교사이다. 오웬 무덤 옆 에는 1907년 광주에 와서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오랫동안 일했던 그래 함(Ellen I. Graham, 엄언라)이 누워있다. 독신이었던 그녀는 건강이 악화돼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와 소원대로 광주에 묻힐 수 있었다. 그 옆의 브랜드(Louis C. Brand, 부란도)는 1924년 군산을 거쳐 1930년부터 광주제중병원에서 결핵 퇴치 운동을 전개했던 의료 선교사로 결국 자신이 결핵에 걸려 소천했다. 당시 그의 나이 마흔 넷 이었다.


(사진 - 양화진에 처음 안장된 헤론 선교사의 초기 묘원 모습 / 양화진에 세워진 헤론 선교사의 첫 묘비. 한국전쟁 당시 심하게 파손되어 연세대학교로 옮겨지고, 새로운 묘비가 세워졌다. / 양화진 외국인묘지의 두번째 헤론 선교사 묘비. / 청주 탑동 일신여고 구내의 장로교 선교사 묘역 전경)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선교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한국의 지역을 분할하기로 협정을 맺는다. 이를 소위 ‘교계예양’이라고 한다. 선교지 분할협정은 1892년 미북장로회와 미북감리회에 의해 처 음으로 시작되었지만 여기에서는 원론적인 사항들이 논의됐고, 선교 지 분할이 구체적으로 결정된 것은 1893년 장로회연합선교부공의회를 통해서이다. 장로회 공의회가 1월 28일 모여 미남장로회는 충청도 와 전라도를 선교 책임지역으로 맡고, 호주장로회는 경상도 남부지역을 책임지역으로 맡기로 결의한 것이다. 


이후 장로회 공의회는 1898년 캐나다 장로회가 내한했을 때 함경남도의 원산을 양도하면서 함경남북도 전체를 캐나다장로회 선교부가 맡도록 했고, 1909년에는 미북장로회가 부산에서의 모든 사업을 정리 해 호주장로회에 양도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통해 호주장로회는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를 선교 담당구역으로 정했다. 한편 미북감리회와 미남감리회는 서로의 협정을 통해 원산을 미남감리회로 이양하는 등의 조정을 했다. 일단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장로회와 감리회 내 부에서의 교계예양이 정리된 것이다.


이러한 결정이 협의되는 과정에서 한국에 도착한 다른 선교부가 여 럿 있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최초 미북장로회와 미북감리회가 선교지역에 대한 원칙적인 합의를 한 이후, 호주장로회와 미남장로회가 들어와 협의회를 구성하고 교계예양을 결정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영국성공회의 경우는 이러한 논의에 서 제외되기도 했다. 1895년에는 미남감리회 선교부가 한국에 정착했고, 1898년에는 캐나다장로회가 내한했다. 이렇게 여러 교파가 동시 에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전개하면서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뒤늦게 선교 사업에 뛰어든 교파가 불리한 입장에 놓인 것이다. 


"그러다가 남감리교회가 내도하게 되니 지역분쟁이 격심해졌다. 남감리교회는 서울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북장로교회와 북감리교회의 선교지구로 되어있는 황해도에 선교사업을 연장하였다. 그러나 이 충돌은 남감리교회가 황해도 안에서의 사업을 중지함으로서 해결되었다. 남감리회는 송도와 한강이북지역과 아직 미점유지역인 강원도로 진출하였다."


이와 같이 선교지 문제를 놓고 여러 교파가 고심하는 가운데, 또 다른 교파들이 계속 내한했다. 침례회 계통의 엘라딩 기념선교회, 성결교회의 모체인 동양선교회, 구세군, 안식교, 플리머드 형제단 등이 연이어 한국에 들어온 것이다. 좁은 한국 땅에 많은 교단이 복잡하게 난립하여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선교지를 어디로 설정하느냐 하는 것은 선교사들 사 이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고, 자칫 협정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예민한 부분이기도 했다. 이 때 선교지 분할협정을 원만하게 조정하는 일에 재한개신교선교부공의회 가 나섰다. 물론 여기에 직접 참여 하지 않은 교파들도 있었지만, 그들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알아서 할 수 있도록 했다.


재한개신교선교부공의회는 처 음으로 미북장로회와 미북감리회 사이의 평안북도 지역에 대한 협정을 이끌었다. 1905년 평안북도 태천, 희천, 영변 각 군과 박천의 일부 지역을 미북감리회 선교부에 서 맡고, 나머지 지역은 미북장로회에서 맡기로 했다. 1906년에는 이 공의회의 결정으로 미북장로회와 미북감리회 사이에서 평안남도 지역에 대한 선교지 분할협정이 맺어졌다. 이 결정으로 미북감리회는 평남의 진남포, 강서, 용강군과 중화군 일부, 황해도 해주, 서흥, 신계, 곡산, 장단, 청단, 배천을 담당하게 됐다. 나머지 평안북도 지역은 미북장로회에서 맡기로 했다. 


 1907년에는 미북감리회와 미남장로회 사이에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한 협정이 이루어져, 공주를 경계로 북쪽은 미북감리회가, 남쪽은 미남장로회가 담당하게 됐다. 또한 미남감리회 선교부와 미북장로회 선교부 및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 사이가 강원도와 원산에 대한 협정을 맺어, 원산은 미남감리회와 캐나다 장로회가 공동으로 점유하기로 했고, 철원 이북의 강원도는 미남감리회 구역으로, 원주 이남은 미북장로회의 책임 선교구역으로 정했다. 


1908년에는 미남감리회 선교부와 캐나다장로회가 협정을 맺어 미 남감리회는 원산 북부지방을 캐나다 장로회에 넘겨주고 서울에서 송도까지, 그리고 서울에서 원산까지 확정된 지역을 차지했으며, 캐나 다 선교부는 함경남북도 지역을 계속 차지했다. 서울 이남은 미북장로회와 미북감리회, 그리고 미남장로회가 서로 협정을 맺어 충청북도 는 미북장로회가, 충청남도는 미북감리회가, 그리고 전라남북도는 미남장로회가 차지했다. 영남지방에서는 미북장로회 선교부가 경상남 도 동남부와 서남부 지역을 호주선교부에 넘겨준 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경상남도지역과 경상북도 전역을 차지했다. 


교계예양은 1909년 미북감리회와 미북장로회 사이의 협정을 통해 한국에서의 선교지 분할에 관한 전반적인 협의가 마무리되었다. 하지 만 이후 새롭게 선교지가 설정되는 경우에는 경계를 다시 나누는 일 도 있었다. 가령, 1918년 2월 26일에 조직된 장감연합협의회는 국외 선교지역의 경계를 분할해 장로회는 만주, 감리회는 시베리아 지방을 각각 맡아 선교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미리 정해진 협정을 그대로 인정해 폐지될 때까지 지켰다. 


이렇게 선교부들이 지역을 분할해 선교를 담당함으로써 불필요한 마찰이나 재정낭비를 줄일 수 있었지만, 이 분할규정이 30년 이상 적용되면서 선교부의 배경에 따라 교회의 특성이 형성되는 현상도 나타 나게 됐다. 물론 여기에 동참하지 않은 다른 선교부는 지역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전개하기도 했지만, 교계예양은 해방 이후 지역 갈등과 교회분열의 원천적 원인으로 표면화되기도 했다. 


교계예양이 선교 역량의 낭비를 줄이고 중복으로 인한 마찰을 피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오랜 세월 고착되는 동안 각 지역 사이에서 독특한 지방색으로 형성돼 이후 지역 갈등이나 차별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것은 교계예양이 선교의 편의에 의한 임시적인 구분이어야 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또 교계예양은 전적으로 선교의 주체가 선교 의 대상을 바라보는 과점에서 선교의 객체를 전혀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은 일방적인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도 교계예양의 흔적이 한국교회 곳곳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사진 - 기독교 각 교파 조선포교구역도, 1911)  



조선에서 기독교는 사악한 종교로 규정돼 있었으며, 따라서 엄격하게 금지됐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초기 역사는, 기독교를 금지했던 조 선 정부의 정책 아래서 가톨릭 교인들이 수많은 박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후 조선은 쇄국정책의 빗장을 풀고 문호를 개방한다. 그 과정에서 제한적이긴 하지만 황제의 기독교 선교 윤허가 있었고, 개신교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입국하게 됐다. 


조선이 처음으로 조약을 맺은 국가는 일본이다. 1876년 2월 27일 강화도에서 체결된‘한일수호조규’는 조선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불평등한 조항을 담고 있었다. 이 조약을 통해 한국 영토 내에 일본인들이 거주할 수 있는 빌미가 마련됐으며, 일본은 이 후‘한일수호조규부록’(1876. 8. 24),‘부산항조계조약’(1877. 1. 30), ‘원산진개항예약’(1879. 8. 30),‘원산진


조계협정서’(1881. 8. 4) 등을 잇따라 체결하며 한국 진출의 근거를 마련했다.


한편, 함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조선의 문호 개방을 압박했던 미국 의 전략과 조선에 진출하고자 하는 일본의 독점을 제어하기 위한 중 국의 개입으로, 조선은 미국과 조약을 체결했다. 1882년 5월 22일 체결된 이‘한미수호통상조약’에는 처음으로 외교대표의 서울 상주가 명시됐다. 이어 조선은 중국과도 조약을 체결했다. 1882년 8월 23일 체결된‘한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었다. 이 조약으로 외교대표가 아닌 일반 상인들의 서울 거주가 확정됐다. 


이후 조선은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 벨기에, 덴마크와 연이은 조약을 체결하며 문호개방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조약들을 통해 각국의 공사관이 서울에 설립됐다. 이에 따라 특히 정동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 일대에 외국 외교 대표 관련자들과 일반 상인들이 정착하게 됐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선교사들도 한국에 들어올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고 있었다. 


조선은 이렇게 동서양 제국과 조약을 체결하며 문호를 개방했다. 그리고 동시에 조선도 외교사절단을 파견하기 위해 우선 외국 현지 의 상황을 조사하게 했다. 이를 위해 구성한 파견단 가운데 견미사절 단이 있었다. 이들은 미국 대통령에게 국서를 전달해 양국 사이의 외 교 관계를 공식화하는 동시에, 미국의 정치, 문화, 사회 제도를 살피 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여기에는 고종 황제가 신임하는 민영익을 수 반으로 20대 젊은 인재들이 선발되었다. 


견미사절단 일행은 1883년 7월 제물포를 출발해 9월 미국 샌프란시 스코에 도착했다. 이들은 다시 대륙횡단철도를 타고 시카고와 뉴욕을 거쳐 워싱턴에 도착했다. 이 열차 안에서 사절단 일행은 볼티모어에서 목회하는 감리회 목사 가우처(J. F. Gaucher) 박사를 만났다. 이를 계기로 가우처는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됐으며, 자신이 직접 나서 서 한국에 선교사 파송을 위한 기부금을 제공하는 한편, 중국과 일본 선교의 개척자 역할을 하는 대표적인 감리회 선교사 맥레이(Robert. S. Maclay, 맥리가)에게 한국을 방문하여 선교사업의 가능성을 확인 해 줄 것을 요청했다. 


"시간 좀 내서 한국에 나가서 땅을 물색하여 선교부를 설치할 수 있 는지 알아보시겠습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는 그 이방인의 지역에 들어가는 첫 번째 개신교회가 될 것입니다. 만약에 일이 성사된다면, 이것은 일본 교회로서도 명예가 될 뿐 아니라 당신께서 우리 교회를 위해 이미 이룩해 놓으신 업적에 또 하나 새로운 업적을 남기게 될 것 입니다."


맥레이는 가우처의 부탁과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본부의 한국 선교 결정에 따라 2주 동안 한국을 방문했다. 맥레이는 이 때 일본에서 알게 된 개화파 정치인 김옥균의 도움을 받았다. 맥레이는 김옥균을 통해 자 신이 조선에 온 목적을 담은 편지를 고종 황제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은 물론 한국 정부가 기독교 선교를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며칠 후 맥레이는 김옥균을 만나 고종 황제가 병원과 학교 사업을 시 작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1884년 7월 3일 조선 의 황제가 기독교 선교를 윤허했다는 말이었다. 이에 따라 맥레이는 일 본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서울과 인근 지역을 둘러보고, 외국 공사관들이 모여 있는 정동에 선교본부를 마련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이런 전반적인 상황 속에서 미국에 있는 해외선교본부들이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미국 장로회는 한국 선교를 위한 기금을 조성해 선교사를 선발했고, 미국 감리회와 미국 감리회 여성 해외선교본부에서도 한국에 파송할 선교사들을 서둘러 선발했다. 그러는 사이 한국에서도 이들을 맞이할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한국에 처음 자 리를 잡은 선교사는 의료선교 사인 알렌(H. N. Allen, 안련) 이었다. 당시 의료 혜택을 전 혀 받을 수 없던 상황에서 외 과 의사 알렌의 등장은 각국 공사관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따라서 이들은 알렌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이에 따라 알렌은 손쉽게 선교 사업을 위한 부지를 마련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서는 명성황후의 조 카 민영익의 생명을 구해냄으로써 왕실의 후원 아래 제중원이라는 한 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을 설립할 수 있었다. 제중원은 초기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머물며 본격적인 선교를 전개하기 위한 준비와 협력을 하는 장소가 됐다. 아펜젤러(H. G. Appenzeller, 아편설라)와 언 더우드(H. G. Underwood, 원두우)를 비롯한 초기의 선교사들은 이후 서울 정동에 각각 선교지부를 설치하고 한국 선교를 위한 각종 사업 을 추진했다. 병원으로는 제중원을 비롯하여 제중원 부인병원, 시병원, 보구여관과 시약소가 세워졌고, 학교로는 원두우학당,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이 황실의 깊은 관심 속에 설립됐다. 그리고 1887년 가을 에는 드디어 각각 새문안교회와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했다. 이러한 과 정을 거쳐 서울 정동은 한국 기독교의 요람이 될 수 있었다. 이처럼 조선의 문호개방과 그 이후 있었던 고종 황제의 선교 윤허, 그리고 공식적인 선교사의 내한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다.  


(사진 - 1934년 배재학당에서 시연된 고종의 선교윤허를 극화한 연극공연 모습 / 최초의 견미사절단[1882])





1873년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면서 고종은 재위 10년 만에 친정을 선포했다. 이때 조선의 화두는 개화였다. 이는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 이는 방식에 있어서 제기되고 있던 중국의 중체서용과 일본의 화혼 양재를 염두에 둔 조치였다. 즉 중심은 고유의 방식을 유지하면서 주 변은 서양의 문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한 국의 경우 동도서기의 입장으로 대변됐다. 그러나 이같은 이론적이 고 논리적인 차원의 논의들은 실질적으로 서양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구체적인 전개 과정에서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더구나 위정척 사의 강력한 관성이 지속적으로 조선 사회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서 양의 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던 실학파의 입장도 서로 많은 차이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강력한 구심점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당시 서구 열강들의 동양 진출 과정 속에서 적극적인 개화의 의지를 갖고 동서양 제국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자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한국 사회에 문명개화를 소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이었다. 선교사들의 문명개화론은 논리적으로 정교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한국 사회의 매우 현실적인 차원을 다루고 있었다. 이들이 조선 사회에 문명개화를 소개한 이유는 기독교를 변증하려는 의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제적으로 조선 사회에 문명개화에 대한 강력한 요구가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 선교사들은 순한글 신문을 제작, 보급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1897년 초반 창간된 두 개의 신문이다. 각 신문의 창간사를 보면, 선교사들이 신문을 통해 한국 사회에 전하고자 했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확 인할 수 있다.  


"지금 만국이 교제하는 때를 당하여 동양 사람은 동양 글만 읽고 동 양 도만 존숭하고 동양 소문만 듣고자 하지 말고 우리 회보를 보시면 세계 상의 유익한 소문과 각국의 재미있는 사적을 자연히 통달할 것 이니 우리가 이 회보를 파는 것은 재리를 취함이 아니요 사람은 혼암한 마음을 광명케 함이니 누구든지 개명에 진보하고자 하거든 이 회 보를 차례로 사서 보시기를 바라오. 조선 회보라 한 뜻을 발명함이라." 「죠선크리스도인회보」 창간호, 1897년 2월 2일.


"이 그리스도 신문을 설립하는 것은 조선 백성을 위하여 지식을 널리 펴려하는 것이니 지식을 말하려 하면 다른 것이 아니라 천지만물 의 이치와 형상과 법을 아는 것이요 타국 정치상을 아는 것이니라. 아 무 생업이라도 각 학문을 배운 것이 유익하지 않음이 없으니 지식이라 하는 것은 각 사람에게 재물로 유익함이니 나라에도 유익함이 되느니라." 「그리스도신문」 창간호, 1897년 4월 1일.


「죠션크리스도인회보」는 미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아편설라)가 1889년 5월부터 월 2회 발간했던「교회」 라는 간행물을 확대, 1897년 2월 2일부터 주간으로 발행한 4~6면 분량의 순한글 신문이다. 이 신문은 그 해 12월 초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뀌면서「대한크리스도인회보」로 이름을 바꿨고, 아펜젤러의 주도로 1900년 8월 29일까지 발행됐다. 그러나 아펜젤러가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이후 발행이 전면 중단됐다가, 1905년 1월부터「그리스도인회보」라는 명칭으로 미 남·북감리회 합동으로 발행됐다. 


「그리스도신문」은「죠션크리스도인회보」보다 두 달 늦은 1897년 4월 1일 미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 가 개인적으로 창간한 후 1904년부터 장로회의 공식 신문으로 발간된 순한글 주간 신문이다. 8~10면으로 간행된 이 신문은 「죠션크리스도인 회보」보다 분량이 많았으며, 활자 체, 구성, 내용의 다양성 등 모든 면 에서 「죠션크리스도인회보」보다 더 나은 평가를 받았다. 이 두 신문이 1905년 7월 선교사들 사이의 연합 운동 일환으로 통합되면서「그리스도신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통합된 신 문은 1907년 11월부터 이름을「예수교신보」로 바꾸고 1910년까지 약 5년간 격주간으로 발행 됐고, 이 신문은 이후「기독신보」라는 이름으로 계속 발행됐다.


이 두 신문은 발간 취지에서 알 수 있듯 선교 목적과 함께 조선의 문명개화라는 목적으로 발행됐다.「그리스도신문」은 조선의 문명개화를 위해“농리 편설”과“공장 편리설”이라 는 연속 기사를 통해 서양의 농 사법과 공장의 학문에 관한 여 러 가지 정보를 매우 풍부하게 전해주기도 했다. 또한 각종 상업 광고를 게재하면서“각색 상품 물목”이나“종시 상품 물세”라는 제목 아래 지면을 할애해 각 지역의 물건 값을 비교하여 밝혀줌으로써 상업과 물품 구입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 외에도“시세론,”“외방통신,” “외국 통신,”“전보”등을 통해 해외 소식을 알려주었고, 미국이나 유럽 각국, 일본 등의 소식들을 자세히 소개하는 기사를 통해 “문명국”의 모습을 국내에 전하려 노력했다. 


이 두 신문의 발간은“복음전파”와“조선의 문명화”라는 취지를 넘 어 조선 사회에 의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영향을 미쳤는데, 그 대표적 인 것이 한국 근대 문학의 발전에 공헌한 것이었다. 이 글에서는 이 한 가지 중요한 차원의 성과를 살펴봄으로써「죠션크리스도인회보」 와 「그리스도신문」이 얼마나 조선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단적으로 예시하고자 한다.  


이 두 신문이 한국의 근대 문학의 발전에 끼친 영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독자들에게 한글 사용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한글 문화의 정착과 한글의 대중화에 적지 않게 공헌했다. 한국 근대 문학 발전을 가늠하는 주요 지표 가운데 하나가 한글 사용의 확대라는 점을 생각 한다면, 이러한 기독교 신문의 한글 중시 방침은 한국 근대 문학 전개 역사에 일정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둘째, 두 신문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시도한 새로운 글쓰기 형식인 우화와 같은 서사적 논설은 새로운 차원의 서사문학 양식을 탄생시켰다. 


셋째, 두 신문이 믿음이 굳건한 인물들의 일대기나 일화를 소개하기 위해 다뤘던 인물 기사는 이후「대한매일신보」를 통해 발표되는 근대계몽기 역사, 전기소설 창작의 바탕이 됐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선교사가 발간한「죠션크리스도인회보」와「그리스도신문」은 복음전파라는 선교적 목적을 넘어서 조선의 문명개화와 더불어 한국 근대 문학의 발전이라는 구체적인 영역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사진 -  대한크리스도인회보와 발행인이었던 아펜젤러 선교사 / 그리스도신문과 발행인이었던 언더우드 선교사)




한국의 근대적인 출판문화는 기독교 선교역사와 함께 걸어 왔다. 1884년 시작된 기독교 선교와 함께 비로소 조선에 광혜원(제중원), 시병원 등 근대적 병원이 세워졌고, 곧이어 배재학교와 이화학교 등의 근대적 교육기관이 시작됐다. 이와 더불어 배재학당 안에 인쇄소가 설치되면서(삼문출판사로 발전됨) 서구의 출판물을 본받아「죠션크 리스도인회보」의 전신인 월 2회 정기간행물「교회」, 월간지「코리안 리파시토리」,「독립신문」등 근대적 신문과 잡지가 조선에서는 처음 으로 창간됐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 조선에 전래된 기독교는 근대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지만, 조선인들이 볼 때는 결과적으로‘근대’라 는 옷을 입고 찾아온 선진문명이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전래가 조선의 근대적 출판문화에 끼친 영향은 다양한 측 면에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기독교가 발행한 근대적 출판 물 그 자체가 중요한 요인이었다. 여기서 기독교 출판물의 출판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에 따라 출판의 시기를 세분할 수 있다. 우선 1885년 선교사들의 내한으로부터 1910년 한일병탄까지는, 선교사들이 출판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선교사 시대(1885-1919)로 볼 수 있다. 1910년 이후부터 한국인들이 서서히 등장해 출판에 관여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한국인은 선교사들의 조력자 정도로 여겨졌다. 이 시대 출판 물의 발간 목적은 주로 선교용이었고, 서구문화의 소개, 세계의 시사 문제를 전달하는데 있었다.


 그러다 1920년대에 들어와 선교사와 한국인의 동반 시대(1920- 1930)가 열리면서, 신문 또는 회보 발간에서 차차 벗어나 잡지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또한 필진이 거의 한국인으로 교체되고 그 내용도 계몽에서 탈피해 본격적인 연구 논문이 실리기 시작했다. 


이어 1930년대 이후부터 한국인시대(1931-1939)가 시작된다. 그 전 반기에는 기독교 도서와 신문 잡지 출판의 최고 전성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기독교 선교 50주년을 지나면서부터는 쇠퇴하기 시작해 1940 년대에 들어서는 겨우 몇 개의 잡지만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는 암흑 기(1940-1945)에 들어서게 된다. 


「신학월보」(The Sin Hak Wolpo. A Biblical and Church Monthly)는 미북감리회 선교사 존스(George H. Jones, 조원시)가 1900년 12월 창 간한 감리회의 두 번째 월보이자 조선 최초의 신학잡지이다. 


이 잡지는 신학, 교회사, 성서주석, 설교학 등에 관한 논문과 논설, 신앙고백, 교회 관련 기사 등을 싣고 있다. 신학 전문 잡지지만 순한 글로 되어 있어 일찍부터 한국 신학의 형성에 공헌했고, 신학서적이 거의 없던 기독교 초창기에 신학교 교재 역할을 함으로써 목회자 양성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신학월보」에는 편집 발행 책임을 맡았던 존스 등 선교사들과 함께, 한국교회의 초창기 선구자들인 김창식, 전덕기, 오석형, 최병헌, 박에스더, 구춘경 등 40명이 넘는 한국인 필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언론인이자 임시정부 외무총장을 지낸 박용만이 1904년 6월호에 기고한 ‘십자군의 격서’는 이 잡지가 감리교의 신학잡지를 넘어서 기독교와 민족운동을 결합시킨 개화기의 언론매체였음을 보여준다.


「신학월보」는 창간 이후 1904년까지 월간으로 발행되다가 2년간 중 단되었고, 1907년 7월 복간된 뒤 1910년 가을까지 격월간으로 발간됐 다. 


「신학월보」가 사역자를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재였다면「신학세계」는「신학월보」를 흡수하여 발간된 학술지 성격이 강화된 전문적 신학잡지였다. 


이 잡지는 1916년 2월 선교사 하디(Robert A. Hardie, 하리영)가 편 집 겸 발행인으로, 양주삼이 주간으로 참여해 출판된 잡지로, 신학연구논문만이 아니라 국내외의 교계소식도 싣고 있다. 이 잡지는 당시 한국 교회의 진보적인 신학을 대변하는 잡지라는 뚜렷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1932년에 정경옥에 의해 칼 바르트의 신학이 소개되는 등 당시 평양신학교의 보수적 입장에서 볼 때는 진보적인 신학이 유입되는 경로였다. 이 잡지는 또 한국적 신학의 형성과 신학의 토착화 에도 중요한 공헌을 했다. 최병헌은 이 잡지에 동양사상과 기독교사 상을 비교 연구한 종교 변증설을 연재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그 후「신학세계」는 1940년 감리교신학교가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됨에 따라 폐간됐다. 그리고 해방 이후 46년 1월에 신학교는 개교했지만 이 잡지는 미처 복간되지 못했다. 그러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소생할 기회를 완전히 잃는 듯 했지만, 폐간 12년 만 인 1952년 10월 15일 부산 피난지에서 속간 제1호(제27권 1호)를 발간 하는‘포화 속 기쁨’을 맞았다. 현재「신학세계」는 명칭을『신학과 세계』로 바꿔서 계속 발행되고 있다. 


「신학지남」은「신학세계」보다 2년 뒤인 1918년 3월, 클라크 (Charles A. Clark, 곽안련)를 발행인, 엥겔(George O. Engel, 왕길지)을 편집인으로 한국 신학의 지남(指南:가리켜 지시하는 것)적 사명 을 띠고 평양신학교의 대변지로 출발했다. 


창간호 발간사에 따르면,「신학지남」의 목적은 장로회의 신학을 제대로 제시하고, 목회자들이 계속해서 신학을 연구해 신학적 지식을 풍부하게 하는 동시에, 목회와 설교 준비에 도움을 주어 뛰어난 설교 자가 되도록 하는 데 있었다. 


장로회의「신학지남」은 감리회의「신학세계」와 마찬가지로 신학 서적이 부족하던 당시에 목회자와 신학생들에게 신학 지식을 전달하 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신학세계」가 한국인의 글을 주로 실었 던 것에 비해「신학지남」은 주로 선교사 위주로 글이 실렸고, 새로운 신학이해보다는 과거의 신학사상과 성경의 교리를 풀이하는데 치중 했다. 또「신학세계」가 시대적 풍조에 따라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토착화 작업에 관대한 입장을 취한 것에 비해,「신학지남」은 변증적 글이 대부분이었고 서구신학을 소개하는데 그쳤다는 아쉬움이 있다. 


이후「신학지남」은 장로회신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폐쇄 되자 자연스럽게 함께 폐간되됐가 해방 후인 1954년 2월에 복간되었다. 그러나 1960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가 분열되면서 장로교신학대학측은 1965년에「신학지남」의 제호를『교회와 신학』으로 바꾸어 현재까지 출판해 오고 있는 반면, 총신대학측은 제호를 그대로 고수하여 『신학지남』을 현재까지 계속 간행하고 있다. 


 추구하는 학문적 성격을 달랐지만,「신학세계」는 초기 한국 감리회 신학 연구와 발전을 위해, 그리고「신학지남」은 초기 한국 장로회의 보수신학을 위해 쌍벽을 이루면서 한국 교회 신학권에 큰 영향을 미친 잡지라 하겠다. 


(사진 - 신학월보 / 신학세계 / 신학지남)


 



근대 이전 인쇄술의 발달에 있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찬란한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8세기 통일신라 때 제작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평가 받고 있고, 독일의 구텐베르크보다 2세기 앞선 고려시대에 이미 금속 활자가 인쇄에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그러나 이처럼 어느 나라보다도 앞선 활자의 발명에도 불구하고 출판문화는 한국 문화의 저변까지 확대되지 못했으며, 일반 대중들은 책을 읽을 기회를 거의 얻지 못했다. 그 결과 일반 서적은 물론, 신문이나 잡지, 기독교 문서 등이 출판되기 시작한 한국의 근대적 출판역사는 개화기 때부터 시작됐다. 


국내에서 활판 인쇄술을 이용한 출판 사업을 최초로 시작한 곳은 대부분 일본인들 손에 의해 운영되던 박문국(博聞局)으로, 모든 출판 물은 한문으로 발행됐고, 한국 최초의 신문「한성순보」도 이곳에서 발간됐다. 이후 박문국에 이어 한국 최초의 민간 출판사인 광인사(廣 印社)를 비롯한 회동서관 등 여러 출판사들이 등장했다. 


