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한국에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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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서 번역된 로스역 한글 성경과 일본에서 번역된 이수정역 한글 성경은, 공식적인 선교사의 내한 이전에 전국 곳곳에 배포됨으로써 한국인 스스로의 주체적인 복음 수용을 통한 기독교 신앙공동체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을 통해서 성경의 한글 번역이 지니는 중요성이 입증됐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성경 말씀 자체가 지닌 효과가 확인됐다. 따라서 성경의 한글 번역을 완성하고자 하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추진됐다. 당시 한국에서는 한글 성경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었지만, 로스역과 이수정역은 한국 전체를 아우르는 표준적인 한글성경으로서는 다소 아쉬운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스의 한글 성경은 평안도 사투리가 반영돼 있었고, 이수정의 한 글 성경도 단편에 불과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한글 성경의 새로운 번역을 검토했다. 선교사들은 1887년 성경번역위원회(Committee for Translating the Bible into the Korean Language)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번역 사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성경을 새롭게 번역하는 일은 시간 이 오래 걸리는 사업이었기 때문에 기존에 발간된 한글 성경을 조금씩 수정하여 출판하는 한편, 신약 전체가 번역된 로스역 한글 성경을 기반으로 개정작업을 해 나갔다. 그런데 로스역 개정 작업은 얼마 후 중단되고 말았다.


"1889년 국내에서 선교사들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로스역 성경을 개 정하려는 노력이 있은 후 위원들은 철자법을 수정하는데 완전히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결국 2년이나 헛수고를 한 셈이었다. 문제는 철자 법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용된 언어들과 딱딱한 문제, 불분명한 표 현 및 책의 고전적 형태 등도 문제였다. 그래서 1890년 누가복음 및 로마서 개정이 끝나자 로스역 성경을 개정하는 일은 중단되었고, 로스역 성경은 선반 위에 놓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위원회는 로스역 성경의 수정을 포기한 뒤 가능하면 신 속하게 신약전서를 새로 번역하기로 하고, 1890년 6월 11일에는 2년 이내에 신약성경 번역 사업을 끝낼 목적으로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와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시란돈)이 특별히 성경번역에만 전념하기로 결정한다. 상임성서위원회의 이 결정 은 한글 성경 번역사에 하나에 획을 긋는 중대한 결정이었다. 즉, 이 결정이 순수 국내 번역의 신기원이 된 것이다. 국내 선교사들에 의해 1890년부터 시작된 한글성경번역 작업은 이후 10년 만에 신약전서를, 그리고 다시 10년 후에는 구약전서를 완역해 1911년 마침내 성경전서로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1893년에는 이 조직을 상임성경실행위원회(Permanent Executive Bible Committee)로 개편하고 그 산하에 성경번역자회를 조직해 체계적인 원칙에 따라 공동번역에 착수했다. 선교사들은 헬라어성경과 개정판 영어성경을, 한국인 조사들은 대표자역본 한문성경을 저본으로 채택했다. 이 번역자회의 의견을 거친 성경을 시험역본(Tentative Version)이라 했고, 이것을 3년간 사용하면서 개정해 낸 것을 공인역본(Authorized Version)이라 불렀다. 


1895년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이 시험역본으 로 발행된 후 신약의 단편성경들이 꾸준하게 간행돼 1900년에는 신약 전체가 한 권으로 묶여 나왔다. 신약 전체가 번역되기는 했지만, 엄밀 하게 말해서 마태복음부터 로마서까지는 시험역본이고 나머지는 번역자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은 개인역본이었다. 이렇게 서둘러 간행한 것은 한국교인들의 열화 같은 요구 때문이었다. 그 후 곧 신약의 개정 작업에 착수해 1904년 1차 개정본이 간행됐고, 1906년에 비로소 공인 역본 신약전서가 발간됐다. 


구약의 번역과 발간은 신약보다 늦었다. 1898년 미국성서공회 권서였던 유태계의 피터스(Alexander A. Pieters, 피득)가 시편의 절반 정 도를 번역,‘시편촬요’라는 이름으로 간행하기는 했지만 개인번역에 불과한 것이었다. 본격적인 구약 번역은 신약번역이 끝난 1900년에 시작됐지만, 선교사의 잦은 이동과 다른 업무로 인해 진척이 없다가, 1907년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이눌서)와 감정삼, 이승두 등 3인이 번역작업에만 집중해 1910년 구약 전체를 번역해 냈다. 이로써 성경 전체가 번역돼 그 이듬해 출간됐다. 


이렇게 오랜 기간에 걸쳐 성경이 번역되는 동안 한국교회 교인들은 신속하게 성경이 번역되기를 기다려 왔다. 한문 성경 이외에는 제한적으로 성경을 읽을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한국인 신자들 의 간곡한 요청이 쇄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바쁜 일정에 도 불구하고 성경을 빨리 번역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1900년 신약전서가 단권으로 묶여 나오기 전까지 성경을 요구하는 한 국인 독자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번역자회를 통과한 단편 성경 들을 먼저 출판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러한 신약 단편 성경이 한 권으로 묶여 출간된 것이다. 


"신약을 지금 대한서와 국문으로 출판하였는데 사복음과 여러 가지 편지와 합이 이십칠권을 합부하였는데 값은 사십전이요 복음과 각 편 지를 각권으로도 판매하되 값은 이전 광고한 값과 같으니 경향 각처 에 무론 남녀 교우하고 성경 출판되기를 오래 고대하였더니 지금은 족이 해갈을 하겠으니 대단이 즐거운 일이 될지라"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대적인 출판기념회가 여러 곳에서 성황리에 거행되기도 했다. 한편, 1910년 구약성경 번역이 완료되기까지는 더욱 힘든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드디어 구약 전체의 한글 번역도 끝 나는 날이 있었다.


이박사와 같이 전주에 가서 구약번역의 노고를 한 가지로 한 이는 이승두, 김정삼 양씨였다. 구약 중에 이박사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 은 오직 예레미야 한 책뿐인데 예레미야는 기일박사가 번역하고 원두 우박사가 교열하였다. 1910년 4월 2일에 구약의 끝 절을 역료(譯了)하고, 그들은 성경번역을 무사히 마쳤다는 감사한 정서와 방학 일을 당 한 소학생의 작약적(雀躍的) 희열로써 하나님께 감사한 기도를 올리고 휴회하였다. 


이 성경은 개역 과정을 거쳐 지금 한국 교회가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성경의 모체가 되었다. 로스역과 이수정역, 그리고 성경번역 위원회의 한글 성경은 초기 한국 기독교의 특징을‘성경 기독교’로 자리 잡게 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또한 한글 성경의 번역 과정을 통해서 한글의 가치 또한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사진 - 초기 성서번역위원회 모습 / 신약전셔[1900]와 신약젼셔[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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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늦은 시기에 한국에 들어왔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해외선교를 주도하던 기관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얻은 해외선교 방법과 경험을 최대한 살려 한국의 선교 현장에 적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의 경험, 특히 중국이나 인도, 일본 등에서의 경험과 노하우는 한국 선교에 있어서 오히려 한국적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사실은 1905년의 ‘대한 예수교회’ 논의를 통해 단적으로 드러난다. ‘대한예수교회’는 본국 교회의 영향을 직접 받지 않고 교파의 구별도 없는, 독립적인 현지의 토착적 교회를 의미했다. 그 경위는 대개 다음과 같이 알려져 있다.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일찍이 1905년 6월 25일에 서울에서 한 위원회를 조직하고, 남장로교 선교부의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이눌서)의 동의를 만장일치로 가결한 바가 있었다. 그 동의에 의하면“이제 때가 성숙하였으니, 하나의 민족교회를 창설하여 그 이름을‘한국기독교회’로 하리라”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기운에 밀려서‘선교사연합공의회’(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에 서도 복음주의적 단일한 한국교회의 설립을 기필코 성사시킨다는 목표를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사항이 보완돼야 한다. 첫째는 하나의 민 족교회 창설 동의가 레이놀즈에 의해 처음 발의된 것 같은 인상에 대 한 것이다. 하지만 단일 현지교회 설립에 대한 논의가 갑작스럽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가능한 빨리 자립, 자전, 자치의 현지 교회를 설립하는 것’(establishing a self-support, self-propagating, and self-governing native church)이 해외선교의 최종적인 목표라는 것은 당시 세계적으로 공통된 견해였다. 각 지역의 현지 교회가 신속하게 스스로 모든 운영의 주체가 돼야 하고, 선교의 대상이 아니라 선교의 주체로 거듭나야 하며, 또한 교회의 내외적인 모든 문제를 스스로 처리해야 하는 독립적이고 토착적인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해외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적인 대명제로서의 해외선교의 목적과 함께, 한 국에서 일정기간 동안 활동했던 초기 선교사들은 대부분 실제 한국에 서 첨예한 교파의 구별이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깨닫게 됐다. 이런 생 각은 한국의 선교사들이 처음부터 확실하게 느낀 바였다. 따라서 선 교사들은 한국에서 교파를 강조하기 보다는, 현지의 상황에 주목해 협력과 일치를 위한 선교 방법을 공동으로 추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남달리 각별하게 지냈던 장로회 선교부들의 공의회 (Council of Presbyterian Missions in Korea)에서는 장로회만의 단일 교회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해외선교의 궁극적 목적인‘단일 현지교회의 설립’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또, 장로회 소속의 선교사들 가운데서 도 단일 한국장로교회의 설립보다는 다른 교파들도 함께 참여하는 일치된 단일 한국교회의 설립을 원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런 상황 속 에서 미북장로회 한국선교 20주년 기념식이 개최됐는데, 여기에서 다 음과 같은 의견이 나왔다. 


"저에게는 기독교 가정, 기독교 사회, 기독교 지도자, 기독교 영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끌고, 관리하며 영향을 주는 능력 있는 하나의 조직교회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 훈련되고 철저하게 성별 된 현지 목회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그리고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은 하나로 연합된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제안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거쳐 1905년‘대한예수교 회’의 설립에 대한 견해가 모아졌다. 당시 150여 명의 선교사들이 모 여 한국 단일교회 설립 안에 찬성했다는 것은 이러한‘꿈’에 대한 열 의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준다.‘대한예수교회’에 대한 논의는 국 내에서 커다란 가능성을 확신하며 전개됐고, 해외선교 현장으로 널리 전해졌다.


