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한국에 살다


6c6e1e54c4299.png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한국인 최초의 목사는 감리회에서 안수를 받 은 김창식(金昌植)이다. 1884~85년 한국 기독교 선교가 시작된 이래 미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에서 신학부라는 이름으로 방과 후에 학생들에게 교리 공부를 시키면서 한국인 목회자 양성과정이 시작됐다. 전담 교수진과 독자적인 건물은 없었지만, 서울과 평양, 인천 등지를 돌며 농한기에 집중적으로 한국인 전도인들을 모아 신학 을 가르쳤다. 이 과정을 거친 전도인 중 연회 자격심사를 통과한 김창 식과 김기범(金箕範) 2인이 1901년 5월 14일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린 북감리회 조선선교회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김창식이 연장자 인 관계로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지만 먼저 받게 되었다. 그래서 통상 적으로 한국인 최초의 목사는 김창식이라고 말한다. 


김창식은‘조선의 바울’이란 칭호를 받았던, 한국 기독교 개척시대의 전설적인 전도인이다. 그는 1857년 황해도 수안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농사일을 하다가, 15세 되던 해 고향을 떠나 전국을 떠돌며 머슴, 마부, 지게꾼, 장돌뱅이 같은 밑바닥 일을 전전했다. 그 뒤 29세 되던 1886년 박노덕과 결혼하고 서울 남대문 안에 정착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장안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아이들을 데려다 지하실에 가두 어 놓고 하나씩 잡아먹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파다했다. 이는 수구파 세력이 선교를 방해하려고 조작한 것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김창식 은 선교사들이 조선 아이를 잡는 현장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미북감리회 선교사 올링거(Franklin Ohlinger, 무림길)의 집에 하인으로 취직을 하고 성실히 일해 요리사로 승진하면서 선교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하지만 그가 기대했던 만행은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올링거 목사 내외의 인격과 생활에 감화를 받고 그들의 종교인 기독교에 마음을 열게 되었다. 마침내 2년 만인 1890년경 세례 받고 1892 년 봄 미북감리회 선교부에서 정식으로 임명한 전도인이 됐다. 이후 1893년 미북감리회 의료선교사 윌리엄 홀(William J. Hall, 하락/홀)과 짝이 돼 평양에 내려가 선교지를 개척했다. 보수적인 평양에서는 선교사가 전면에 나설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김창식이 나서서 서문 밖 의 기생집을 사들여 선교사 사택과 병원, 학교, 교회 자리를 마련했다. 


1894년 5월 수구파였던 평양 관찰사 민병석이 평양에 기독교가 확 산되는 것을 막고자 서양 선교사를 돕던 김창식을 비롯한 감리교인 과 장로교인 10여 명을 평양관아에 투옥하고, 배교를 강요하며 매질 을 가하고 석방 대가로 돈을 요구했다. 그러나 배교를 거부한 김창식 은 심한 매를 맞고 죽을 지경에 이른다. 이때 선교사들의 요청으로 미 국 공사관에서 조선 정부에 항의를 해 마침내 조선 정부에 의해 관찰 사에게 석방을 명령, 일주일 만에 해결됐다. 며칠 후 관찰사는 선교사 를 찾아가 배상금을 물어야 했고 얼마 후 좌천됐다. 


1894년 7월에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평양은 청국군과 일본군의 주 전장(主戰場)이 됐다. 당시 교회당이나 선교사가 운영하던 병원은 치 외법권 지역이어서 피난가지 못한 이들의 은신처 역할을 했다. 전쟁 후 전염병이 돌았는데, 홀과 김창식은 제 몸을 돌보지 않고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봤다. 그러다가 홀이 그 병에 걸려 회생하지 못하고 별 세하고 만다. 이에 평양 사람들은 크게 감동했다. 이런 헌신과 희생 이 선교의 거름이 돼 훗날 평양이‘조선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게 되었다. 


 김창식은 1896년부터 노블(William A. Noble, 노보을)과 함께 평양 이북 지역의 감리교회를 이끌며 그해부터 시작된 신학회에 들어가 정 식으로 목회자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24년 은 퇴하기까지 영변, 수원, 해주 지방을 돌아다니며 125개의 교회를 개척 하고 48군데 예배당을 건축했다. 그는 머슴이었다가 한국 최초의 목 사가 되는 신분의 수직 상승을 경험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낮은 자 의 겸손과 순종을 잃지 않았다. 


김기범은 황해도 연안군에서 태어났다. 인천에 언제, 어떤 이유로 왔는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인천에서 사는 동안 서울에서 내려온 감리교 전도인 노병일(盧丙日)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됐다. 