이렇게 정부와 민간인들이 근대적인 출판 사업을 벌이고 있을 무렵, 한국 기독교 초기에 출판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인식한 미북감리회는 1888년 배재학당 내에 최신식 인쇄시설을 갖추고 출판활동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한국기독교 출판사업의 문을 연 삼문출판사(三文出 版社, The Trilingual Press)이다. 


1892년 1월 올링거(F. Ohlinger) 목사가 배재학당 내에 세운 삼문출 판사는 한글, 한문, 영문 세 가지 활자를 갖추어 놓고 삼문(三文)으로 인쇄, 출판했기 때문에 The Trilingual Press, 즉 삼문출판사라는 이 름이 붙었다. 삼문(三文)으로 인쇄한다는 것은‘밖의 것’들을 조선인 들에게 전해주는 것만큼,‘조선의 소식’도 외국에 알리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확장성으로 인해 삼문출판사는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출판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서적 외에 일반 서적들도 많이 출판했던, 당시 국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출판사였다. 


이후 삼문출판사는 베크(S. A. Beck, 백서암)가 새로운 책임자로 부 임하면서 1900년 8월 미국 교인들로부터 모금된 5,000달러로 제본기, 활자 등을 구입해 출판사의 시설을 확충하고, 출판사의 이름을 감리교출판사(The Korea Methodist Publishing House)로 변경하게 된다. 


조선에 온 선교사들이 자국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역을 알리는 방 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일부 선교사들은 논문을 작성하기도 하고 몇 개의 영문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The Korea Review와 Korea Mission Field이다. 


The Korea Review는 올링거에 이어 1893년 9월부터 책임을 맡으면 서 출판사를 발전시킨 헐버트(Homer B. Hulbert, 할보)가 1901년에 창 간한 영문 월간지이다. 헐버트는 앞서 1895년 1월부터 1897년까지 이 출판사에서 발행되던 The Korean Repository의 편집 일을 맡아 하면서 조선의 역사, 언어, 문화 에 대한 논문을 싣다가 벙커(D. A. Bunker)에게 출판 사의 운영을 넘기고 한성 사범학교에서 교육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 1898년 12 월 The Korean Repository 의 발행 규모가 축소돼 결국 1899년 6월에는 중단됐고, 다시 헐버트에 의해서 1901 년 1월 조선의 소식을 외국 에 알릴 새로운 영문 월간지 The Korea Review가 창간 된 것이다. 


The Korean Repository 는 1892년 1월에서 1898년 12월까지 7년간, The Korea Review는 1901년에서 1906년까지 6년 동 안 간행됐다. 이 두 잡지는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 풍습, 종교, 언어 등 조선 사회의 전반적인 상황을 생생하게 소개함으로써 해외에 있는 외국인들의 조선 사회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또 The Korea Review는 The Korean Repository의 발행이 중단된 후 서양 언어로 한국에서 발행된 유일한 월간잡지였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헐버트는 1901년 창간호에서 발행목적과 대상 분야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선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한 영어기록이 없다는 점에서 그 필요성을 인식했고, 또 한국문물에 관한 기록들을 모으고 비교하며, 독자들 간에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중심적인 장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역할을 The Korea Review가 맡고자 한다는 것이다. 초기에는 이런 발행목적에 맞춰 한국문화에 대한 연구와 기사가 주로 다뤄지다가, 러일전쟁이 시작되는 1904년 이후로 가면서 러·일 관계와 한·일 관계에 대한 글들이 주종을 이루게 된다. 그러다 1905 년 후반부터는 일본의 침략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더해져 결국 일본 당국으로부터 반일적 매체라는 판단을 받아 1901년 1월부터 발행이 중단된다.


The Korea Mission Field는, 1901년 11월 장로교의 빈턴(C. C. Vinton)이 계간으로 발행한 The Korea Field와 1904년 11월 남북감리 회가 연합으로 창간한 월간지 The Korea Methodist가 연합정신으로 통합된 영문 잡지로, 1905년 11월 창간돼 1941년 11월까지 발간됐다. 


The Korea Mission Field 창간호는 이 잡지가 발행됨으로써“기독 교인들과 기독교교회의 일치의 새 시대가 얼렸다”고 선언했다. The Korea Mission Field의 발행은‘재한개신교선교부연합공의회’가 맡았으며, 실제적인 발행 업무는 조선성교서회가 담당했다. 


The Korea Mission Field는 1905년부터 1941년까지 매달 한국에서 이루어졌던 선교사역에 대한 최신 뉴스를 포함하여 한국에 대한 여러 가지 소식을 다루었기 때문에, 비교적 장기간에 걸쳐 한국의 이미지를 해외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실제로 The Korea Mission Field는 선교활동에 대한 홍보뿐 아니라 한국을 더 널리 알리는 것 또한 중요한 발행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특히 발간 후기에 가서는, 한국의 풍습과 역사적인 사건을 다루는 내용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데, 이는 자신을 한국문화를 서양인들에게 소개하는 한국문화의 해석자라고 생 각한 많은 선교사들이 문화와 상관없는 선교활동에 대한 기록에서도 한국 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일화를 소개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The Korea Mission Field의 발행 초기에는, 웸볼드(Wambold)가 임 시 편집인으로 수고하면서 매 호마다 700에서 800부까지 발행부수가 늘어갔다. 이후 1910년 이후에는 매월 1,000명 이상의 고정 구독자가 있었고,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최고의 수준을 유지함으로써 어떤 선교지에서 발간되는 신문이나 잡지에도 뒤지지 않는 모양과 내 용을 담고 있다는 인정을 받았다. 


The Korea Review와 Korea Mission Field는, 그동안‘조용한 아침 의 나라’,‘은둔의 나라’,‘금단의 나라’로 감추어져 있던 조선의 모습 과 20세기 초 조선이 처했던 급박한 정치상황을 해외에 알림과 동시 에 한국출판문화의 지평을 넓히는데 공헌했다.


(사진 - The Korea Review / The Korea Mission Field)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한국인 최초의 목사는 감리회에서 안수를 받 은 김창식(金昌植)이다. 1884~85년 한국 기독교 선교가 시작된 이래 미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에서 신학부라는 이름으로 방과 후에 학생들에게 교리 공부를 시키면서 한국인 목회자 양성과정이 시작됐다. 전담 교수진과 독자적인 건물은 없었지만, 서울과 평양, 인천 등지를 돌며 농한기에 집중적으로 한국인 전도인들을 모아 신학 을 가르쳤다. 이 과정을 거친 전도인 중 연회 자격심사를 통과한 김창 식과 김기범(金箕範) 2인이 1901년 5월 14일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린 북감리회 조선선교회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김창식이 연장자 인 관계로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지만 먼저 받게 되었다. 그래서 통상 적으로 한국인 최초의 목사는 김창식이라고 말한다. 


김창식은‘조선의 바울’이란 칭호를 받았던, 한국 기독교 개척시대의 전설적인 전도인이다. 그는 1857년 황해도 수안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농사일을 하다가, 15세 되던 해 고향을 떠나 전국을 떠돌며 머슴, 마부, 지게꾼, 장돌뱅이 같은 밑바닥 일을 전전했다. 그 뒤 29세 되던 1886년 박노덕과 결혼하고 서울 남대문 안에 정착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장안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아이들을 데려다 지하실에 가두 어 놓고 하나씩 잡아먹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파다했다. 이는 수구파 세력이 선교를 방해하려고 조작한 것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김창식 은 선교사들이 조선 아이를 잡는 현장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미북감리회 선교사 올링거(Franklin Ohlinger, 무림길)의 집에 하인으로 취직을 하고 성실히 일해 요리사로 승진하면서 선교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하지만 그가 기대했던 만행은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올링거 목사 내외의 인격과 생활에 감화를 받고 그들의 종교인 기독교에 마음을 열게 되었다. 마침내 2년 만인 1890년경 세례 받고 1892 년 봄 미북감리회 선교부에서 정식으로 임명한 전도인이 됐다. 이후 1893년 미북감리회 의료선교사 윌리엄 홀(William J. Hall, 하락/홀)과 짝이 돼 평양에 내려가 선교지를 개척했다. 보수적인 평양에서는 선교사가 전면에 나설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김창식이 나서서 서문 밖 의 기생집을 사들여 선교사 사택과 병원, 학교, 교회 자리를 마련했다. 


1894년 5월 수구파였던 평양 관찰사 민병석이 평양에 기독교가 확 산되는 것을 막고자 서양 선교사를 돕던 김창식을 비롯한 감리교인 과 장로교인 10여 명을 평양관아에 투옥하고, 배교를 강요하며 매질 을 가하고 석방 대가로 돈을 요구했다. 그러나 배교를 거부한 김창식 은 심한 매를 맞고 죽을 지경에 이른다. 이때 선교사들의 요청으로 미 국 공사관에서 조선 정부에 항의를 해 마침내 조선 정부에 의해 관찰 사에게 석방을 명령, 일주일 만에 해결됐다. 며칠 후 관찰사는 선교사 를 찾아가 배상금을 물어야 했고 얼마 후 좌천됐다. 


1894년 7월에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평양은 청국군과 일본군의 주 전장(主戰場)이 됐다. 당시 교회당이나 선교사가 운영하던 병원은 치 외법권 지역이어서 피난가지 못한 이들의 은신처 역할을 했다. 전쟁 후 전염병이 돌았는데, 홀과 김창식은 제 몸을 돌보지 않고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봤다. 그러다가 홀이 그 병에 걸려 회생하지 못하고 별 세하고 만다. 이에 평양 사람들은 크게 감동했다. 이런 헌신과 희생 이 선교의 거름이 돼 훗날 평양이‘조선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게 되었다. 


 김창식은 1896년부터 노블(William A. Noble, 노보을)과 함께 평양 이북 지역의 감리교회를 이끌며 그해부터 시작된 신학회에 들어가 정 식으로 목회자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24년 은 퇴하기까지 영변, 수원, 해주 지방을 돌아다니며 125개의 교회를 개척 하고 48군데 예배당을 건축했다. 그는 머슴이었다가 한국 최초의 목 사가 되는 신분의 수직 상승을 경험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낮은 자 의 겸손과 순종을 잃지 않았다. 


김기범은 황해도 연안군에서 태어났다. 인천에 언제, 어떤 이유로 왔는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인천에서 사는 동안 서울에서 내려온 감리교 전도인 노병일(盧丙日)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됐다. 


한국 장로회의 경우는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그 해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서경조(徐 景祚), 한석진(韓錫晋), 양전백(梁甸伯), 방기창(邦基昌), 길선주(吉善 宙), 이기풍(李基豊), 송인서(宋麟瑞) 7인이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평양신학교로 불리는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는 1903년 정식으로 개교했다. 하지만 1901년부터 방기창, 김종섭 2인이 마펫(Samuel A. Moffet, 마포삼열)에게 신학 수업을 받기 시작했고, 1903년에 양전백, 길선주, 이기풍, 송인서 등 4명이 합류했다. 1904년에는 서경조, 한석진, 이원민, 최중진 등 15명이 평양신학교에 입학 했다. 서경조, 한석진은 그동안 선교사에게 받았던 개인 지도를 인정받아 3학년에 편입했다. 그래서 3학년은 8명이 되었다. 이들은 1907년 6월 20일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식에서 스왈론 교장의 졸업장을 받았다.


한국 장로회는 미북장로회, 미남장로회, 호주장로회, 캐나다장로 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해 시작됐다. 1901년부터 한국인도 참여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공의회가 구성돼 있었으나 한국인들의 위치는 미약했 다. 한국인이 안수를 받을 날이 가까워오자 이들의 소속 노회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다. 여기에는 각 본국 노회 소속으로 하는 방법과 한국 의 별개 노회를 선택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런데 본국 노회 소속으로 할 경우 여러 가지 문제점이 노출될 수 있어 한국에 독립된 노회를 설 립하기로 하고, 본국 교회의 허락을 받아 독노회 설립을 추진했다. 독노회의 신경(信經)은 얼마전 창설된 인도장로교회의 것을 기초로 삼 기로 하고, 정치적 규범인 규칙은 웨스트민스터 정치문답을 기초로 삼기로 했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쳐 1907년 9월 17일 대한예수교장 로회 독노회가 창설된 것이다. 초대 독노회장에는 마펫, 서기에는 한석진, 부서기에는 송인서가 선출됐다. 이후 계속된 독노회에서 한국 장로회 최초의 목사가 탄생한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창설은 한국 장로회의 독립선언과도 같은 의미가 깃들어 있는 사건이었다. 


이때 첫 노회 창설 기념으로 선교사 파송을 결의하고, 이기풍 목사 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했다. 서경조는 황해도 소래교회를 세운 서상륜의 동생으로 장연, 옹진 등지의 전도목사로 정해졌고, 1910년부터 새문안교회에서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와 함께 동사 목사로 시무했다. 길선주는 장대현교회의 장로로서 한국 교회에서 처음으로 새벽기도를 시작했으며, 후에 평양부흥운동의 주역이 됐다. 안수를 받은 후 장대현교회 목사로 정해졌다. 방기창은 용강, 제재, 주달교회 전도목사로, 양전백은 선천, 정주, 박천 등지의 전도목사로, 한석진은 평양 장천, 미림, 이천교회 전도목사로, 송인서는 증산, 한 천, 외서장, 영유, 허리몰교회 전도목사로 정해졌다.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된 이기풍 목사를 제외하면 모두가 평안도, 황해도 지역에서 목회하도록 배정됐다. 지교회 목사는 길선주뿐이며 모두 전도목사였다. 전도목사는 선교사와 함께 목회했으며, 지교회를 총찰하는 권한은 선교사가 가지고 있었다. 전도목사는 선교사의 지휘와 감독을 받아 맡은 구역을 돌봤다.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한국인 목 사의 탄생은 한국 교회에서 한국인이 서서히 지도력을 가지게 되는 출발점이다.


(사진 - 감리교 첫 안수자 김창식 목사 /  1907년 장로교 평양신학교의 첫 졸업생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방기창, 서경조, 양전백, 송린서, 길선주, 이기풍, 한석진)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기독교 신자는 이전보다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당시 복음이 전파되는 양상을 살펴보면, 1886년에 세례를 받은 이는 전국적으로 9명에 불과했지만 그 다음해에는 25명으로 늘어났으며, 1888년에는 65명, 1889년에는 100명, 1890년에는 104명, 1891년에는 119명, 1892년에는 127명, 1893년에는 141명에 달했다. 또 청일전쟁이 일어났던 1894년에는 236명이었던 것이 1895년에는 286명에 달했고, 청일전쟁이 끝난 후인 1896년에는 530명으로 급증했다. 교인 수로 보자면, 1895년 당시 기독교 신자는 2,500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1900년에는 12,600명. 1910년에는 73,180명으로 성장했다. 1885년 4월 미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 우)와 미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Henrry G. Appenzeller, 아편설라) 의 입국으로부터 시작된 한국교회의 성장은 세계 선교 역사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각 선교부의 모교회로부터 자립하여 한국인 만의 자치를 수립한 시기는 언제일까? 


먼저 장로회의 경우를 보자. 장로교는 네 개의 서로 다른 선교부 를 통해 한국에 전해졌다. 1885년 5일 언더우드가 입국하고, 같은 해 6월에는 헤론(John W. Heron, 혜론)이 입국해 이들이 조선에 미북장 로회 선교부를 창설했다. 그리고 1889년에 호주장로회의 데이비스(J. Henry Davies, 대목사)가 입국함으로써 조선에는 두 개의 선교부가 존 재하게 됐고, 그 해 두 선교부는‘미북장로회 미션과 빅토리아 미션 연합공의회’를 조직했다. 여기에 1892년 미남장로회 선교사들이 입국 하고, 1898년에는 캐나다장로회의 선교사들이 입국해 가입함으로써, 네 장로교 총회 선교부를 대표하는 선교공의회(宣敎公議會)가 됐다. 


당시 선교부는 문답을 하고 세례를 준 사람들을 그 선교부가 속한 자 국 교회의 회원으로 받았다. 이를테면 미북장로회 선교부에서 파송한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아 신앙생활을 시작한 성도들이 교적 등록을 할 때, 한국에서 실제로 출석하는 교회가 아니라 미국에 있는 선교사 교회 소속의 교인이 되는 것이다. 또한 각자 설립한 교회에 대한 치리권 역시 각 선교부 모교회에 있었다. 그러므로 재한 선교사들 역시 공의회에서 는 친목하며 의논만 할 뿐, 여전히 공의회가 교회 치리권, 즉 노회로서 의 권한을 가지려면 각 선교부 모교회의 허락을 얻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빠르게 성장하자 선교사들은 조선인 총대가 참 가하고 조선어를 사용하는 모임이 있어야함을 깨달았고, 먼저 1900 년 각 모교회에 요청해 공의회가 치리권 있는 모임이 되도록 했다. 그 리고 그 해 회의에서 이듬해부터는 조선인 총대가 참가하도록 결의해 조선어를 사용하는 모임을 따로 갖기로 했다. 입교인의 선교부 모교 회 소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도 마련됐다. 이를 위해 1901년 조선자유장로회 설립방침 의정위원을 선정하고, 1902년에는 각 모교회 총회에 노회 설립에 대한 허락을 구했다. 그리고 1905년, 마침내 각 선교부 본국 교회들의 허락을 다 받아 냈고, 이에 따라 공의회는 1907 년에 조선야소교장로회(朝鮮耶穌敎長老會)를 조직할 것과 그 때에 조 선 목사를 전도목사로 장립할 것 등을 결의하고, 새롭게 세워지는 조 선교회를 위해 교회 신경을 채용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1907년, 공의 회가 매년 정기적으로 모이던 달인 9월 17일에 평양 장대현(章臺峴) 예배당에서 조선전국독노회(朝鮮全國獨老會)가 조직된다. 한국인 장로 36명과 선교사 33명, 찬성회원 9명 등 모두 78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회 노회를 성립시킨 것이다. 독노회는 가장 중요한 안건으로 1901년에 설립된 장로회 평양신학교 졸업생 7인을 안수하여 목사로 세웠다. 


감리회의 경우 장로회와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한국의 감리회는 미국의 남·북감리회에서 파송된 별개의 선교사들에 의해 각각 독자 노선을 걸었다. 그러나 1907년 6월 남·북감리회는‘조선인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해 신학당을 설립하기로 가결’함으로써 합동의 실마리를 찾게 됐다. 이 학교는 미남감리회와 미북감리회가 합동하여 설립했다고 해서 협성신학교라는 이름을 붙였다. 마침내 하나의‘조선 감리교’를 형성하는 데 성공한 미국 남·북감리회 대표들은, 1925년 모두 가 양 교파의 합동을 찬성하는 가운데 여러 어려움을 극복, 1930년 기 독교조선감리회(Korean Methodist Church)를 결성했다. 


남·북 감리교의 합동은 한국에서 교파 합동의 효시가 됐을 뿐만 아니라, 미국 남·북 감리회의 합동보다 앞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세계 기독교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피선교지 교회들이 본국 교회나 선교부가 합동되지 않은 상태에서 합동을 이룩했다는 사실 은 한국 기독교인들의 일치와 합동정신을 반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감리교회는 한국인들의 손에 의해 선출된 최고 지도자를 세울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자립의 기치를 내걸기는 했어도,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장로회의 경우 독노회가 조직돼 자생의 기반을 마련했지만, 사실 스스로 자체적인 총회를 세울만한 역량은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감리회는 모교회로부터 선교사와 재정 지원을 계 속 받아야 할 입장이었기 때문에, 미국교회와 동등한‘감독’칭호를 사양하는 겸양을 보였다. 한국 감리교회의 수장(首長)을 뜻하는 ‘총리사’(總理師, general superintendent)라는 명칭은‘감리사’ (superintendent)보다는 상위에 있으나 감독(bishop)보다는 하위 개념 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한국교회가‘자치교회’를 이뤘다는 면에서는 긍정적인 평 가를 내릴 수 있겠지만, 제한적인 조건이 붙은‘자치’였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드러냈다. 경제적 독립을 성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치적 자치가 갖는 의미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자치’는 분명‘독립’과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각 교단의 1차 회의는 사실상의 독립이라기보다는, 자생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진 - 초기 감리교 협성신학교 전경. 이 학교는 미 북감리회와 남감리회 선교부가 연합으로 설립 운영하였다. / 장로교 네 개 선교회가 연합해 설립한 독노회[1907])



종교 본연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절대적 존재와의 교감 을 경험하는 일일 것이다. 기독교인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실재성을 머리로만 납득하는데 그치지 않고 가슴으로 만나는 경험이 있어야 한 다. 이런 체험 없이는 종교 본연의 깊이에 도달했다고 볼 수 없다. 종 교가 윤리적이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도덕 자체는 아니다. 또한 종교 가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해 가 야 하지만, 교회는 사회기구나 시민단체와는 또 다르다. 기독교는 영 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종교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기독교를 종교 본연의 체험으로 만났던 집단적 경험이 바로 1907년에 있었던‘평양 대부흥운동’이다. 


한국기독교는 1884년 공식적으로 시작됐지만 이때까지 성령체험이 라고 할 만한 종교적 경험을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 전파될 때, 어떤 이에게는 기독교가 민족을 부강하게 하고 자유독립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보였다. 어떤 이들은 먹을 것을 준다는 소 문에 교회를 찾았다. 또 다른 이들은 선교사의 도움을 받고 싶어 찾아 왔다. 1백리를 걸어 주일예배에 참석하던 한 조선인 신자는, 몇 주가 지나자 교회에 나온 대가로 10달러를 달라고 해 선교사들을 아연실색 하게 했다. 제사보다 잿밥에 관심이 있는 이런 신자들을 선교사들은 ‘쌀교인’(rice Christian)이라고 불렀다. 상황이 이랬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한국 교인들이 무엇보다 성령체험을 하기 원했다. 선교사들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자꾸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해서도 부담을 가졌다.


평양대부흥운동은 한 국교회사에 있어서 특별 한 사건이다. 이때 한국 교회가 성령이 집단적으 로 임하는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성령을 체험 한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야기하기 힘든 죄를 고백하고 이를 배상하고자 했다. 1907년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신앙을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사모하는 체험적, 감정적 신앙으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오늘날 한국교회 신앙의 전반적인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부흥운동은 1907년 절정에 이르렀지만, 그 시초는 이미 1903년 8월 원산에서 일어났고, 1909년에 있었던‘백만인 구령운동’으로 이 어졌다. 


평양대부흥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은 원산부흥운동이었다. 원산에 서 활동하던 미남감리회 하디(Robert. A. Hardie, 하리영)는 감리회와 장로회 선교사들의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인도하는 도중 큰 은혜를 체험했다. 하디는 1892년부터 원산에서 사역했지만 선교의 열매를 거의 거둘 수 없었다. 특히 1901년부터 원산과 통천에서 개척선교사로 활동 했던 3년은 패배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그를 힘들게 했다. 1903년 여름,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하디는 자신이 영적인 능력이 없으며 교만하고 우월의식에 사로 잡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령이 임하자 그 는 자신의 실패와 허물을 공개적으로 털어놓고 회개하였다. 이 기도회 후 하디는 원산을 넘어 서울, 개성, 평양, 인천 등지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본격적인 의미에서 한국 최초의 부흥사가 됐다. 그는 초교파적으로 활동했다. 하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초기 부흥운동에서 공개적인 죄의 고백은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전형적인 특징이 됐다.


부흥운동의 절정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었다. 발단은 1907년 1 월 2일부터 15일까지 2주간 있었던 겨울 남자사경회(평안남도도사경회)였다. 보통 겨울 사경회는 400여 개의 장로회 교회들이 연합하여 갖는 대규모 사경회로, 선교사들의 중요한 사역 중 하나였다. 이 집회 에는 장소문제로 남자들만 참여했는데, 수백리 길을 걸어서 온 신자 도 있었다. 이들은 사경회 동안 식사와 숙박비 일체를 스스로 부담했다. 


한국의 오순절이라 할 수 있는 사경회의 절정은 14일 저녁집회였다. 8시에 시작된 집회는 새벽까지 계속됐는데, 설교가 끝나자 통성기도의 물결이 파도쳤고, 공개적으로 죄를 회개하는 일이 끝없이 이어졌다. 죄를 견딜 수 없어서 몸을 비틀거나 울면서 바닥을 치는 이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사람을 죽인 일까지 고백하며 용서를 구했다. 종교적 체험은 격렬한 정신적 고뇌를 겪은 후 자신의 죄를 대중 앞에서 고백하고 회개하며 기도하는 등 매우 열광적으로 전개됐다. 부흥운동 의 특징은 죄의 고백과 열광적인 통회의 기도에 있었던 것이다. 


사경회 마지막 날도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울부짖었다. 어느 한 대학생은 간 음, 증오, 아내에 대한 애정결핍 외에 기억할 수도 없는 많은 죄를 고백하여 선교사들을 놀라게 했다. 이날 수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자기 내면에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죄악들을 하나하나 쏟아냈다. 이처럼 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 기독교인들에 게 심각한 죄의 각성과 회개를 불러일으켰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열기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신자들의 윤리적 의 식도 함께 성장했다. 살인, 간음, 절도, 거짓말과 같은 보편적인 죄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시대에는 죄악으로 보지 않았던 것들, 즉 흡연, 축첩, 노비, 제사, 주술 등이 새롭게 죄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하나의 문화적 관습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행위들은 사회제도나 윤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어서 신자들의 인식 수준을 한 단계 높여 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모든 부흥운동과 마찬가지로 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를 양적으로 성장시켰다. 한국교회는 이미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급속한 팽창을 거듭하고 있었으나, 부흥운동을 계기로 그 성장이 가속화 된 것이다. 평양대부흥운동 자체는 교회의 급속한 성장에 따라 신자들에게 성경공부를 비롯한 신앙훈련을 쌓게 하는데 그 주안점이 있었다. 그러나 부흥운동으로 제고된 종교적 열정은 당연한 귀결로서 전도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돼 교회가 성장하자 선교사들은 좀 더 계획적으로 부흥운동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 생각으로 “백만인을 그리스도에게”라는 구호를 내걸고 백만인구령운동(1909-1910)을 추진했다. 당시 한국 전체 교인 수는 약 20만 명 수준이었다. 이 운동은 장감을 아우르는 초교파적 전도운동이었다. 이때 선교사들 은 철저한 사전 계획과 준비를 했다. 신도들은 헌금을 할 수 없는 경우에 날연보(day offering)를 하며, 쪽 복음을 들고 나가 전도했다. 날연보는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는 일종의 십일조였다. 그러나 이 운동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0만 명도 채우지 못하고 막을 내렸던 것이다. 사실상 목표치가 과한 것도 있었다. 백만인구령운동은, 교회의 부흥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다는 교훈을 남겼다. 비록 목표한 숫자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복음화의 의지는 한국교회의 귀감이 됐다. 100만 명이라는 기독교인 숫자는 1950년 대에 달성됐다.  


일제시대에는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이 각 지역이나 교회의 부흥집회 형태로 지속됐다. 길선주나 김익두, 이용도, 최봉석, 정남수와 같은 걸출한 부흥사가 활동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이 운동이 해방 후에 는 전 민족을 복음화해야 한다는 민족복음화 운동으로 계승됐다.


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사에서 성령운동의 역사적 기점이 되었다. 훗날 교회가 침체기에 들어설 때마다 한국교회는 1907년 임했던 성령의 역사가 동일하게 임하기를 기도했다. 1980년대 오순절 성령운동이 한국교회에 대중화 되면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오순절, 성령운동의 모범으로 자리 잡았다. 특별히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이었던 2007년 한국교회는 1907년을 기리는 역사적 작업과 부흥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기도 했다.


(사진 - 평양대부흥 시기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여자사경회[1906-1907] /  1907년 대부흥의 현장이 되었던 장대현교회)



일제하 한국교회 일각에서 주체적 신앙과 신학을 내세우며 등장한 기독교운동을 한국교회 자치운동으로서의‘조선적 기독교’운동이라 한다. 이런 움직임의 시초는 1910년 최중진의 자유교회에서 찾을 수 있다. 어떤 사안이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최중진이 장로 회에서 분립한 데에는 선교사와의 갈등이 있었다. 1918년에는 김장호 가 조선기독교회를 설립했다. 장로회가 그를 이단시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성서를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1923년 에는 이만집이 장로회 경북노회와 갈등을 빚으며 조선예수교회를 설립했다. 이들 교회들은 반선교사적 경향을 보이면서, 미국 선교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장로회 노회를 강하게 비판했다. 


서구 기독교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교회나 신학을 세우고자 했 던 움직임은 1920년대 중반부터 더 강해졌다. 특히 무교회주의자 우 찌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을 받았던 최태용과 김교신이 조선에 귀국하면서 조선적 기독교 운동은 탄력을 받았다. 이 외에도 예수교회(1933)를 설립했던 스타 부흥사 이용도도 조선적 기독교 운동의 관점에서 평가할 수 있다. 이들은 조선적 기독교운동의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 신학적 이론을 심화시켰고, 기성교회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이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던 1920년대는 한국교회게 상당히 어려운 시기였다. 당시 한국교회에는 현실과 역사적인 문제보다는 내세와 영적 체험을 중요시하는 부흥회가 성행했다. 또 정통 교리의 수호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고 여기는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정서는 신자들 의 신앙을 경직시켰다. 더구나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네비우스 선교원 칙에 따라 자전, 자립, 자치를 중요시했지만, 선교사들이 자치, 즉 최고 리더십을 한국인에게 이양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선교 반세기가 가까워오고 있는 시점에서 이런 리더십의 부재와 함께 한국교회 안에 스스로의 독자적인 신학이 없다는 것도 조선적 기독교 운동 그룹에게는 좋은 명분이 됐다. 