그 다음으로 보완되어야 할 것은 단일교회의 명칭이다. 당시 선교사들이 회의를 통해 결정한 한국의 단일교회는‘한국기독교회’가 아 니라‘대한예수교회’였다. 이는 단일교회 설립을 위해 구성된‘재 한개신교선교부공의회’(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통해 결정된 공식적인 한글 명칭이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선교부공의회의 목적이‘복음주의적 한국 단일교 회의 설립’이라는 점이다. 여기서‘복음주의적’이라고 해석되는 ‘evangelical’이라는 단어는 당시 개신교를 의미하는‘Protestant’를 지칭하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개념이었다. 


하지만 교파의 구별이 없는 한국 단일교회‘대한예수교회’를 설립 하려는 강력한 의지의‘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장로회 독노회가 창설되기 이전에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는 점과 장로회와 감리회가 역사적으로 서로 달랐다는 점, 그리고 여러 교파의 해외선교 시스템 상 현실성이 없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 한 원인은‘자립, 자전, 자치의 토착교회’에 대한 해외선교본부의 입 장과 현지 선교사들의 입장이 달랐다는 점이었다. 


즉, 목적은 같았지만 그 목적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랐던 것이다. 해 외선교본부의 입장에서는 한국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있었던 비슷한 시도와 그 결과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있었다. 인도, 중국, 일본 등 의 아시아 지역을 포함해서 기타 다른 지역에서 설립된 토착교회의 경우, 기독교로서의 정체성 자체가 문제시되기도 하는 상황이었기 때 문이다. 그런 견해는 다음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렇게 ‘대한예수교회’의 꿈은 사라져 가고 말았다. 


"특정 교파에서 훈련 받은 선교사는 해외선교 현장에서 교파적 특성을 그대로 답습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쉬운 경향이 있다. 그러나 좀 더 명확하게 각 기독교 공동체가 저들을 위해 결정하는 사안에 대한 자율적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또한 거기에 놓여있는 위험들 을 무시할 수도 없다. 이는 때때로 심각한 걱정의 원인이 된다. 일본 의 교회, 중국의 교회, 인도의 교회들이 복음적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라면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 건전성에 대해 누가 판단할 수 있겠는가?"


교파의 구별이 없는 독립적인 단일교회로 구상된‘대한예수교 회’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1905년‘재한개신교선교부공의회’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가 조 직됐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논의는 그해 6월에 있었던 미북감리회 총 회에서 시작됐다. 감리회 선교사들은 다른 선교부 소속의 선교사들을 초청해 한국 선교를 위한 연합의 문제를 상세하게 다룰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당시 한국 기독교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지만, 그 에 비해 개별 선교부의 입장에서는 인력과 재정이 충분하게 확보되지 못해 한국 기독교의 빠른 성장 속도를 감당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미북감리회 총회 석상에서는 미북장로회의 베어드(William. M. Baird, 배위량)가 연설을 통해 경신학교와 배재학당이 연합해 전국 최고 수준의 교육기관으로 발전한 사실을 앞세워 교육 사업에 있어 연합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또한 감리회 부인병원을 책임지고 있었던 의사 커틀러(Mary M. Cutler, 거달리)는 새 병원을 짓기 위한 계획을 설명하면서 연합을 통해 최선의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음을 밝혔다. 이화학당 책임자였던 힐먼(Mary R. Hillman)도 학교의 시설 확충과 운영을 위해 장로회와 협력할 것을 주장했다. 다른 선교사들도 이들의 주장에 적극 동조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미북감리회 총회는 구체적 으로 연합사업을 추진할 위원들을 선출하고 장로회 측과 회담에 들어 갔다. 


준비는 발빠르게 진행됐다. 총회 직후인 6월 26일 벙커(Dalziel A. Bunker, 방거)의 집에 장로회와 감리회 선교사들이 모여 앞으로 진행 될 연합사업의 목표를 설정했다. 이때 결의된 내용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한국에 단일 개신교회를 만들며 그 이름을‘대한예수교회’라고 한다는 것이었고. 이는「1905년‘대한예수 교회’논의」라는 글에서 자세하게 살펴본 바 있다. 둘째는 기독교 세력들이 각종 선교 사업을 하는데 있어 힘을 합한다는 것이었다. 이 자 리에서 연합에 대한 분위기가 고조돼 여러 가지 새로운 안건들이 나 오는 가운데 스크랜턴은 이런 일들을 위해‘개신교선교부공의회’ (Council of Protestant Missions)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선교사들은 연합 사업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감리회와 장로회의 연합 위원회를 구성하는 한편, 모든 개신교 선교사들이 모이는 집회를 열기로 결의했다. 이 전체 집회는 준비기간을 거쳐 9월 11일 저녁 이화학당 예배당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언더우드 (Horace G. Underwood, 원두우)가 집회의 회장으로, 벙커가 총무로 선출됐다. 이어진 발표와 토론 시간에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시란돈)은 '복음적 선교부 공의회'(Evangelical Council of Missions)를 결성하자고 동의했다. 이 동의안이 받아들여져 참석했던 선교사들이 회원이 되는 형식으로 즉석에서 공의회가 결성됐다. 언더우드와 벙커 는 계속해서 그 직을 맡기로 하고 이 새로운 조직을 위한 회칙과 규정 들을 정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협의회를 중심으로 우선 단일교회 설립을 위한 교리문제를 포함한 제도상의 일치를 논의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크고 작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됐다. 결국 1910년에는‘한국에서 하나로 조직된 교회가 취할 완벽한 정치체제를 제시하기보다는, 실제적인 면에서 가능 한 것부터 조화를 추구해 나감으로써 우리 교회생활을 정착시키고 우리가 취하고 있는 초교파적 협력관계에 있어서 야기될 수도 있는 마찰의 요인을 제거하는 데 즉각적인 효력을 얻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로써 단일교회의 설립은 사실상 포기 단 계에 들어섰고, 1911년에는 기구의 명칭도‘재한개신교선교부연합공의회’(Federal Council of Protestant Missions)로 바뀌었다.  


비록 단일교회 설립을 위한 교파 사이의 일치는 실패로 끝이 났지 만,‘재한개신교선교부공의회’는 각종 선교 사업에서 연합활동을 추진, 한국 에큐메니칼운동의 실질적인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 구체적 인 내용은 다음 글에 잘 요약돼 있다. 


"서울에서는 감리교의 배재학교와 장로교의 경신학교가 합동 운영 을 모색하였고, 세브란스병원과 의학교도 연합 기관이 되었으며, 초 교파 신학교로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이 설립되었다. 평양에서도 두 교 회 연합으로 숭실학교와 숭의여학교를 운영하였고, 감리교 병원이 던 기홀병원도 연합병원이 되었다. 그리고 감리교의 찬미가와 장로교 의 찬양가가 합하여 찬숑가가 되었고, 장로교의 그리스도신문과 감리 교의 그리스도인회보가 통합되었고, 선교사들의 영문잡지인 감리교 의 The Korea Methodist와 장로교의 The Korea Field도 합하여 The Korea Mission Field가 되었다."


우선 교육 사업에서의 연합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교육 사업 은 특히 고등교육사업에 있어서 연합이 필수적이었다. 여기에 나타나 지는 않지만, 연희전문학교의 경우 미북장로회 차원의 대학으로 설립 될 수 없는 상황에서 미북감리회, 미남감리회가 연합하여 학교를 시 작했고, 이후 미남장로회와 캐나다 장로회가 인력과 재정을 연합하여 높은 수준의 학교로 발전할 수 있었다. 


특히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의 경우에는, 이미 평양 장로회신학교가 장로회 선교부 연합으로 운영되고 있고 또 감리교협성신학교가 감리회 선교부 연합으로 운영되는 상황에서, 평신도를 위한 새로운 신학교육기관으로 설립돼 당시 교계에서 요구되는 다양한 영역의 지도자 들을 배출했다. 재한개신교선교부공의회는 이 피어선기념성경학원에 서 많은 모임을 가졌다. 그밖에 의료 사업을 포함한 대부분의 연합사업에 있어 재한개신교선교부의 공헌은 매우 컸다. 그러나 이 협의회 의는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일제 치하라는 특수한 현실 속에서 선교사들과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입장은 서로 달랐다. 우선 한국의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견해에 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선교사 중심의 연합기구가 구체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사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교회의 내외적인 변화에 걸맞게 1918년 한국교회인 장로교회 와 두 개의 감리교회가‘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Korean Church Federal Council)를 구성한다. 이는 선교사가 아닌 한국교회가 중심이 된 교회협의회였다. 이로써 한국교회가 교회일치운동의 새로운 주체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와 재한개신교선교부연합 공의회가 공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에큐메니칼 기구의 일원화에 대 한 요구가 대두됐다. 결국 1922년부터 통합 논의가 적극 추진됨으로 써 1924년 9월 24일에는 새문안교회에서‘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Korean National Christian Council)가 창설된다.  


(사진 - 1901년 구리개 제중원에서 개최된 장로교공의회 모습. / 1910년 경 확정된 한반도 선교구역분할협정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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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교회 (松川敎會) 

우리나라에 기독교 전래가 이루어진 것은 1884년 가을 미국 선교 사이자 의사인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n, 안련)이 도착하면서부터였다. 그러면 처음 세워진 교회는 어떤 교회였을까? 그것은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인 소래(솔래)교회다. 마을의 이름은 원래 소나무 샘을 뜻하는 솔샘(松泉)어었으나, 소나무 내라는 의미의 솔내(松川)에서 마지막 소래로 바뀌었다.


기독교가 전파될 때 이 마을에는 약 70 가구가 살고 있었다. 원래 우리나라 전통 촌락은 한 성을 가진 사람들이 집성촌을 이루는데, 이 마을은 여러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독특한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 1870년대부터 이주한 서씨 가문이 소래에 기독교를 전파한 사람들이다. 


서상륜이라는 사람이 그의 동생 서경조와 함께 1878년 만주 영구라는 곳에 가서 행상을 하다가 열병에 걸려 눕게 됐다. 그런데 마침 만 주에 와 있던 스코틀랜드 선교사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마륵태) 에게 치료를 받고 나았다. 그 후 존 로스(John Ross, 나약한)를 만나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함께 세례를 받은 이응찬, 백홍준, 김진기 등과 선교사들이 함께 성경을 번역, 1883년에 한글성경을 간행하게 된 다. 이들은 이 성경을 가지고 국내에 들어와 전도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국경 검문소에서 발각돼 구사일생으로 한글 성경 열권을 가지고 도망했다. 