한국 장로회의 경우는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그 해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서경조(徐 景祚), 한석진(韓錫晋), 양전백(梁甸伯), 방기창(邦基昌), 길선주(吉善 宙), 이기풍(李基豊), 송인서(宋麟瑞) 7인이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평양신학교로 불리는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는 1903년 정식으로 개교했다. 하지만 1901년부터 방기창, 김종섭 2인이 마펫(Samuel A. Moffet, 마포삼열)에게 신학 수업을 받기 시작했고, 1903년에 양전백, 길선주, 이기풍, 송인서 등 4명이 합류했다. 1904년에는 서경조, 한석진, 이원민, 최중진 등 15명이 평양신학교에 입학 했다. 서경조, 한석진은 그동안 선교사에게 받았던 개인 지도를 인정받아 3학년에 편입했다. 그래서 3학년은 8명이 되었다. 이들은 1907년 6월 20일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식에서 스왈론 교장의 졸업장을 받았다.


한국 장로회는 미북장로회, 미남장로회, 호주장로회, 캐나다장로 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해 시작됐다. 1901년부터 한국인도 참여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공의회가 구성돼 있었으나 한국인들의 위치는 미약했 다. 한국인이 안수를 받을 날이 가까워오자 이들의 소속 노회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다. 여기에는 각 본국 노회 소속으로 하는 방법과 한국 의 별개 노회를 선택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런데 본국 노회 소속으로 할 경우 여러 가지 문제점이 노출될 수 있어 한국에 독립된 노회를 설 립하기로 하고, 본국 교회의 허락을 받아 독노회 설립을 추진했다. 독노회의 신경(信經)은 얼마전 창설된 인도장로교회의 것을 기초로 삼 기로 하고, 정치적 규범인 규칙은 웨스트민스터 정치문답을 기초로 삼기로 했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쳐 1907년 9월 17일 대한예수교장 로회 독노회가 창설된 것이다. 초대 독노회장에는 마펫, 서기에는 한석진, 부서기에는 송인서가 선출됐다. 이후 계속된 독노회에서 한국 장로회 최초의 목사가 탄생한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창설은 한국 장로회의 독립선언과도 같은 의미가 깃들어 있는 사건이었다. 


이때 첫 노회 창설 기념으로 선교사 파송을 결의하고, 이기풍 목사 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했다. 서경조는 황해도 소래교회를 세운 서상륜의 동생으로 장연, 옹진 등지의 전도목사로 정해졌고, 1910년부터 새문안교회에서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와 함께 동사 목사로 시무했다. 길선주는 장대현교회의 장로로서 한국 교회에서 처음으로 새벽기도를 시작했으며, 후에 평양부흥운동의 주역이 됐다. 안수를 받은 후 장대현교회 목사로 정해졌다. 방기창은 용강, 제재, 주달교회 전도목사로, 양전백은 선천, 정주, 박천 등지의 전도목사로, 한석진은 평양 장천, 미림, 이천교회 전도목사로, 송인서는 증산, 한 천, 외서장, 영유, 허리몰교회 전도목사로 정해졌다.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된 이기풍 목사를 제외하면 모두가 평안도, 황해도 지역에서 목회하도록 배정됐다. 지교회 목사는 길선주뿐이며 모두 전도목사였다. 전도목사는 선교사와 함께 목회했으며, 지교회를 총찰하는 권한은 선교사가 가지고 있었다. 전도목사는 선교사의 지휘와 감독을 받아 맡은 구역을 돌봤다.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한국인 목 사의 탄생은 한국 교회에서 한국인이 서서히 지도력을 가지게 되는 출발점이다.


(사진 - 감리교 첫 안수자 김창식 목사 /  1907년 장로교 평양신학교의 첫 졸업생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방기창, 서경조, 양전백, 송린서, 길선주, 이기풍, 한석진) 

 

9e8fbc2e8b189.jpg

5967785fd0044.jpg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기독교 신자는 이전보다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당시 복음이 전파되는 양상을 살펴보면, 1886년에 세례를 받은 이는 전국적으로 9명에 불과했지만 그 다음해에는 25명으로 늘어났으며, 1888년에는 65명, 1889년에는 100명, 1890년에는 104명, 1891년에는 119명, 1892년에는 127명, 1893년에는 141명에 달했다. 또 청일전쟁이 일어났던 1894년에는 236명이었던 것이 1895년에는 286명에 달했고, 청일전쟁이 끝난 후인 1896년에는 530명으로 급증했다. 교인 수로 보자면, 1895년 당시 기독교 신자는 2,500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1900년에는 12,600명. 1910년에는 73,180명으로 성장했다. 1885년 4월 미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 우)와 미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Henrry G. Appenzeller, 아편설라) 의 입국으로부터 시작된 한국교회의 성장은 세계 선교 역사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각 선교부의 모교회로부터 자립하여 한국인 만의 자치를 수립한 시기는 언제일까? 


먼저 장로회의 경우를 보자. 장로교는 네 개의 서로 다른 선교부 를 통해 한국에 전해졌다. 1885년 5일 언더우드가 입국하고, 같은 해 6월에는 헤론(John W. Heron, 혜론)이 입국해 이들이 조선에 미북장 로회 선교부를 창설했다. 그리고 1889년에 호주장로회의 데이비스(J. Henry Davies, 대목사)가 입국함으로써 조선에는 두 개의 선교부가 존 재하게 됐고, 그 해 두 선교부는‘미북장로회 미션과 빅토리아 미션 연합공의회’를 조직했다. 여기에 1892년 미남장로회 선교사들이 입국 하고, 1898년에는 캐나다장로회의 선교사들이 입국해 가입함으로써, 네 장로교 총회 선교부를 대표하는 선교공의회(宣敎公議會)가 됐다. 