한국교회사에서 조선적 기독교를 추구했던 이들은 비주류를 형성 하고 있었다. 또 이 운동들은 일찍부터 주류 교단으로부터 이단이라고 단죄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정통-이단의 이분법적 도식을 넘어 조선적 기독교 그룹을 새롭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들에게서 엿보이는 한국교회에 대한 개혁의지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용도, 김교신, 최태용은 모두 1920-30년대 한국교회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김교신과 최태용은 일본에서 유학할 때 교회지상주의를 비판하고 일본적 기독교를 추구하던 우찌무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조선인은 조선인의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것과 선교사들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용도는 민족운동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이루려고 했던 민족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강원도 통천에서 사역을 시작하면서 김성실이라는 인물 을 만나게 된다. 김성실은 프란체스코 신앙의 영향을 받아 수 도적 영성을 추구했던 이로서, 당시 그의 영향을 받아 청빈과 걸식을 추구했던 젊은이들이 많았다. 또한 통천 주변의 금강산에는 수도자적 영성과 신비적 영성을 추구하는 이들 상당수가 몰려 있었다. 수도적, 신비적 영성이라는 것 자체가 기존 교회에 대한 비판적 성격이 강하 다. 이용도는 무교회 잡지도 읽었는데, 서구 기독교와 기성교회에 대한 비판의식은 여기서 배운 것이 많았다.


김교신은 조선의 교회가 너무 뜨겁다는 것을 문제 삼았다. 그는 당 시의 부흥회를 조선 교인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가는 비이성적 신앙의 대표 격으로 생각했다. 그는 이 뜨거움에 학구적인 찬물을 끼얹으려 하였다. 신앙은 뜨거워야 하나 맹목적인 뜨거움은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최태용은 조선교회에 신앙의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조선교회가 교리적 신앙, 교회에 갇힌 신앙에 머무르지 말고 영과 진리, 생명이 있는 그리스도 자신을 믿는 신앙으로 나아가라고 외쳤다. 이들은 비이성적 신앙, 교리적 신앙을 서구 기독교의 산 물로 생각했다. 그래서 조선교회가 서양선교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혼을 살리는 복음까지 서양인의 신학과 돈에 의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조선교회는 조선인의 복음으로, 독립적으로 선교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이었다.  


김교신은 조선산 기독교를 주장했다. 이는 새로운 토착 기독교론이 다. 그는 기독교가 전래 된지 약 반세기에 이르렀음에도 아직까지도 서구 구미 선교사의 유풍(遺風)을 모방하는 단계에 있는 한국기독교 를 유감으로 생각했다. 토착신학자들은 서구적 기독교를 한국화 시키는 것, 혹은 서구 기독교와 한국 문화의 만남을 토착신학으로 간주한 다. 그러나 김교신은 서구 기독교의 수용을 거부하고 성서만으로 사도적이면서도 조선적인 기독교를 새롭게 창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조선인이 조선심으로 성경을 읽고, 이를 체화하면 조선산 기독교를 구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최태용은 서구신학이 아닌 조선인 자신의 신학을 구현하려 평생을 몸부림쳤다. 그는 신앙은 복음적이며 생명적이고,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교회는 조선인 자신의 교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태용은 이런 포부를 갖고 1935년 복음교회를 설립했다.


이용도는 구체적으로 자신이 속한 감리회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교회를 설립할 의사는 없었다. 그러나 기존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고 새로운 신앙운동을 표방했기 때문에 서북 장로회의 심한 견제를 받았다. 이용도는 1933년 백남주, 한준명, 유명화와 더불어 성령운동과 신령주의적인 성격이 강한 예수교회를 설립했다. 


당시 장로회나 감리회나 분립하는 교회에 대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 다. 이는 교회가 갈라지고 교회 안에 갈등이 존재하는 실재적인 문제이자 큰 상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들을‘이단’으로 정죄해 버린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행위는 조선교회가 서구 교회와 서구신학의 영향력 하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에 불과 했다. 오늘날도 일부 교단의 인식은 현재진형형이다. 이들에게 조선적 기독교는 단지 교회 분립이며, 이단일 뿐이다. 자신의 자리를 성찰 하고 역사적 재평가를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뼈아픈 일이다. 그러나 이들 소종파에게 한국 교회사에서 조선적 기독교를 추구한 이들이었다는 역사적 자리는 마련해 줘야 한다고 본다. 


소종파는 이단으로 전락하면 주류가 되지 못하는 이상 비주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운동은 오늘날도 소모임으로 계승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조선산 기독교 수립 의지는 계승이 잘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예수교회와 복음교회는 해방 후 점차 정통교회의 모습으로 회귀하여 독자적인 신학노선을 상당수 포기하였 다. 복음교회는 수적으로는 미미하지만 한국의 정통교단으로 자리 잡아 주류 교단과 공적인 활동을 같이하고 있다. 예수교회는 이호빈이 리더십을 행사하면서 신령주의적 색체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다만 교회의 발전은 매우 미약한 편이다. 조선적 기독교 운동이 일제와의 협력 문제나 정통신학에서의 이탈하는 모습을 일부 보였던 것은 사실 이다. 그러나 이는 초기 운동에서 흔히 보이는 미진하고 극단적인 모습으로 이해해야 한다. 한국적 교회와 신학의 불모지와 다름없는 이 땅에서 독자적인 교회와 신학을 수립하고자 했던 이들의 노력은 높이 평가할 부분이다 . 


(사진 - 김교신과 그가 편집한 <성서조선> / 최태용과 그가 설립한 기독교조선복음교회[1935] / 경성복음교회 전경)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해외 선교사를 보내는 선교 대국이다. 2012년 1월 현재 전 세계에 파송된 한국선교사는 169개국에 23,000여 명에 이르고 있다. 한국교회는 기독교 수용 초기부터‘선교하는 교회’로 명확한 정체성을 형성해 갔다. 한국교회는 1884년 알렌이 선교를 시작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그가 입국하기 전에 만주와 일 본에서 복음을 접한 한국인들은 이를 고국에 전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한국교회는 복음을 전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한국교회는 복음을 수용한지 30년이 채 되지 않아 이웃 나라인 중국 산동에 선교사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이 처한 정치사회 적 상황과 경제적 궁핍을 생각해 본다면, 이는 복음을 접한 기쁨과 이방인에 대한 책임감 없이는 이뤄낼 수 없었던 기적이었다. 한민족이 외국에서, 그것도 민족문화의 상당수를 빚진 중국인에게 복음을 전한 다는 것은 전통적인 한중관계사 속에서는 특별한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서 당시에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역사의‘역전’이었던 것이다.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로는 1902년 12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자들을 위해 파송된 인천 내리교회의 홍승하 전도사를 들 수 있다. 또한 장로회에서는 흔히 최초의 선교사로 이기풍 목사가 거론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타문화권 선교와 외국인 선교라는 관점에서 볼 때 본격적인 해외선교는 산동 선교라고 봐야 한다. 2012년은 산동선교 결정 100주년이고, 2013년은 산동 선교사 파송 100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이다. 산동선교는 오늘날 선교대국으로 성장한 한국 선교역사 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적지 않다. 산동선교를 시작으로 한국교회는 선교 받던 국가에서 선교하는 국가로 전환하는 전기를 마련해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07년 평양부흥운동이 낳은 스타였던 길선주 목사는 이미“우리는 불원에 우리나라 전역에 복음을 전파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흑암에 묻혀 있는 수억의 중국인들에게 미국 교인들이 우리에게 한 것처럼 선교사를 보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도를 전하는 의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중국선교에 대한 포부를 밝힌 적이 있었다. 또 1907년 한국을 방문한 한 중국인은 한국교인들 앞에서“나는 여러분 이 나의 조국에 선교사들을 파송해 그 나라가 복음화되 것을 도울 날 이 올 것을 기대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중국 선교는 실로 이런 오랜 한국교회의 소망이 이루어진 결과였다.  


중국 선교는 중국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생명의 복음으로 갚겠다는 동기에서 출발했다. 이에 대해 한국에 온 중국 대표가 공맹(孔孟)의 도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면 산동이 합당하다고 말해 산동이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그러나 1913년 5월 박태로와 김찬성 목사가 산동선교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옌타이(煙臺)이 도착했을 때 중국교회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은 오랫동안 중국을 상국(上國) 으로 받들어 오고 있었고 기독교 역사도 길었다. 당시 한국은 나라의 주권도 없고, 기독교도 이제 걸음마 단계였다.“중화는 고대의 문명국이오 역사가 심장한 대국 이며 세계 4분지 1의 인구를 가 진 국가로 교만과 자존심이 많아 자칭 대국이라


하야 소국을 멸시하는 고래의 습행이 있으니 중화와 조선은 자고로 관계 가 되어 대소와 조완의 차별을 두는 관계로 조선교회가 중화에 선교는 다방으로 고난이라”다 기울어가는 중국이지만 조선에 게까지 선교를 받을 처지는 아니라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중화예수교장로회 화북대회는 한국교회 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산동반도의 요충지인 내양현(萊陽縣) 사 방 30리를 선교지로 내주었다.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등 세 선교사는 1913년 11월에 내양에 도착해 서문안 중국인 가옥 한 채를 세내 중국말 을 배우는 것으로 선교를 시작했다. 중국에 온 선교사들의 노고는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언어와 음식, 생활습관이 다른 문화 환경 속에서 그들은 선교의 뿌리를 내리고 복음을 전해야 했다. 선교지에서 늘 닥치는 경제적인 문제와 건강상의 어려움도 있었다. 선교사 부인의 생활과 자녀교육도 큰 고민거리였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1915년에는 교인 수가 40여 명에 이르렀고 평균적으로 30여 명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는 보고를 할 수 있었다. 이들 선교사들은 성탄절에 중국인 신자들 과 함께 인근 교도소를 찾아가 죄수들에게 전도를 하기도 했다. 또한 이 들은 중국 교회의 자립을 위해 헌금을 강조했다.  


그러나 결국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1915년 봄, 박태로 선교사의 몸에 이상이 감지되기 시작했고, 결국 1916년 귀국해야만 했다. 두 명의 선교사 에게 박태로 선교사의 빈 자리는 컸다. 다음해 사병순과 김영훈은 총회 전도국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귀국하고 말았다. 선교지 무단이탈이라고 할 만한 사건이었다. 이 때문에 어렵게 착수했던 산동 선교가 3년여 만 에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장로교 총회는 바로 방효원, 홍승한, 김병규를 새로 산동에 파송해로 선교를 재개했다. 방효원은 방지일의 아버지로서 더 유명한데, 훗날 방지일이 중국선교에 뛰어들게 되면서 2대 가 선교에 헌신하게 됐다. 김병규는 중국어를 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선교사는 증원됐고, 선교사역의 발판도 안정을 찾아갔다. 


꾸준히 성장하던 산동 선교가 다시 한 번 어려움에 봉착한 것은 1930년대에 일본이 만주와 중국을 침략하면서부터였다. 중국 내부는 지속적으로 어수선한 상태였고, 한국 선교사들의 처신도 어려운 부 분이 있었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중국 선교는 더 어려운 상 황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1937년 파송된 방지일은 끝까지 중국 에 남았다. 그는 국내 소환령을 무릅쓰고 선교사역을 감당하면서 버티다가 1957년 홍콩으로 추방당했다. 그가 공산화된 중국에서 9년이 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선교가 중국인들에게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방지일이 1957년 추방될 때까지 중화기독교총회 산하 17개 대 회 121개 노회 중 한국인이 선교한 결과로 생겨난 노회가 세 개나 됐다.


산동선교는 제국주의와 문화패권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인 선교였다. 또 산동에 한인교회가 아니라 중국 교회를 세웠다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본격적인 해외 선교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명령에 기초한, 복음을 받았으니 다른 사람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이 산동선교는 오늘날 한국선교의 초석이 됐다. 물론 초기 산동 선교에서 발생했던 문제는 선교사들에 대한 사전 준비와 사후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개인의 사명감에만 선교를 맡겨둘 수 는 없으며, 제도적으로 선교사들을 돕고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것이다. 


해방 전부터 한국교회는 이처럼 선교하는 교회였다. 그리고 이 전 통은 해방 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한국교회의 선교역사에서 후대에 남길 최고의 전통은 선교하는 교회 바로 그것이다. 한국교회는 해방 후의 어수선함, 6.25 전쟁 등으로 선교를 꿈꿀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부터 선교의 끈을 다시 맸다. 당시까지만 해도 제3세계 선교는 선진국의 몫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해외선교에 주 도적으로 나섰다. 민족적 상흔이 예리한 칼처럼 한국인의 가슴을 찔러오던 1956년 5월, 예수교장로회 총회 소속의 최찬영이 태국에 파송 된 것이다. 이후 한국교회는 아시아, 파키스탄, 아프리카 등지로 선교지역을 넓혀 나갔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교회는 북방선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1990년대 이후에는 선교의 역량이 크게 늘어났다. 해외여행자유화 조치와 신장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국교회는 선교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고 세계 전역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물론 그 동안 선교에 대한 체계적인 준비가 부족했다는 한계도 지적됐다. 앞으로도 한국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로서의 정체성이 어떤 상황에서 도 포기할 수 없는 기독교의 본질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진 - 제1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1912]. 이 총회에 중국 산동지역 선교를 결정했다. / 1913년 파견된 최초의 중국 산동지역 선교사 3인[방효원, 홍승한, 김병규] / 1908년 제주지역 첫 선교사로 파견된 이기풍 목사 가족) 



1906년 상동교회의 상동청년학원에서 출간된「가정잡지(家庭雜 誌)」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우리나라는 여인을 낮게 아는 까닭으로 천리까지 잘못 알았도다. 그러한즉 여인을 낮게 대접하는 것이 사회상이나 가정상에 아무 폐단 도 없는가? 폐단이 많이 있으니 잠깐 그 폐단을 말씀하오리다.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은 줄 아는 풍속으로 인하여 생긴 폐단을 말씀하려면 이로 다 셀 수 없으나 그 중에 제일 큰 폐단을 말하면 두서너 가지 있으니 아래 기록한 것과 같도다.

첫째는, 첩 두는 폐단이니 당초에 하늘과 땅이 마련되고 만물이 생 긴 중에 사람은 제일 신령한 영혼을 타서 한 사나이와 한 여인이 생겨 서 배필이 되었으니 세상 사람이 다 한 남편과 한 여인이 부부됨이 천리에 합당하니, 여인이 두 남편을 두는 것도 옳지 않고 사나이가 두 계집 두는 것이 옳지 아니하거늘, 우리나라는 여인을 낮게 아는 까닭 으로 여인이 남편을 두셋을 두면 큰 변으로 알고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되어도 개가도 못 가게 하되, 사나이는 장가든 후에 의례히 첩 두기를 시작하여 칠팔 명씩 첩을 두는 사람이 흔이 있고 지금 세상에는 첩을 두지 아니한 사람은 몇 명이 없어 첩을 아니 두는 사람은 사나히가 아니라 하여 못생긴 사람으로 돌리니 첩을 두는 까닭으로 패가망신하 는 사람이 많이 있고 집안이 불화하여 그 집이 망하고야 말고, 첩의 소생으로 난 자식은 입명이라 지목하여 선천과 후천을 가리는 폐단이 우리나라에 어떠하였느뇨?..."


위 글에서는 첩을 두는 폐단을 가장 먼저 지적하고 이어서 세 가지의 폐단을 더 지적하고 있다. 우선, 여자를 가르치지 않는 폐단을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여인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다. 그리고 아들만 아는‘남아선호사상’과 여자를 우습게 여기는 폐단을 지적한다.


사실상 이러한 폐단은 조선시대 이래 있어 왔던 잘못된 유교 덕목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교를 사람 지배하는 방편으로만 삼았기 때문 이다. 이 잘못된 관습은 오랜 기간에 걸쳐 학습이 돼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뿐만 아니라 여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모습으로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실제로 양반가에서는 소실을 두는 일이 당연시 됐고, 첩을 두는 일이 오히려 남성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첩을 두는 폐단은 조강지처나 첩을 가리지 않고 양쪽 모 두를 불쌍한 지경에 이르게 하는 악습이었다. 전설의 전도부인 전삼덕도 남편의 첩살이로 인한 외롭고 힘겨운 삶속에서 복음을 받아들여 헌신된 삶을 살게 되었다.  


조선시대 내내 기나긴 질곡으로 이어져 온 첩을 두는 문제에 대해, 1884년 근대적 개혁을 추진했던 갑신개화파의 정령(政令)도, 1894년 갑오개혁의 법령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갑오개혁의 경우,‘적 실과 첩에 모두 아들이 없는 경우에 한하여 양자를 허가할 것’이라는 규정을 두어 암암리에 축첩제도를 인정하고 있는 인상마저 준다. 결 국 1915년의 총독부 통첩에 의해 첩의 입적신고를 금지하면서부터 일부일처제가 법률상으로 확립됐다.


19세기 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축첩에 대한 반응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초기 한국 선교를 담당하고 있던 미국 복음주의계 선교사의 성향의 영향이 컸다. 그들은 서구의 개인 윤리, 특히 일부일 처제를 크게 강조했다. 이를 어긴다는 것은 곧 십계명의 제 7계를 어 기는 일로 규정하고 사실상‘준 교리화’했다. 이것은 혁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가정과 여성문제를 혁신하는 기틀이 됐고 기독교적인 도덕 성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1907년 대부흥운동의 물결 속에서 시작된 회개 운동 중 가장 많이 회개한 죄가 바로 축첩과 간음이었다. 


교회는 이를 악덕으로 여겨 첩을 둔 사람은 교회에 들이지 않았고, 기왕에 교인이 된 사람 중에서 이런 일이 드러나면 내쫓기도 했다. 1910년 새문안 교회에서 노병상이라는 사람이 축첩을 했다는 이유로 출교시켰고, 남편을 버리고 다니는 여자를 자기 집에 투숙시켜 동침 한 유호준을 여섯 달 동안 처벌했다는 기록이 있다. 남양교회 홍종익의 경우, 교인으로서 첩 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 소실을 스스로 내보내기도 했다. 


 1910년 동대문 교회가 지교회로 개척한 각심사교회에서도 같은 일 이 일어났다. 당시 각심사란 곳은 사찰은 흔적뿐이고 무당촌으로 유 명했다. 특히 그곳 사람들은 거의가 첩을 한둘 이상 두고 있었다. 각 심사로 파송된 김종우 목사는 열심히 기도하며 진지하게 이들을 권면 했다. 그의 열심 덕분에 이전 생활을 청산하고 몸과 마음을 온전히 주께 헌신하는 사람이 많이 나왔다. 그 중에 송신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동리에 송신묵이라는 형제는 본래 그 동리에 유력한 신사요, 또 첩이 둘이 있었는데 그는 예수를 믿은 후에도 교우와 나의 많은 권고 가 많았으되 오히려 주저하고 첩을 내보낼 용기가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한번은 그를 붙잡고 같이 열정의 기도를 드린 후에 여러 가지 말로 권고하였더니, 그는 자기의 죄악을 슬피 자복하고 애통하던 중 첩 둘을 다 내보냈다. 그리고 그 몸과 마음을 천국사업에 바치기로 작정 하고 오늘까지 주의 일에 충성한 사역자가 되었다. 그 때 그 형제 한 사람이 회개함으로 각심사교회가 크게 은혜를 받게 되었다. 또 근처 중계리와 창동 두 곳에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그 후 각심사 교회에서 는 전도사 세 사람이 나왔는데 그들은 다 지금까지 주의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 (『승리의 생활』, 1927)


송신묵은 이후 본처 전도사가 되어 돌아와 전도 일에 헌신했다.


(사진 - 가정잡지 / 1960년 7월 19일 축첩 반대 플래카드를 펼쳐 들고 서울 종로로 나선 전국 여성단체연합회 회원들의 시위 행진 모습.)


 


"여전도인은 별명이 하나 있습니다.‘걸네(걸래)’라고요 참 누가 하 셨는지 잘하셨습니다. 그 책임은 참 그러합디다. 아는 집에서 기도하고, 초상나면 염쟁이 노릇하고 또 순산하는 분에게는 산파가 되어주고 경성을 포위하여 삼사십리씩 나가서 촌 교회가서 가정학이라는 것은 가정아해 기르는 것, 성경국문들을 가르치고, 혼인집, 장사집, 낙 심한 집을 두루 다니는 책임이 '걸네'와 같습니다."


위의 글은 경성의 전도부인 정마리아가 1930년 1월 1일자「기독신보」에 게재한 글이다. 당시 전도부인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그렇게 살아갔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러니 걸네 없는 집안은 깨끗지 못합니다. 珠蓮花閣(주연화각)으 로 잘 지었어도 그 집을 잘 소제하려면 청결한 걸네가 요긴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희망은 여기 있습니다.‘마음이 청결하는 자는 하나 님을 볼 것이라고’예수께서 말씀하신 것같이 이 불결한 세상에서 성결한데 이르기까지 악전고투하다가 승리하여서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을 것과 우리 형제들이 死線에 서게 되는 것은 모든 승리의 희망 된 것만큼 내 희망입니다."


바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도부인이란 선교초기에 선교사들의 지휘를 받아 시골에 나가 성 경책과 전도책자를 팔면서 전도하던 여성 사역자를 일컫는다. 남성은 권서(勸書)인 혹은 매서인(賣書人)이라 불렀다. 초기 전도부인의 전도 활동은 크게 대도시와 시골의 전도활동으로 나뉜다. 도시의 전도부인들은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고 필요한 지역에서는 교육을 권면했다. 교육은 여자 교인들에게 읽는 것을 가르치는 일과 교리문답을 반복해 서 연습시키는 일이었다. 전도부인이 이해하고 있는 수준에서 성경을 설명했다. 이러한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선교사 부인의 철저한 감독 과 조언을 받았다. 때로는 도시에서 전도 활동을 하던 전도부인이 시 골로 내려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역교회에 가서 교회의 여자들을 돌보고, 교회를 순회하면서 여자 성도들의 상황과 필요를 조사하 고 최선을 다해 가르치고 권면하는 일을 했다. 전도부인의 역할과 중요성은 점점 늘어났다. 


초기 선교사들의 보고서에는 어김없이 전도부인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전도부인 전삼덕에 대하여 에디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의 신실한 전삼덕은 좋은 집을 버리고 이 황량한 곳에 와서 훌륭한 전도인으로, 교사로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서너 명의 여자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그의 노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인도되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복음은 여성들로 하여금 억압된 상황에 대한 깨달음 과 동시에 정확한 자기 인식을 갖게 해 주었다. 한국 여성들에게 있어 서 기독교 복음은 억압된 삶을 벗어나 배움에 대한 열정을 갖게 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사는데 주저하지 않게 했다. 전도부인으로 자신의 삶을 헌신한 여성들의 사회적 배경과 입교 동기를 보면 이같은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12명의 전도부인들의 입교 동기를 살펴보면 남편의 축첩이나 외도, 시집의 박대 또는 주변의 권고로 믿은 경우, 스스로 믿은 경우이다. 그리고 대부분 과부라는 점에서, 경제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여성이었으며 전근대 가부장적 사회의 억압아래에 있었다는 사실에 서 이들의 입교 동기를 찾을 수 있다. 공통적으로 고통과 핍박을 받고 있었으며, 심지어 생명의 위협에까지 노출되어 있었다. 동대문교회의 전도부인 마르다의 경우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초기 전도부인들이 생명의 위협까지도 감수하면서 전도부인이 된 이유는 바로 복음에서 비롯된 자유와 해방이었다. 전도부인 김세지는 다음과 같은 말로 해방감을 표현했다.  


"우리 조선에 보내시고 여러 천년 동안 자유 없이 남자의 압박 아래 이름 없이 살던 우리 조선여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의 밝은 빛을 전파하여 여자의 자유와 그 본분을 널리 가르쳐 깨닫게 하는 동시에 나의 무식한 것을 깨뜨려 주게 하시고..."


한국 여성들에게 있어서 복음의 열매는 자유와 해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유와 해방의 열매는 곧 핍박으로 이어졌다. 전도부인 김덕 선은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예수를 믿은 지 4년이 되던 해에, 남편이 온갖 핍박을 다하며 예수를 못 믿게 하다가 끝끝내 듣지 않으니까 나중에는 나의 손목을 끊어 버리겠다고 하며 칼을 들고 내게 달려들어 손목을 쳐서 피를 말 할 수 없이 많이 흘렸으되, 나는 조금도 남편을 원망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위하여 기도하였으며, 가장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무릎 끓고 그 가 회개하기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복음으로부터 온 자유와 해방의 열매는 죽음조차 두렵지 않은 견고한 믿음으로 이어졌다. 초기 복음을 받아들인 여성들은 더 이상 이전 의 인간답지 못한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온전한 삶을 살게 된 기독교 여성들은 더욱더 헌신된 삶으로 자신을 드리게 됐다. 그것이 바로 전도부인의 삶이었다. 다시 김세지의 이야기다.


"죄악에서 죽을 것을 면케 하여 구원의 도를 알게 하셨으며, 또 나로 하여금 나 일신만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나의 아는 것과 배운바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의 도를 많은 남녀에게 전파하게 하여, 이로 인하 여 주의 말씀을 듣고 믿기로 작정한 남녀의 수효가 수천에 이르게 된 것은 첫째로,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돌리고 둘째로는 세상 사람들에게까지 이를 자랑하여도 과도한 자랑이 아닐 줄 아는 바이다."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데 더하여, 아는 것과 배운 것을 전파하는 일까지 하게 된 것이다. 복음의 힘은 억압받고 있던 여성들의 삶의 터 전이 그야말로 ‘온 천하’가 되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사진 - 한국교회 초기 전도부인들. [중앙이 전삼덕 전도부인] / 선교사와 성경공부 중인 전도부인들) 


(사진 - 1920년대 원산지역에서 활동한 전도부인들)

 

19세기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왔을 당시 선교사들의 눈에 비친 한국 여성들의 지위는 공통적으로 한국의 남성에 비해 열등한 존재 로 인식되었다. 19세기『은둔의 나라 한국』을 쓴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는 한국 여성을‘이름이 없는 존재’라고 불렀다. 조선 여자 의 지위는 향락과 노동의 도구라고까지 말한 바 있다. 여성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은 것은, 집안에 갇혀 사는 여인을 부를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성들에게 이름이 생긴 것은 그나마 장옷이라도 걸치고 나들이를 시 작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이것은 부유한 계층의 경우였고, 대부분의 경우는 이름이 없었다. 


미북감리회 선교사 존스(George H. Jones, 조원시)는‘한국 여성 의 지위’(The Status of Woman in Korea)라는 논문에서 한국 여성의 열등적 지위의 원인을 이원론적인 음양설에서 찾아 설명하기도 했다. 또한 189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 입국하여 활동했던 무스(Jacob R. Moose, 무야곱)는『1900년, 조선에 살다』에서, 한국 소녀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불공평하게 태어났으며, 아들로 태어나지 못했으므로 ‘섭섭이’라는 이름을 갖기도 한다고 쓰고 있다. 흔히 말하는‘살림 밑천’으로, 놀 때도 일하러 갈 때도 항상 아기를 업고 있었으며, 심지 어는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 등교할 때도 아기를 업고 등교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조선 여인들은 남성들에게 있어서는‘지각이 없는 존재’였으며,“조선에서 여인에게 내려지는 지독한 멸시만큼 슬프고 통탄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조선 여인들의 처지를 동정했다. 조선시대의 여성 은 한마디로 말해 의무만이 있었고 권리와 자유는 없었던 것이다. 


조선 여인들에게 이름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서구 문물과 교육이 들어오면서부터 생겨났다. 1906년 6월 13일자「제국신문」에 ‘여하무명(女何無名)’이라는 글이 실렸다.