그래서 피신한 곳이 바로 황해도 소래였다. 1884년과 1885년 서상 륜과 서경조의 가족들은 소래로 이주했고, 1884년 가을부터 소래에서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소래에 최초의 한국인 기 독교 공동체, 예배 공동체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1885년 9월에는 언더우드 목사가 소래를 방문하여 세례를 베풀었다.


소래교회의 예배당은 전통 한옥을 한 채 사용했다. 구조를 전혀 변경하지 않은 전통한옥 이었다. 다만 지붕 꼭대기에 십자가를 달아 이 곳이 교회당임을 표시했다. 소래는 한국을 방문한 선교사들에게 놀라 운 기독교의 발상지가 됐고, 선교 초기의 한국 선교사들은 의례 이곳을 방문했다. 미북장로회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 동아기독교를 설립한 캐나다 사람 펜윅(Malcolm C. Fenwick, 편위익), 그리고 캐나다 사람으로 소래에서 사역하다가 순교한 매켄지(William J. McKenzie, 매견시) 등이 소래를 떠나지 않고 교회를 짓고 생활하였다. 고독과 외로움에 맥켄지 선교사는 세상을 떠났고, 그 후 한국을 찾아온 선교사들은 소래에 들러 소래교회와 맥켄지의 집을 방문했다. 


소래는 지역교회의 거점이 됐다. 그래서 장연 부근의 송화 은율 풍천 문화 해주 옹진 등지에 수십개의 교회가 연달아 세워졌다. 1902년에는 해서교안 사건이 일어나 소래 일대의 교회들이 박해를 당하기도 했다. 해서교안은 기독교보다 백여년 먼저 들어와 있었던 천주교회가 기독교 의 급속한 부흥을 시기하고 프랑스 신부들의 위세에 기대 황해도 일대 기독교도들을 습격하고 교회당을 탈취하려 시도한 사건이었다. 황해도 일대 교회들이 처했던 이러한 위기는 언더우드에게 연락이 됐고, 그를 통해 정부에 호소해 정부의 개입으로 진압될 수 있었다. 1907년 평양신 학교를 졸업한 서상륜이 소래교회의 초대 목사가 됐고, 그 후 서울에 올라와 언더우드와 함께 새문안교회의 동사 목사가 되었다. 서경조 이후 에는 김두헌 목사, 장응곤 목사 그리고 허간 목사 등이 시무하였다. 소래교회는 한국 기독교의 요람으로 알려져 있다.


새문안교회 

새문안교회는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서울노회에 소속된 교회이다. 종로구 신문로 1가에 있던 초대 정동지역 선교부에 가깝게 위치해 있다. 사실 한국 개신교에서는 최초의 조직교회라고 할 수 있다. 1897년 9월 27일 미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가 서상륜, 백홍준 등 한국인 장로들과 교회를 시작했다. 그날은 주일이 아니고 화요일 이었다. 첫 교인들은 모두 14명이었다. 그중 13명은 이미 매서인 서상륜에 의해서 기독교 신앙에 입문해 있는 사람들이었다.  


새문안교회의 태동은 만주 주재 영국성서공회 선교사들과 한국인 매서인들, 그리고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 등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새문안교회는 원래 정동장로교회 또는 서대문장로교회라 불렸으나, 위치한 곳이 새문(新門 敦義門) 안쪽이었기 때문에 새문안 (新門內)교회가 되었다. 


원래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가 사택으로 구입한 정승 강노의 집에 사랑채를 열어 시작했다. 한옥의 사랑채를 개방한 가정교회였던 것이 다. 그리고 그 집에서 1886년 7월에 노도사라는 언더우드의 한국어 교사가 세례를 받기도 했다. 초기의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 목사에게 부과된 일이 너무 많아 교회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 1886년 고아를 데려다가 가르치기 시작한 구세학당에서 발전하여 경신학교가 됐고, 그것을 기초로 현재의 연세대학교로 이어지는 교육 사업이 시작 됐다. 이러한 학교의 발전과 함께 새문안교회도 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경건운동인 사경회도 새문안교회에서 시작됐 다. 철저한 하나님의 말씀 중심인 장로회의 전통에 따라 1890년 다함께 성경을 읽는 사경회가 처음 시작됐다. 1892년에는 새문안교회 교인뿐 아니라 전국에서 상경한 사람들을 모아 사경회를 개최했다. 모두 16인이 모여 들었는데, 이들은 준사역자 수준의 성경연구와 교리 문답에 이를 만큼 수준 높은 성경공부를 했다. 


새문안교회의 건축은 1895년에 시작됐다. 기퍼드(Daniel. L. Gifford)와 홍정후가 건축 책임을 맡았고, 교인들의 노동과 헌신으로 한옥예배당을 준공했다. 당시 한국인의 월급이 4달러였는데, 교인들은 모두 250달러를 건축 헌금으로 냈다. 건물이 완공되고 나자 새문안교회는 서울 전역에 18개소의 성서강습소를 개설해 선교활동에 나 섰고, 매 주일마다 35개소에서 40개소에 이르는 곳에 집회소를 설치 하고 정규적인 강습회를 열었다. 그렇게 해서 서쪽으로 서교동교회 김포교회 등 교세의 지속적인 확장이 이루어졌고, 남쪽으로는 영등포교회 시흥교회 등으로 확장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성장한 새문안교회는 1907년에 이르면 교세가 600명에 이르게 된다. 빠른 교회 성장으로 예배당이 협소해져 1907년 현 경희궁 옆에 교회 터를 새로 잡고 교회를 건축하게 됐다. 1901년 5월 22일 새로운 예배당이 준공됐다. 장식을 극도로 줄인, 칼빈주의적 신학이 강조된 절제된 건축미의 예배당이었다. 


1910년 서경조 목사가 언더우드의 전도목사로 새문안교회에 부임 했고 1911년에 언더우드의 동사 목사가 됐다. 1911년 평북에서 차재명을 조사로 초빙했는데, 이것은 새문안교회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서북과의 깊은 연고 때문이었다. 차재명은 1920년에 새문안교회의 시무목사가 됐다. 한국인 목사가 부임하면서 교회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되어 주일학교, 면려회, 여전도회, 유치원, 찬양대 등의 활동이 활발해 졌다. 서울 안에 있는 서북계열의 교회로서, 1930년대 중반 서울 지역 교역자들과 서북계가 대립하는 경중노회 사건에 새문안교회가 연관 되기도 했다. 


해방 후 새문안교회는 한국교회의 어머니 교회로서 역할을 충분히 해 왔다. 남부대회 장소로 새문안교회가 제공됐고, 한국전쟁의 와중 속에서도 교회는 부흥했다. 1955년부터 강신명 목사가 취임하여 1981 년 퇴임할 때까지 크게 발전했고, 이후에도 한국교회의 모교회로서 위상을 잃지 않고 그 역할을 감당해 오고 있다. 


정동제일감리교회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첫 번째 설립된 조직교회 정동제일교회 는 1887년 10월 9일 최초의 미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아편설라)가 서울 중구 정동의 현재 자리에서 시작했다. 아펜젤러는 1885년 기독교 학교이자 한국인의 숙원이던 근대식 교육 기관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887년에는 교회를 설립 했다. 장로교회가 한옥교회가 많았던 것과는 달리, 감리교회는 서구식 양식으로 교회를 건축했다. 정동제일교회는 서구식 건축이자 최초의 감리교회 예배당이었다. 교회 근처에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있었기 때문에 초창기부터 성장할 수 있었다.  


정동제일교회는 구한국의 근대화 요구에 부응하는 선교를 펼쳤다. 개화운동과 반일민족독립운동, 그리고 복음전도를 함께 해 나갔던 것 이다. 그래서 정동제일교회는 개화와 민족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운동 단체인 독립협회를 설립한 것은 갑신정변으로 피신했다가 1895년 귀국한 서재필이었다. 그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집에 기숙했기 때문에 정동제일교회나 배재학당과 깊은 관련을 가지게 됐다. 1896년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간행했을 때, 그 인쇄소는 배재학당 지하의 삼문인쇄소였다. 또 같은 해부터 서재필은 배재학당에서 세계지리, 역사학, 정치학 등을 강의했다.


1896년 배재학당에는 협성회라는 조직이 구성돼 민주주의에 대한 토론과 교육이 이루어졌는데, 그 중심 인물은 노병선, 이승만, 신흥우 등 정동제일교회의 청년들이었다. 이처럼 개혁적인 인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청년회는 외부의 수구적인 세력들로부터 위협과 압력을 받았다. 그 결과 1905년에는 을사조약 반대운동으로 인해 청년회가 해산 되기도 했다. 


1895년에 예배당 건축을 시작해 1897년 완성됐다. 고전적 고딕 양 식을 재해석한 양식의 간결한 디자인으로, 강단이 정서쪽을 향하도록 건축됐다. 12월 26일에 봉헌된 이 건물은 명동성당과 함께 서울의 명 소가 됐다. 


초기 신도들 중 이화학당 학생이나 관계자들이 많아 정동교회는 한국 초기 여성운동의 중심지가 됐다. 여성 신도들은 청년회를 통해 축첩반대, 조혼반대, 여아 매매 금지, 여성교육의 장려 등 여성의 의식 개혁과 구습타파에 앞장섰다. 


정동교회의 성가대는 그 수준이 최고였는데, 그 이유는 성가대원들 이 대개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의 학생들이인 데다가, 지휘자도 연희전 문이나 이화여전의 음악과 학생들이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에는 이 화여전의 음악과장인 영(Mary E. Young, 미리영)이 지휘를 맡아 성가 대의 황금시대를 열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정동교회의 담임 이필주 목사가 민족대표 33인중의 하나였고, 박동완 장로도 33인 중에 하나였다. 소속 목사인 김진호 목사와 정득성 장로도 3.1 운동에 크게 기여한 인물 이었다. 교회 청년 홍호는 독립신문이라는 전단지를 만들어 독립에 관한 소식과 독립운동 상황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렇게 독립운동에 대거 참여함에 따라 여러 명의 교인이 수감됐고, 일제의 감시가 심해 져 1919년 가을까지 저녁집회를 중지해야 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감리교회가 재건파와 부흥파로 갈라지는 분 열을 겪었지만, 정동교회는 모교회로서 위치를 지키며 두 파가 1949년 정동교회에서 합동총회를 열도록 함으로써 교단의 일치를 선도했 다. 한국전쟁 중에는 폭격으로 예배당이 파괴되는 큰 손실을 입었다. 1976년 첫 예배당이 사적 제256호로 지정돼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고 1979년 4월 15일 봉헌했다. 정동교회는 지금도 국내 및 해외선교 그리고 방송, 교도소, 직장인 등 한국사회 내에서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진 - 한국 최초의 자생적 교회이자 한옥예배당인 황해도 장연의 소래교회 / 한국의 첫 서양식 개신교 종교건축인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 /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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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를 통해 볼 때 그리스도교는 세 개의 큰 물줄기를 형성 해 왔다.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정교회,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그것이 다. 초대교회에서는 로마,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 노플 등의 다섯 교회가 중심교회로서 리더십을 행사했다. 교회는 지 역에 따라 다양한 신학적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 서 일체감을 형성했다. 이 중 로마교회는 로마제국의 중심지에 있어 주도적인 위치를 점해갔고, 결국 로마 가톨릭교회로 발전해 간다. 그 러나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중심으로 한 로마제국의 동쪽에 있었던 여러 교회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는 다른 신학과 전통을 발전시켜 나 갔고, 결국 1054년 동방정교회로 분열하고 말았다.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 기독교(Protestant)가 갈라져 나 가면서 그리스도교는 세 개의 큰 전통을 형성해 나갔던 것이다. 