당시 선교부는 문답을 하고 세례를 준 사람들을 그 선교부가 속한 자 국 교회의 회원으로 받았다. 이를테면 미북장로회 선교부에서 파송한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아 신앙생활을 시작한 성도들이 교적 등록을 할 때, 한국에서 실제로 출석하는 교회가 아니라 미국에 있는 선교사 교회 소속의 교인이 되는 것이다. 또한 각자 설립한 교회에 대한 치리권 역시 각 선교부 모교회에 있었다. 그러므로 재한 선교사들 역시 공의회에서 는 친목하며 의논만 할 뿐, 여전히 공의회가 교회 치리권, 즉 노회로서 의 권한을 가지려면 각 선교부 모교회의 허락을 얻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빠르게 성장하자 선교사들은 조선인 총대가 참 가하고 조선어를 사용하는 모임이 있어야함을 깨달았고, 먼저 1900 년 각 모교회에 요청해 공의회가 치리권 있는 모임이 되도록 했다. 그 리고 그 해 회의에서 이듬해부터는 조선인 총대가 참가하도록 결의해 조선어를 사용하는 모임을 따로 갖기로 했다. 입교인의 선교부 모교 회 소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도 마련됐다. 이를 위해 1901년 조선자유장로회 설립방침 의정위원을 선정하고, 1902년에는 각 모교회 총회에 노회 설립에 대한 허락을 구했다. 그리고 1905년, 마침내 각 선교부 본국 교회들의 허락을 다 받아 냈고, 이에 따라 공의회는 1907 년에 조선야소교장로회(朝鮮耶穌敎長老會)를 조직할 것과 그 때에 조 선 목사를 전도목사로 장립할 것 등을 결의하고, 새롭게 세워지는 조 선교회를 위해 교회 신경을 채용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1907년, 공의 회가 매년 정기적으로 모이던 달인 9월 17일에 평양 장대현(章臺峴) 예배당에서 조선전국독노회(朝鮮全國獨老會)가 조직된다. 한국인 장로 36명과 선교사 33명, 찬성회원 9명 등 모두 78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회 노회를 성립시킨 것이다. 독노회는 가장 중요한 안건으로 1901년에 설립된 장로회 평양신학교 졸업생 7인을 안수하여 목사로 세웠다. 


감리회의 경우 장로회와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한국의 감리회는 미국의 남·북감리회에서 파송된 별개의 선교사들에 의해 각각 독자 노선을 걸었다. 그러나 1907년 6월 남·북감리회는‘조선인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해 신학당을 설립하기로 가결’함으로써 합동의 실마리를 찾게 됐다. 이 학교는 미남감리회와 미북감리회가 합동하여 설립했다고 해서 협성신학교라는 이름을 붙였다. 마침내 하나의‘조선 감리교’를 형성하는 데 성공한 미국 남·북감리회 대표들은, 1925년 모두 가 양 교파의 합동을 찬성하는 가운데 여러 어려움을 극복, 1930년 기 독교조선감리회(Korean Methodist Church)를 결성했다. 


남·북 감리교의 합동은 한국에서 교파 합동의 효시가 됐을 뿐만 아니라, 미국 남·북 감리회의 합동보다 앞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세계 기독교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피선교지 교회들이 본국 교회나 선교부가 합동되지 않은 상태에서 합동을 이룩했다는 사실 은 한국 기독교인들의 일치와 합동정신을 반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감리교회는 한국인들의 손에 의해 선출된 최고 지도자를 세울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자립의 기치를 내걸기는 했어도,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장로회의 경우 독노회가 조직돼 자생의 기반을 마련했지만, 사실 스스로 자체적인 총회를 세울만한 역량은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감리회는 모교회로부터 선교사와 재정 지원을 계 속 받아야 할 입장이었기 때문에, 미국교회와 동등한‘감독’칭호를 사양하는 겸양을 보였다. 한국 감리교회의 수장(首長)을 뜻하는 ‘총리사’(總理師, general superintendent)라는 명칭은‘감리사’ (superintendent)보다는 상위에 있으나 감독(bishop)보다는 하위 개념 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한국교회가‘자치교회’를 이뤘다는 면에서는 긍정적인 평 가를 내릴 수 있겠지만, 제한적인 조건이 붙은‘자치’였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드러냈다. 경제적 독립을 성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치적 자치가 갖는 의미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자치’는 분명‘독립’과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각 교단의 1차 회의는 사실상의 독립이라기보다는, 자생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진 - 초기 감리교 협성신학교 전경. 이 학교는 미 북감리회와 남감리회 선교부가 연합으로 설립 운영하였다. / 장로교 네 개 선교회가 연합해 설립한 독노회[1907])