"한국 여자들은 성만 있고 이름 없어 이 부인 김 소사니 부인 칭호 좋지만은 허다한 이부인에 허다한 김 소사를 그 뉘라서 분별할까. 이 전 역사 상고하니 유명한 부인들은 이름 없는 부인 없고 지금 세계 어 느 나라 이름 없는 부인 있나. 시대가 변천하야 여자사회 발동할 제 이름 없이 못 되리니 여 학도들은 자연이 있을 터요. 부인협회 여자 성 없고는 못될지니 이름 짓기 시작하오. 여자 이름 처음이라 듣기에 이상하나 별호같이 통용하면 자연 습관 무방이오. 이름을 짓더라도 당자 이름 괴이하니 순순하게 자호같이 일일이 시행하면 그 아니 좋겠는가, 이름 없는 여자들은 귀신도 수치 되네. 우리나라 여자들도 남 같이 이름 지어 사람노릇 하야보세" 


한말, 한국 여성은 두 가지 커다란 변화의 기로에 서있었다. 첫째 는, ‘인간’인 여성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과, 둘째는 ‘한국 여성’으로 자리를 찾는 것이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기독교 선교는 한편으로는 남성과의 관계에서 여성의 지위를 회복시키는 일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습된 여성의 지위, 특히 양반계층의 여성의 신분 적 우월감과 천민계층 여성의 비속감을 타파함으로써 같은 여성으로 서 인권을 소유하게 한다는 목적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초기 한 국 기독교의 여성 선교는 단순한 '교인 만들기'가 아니었다. 복음을 들 은 여성들이 자신의 억압된 위치와 능력을 확인할 것과,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기독교적 인간 이해의 틀 안에서 자기 자리 를 찾아가는 운동이어야 했다. 억압의 인식을 벗어버리고자 대문을 박차고 장옷을 벗어 던지며 세상 속으로 첫 걸음을 내디딘 여성들이 있었다. 


최초 여의사 박에스더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부터 이야기를 해 보자. 박에스더 의 본래 이름은 김점동이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서 세례를 받고 에스더라는 이름을 지니기 시작했다. 그는 열 살 때 아버지에 이끌려 이화학당에 들어갔다.


"...내가 열 살적에 아버지는 나를 스크랜턴 부인에게 데려다 주었다. 아주 추운 때였는데 부인이 나를 스토브 가까이 오라고 하셨다. 나는 스토브라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 서양 부인이 나를 그 속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줄 알고 겁먹었지만 아름답고 친절한 얼 굴을 보고 그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 당시 학당에는 나 말고 세 명의 여자 아이가 있었다. 그때 나는 밥 먹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도 몰랐다."


공부를 하면서 특히 좋아한 과목은 영어와 오르간이었다. 영어실력 이 뛰어 났던 에스더는 정동에 있는 여성 병원 보구여관에서 로제타 홀(Rosetta S. Hall, 허을)을 도와 일하기 시작했다. 홀의 소망이 ‘여 성이 여성을’ 진료하는 것이었으므로 보구여관 안에 의학반을 만들어 기초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에스더도 그 반에 들어가 공부하게 됐다. 


1893년 열여섯 살이 된 에스더는 자신보다 신분이 낮았던 박유산이 라는 믿음 좋은 청년과 서양식으로 혼례를 올렸다. 이때부터 박에스더가 되었다. 남편 박유산은 홀의 남편 제임스 홀(William J. Hall, 하 락/홀)의 조수였던 터라 일찍부터 의식이 깨어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을 희생하며 아내가 사회활동과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했다. 그들은 1894년 5월 홀 부부가 평양 개척선교사로 갈 때 동행했다. 


1894년의 평양은 그야말 로 아수라장이었다. 청일전 쟁으로 난리가 나 사람들은 피난을 갔고, 설상가상으로 전염병이 돌아 부상자들과 병자들을 돌보던 제임스 홀 이 그만 열병에 걸리고 말았 다. 치료를 위해 서울로 옮겼으나 회복되지 못하고 1894년 11월 24일 아내 로제타의 무릎에서 운명을 달리 했다. 양화진에 묘 를 마련하여 안장한 후 로제타와 한 살짜리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 하락)은 귀국길에 올랐다. 뱃속에 둘째 아이를 잉태한 상태였다. 귀국하면서 에스더 부부를 데리고 갔다. 에스더가 미국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에스더는 로제타 홀의 주선으로 1895년 2월 뉴욕 리버티 공립학교 에 입학해 공부하면서 뉴욕 유아병원 간호사로 의료 실습을 하기 시 작했다. 의대에 들어간 것은 1896년 10월이었다. 후에 존스 홉킨즈 대 학이 된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이었다. 로제타 홀은 의학공부를 하는 에스더를 미국에 남겨두고 아들 셔우드 홀과 새로 태어난 딸 에디스 홀을 데리고 1898년 11월 다시 내한해 의료활동을 벌였다. 에스더의 남편 박유산은 아내가 공부하는 동안 로제타 홀의 친정인 셔우드 농 장에서 일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그러나 아내의 졸업과 귀 국을 두 달 앞두고 급성 폐결핵에 걸려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숨을 거 두고 말았다. 남편을 타국 땅에 묻은 슬픔을 뒤로한 채, 에스더는 당당히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어 1900년 고국 땅을 밟았다.‘한국 여 성이 한국 여성’을 진료하는 시대를 연 것이다. 


귀국 후 에스더는 보구여관과 평양 기홀병원에서 여성을 위한 진 료활동을 벌였다. 평양맹아학교와 간호사 양성원, 그리고 전도부인을 양성하는 여자성경학원 교수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헌신하기를 10년, 그의 몸은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다. 남편과 같은 폐결핵이었다. 결국 1910년 4월 13일, 34세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사진 - The Korea Mission Field 표지에 소개된 박에스더)


이화학당 한국인 최초 교사 이경숙 

이경숙은 이화학당 최초의 한국인 교사이며,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시란돈)의 부인 W, B. 스크랜턴의 양녀였다. 이경숙은 1851 년 충남 홍주에서 가난한 선비의 딸로 태어났다. 1869년 18세의 나이 에 청상과부가 돼 가난한 친정집 살림을 도우며 어려운 생활을 해야 만 했다. 1888년 37세의 나이에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올라와 삼촌댁 에 머물면서 바느질과 빨래 등 허드렛일로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이러한 삶은 그녀가 인생을 비관하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동대문 밖 여 승방에 가서 머리를 깎고 중노릇이나 해야겠다는 마음을 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친척집에 바느질을 하러 갔다가 그 집 남편 이 미국 여선교사의 한글 선생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때 친척을 통해 서양 선교사를 소개 받은 것이다. 그가 바로 W. B. 스크랜턴이었 다. 이경숙은 W. B. 스크랜턴의 사랑에 감격했다. 


이경숙이 W. B. 스크랜턴 집에 들어가 살기 시작한 것은 39세 때였다. 그녀는 집안일 뿐 아니라 이화학당 일도 함께 하였다. 이 때 로드와일러(Lousia C. Rothweiler)도 이화학당에서 스크랜턴 부인과 함께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로드와일러가 다른 지역으로 잠시 사역을 나가 있을 때면 이경숙이 그 빈자리를 대신했다. 이경숙은 이화학당에서 한글과 한문을 가르쳤으며, 서양인 여자를 구경하러 오는 조 선 여인들의 안내를 맡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 이경숙은 서양 선교사들의 신임을 얻게 됐고, 드디어 1890년 9월 정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드루실라(Drusilla)라는 이름도 얻을 수 있었다. 


이화학당에서 만난 로드와일러와 이경숙은 W. B. 스크랜턴이 잠 시 귀국한 사이, 사역을 함께 했다. 그런데 이경숙에게 있어서 로드와일러는 여러 모로 부담스러운 게 많았다. 로드와일러는 독일계 미국 인 교육자로 W. B. 스크랜턴보다 20년 정도 젊었다. 그녀는 부드럽고 온화한 W. B. 스크랜턴과는 달리, 학교의 일을 철저하게 규칙에 따라 수행하는 조직적이고 명철한 면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로드와일러의 올곧은 성품을 견디지 못한 이경숙은 이화학당을 떠나 이리저리 방황 하다가 W. B. 스크랜턴이 다시 돌아온 뒤 다시 합류한다. 


이경숙은 다시 돌아온 W. B. 스크랜턴과 서울과 경기이남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부인으로 활동했다. 1909년 10월 8일 W. B. 스크랜턴이 별세한 후에는 수원지방의 전도부인이 돼 수원 종로교회 여선교회 사업과 교회에서 설립한 삼일여학교의 교육사업을 관장했다. 이경숙으로 인해 2명에 불과했던 학생 수가 20명으로 늘어났으며, 정신이상 의 40대 여인과 무녀를 기도로 고치는 기적이 일어나 ‘귀신 쫓는 여인’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60세가 되던 1911년 이경숙은 일선에서 은퇴하고 상동교회 안에 있는 조그마한 방에서 살다가 1930년 1월 9일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경숙은 불우했던‘이름 없는 여인’에서 환경을 극복하고 한국인 최초의 여성 교사가 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은 W. B. 스크랜턴을 통해 얻은 복음의 힘이었다.  (사진 - 이화학당 교사들과 학생들[1901년])


한국인 최초의 미국 대학 문학사 하란사  

"두 가지 가정 일에 대한 불평이 타당하다고 인정할지라도 다음 사실만은 꼭 알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정규 고등 학교 졸업생이 그저 요리나 바느질하는 법을 알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한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그 학교들의 목 적과 방향은 슬기로운 어머니, 충실한 아내 및 개화된 가정 주부가 될 수 있는 신여성(New type of woman)을 배출하는 것이지 요리사나 간호원 침모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1911년 당시 이화학당 대학과 교수이자 기숙사 사감으로 있던 하란사가 영문으로 발행되는 선교잡지 The Korea Mission Field(Vol.7, No.12, 1911. 12)에 기고한 글의 일부이다. 


이 글은 이 잡지 7월호에 윤치호가 "기술교육의 필요성"(A Plea for Industrial Training)이란 글을 발표하면서 한국에서의 여성교육을 비판하는 중에, “新학교 학생들은 요리하는 법을 모른다. 바느질하는 법, 옷감을 자르고 빨고 다리미질하는 법도 모르며, 어떤 때엔 시어머니에게도 순종치 않으며, 대체로 집안 살림하는 법을 모른다”는 식 의 주장을 한 것에 대한 반박을 하고자 쓴 것이다.


하란사는 우리나라 초기 여성교육의 역사에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인물로 눈길을 끈다. 그는 1875년 평양의 김해 김씨 집안에서 태어나, 인천 별감으로 있던 하상기의 후처가 됐다. 이화학당이 여성을 위한 신교육을 한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교사로 있던 프라이(Lulu E. Frey, 부라이)를 찾아갔다. 처음에는 기혼이라는 이유로 수차례 거절을 당 했으나 굽히지 않고 청해 입학할 수 있었다.나중에 가서 조혼이 공 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재학생의 결혼을 금했지만, 초기에는 기혼여성도 이화학당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란사는 그 중에도 열성적인 학생이었다. 하란사라는 이름은 이화 학당 시절 란사(낸시)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서양식으로 남편의 성을 따라 지은 것이다. 남편이 고위 세무직 공무원에 오른 후, 하란사는 1년간 일 본 동경의 경응의숙에서 유학할 기회를 갖는다. 그 후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미 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 시 소재의 웨슬 리언대학에 입학해 1906년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조선 최초의 여자 유학생이자 여자 미국 학사가 된 것이다. 웨슬리언 대학교는 감리교 재단의 대학으로서 미 국 전역에 걸쳐 있는데, 그 가운데 하란사가 수학한 오하이오 주 웨슬리언 대학교는 1842년에 건립된, 교양 교육이 유명한 학교이다.


하란사는 1911년 이화학당의 대학과 교수이자 기숙사 사감으로 등용됐다. 1916년에는 미국 감리회 4년 총회에 참석하면서 미주지역 순회강연을 했는데, 그때 모금한 돈으로 1918년 정동제일교회에 한국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하기도 했다.  (사진 - 하란사)


(사진 - 언더우드 선교사가 펴낸 첫 영한사전인 <한영자전>)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한글과의 만남으로 시작됐다. 어느 나라든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들어가서 처음 해야 할 일은 그 땅 사람들 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그런 후에 선교사들은 토착 교인들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 경전인 성서를 비롯한 기독교 문서들을 선교지 토착언어로 번역, 출판, 보급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선교 사역을 시작한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우선 한국어를 배워야 했다. 그러나 당시 선 교사들이 한글을 배울 수 있는 교과서는 충분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프랑스 선교사들이 편찬했던『한불자전』이나 로스로스(John Ross, 나약한)가 출판했던『한국어 첫걸음』Corean Primer 정도를 참조할 수 있었지만,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이 한 계를 극복하기 위해 초기 한국 선교사들은 한글 어휘를 수집하고 정리해 한국어와 관련된 다양한 사전을 출판했고, 한글의 체계를 연구 해 한글 문법서를 만들어 냈다. 비교적 한국어 실력이 탁월했던 언더우드와 게일 등이 이 작업을 주도했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는 1889년 문법책과 사 전을 완성한 후,『한영문법』Introduction to the Korea Spoken Language과『한영자전』,『영한자전』을 간행했고, 게일(James S. Gale, 기일)은 1893년 서울에서『사과지남』Korean Grammatical Forms을 발간한 데 이어, 이미 간행된 여러 사전을 참고하고 자신이 수집한 어휘를 기초로 하여 1897년에 『한영대자전』을 발간했다. 이 때 베어드(Willam. M. Baird, 배위량)의 부인 애니 베어드(Annie A. L. A. Baird, 안애리)는『한글입문서』Fifty Helps for the Begginner in the Use of the Korean Language를 발간해 한국어를 배우는 표준 교과서로 사용될 수 있게 했다. 물론 여기에는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채용한 한국인 어학선생들의 도움이 크게 작용했다. 


선교사들은 어학선생을 고용하여 한국어를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의 고유문화와 전통, 종교와 역사를 접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서 한글은 자연스럽게‘기독교 언어’로 자리를 잡게 됐다. 미북장로회 선교부는 1893년 1월“모든 문서는 한문을 섞지 않고 순전히 한글로 인쇄한다”는 방침을 채택했다. 이로써 한자가 배제된 순한글 문서들 이 기독교를 통해 세상에 반포됐다. 아펜젤러(Henrry G. Appenzeller, 아편설라)의 미북감리회 선교부도 1888년 배재학당 안에 한글 자모를 구비한 활판소를 차리고 성서와 찬송가를 비롯하여《텬로력뎡》,《쟝 원량우상론》,《셩교촬리》등 각종 기독교 한글 문서를 출판했다. 나 아가 미북감리회 기관지 <죠션크리스도인회보>(1897)와 미북장로회 기관지 <그리스도신문>(1897), 배재학당 학생회 기관지 <협성회회보 >(1898)와 <매일신문>(1898) 등 순한글 신문을 비롯하여 한글 보급운 동에 크게 기여한 독립협회 기관지 <독립신문>(1896)도 이곳 배재학당 활판소에서 인쇄했다. 


이처럼 선교사들이 한글을‘선교 언어’(mission language)로 채택 해 성서와 기독교 문서, 신문들을 발행함으로써 기독교 복음은 짧은 기간에 전국, 전 계층으로 확산됐다. 그 결과 기독교가 한글에 도움을 받은 것에 못지않게 한글도 기독교에 큰 덕을 입었다.


한글은 기독교를 만나는 순간,“4백년 긴 잠을 자다가 마치 자명종 소리에 놀라 깨어나듯 이제 일어나”그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세종대왕 창제이후 4백년 넘게 한자를 숭상하는 수구보수 세력에 의 해 억압당하면서‘잊혀진’글로 남아 있다가, 기독교를 만나 비로소 그 우수성과 효율성을 맘껏 발휘하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무시당해왔던 한글의 가치를 재발견해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기독교는 한글 해방운동의 공로자로 인정받아 마땅하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할 당시부터‘나랏 말삼’(國語)이었다. 그 런데 한글은 창제 이후 4백 년 동안 한문을 숭상하는 사대주의 봉건세력 때문에 나라와 민족의 글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기독교 선교가 이루어지면서 비로소‘나라 글’(國文)로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기독교와 한글은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상생(相生의) 관계를 맺으며 그 역할과 기능을 맘껏 발휘했다. 


무엇보다 성서를 비롯한 모든 기독교 문서를 한글로 번역, 인쇄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한글은 어휘와 표기에서 중국어나 일본어는 물론이고 서양의 다른 어떤 언어에 전혀 뒤지지 않는 능력을 가진 뛰어난 언어인 것이 증명됐다. 특히 1911년 신구약 성서 전체가 한글로 번역 돼 총 2,174쪽에 94만여 자를 수록한《성경전서》한 권의 책으로 인쇄돼 나왔는데, 창제 이후 한글이 이처럼 풍부한 어휘와 활자로 자신 의 존재를 표현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사실 해방 직전까지 한글(한국어)을‘공공 언어’(public language) 로 사용한 곳은 교회뿐이었다. 일제 총독부가 1940년 이후 교회에서도 일본어로 설교하도록 지시를 내리기는 했지만, 일본어로 유창하게 설교를 할 수 있는 한국인 목사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 지시는 효력이 없었으며, 교인들은 여전히 한글 성서와 찬송가를 사용하여 예 배를 드릴 수 있었다. 또한 최현배가“우리말, 우리글 수호의 공을 기독교에 인정하여야 마땅하다”고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 강점기 한글을 지키려 애쓰다가 수난 받은 한글 운동가의 대부분이 기독교인 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맞서 한글을 수호하려는 어떤 시도도, 정치적 저항운동으로 해석돼 갖은 탄압과 박해를 받았다. 그 대표적 인 것이 1942년 일어난‘조선어학회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체포 돼 1943년 함흥 감옥에서 순국한 이윤재는 서울 안동교회 장로였고, 같이 투옥됐던 최현배는 새문안교회 집사, 김윤경은 정동교회 교인이 었다. 이 외에 1920년대부터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한글 연구와 한글 보급운동을 전개한 정인승과 정태진, 장지영, 이만규 등도 교회와 기독교 학교를 배경으로 활동했던 기독교인들이다. 


이윤재와 최현배, 김윤경 등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대항해 한글을 연구하고 지킨 기독교인 한글학자들은 주시경의 제자들이다. 주시경은 1890년대 다른 학생들처럼‘영어를 배워 출세하려고 ’아펜 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입학했지만, 학비를 벌기 위해 학당 내 활 판 인쇄소에서 일하다가‘나라 글’인 한글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한 후 평생을 한글 연구와 보급운동에 헌신한 근대 한글운동의 개척자이자 선구자이다. 그의 한글운동은 교회와 기독교를 배경으로 해서 이루어 졌다. 기독교 학교인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에는 정동교회 청년회 임 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보구여관 간호원양성학 교와 상동교회 부속 청년학원 교사로 근무하면서 본격적인 한글 연구 와 교육에 임했고, 상동교회 청년학회가 발행하는 순한글 <가뎡잡지> 편집을 맡아 자신의 연구 결과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주시경을 비롯한 기독교인 학자들의 한글 연구는 선교사들 이 먼저 연구한 결과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선교의 필요성에 따라 이루어진 선교사들의 한글 공부와 연구를 통해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 성이 증명되었고, 의식 있는 한국인들이 거기에 자극을 받아‘자기 나라 글’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된 것이다. 선교사들이 펴낸 한글 문법 책이나 어휘사전은 한글에 대한 과학 적 연구의 기초가 됐고, 선교사들이 영문 저술이나 논문을 통해 발표한 연구결과는 한글을 서방세계에 알리 는 창구가 됐다. 선교사들의 한글에 대한 평가는‘최상’이었다. 예를 들어 개척 선교사 언더우드는 한글을‘세계 2위의 문자’로 평가하기도 했다. 


신구약 성서 전체가 한글로 번역, 인쇄되어 나온 것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래‘한 권의’책 속에 가장 많은 어휘와 문장을 담은 것 으로, 한글로 모든 사상, 모든 사물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 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나아가 한글 성서와 기독교 문서를 통해 한글의 가치를 재발견한‘민족주의’학자들에 의해 한글의 과학적 연구와 실용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기독교 선교가 이루어지고 성서가 한글로 번역되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한글은 더 오 랜 세월을 깊은 잠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현배가“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의 거룩한 뜻이 기독교에서 실현된 것”이라 한 것이나, 전택부가“한글 성서는 한국 국어사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사건”이라 표현한 것은 정확했다.


이렇게 기독교 선교가 시작되면서‘길고도 깊은 잠’에서 깨어난 한 글은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장점을 십분 발휘해 봉건사회에 억눌리고 소외당했던 부녀자와 민중계층의 글로 다시 태어났다. 기독교는 글을 깨친 민중계층에 자의식과 능력 개발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고, 이로써 자유와 평등을 기반으로 한 시민사회가 건설될 수 있었다. 그 리고 기독교는 민족문화 말살정책을 펼쳤던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서 한글을 보듬고 지켜나가는 수호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많은 기독교 한글학자와 한글운동가들이‘나라 말’인 한글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고 그로 인해 많은 수난을 겪었다. 이들의 수고와 희생을 바탕으로 한 글은‘멸절의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렇게 기독교는 한글을 깨우고 갈고 닦아 지켜낸 공로자로서 교회사 뿐 아니라 한국 민족 사에 분명한 흔적을 남기게 됐다.  


(사진 - 주시경 선생)




선교사들이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진 첫 번째 이유는 효과적인 선 교를 위한 방책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의 구체적인 상황을 연 구해 선교활동에 도움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부 선교사들 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 단계에까지 도달했고,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근대 한국학의 초석이 됐다. 


선교사들이 한국을 학문적으로 연구해야 했던 이유는, 한국의 역사 와 문화, 그리고 생활 전통에서 쉽게 발견되는 표면적인 현상 너머에 또 다른 차원의 심오한 깊이와 무게가 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이 것이 선교라는 대전제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학문적 노력은, 한국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지 않은 시점에서 이루어진 것 이어서 더욱 의미가 있었다. 


선교사들의 한글 이해와 한국 역사 이해에 대해서는 다른 장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므로 서로 중복되는 내용은 제외하기로 하고, 여기 에서는 특별히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를 통해 활동한 선교사들의 한국 이해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는 대영왕립아시아학회(The Royal Asiatic Society of Great Britain and Ireland)를 본부로 한다. 대영왕립아시아 학회는 범세계적인 조직으로, 1824년 영국 왕 조지 4세가‘아시아의 과학, 문학, 그리고 예술을 진작시키는 일과 관련된 주제들을 탐구하기 위해’설립했다.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의 첫 모임은 1900년 6월 16일 토요일, 서울 유니온 클럽의 도서실에서 있었다. 참여한 사람들 중에는 일반 외 국인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들은 선교사였다. 이 학회는 창립 직후‘출판하지 않으면 사라진다!’는 모토 아래 수준 높은 잡지를 간행하기로 결의하고, Transactions of 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를 발간했다. 이 잡지에는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발간이 중단된 때까지 모두 30권 67편의 논문이 게재됐다. 이 논문들 가운데 선교사들의 연구를 중심으로 한국과 관련된 항목들 을 따라 선교사들의 한국 이해가 어느 지점까지 도달해 있었는지를 대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선교사들 가운데 게일(James S. Gale, 기일)과 헐버트(Homer B.l Hulbert, 할보), 존스(George H. Johns, 조원시), 트롤로프(Mark N. Trollope, 조마가)의 연구를 통해 한국의 종교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 자. 이들은 공통적으로 한국의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적 접근방법을 사용했다. 또한 한국의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 고조선 당시의 국 제적 역학관계를 성찰했다. 이 과정에서 유교나 불교, 그리고 샤머니즘이 한국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연구했다. 이 연구 는 오늘날의 종교 연구 방법에 버금가는 학문적 수준을 보여준다. 세부적으로는 한국 민간 종교의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서까지 역사적인 근원을 쫓아 설명해 내고 있다. 또 그런 점들이 구체적으로 중국이나 일본과는 얼마나 유사하고 얼마나 상이한지에 대해서도 분석하고 있 다. 이 부분은 한국의 종교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는 동시에, 지금도 여전히 한국 학자들이 학문적으로 검토하기에 적당한 논점을 보여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들은 한국에 대한 연구를 위해 방대한 분량의 한국 및 중국의 서 적들을 수집하여 따로 정리하고 보관했다. 그리고 이 자료들을 활용 하기 위해 별도의 도서관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렇게 수집된 것들이 한국학 관련 서양어 서지학 목록으로 정리되어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으며, 따라서 유용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트롤로프의 노력에 이어 이를 최종적으로 정리한 사람은 언더우드(Horace H. Underwood, 원한경)이었다. 이것이 A Partial Bibliography of Occidental Literature on Korea 라는 제목으로 1931 년 연희전문학교에서 출판됐다. 그리고 여기에 조금 더 보완된 것이 엘로드(J. McRee Elrod)에 의해 연세대학교에서 An Index to English Language Periodical Literature Published in Korea 1890 ~1940 라는 제목으로 1960년에 출판됐다. 이 자료들은 지금도 한국학 연구를 위 해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는 기초자료이다. 


한국에 대한 선교사들의 이러한 학문적 연구 성과는, 한글에 대한 연구는 물론 한국의 역사 자체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고, 한국의 종 교와 문화 전반으로 저변을 확대해 나갔다. 여기에는 한국의 시와 고 전 문학에서부터 한국의 민화와 화가들에 대한 소개, 한국의 전반적 인 예술분야 연구, 서울과 강화를 비롯한 한국의 도시들에 대한 연구, 한국의 선박과 건조 기술에 대한 연구, 한국의 갑옷과 무기 체계, 한 국 무덤의 양식, 한국의 천문학, 한국의 음식과 요리법, 한국의 동물 과 사냥 기술, 한국의 종, 한국의 과거제도, 한국의 결혼 풍습과 장례 문화, 한국의 의학과 약 제조 기술, 한국의 조류, 한국의 사찰과 사원, 한국의 지리와 지질, 식생, 금광, 기후, 도로체계, 생물학, 도자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항목들이 망라되어 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학문적인 노력을 통해 한국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려져 있던 내용들이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수준으로 소개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 발표된 논문들은 한국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일제 하 정치적인 위기 속에 있던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발굴해 한국에 관심을 가진 많은 학자들과 일반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이다. 지금도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는 한국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연구해 수록한 학술지를 발간하고 있으며, 각 종 세미나와 연구모임, 단행본 발간을 통해 한국학의 세계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러한 성과는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서양의 학문적 방법을 이용해 꾸준하게 한국의 역 사와 문화, 그리고 자연과 생태를 연구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사진 -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에서 간행한 한국학 연구 저널 표지. 이 저널의 표지에는 일제강점기에도 중앙에 태극문양이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삼문출판사(三文出版社, The Trilingual Press)는 한국 선교에서 출 판과 인쇄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인식한 미북감리회 선교부가 1889년 9월 배재학당 내에 설치한 인쇄소를 겸한 출판기관이다. 선교사들이 처음에 The Trilingual Press라고 붙인 이름을, 김양선은 삼음(三音)출 판사, 이호운은 삼국어(三國語)출판사, 백낙준은 삼문(三文)출판사로 각각 번역했는데, 대체로 백낙준 번역인 삼문출판사를 채택했다. 당 시 한국 내에 존재했던 인쇄시설은 정부 소유인 박문국(博文局) 인쇄 시설 뿐이었다. 삼문출판란 국문, 한문, 영문 등 세 가지 언어로 출판 할 수 있다는 뜻이며, 1900년 인쇄소 시설을 확장하고 감리교출판사 (Korea Methodist Publishing House)로 이름을 바꿨다. 운영은 감리회에서 했지만 장로회에서 발행하는 인쇄도 담당했으며, 1889년에는 장·감 선교사들이 문서선교를 논의하다가 다음 해에 조선성교서회 를 설립하게 된다. 


삼문출판사는, 배재학당 당장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아편설라) 선교사가 현대식 인쇄소를 설치한 뒤 문서선교 사업을 위해 중국 푸저우에서 교육과 문서선교 사업을 하고 있던 올링거(Franklin Ohlinger, 무림길) 선교사를 조선으로 초빙하면서 시작됐다. 올링거는 1887년 12월 내한, 중국으로부터 인쇄기기와 활자를 도입해 배재학당 내에 삼문출판사를 창립하는 한편, 교육과 문서선교 사업을 펼쳐 나 갔다. 


배재학당 건물은 르네상스식 붉은 벽돌집으로 한국 최초의 양옥이 었다. 학생들에게 고학(苦學) 겸 무실역행(務實力行)의 인격을 심어 주기 위해 지하실에 공업부를 설치하고 일을 시켰다. 처음에는 붓 만 드는 일과 구두 짓는 일을 했으나 실패했고, 인쇄소를 설치한 후 학생들에게 식자, 조판, 인쇄는 물론 제본까지 맡게 한 후 그 이름을 삼문 출판사라고 한 것이다. 올링거는 1892년 The Korean Repository란 영문 한국학 연구지를 창간하여 삼문출판사에서 펴내기 시작했다. 