현재 기독교 안에는 현재 다양한 교파가 존재하고 있다. 이는 각 시대마다 다양한 신앙운동이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종교개혁으로 루터 파와 개혁파가 형성된 것처럼, 영적 부흥과 성화를 중시하는 영국의 성공회 신자들을 중심으로 감리교가 형성됐다. 또한 감리교 내에서는 성결을 강조하는 성결교가 태동했다. 이처럼 기독교는 다양한 영적 흐름을 대변하고 생동감 있는 변화들을 만들어갈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는 반면, 교파분열에는 취약한 구조 또한 내포하고 있다. 기독교 는 각 개인의 성서해석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효과적인 리더십이 없기 때문에, 다양한 교파가 형성될 수 있었다. 기독교의 이같은 다양한 교파와 교회분열 때문에, 교회사에서는 성서의 가르침으로 모든 교회가 하나될 것을 주장했던 미국의 환원운동 (Restoration movement)이나 교회의 가시적 일치와 연합운동을 주도 하는 에큐메니칼운동이 나타나기도 했다.


한국교회의 다양한 교파는 미국에서 전해졌다. 한국교회는 그 시작부터 교파교회로 출발했다. 각기 교파적 배경을 달리하는 선교사들이 자신들이 속한 교파를 이 땅에 이식한 것이다. 이는 한국교회가 하나 의 교회가 아니라 여러 교파로 분열된 가운데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 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연합운동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서구 선교사들 중에는 미국 선교사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알렌 (Horace N. Allen, 안련)이 입국한 1884년 가을부터 선교사들이 강제 출국으로 조선을 완전히 떠난 1942년 여름까지 약 60년 동안, 1,500 명이 넘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입국했고, 이들 중 미국 선교사들은 약 70%를 차지하고 있다. 교파별로는 장로회(45.4%), 감리회(28.3%)가 다른 교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선교사 인력을 갖고 있었다. 이는 한국교회의 지형도가 처음부터 장로회와 감리회 중심으로 고착화될 가능성이 컸다는 것을 말해 준다. 또 초기의 연합활동 역시 장로회와 감리회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후발주자로 한국 선교에 나섰던 다른 교파들은 한국 선교의 주도권을 미국의 장감선교사들에게 빼앗기고 말았으며, 연합활동에서도 배제되고 있었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연합활동을 펼쳤다. 이는 선교 초기라는 시 대적 상황을 통해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선교사들 입장에서 한국 은 개척해 나가야 할 광야와도 같았고 선교사들의 인력은 절대 부족 했기 때문에, 선교적인 협력은 불가피했다. 한국에는 서양 사람들도 많지 않아 이들은 자연스럽게 함께 교제하며 협력했다. 여기에 서구 개신교 선교운동에 나타난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와 초교파주의 (inter-denominationalism) 등의 영향도 컸다. 


선교사들의 연합활동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것은 한국에 교파와 상 관없는 하나의 개신교회를 설립하고자 했던 노력이다. 1905년에 장로회 4개 선교부(미국 남·북 장로회, 캐나다장로회, 호주장로회), 감 리회의 2개 선교부(미북감리회, 미남감리회)가 함께 재한개신교선교 부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 in Korea)를 결성했는데, 이 연합공의회는 향후 한국에 하나 된 기독교 회를 설립할 것을 표방했다. 이 하나 된 기독교회는‘하나의 토착 복 음주의 교회’(one native evangelical Church)로서 교회 이름도 ‘대한 예수교회’ ‘그리스도교회’(Church of Christ)가 언급됐다. 이들의 꿈 이 실현됐다면 한국에는 장로회와 감리회가 하나된 연합교회가 설립 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선교사들을 한국까지 파견했던 각 선교부로서는 이에 찬성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한 재한 선교사들도 모두 뜻을 같이하지는 않았다. 한국에서도 이를 주도할만한 리더십이 없었기 때문에 단일교회 설립은 한국교회사의 이상(理想)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공의회는 다양한 연합활동을 추진함으로써 연합운동의 효시가 됐다. 이미 오래전부터 추진돼 오던 성경번역과‘조선성교서 회’를 통한 문서사업은 물론이고 몇 가지 정기간행물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The Korea Mission Field(1905),「그리스도신문」(1906),『찬숑 가』(1908) 등의 통합·발간이 그것이다.


초기 선교사들의 주목할 만한 두 번째 연합활동은 장감 선교부를 통해 이루어졌던 선교지 분할이다(comity arrangement). 분할협정은 1892년 미북감리회와 미북장로회 사이에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협정 의 내용은, 5천 명 인구가 사는 개항장과 도시는 양 선교부가 공동으로 점유하고, 5천명 이하일 때는 도시에 이미 지부를 설립한 선교부가 점유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었다. 또 교파를 이적할 때는 소속 교회의 추천서를 받아야 하는 등 8개 항에 합의했다. 이 협정이 1893년 8월에 열린 미북감리회 선교연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후 두 선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선교회들 사이에서도 선교지 분할의 기본 원칙으로 인식됐다. 선교지 분할로 인해서 선교부의 중복투자와 경 쟁은 상당부분 사라지게 됐다. 그러나 장감 이외의 교파는 이 선교협 정에 참여하지 못해 후발주자나 군소교파들은 이 협정을 ‘빅 투(big two)의 선교 담합’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었다. 


세 번째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모체인 조선예수교연합 공의회(1924)이다. 이는 일종의 교회연합 기구로서 한국의 장로회, 감 리회뿐만 아니라 4개 장로회 선교부, 2개 감리회 선교부, 그리고 대영 성서공회와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등이 참여했다. 이 공의회는 각 교파의 정체성과 교리적인 문제에 절대 관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이는 각 교파의 신학을 인정하면서 교회의 연합과 협력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후에 한국기독교교회 협의회(NCCK)로 발전했고, 오늘날까지 한국 개신교 교회일치운동의 중심기구로 유지되고 있으며 에큐메니칼 운동과 사회참여 신학을 중 시하고 있다. 


교파교회 성격이 강한 한국교회에서 선교사들의 연합활동은 한국 교회의 소중한 역사적 자산이다. 복음전도와 연합활동에 서로 협력했던 이들의 소중한 유산은 한국교회에 계승 발전돼야 한다. 오늘날 한 국교회의 교파 이기주의, 또한 이를 넘어서는 개교회주의는 한국교회 전체의 건강성을 생각할 때 사라져야 할 유산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지 적하고 싶은 것은, 선교사들의 연합활동이 장로회와 감리회를 중심으 로 이루어지면서 후발 주자들에게는 하나의 선교상의 장애물이 되기 도 했다는 점이다. 또한 장로회와 감리회가 단일교회를 형성하려 했 던 것은 바람직한 것으로 보이나, 이것이 실현됐다면 교회의 발전과 성장에 반드시 긍정적이었으리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서구교회에서 여러 교파나 교회가 연합한 후 오히려 교회성장 면에서는 쇠퇴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연합활동은 다양성의 일치 속에서 성숙하 게 그리고 역사적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것이 중요하는 것이다.  


(사진 - 첫 내한선교사회의 모습[1893] / 한국기독교연합회()KNCC)의 제11회 총회 모습[승동교회,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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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이후 외국인 선교사들이 활동했던 전국 주요 도시의 선교 거점(station)에는 그들의 묘역이 조성돼 있다. 


먼저 서울의 경우, 양화진에 그 묘역이 조성돼 있다. 전철 2호선 합 정역 7번 출구로 나와 양화진길로 200m 정도 들어가면 깔끔하게 단장된 외국인 공동묘지(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145-8)가 보인다. 묘지 의 총 면적은 13,224㎡ 이다. 여기에 안장된 외국인은 417명이며, 이 중 선교사(가족 포함)는 145명이다. 


이 묘지는 미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내한해 헌신적으로 활동하다 전염성 이질에 걸려 죽은 헤론(John W. Heron, 혜론)이 1890년 7월 이 곳에 묻히면서 시작되었다. 헤론이 죽자 당시 서울의 외국인들은 묘 지를 요구했고, 조선 정부는 이곳 약 280평을 매입하여 외국인묘역으로 조성했다. 일제 말 선교사들의 강제 출국으로 묘역이 방치되다가, 6.25 전쟁 중에는 묘비에 총탄 자국이 생겨 비문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더욱 황폐화됐다. 그러다가 1985년‘100주년기업사업협의회’가 이곳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면서 성역으로 재탄생했다. 이 묘역의 명칭은 양화진외인묘지(楊花津外人墓地), 경성구미인묘지(京城歐美人墓 地), 서울외국인묘지공원 등으로 변경되다가 2006년 5월 현재의 명칭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묘역 안에는 2005년 100주년기념교회가 설립 돼 묘역 관리 및 운영을 맡고 있다.


부산과 경남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호주 선교사들은 지난 2010년 10월 문을 연 창원시 창원공원묘원 내에 있는‘경남선교 120주년 기 념관’바로 옆‘순직 호주 선교사묘원’에 묻혀 있다. 2009년 조성 된 묘원에는 모두 8명의 선교사 기념비와 함께 경남 출신의 순교자 인 주기철·손양원 목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8명의 선교사는 데이 비스(Joseph H. Davies, 덕배시, 1890, 부산), 맥케이 부인(James H. Mackay, 1892, 부산), 아담슨 부인(Mrs. Andrew Adamson, 1895, 부 산), 라이트 부인(Mrs. Albert C. Wright, 1927, 진주), 알렌(Arthur W. Allen, 안란, 1932, 진주), 네피어((Miss Gertrude Napier, 남성진, 1936, 진주), 테일러(William Taylor, 위대연, 1938, 진주), 맥피((Miss Ida McPhee, 1912, 미희) 등이다. 