93c8fc75cd7f7.jpg

a01578e11fd1a.jpg


종교 본연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절대적 존재와의 교감 을 경험하는 일일 것이다. 기독교인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실재성을 머리로만 납득하는데 그치지 않고 가슴으로 만나는 경험이 있어야 한 다. 이런 체험 없이는 종교 본연의 깊이에 도달했다고 볼 수 없다. 종 교가 윤리적이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도덕 자체는 아니다. 또한 종교 가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해 가 야 하지만, 교회는 사회기구나 시민단체와는 또 다르다. 기독교는 영 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종교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기독교를 종교 본연의 체험으로 만났던 집단적 경험이 바로 1907년에 있었던‘평양 대부흥운동’이다. 


한국기독교는 1884년 공식적으로 시작됐지만 이때까지 성령체험이 라고 할 만한 종교적 경험을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 전파될 때, 어떤 이에게는 기독교가 민족을 부강하게 하고 자유독립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보였다. 어떤 이들은 먹을 것을 준다는 소 문에 교회를 찾았다. 또 다른 이들은 선교사의 도움을 받고 싶어 찾아 왔다. 1백리를 걸어 주일예배에 참석하던 한 조선인 신자는, 몇 주가 지나자 교회에 나온 대가로 10달러를 달라고 해 선교사들을 아연실색 하게 했다. 제사보다 잿밥에 관심이 있는 이런 신자들을 선교사들은 ‘쌀교인’(rice Christian)이라고 불렀다. 상황이 이랬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한국 교인들이 무엇보다 성령체험을 하기 원했다. 선교사들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자꾸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해서도 부담을 가졌다.


평양대부흥운동은 한 국교회사에 있어서 특별 한 사건이다. 이때 한국 교회가 성령이 집단적으 로 임하는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성령을 체험 한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야기하기 힘든 죄를 고백하고 이를 배상하고자 했다. 1907년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신앙을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사모하는 체험적, 감정적 신앙으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오늘날 한국교회 신앙의 전반적인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부흥운동은 1907년 절정에 이르렀지만, 그 시초는 이미 1903년 8월 원산에서 일어났고, 1909년에 있었던‘백만인 구령운동’으로 이 어졌다. 


평양대부흥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은 원산부흥운동이었다. 원산에 서 활동하던 미남감리회 하디(Robert. A. Hardie, 하리영)는 감리회와 장로회 선교사들의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인도하는 도중 큰 은혜를 체험했다. 하디는 1892년부터 원산에서 사역했지만 선교의 열매를 거의 거둘 수 없었다. 특히 1901년부터 원산과 통천에서 개척선교사로 활동 했던 3년은 패배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그를 힘들게 했다. 1903년 여름,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하디는 자신이 영적인 능력이 없으며 교만하고 우월의식에 사로 잡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령이 임하자 그 는 자신의 실패와 허물을 공개적으로 털어놓고 회개하였다. 이 기도회 후 하디는 원산을 넘어 서울, 개성, 평양, 인천 등지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본격적인 의미에서 한국 최초의 부흥사가 됐다. 그는 초교파적으로 활동했다. 하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초기 부흥운동에서 공개적인 죄의 고백은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전형적인 특징이 됐다.


부흥운동의 절정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었다. 발단은 1907년 1 월 2일부터 15일까지 2주간 있었던 겨울 남자사경회(평안남도도사경회)였다. 보통 겨울 사경회는 400여 개의 장로회 교회들이 연합하여 갖는 대규모 사경회로, 선교사들의 중요한 사역 중 하나였다. 이 집회 에는 장소문제로 남자들만 참여했는데, 수백리 길을 걸어서 온 신자 도 있었다. 이들은 사경회 동안 식사와 숙박비 일체를 스스로 부담했다. 


한국의 오순절이라 할 수 있는 사경회의 절정은 14일 저녁집회였다. 8시에 시작된 집회는 새벽까지 계속됐는데, 설교가 끝나자 통성기도의 물결이 파도쳤고, 공개적으로 죄를 회개하는 일이 끝없이 이어졌다. 죄를 견딜 수 없어서 몸을 비틀거나 울면서 바닥을 치는 이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사람을 죽인 일까지 고백하며 용서를 구했다. 종교적 체험은 격렬한 정신적 고뇌를 겪은 후 자신의 죄를 대중 앞에서 고백하고 회개하며 기도하는 등 매우 열광적으로 전개됐다. 부흥운동 의 특징은 죄의 고백과 열광적인 통회의 기도에 있었던 것이다. 