올링거가 자녀들을 잃고 양화진 묘지에 묻은 채 1893년 한국을 떠나게 되자, 헐버트(Homer B. Hulbert, 할보)가 삼문출판사 운영 의 책임을 지고 문서선교 사업을 주관했다. 헐버트는 The Korean Repository의 인쇄와 운영도 맡아 하면서, 이를 통해 한국의 역사, 풍속, 언어 등에 관한 자신의 연구 논문들을 발표했다. 1899년 The Korean Repository가 폐간된 뒤, 헐버트는 The Korea Review를 창간 해 1901년부터 1906년까지 발행했다. 이 때 연재하던 것을 기초로 한 국사에 대한 방대한 저술인 The History of Korea(1905), The Passing of Korea(1906, 대한제국 멸망사)가 발간됐다. 헐버트는“삼문출판사 의 목적이 한국에 있는 외국인과 한국인 사이에 기독교 문헌을 널리 보급하는 데 있음”을 확인하고, 인쇄물이 깨끗하고 질이 좋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인쇄기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한글과 한문영어 의 활자도 바꾸려 했다. 그는 삼문출판사에 부임한 지 9개월 만에 전도지와 종교서적 총 5만2천여 권, 1백8십만여 면을 인쇄 반포했으며, 운영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 올렸다. 


1894년 헐버트는 금화 300달러를 들여 세 가지 형태의 한글 자모 (字母)와 활자제조기를 구입했다. 이때부터 삼문출판사는 한글 활 자를 지속적으로 일본에 공급할 수 있게 됐고, 인쇄기기 공급기지 로서 서울에 있는 다른 두 인쇄업체에 종이와 다른 자재를 보급하 게 됐다. 삼문출판사의 인쇄시설은 아펜젤러와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 등 주한 선교사들이 1893년 성서 번역을 본격화 하면서 이루어지는 각종 인쇄 사업을 지원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1896년에 제본기가 도입돼 제본소도 설립했는데, 삼문출판사가 보 유한 외국 제본기는 당시 유일한 것이었다. 제본소는 초기에 벙커 (Dalziel. A. Bunker, 방거)가 관리했다. 헐버트는 인쇄시설을 확충했 을 뿐만 아니라 종로에다 대동서시라는 감리교 서점을 차리고 삼문출판사에서 발간한 서적을 전국에 보급하는 데 힘을 쏟았다. 


1897년부터는 벙커가 삼문출판사의 운영을 맡았다. 벙커는 일본에 새로운 자모를 발주하고 신약성서와 다른 책들을 28,000부나 인쇄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1898년에는 콥(George C. Cobb)이 운영을 맡았다. 콥이 건강 관계로 미국으로 떠나자 1900년 초 아펜젤러와 스웨어러(Wilbur. C. Swearer, 서원보)가 자원해서 임시 관리인으로 임명받 았다. 1900년 8월엔 베크(S. A. Beck, 백서암)가 삼문출판사의 책임자 가 됐다. 베크는 미국의 협력자로부터 기증받은 5,000달러를 재원으 로 인쇄시설을 크게 확충했다. 또한 장로교 선교부로부터 2천원을 빌려 시설을 확충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감리교 연회에서는 이름을 삼문출판사에서 감리교출판사로 바꿨다. 


감리교출판사는 1902년 정동 선교부 기지에 현대식 2층 벽돌 사옥을 마련했다. 감리교출판사에서 인쇄되는 문서들 중에는 장로교의 것도 많아서 1906년경부터 감리회와 장로회 그리고 조선성교서회 등 교파연합출판사로 개편할 계획을 세우고 빈턴을 미국에 파견했지만, 미북장로회의 불참으로 성사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1909년 경 감리교 출판사는 내외적 여건의 변화로 폐쇄된다.


삼문출판사는 한국의 문서선교와 문화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지 금과 같은 출판사 기능보다는‘인쇄’에 더 역점이 주어졌다. 삼문출 판사에서 간행한 출판물은 크게 네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는 초기 전도용문서이고, 둘째는 기독교 신문과 잡지를 포함한 정기 간행물이다. The Korean Repository, The Korea Review, The Korea Methodist, The Korea Mission Field 등의 영문 잡지와「독립신문」, 「협성회보」,「경성신문」,「매일신문」,「조선크리스도인회보」등 의 신문이 그것이다.「독립신문」은 한국 최초의 민간 한글 신문이고, 「협성회보」는 배재학당 학우회지이다.「경성신문」은 최초의 상업 신문이고,「매일신문」은 한국 최초의 민간 일간 신문이다. 


그리고 셋째는 일반서적과 기독교 학교의 교과서이다. 1890년에 국 한문 혼용으로『배재학당 규칙』을 발행했고, 1896년에는 배재학당 성 경 교과서인『복음요사(福音要史)』,『의회통상규칙』등과 일반 교양 서적으로 헐버트의『대한역사』,『사민필지』등을 펴냈다. 마지막으 로는 성경과 찬송가를 포함한 기독교 문서이다. 삼문출판사는 이렇게 기독교 복음뿐만 아니라 근대 문명의 전파에 막대한 기여를 한 것이다.  


성공회는 1889년 한국에 선교를 시작한 이후 1891년 영국해군에서 기증받은 인쇄기로 인쇄소를 설치하고 맥길의『구세요역(救世要譯)』, 『예수세상구주』,『조만민광(朝萬民光)』을 인쇄, 발행하였다. 


잡지 언론 선구자 차상찬(車相瓚)은 1936년에 펴낸“조선 신문 발달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특히 유의할 것은 그때 그 세 신문(독립신문, 경성신문, 매일신문 - 필자 주)이 모두 순조선신문인 것과 계통이 미국의 계통으로 발행소가 전부 배재학당 내에 있었던 것이니, 그 신문들이 비록 수명은 길지 못하고 또 주간한 인물이 대개 미국계 기독교인이니만치 그 지 면에 기독교 냄새를 많이 피운 것이 사실이나 예의 미국풍의 독립 자 주주의와 자유 평등사상을 많이 조선사람에게 그 영향을 많이 끼치고 또 한글 보급에도 공헌이 퍽 많았었다. 그리고 오늘의 배재학교는 일 개 교육기관에 불과하지마는 그 시대에는 그곳이 독립당들의 근거지 가 되고 언론의 발원소가 되었기 때문에 한말 정당사나 조선신문사를 쓰는 사람은 누구나 그곳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삼문출판사는 우리나라 출판문화 사업뿐만 아니라 정치, 경 제, 문화, 종교 등에 큰 업적을 남겼다.


(사진 - [위] 서울 정동 배재학당 구내에 설치되었던 삼문출판사 / [아래] 삼문출판사에서 인쇄한 「조선크리스도인회보」와  「독립신문」 )



구한말인 1884년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고종의 윤허 아래 이전 가톨릭 선교사들에 비해 윤택한 상황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초기 선교활동이 평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 다. 오랫동안 지속돼 온 한국의 가톨릭 박해와, 그 박해의 인식론적 근거가 되는 위정척사론(爲政斥邪論), 그리고 미국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친미파들이 득세하면서 기존 수구세력들이 갖게 된 위기의식 등 이 맞물려 구한말 한국사회에서도 크고 작은 박해가 끊임없이 일어나 게 됐다. 


더구나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당시 사람들이 가톨릭과 기독교를 구분하지 못해서, 서양 선교사들이란 모두 사악한 학문(邪學)을 전하는 귀신(鬼子)이요, 그들이 믿는 종교는 신구교 합하여 모두 천주학 (天主學)으로 통칭하며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천주교 박해 때와는 달리 정부가 열강들과 조약을 맺으면서 종전(從前)과 같은 유혈(流血)의 참화(慘禍)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선교사들과 한국 권서인들이 전도하러 가는 도처에서 유숙이 허락되지 않거나, 돌을 던지고 욕(毁言)을 하는 등의 일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그런 와중에 기독교를 향한 큰 규모의 박해가 발생하게 되는데, 첫 번째 주목해야 하는 것은 1888년 일어난 소위‘영아소동’으로 불리는 반기독교 운동이다. 영아소동이란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학교, 고아 원, 병원 등에서 아이를 유괴하여 눈을 도려내고 실험대상으로 쓴다 는 유언비어가 퍼져 흥분한 군중들이 교회, 외국인 사택, 학교, 병원 등을 공격한 사건이다. 이는 앞선 1870년 중국에서 거센 반기독교운 동으로 선교사 및 외국 공사관 직원 20명과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살해당한 ‘천진교안(天津敎案)’때와 똑같은 유형의 유언비어가 한국 사회에도 퍼진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친미파의 득세로 자신들의 위치가 불안해진 기존 수구세력이 이런 소문을 퍼뜨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영아소동’당시 퍼진 유언비어의 내용이 중국 천진에서 일어난 반기독교 운동 당시 산동에 퍼진 유언비어와 상당히 흡사한 것을 볼 때, 이는 한국에서 정치적 이득을 보려는 이들이 중국의 반기독교 운동을 모방하여 유발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유언비어를 듣고 흥분한 군중들은 외국 인을 위협하고 학교, 병원 등을 공격했다. 결국 정동에 있던 이화학당 이 큰 피해를 입었고, 각국 공사관들은 자국 선교사들에게 외부 출입을 금할 것을 지시하였다. 


두 번째로 살펴보아야 하는 사건은 1900년 가을에 일어난 ‘도륙밀지사건(屠戮密旨事件)’이다. 1900년 11월(양력) 어느 날, 전국 방방곡곡의 향교에 고종 황제의 밀지가 암암리에 도착한다. 그 밀지에는 친 러파 세력으로 알려진 정부 관료 이용익과 김영준이 자신들의 이름으로 배서를 하고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고 있었는데, 황제의 명령인 즉 “음력 10월 15일(양력 12월 6일)에 일제히 전국의 선교사와 기독교인들을 도륙하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황해도 해주를 여행 중이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 선교사는 11월 20일에 한국인 조력자를 통해 우연히 이 밀지를 손에 넣었고, 즉시 서울에 있는 선교본부에 전보를 쳐 이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만약 이 밀지가 사실이라면 전보 기사들이나 관료들이 자신 의 전보를 중간에서 가로채 파기할 수도 있다고 우려한 언더우드는, 한국인들이 해독 가능한 한국어나 영어가 아닌, 선교사들만 읽을 수 있었던 라틴어로 전보를 치기로 결심한다. 전보를 받은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는 즉시 미국 공사관으로 달려갔다. 미국 공사 알렌(Horace N. Allen, 안련)은 그 전보를 들고 바로 입궐하여 외무대신 박제순과 고종을 만나 자초지종을 물었다. 사실을 알아본 즉, 고종황제는 그런 밀지를 내린 적이 없었고, 이용익과 김영준도 그런 날조된 밀지에 자신들의 이름이 들어간 것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리고 며칠 후 조선 정부는 전국에‘훈령철회서’를 배포하여 앞서 전달된 도륙밀지가 날조된 것임을 강조하고 혹시 있을지 모를 도륙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정부와 서구 영사관들의 노력으로 비록 대규모 도륙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작은 소요들이 일어나 기독교인들이 구타 당하고 관에 잡혀가는 사건들이 1900년 겨울에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도륙밀지 날조 사건’이 일어난 원인은 바로, 같은 해 여름 중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의화단 사건’의 영향에서 찾을 수 있다. 의화단사건이란 1899년부터 1900년 여름까지 중국의 산동, 산서지방 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규모 반기독교운동으로, 선교사 230여명과 중국 기독교인 4만여 명이 살해된 사건이다. 이때 많은 선교사와 중국 기독교인들이 한국으로 피난을 왔고, 서구 열강들은 자국민 보호를 앞세워 8개국 연합군을 조직하여 의화단을 지지한 청나라 정부와 전쟁을 벌였는데, 이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이후 돌이킬 수 없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때 중국의 의화단을 모방한 반기독교 운동들이 1900년 여름부터 한국에서도 일어나는데, 그 주도세력은 동학과 활빈당이었다. 여름부터 전국 각지에서 한국 기독교인들과 서구 선교사들이 구타당하고 교회가 파괴되고 기독교 가옥들이 불타는 사건이 발생했고, 서구 언론 들은 한국에서도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다고 대서특필하며 법석을 떨 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전국에‘도륙밀지’가 배포되자 선교사들은 그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고 공포에 떨게 됐고, 그 배후 세력으로 동학 과 활빈당을 지목했다.‘영아소동’이 수구세력의 주도로 벌어진 반기독교 운동이었다면,‘도륙밀지사건’은 일반 대중에 의한 반기독교 운동이었다. 하지만 동학과 활빈당의 이러한 반기독교 운동은 이후 한 국이 국권을 상실하면서 그 열기를 잃어갔고, 항일운동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워 나갔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1920년대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한 반기독교 운동이다. 1920년대 초, 사상적 조류로서 한국에 들어온 사회주의는 처음에는 이론적, 사상적으로 반종교의 기치를 내세웠다. 그러 나 1925년 반기독교운동이 실력행사로 드러나는데, 1925년 10월 21 일부터 28일까지 개최된 ‘제2회 조선주일학교대회’방해운동에서였 다. 약 3천여 명이 모인 장로교·감리교 연합 주일학교대회에 맞춰 사회주의 계파인‘한양청년연맹’은 10월 25일과 26일에 서울 인사동에 서 반기독교대회와 반기독교강연회를 개최하려 했다. 그런데 마침 주 일학교대회에 참석차 서울에 와 있던 기독교인들이 그 광고판을 보 고 흥분해 강연회장 앞에 쇄도하여 일대혼잡을 이루고, 이에 경찰이 와서 광고판을 내리게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반기독교강연회 는 일본 경찰에 의해 금지됐지만, 이로 인해 기독교가 일제와 유착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고 반기독교운동의 좋은 선전 자료가 되기도 했다. 


이후 신흥청년동맹이 1925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기해 반기독교대회를 소집했고, 1926년 1월에는 한양청년연맹이 그해 크리스마스를 ‘반기독데이’로 지정했다. 그리고 1925년 후반부터 1926년 초까지 전국에 걸쳐 사회주의 사상 단체나 청년 단체들은 기독교 비판을 주 제로 한 강연회, 연설회를 가졌다. 또한 미신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김익두와 같은 부흥사들을“고등무당”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집회를 방 해하는 일들이 잇따라 일어났다. 그러나 1926년 11월 사회주의운동은 종래의 계급주의노선으로부터 방향을 선회하여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제휴하며 기독교를 일단 민족주의 세력으로 간주하게 됐다. 이 로써‘반기독교노선’은‘제휴기독교노선’으로 전환됐고, 사회주의 계열의 반기독교 운동은 종식됐다. 기독교 민족주의자인 박동완, 유억겸 등이 민족협동전선 논의에 참여했고, 1927년 2월 민족연합체인 ‘신간회’가 출범하고 YMCA 총무를 지낸 이상재가 이 신간회의 회장을 맡으면서, 사회주의자들의 기독교에 대한 배척운동은 공식적으로 철회됐다. 


구한말에 경험한 반기독교운동은 기독교가 아직 한국인의 종교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던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1920년대 반기독교운동에서 알 수 있듯, 기독교가 점차 민족주의 운동에 적극 참여 하며 한국인 안에 서고 한국의 종교로 받아들여지자, 거센 반기독교 감정은 점차 수그러져 갔다. 그리고 이후 다시는 그런 대규모 반기독교 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기독교는 한국의 종교로서 자신이 담 당한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나갔다.


(사진 - 선교학교의 운영과 관련한 내한선교사들과 한국인들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동아일보> 만평, 1925년 7월 1일자.)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와서 전개한 선교 활동을 통해 한국 사회의 신분질서를 해소시켰다는 점은, 한국의 전반적인 사회변화에 있어서 상징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기독교 선교의 축은 병원을 중심으로 의료 사업을 전개하는 동시에 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교육사업, 그리고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전도 사업이었다. 한국 사회에서의 신분질서 해소는 기독교 선교의 세 가지 영역에서 모두 나타난 현상이다. 


한국에서 처음 시도된 선교 사업은 의료선교였다. 의과의사였던 알 렌(Horace N. Allen, 안련)은 가장 먼저 한국에 정착한 선교사로 당시 서양 의술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특히 알렌은 한국에 정 착한 직후에 발생한 갑신정변으로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심각한 부 상을 입은 정치가 민영익을 치료하여 서양 의술의 효력을 한국에 널 리 선전할 기회를 얻었다. 이를 통해 알렌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을 설립하고 그 안에 의학교도 함께 개설했다. 


제중원은 가난한 사람들을 진료하기 위해, 그리고 서양 의학을 한국인에게 전수하기 위해 설립됐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제중원은 모든 계층의 한국인들에게 의료 혜택을 제공했다. 특히 남성 의사가 여 성 환자를 진료할 수 없는 상황에 따라, 여성 의료 선교사를 확보해 부인병원을 개설하기도 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의학 또는 위생 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었다. 한국에서 기독교를 통한 신분질서의 해소는 바로 이곳에서부터 시작됐다. 


무엇보다 제중원에서는 양반이나 일부 부유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 심지어 천민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모두가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한국 사회의 신분질서 해소를 향한 출발점이 됐다. 특히 한국인 의료진을 양성해 의료 수혜의 대상을 확대하고, 동 시에 기독교 의료사업의 주도권을 한국인에게 이양하고자 하는 과정 에서 신분질서가 해소되는 극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당시 한국에서는, 지역적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양반과 상 민, 그리고 천민의 신분 구별이 엄격했다. 특히 서울에는 신분계층에 따른 집단 거주지가 형성돼 있었을 정도로 철저하게 신분이 구분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 관자골에는 천민 중에서도 가장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던 백정들의 마을이 있었다. 백정 마을에 사는 한 아이가 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병으로 누워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선교사 무어(Samuel F. Moore, 모삼열)는 당시 고종의 어의이기도 했던 애비슨(Oliver R. Avison, 어비신)을 대동하고 백정마을을 방문했다. 난생 처음 의료 혜택을 받은 백정은 이에 감동했고 건강도 되찾았다.


이 백정은 아들이 계속 교회에 다닐 수 있도록 격려하는 한편, 본인 자신도 용기를 내 교회에 나왔다. 처음에는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의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무어의 의지 는 강고했고, 이에 자 신을 얻은 백정은 더욱 열심히 전도했을 뿐만 아니라, 특정 계 급 해방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백정의 아들은 세브란스 의 학교에 입학하여 한국인 최초의 의사 7인 중 한 사람이 됐다. 그의 이름은 박서양으로, 당시 가장 뛰어난 의사로서의 실력을 자랑하고 있 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장로가 되었다. 백정이 의사가 되는 일과 장로로 장립받는 일은 당시의 상황 에서는 기적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기독교가 한국의 사회변화와 신분질서 해소를 위해 애썼던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다음으로,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교육 사업에 많은 공헌을 했다.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과 사생아로 태어난 버려진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처음에 는 이러한 아이들을 돌보기 위한 고아원 형태의 학당을 설립했다. 그 리고 한국의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남녀 학당이 설립되었다. 이러 한 기관에서는 출신에 따른 차별이 없었다. 따라서 초기에는 이러한 아이들이 교육을 받고 사회에 진출하여 사회변화의 주체가 되는 일도 많았다. 


무엇보다 근대 교육체계가 전무했던 한국에 학교를 세우고 어린 학생들을 모아 교육하는 활동을 통해, 양반의 자제가 아닌 일반 백성의 아이들이 새로운 교육을 받고 중학교를 거쳐 대학교로 진학할 수 있는 교육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교육 사업을 통한 한국의 사회 변화는, 제도적인 차원에서부터 인성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결국 교육 사업은 한국에서 사 회 변화의 주역들을 양성해 배출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는 한국 사 회의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영향력 발휘하며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분야는 교회를 통한 전도 사업이다. 초창기의 전도는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하며, 주일학교를 지도하고, 예배당을 스스로 짓고, 특히 교회가 위치한 주변 지역에 큰 관심을 갖고 사람들을 돌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를 통해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 가면서 새로운 교회 문화를 창출해 나갔다.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새로운 신앙 공동체의 형성 과정에서 한국 사회의 신분 차별의 벽이 크게 해소되는 일이 나타났다.


또한 교회에서는 일찍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해 교인들에게 가르쳤 으며, 찬송가를 편찬해서 많은 노래를 가르치고 불렀다. 특히 대한기독교서회를 설립해 각종 신앙서적을 발간하고 보급했다. 이를 통해 독서문화가 전 계층으로 확대됐고, 서양식 음률이 보급됐다. 한글의 사용을 원칙적으로 준수했기 때문에 한글의 발전에도 커다란 공헌을 했다. 이로써 한문을 중심으로 하는 양반 중심의 문화적 특혜의 벽이 서서히 무너져 갔다. 이러한 문서 사업은 보다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기 위해 철저하게 한글을 중심으로 전개됐는데, 이는 이미 훈민정음을 통해 민간에 알려진 언문이라는 문자체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 능한 일이었다. 


교회는 또 청년운동을 전개했다. 주로 YMCA와 YWCA를 중심으로 전개된 청년사업은, 청년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규정하고 이에 해당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대대적인 문화운동으로 전개돼 나갔다. 특히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 활동을 통해, 사회 변화의 주역인 청년 들을 각성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사회 전반에서 획기적 인 변화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처럼 교회는 사회의 제도를 바꾸는 정책적인 차원은 물론, 무엇보다 사람들의 의식 변화를 통해 서서히, 그 리고 꾸준하게 사회변화를 이끌어 갔다. 


YMCA의 설립 이면에는, 선교사들이 청년회의 창설을 발의하기도 전에 먼저 150여명의 한국 청년들이 청년회의 창설을 요구했다는 사 실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청년운동의 조직적 전개 과정에서 나타난 청년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청년운동은 당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전개되는 일이었으며, 여기에 참여했던 청년들은 물론, 이들과 관련된 사람들 대부분은 한 국의 사회변화를 통한 신분질서의 해소 과정을 몸소 실천했다. 기독교를 통한 한국 사회의 신분질서 해소는 한국에서 새로운 사회문화를 창출해 낸 기본적인 배경이었던 것이다.


(사진 - 백정 출신 기독교인으로 종각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개막연설을 맡은 박성춘 장로[승동교회] / 박성춘의 아들로 세브란스의전 제1회 졸업생으로 한국인 첫 세브란스의전 교수가 되었던 독립운동가 박서양. 에비슨 의사와 함께 외과수술에 참여한 박서양의 모습.)  



조선성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는 초기 한국 기독교의 문서선교를 담당하기 위해 세워진 연합기관이다. 1889년 10월 서울 정동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 선교사 자택에서 열린 장·감 선교사 모임에서 헤론(John W. Heron, 혜론)이 문서선교 기관을 제안했다. 언더우드는 토론토 문서선교회, 미국 문서선교회, 런던 문서선교 회에 재정 지원을 요청했고, 이들의 재정 지원을 받아 1890년 6월25 일 서울 정동 언더우드 선교사 자택에서 The Korean Religious Track Society가 설립됐다. 설립위원장은 올링거(Franklin Ohlinger, 무림길)가 맡았다. 


설립 과정에서 헤론은 기안의 공, 언더우드는 외국 선교회의 재정 원조의 공, 그리고 올링거는 조직의 공을 각각 세운 것이다. 위원으로는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아편설라), 언더우드, 베어드 (Willam. M. Baird, 배위량), 존스(George H. Johns, 조원시), 헤론, 마펫(Samuel A. Moffet, 마포삼열), 벙커(Dalziel. A. Bunker, 방거), 기퍼드(Daniel. L. Gifford), 게일(James. S. Gale, 기일), 레이놀즈 (William. D. Reynolds, 이눌서) 등의 선교사가 참여하였다. 초대 임원 진은 회장 올링거, 부회장 헐버트, 연락 간사 언더우드, 서기 스크랜턴(William. B. Scanton, 시란돈), 회계 펜윅(Malcolm C. Fenwick, 편 위익)이었고, 초기의 실제 사무는 빈턴(C. C. Vinton, 빈돈)이 맡았으 며, 빈턴의 집이 사무실이었다. 1891 1월 The Korean Religious Track Society의 한국 명칭을 조선성교서회(朝鮮聖敎書會)로 정했다.


감리회와 장로회의 연합사업으로 시작된 조선성교서회는 문서선교 와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설립 목적은‘조선어로 기독교 서적과 전도지, 정기간행물의 잡지류를 발행해 전국에 보급하는 것’이었다. 조선성교서회는 당시 문서선교를 위해 출판 업무를 수행했던 심양문광 서원과 삼문출판사와 함께 복음전파의 한 축을 담당했다. 


조선성교서회에서 1890년 처음으로 발행한 책은 언더우드가 번역 한“성교촬리(聖敎撮理)”였다. 다음으로는 모펫의“장원량우상론(張 袁兩友相論)”이 출간됐다. 1892년에는 한국 최초의 노래집이자 찬송 가인 감리교의『찬미가』를 발행했고, 1893년엔“구셰진젼”,“구셰 진주”등의 전도교리 문서를 펴냈다. 조선성교서회는 1893년에 7종, 1894년에 한국 최초의 번역 소설인“인가귀도”등 12종, 1895년에는 게일이 번역한“천로역정”을 각각 발행했으며, 1896년에는 20여 종의 간행물이 나왔다. 1897년에 노병선의“파혹진션론”과 한국 최초의 한 영·영한사전인“한영뎐”을 발행했고, 1899년엔 한국 최초의 생리학 교과서인“젼톄공용문답”을 발행했다. 이후 1911년부터 1940년까지 총 46,334,519부의 책을 발간했고, 924,930,616쪽을 인쇄했다고 한다. 


1893년에는 서적 판매소를 전국 세 곳으로 확장해 서울은 빈턴, 평 양은 마펫, 부산은 베어드가 각각 관리를 맡았다. 1897년 국호가 대한 제국으로 바뀜에 따라‘대한성교서회’로 개칭했다가 1915년에는 조 선예수교서회로 이름을 바꿨 다. 또 1939년 조선기독교서회로, 그리고 1948년 8월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다시 문을 열면서 이름을 재단법인 대한기독교서회로 바꾼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00년부터는 최초의 공식 사무실을 성서공회 건물 안에 설치하고, 독자 건물을 위한 모금운동 착수했다. 그 결과 1906년에는 종로 2가의 낡은 건물을 매입해 대한성교서회의 자체 건물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09년 2월에는 한국인 이용균(이모세) 씨를 판매부장으로 채용했다. 1910년에 본윅(Gerald W. Bonwick, 반우거) 총무가 취임하면서 새로 운 건물을 계획, 1911년 6월에 2층 양옥 건물을 완공했다. 구세군 선교 사로 2년간 활동한 바 있는 본윅은 조선성교서회의 총무로 임명받아 27년간 일하면서 조선예수교서회의 기본 조직을 갖추고, 탁월한 사업가적 기질을 발휘하며 조선예수교서회를 든든하게 세웠다. 전국의 교 회와 기관들의 관심과 협력을 얻기 위해 1912년부터 매년 1월 셋째 주 일을 서회 주일로 정해 기도와 헌금을 하도록 총회적으로 결정하기도 했다. 


1916년에 조선예수교서회의 영어 명칭을 The Korean Religious Book and Track Society로 바꿨다가 1919년에는 The Christian Literature Society of Korea로 다시 변경했다. 이 영문 이름은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대한성교서회가 출간한 책들 가운데 한국 교회 전체에 종요한 영향을 미친 것을 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한성교서회는 주한 외국 선교사들의 영문 잡지인「한국선교현장」(The Korea Mission Field)를 위탁 발행했다. 이 잡지를 통해 당시 한국의 현실과 한국학(선교사들의 한국 문화와 역사 등)을 해외 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 


둘째, 대한예수교서회는 1915년부터 한국 교회 유일의 주간지인 「기독신보」(基督申報)를 발행했다.「기독신보」는 감리교의「죠션 크리스도인회보」와 장로교의「그리스도신문」이 합쳐져 장감 연합으 로 발행한 신문이다. 대한예수교서회는「기독신보」를 통해 일제강점기 중 교회의 사회·문화적 입장을 대변했다. 


셋째, 대한예수교서회는 주일학교 공과와 찬송가를 발행했고, 이를 통해 한국 교회의 교회교육과 교회일치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대한성교서회가 출판과 관련된 공헌만 한 것은 아니다. 문화적 사업에도 많은 공헌을 했다. 독립협회 사건 후 개화파 인물들이 투옥되었을 때, 대한성교서회는 성서공회와 협력하여“옥중전도문고(The Prison Library)”를 만들어 옥중 인사들이 회심하는 데 도움을 줬다. 이를 통해 이상재, 이승만, 유성준, 김정식, 안국선, 김린, 이원긍, 남 궁억 등 10여 명의 개화파 인사들이 기독교인이 되게 한 것이다. 교역 자 문고를 만들었으며,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월력과 선교사수첩을 만 들었다. 또 조선예수교서회는 설립 초기 종교 출판이라는 제한된 벽을 넘어 일반 교양, 위생, 계몽, 어린이, 어학, 역사 등에 대한 책을 출 판, 민족 개화와 문화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1924년에 스와인하트(Martin. L. Swinehart, 서로득)가 건축비 모 금 운동을 펼친 뒤, 1926년에는 상하이에서 활동 중이던 군(C. A. Gunn)이 새 건물 설계해 5층의 현대식 건물을 신축했다. 이 건물에 는 기독교 주요 기관들이 입주했다. 1924년 체계적인 도서 출판을 위 해 편집부를 신설하고 편집부원에 클라크(William. M. Clark, 강운림), 하디(Robert. A. Hardie, 하리영) 목사, 보조원에 김필수, 오천영, 최 성현, 김태원 목사를 임명했다. 1928년 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아 32 명의 이사 중 김필수, 최재학, 전필순, 장락도, 김인영, 차재명 등 6 명의 한국인이 이사로 참여했다. 또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들이 번역 한 940쪽 분량의 한국 교회 최초의 종합사전『성경사전』을 발행했다. 