대구선교사묘역인‘은혜의 정원’(Garden of Mercy)은 대구 동산병원 구내에 있다. 원래 동산병원 동쪽 지금의 제일교회 담 밑에 방치돼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재정비한 것이다.‘은혜의 정원’에는 현재 12개의 묘석(墓石)이 자리 잡고 있는데, 모두 대구·경북 지방에서 활동한 선교사와 그 자녀들이다. 


그 중 몇 명만 살펴보면, 앞 줄 맨 왼쪽의 마르다 브루엔(Martha S. Bruen, 부마태)은 헨리 브루엔(Henry M. Bruen, 부해리)의 부인으로 1902년 남편과 함께 대구에 부임하여 신명여학교를 설립하는 등 여성 교육과 여성선교에 헌신하다가 1930년 10월 20일 55세를 일기로 운 명했다. 앞줄 가운데 누워 있는 스와이처(Martha Switzer, 성마리태)는 독신 여성선교사로 1911년 대구에 와서 신명여학교 교사로 활동 하다가 1929년 과로로 별세했다. 그 앞의 도우슨(John Dawson) 무덤 은 이 묘역에서 가장 최근인 2008년 11월 11일에 조성됐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동산병원 외과 과장을 지낸 도우슨은 지난 2007년 2월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60년 의사 생활 중 한국에서의 시절이 가장 행복했었다고 유언했다. 뒷줄에는 대구스테이션을 개척한 아담스 (James E. Adams, 안의와)의 부인 넬리 딕(Nellie Dick Adams, 탁넬리)의 무덤이 있다. 1866년생인 그녀는 1895년 3개월 된 아들 에드워 드(Edward A. Adams, 안두화)를 안고 태평양을 건너와 남편과 함께 초창기 대구스테이션의 아동·여성 선교에 헌신했다. 1909년 10월 31 일 넷째아이 유산 후유증으로 43세의 나이에 운명해 대구에 묻힌 첫 외국인이 됐다. 


충북 청주시 일신여고 구내에는 모두 3개의 묘비와 1개의 기념비 가 나란히 서 있는 묘지 동산이 있다. 그 작은 동산의 맨 왼쪽에 있 는 묘비가 바로 청주 선교의 개척자 밀러의 것이고, 그 다음에는 퍼디 (Jason G. Purdy, 부례선)의 무덤이 있다. 1923년 청주에 부임한 퍼디 는 보은, 옥천, 영동 등 충북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26 년 황간에서 전염병에 걸려 29세의 나이로 순직했다. 세 번째의 작 은 묘비는 1918년부터 1937년까지 20년간 충북 선교에 헌신한 솔타우 (Stanley T. Soltau, 소열도)의 아들 데오도라(Theodora G. Soltau)의 것이다. 그는 1922년 두 살의 나이로 청주에서 사망했다. 


충남 공주시 영명고등학교(충남 공주시 중동 318번지) 강당 뒤편 산 중턱에 조성돼 있는 공주 선교사 묘지에서는 모두 5개의 묘비를 만 나 볼 수 있다. 그 중 가장 큰 것이 샤프(Robert A. Sharp)의 무덤이다. 1903년 내한한 샤프 선교사는 먼저 배재학당과 정동교회에서 일했는 데 그 사이에 여선교사 앨리스(Hammond J. Allice, 사애리시)와 결혼 했다. 1904년 충청구역 책임자로 임명된 그는 1905년 공주로 내려와 공주 최초의 양옥집을 짓고 이주했다. 하지만 1906년 2월 논산지방을 순회 전도하다가 발진티프스에 감염돼 순직했다. 악천후를 피해 잠깐 머물렀던 곳이 바로 상여집이었는데, 그 상여를 만진 것이 감염의 원 인이 된 것이다. 부인의 정성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샤프는 1906년 3 월 15일 34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 이곳에 묻혔다. 샤프의 무덤 외에 나머지는 선교사 2세의 무덤들이다.


‘전주 선교사 묘역’은 전북 전주시 예수병원(전북 전주시 완산구서 원로 68) 맞은편 의학박물관 건물 뒷산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 이곳에는 모두 17기의 무덤이 안장돼 있다. 그 중 입구에 있는 묘비 6개만을 소개하기로 한다. 1892년 미남장로회 첫 선교사로 내한했던 데이비스(Linnie F. Davis, 후에 해리슨 선교사와 결혼)는 전주에서 환자들을 돌보다가 병이 전염돼 1903년 6월 19일 순직했다. 그 옆의 전킨 (William M. Junckin, 전위렴) 역시 남장로교의 처음 선교사로 내한 해 군산에서 사역하다 건강이 악화돼 1904년 전주로 임지를 옮겼지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지방 순회에 몰두하다가 결국 1908년 1 월 운명했다. 전킨 묘비 앞에 있는 조그만 돌 세 개는 어려서 군산에서 사망한 전킨의 세 아들 시드니(Sidney), 프랜시스(Francis), 조지 (George)의 묘비석이다.  


‘미남장로회 광주 선교사 묘지’는 현재 광주광역시 호남신학대학 구내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여기에는 12기의 무덤이 있었는데, 순천과 목포스테이션이 정리되면서 그곳에 있던 묘지들을 지난 1979년 이곳으로 이장(移葬)해 그 규모가 크게 늘어났다. 지금은 순천 에서 온 10개와 목포에서 옮겨진 4개 등을 합해 모두 26기의 무덤이 이곳 묘역에 있다. 그 중 몇 개의 무덤들만 소개하면, 맨 앞 오른쪽에 묻혀 있는 폴 크레인(Paul S. Crane, 1889-1919)은 순천스테이션 소 속 선교사였던 존 크레인(John C. Crane, 구례인)의 동생으로 형보다 2년 늦은 1916년부터 목포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교 3년 만인 1919년 3월 26일 벨(Eugene Bell, 배유지)이 몰던 승용차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오던 중 수원을 지나 병점의 건널목에서 그만 열차와 충돌하는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그 바로 옆의 오웬(Clement C. Owen, 오기원)은 벨과 함께 전남 선교를 개 척한 인물로 1909년 순천 전도에 나섰다가 폐렴에 걸려 42세의 나이로 순직했다. 그는 양림동 동산에 묻힌 첫 선교사이다. 오웬 무덤 옆 에는 1907년 광주에 와서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오랫동안 일했던 그래 함(Ellen I. Graham, 엄언라)이 누워있다. 독신이었던 그녀는 건강이 악화돼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와 소원대로 광주에 묻힐 수 있었다. 그 옆의 브랜드(Louis C. Brand, 부란도)는 1924년 군산을 거쳐 1930년부터 광주제중병원에서 결핵 퇴치 운동을 전개했던 의료 선교사로 결국 자신이 결핵에 걸려 소천했다. 당시 그의 나이 마흔 넷 이었다.


(사진 - 양화진에 처음 안장된 헤론 선교사의 초기 묘원 모습 / 양화진에 세워진 헤론 선교사의 첫 묘비. 한국전쟁 당시 심하게 파손되어 연세대학교로 옮겨지고, 새로운 묘비가 세워졌다. / 양화진 외국인묘지의 두번째 헤론 선교사 묘비. / 청주 탑동 일신여고 구내의 장로교 선교사 묘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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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선교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한국의 지역을 분할하기로 협정을 맺는다. 이를 소위 ‘교계예양’이라고 한다. 선교지 분할협정은 1892년 미북장로회와 미북감리회에 의해 처 음으로 시작되었지만 여기에서는 원론적인 사항들이 논의됐고, 선교 지 분할이 구체적으로 결정된 것은 1893년 장로회연합선교부공의회를 통해서이다. 장로회 공의회가 1월 28일 모여 미남장로회는 충청도 와 전라도를 선교 책임지역으로 맡고, 호주장로회는 경상도 남부지역을 책임지역으로 맡기로 결의한 것이다. 


이후 장로회 공의회는 1898년 캐나다 장로회가 내한했을 때 함경남도의 원산을 양도하면서 함경남북도 전체를 캐나다장로회 선교부가 맡도록 했고, 1909년에는 미북장로회가 부산에서의 모든 사업을 정리 해 호주장로회에 양도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통해 호주장로회는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를 선교 담당구역으로 정했다. 한편 미북감리회와 미남감리회는 서로의 협정을 통해 원산을 미남감리회로 이양하는 등의 조정을 했다. 일단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장로회와 감리회 내 부에서의 교계예양이 정리된 것이다.


이러한 결정이 협의되는 과정에서 한국에 도착한 다른 선교부가 여 럿 있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최초 미북장로회와 미북감리회가 선교지역에 대한 원칙적인 합의를 한 이후, 호주장로회와 미남장로회가 들어와 협의회를 구성하고 교계예양을 결정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영국성공회의 경우는 이러한 논의에 서 제외되기도 했다. 1895년에는 미남감리회 선교부가 한국에 정착했고, 1898년에는 캐나다장로회가 내한했다. 이렇게 여러 교파가 동시 에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전개하면서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뒤늦게 선교 사업에 뛰어든 교파가 불리한 입장에 놓인 것이다. 


"그러다가 남감리교회가 내도하게 되니 지역분쟁이 격심해졌다. 남감리교회는 서울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북장로교회와 북감리교회의 선교지구로 되어있는 황해도에 선교사업을 연장하였다. 그러나 이 충돌은 남감리교회가 황해도 안에서의 사업을 중지함으로서 해결되었다. 남감리회는 송도와 한강이북지역과 아직 미점유지역인 강원도로 진출하였다."


이와 같이 선교지 문제를 놓고 여러 교파가 고심하는 가운데, 또 다른 교파들이 계속 내한했다. 침례회 계통의 엘라딩 기념선교회, 성결교회의 모체인 동양선교회, 구세군, 안식교, 플리머드 형제단 등이 연이어 한국에 들어온 것이다. 좁은 한국 땅에 많은 교단이 복잡하게 난립하여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선교지를 어디로 설정하느냐 하는 것은 선교사들 사 이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고, 자칫 협정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예민한 부분이기도 했다. 이 때 선교지 분할협정을 원만하게 조정하는 일에 재한개신교선교부공의회 가 나섰다. 물론 여기에 직접 참여 하지 않은 교파들도 있었지만, 그들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알아서 할 수 있도록 했다.