사경회 마지막 날도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울부짖었다. 어느 한 대학생은 간 음, 증오, 아내에 대한 애정결핍 외에 기억할 수도 없는 많은 죄를 고백하여 선교사들을 놀라게 했다. 이날 수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자기 내면에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죄악들을 하나하나 쏟아냈다. 이처럼 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 기독교인들에 게 심각한 죄의 각성과 회개를 불러일으켰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열기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신자들의 윤리적 의 식도 함께 성장했다. 살인, 간음, 절도, 거짓말과 같은 보편적인 죄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시대에는 죄악으로 보지 않았던 것들, 즉 흡연, 축첩, 노비, 제사, 주술 등이 새롭게 죄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하나의 문화적 관습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행위들은 사회제도나 윤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어서 신자들의 인식 수준을 한 단계 높여 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모든 부흥운동과 마찬가지로 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를 양적으로 성장시켰다. 한국교회는 이미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급속한 팽창을 거듭하고 있었으나, 부흥운동을 계기로 그 성장이 가속화 된 것이다. 평양대부흥운동 자체는 교회의 급속한 성장에 따라 신자들에게 성경공부를 비롯한 신앙훈련을 쌓게 하는데 그 주안점이 있었다. 그러나 부흥운동으로 제고된 종교적 열정은 당연한 귀결로서 전도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돼 교회가 성장하자 선교사들은 좀 더 계획적으로 부흥운동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 생각으로 “백만인을 그리스도에게”라는 구호를 내걸고 백만인구령운동(1909-1910)을 추진했다. 당시 한국 전체 교인 수는 약 20만 명 수준이었다. 이 운동은 장감을 아우르는 초교파적 전도운동이었다. 이때 선교사들 은 철저한 사전 계획과 준비를 했다. 신도들은 헌금을 할 수 없는 경우에 날연보(day offering)를 하며, 쪽 복음을 들고 나가 전도했다. 날연보는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는 일종의 십일조였다. 그러나 이 운동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0만 명도 채우지 못하고 막을 내렸던 것이다. 사실상 목표치가 과한 것도 있었다. 백만인구령운동은, 교회의 부흥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다는 교훈을 남겼다. 비록 목표한 숫자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복음화의 의지는 한국교회의 귀감이 됐다. 100만 명이라는 기독교인 숫자는 1950년 대에 달성됐다.  


일제시대에는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이 각 지역이나 교회의 부흥집회 형태로 지속됐다. 길선주나 김익두, 이용도, 최봉석, 정남수와 같은 걸출한 부흥사가 활동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이 운동이 해방 후에 는 전 민족을 복음화해야 한다는 민족복음화 운동으로 계승됐다.


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사에서 성령운동의 역사적 기점이 되었다. 훗날 교회가 침체기에 들어설 때마다 한국교회는 1907년 임했던 성령의 역사가 동일하게 임하기를 기도했다. 1980년대 오순절 성령운동이 한국교회에 대중화 되면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오순절, 성령운동의 모범으로 자리 잡았다. 특별히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이었던 2007년 한국교회는 1907년을 기리는 역사적 작업과 부흥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기도 했다.


(사진 - 평양대부흥 시기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여자사경회[1906-1907] /  1907년 대부흥의 현장이 되었던 장대현교회)


a64a1e919c3e5.jpg

4f980ab9d3c86.jpg

48e8d90773dce.jpg

574d02e7664ed.jpg


일제하 한국교회 일각에서 주체적 신앙과 신학을 내세우며 등장한 기독교운동을 한국교회 자치운동으로서의‘조선적 기독교’운동이라 한다. 이런 움직임의 시초는 1910년 최중진의 자유교회에서 찾을 수 있다. 어떤 사안이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최중진이 장로 회에서 분립한 데에는 선교사와의 갈등이 있었다. 1918년에는 김장호 가 조선기독교회를 설립했다. 장로회가 그를 이단시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성서를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1923년 에는 이만집이 장로회 경북노회와 갈등을 빚으며 조선예수교회를 설립했다. 이들 교회들은 반선교사적 경향을 보이면서, 미국 선교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장로회 노회를 강하게 비판했다. 


서구 기독교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교회나 신학을 세우고자 했 던 움직임은 1920년대 중반부터 더 강해졌다. 특히 무교회주의자 우 찌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을 받았던 최태용과 김교신이 조선에 귀국하면서 조선적 기독교 운동은 탄력을 받았다. 이 외에도 예수교회(1933)를 설립했던 스타 부흥사 이용도도 조선적 기독교 운동의 관점에서 평가할 수 있다. 이들은 조선적 기독교운동의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 신학적 이론을 심화시켰고, 기성교회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이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던 1920년대는 한국교회게 상당히 어려운 시기였다. 당시 한국교회에는 현실과 역사적인 문제보다는 내세와 영적 체험을 중요시하는 부흥회가 성행했다. 또 정통 교리의 수호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고 여기는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정서는 신자들 의 신앙을 경직시켰다. 더구나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네비우스 선교원 칙에 따라 자전, 자립, 자치를 중요시했지만, 선교사들이 자치, 즉 최고 리더십을 한국인에게 이양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선교 반세기가 가까워오고 있는 시점에서 이런 리더십의 부재와 함께 한국교회 안에 스스로의 독자적인 신학이 없다는 것도 조선적 기독교 운동 그룹에게는 좋은 명분이 됐다. 