1940년에는 창립 50주년 기념식을 YMCA 대강당과 체육관에서 가 졌다. 40년동안 조선예수교서회는 700여 종의 서적을 발행해 4,470만 권을 판매했으며, 단편 전도지 2,800만 매를 발행했다. 


1942년 5월에는 일제가 조선기독교서회의 재산을 적산(敵産)으로 선언하고, 관리인을 파송해 한국인 직원들을 해고해 버렸다. 이로 인해 출판 사업이 중단되고, 비품과 기물들을 약탈당했다. 1948년 3월에 해 방 후 최초의 정식 이사회를 개최하여 이사장에 남궁혁, 부이사장에 아 펜젤러(Alice. R. Appenzeller, 아편설라4), 총무에 김춘배, 협동총무에 프레이저(Edward J. O. Fraser, 배례두)를 임명했다. 1946년부터 장로 교, 감리교, 성결교의 찬송가 통일을 위한 합동연구위원회를 조직하고, 1949년 세 교파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합동찬송가를 발행했다. 


1952년 1월엔 아동 잡지「새벗」을 창간하고 편집위원으로 최석주, 전택부, 표재환, 강소천, 이희제가 참여했다. 이 잡지를 통해 어린이 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줄 수 있었다. 1957년 8월에는 월간「기독교사상」을 창간, 오늘날까지‘한국 기독교의 양심과 지성의 상징’역할을 하고 있다. 1975년 이후부터 해외교회의 원조에서 벗어나 자립의 길 에 들어섰으며, 이윤 창출이 어려운 신학서적 출판을 꺼리는 출판 풍토 속에서 수준 높은 신학서적을 출간하고 건강한 평신도 육성을 위 한 서적 발간에 주력하고 있다.


(사진 - 1890년 창립 이후 종로에 문을 연 "예수교서회" 매장 모습 / 1910-20년대에 사용한 조선예수교서회의 신축사옥)





한국의 근대화를 이야기할 때,‘기독교청년회’(YMCA)와‘여자기 독교청년회’(YWCA)를 빼 놓을 수 없다. 이 두 단체는 기독교 청년운동 단체로서 한국 근대사 곳곳에 족적을 남기며 한국 근대화에 한 몫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청년회(YMCA. National Council of the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s)는 원래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이 1844년에 결성한 단체로, 지역 기독교청년회가 세계 각국에 설치되면서 확장됐다. 여자기독교청년회(YWCA. Young Women’s Christian Association) 역시 19세 기 중반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영국에서 사회참여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드러낸 근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전통에 따라 결성됐으며, 이 후 세계 각 지역으로 확대됐다.  


하지만, 이 두 단체가 한국에 들어온 시기는 다소 차이가 있다. YMCA는 선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됐다. 미북장로회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와 미북감리회의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아편설라)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상류 지식층 지도자와 청년들에게 전도하려는 목적으로 교회와는 별개의 기독교 기관을 만 들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당시 한국 사회에 남아 있던 신분제의 잔재로 인해서 상류층 인사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그들 이 참여할 수 있는 기관과 장소를 마련하여 복음을 전하고자 한 것이다.


이들은 1899년 미국에 있는 기독교청년회 국제위원회에 기독교청 년회관 건축비 보조 청원서를 한국 청년 150명의 진정서와 함께 제출 했다. 국제위원회는 전문 간사를 파송해 조사보고를 받은 후 1901년 9월 질레트(Philip L. Gillett, 길례태)를 창설 간사로 한국에 파송했다. 한국에 들어온 질레트는 배재학당 안에 기독학생회를 만들고, 1903년 3월에는 국내 선교사들과 영·미·불·독·일·중 등 각국 외교관, 은행가 실업가 등으로 청년회관 건립을 위한 자문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1903년 10월 28일에는 정동의 공동서적실에서‘황성기독교청년회’의 창립총회를 열었다. 


창립총회에는 5개국 37명의 창설회원이 모였으며, 초대 회장에 헐 버트(Homer B. Hulbert, 할보), 초대 총무로 질레트를 선출했다. 그런 데 창립 이듬해에 이상재, 김정식, 남궁억, 유성준, 윤치호 등 독립협 회 관계 인사들이 가입했다. 이에 따라, 단순히 상류 지식층 지도자와 청년들을 전도하기 위한 기독교 기관을 추구했던 YMCA의 역할에 변 화가 생겼다. 이들의 가입으로 YMCA는 독립협회 운동의 계승자 역할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YMCA는 단순히 기독교 청년운동에 머물지 않고 독립협회 운동의 계승자로서의 역할도 잘 감당해 냈다. 또한 1905년 을사늑약 후 일본으로 유학 간 청년들을 위해 재일본 한국 YMCA를 창설하는 등 해외로도 활동영역을 넓혀 나갔다. 1908년에는 현재 서울 YMCA가 자리 잡고 있는 종로2가에 3층짜리 현대식 건물을 준공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리고 1910년 한일합병으로 전국민이 비통해 있을 때, 학생들의 연합하령회 등을 개최하여 민족정신 함양과 국민계몽으 로 광복을 기약하고 다짐하는 한편, 학생청년조직을 강화해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일본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YMCA 의 활동을 주시한 일본은 기독교 세력의 위험성을 인식하게 됐고, 이 것은 결국 기독교인들과 학생들이 데라우찌 총독을 죽이려고 했다는 조작극을 통해 이른바 ‘105인 사건’을 일으키게 만든 원인이 됐다. 이에 더하여 일제는 일부 YMCA 지도자들과 회원들을 매수,‘유신회’라는 친일단체를 만들어 YMCA를 손에 넣으려 시도하다가 실패하는 사건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 일본의 탄압으로 대부분의 YMCA 지도자가 검거되거나 해외 망명길에 오르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압박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한국YMCA는 일본의 식민지배 아래에서 애국계몽운동의 선봉으로 자리매김했다. 1914년 국내의 여러 YMCA들을 규합해 조선기독교 청년회전국연합회를 조직 한 한국 YMCA는, 1919년 3.1운동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러니 이후 이어진 일제의 문화통치기에는 그 조직망을 전국적으로 갖추어 한국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청년들을 계몽시켜 문명 향상을 꾀하고 기독교 정신을 심는 것을 목적으로 월간지 〈청년(靑年)〉을 1921년부터 발행했고, 평양 YMCA 총무 조만식을 중심으로 물산장려운동과 금주·단연·절제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또한 농민협동조합, 소비조합, 저축조합, 야학 등을 세워 농민의 생활 향상, 의식개발, 단결력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 비록 일제 말기의 탄압과 회유 등으로 서울 YMCA를 제외하고는 모두 폐쇄됐지만, 8·15 해방 후 재건운동을 활발히 펼쳐나갔다.


1955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으로 개칭한 한국 YMCA는 오늘날에도 선교사업을 비롯한 사회교육사업, 농촌사업, 국제교류활동, 체육사업, 출판사업, 지도력개발사업, 캠프 야외활동을 통해 건전한 시민사회 형성에 힘 쓰고 있다.  


선교사들에 의해 추진된 YMCA 결성과는 달리, YWCA는 김활란, 김필례, 유각경 등 기독교인 여성 지식인들에 의해 일제강점기인 1922년 결성됐다. 일본에 유학 중이던 김필례는 동경 YWCA가 경영 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다가 YWCA의 이념과 사업을 몸소 체험한 뒤 1916년 귀국, 1921년 YWCA 창설을 위해 선교사들과 여성 지도자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아펜젤러의 소개로 김활란을 만났다. 이후 신의경, 유각경을 포함한 교육받은 여성들이 같은 목적으로 모여 YWCA연합 회를 조직하기 위한 모임을 가졌고, 1922년 3월 27일 남녀 유지 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성여자교육협회에서 제1차 한국 YWCA 발기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그해 4월 북경 청화대학에서 열린 세계기독학생연맹 (WSCF) 총회에 참석한 김활란(감리교 여성대표), 김필례(장로교 여성 대표)는 일본의 식민지배하에 있는 우리나라 YWCA가 일본 YWCA 동맹의 허가 없이는 조직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이에 따라 이들 은 일본 YWCA 총무 가와이 미치코를 만나 조선에 YWCA가 설립될 경우 세계 YWCA에 단독 가입할 것을 승인받는 동시에, 한국의 단독가입동의서를 첨부해 준다는 약속을 받아 돌아왔다. 그 결과, 비록 일제 치하임에도 YWCA가 조선 단독으로 창설되는 기틀이 마련됐고, 한국 YWCA는 처음부터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 YWCA와의 유대 속에서 식민지 일본 YWCA의 한 지부가 아닌 독립된 조선 YWCA로서의 회원 자격을 갖고 출발할 수 있었다.  


이렇게‘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라는 명칭으로 시작된 YWCA는 강 연회, 성경공부, 야학 운영을 통해 여성을 각성시키는 활동부터 시작하여, 문맹퇴치 운동, 국산품 장려 운동이나 금주·금연 운동, 공 창 폐지 운동, 조혼 폐지 운동 등으로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소설 『상록수』에 나오는 주인공 채영신의 모델인 최용신이 YWCA 운동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의 군국주의와 내선일체 정책이 강화됨에 따라 사회운동 단체들에 대한 탄압 또한 강화돼, 해방 이후 다 시 활동을 재개하는 1946년까지 한국 YWCA 역시 그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시대적인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들 기독교 청년단체의 다양 한 운동이 한국의 근대화에 끼친 공헌은 적지 않다. 선교사들이 상류 지식층 지도자와 청년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설립한 기독교 청년단체 YMCA는, 단순한 기독교단체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적 요구에 따라 애국계몽을 기치로 내세워 한국 전역으로 그 조직이 확대되면서 기독교 정신과 근대적 사상을 한국 전역에 뿌리내리게 했고, 이를 통해 건전한 시민사회의 건설을 꿈꾸게 했다. 그리고 한국 YWCA는 기독교 정 신으로 어둠 속에 있던 여성을 일깨웠을 뿐만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 청소년에 대한 인식 변화를 통해 한국 근대화의 한 축을 담당해 냈다.


(사진 - [위] 초기 YMCA 회관 전경 / [아래] YWCA 하령회에서의 초기 멤버들[1924])




조선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가 사업을 펼쳐 나 가는 데 있어서 근거가 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청년개인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며, 그 청년들을 연합하여 하나로 묶기를 추 구한다”는 파리선언이었고, 또 하나는 정신적, 지적, 사교적, 신체 적 요소를 모두 전인적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사중목적사업(four fold program)이다. 체육사업 역시 그 일환이었다. 한국 YMCA는 사업목표부터기 지덕체의 균형 잡힌 인간형성에 있었던 것이다. 1905년 신흥 사에서 열린 YMCA 운동회에서 YMCA 부총무 김정식은 운동회의 목 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청년회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이는 덕육, 지육, 체육이다. 소위 이것을 삼육이라 한다. 사람이 사람이 되는 것은 도덕이 있고, 지식이 있고, 신체가 건강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들 세 가지 중 하나가 없다면 인격이 추락되어 버린다. 인격이 추락되면 세 계나 우리나라는 물론 가족이나 사회도 존재할 수 없다."


YMCA가 회원들에게 지도한 스포츠는 야구, 농구, 축구, 유도, 검 도, 육상, 체조 등이었다. 이 중 야구는 정확한 년도에 관해서는 논란 이 있지만, 조선 YMCA 총무 질레트(Phillip L. Gillett, 길례태)에 의해 1904년과 1905년 사이에 처음 소개됐다. 질레트가 내한하면서부터 야 구를 한국에 도입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단지 개인의 여가활동을 위해 야구장비들을 챙겨왔다가, 몇 년 뒤 한국 사람들이 야구에 흥미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야구를 가르치는 것이 YMCA활동 에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당연히, YMCA가 야구를 시작 했을 때의 야구 수준은 동네야구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모든 것이 정비되지 않은 상태로, 유니폼 등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선수는 조선 옷에 짚으로 만든 조선 신발을 신고 나왔다. 하나의 배트를 교대로 사용하였고, 내야는 장갑, 외야는 맨손으로, 주자가 없을 때에는 투수의 투구에 대하여 포수는 정확하게 잡으려 하지 않고 아픈 것이 손해라고 생각하여 가능한 한 공을 흘려보내서 백네트를 이용하였다."


하지만 YMCA야구단은 시합을 통해 실력을 배양했다. 그중에서도 YMCA의 허성은“실로 조선인 야구의 아버지, 육성의 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사람이며, 황성군의 투수로서 활약하고 명선수로서 이름을 날렸던”사람이다. 그는 휘문의숙, 오성학교 학생들에게 야구를 지도하며 야구 보급에 힘썼다. 한국 최초의 야구시합은 1906년 3월15일 YMCA와 독일어 학교인 덕어학교 사이에 벌어졌다.


 한국에 야구가 정착하기까지 YMCA의 역할은 두드러졌다. YMCA 에서는 야구, 배구, 농구, 축구 등을 가르쳤고, 한국 최초의 축구 공개 시합도 YMCA와 대한체육구락부 사이에서 벌어졌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에 구기운동이 도입되는 데 있어서 YMCA가 미친 영향이 매우 선 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당시의 축구는 발공, 경구, 척구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선수의 수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골대조차 없 이 경기가 펼쳐졌지만, 무엇이든 처음은 미약한 법이다. 


1906년에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체육단체인 대한체육구락부가 창립됐다. 대한체육구락부의 주된 활동은 축구와 관련된 경기를 개회하는 일이었다. 이 시기에 회동구락부, 대동체육부 등의 단체들도 결성 됐고, 이 시기에 도입된 근대 스포츠 종목은 YMCA가 지도한 축구, 야 구, 농구, 유도, 검도, 육상, 체조 등이었으며, 이외에도 테니스, 스케이트, 수영, 사이클, 승마, 사격 등이 있었다. 이때 도입된 근대 스포츠 종목의 절반 이상이 YMCA가 도입해서 지도한 종목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YMCA는 근대 스포츠를 도입해 보급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확장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출발은 YMCA가 사회단체로는 처음으로 1905년 5월 22일 신흥사에서 체육보급의 시초인 운동회를 개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운동회가 1896년 허치슨(W. F. Hutchison)에 의해 영어학교에서 개최된 이후 1910년까지 YMCA를 제외하고도 다양한 운동회들이 열렸는데, 구한말의 운동회 는 대체적으로 다음의 네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학생이 아닌 일 반인들에게도 체육을 보급하고 체육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둘째, 체육행사뿐 아니라 놀이, 오락과 연설회 등의 활동이 함께 어우러진 축제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셋째, 교육적 기능을 담당했고, 넷째, 군사훈련적 경기가 포함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전에 는 각 학교들이 주최하는 오락과 놀이 중심의 체육행사가 진행돼 오 다가 1905년 이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주권침탈이 노골화면 서 종래의 오락과 유희 중심이었던 운동 종목이 점차 군사적 색채가 강한 종목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운동회가 민족적 위기라 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된 것이었다.  


이런 중에 YMCA는 1905년 신흥사를 시작으로, 1906년 6월에는 흥 천사에서, 1907년 5월에는 훈련원에서, 1909년 5월에는 삼선평에서 큰 규모의 운동회를 개최했는데, 여전히 육상, 축구, 야구 등 근대 스포츠와 놀이적 요소가 강한 전통놀이가 주된 종목이었다. 하지만 운동회를 마친 이후에는 만찬이 이어졌다. 이렇게 볼 때 그 규모는 알 수 없지만 YMCA의 연합운동회가 체육대회이면서도 회원들 사이의 친교의 장이라는 기능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민족적 각성을 한 청년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안 정적인 식민 지배를 꿈꾸는 일본에게는 위험요소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일본은‘운동회가 위험풍조를 나타내고 있다’는 학부차관 타와라 마고이치(俵孫一)의 경고에 따라 1910년부터 연합운동회를 폐지했 다. 당시 운동회가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적 성격을 조선 지배의 커다란 장애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운동회가 유희 에 탐닉하게 하며 (학)부형으로 하여금 예기하지 않았던 비용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당하게 함과 같은 일이 있다고 하면 교육의 보급과 장려에 도리어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이유를 내결었다.  


이렇게 운동회들에 대한 일본의 단속이 있었음에도 YMCA 이외 의 단체들은 여전히 운동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일본이 유독 YMCA 의 연합운동회만을 폐지한 이유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스포츠에 대 한 지식이 거의 없던 조선인들에게 근대스포츠를 알리고 가르쳤던 YMCA의 노력이 스포츠사뿐 아니라 민족사적으로도 얼마나 중요한지를 증명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YMCA뿐 아니라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의 마라톤 코치가 조선적 기독교를 열망했던 김교신이었다는 사례 등에서 볼 수 있듯, 한국 기독교는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의 근대 스포츠 도입과 스포츠를 통한 민족의식 함양에 영향을 미쳐왔던 것이다. 


(사진 - [위] 초기의 황성기독교청년회 회관 전경 / [아래] YMCA 야구단 초기 멤버)






한국에 온 선교사 가운데 한국의 역사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선교사들은 많이 있었지만, 꾸준한 연구를 통해 한국의 역사를 책으로 남긴 선교사는 게일(J. S. Gale, 기일)과 헐버트(H. B. Hulbert, 흘법)였다. 게일과 헐버트가 한국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자료를 찾아 공부하기 시작한 시기는 한국인들조차도 한국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적었던 시절이었다. 대부분 중국의 역사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었으며 한국의 자주적인 역사 서술에 대한 시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한국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정립한 신채호나 박은식의 경우 보다 시기적으로 앞서 있었다. 따라서 게일과 헐버트의 한국 역사 서 술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와서 한 일 가운데 한국의 역사를 올바로 정리할 수 있는 새로운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사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게일과 헐버트가 한국의 역사에 대대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00년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창립된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 에서 첫 번째 발표자로 선정되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 학회 는 가장 먼저 한국의 역사에 대한 연구 논문을 발표하기로 결정하고 여기에 가장 적합한 두 사람을 선정하였는데 그들이 바로 게일과 헐버트였다. 이 두 사람의 선교사가 선정된 것은 당시 누구보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다른 선교사들보다 탁월한 식견을 이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시 한국의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들을 고려하여 게일에게는 한국의 역사를 중국과 깊이 관련하여 서술하도록 요구하였고, 헐버트에는 한국의 고유한 점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역사를 검토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게일은 1900년 10월 24일“The Influence of China Upon Korea”라는 제목의 연구를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게일은 한국의 역사를 중국과 관련하여 B. C. 1122년부터 개관하였다. 그리고 당시 중국 인들이 ‘한국은 작은 중국이다’라고 표현하는 점을 들어 한국은 고대로부터 중국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 에 반해 헐버트는 11월 29일“Korean Survivals”라는 제목의 연구에 서 한국의 고유한 것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역사를 개관하였다. 그리고 천이백 만이 넘는 한국 사람들이 수천 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그 들만의 특별하고 독특한 유산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두 편의 논문은 많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헐버트의 발표가 끝난 후 당시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모였던 학회의 회원들은 한 국의 역사를 보는데 있어서 어떤 관점이 훨씬 더 의미가 있을 것인지에 대해 거침없는 토론을 하였다. 그리고 대체로 한국의 역사는 한국 의 고유한 특징들을 근거로 서술되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수렴되었다.


게일과 헐버트의 연구는 한국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한국 역사의 내용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우선 한국의 역사를 시작하는 시점이 다르다. 게일의 경우라면 중국이 한국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 비교적 확실한 기자에서부터 출발하지만, 헐버트의 경우에는 당연히 단군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한국의 문자 체 계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 게일은 설총이 이두를 발명한 것은 중국의 사상을 한국인들에게 잘 전달하기 위함이었으며 마찬가지로 한글 체 계가 있었지만 여전히 중국의 문자를 사용해왔기 때문에 한글을 사용 한다고 하더라도 한문 없이는 생각을 전달할 방법이 없다고 하였고, 헐버트는 설총의 이두를 통해 한국인들이 중국의 문자 체계에서 벗어 나 독창적인 한국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고 대중교육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평가하면서 이는 이후 한글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글자의 발명을 통해 완성되었다고 하였다. 헐버트는 한글만으로 모든 사상과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상반된 입장으로 한국의 역사 각 항목 하나하나가 서로 비교되고 평가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입장은 지금도 매우 유효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게일과 헐버트가 학회에서의 발표로 한 국의 역사에 대한 연구를 끝내지 않고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시켰으며 결국 두 사람 모두 체계적인 한국의 역사서를 서술하였다는 것이 다. 우선 게일과 헐버트의 역사 서술이 책으로 묶여지기 이전에는 각 각 잡지에 발표되었다. 게일은“A History of the Korea People” 이라는 제목으로 1924년 7월부터 1927년 9월까지 모두 37회에 걸쳐 The Korea Mission Field에 연재되었다. 게일의 글들은 리차드 러트 (Richard Rutt)라는 성공회 신부가 편집하여 James Scarth Gale and his History of the Korean People 라는 제목으로 한 권의 단행본으 로 묶여지게 되었다. 그리고 헐버트는“History of Korea”라는 제목으로 1901년 1월부터 1904년 12월까지 The Korea Review에 연재되었고, 1905년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이 헐버트의 책은 클라 렌스 윔즈(Clarence N. Weems가 정리하여 두 권의 단행본 Hulbert’s History of Korea Vol. Ⅰ. and Ⅱ. 으로 다시 출판하였다. 그리고 헐버트가 쓴 The Passing of Korea라는 책은 신복룡 교수가 번역하여 『대한제국멸망사』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게일과 헐버트는 선교사 가운데 한국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달랐던 선교사였다. 심지어 헐버트의 경우에는 한국의 독립을 위한 적 극적인 활동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기까지 하였다. 일제라고 하는 강력한 통제력이 커다란 압박으로 일상에 작용하던 시절 한국인 들은 다시 한국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서둘러 자 신들의 역사를 정립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역사와 관련하여 외국의 선교사들이 먼저 글을 쓰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당시 한국의 교회에서 한국의 역사가 나름 대로의 체계를 가지고 가르쳐지고 있었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그때 기독교는 한국의 역사를 널리 전하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한국의 역사와 관련하여 게일과 헐버트를 주목해야하는 이유는 그들이 한국의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역사를 서술하였다는 점 때문만 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연구는 그들이 한국에서 살아온 삶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역사를 안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바꾼다고 하는 점을 이 두 선교사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한국의 역사는 한국 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저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가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꾸준하게 연구하고 깊이 성찰 해야 하는 분야이다.


(사진 - [위] 헐버트 선교사와 그가 저술한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국립국어원 제공] / [아래] 게일 선교사와 그가 번역한 첫 한글 소설 <천로역정>)





1890년대와 1900년대 초 한국인들의 서양음악에 대한 이해는 거의 전무했다고 할 수 있다. 1923년 출판된 최초의 한글 음악통론『음악 대해』가 저술된 목적도, 당시 성가대원 및 교인들이 악보를 제대로 읽 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합창의 경우, 단선율만으 로 이루어진 노래를 따라 부르기에도 벅찬 한국인들에게, 4성부의 합창은 부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듣는 것조차도 힘든 일이었다. 평양 숭실학교의 교사로 시무하면서 한국최초의 성가대인 평양 장대현교회 성가대를 만든 모우리(Eli M. Mowry, 모의리)는, 한국에서의 합창 이 얼마나 정착되기 어려운 것인지를 이렇게 털어놓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한국인은 4부로 된 음악을 듣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한사람이 우리 학교의 4부 중창을 듣고 난 후, 한 사람만 노래하고 나머지는 가만히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사람은 30명으로 구성된 합창을 듣고 도망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창기 한국 교회음악은 서양 음악을 모르던 많 은 사람들을 음악가로 만들어 사회에 내보냈다. 서양 음악이 한국에 들어오는 통로가 선교사들이었으며, 서양음악을 배운 사람들이 풍금 소리, 찬송가 소리, 합창 소리에 매료되어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기 때 문이다. 근대 서양음악의 개척자이자 한국 교회음악의 선구자로 여겨 지는 김인식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에 음악을 배운다면 누구나 다 종교 분야에서 시작했다. 왜냐하면 당시에 음악은 대개 서양인 선교사를 통하여 들어왔기 때문이 다. 내가 음악을 배운 동기도 마찬가지다. … 풍금 치는 것이며 찬미하는 것을 몹시 흥미 있게 듣던 나머지 11살에 숭덕학교에 들어가서 창가를 열심히 하였다."


우리나라 근대음악의 효시로 여겨지는‘학도가’의 작곡가이기도 한 김인식은, 동학당 혐의로 체포된 삼촌이 예수교인이라는 구실로 그 혐의를 벗고 생명을 유지하게 된 것을 계기로 어린 나이에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에 나가면서 음악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고, 1897년 숭덕학교에서 창가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16세 때 부터는 숭실중학교에 들어가 더 체계적으로 음악을 공부하고 싶은 열 망으로 헌트(William B. Hunt, 한위렴)의 부인과 숭의여학교 교장 스눅(Velma L. Snook, 선우리)에게 성악을 배웠다. 


김인식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재능은 탁월하였다. 어느 날 기숙사 동료 4명과 돈을 모아 한 선교사로부터 헌 풍금을 구입한 김인식은 너 무 열심히 연습을 한 나머지 기숙사 학생들의 항의로 기숙사에서 쫓겨나게 됐다. 비록 기숙사에서 쫓겨났지만, 그의 실력은 일취월장해 3학년이 되던 해에는 그의 오르간 연주 실력이 너무나 훌륭해서 교장이 그로 하여금 하급반 음악 시간을 담당해 가르치도록 할 정도의 수준에 이르게 됐다.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이에 그치지 않고 리 (Graham Lee, 이길성)에게서 코넷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바이올린도 독학으로 사흘만에 찬송가를 훌륭히 연주해 내는 정도가 돼 그래함 리를 위시한 많은 선교사들을 놀라게 했다. 


김인식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재능은, 1907년 22세의 나이로 상경 해 교육자의 길을 걸으면서 한국 음악의 근대화에 한 몫을 담당하게 됨으로써 더욱 그 빛을 발하게 된다. 영어를 배워 미국으로 유학하겠다는 뜻을 버리고, 시대의 요구에 따라 한국 최초의 음악 교사로 일하게 된 것이다. 그는 황성기독청년회가 설립한 숭실청년학원 중학부를 가르치는 것을 시작으로 기호학교(현 중앙고교), 진명, 오성, 경신, 배재 등 여러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그리고 1909년 최초의 사설 음악전문 교육기관인 조양구락부(調陽 俱樂部)가 생기자 교사로 활동했으며, 그곳에서 이상준·홍난파 등을 가르쳤다. 조양구락부는 후에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轉習所)로 바뀌었는데, 표면상 정음(正音)을 바로잡아 국민의 입지에 도움을 주자 는 것을 발족동기로 내세웠지만, 사실은 나라를 빼앗긴 뒤 애국지사 들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만든 모임의 성격을 가진, 서양음악과 한국 전통음악을 가르친 최초의 음악기관이었다. 한편 이후에 그는 YMCA 에서 음악을 가르치면서 합창을 지도했으며, 종교교회에 본부를 둔 합창대를 만들기도 했다. 이 합창대가 처음 남성만의 합창으로 시작 하여 혼성합창대로 발전한 경성합창대이다. 경성합창대는 한국 합창 운동의 효시가 됐다. 


경성합창대의 놀라운 점 한 가지는 남녀 혼성의 합창대라는 것이 다. 여성이 대중 앞에서 노래한다는 것은 매우 새로운 일이었다. 최초의 성가대인 평양장대현교회의 성가대 역시 남성들로 이루어져 있 었다. 당시에는 가정집에서 여성의 노랫소리가 바깥으로 나가는 것 이 사회적 금기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은 집안에서조차 마 음 놓고 노래를 부를 수 없는 형편에 처해 있었다. 이런 시대에 특수 한 직업적 특성을 가진 기생을 제외한 여성이 마음 놓고 노래 부를 수 있는 공간은 교회가 거의 유일했다. 비록‘ㄱ’자 형태이거나 커튼으로 사이를 갈라 서로를 볼 수 없게 만든 형태의 교회였지만, 여성들은 남성들과 함께 공공의 장소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여성의 침묵 이 강요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집안에서조차 자신의 목소리를 내 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던 여성들이 비로소 노래하는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1886년 설립된 이화학당을 시작으로, 여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 에서 음악은 성경과 더불어 중요한 교과목으로 여겨졌다. 여학교들 이 생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에서 비교적 체계적으로 음악을 배 운 여학생들은, 성탄절과 같은 교회의 큰 절기를 기념하는 행사에 참 가한 대중 앞에서 노래하는 대표자로 나설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감리교에 속한 교회들이 1898년 12월 24일 저녁 정동교회에서 함 께 한 성탄전야 예배였다.‘육 칠 백 명의 남녀가 참가한 큰 규모의 모임’에서 이화학당의 여학생들이 대표로 예배 순서 중 예물을 드리는 시간에 영어가사의 찬미가를 노래했다. 