재한개신교선교부공의회는 처 음으로 미북장로회와 미북감리회 사이의 평안북도 지역에 대한 협정을 이끌었다. 1905년 평안북도 태천, 희천, 영변 각 군과 박천의 일부 지역을 미북감리회 선교부에 서 맡고, 나머지 지역은 미북장로회에서 맡기로 했다. 1906년에는 이 공의회의 결정으로 미북장로회와 미북감리회 사이에서 평안남도 지역에 대한 선교지 분할협정이 맺어졌다. 이 결정으로 미북감리회는 평남의 진남포, 강서, 용강군과 중화군 일부, 황해도 해주, 서흥, 신계, 곡산, 장단, 청단, 배천을 담당하게 됐다. 나머지 평안북도 지역은 미북장로회에서 맡기로 했다. 


 1907년에는 미북감리회와 미남장로회 사이에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한 협정이 이루어져, 공주를 경계로 북쪽은 미북감리회가, 남쪽은 미남장로회가 담당하게 됐다. 또한 미남감리회 선교부와 미북장로회 선교부 및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 사이가 강원도와 원산에 대한 협정을 맺어, 원산은 미남감리회와 캐나다 장로회가 공동으로 점유하기로 했고, 철원 이북의 강원도는 미남감리회 구역으로, 원주 이남은 미북장로회의 책임 선교구역으로 정했다. 


1908년에는 미남감리회 선교부와 캐나다장로회가 협정을 맺어 미 남감리회는 원산 북부지방을 캐나다 장로회에 넘겨주고 서울에서 송도까지, 그리고 서울에서 원산까지 확정된 지역을 차지했으며, 캐나 다 선교부는 함경남북도 지역을 계속 차지했다. 서울 이남은 미북장로회와 미북감리회, 그리고 미남장로회가 서로 협정을 맺어 충청북도 는 미북장로회가, 충청남도는 미북감리회가, 그리고 전라남북도는 미남장로회가 차지했다. 영남지방에서는 미북장로회 선교부가 경상남 도 동남부와 서남부 지역을 호주선교부에 넘겨준 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경상남도지역과 경상북도 전역을 차지했다. 


교계예양은 1909년 미북감리회와 미북장로회 사이의 협정을 통해 한국에서의 선교지 분할에 관한 전반적인 협의가 마무리되었다. 하지 만 이후 새롭게 선교지가 설정되는 경우에는 경계를 다시 나누는 일 도 있었다. 가령, 1918년 2월 26일에 조직된 장감연합협의회는 국외 선교지역의 경계를 분할해 장로회는 만주, 감리회는 시베리아 지방을 각각 맡아 선교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미리 정해진 협정을 그대로 인정해 폐지될 때까지 지켰다. 


이렇게 선교부들이 지역을 분할해 선교를 담당함으로써 불필요한 마찰이나 재정낭비를 줄일 수 있었지만, 이 분할규정이 30년 이상 적용되면서 선교부의 배경에 따라 교회의 특성이 형성되는 현상도 나타 나게 됐다. 물론 여기에 동참하지 않은 다른 선교부는 지역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전개하기도 했지만, 교계예양은 해방 이후 지역 갈등과 교회분열의 원천적 원인으로 표면화되기도 했다. 


교계예양이 선교 역량의 낭비를 줄이고 중복으로 인한 마찰을 피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오랜 세월 고착되는 동안 각 지역 사이에서 독특한 지방색으로 형성돼 이후 지역 갈등이나 차별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것은 교계예양이 선교의 편의에 의한 임시적인 구분이어야 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또 교계예양은 전적으로 선교의 주체가 선교 의 대상을 바라보는 과점에서 선교의 객체를 전혀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은 일방적인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도 교계예양의 흔적이 한국교회 곳곳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사진 - 기독교 각 교파 조선포교구역도,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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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기독교는 사악한 종교로 규정돼 있었으며, 따라서 엄격하게 금지됐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초기 역사는, 기독교를 금지했던 조 선 정부의 정책 아래서 가톨릭 교인들이 수많은 박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후 조선은 쇄국정책의 빗장을 풀고 문호를 개방한다. 그 과정에서 제한적이긴 하지만 황제의 기독교 선교 윤허가 있었고, 개신교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입국하게 됐다. 


조선이 처음으로 조약을 맺은 국가는 일본이다. 1876년 2월 27일 강화도에서 체결된‘한일수호조규’는 조선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불평등한 조항을 담고 있었다. 이 조약을 통해 한국 영토 내에 일본인들이 거주할 수 있는 빌미가 마련됐으며, 일본은 이 후‘한일수호조규부록’(1876. 8. 24),‘부산항조계조약’(1877. 1. 30), ‘원산진개항예약’(1879. 8. 30),‘원산진


조계협정서’(1881. 8. 4) 등을 잇따라 체결하며 한국 진출의 근거를 마련했다.


한편, 함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조선의 문호 개방을 압박했던 미국 의 전략과 조선에 진출하고자 하는 일본의 독점을 제어하기 위한 중 국의 개입으로, 조선은 미국과 조약을 체결했다. 1882년 5월 22일 체결된 이‘한미수호통상조약’에는 처음으로 외교대표의 서울 상주가 명시됐다. 이어 조선은 중국과도 조약을 체결했다. 1882년 8월 23일 체결된‘한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었다. 이 조약으로 외교대표가 아닌 일반 상인들의 서울 거주가 확정됐다. 


이후 조선은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 벨기에, 덴마크와 연이은 조약을 체결하며 문호개방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조약들을 통해 각국의 공사관이 서울에 설립됐다. 이에 따라 특히 정동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 일대에 외국 외교 대표 관련자들과 일반 상인들이 정착하게 됐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선교사들도 한국에 들어올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고 있었다. 


조선은 이렇게 동서양 제국과 조약을 체결하며 문호를 개방했다. 그리고 동시에 조선도 외교사절단을 파견하기 위해 우선 외국 현지 의 상황을 조사하게 했다. 이를 위해 구성한 파견단 가운데 견미사절 단이 있었다. 이들은 미국 대통령에게 국서를 전달해 양국 사이의 외 교 관계를 공식화하는 동시에, 미국의 정치, 문화, 사회 제도를 살피 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여기에는 고종 황제가 신임하는 민영익을 수 반으로 20대 젊은 인재들이 선발되었다. 


견미사절단 일행은 1883년 7월 제물포를 출발해 9월 미국 샌프란시 스코에 도착했다. 이들은 다시 대륙횡단철도를 타고 시카고와 뉴욕을 거쳐 워싱턴에 도착했다. 이 열차 안에서 사절단 일행은 볼티모어에서 목회하는 감리회 목사 가우처(J. F. Gaucher) 박사를 만났다. 이를 계기로 가우처는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됐으며, 자신이 직접 나서 서 한국에 선교사 파송을 위한 기부금을 제공하는 한편, 중국과 일본 선교의 개척자 역할을 하는 대표적인 감리회 선교사 맥레이(Robert. S. Maclay, 맥리가)에게 한국을 방문하여 선교사업의 가능성을 확인 해 줄 것을 요청했다. 


"시간 좀 내서 한국에 나가서 땅을 물색하여 선교부를 설치할 수 있 는지 알아보시겠습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는 그 이방인의 지역에 들어가는 첫 번째 개신교회가 될 것입니다. 만약에 일이 성사된다면, 이것은 일본 교회로서도 명예가 될 뿐 아니라 당신께서 우리 교회를 위해 이미 이룩해 놓으신 업적에 또 하나 새로운 업적을 남기게 될 것 입니다."


맥레이는 가우처의 부탁과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본부의 한국 선교 결정에 따라 2주 동안 한국을 방문했다. 맥레이는 이 때 일본에서 알게 된 개화파 정치인 김옥균의 도움을 받았다. 맥레이는 김옥균을 통해 자 신이 조선에 온 목적을 담은 편지를 고종 황제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은 물론 한국 정부가 기독교 선교를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며칠 후 맥레이는 김옥균을 만나 고종 황제가 병원과 학교 사업을 시 작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1884년 7월 3일 조선 의 황제가 기독교 선교를 윤허했다는 말이었다. 이에 따라 맥레이는 일 본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서울과 인근 지역을 둘러보고, 외국 공사관들이 모여 있는 정동에 선교본부를 마련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이런 전반적인 상황 속에서 미국에 있는 해외선교본부들이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미국 장로회는 한국 선교를 위한 기금을 조성해 선교사를 선발했고, 미국 감리회와 미국 감리회 여성 해외선교본부에서도 한국에 파송할 선교사들을 서둘러 선발했다. 그러는 사이 한국에서도 이들을 맞이할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한국에 처음 자 리를 잡은 선교사는 의료선교 사인 알렌(H. N. Allen, 안련) 이었다. 당시 의료 혜택을 전 혀 받을 수 없던 상황에서 외 과 의사 알렌의 등장은 각국 공사관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따라서 이들은 알렌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이에 따라 알렌은 손쉽게 선교 사업을 위한 부지를 마련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서는 명성황후의 조 카 민영익의 생명을 구해냄으로써 왕실의 후원 아래 제중원이라는 한 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을 설립할 수 있었다. 제중원은 초기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머물며 본격적인 선교를 전개하기 위한 준비와 협력을 하는 장소가 됐다. 아펜젤러(H. G. Appenzeller, 아편설라)와 언 더우드(H. G. Underwood, 원두우)를 비롯한 초기의 선교사들은 이후 서울 정동에 각각 선교지부를 설치하고 한국 선교를 위한 각종 사업 을 추진했다. 병원으로는 제중원을 비롯하여 제중원 부인병원, 시병원, 보구여관과 시약소가 세워졌고, 학교로는 원두우학당,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이 황실의 깊은 관심 속에 설립됐다. 그리고 1887년 가을 에는 드디어 각각 새문안교회와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했다. 이러한 과 정을 거쳐 서울 정동은 한국 기독교의 요람이 될 수 있었다. 이처럼 조선의 문호개방과 그 이후 있었던 고종 황제의 선교 윤허, 그리고 공식적인 선교사의 내한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다.  