한국교회사에서 조선적 기독교를 추구했던 이들은 비주류를 형성 하고 있었다. 또 이 운동들은 일찍부터 주류 교단으로부터 이단이라고 단죄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정통-이단의 이분법적 도식을 넘어 조선적 기독교 그룹을 새롭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들에게서 엿보이는 한국교회에 대한 개혁의지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용도, 김교신, 최태용은 모두 1920-30년대 한국교회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김교신과 최태용은 일본에서 유학할 때 교회지상주의를 비판하고 일본적 기독교를 추구하던 우찌무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조선인은 조선인의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것과 선교사들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용도는 민족운동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이루려고 했던 민족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강원도 통천에서 사역을 시작하면서 김성실이라는 인물 을 만나게 된다. 김성실은 프란체스코 신앙의 영향을 받아 수 도적 영성을 추구했던 이로서, 당시 그의 영향을 받아 청빈과 걸식을 추구했던 젊은이들이 많았다. 또한 통천 주변의 금강산에는 수도자적 영성과 신비적 영성을 추구하는 이들 상당수가 몰려 있었다. 수도적, 신비적 영성이라는 것 자체가 기존 교회에 대한 비판적 성격이 강하 다. 이용도는 무교회 잡지도 읽었는데, 서구 기독교와 기성교회에 대한 비판의식은 여기서 배운 것이 많았다.


김교신은 조선의 교회가 너무 뜨겁다는 것을 문제 삼았다. 그는 당 시의 부흥회를 조선 교인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가는 비이성적 신앙의 대표 격으로 생각했다. 그는 이 뜨거움에 학구적인 찬물을 끼얹으려 하였다. 신앙은 뜨거워야 하나 맹목적인 뜨거움은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최태용은 조선교회에 신앙의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조선교회가 교리적 신앙, 교회에 갇힌 신앙에 머무르지 말고 영과 진리, 생명이 있는 그리스도 자신을 믿는 신앙으로 나아가라고 외쳤다. 이들은 비이성적 신앙, 교리적 신앙을 서구 기독교의 산 물로 생각했다. 그래서 조선교회가 서양선교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혼을 살리는 복음까지 서양인의 신학과 돈에 의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조선교회는 조선인의 복음으로, 독립적으로 선교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이었다.  


김교신은 조선산 기독교를 주장했다. 이는 새로운 토착 기독교론이 다. 그는 기독교가 전래 된지 약 반세기에 이르렀음에도 아직까지도 서구 구미 선교사의 유풍(遺風)을 모방하는 단계에 있는 한국기독교 를 유감으로 생각했다. 토착신학자들은 서구적 기독교를 한국화 시키는 것, 혹은 서구 기독교와 한국 문화의 만남을 토착신학으로 간주한 다. 그러나 김교신은 서구 기독교의 수용을 거부하고 성서만으로 사도적이면서도 조선적인 기독교를 새롭게 창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조선인이 조선심으로 성경을 읽고, 이를 체화하면 조선산 기독교를 구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최태용은 서구신학이 아닌 조선인 자신의 신학을 구현하려 평생을 몸부림쳤다. 그는 신앙은 복음적이며 생명적이고,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교회는 조선인 자신의 교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태용은 이런 포부를 갖고 1935년 복음교회를 설립했다.


이용도는 구체적으로 자신이 속한 감리회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교회를 설립할 의사는 없었다. 그러나 기존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고 새로운 신앙운동을 표방했기 때문에 서북 장로회의 심한 견제를 받았다. 이용도는 1933년 백남주, 한준명, 유명화와 더불어 성령운동과 신령주의적인 성격이 강한 예수교회를 설립했다. 


당시 장로회나 감리회나 분립하는 교회에 대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 다. 이는 교회가 갈라지고 교회 안에 갈등이 존재하는 실재적인 문제이자 큰 상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들을‘이단’으로 정죄해 버린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행위는 조선교회가 서구 교회와 서구신학의 영향력 하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에 불과 했다. 오늘날도 일부 교단의 인식은 현재진형형이다. 이들에게 조선적 기독교는 단지 교회 분립이며, 이단일 뿐이다. 자신의 자리를 성찰 하고 역사적 재평가를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뼈아픈 일이다. 그러나 이들 소종파에게 한국 교회사에서 조선적 기독교를 추구한 이들이었다는 역사적 자리는 마련해 줘야 한다고 본다. 


소종파는 이단으로 전락하면 주류가 되지 못하는 이상 비주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운동은 오늘날도 소모임으로 계승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조선산 기독교 수립 의지는 계승이 잘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예수교회와 복음교회는 해방 후 점차 정통교회의 모습으로 회귀하여 독자적인 신학노선을 상당수 포기하였 다. 복음교회는 수적으로는 미미하지만 한국의 정통교단으로 자리 잡아 주류 교단과 공적인 활동을 같이하고 있다. 예수교회는 이호빈이 리더십을 행사하면서 신령주의적 색체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다만 교회의 발전은 매우 미약한 편이다. 조선적 기독교 운동이 일제와의 협력 문제나 정통신학에서의 이탈하는 모습을 일부 보였던 것은 사실 이다. 그러나 이는 초기 운동에서 흔히 보이는 미진하고 극단적인 모습으로 이해해야 한다. 한국적 교회와 신학의 불모지와 다름없는 이 땅에서 독자적인 교회와 신학을 수립하고자 했던 이들의 노력은 높이 평가할 부분이다 . 