"정동회당에서는 특별히 이십사일 밤에 형제와 자매들이 일제히 모 여 구세주의 탄일을 경축할 회당 종집 위의 등불을 가득히 달아놓고 문표와 예식을 만들어 절차 있게 행하였는데 … 이화학당 여학도들만 찬미가를 영어로 노래하고 예물로 분금하는 표를 적간하여 차례로 나누어 주고 … 이때에 남녀 중 모인 사람들이 합 육 칠 백 명이 되는데 모두 기쁜 마음으로 구세주 나심을 목도하고 만남같이 알더라."


여성이 공적인 자리에서 노래하는 자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초기 한국교회 여성들이 음악을 통해 강요된 침묵에서 벗어날 주요한 수단 을 찾았음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사진 - [위] 연희전문학교 김영환 교수의 음악수업 광경[1927] / [아래] 이화여전의 캠퍼스 이전 기념 찬송가 제창[1935])



격동의 한말 일제시대에 서구 종교인 기독교는, 민중의 생활중심지였던 장시(場市)를 통해 한국의 역사·문화적 환경 속으로 수용되면 서 민중의 지지를 얻는 종교로 정착돼 갔다. 장시는 선교사들이 선교 활동을 가장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였으며, 기독교의 급 속한 전파와 더불어 선교 거점으로 발전했다. 초기 내한 선교사들 역 시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면 주로 장시(場市)를 중심으로 한 장돌뱅이, 즉 보부상 혹은 장꾼들의 행로(行路)를 참고해 순회전도 여행을 해 나 갔다.


장시는 경제적인 기능 뿐 아니라, 각종 문물의 소개와 전파, 주민 상호간의 정보교환, 음식과 구경거리를 통한 오락기능 등 경제외적인 기능들도 상당부분 갖고 있었다. 신지식과 신문물라고는, 다른 지역 을 다녀 온 시장 상인이 전해주는 것이 유일했다. 이처럼 교통, 통신 이 발달되지 않은 전근대 사회에서 장시는 경제적 기능뿐 만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종교를 포괄하는 기능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의 장시는 19세기말 입국한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앙을 전도 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로 여겨졌을 것이다. 


미북장로회 선교사 블레어(William N. Blair, 방위량)는“장터는 사 람들을 만나기 좋은 장소이며, 복음을 전하기 안성맞춤인 곳이다” 라고 했고, 마펫(Samuel A. Moffet, 마포삼열)이 1890년 10월 20일에 선교 본부의 엘린우드 박사에게 보는 편지에서도 전도 활동에 있어서 장시가 지닌 중요성에 대한 지적이 잘 나타나 있다. 


"장날, 안악에 도착했습니다. 장터는 인근 전 고장에서 온 수천 명의 사람들로 무척 붐볐습니다. 매 닷새마다 이런 장터가 서며, 이렇게 장 이 서면 거리에서 전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한국 개신교의 첫 세례인과 처음 신앙공동체 역시 만주의 국제무역시장‘고려문’을 통해 수용됐다. 즉, 로스(John Ross, 나약한)가 조선 상인 백홍준, 이응찬을 무역장시 고려문에서 처음 만나『예수셩교젼셔』를 번역할 수 있었던 것이다.


"봉황성에서 나는 고려문이 열릴 때까지 엿새 동안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동안 나는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전도를 하고 성경책과 전 도책자를 팔았다. … 봉황성에서 나는 여러 명의 상인들에게서 초대 를 받았는데,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우리의 교리에 대하여 알고 싶다고 하면서 나에게 교회를 하나 세워달라고 하였다,"


1872년 매킨타이어 (John MacIntyre, 마륵 태)와 로스가 조선 상인 을 만남으로써 조선으 로 향하게 된 복음의 씨 앗은 상인들의 등짐에 실려 드디어 조선의 국 경무역 시장이며 의주 만상의 거점인‘의주’에 도착했다. 의주 남문 높다란 2층 누각에는 조선의 첫 관문이라는 뜻을 가진 ‘해동제일관 (海東第一關)’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말 그대로 조선의 국경 도 시이자, 중국으로 통하는 첫 고을이었다.『예수셩교젼셔』라는 성경을 번역한지 10년, 출판한지 5년 만에, 이미 한국은 복음의 문이 열려 수 만 권의 성경이 반포됨으로써 로스가 믿고 바랐던 ‘풍성한 수확’이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고 있었다. 


반포사업의 주역은 한국인 개종자들과 상인 출신 권서(매서인)들이었다. 이들은 의주의 관문에서 시작되는 다섯 갈래의 큰 길을 이용하여 마을마다 성경을 짊어지고 들어가 복음의 씨를 뿌렸다. 다음 자료는 스톡스 선교사의 장터 전도 모습이다. 


"4, 5명의 사역자들이 한 그룹을 이루어 시장이 서는 곳에 가서, 작 은 무리가 모일 수 있는 적당한 곳에 서서, 간단한 복음성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곧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 러면 성경구절을 몇 구절 읽고 짧은 설교를 한다. 쪽 복음서들을 팔고 전도지를 나누어 준 후에 개인적으로 전도를 한다."


구체적으로 장터에 세워진 초기교회는 어떤 것이 있는지 서울의 경우를 살펴보자. 


1910년 이전에 세워진 서울의 감리교회 중에는 종교교회, 자교교회 (자골 교회), 수표교교회처럼 교회 이름의 끝 자가‘교(橋)’자인 경우 가 많다. 다리 옆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다리 옆에는 현방(顯房)이라 는 푸줏간이 있었다. 특히 현방은 소를 잡아 고기를 판매하는 곳으로, 고기를 매달아 판다고 하여‘현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공교롭게도 점포가 주로 다리 옆이었다. 푸줏간 일에 참여한 사람들은 백정이었 다. 백정은 천민 중의 천민이었다. 또한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사대 문 밖은 당연이 교회가 세워지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17세기 중엽 이후 서울의 인구 증가는 대단한 것이었다. 인조(仁祖) 26년(1648)에 95,569명이던 것이, 정조 원년(1777)에 이르면 197,957 명에 이르게 된다. 중인들은 중부인 청진동에 거처하고 있었고, 군교 들은 동대문과 광희문 사이, 그리고 이곳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던 왕십리에 많이 살았다. 사회의 밑바닥에서 호구(糊口)를 이어가 던 상인(常人), 천인들의 주거지역은 성벽 바로 밑 또는 성 밖의 변두리였다. 그들은 이런 곳에 수호 또는 수십 호씩 집단으로 거주했다. 또 가끔 지방에 큰 흉년이 들어 서울로 거지 노릇을 하러 온 사람들 중 일부가 사대문 밖이나 다리 밑에 움막집을 짓고 살았다. 청냉교회 (광희문교회)는 바로 그 곳에 세워진 것이다. 동대문 교회와 수구문교 회(청녕교회, 광희문교회)도 바로 그런 곳에 세워졌다. 


이러한 조건 아래 교회가 세워지기는 지방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 다. 남부지역의 대표적 대 장시가 열렸던 전주 서문 밖 교회 역시 장 터에 세워진 교회였다. 이중환의『택리지』는 전주에 대해서,“전주는 여러 골짜기의 물이 들어와 관개함으로 땅이 기름지고, 물산이 풍부 하다. 또한 화물을 실은 배가 만경강을 왕래하여 추천(楸川)이나 어은 골까지 닿는다. 그리하여 전주는 경성과 다를 바 없는 큰 도시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말 일제기에는 더욱 상업활동이 번성하였다. 1899년 군산항이 개항되고 1910년 전주가 전라북도청 소재지가 되면 서 더욱 그랬다. 전주 서문교회가 세워진 이유도 그 입지 조건이 여행 객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었기 때문이고, 서문 밖에는 장이 이루어 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시는 모두 사대문 밖에 섰고 상인들과 장 인(匠人)들은 성문 밖에 거주했다. 이 때문에 초기 서문교회 교인들은 주로 평민·천민·상인들이었고, 초기의 개종자들은 장터나 인근 마을을 다니면서 전도했다.  


병원이 세워지는 곳이야말로 민중들이 운집하는 장소여야 했다. 최초의 서양식 병원(광혜원)을 연 의료 선교사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시란돈)은 민중을 향한 의료 사업을 통해 민중 전도에 힘쓴 선교사였다. 그는 보다 적극적으로 민중과 접촉하기 위해 1894년 궁 궐과 외국 공사관이 즐비한 정동을 떠나 남대문 근처의 빈민 지역인 상동으로 병원을 옮겼다. 병원을 옮기기 위해 그가 선교 본부에 보낸 보고서에는 이러한 그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병원이 성공하려면 가장 필수적인 것이 대중의 요구에 맞도록 번잡 한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동에 있는 남대문 병원은 제 판단 으로 본다면 여러 가지 면에서 유익합니다. 그 곳은 민중이 있는 곳인 반면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외국인 거주 지역입니다."


남대문안 상동은 시장 지역이었고, 따라서 상인과 노동 계층이 주 로 살고 있었다. 정동에 있는 시병원에도 양반 아닌 민중계층이 찾아 왔지만, 아무래도 지역적 환경이 민중에게 개방적이지는 못했다. 양 반 동네인 재동(북촌마을)에 있던 제중원이 조선후기 약국 밀집지역인 남대문안 구리개로 옮긴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으며, 역시 정동에 있던 감리교 여성병원 보구여관도 시장통인 동대문 안으로 옮겼다. 청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소민병원이 처음에는 탑동(일신여고 부 지) 언덕 꼭대기에 세워졌으나 환자가 기피하자, 결국 현재의 청주제 일교회가 세워진 청주시장통으로 진료소를 이전했던 것이나, 충남지 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공제의원이 영명학교가 위치한 산 위가 아닌 공주시장 한편에 세워진 것도 모두 비슷한 맥락이다. 이는 모두가 선교전략상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여 민중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시장 혹은 장시의 역할에 주목한 결과였다.


(사진 - [위] 1899년 장로교 아담스 선교사가 대구 시민들에게 전도하고 있다. / [아래] 자전거를 타고 전도여행 중인 감리교 스웨어러 선교사)

 



오늘날 가장 대표적인 이웃사랑 실천으로 인정받고 있는 구세군 자 선냄비가 한국에서 시작된 것은 1928년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1928년은 가뭄과 뒤늦은 홍수 피해로 많은 곳에서 양곡을 추수하지 못한 흉 년이었다. 당시 한국 구세군의 박준섭 사령관은 불우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두고 보기만 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따라서 구호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더욱 집중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박사령관 은 일제 당국과의 교섭을 통해 ‘성탄 자선냄비’를 이용해 대중 모금을 할 수 있다는 승인을 받

아 냈고, 크리스마스를 전후한 12월15일부터 31일까지 20개소에서 한국 최초의 자선냄비 모금을 시작했다. 


모금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약 850원이 모였다. 이 돈으로 구세군 본영 근접한 건물에 급식소를 차려 매일 120명에서 130명에게 따뜻한 밥과 국을 무료로 제공했다. 지방에서도 모금활동이 펼쳐져 모금한 돈을 극도로 빈곤한 마을을 돕는데 사용했다. 


1928년 시작된 자선냄비가 구세군 사회사업의 대표적인 사례로 여겨지고 있지만, 사 실 한국 구세군의 사회사업은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있어 왔 다. 1916년에 이미 사회복지시 설인 여자실업관이 설립된 것 을 감안하면, 구세군의 사회 사업은 그 이전에 시작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또한 1918년 1 월과 2월부터 구세군은 긴급 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구 호를 목적으로 ‘급식소 및 장작배급소’를 설치했다. 이곳에서는 여성과 아동들에게는 따뜻한 식사 와 쉴 공간을 무료로 제공했고, 남성들에게는 장작 패는 일을 하게 한 뒤 일정 분량의 일을 하면 숙소를 제공했다. 이 사업이 시작된 첫 주에만 559명에게 무료식사가 제공됐고, 400가정에 연료를 공급했다. 또한 43일에 걸친 긴급구호사업을 통해 1,186 가족, 2,536명에게 식품 과 연료를 제공했다. 


구세군은 긴급한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구호사업에 앞장서곤 했다. 1922년 여름에는 일찍 시작된 무더위와 장마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다. 장마로 인해 곡식들의 피해가 커 가격이 폭등한 것은 물론이 고,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다. 특히 한반도 북부 지역의 피해는 더 욱 심해서, 한 마을에서 70명이 목숨을 잃고 마을 전체가 파괴되기도 했으며, 다른 마을에서는 천 호가 넘는 집들이 침수되고 수백 채가 떠 내려가기도 했다. 구세군은 피해 지역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조사해 다각도로 구호활동에 나섰고, 많은 한국인들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았다. 한 홍수 피해자가 보내온 편지의 내용을 보면, 구세군의 활동이 수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됐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감사하며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는 여러분의 노력이 더욱 커지 기를 바랍니다. 또 여러분 모두가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제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아이들의 목숨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1924년 11월에도 홍수가 난데다가 추위마저 일찍 찾아와 얼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등 긴급 구호활동이 필요해졌다. 구세군은 임시 구호활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 본영에서 이를 시작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공식적으로 일제 당국의 모금 허가를 받지는 못했지 만, 언론을 통한 광고가 효과를 발휘해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이어졌다. 이런 일화도 있었다. 경성 3영문의 노상섭 정위가 물건을 사러 상 점에 들어가 상점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상점 주인이 50원을 쾌 척하며 이렇게 말했다 .


"구세군 사령관의 편지를 신문에서 읽었는데, 조선의 가난한 사람을 도우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알게 돼 기쁩니다. 나는 4년 전에 이 사 업을 시작해 지금까지 성공을 했습니다. 내일 저녁 우리 친구들을 불러 기념잔치를 하려고 했는데, 이 편지를 읽고 나서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여기 잔치하려고 마련해 둔 50원을 드리니 구세군에서 나보다 더 잘 사용해 주기 바랍니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나서 준 사람들의 도움으로 구세군은 12월 초 경성 시내에서 1,000명에게 무료 급식을 제공하였고, 12월 26일에도 1,000명의 빈민에게 따뜻한 점심을 제공했다. 그리고 서대문정 일정 목 91번지에 빈민구제소를 설치할 수 있었다. 성탄절 다음날부터 밤 이면 빈민들이 와서 음식을 먹고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이 다. 첫날 이 구제소를 이용한 사람은 20여명에 불과했지만, 한 달이 지나서는 매일 150여명으로 늘어났다. 애초 50명 수용을 목표로 했던 구세군은 인접한 집 3채를 더 빌려 되도록 많은 사람이 숙식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구세군은 소년원(후생학원)과 소녀원(혜천원)도 운영했다. 그 중 후 생학원의 설립과정을 살펴보면 구세군의 사려 깊고 헌신적인 이웃사랑의 모습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


1918년 말 서울에는 수많은 소년 걸인들이 있었다. 그 중 한 소년 이 일본인 사업가 고바야시의 가게 밖에서 얼어 죽은 채 발견되는 일 이 발생했는데, 고바야시는 구세군을 찾아와 소년들이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하며 그 비용을 기부했다. 이를 계기로 구세군은 12월 31일 소년 걸인들을 위한 특별한 활동을 진행했다. 겨울철 추위가 매섭게 기승을 부리던 때에 소년단 활동대(Scouting Party)를 구성해 밤거리에서 추위에 떨며 노숙을 하고 있는 소년 걸인들을 찾아 나선 것이다.  


첫 번째 수색에서는 두 세 명의 소년 밖에 찾아내지 못했지만, 이때 찾아낸 소년 중 한명이 탁월한 안내자 구 실을 해 주었다. 작은 구덩 이나 땅굴, 생선시장에 버려 진 생선상자, 양곡 시장 안의 쓰레기 더미, 낡은 쌀 포 대 등에서 발견된 소년들 중 에는 이미 거의 혼수상태에 빠진 경우도 있었다. 구세군 소년단의 헌신적인 수색작업 이 없었다면 얼어 죽었을지 도 모르는 이 소년들이 구세군 사관학교의 남는 방으로 안내됐다. 소년들은 이발을 하고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에서 오랫동 안 목욕을 즐겼다. 그동안 그들이 입고 있던 넝마조각 같은 옷들은 소각됐고, 목욕을 마치고 난 뒤에 깨끗한 옷을 받았다. 소년들 스스로도 서로를 보면서 새롭고 깨끗한 모습에 즐거워했다. 1919년 1월1일 새벽 2시30분, 이들은 따뜻하고 넓은 방에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소년들이 모여 서로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소년들 중에는 그 배후에 아이들을 감금 하고 구타하면서 도둑질과 구걸을 시키고 나아가 그렇게 얻은 수입마저 착취하는 어른들이 있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구세군은 아이들에게 글과 산수를 가르치고 매일의 양식을 얻을 수 있는 정직한 방법들을 알려주기로 결정하고, 곧바로 아이들에 대한 교육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사업을 더욱 효과적이고도 지속적으로 하 기 위해서는 소년들을 위한 영구적인 숙소와 작업장이 필요했고, 이 것이 1923년 12월3일‘후생학원’설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후생학원 개원식에서 사회를 맡은 신태빈 사령관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이 시설이 불행한 소년들에게 대단히 유익이 되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그리하여 예전에 걸인이었던 이 소년들이 악과 범죄로 다시 떠내려가는 대신에 매우 쓸모가 있고 근면 한 시민이 되도록 도울 것이며, 또한 이 시설과 그들이 태어난 이 나라의 자랑거리가 되도록 할 것입니다."


구세군은 일제 당국과 기타 기관들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돌봄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던 시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써 그 사회적 책임을 다해 왔다.


(사진 - [위] 서울 정동의 옛 구세군사관학교 전경 / [아래] 한국 최초의 구세군 자선냄비[광화문 광장, 1928년])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와 정착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사회 문화 전반 에 걸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흔적은 정신, 문화, 물리적 측면 곳곳에 남아 있다. 건축도 예외가 아니다. 기독교의 전래와 성장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한국 건축문화의 근간을 흔드는 큰 영향들이, 한반도 전역에 걸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근대시기 급변하는 한국 상황 속에서 눈에 띄는 물리적 환경의 변화 가 나타났고, 평온한 우리의 자연 경관에 세워지는 건축물들에서 그 변 화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한국에서 전개된 건축의 근대화는, 실용주의 성리학에 기반을 둔 수원성의 축조과정이나, 개화운동에 기반을 둔 외래 문물과 건축의 도입 등에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 들어온 외래 건축으로는 일본을 통한 관공서, 금융시설 등의 건축과 천주교에 의한 성당 등의 건축, 외국인 상인들에 의한 호텔 및 공장 등의 건축, 그 리고 기독교에 의한 교회, 학교, 병원, 주택 등의 건축을 들 수 있다.


기독교에서 지은 건축물들은, 서양의 건축문화를 순수한 형태로 도 입하면서 미국 등의 선교사와 한국교회가 함께 건축의 주체가 돼 지어졌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기독교 건축의 남다른 특징은 또 있다. 사실, 일본 정부에 의해 지어진 건축물에는 변형된 서양건축(和洋式 建築)이 제국주의적 양태로 나타나 있다. 옛 서울역, 한국은행 본관 등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기독교 건축은 민간에 의해 선택 적으로 한국적 토착화와 더불어 한양절충식, 서양식, 근대주의 건축 등 다양한 표현으로 나타났다. 한양 절충식으로 지어진 강화성공회성당, 강화온수리성공회성당, 청주성공회성당 등은 지금도 남아 있다. 이것은 한국 건축을 통해 한국의 고유성을 드러내고, 또 서양식 건축을 지을 경우에도 정동감리교회, 승동교회, 대구제일교회, 청주제일 교회, 경북안동교회 등에서 볼 수 있듯 고딕양식을 주제로 선택함으로써, 일본 정부에 의해 이루어진 제국주의적 양식을 반대하는 입장 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 건축에 있어 먼저 교회 건축을 살펴보자. 교회 건축은 서울 을 비롯한 각 지역선교 거점인 지방도시에까지 폭넓게 확장돼 나갔다. 서울의 새문안교회, 정동교회, 승동교회, 연동교회, 서울 안동교회를 비롯하여, 대구읍교회, 부산 초량교회, 군산 구암교회, 전주 서문교회, 목포 양동교회, 청주읍교회, 안동교회, 광주 양림교회, 순천 중앙교회 등과 북한 지역의 솔내교회, 평양 장대현교회, 선천읍교회, 강계읍교회, 선천남교회, 재령읍교회, 평양 창동교회, 원산교회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역에 교회가 지어졌다. 이처럼 수많은 교회가 지어짐으로써, 지역사회에 큰 문화적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과 소망을 가져다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이러한 대규모 건축행위를 통해 한국 교인을 단결하게 하고, 또 미국인 선교사나 한국인 목사의 지도에 따라 교회건축에 참여 한 한국 교인의 정신과 기술이 서양인과 의사소통을 하는 장을 형성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대규모의 교회 건축은 하나의 역사적 과정이었으며, 우리는 이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겨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기독교 학교건축의 경우는, 기독교 정신과 서양의 제도화 된 교육을 담당하는 그릇으로서 뿐만 아니라 그 건축적 규모와 양식과 기술에 있어서, 그것이 한국 근대건축에 미친 영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 학교 건축은 초등과정, 중등과정, 고등과정을 포함하면 전 국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서울의 배제학당, 이화학당, 경신학교, 정 신여학교, 배화학당,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교 등과 대구의 계성학교, 신명학교, 전주의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목포의 정명여학교, 광 주의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청주의 청남학교, 안동의 계명학교, 순천 의 매산학교, 북한 지역의 평양 숭실학교, 선천 보성여학교, 재령 명신학교, 선천 신성학교, 강계 영실학교 등이 기독교에 의해 지어졌다. 그 리고 일본 제국 정부에 의해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교육령이 발효된 이 후에는, 각 거점선교지의 성경학교와 유치원 등 다변화된 교육기관으로 확장되면서 다양한 교육의 양태를 보여 준다. 기독교는 이를 통해 식민 지 한국의 미래 동량을 배출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건축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초기에는 한양절충식의 건축양식을 사용하면서 친한국적인 토착화를 표현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대구 계성학교 아담스관, 대구 계성학교 맥퍼스관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제 2차와 제 3차 조선교육령이 발동한 이후에는, 규모 적인 측면을 해결하기 위해 기술적 차원에서 서양의 고딕양식과 조지 안 양식이 주로 채택됐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학교 건물로는 대구 계성학교의 헨더스관과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관, 스팀슨관, 아펠젤러 관이 지금도 남아 있고, 조지안 양식으로는 서울 정신여고의 세브란스관(구관), 순천 매산중학교 매산관, 광주 수피아여고 윈스브로우관, 청주 퍼디기념성경학교 등이 현존한다.


이처럼 기독교 학교 건축에서 고딕 양식 등을 채택한 것은 이후 한국의 독립적 재원으로 설립된 중앙학원과 고려대학교의 초기 건축에서도 고딕양식을 채용하면서 한국적 축조기술로 이어지는 데에도 영향을 미 쳤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 학교 건축은 선교를 목적으로 세워진 교육시설을 짓는 일이었지만, 일본인 공립학교와는 그 표현 양식과 건축개념에 있어 확연한 차이를 보였으며, 나아가 한국인이 독립적으로 설립한 많은 사립학교에도 같은 철학을 갖도록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셋째로 기독교 병원은 사실 한국인들에게 의료행위를 통해 선교를 할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고, 따라서 주된 기능은 의료 행위에 있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목적은, 한국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하는 형식 에 있어서 치료를 통한 감흥을 이끌어 내고, 이를 통해 보다 깊이 있는 교감을 갖게 하는 데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건축적 양식은 기독교 학교건축과 마찬가지로 초기엔 한양절충식 으로 접근함으로써 한국인에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청주 던컨 기념병원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일제 강점기 조선의료령에 따라 일정한 규모 이상의 시설을 갖추기 위한 서양 건축양식의 기독교 병원들이 각 선교 거점지역에 건축됐으며, 이 병원들이 오늘날까지 그 전통을 이어오는 주요 의료기관으로 성장했다. 


기독교 병원은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 대구 동산병원, 전주 예수병 원, 목포 프렌치 기념병원, 광주 그래함 기념병원, 청주 던컨 기념병원, 안동 성소병원, 순천 알렉산더병원, 북한지역의 선천 미동병원, 평양 연 합기독병원 등 각 지역마다 세워졌다. 복잡하고 세밀한 건축적 설계가 필요한 병원건축을 통해 지역사회에 건축적 영향을 지대하게 미친 것이 사실이고, 또 외래 진료뿐만 아니라 의료 선교사들의 순회 진료 행위를 통해 한국 기독교 성장의 바탕이 된 것 역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선교사들이 살았던 주택의 경우는, 초기에는 한국의 전통가옥을 매입해 서양인의 생활에 맞게 변형해 사용하던 방법과, 처음부터 서양식 주택을 짓고 서양식 생활방식을 직접 도입한 방법으로 나눌 수 있다. 각 지방에 대한 기독교 선교를 위해 한국의 전통가옥을 개조해 사용하다가 한양절충식 복합주택을 건축했다. 이렇게 지어진 청주 포사이드기념 주택, 대구 스윗처 주택, 청주 밀러 주택 등이 아직 남아 있다. 1930년대에 들어서서는 전 세계적인 근대 건축의 경향 이 한국에도 들어온다. 하지만 이러한 양식을 따르는 건축행위는 일 본 건축가와 소수의 한국인 건축가들이 주도했고, 선교사들은 서양의 건축양식, 즉 조지안 양식, 고딕양식, 미국 식민지 양식 등을 따라 주택을 건축함으로써 시대적 흐름의 한 축을 이어갔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남아 있는 광주 윌슨 주택, 서울 연지동 선교사 주택 등이 이러 한 흐름을 보여 준다.


이런 경향은 서울에서 언더우드 주택을 비롯한 대부분의 선교사 주택에서 나타나고, 대구의 스윗처 주택, 블레어 주택 등에서도 볼 수 있다. 다만, 평양의 마펫 주택은 한국 전통양식으로 건축해 오랫동안 사용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거생활을 어떻게 건축적으 로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아주 중요하다. 따라 서 서양 선교사가 한국 기독교에 미친 주생활 문화는, 우리 주생활 문화의 관성이 지속적인 유전인자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매우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기독교가 한국 근대건축에 미친 영향은, 우리를 둘러싼 외적 환경인 일본 제국주의의 강제 속에서도 한국인으로서의 정신과 문화와 생활을 유지하고 또 한국인의 민족적 지속력을 확보하는 데 매우 지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진 - [위] 성공회 강화읍교회[1900년 경] / [아래] 평양 기홀병원)




한국 조정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경계하며 러시아에 대해 근접한 태도를 보이게 되자, 일본은 그 배후에 명성황후가 있다고 보고 황후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주도 속에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데 성공했다. 미우라는 일본군을 동원 하여 궁궐을 포위하고 일본에서 건너온 자객들을 풀어 황후를 시해했다. 이것이 을미사변이다.  


미국 공사 알렌(Horace N. Allen, 안련)은 조선이 근대화되기 위해 서는 청나라를 꺾은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알렌은 이런 생각으로 조선 정부와 일본 사이의 신뢰관계를 위한 중재자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알렌과 조선 정부의 신뢰를 배신하고 을미사변을 일으킨 것이다.


황후의 죽음을 보고받은 고종은 신변에 큰 위협을 느꼈고, 복수를 해주는 사람에게 자신의 상투를 잘라 짚신을 삼아 주겠다는 한탄을 할 만큼 비통에 잠겼다. 게다가 고종은 아내를 죽인 일본인들에게 포 위된 채 경복궁 안에 연금된 처지였다. 그의 신변에 어떤 일이 닥칠지 알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때 고종의 청을 받은 미국 공사 실의 주선으로 애비슨(Oliver R. Avison, 어비신),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 게일 (James S. Gale),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헐버트(Homer B. Hulbert, 할보), 존스(George H. Jones, 조원시)는 매일 저녁 왕의 서 재 겸 집무실인 집옥재(集玉齋) 가까운 건물에서 미국 군사고문 윌리 엄 다이(William M. Dye) 장군과 함께 거의 7주 동안 교대로 권총을 차고 고종의 침소 근처에서 야간 경비를 서기도 했다. 고종은 일본인 들이 자신을 노리고 있지만 서양인들이 보호해 준다면 쉽지 않을 것 이라 여겨 미국 공사 실에게 선교사들의 입궐을 요청했다. 왕의 요청 을 접한 선교사들은 을미사변 직후 일어난 동정심에서만이 아니라, 이것이 왕실에서 그간 베풀어 준 호의에 보답하고 조선에 대한 그들 의 우의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아스(Lillias S. Underwood)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남편이나 우리나 모두 국왕에 대한 봉사가 즐거웠다. 우리는 가장 높은 사람에게서부터 가장 낮은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친구임을, 또 정의로운 지배자임을 입증하는 것이 기뻤다. 특히 우리 가 기뻤던 것은, 복음의 전파를 금지하는 법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불충하다고(disloyal) 불렸던 사람들이 이제는 임금에게 가장 충성하는 사람들임을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고종의 친미, 친러파 신하들과 소수의 서양 선교사들이 죽음의 공포로부터 왕을 해방시키고자 왕의‘이어(移御)’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기지만 실패하고 마는 사건이 일어나고 만다. 이 사건이 1895년 11월 28일에 일어난 이른바‘춘생문 사건(春生門事件)’이다. 춘생문은 경복궁 북동쪽에 위치한 문으로, 경복궁 서쪽으로 나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고종은 친일 내각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으며, 그들의 시선을 두렵게 의식했다. 따라서 고종은 귓속말과 몸짓, 혹은 언더우드의 손 에 몰래 작은 메모지를 쥐어주는 방법을 통해 자신의 뜻과 계획을 전 달했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 고종은 독살 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껴 삶은 계란이나 깡통 채로 들여와 그의 눈앞에서 직접 개봉된 농축우유 외에 궁에서 제공하는 음식은 일체 먹지 않았다.