(사진 - 1934년 배재학당에서 시연된 고종의 선교윤허를 극화한 연극공연 모습 / 최초의 견미사절단[1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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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면서 고종은 재위 10년 만에 친정을 선포했다. 이때 조선의 화두는 개화였다. 이는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 이는 방식에 있어서 제기되고 있던 중국의 중체서용과 일본의 화혼 양재를 염두에 둔 조치였다. 즉 중심은 고유의 방식을 유지하면서 주 변은 서양의 문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한 국의 경우 동도서기의 입장으로 대변됐다. 그러나 이같은 이론적이 고 논리적인 차원의 논의들은 실질적으로 서양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구체적인 전개 과정에서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더구나 위정척 사의 강력한 관성이 지속적으로 조선 사회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서 양의 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던 실학파의 입장도 서로 많은 차이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강력한 구심점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당시 서구 열강들의 동양 진출 과정 속에서 적극적인 개화의 의지를 갖고 동서양 제국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자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한국 사회에 문명개화를 소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이었다. 선교사들의 문명개화론은 논리적으로 정교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한국 사회의 매우 현실적인 차원을 다루고 있었다. 이들이 조선 사회에 문명개화를 소개한 이유는 기독교를 변증하려는 의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제적으로 조선 사회에 문명개화에 대한 강력한 요구가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 선교사들은 순한글 신문을 제작, 보급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1897년 초반 창간된 두 개의 신문이다. 각 신문의 창간사를 보면, 선교사들이 신문을 통해 한국 사회에 전하고자 했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확 인할 수 있다.  


"지금 만국이 교제하는 때를 당하여 동양 사람은 동양 글만 읽고 동 양 도만 존숭하고 동양 소문만 듣고자 하지 말고 우리 회보를 보시면 세계 상의 유익한 소문과 각국의 재미있는 사적을 자연히 통달할 것 이니 우리가 이 회보를 파는 것은 재리를 취함이 아니요 사람은 혼암한 마음을 광명케 함이니 누구든지 개명에 진보하고자 하거든 이 회 보를 차례로 사서 보시기를 바라오. 조선 회보라 한 뜻을 발명함이라." 「죠선크리스도인회보」 창간호, 1897년 2월 2일.


"이 그리스도 신문을 설립하는 것은 조선 백성을 위하여 지식을 널리 펴려하는 것이니 지식을 말하려 하면 다른 것이 아니라 천지만물 의 이치와 형상과 법을 아는 것이요 타국 정치상을 아는 것이니라. 아 무 생업이라도 각 학문을 배운 것이 유익하지 않음이 없으니 지식이라 하는 것은 각 사람에게 재물로 유익함이니 나라에도 유익함이 되느니라." 「그리스도신문」 창간호, 1897년 4월 1일.


「죠션크리스도인회보」는 미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아편설라)가 1889년 5월부터 월 2회 발간했던「교회」 라는 간행물을 확대, 1897년 2월 2일부터 주간으로 발행한 4~6면 분량의 순한글 신문이다. 이 신문은 그 해 12월 초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뀌면서「대한크리스도인회보」로 이름을 바꿨고, 아펜젤러의 주도로 1900년 8월 29일까지 발행됐다. 그러나 아펜젤러가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이후 발행이 전면 중단됐다가, 1905년 1월부터「그리스도인회보」라는 명칭으로 미 남·북감리회 합동으로 발행됐다. 


「그리스도신문」은「죠션크리스도인회보」보다 두 달 늦은 1897년 4월 1일 미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 가 개인적으로 창간한 후 1904년부터 장로회의 공식 신문으로 발간된 순한글 주간 신문이다. 8~10면으로 간행된 이 신문은 「죠션크리스도인 회보」보다 분량이 많았으며, 활자 체, 구성, 내용의 다양성 등 모든 면 에서 「죠션크리스도인회보」보다 더 나은 평가를 받았다. 이 두 신문이 1905년 7월 선교사들 사이의 연합 운동 일환으로 통합되면서「그리스도신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통합된 신 문은 1907년 11월부터 이름을「예수교신보」로 바꾸고 1910년까지 약 5년간 격주간으로 발행 됐고, 이 신문은 이후「기독신보」라는 이름으로 계속 발행됐다.


이 두 신문은 발간 취지에서 알 수 있듯 선교 목적과 함께 조선의 문명개화라는 목적으로 발행됐다.「그리스도신문」은 조선의 문명개화를 위해“농리 편설”과“공장 편리설”이라 는 연속 기사를 통해 서양의 농 사법과 공장의 학문에 관한 여 러 가지 정보를 매우 풍부하게 전해주기도 했다. 또한 각종 상업 광고를 게재하면서“각색 상품 물목”이나“종시 상품 물세”라는 제목 아래 지면을 할애해 각 지역의 물건 값을 비교하여 밝혀줌으로써 상업과 물품 구입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 외에도“시세론,”“외방통신,” “외국 통신,”“전보”등을 통해 해외 소식을 알려주었고, 미국이나 유럽 각국, 일본 등의 소식들을 자세히 소개하는 기사를 통해 “문명국”의 모습을 국내에 전하려 노력했다. 


이 두 신문의 발간은“복음전파”와“조선의 문명화”라는 취지를 넘 어 조선 사회에 의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영향을 미쳤는데, 그 대표적 인 것이 한국 근대 문학의 발전에 공헌한 것이었다. 이 글에서는 이 한 가지 중요한 차원의 성과를 살펴봄으로써「죠션크리스도인회보」 와 「그리스도신문」이 얼마나 조선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단적으로 예시하고자 한다.  


이 두 신문이 한국의 근대 문학의 발전에 끼친 영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독자들에게 한글 사용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한글 문화의 정착과 한글의 대중화에 적지 않게 공헌했다. 한국 근대 문학 발전을 가늠하는 주요 지표 가운데 하나가 한글 사용의 확대라는 점을 생각 한다면, 이러한 기독교 신문의 한글 중시 방침은 한국 근대 문학 전개 역사에 일정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둘째, 두 신문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시도한 새로운 글쓰기 형식인 우화와 같은 서사적 논설은 새로운 차원의 서사문학 양식을 탄생시켰다. 


셋째, 두 신문이 믿음이 굳건한 인물들의 일대기나 일화를 소개하기 위해 다뤘던 인물 기사는 이후「대한매일신보」를 통해 발표되는 근대계몽기 역사, 전기소설 창작의 바탕이 됐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선교사가 발간한「죠션크리스도인회보」와「그리스도신문」은 복음전파라는 선교적 목적을 넘어서 조선의 문명개화와 더불어 한국 근대 문학의 발전이라는 구체적인 영역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사진 -  대한크리스도인회보와 발행인이었던 아펜젤러 선교사 / 그리스도신문과 발행인이었던 언더우드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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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적인 출판문화는 기독교 선교역사와 함께 걸어 왔다. 1884년 시작된 기독교 선교와 함께 비로소 조선에 광혜원(제중원), 시병원 등 근대적 병원이 세워졌고, 곧이어 배재학교와 이화학교 등의 근대적 교육기관이 시작됐다. 이와 더불어 배재학당 안에 인쇄소가 설치되면서(삼문출판사로 발전됨) 서구의 출판물을 본받아「죠션크 리스도인회보」의 전신인 월 2회 정기간행물「교회」, 월간지「코리안 리파시토리」,「독립신문」등 근대적 신문과 잡지가 조선에서는 처음 으로 창간됐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 조선에 전래된 기독교는 근대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지만, 조선인들이 볼 때는 결과적으로‘근대’라 는 옷을 입고 찾아온 선진문명이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전래가 조선의 근대적 출판문화에 끼친 영향은 다양한 측 면에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기독교가 발행한 근대적 출판 물 그 자체가 중요한 요인이었다. 여기서 기독교 출판물의 출판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에 따라 출판의 시기를 세분할 수 있다. 우선 1885년 선교사들의 내한으로부터 1910년 한일병탄까지는, 선교사들이 출판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선교사 시대(1885-1919)로 볼 수 있다. 1910년 이후부터 한국인들이 서서히 등장해 출판에 관여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한국인은 선교사들의 조력자 정도로 여겨졌다. 이 시대 출판 물의 발간 목적은 주로 선교용이었고, 서구문화의 소개, 세계의 시사 문제를 전달하는데 있었다.


 그러다 1920년대에 들어와 선교사와 한국인의 동반 시대(1920- 1930)가 열리면서, 신문 또는 회보 발간에서 차차 벗어나 잡지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또한 필진이 거의 한국인으로 교체되고 그 내용도 계몽에서 탈피해 본격적인 연구 논문이 실리기 시작했다. 


이어 1930년대 이후부터 한국인시대(1931-1939)가 시작된다. 그 전 반기에는 기독교 도서와 신문 잡지 출판의 최고 전성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기독교 선교 50주년을 지나면서부터는 쇠퇴하기 시작해 1940 년대에 들어서는 겨우 몇 개의 잡지만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는 암흑 기(1940-1945)에 들어서게 된다. 


「신학월보」(The Sin Hak Wolpo. A Biblical and Church Monthly)는 미북감리회 선교사 존스(George H. Jones, 조원시)가 1900년 12월 창 간한 감리회의 두 번째 월보이자 조선 최초의 신학잡지이다. 


이 잡지는 신학, 교회사, 성서주석, 설교학 등에 관한 논문과 논설, 신앙고백, 교회 관련 기사 등을 싣고 있다. 신학 전문 잡지지만 순한 글로 되어 있어 일찍부터 한국 신학의 형성에 공헌했고, 신학서적이 거의 없던 기독교 초창기에 신학교 교재 역할을 함으로써 목회자 양성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신학월보」에는 편집 발행 책임을 맡았던 존스 등 선교사들과 함께, 한국교회의 초창기 선구자들인 김창식, 전덕기, 오석형, 최병헌, 박에스더, 구춘경 등 40명이 넘는 한국인 필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언론인이자 임시정부 외무총장을 지낸 박용만이 1904년 6월호에 기고한 ‘십자군의 격서’는 이 잡지가 감리교의 신학잡지를 넘어서 기독교와 민족운동을 결합시킨 개화기의 언론매체였음을 보여준다.


「신학월보」는 창간 이후 1904년까지 월간으로 발행되다가 2년간 중 단되었고, 1907년 7월 복간된 뒤 1910년 가을까지 격월간으로 발간됐 다. 


「신학월보」가 사역자를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재였다면「신학세계」는「신학월보」를 흡수하여 발간된 학술지 성격이 강화된 전문적 신학잡지였다. 