(사진 - 김교신과 그가 편집한 <성서조선> / 최태용과 그가 설립한 기독교조선복음교회[1935] / 경성복음교회 전경)


 

93eb997e2fa56.jpg

09652395f54f5.jpg

5c914f179defa.jpg

eb5929694d781.jpg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해외 선교사를 보내는 선교 대국이다. 2012년 1월 현재 전 세계에 파송된 한국선교사는 169개국에 23,000여 명에 이르고 있다. 한국교회는 기독교 수용 초기부터‘선교하는 교회’로 명확한 정체성을 형성해 갔다. 한국교회는 1884년 알렌이 선교를 시작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그가 입국하기 전에 만주와 일 본에서 복음을 접한 한국인들은 이를 고국에 전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한국교회는 복음을 전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한국교회는 복음을 수용한지 30년이 채 되지 않아 이웃 나라인 중국 산동에 선교사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이 처한 정치사회 적 상황과 경제적 궁핍을 생각해 본다면, 이는 복음을 접한 기쁨과 이방인에 대한 책임감 없이는 이뤄낼 수 없었던 기적이었다. 한민족이 외국에서, 그것도 민족문화의 상당수를 빚진 중국인에게 복음을 전한 다는 것은 전통적인 한중관계사 속에서는 특별한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서 당시에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역사의‘역전’이었던 것이다.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로는 1902년 12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자들을 위해 파송된 인천 내리교회의 홍승하 전도사를 들 수 있다. 또한 장로회에서는 흔히 최초의 선교사로 이기풍 목사가 거론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타문화권 선교와 외국인 선교라는 관점에서 볼 때 본격적인 해외선교는 산동 선교라고 봐야 한다. 2012년은 산동선교 결정 100주년이고, 2013년은 산동 선교사 파송 100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이다. 산동선교는 오늘날 선교대국으로 성장한 한국 선교역사 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적지 않다. 산동선교를 시작으로 한국교회는 선교 받던 국가에서 선교하는 국가로 전환하는 전기를 마련해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07년 평양부흥운동이 낳은 스타였던 길선주 목사는 이미“우리는 불원에 우리나라 전역에 복음을 전파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흑암에 묻혀 있는 수억의 중국인들에게 미국 교인들이 우리에게 한 것처럼 선교사를 보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도를 전하는 의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중국선교에 대한 포부를 밝힌 적이 있었다. 또 1907년 한국을 방문한 한 중국인은 한국교인들 앞에서“나는 여러분 이 나의 조국에 선교사들을 파송해 그 나라가 복음화되 것을 도울 날 이 올 것을 기대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중국 선교는 실로 이런 오랜 한국교회의 소망이 이루어진 결과였다.  


중국 선교는 중국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생명의 복음으로 갚겠다는 동기에서 출발했다. 이에 대해 한국에 온 중국 대표가 공맹(孔孟)의 도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면 산동이 합당하다고 말해 산동이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그러나 1913년 5월 박태로와 김찬성 목사가 산동선교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옌타이(煙臺)이 도착했을 때 중국교회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은 오랫동안 중국을 상국(上國) 으로 받들어 오고 있었고 기독교 역사도 길었다. 당시 한국은 나라의 주권도 없고, 기독교도 이제 걸음마 단계였다.“중화는 고대의 문명국이오 역사가 심장한 대국 이며 세계 4분지 1의 인구를 가 진 국가로 교만과 자존심이 많아 자칭 대국이라


하야 소국을 멸시하는 고래의 습행이 있으니 중화와 조선은 자고로 관계 가 되어 대소와 조완의 차별을 두는 관계로 조선교회가 중화에 선교는 다방으로 고난이라”다 기울어가는 중국이지만 조선에 게까지 선교를 받을 처지는 아니라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중화예수교장로회 화북대회는 한국교회 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산동반도의 요충지인 내양현(萊陽縣) 사 방 30리를 선교지로 내주었다.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등 세 선교사는 1913년 11월에 내양에 도착해 서문안 중국인 가옥 한 채를 세내 중국말 을 배우는 것으로 선교를 시작했다. 중국에 온 선교사들의 노고는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언어와 음식, 생활습관이 다른 문화 환경 속에서 그들은 선교의 뿌리를 내리고 복음을 전해야 했다. 선교지에서 늘 닥치는 경제적인 문제와 건강상의 어려움도 있었다. 선교사 부인의 생활과 자녀교육도 큰 고민거리였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1915년에는 교인 수가 40여 명에 이르렀고 평균적으로 30여 명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는 보고를 할 수 있었다. 이들 선교사들은 성탄절에 중국인 신자들 과 함께 인근 교도소를 찾아가 죄수들에게 전도를 하기도 했다. 또한 이 들은 중국 교회의 자립을 위해 헌금을 강조했다.  