그러자 명성황후와 특히 가까웠던 러시아 공사의 부인과 릴리아스 는 고종을 위해 번갈아 가면서 음식을 장만했다. 두 사람이 마련한 음 식은 큰 양철통에 넣어져 단단한 미국 자물쇠로 잠긴 채 매일 고종에 게 배달됐다. 음식이 담긴 양철통은 입궐하는 관리 편으로 보냈지만 열쇠는 반드시 언더우드가 매일 직접 가지고 가서 고종에게 전해 주었다. 그리고 애비슨은 음식에 독이 들어있지는 않은지 살폈다. 


고종은 경복궁에서 탈출해 자신이 신뢰하는 미국과 러시아의 공사 관이 밀집된 정동 지역으로 가고 싶어 했다. 고종의 이러한 탈출 의지를 처음 접한 사람이 바로 언더우드였다. 고종은 언더우드에게 자신 의 은밀한 탈출의지(意志)를 기록한‘밀지(密旨, Tiny Note)’를 손바닥 에 전했다. 그리고 이런 메시지는 정동에 모여있던 외국인들에게 비 밀리에 전해졌다. 


정동에서는 경복궁에 갇힌 고종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을 은밀히 수립해 결국 1895년 11월 28일 자정을 기해 왕을 탈출시키고자 했다. 거 사 당일 윤웅렬은 아들 윤치호에게“오늘 밤 충성파 인물들이 경복궁을 침입하여 국왕을 구출, 해방시키겠다. 친일 내각 수중에 갇혀 있는 국왕을 보호하기 위해 습격하며, 외국 공사들에게 이 사실을 통고하기 바란다”는 말을 전했다. 윤치호는 즉시 미국과 러시아 공사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외국인을 동원해 경복궁으로 입궐하여 국왕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해 줄 것을 당부했다. 


윤치호의 보고를 받은 실 공사와 알렌은 즉시 국왕을 보호하기 위한 대비책으로 언더우드에게 입궐을 요청했다. 언더우드, 애비슨, 헐 버트 3인의 일행은 경복궁에 도착해 침전 건청궁의 곤녕각으로 달려 갔다. 국왕은 무사했고, 도착을 알리자 즉시 반갑게 맞아 주었다. 고종은 왕의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도 밤새 자신을 경호해 줄 것을 그들 에게 당부하면서, 침전 근처에 있는 다이 장군과 다른 두 명의 장교들 은 숙소에서 대기할 것을 요청했다.


자정 쯤 한발의 소총소리가 울리고 뒤이어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렸다. 총소리에 놀란 다이 장군과 선교사들은 벌떡 일어나 권총을 빼들고 국왕 침전으로 달려갔다. 국왕은 선교사 일행을 보더니 안도감을 보이면서 선교사들의 손을 잡고 밤새도록 함께 있자고 말했다. 선교 사 일행은 고종을 옆에서 지키며 구조대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던 구조대가 경복궁으로 진입하는 와중에 중충원 의관인 안경 수가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이 사실을 알려 버렸고, 호위대장 이진호 가 변심해 군부대신 어윤중에게 밀고, 결국 이도철 등 10여명이 현장 에서 체포되고 나머지는 도주하면서 국왕 구출작전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거사가 실패로 끝나자 친일내각의 김홍집 총리는 여러 각료들과 함께 국왕을 찾아와 국왕을 좀 더 안전한 곳으로 모셔 가려 했다. 김홍집이 고종의 손을 잡고 끌어당기자 국왕은 애비슨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고, 군부대신 어윤중이 왕세자를 잡자 왕세자는 언더우드의 손을 잡고 늘어졌다. 애비슨과 언더우드 일행이 꼼짝 않고 서있자 김홍집 일행은 고종과 왕세자로부터 선교사들 떼어 놓기 위해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소득 없이 돌아갔다. 선교사들은 옆방에서 밤새 교대로 불침번을 서기로 결정했다.


춘생문 사건이 실패하자 체포된 관련 주모자들은 사형에서 태 100대, 징역 3년 등의 처벌을 받았고,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 중이던 을미사변 관련 주모자들은 증거불충분으로 전원 석방됐다. 정동파 인사들 은 재빨리 미국과 러시아 공사관 혹은 선교자 집으로 피신했고, 일제 는 이‘국왕탈취사건’에 서양인이 관련되어 있음을 적극적으로 선전 했다.  


비록 춘생문 사건은 실패했지만, 황후시해 이후 발생한 일본 및 친 일세력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인 저항의 움직임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이후 ‘아관파천’으로 이어져 나름의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그 리고 개신교 선교사들은 경복궁에서 고종을 지키며 일본에 대항했는데, 이는 훗날 헐버트가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에 파견되고, 언더우드 의 아들(Horace H. Underwood, 원한경)이 3·1운동 이후 일제가 저지른 제암리 학살 사건 등을 전 세계에 알리며 규탄한 것을 비롯, 선교사들이 직접적으로 한국 민족운동에 뛰어들게 되는 밑거름이 됐다.


(사진 - [위] 고종의 서재로 사용되었던 집옥재.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이 곳에 유폐되었다. / 을미사변의 현장인 건청궁 곤녕각) 




헤이그 밀사 사건은 헐버트(Homer B. Hulbert, 할보)와 상동파가 구체적으로 계획한 일이었다. 헐버트는 육영공원(영어학교) 교사로 1886년 7월 한국에 왔다가 1891년 12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귀국한 뒤 오하이오 주 퍼트남 군사아카데미에서 교사를 하고 있던 헐버트는, 1892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온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아편 설라)의 권유를 받고 한국 선교사로 다시 오게 된다. 미북감리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1893년 9월에 다시 내한, 동대문교회 담임을 맡았다. 그는 또 미북감리회에서 운영하는 삼문출판사 운영의 책임을 맡아 문서선교를 주관했다. The Korean Repository란 영문 한국학 연 구지 인쇄와 운영도 맡아, 이를 통해 한국의 역사, 풍속, 언어 등에 관 한 자신의 연구 논문들을 발표하기도 했다. 


헐버트는 한국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대한제국 말기에 고종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고 활동했다. 그의 구체적인 정치 참여는 1895년 11월 28일 일어난 국왕탈취 미수사건‘춘 생문 사건’을 통해 이루어졌다. 


한국의 정치 문제를 깊이 이해하고 있던 헐버트는, 당시 교회가 상 류층 청년 지사들을 수렴할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이 유능한 청 년들에게 근대적인 사회개혁 의식을 고취시키려 했다. 이를 통해 자 연스럽게 기독교의 복음을 접목하고자 모색한 것이 바로 YMCA운동 이었다. YMCA를 한국에도 설치해 청년들의 의식을 개조하고, 이들을 미래의 지도자로 양성하려 한 것이다.


YMCA운동을 사회운동의 성격을 띤 청년운동으로 발전시키려 했던 헐버트의 입장은, 이 운동을 순수 신앙운동으로 만들고자 한 언더우 드의 입장과 긴장 관계를 형성해 초창기 YMCA운동에 혼돈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YMCA운동은 헐버트의 입장으로 방향을 잡게 됐 고, 헐버트는 YMCA 창설의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그는 1903년 한국 YMCA(황성기독청년회) 초대 회장에 선출됐다. 여기에 전덕기, 이상재, 신흥우, 최남선, 윤치호, 김규식, 조만식 등이 적극 참여했다. 


1905년에 접어들어 가츠라-테프트 밀약(1905. 7), 영일동맹 체결 (1905. 8), 포츠머스 조약 등으로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이 구체화돼 갔 다. 이에 한국 정부는 미국의 도움으로 이런 일본의 획책에서 벗어나 고자 미국 정부에 밀사를 파송키로 했고, 고종의 신임을 받던 헐버트 가 밀사로 임명됐다. 헐버트 의 밀사 정보를 입수한 일본 은 떠나기 전날 그에게 미국 행을 포기할 것을 종용하면 서 포기의 대가로 막대한 경 제적 혜택을 주겠다고 제안 했다. 그러나 헐버트는 1905년 10월 중순경 비밀리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려 하고 있으며 이는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력에 의해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과 미국이 한미수호조약에 따라 한국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는 고종의 친서를 품 고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가 워싱턴에 도착하는 날(11. 27)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으 로 만들려는 계획을 서둘러서 을사늑약을 체결, 외교권을 박탈했다. 미국은 가츠라-테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인하는 입장 을 취하고 있었으며 일본의 을사늑약 전문도 이미 와 있었다. 이로 인 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려는 헐버트의 수차례에 걸친 시도는 끝내 무산됐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일본을 거스르면서 한국 문제에 관계하 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미수호조약이 미국의 국익 앞에서 휴지조각이 돼버린 것이다. 다음은 헐버트의 미국 정부에 대한 기록 이다. 


워싱턴 밀사 활동에 실패한 그는 1906년 6월 다시 한국으로 향하던 중,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이를 고종과 YMCA 회 원들에게 전했다. 전덕기 목사는 고종에게 친서를 받아 YMCA 회원의 중심인 상동파와 함께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헤이그 밀사 파견을 모의 했다. 고종은 일본의 한국 강탈을 세계에 호소하고 열강의 공동 보호 를 구하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 이준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로 파견했다. 헐버트는 헤이그 밀사보다 먼저 헤이그로 가서(1907. 4) 이들 세 밀사들의 활동을 도왔다. 


이같은 헐버트의 적극적인 정치참여 태도는“민중과 관련된 모든 것이 정치적이다. 한 나라의 종교는 정치에 대해 분명한 관계를 갖는 다”는 그의 소신에 따른 것이다. 일본이 헐버트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는 1907년 5월 8일 본국의 소환 형식으로 한국을 떠 나야만 했다. 헐버트의 한국사 책 The Passing of Korea는, 을사늑약 이후 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짐에 따라 세계만방에 이 조약의 부당 함을 알리기 위해 저술된 것이다. 


상동파는 상동교회 담임목사였던 전덕기를 중심으로 형성된 민족 운동가들을 가리킨다. 정동교회가 엘리트 선교 전통을 갖고 있었던 반면, 상동교회는 미북감리회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시란돈) 이 설립한 교회로 한국 감리교회의 민중 선교 전통을 세운 교회다. 그 리고 스크랜턴의 뒤를 이어 상동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전덕기는 근대 민족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전덕기는 1904년 상동청년 학원을 설립했는데, 그 설립 목적을 “하나님 공경하는 참 도로써 근 본을 삼아 청년으로 말하여도 벼슬이나 월급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세상에 참 유익한 일꾼이 되기를 작정하자는 데 있다”라 고 밝히고 있다. 이후 이 모임은 구연영, 양기탁, 주시경, 이승만, 이 상설, 이준, 박용만, 이필주, 김진호, 주시경, 최재학, 이동휘, 이회영, 이시영 등으로 이른바 상동파라는 민족운동 세력으로 발전해 적극적 으로 민족 교육을 주도해 나갔다. 


전덕기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무효 투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감리교 청년회인 엡웟회 전국연합회를 소집했다. 당시 평안도 진남포 엡웟회 총무였던 김구와 이준, 이동녕, 조성환 등 청년 지사들도 전국 각지에서 상동교회로 모였다. 이들은 정치집회 성격을 띤 기도회를 개최했는데, 이때 기도회를 주도한 전 덕기, 김구, 이동녕, 조성환 등은 기도회를 마친 다음 궁궐로 나아가 도끼를 메고‘조약 반대 상소’를 올렸다. 비록 일본 헌병대에 의해 해 산당해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이들의 상소는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상동청년회의 애국정신도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나아가 전덕기와 정순만은 평안도 교인들과 더불어 을사 5적 암살을 모의하 기도 했으나, 모든 계획이 일제 경찰에 의해 사전 감지돼 실패하고 말 았다. 김구는 그의 자서전『백범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이때에 나는 진남포 엡웟청년회의 총무로서 대표의 임무를 띠고 경 성대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대회는 상동교회에서 열렸는데 표면은 교 회 사업을 의논한다 하나 속살은 순전히 애국운동의 회의였다. 의병 을 일으킨 것이 구(舊)사상의 애국운동이라면 우리 예수교인은 신(新) 사상의 애국운동이라 할  것이다."


이후 전덕기 목사는 미국에서 일시 귀국했던 안창호와 함께 1907년 4월 상동파를 중심으로 항일 비밀 결사 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한다. 그 는 105인 사건에 연루돼 갖은 고문을 받고 감옥에 갖힌 뒤 병을 얻게 된다. 나중에 병보석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고문후유증은 계속돼 결 국 출옥 후 2년 만인 1914년 39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민중들이 상동교회로 구름같이 모여들었는데, 그 장 례 행렬이 10리가 넘게 이어질 정도였다.


(사진 - [위] 상동교회 / [아래] 헤이그 특사,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나면서 청나라가 병자호란 이후 한국에 미치던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은 소멸 됐다. 독립협회는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자주독립을 염원하는 애국청년들이 주도해 결성한 단체이다. 독립협회는 독립문을 건립하고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등 조선이 자주적 시민국가로 자라나기를 바라는 염원을 표현하였다. 독립문은 청나라 사신들이 당도하면 우리나라의 대신들이 나가 맞던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것으로, 청나라로부터의 자주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준다.

 

독립협회는 갑신정변을 주도한 서재필과 초대 주미한국공사의 비서관인 이상재, 주한미국공사관의 통역관 윤치호 등 인이 주축이 돼 설립했다. 1896년 4월 7일부터는 순한글의 독립신문을 발간해 자주의지를 표명했고, 1896년 11월에는 영은문 옆의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축한 뒤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개선문 형태의 독립문을 건립했다.

 

독립협회에는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외에도 안경수, 이완용 등 정부 요인들이 다수 참여했다.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가 시작될 때 회장은 안경수, 위원장은 이완용, 그리고 위원은 이상재, 김가진 등 8명이 각각 맡았다. 남궁억, 송응빈 등 10명은 간사원, 그리고 서재필은 고문에 취임했다.

 

회장인 서재필은 민중들에게 민주주의 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연설을 많이 했다. 서구에서 유입된 자유민권사상과 시민의 천부적 권리 등을 강조함으로써 근대적 시민사회로 나아가는 길을 열기 위해 노력했다. 1897년 월에는 황태자가 직접 쓴 독립관이란 현판을 걸었고, 이로써 독립협회의 세력은 더욱 커지게 됐다. 그해 7월에는 간사원을 폐지하고 한규설, 박정양 등 고위 관리들이 대거 참여하는 위원으로 통합을 단행, 외연을 확대했다.

 

하지만 아관파천 사건이 일어난 뒤 협회 내의 친러파들이 움츠러들었고, 일부 위원들이 정부의 실정을 공격하는 발언들을 잇따라 토해내자, 고위 관료 출신 위원들은 협회활동에 많은 부담을 느낀 나머지 소극적으로 변했다. 회장이 이완용을 거쳐 윤치호에게 넘어가고, 부회장에 이상재가 취임한 뒤에는 독립협회의 주도권이 신진 개화세력에게 넘어갔다. 더붙어 배재학당의 협성회와 광무협회 등 학생회원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독립협회는 신진 개화 민권단체로 진화한다.

 

독립협회는 민족주의를 고양하고 남침하는 러시아세력을 배척하여 국가의 이권을 보호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면서, 영토수호를 위한 활동과 민권신장을 위한 계몽활동에 주력했다. 그러면서 독립협회의 정치적 입장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러시아에 대한 경계에서 반일사상으로 굳어져 갔다. 협회는 근본적인 자주정신을 요청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자주적 의식이 없어 청, 러시아, 일본과 같은 외세가 조선을 넘보게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1898년 2윌에 회원들은 러시아의 영향력을 조정에서 줄이라는 상소를 이상재, 이건호를 통해 제출했고 월에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한국의 자주권을 확립하라는 공개장을 외무대신에게 발송했다.

 

1898년 여름에는 부패한 관리틀을 일소하라는 시폐상소문을 올렸고, 의정부 참정 조병식에게는 사직권면서를 발송했다. 두 번째 시폐 상소는 이용익에게 행해졌다. 그리고 회원들을 동원하여 인화문 앞에서 연좌데모를 벌였다. 다수의 회원들과 수많은 학생들이 데모에 참여했기 때문에 마침내 고종은 그 요구를 수용하게 된다.

 

협회는 민중의 참정권에 관심을 기울였다. 만민공동회를 열면서 윤치호, 박정양 등 고위 관료 출신 외에 박성춘과 같은 백정 대표도 연설을 하게 했으며, 관민협의회를 구성해 일반 민중들이 정부시책에 참여하게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헌의육조와 같은 국정개선안을 재택하고 이를 정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만민공동회는 정부가 이런 건의를 수용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공동회를 해산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1차 만민공동회 직후부터 독립협회를 타도하기 위한 음모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우선 독립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고종을 폐위시키고 윤치호나 서재필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려 한다는 것이다. 조병식, 한규설 등 수구파 대신들을 중심으로 황국협회가 조직됐고, 이들은 전국의 보부상들을 모아 독립협회가 왕실을 타도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그리고 1898년 10 월 보부상 300명을 동원해 정동에 있는 본부를 습격했다.

 

1898년 11월 5일에 독립협회 회원들에 대한 일제 검거가 시작됐다. 이상재를 비롯한 14 명이 체포되고 윤치호 등 다른 간부들은 피신했다. 그러자 만민공동회가 다시 열려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이 이루어지고 고종도 이를 수용할 의지를 보일 무렵, 보부상 천 명이 동원돼 만민공동회를 습격했다. 그리고 박영효와 서재필을 귀국 시키라는 중추원의 탄원이 정부에 전달되자 공화정을 위한 쿠데타의 의심을 품은 정부는 독립협회에 해산명령을 내리게 된다. 독립협회와 횡국협회의 투쟁은 한동안 지속되며 두 달여 동안 거리에서 혈전을 벌였다. 이로 인해 김덕구 등 독립협회 회원들이 죽고 100여 명이 부상당했다.

 

1899년 월에는 중추원도 해산명령을 받았고, 독립협회 출신들도 체포당했다. 최정식은 사형당하고 이승만은 종신형을 받았다. 1901년 검거령이 다시 발동해 신흥우 등이 체포됐고 이완용은 조선협회가 정부를 전복하려 한다고 조작한 개혁당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이상재, 김정식, 이원긍, 유성준, 홍재기, 이승인 등이 체포돼 한성 감옥에서 옥살이를 했다. 이들은 모두 1904년에 석방됐는데, 이들이 옥살이를 하는 동안 한성감옥에서 회심히는 사건이 일어난다.

 

독립협회 출신 애국청년들이 감옥에 갇혔다는 이야기를 들은 벙커(Dalziel. A. Bunker, 방거),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 헐버트(Homer B. Hulbert 할보) 등은 이들을 방문해 위로를 전하고 이들에게 신약성서와 기독교서적을 전달했다. 이중 이승만이 가장 먼저 이 책들을 읽고 기독교로 회심했다. 그리고 이상재, 김정식 등 한성감옥에 갇힌 이들이 차례로 기독교로 회심했다. 형구를 쓰고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선교사들의 방문은 위로가 됐고, 성서공회에서 발간한 책들을 읽으면서 기독교 신앙을 절실하게 체험한 것이다. 이들은 회심 후 성서공회에 서신을 보내 감사의 뭇을 전하고, 옥중에서 겪은 고초와 신앙의 위로를 시문으로 남기기도 했다.

 

한성감옥 회심 사건은 한국의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형성되는 계기가 됐다. 이들은 출옥 후 독립협회 시절 가지고 있던 근대적 시민국가의 꿈을 상동청년학원에서 다시 이어가게 된다. 그리고 상동청년학원이 교회의 정치화를 우려한 선교사에 의해 해산된 후에는, 신민회로, 그리고 YMCA로 이어지는 기독교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큰흐름을형성하게된다.


(사진 - [위]독립협회의 독립문 기공식 장면[1896년 11월 21일 ) / [아래]완공된 독립문과 독립협회 사무실로 쓰인 옛 모화관)






1910년 국권피탈 이후 일제는 영구적으로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삼으려는 전략을 수립하게 된다.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해 토지를 일본으로 귀속시키려 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전 분야에 결친 일본 귀속 작업을 단행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독립을 향한 의지를 가진인물이나 단체들을 해체시켜 저항세력을 근절하려 하게 되는데, 그 대상으로 주목한 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되자 일제는 한국을 곧바로 식민지로 합병했고, 총통감부를 총독부로 바꿔 초대총독으로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취임한다.

 

105인 사건이란, 1910년 12월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철교 낙성식에 참가하기 위해 신의주로 갈 때 한국 기독교인들이 총독 암살을 기도했다는 내용의 날조된 사건이다. 일제는 1905년에 을사늑약을 체결한 후 1907년에는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고 보안법을 선포했다. 그리고 1908년에 사립학교령과 학회령을 발령하고 1909년 출판법, 1910년 집회결사금지법 등을 통해 한국의 모든 단체들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개방적 단체인 교회와 기독교학교들은 어쩔 수 없이 존속하게 했다.

 

그러던 중 1910년 안악사건이 발생했다. 안악사건은 안중근의 종제인 안명근이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자금을 모으던 중 그 사실이 발각되자 일제가 황해도 지역의 애국적 기독교인사 160명을 대거 검거한 사건이다. 그라고 한일합방에도 불구하고 서울YMCA가 굳건하게 버틸 뿐만 아니라 학생 하령회를 개최하여 학생, 청년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시거는 것을 보고 일제는 1911년 기독학생들을 일제 검거했다. 그러면서 검거자 수를 700여명까지 늘얀 후 이들에게 엉뚱한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즉 1910년 12월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철교낙성식에 갈때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권총을숨겨, 가는길에 암살하려 했지만 열차가 정차하지 않고 통과했고, 그 후 낙성식이 끝난 후 데라우치 총독이 선천에 와 맥륜 선교사와인사를 나눌 때 암살하려 했지만 역시 헌병들의 삼엄한 경계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피의자로 제포된 이들은 이승훈을 비롯해 안태국, 양기탁, 임지정, 유동열 등과 차 하령회 대회장인 윤치호, 양전백, 양준명 등 하령회 강사들었다. 이틀은 체포된 뒤 온갖 고문을 받았다. 죽장으로 맞는 것은 물론, 물고문과 손톱 발톱이 다 빠져나가는 고문을 한겨울에 받았던 것이다. 고문 기술자들이 오히려 지친 나머지 피의자들을 사흘 동안 단식시켰다. 먹을 것은 고사하고 물도 주지 않아 물을 달라는 호소가 줄을 이었다. 이런 고문으로인해 김근형과 정희순이 사망했다.

 

피의자들은 대부분 날조된 자백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1912년 3월에 가서야 고문이 일단 끝났다. 강제에 의해 서명한 자백서로 주모자인과 가담자 120명이 재판에 회부 됐다. 재판 과정에서 피의자들의 항거가 시작됐다. 윤치호는 이 자백서가 고문으로 날조된 것임을 밝혔고, 뒤이어 양기탁, 유동열 등도 자백서가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제출된여러 증거물을 통해 기소의 부당성이 객관적으로 입증됐지만, 재판부는 1912년 10월 기소장이 발부된 500여명 중 17명만 무죄라고 선고하고 나머지 105명에게는 유죄를 선고했다. 105인 사건’ 이란 이름은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옥관빈을 비롯한 18명은년형을 선고받았고, 이덕환 등 39명은 6년형을, 그리고 오대영 등 42명은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에 전원은 선고에 불복하여 상고했다. 심에서 99명은 무죄로 석방됐고, 결국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임치정, 윤치호, 옥관빈 등 6명이 4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게 됐다.

 

일제는 105인 사건을 통해 기독교인들을 분쇄함으로써 식민 통치를 항구화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일제는 또 선교시들과 암잘사건을 연루시카려 하기도 했다. 맥륜, 마렛, 로버츠, 샤록스 등이 배후에 있다고 날조했을 뿐만아니라, 거사가 실패한 후에도 다시 기회가 올것이라며, 선교사들이 기독교인들을 선동했다고 한 것이다. 선교사들은, 기독교인들은 물론 선교사들이 암살 모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것을 강하게 부인하는 한편, 데라우치 총독에게 사건을 원천적으로 재조사 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YMCA의 부회장인 윤치호가 이 일에 연루돼 고통을 겪는 것을 해외 기독교 단체에 알렸다.

 

특히 YMCA의 총무 질레트(Phillip L. Gillett, 길례태)는 이 사건이 혹독한 고문을 통해 자백서를 쓰게 했다는 사설과 기독청년회의 하령회에서 학생들과 총독암살을 모의했다는 것은 완전히 날조된 것임을 복로했다. 질레트는 이 사실을 폭로한 대가로 추방당하고 말았다. 질레트는 중국 YMCA에서 활동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계속 도왔다. 105인 사건은 YMCA를 굴복시거고 선민회를 와해시키기 위한 공작이었던 것이다.

 

105인 사건에서 일제가 실제로 해산시키려던 것은 비밀애국단체인 신민회였다. 선민회는 대부흥운동이 교회를 휩쓸던 1907년 2월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애국독립단체이다. 그 뿌리는 상동교회에서 전덕기가 설립했던 상동청년학원에 있다. 안창호는 서북의 기독청년을 중심으로 독립을 추구하는 애국단체를 건립하려 하였다. 신민회의 강령은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의 고취, 독립을 향한 국민역량 축적, 교육기관 설립과 청소년교육 진흥, 각종 산업을 육성해 부패한 사상과인습을 타파하는 것과 유신한 국민을 육성해 자유문명국을 세우는 것이었다.

 

조직으로는 총감독, 총서기, 재무, 집행원 등을 두었다. 의결집행기관으로 중앙평의원을 두고 연통제를 이용해인 이상을 서로 알 수 없는 비밀조직을 결성했다. 전국적인 조직망은 물론, 해외까지 조직을 확대했다. 선교육 지식층, 서북의 상공인, 서북의 기독교 민족주의자, 상동감리교회 출신, 개선 유학 민족주의자, 양반 출신 정객과 관료 출신들이 주된 구성원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어서 기독교 항일단체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신민회 내에는 안창호가 주도하는 온건개혁세력과 이동휘가 주도 하는 무력항쟁파의 두 노선이 공존했다. 계몽적 입장에서는 실력양성과 교육활동을 강조했고, 민족산업 육성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무력항쟁을 주장하는 이동휘 노선이 힘을 얻게 됐다. 매국 친일인사의 암살과 무관학교 설립 등, 강력한 항일운동이 신민회 내부에서 힘을 얻게 되면서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은 자연스레 그 힘을 잃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1911년에 105인 사건이 터지면서 신민회의 실체가조금씩 드러나게 된다. 일제는 사실 신민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악사건을통해 알게됐고, 105인 사건을 일으켜·서북의 기독교인들을 대거 체포해 혹독한 고문을 통해 자백을 받아 냈다. 고문 끝에 전체 기소자 123명 중 57명이 신민회 회원인 것을 알아낸 것이다. 그러나 비밀조직인 데다가, 회원들도 서로를 잘 몰랐기 때문에 그 이상은 밝혀내지 못했다.

 

일제는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를 해체하려 했지만, 신민회의 정신은 오히려 더욱 강화돼 나갔다. 신민회에서 다뤘던 자주적 민주 · 민족국가의 수립이라는 이상은 계속 이어져 1919년 3.1운동으로 계승 됐고, 상해 임시정부의 정신적, 이념적 기반이 됐다. 임시정부를 통해 한국은 독립 후인 1948년 민주주의 공화정을 실시하고 사회적 기반이 든든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제헌헌법을 제정하게 된다. 이 제헌헌법의 정신이 바로 신민회에서 구체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은 이처럼 일제강점기 새로운 민족을 만들고자 한 신민회의 이상을 통해 구체화됨으로써 한국의 근대사에 기여했던 것이다.


 


<사진설명> 105인 사건 당시 일제 경찰에 연행 되는 신민회 회원들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