이 잡지는 1916년 2월 선교사 하디(Robert A. Hardie, 하리영)가 편 집 겸 발행인으로, 양주삼이 주간으로 참여해 출판된 잡지로, 신학연구논문만이 아니라 국내외의 교계소식도 싣고 있다. 이 잡지는 당시 한국 교회의 진보적인 신학을 대변하는 잡지라는 뚜렷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1932년에 정경옥에 의해 칼 바르트의 신학이 소개되는 등 당시 평양신학교의 보수적 입장에서 볼 때는 진보적인 신학이 유입되는 경로였다. 이 잡지는 또 한국적 신학의 형성과 신학의 토착화 에도 중요한 공헌을 했다. 최병헌은 이 잡지에 동양사상과 기독교사 상을 비교 연구한 종교 변증설을 연재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그 후「신학세계」는 1940년 감리교신학교가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됨에 따라 폐간됐다. 그리고 해방 이후 46년 1월에 신학교는 개교했지만 이 잡지는 미처 복간되지 못했다. 그러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소생할 기회를 완전히 잃는 듯 했지만, 폐간 12년 만 인 1952년 10월 15일 부산 피난지에서 속간 제1호(제27권 1호)를 발간 하는‘포화 속 기쁨’을 맞았다. 현재「신학세계」는 명칭을『신학과 세계』로 바꿔서 계속 발행되고 있다. 


「신학지남」은「신학세계」보다 2년 뒤인 1918년 3월, 클라크 (Charles A. Clark, 곽안련)를 발행인, 엥겔(George O. Engel, 왕길지)을 편집인으로 한국 신학의 지남(指南:가리켜 지시하는 것)적 사명 을 띠고 평양신학교의 대변지로 출발했다. 


창간호 발간사에 따르면,「신학지남」의 목적은 장로회의 신학을 제대로 제시하고, 목회자들이 계속해서 신학을 연구해 신학적 지식을 풍부하게 하는 동시에, 목회와 설교 준비에 도움을 주어 뛰어난 설교 자가 되도록 하는 데 있었다. 


장로회의「신학지남」은 감리회의「신학세계」와 마찬가지로 신학 서적이 부족하던 당시에 목회자와 신학생들에게 신학 지식을 전달하 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신학세계」가 한국인의 글을 주로 실었 던 것에 비해「신학지남」은 주로 선교사 위주로 글이 실렸고, 새로운 신학이해보다는 과거의 신학사상과 성경의 교리를 풀이하는데 치중 했다. 또「신학세계」가 시대적 풍조에 따라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토착화 작업에 관대한 입장을 취한 것에 비해,「신학지남」은 변증적 글이 대부분이었고 서구신학을 소개하는데 그쳤다는 아쉬움이 있다. 


이후「신학지남」은 장로회신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폐쇄 되자 자연스럽게 함께 폐간되됐가 해방 후인 1954년 2월에 복간되었다. 그러나 1960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가 분열되면서 장로교신학대학측은 1965년에「신학지남」의 제호를『교회와 신학』으로 바꾸어 현재까지 출판해 오고 있는 반면, 총신대학측은 제호를 그대로 고수하여 『신학지남』을 현재까지 계속 간행하고 있다. 


 추구하는 학문적 성격을 달랐지만,「신학세계」는 초기 한국 감리회 신학 연구와 발전을 위해, 그리고「신학지남」은 초기 한국 장로회의 보수신학을 위해 쌍벽을 이루면서 한국 교회 신학권에 큰 영향을 미친 잡지라 하겠다. 


(사진 - 신학월보 / 신학세계 / 신학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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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전 인쇄술의 발달에 있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찬란한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8세기 통일신라 때 제작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평가 받고 있고, 독일의 구텐베르크보다 2세기 앞선 고려시대에 이미 금속 활자가 인쇄에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그러나 이처럼 어느 나라보다도 앞선 활자의 발명에도 불구하고 출판문화는 한국 문화의 저변까지 확대되지 못했으며, 일반 대중들은 책을 읽을 기회를 거의 얻지 못했다. 그 결과 일반 서적은 물론, 신문이나 잡지, 기독교 문서 등이 출판되기 시작한 한국의 근대적 출판역사는 개화기 때부터 시작됐다. 


국내에서 활판 인쇄술을 이용한 출판 사업을 최초로 시작한 곳은 대부분 일본인들 손에 의해 운영되던 박문국(博聞局)으로, 모든 출판 물은 한문으로 발행됐고, 한국 최초의 신문「한성순보」도 이곳에서 발간됐다. 이후 박문국에 이어 한국 최초의 민간 출판사인 광인사(廣 印社)를 비롯한 회동서관 등 여러 출판사들이 등장했다. 


이렇게 정부와 민간인들이 근대적인 출판 사업을 벌이고 있을 무렵, 한국 기독교 초기에 출판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인식한 미북감리회는 1888년 배재학당 내에 최신식 인쇄시설을 갖추고 출판활동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한국기독교 출판사업의 문을 연 삼문출판사(三文出 版社, The Trilingual Press)이다. 


1892년 1월 올링거(F. Ohlinger) 목사가 배재학당 내에 세운 삼문출 판사는 한글, 한문, 영문 세 가지 활자를 갖추어 놓고 삼문(三文)으로 인쇄, 출판했기 때문에 The Trilingual Press, 즉 삼문출판사라는 이 름이 붙었다. 삼문(三文)으로 인쇄한다는 것은‘밖의 것’들을 조선인 들에게 전해주는 것만큼,‘조선의 소식’도 외국에 알리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확장성으로 인해 삼문출판사는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출판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서적 외에 일반 서적들도 많이 출판했던, 당시 국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출판사였다. 


이후 삼문출판사는 베크(S. A. Beck, 백서암)가 새로운 책임자로 부 임하면서 1900년 8월 미국 교인들로부터 모금된 5,000달러로 제본기, 활자 등을 구입해 출판사의 시설을 확충하고, 출판사의 이름을 감리교출판사(The Korea Methodist Publishing House)로 변경하게 된다. 


조선에 온 선교사들이 자국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역을 알리는 방 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일부 선교사들은 논문을 작성하기도 하고 몇 개의 영문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The Korea Review와 Korea Mission Field이다. 


The Korea Review는 올링거에 이어 1893년 9월부터 책임을 맡으면 서 출판사를 발전시킨 헐버트(Homer B. Hulbert, 할보)가 1901년에 창 간한 영문 월간지이다. 헐버트는 앞서 1895년 1월부터 1897년까지 이 출판사에서 발행되던 The Korean Repository의 편집 일을 맡아 하면서 조선의 역사, 언어, 문화 에 대한 논문을 싣다가 벙커(D. A. Bunker)에게 출판 사의 운영을 넘기고 한성 사범학교에서 교육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 1898년 12 월 The Korean Repository 의 발행 규모가 축소돼 결국 1899년 6월에는 중단됐고, 다시 헐버트에 의해서 1901 년 1월 조선의 소식을 외국 에 알릴 새로운 영문 월간지 The Korea Review가 창간 된 것이다. 


The Korean Repository 는 1892년 1월에서 1898년 12월까지 7년간, The Korea Review는 1901년에서 1906년까지 6년 동 안 간행됐다. 이 두 잡지는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 풍습, 종교, 언어 등 조선 사회의 전반적인 상황을 생생하게 소개함으로써 해외에 있는 외국인들의 조선 사회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또 The Korea Review는 The Korean Repository의 발행이 중단된 후 서양 언어로 한국에서 발행된 유일한 월간잡지였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헐버트는 1901년 창간호에서 발행목적과 대상 분야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선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한 영어기록이 없다는 점에서 그 필요성을 인식했고, 또 한국문물에 관한 기록들을 모으고 비교하며, 독자들 간에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중심적인 장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역할을 The Korea Review가 맡고자 한다는 것이다. 초기에는 이런 발행목적에 맞춰 한국문화에 대한 연구와 기사가 주로 다뤄지다가, 러일전쟁이 시작되는 1904년 이후로 가면서 러·일 관계와 한·일 관계에 대한 글들이 주종을 이루게 된다. 그러다 1905 년 후반부터는 일본의 침략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더해져 결국 일본 당국으로부터 반일적 매체라는 판단을 받아 1901년 1월부터 발행이 중단된다.


The Korea Mission Field는, 1901년 11월 장로교의 빈턴(C. C. Vinton)이 계간으로 발행한 The Korea Field와 1904년 11월 남북감리 회가 연합으로 창간한 월간지 The Korea Methodist가 연합정신으로 통합된 영문 잡지로, 1905년 11월 창간돼 1941년 11월까지 발간됐다. 


The Korea Mission Field 창간호는 이 잡지가 발행됨으로써“기독 교인들과 기독교교회의 일치의 새 시대가 얼렸다”고 선언했다. The Korea Mission Field의 발행은‘재한개신교선교부연합공의회’가 맡았으며, 실제적인 발행 업무는 조선성교서회가 담당했다. 


The Korea Mission Field는 1905년부터 1941년까지 매달 한국에서 이루어졌던 선교사역에 대한 최신 뉴스를 포함하여 한국에 대한 여러 가지 소식을 다루었기 때문에, 비교적 장기간에 걸쳐 한국의 이미지를 해외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실제로 The Korea Mission Field는 선교활동에 대한 홍보뿐 아니라 한국을 더 널리 알리는 것 또한 중요한 발행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특히 발간 후기에 가서는, 한국의 풍습과 역사적인 사건을 다루는 내용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데, 이는 자신을 한국문화를 서양인들에게 소개하는 한국문화의 해석자라고 생 각한 많은 선교사들이 문화와 상관없는 선교활동에 대한 기록에서도 한국 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일화를 소개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The Korea Mission Field의 발행 초기에는, 웸볼드(Wambold)가 임 시 편집인으로 수고하면서 매 호마다 700에서 800부까지 발행부수가 늘어갔다. 이후 1910년 이후에는 매월 1,000명 이상의 고정 구독자가 있었고,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최고의 수준을 유지함으로써 어떤 선교지에서 발간되는 신문이나 잡지에도 뒤지지 않는 모양과 내 용을 담고 있다는 인정을 받았다. 


The Korea Review와 Korea Mission Field는, 그동안‘조용한 아침 의 나라’,‘은둔의 나라’,‘금단의 나라’로 감추어져 있던 조선의 모습 과 20세기 초 조선이 처했던 급박한 정치상황을 해외에 알림과 동시 에 한국출판문화의 지평을 넓히는데 공헌했다.


(사진 - The Korea Review / The Korea Mission 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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