그러나 결국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1915년 봄, 박태로 선교사의 몸에 이상이 감지되기 시작했고, 결국 1916년 귀국해야만 했다. 두 명의 선교사 에게 박태로 선교사의 빈 자리는 컸다. 다음해 사병순과 김영훈은 총회 전도국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귀국하고 말았다. 선교지 무단이탈이라고 할 만한 사건이었다. 이 때문에 어렵게 착수했던 산동 선교가 3년여 만 에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장로교 총회는 바로 방효원, 홍승한, 김병규를 새로 산동에 파송해로 선교를 재개했다. 방효원은 방지일의 아버지로서 더 유명한데, 훗날 방지일이 중국선교에 뛰어들게 되면서 2대 가 선교에 헌신하게 됐다. 김병규는 중국어를 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선교사는 증원됐고, 선교사역의 발판도 안정을 찾아갔다. 


꾸준히 성장하던 산동 선교가 다시 한 번 어려움에 봉착한 것은 1930년대에 일본이 만주와 중국을 침략하면서부터였다. 중국 내부는 지속적으로 어수선한 상태였고, 한국 선교사들의 처신도 어려운 부 분이 있었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중국 선교는 더 어려운 상 황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1937년 파송된 방지일은 끝까지 중국 에 남았다. 그는 국내 소환령을 무릅쓰고 선교사역을 감당하면서 버티다가 1957년 홍콩으로 추방당했다. 그가 공산화된 중국에서 9년이 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선교가 중국인들에게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방지일이 1957년 추방될 때까지 중화기독교총회 산하 17개 대 회 121개 노회 중 한국인이 선교한 결과로 생겨난 노회가 세 개나 됐다.


산동선교는 제국주의와 문화패권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인 선교였다. 또 산동에 한인교회가 아니라 중국 교회를 세웠다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본격적인 해외 선교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명령에 기초한, 복음을 받았으니 다른 사람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이 산동선교는 오늘날 한국선교의 초석이 됐다. 물론 초기 산동 선교에서 발생했던 문제는 선교사들에 대한 사전 준비와 사후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개인의 사명감에만 선교를 맡겨둘 수 는 없으며, 제도적으로 선교사들을 돕고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것이다. 


해방 전부터 한국교회는 이처럼 선교하는 교회였다. 그리고 이 전 통은 해방 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한국교회의 선교역사에서 후대에 남길 최고의 전통은 선교하는 교회 바로 그것이다. 한국교회는 해방 후의 어수선함, 6.25 전쟁 등으로 선교를 꿈꿀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부터 선교의 끈을 다시 맸다. 당시까지만 해도 제3세계 선교는 선진국의 몫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해외선교에 주 도적으로 나섰다. 민족적 상흔이 예리한 칼처럼 한국인의 가슴을 찔러오던 1956년 5월, 예수교장로회 총회 소속의 최찬영이 태국에 파송 된 것이다. 이후 한국교회는 아시아, 파키스탄, 아프리카 등지로 선교지역을 넓혀 나갔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교회는 북방선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1990년대 이후에는 선교의 역량이 크게 늘어났다. 해외여행자유화 조치와 신장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국교회는 선교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고 세계 전역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물론 그 동안 선교에 대한 체계적인 준비가 부족했다는 한계도 지적됐다. 앞으로도 한국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로서의 정체성이 어떤 상황에서 도 포기할 수 없는 기독교의 본질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진 - 제1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1912]. 이 총회에 중국 산동지역 선교를 결정했다. / 1913년 파견된 최초의 중국 산동지역 선교사 3인[방효원, 홍승한, 김병규] / 1908년 제주지역 첫 선교사로 파견된 이기풍 목사 가족) 

f06c74297d028.jpg

44af20d0d182d.jpg


7f9fb572f917d.png


1906년 상동교회의 상동청년학원에서 출간된「가정잡지(家庭雜 誌)」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우리나라는 여인을 낮게 아는 까닭으로 천리까지 잘못 알았도다. 그러한즉 여인을 낮게 대접하는 것이 사회상이나 가정상에 아무 폐단 도 없는가? 폐단이 많이 있으니 잠깐 그 폐단을 말씀하오리다.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은 줄 아는 풍속으로 인하여 생긴 폐단을 말씀하려면 이로 다 셀 수 없으나 그 중에 제일 큰 폐단을 말하면 두서너 가지 있으니 아래 기록한 것과 같도다.

첫째는, 첩 두는 폐단이니 당초에 하늘과 땅이 마련되고 만물이 생 긴 중에 사람은 제일 신령한 영혼을 타서 한 사나이와 한 여인이 생겨 서 배필이 되었으니 세상 사람이 다 한 남편과 한 여인이 부부됨이 천리에 합당하니, 여인이 두 남편을 두는 것도 옳지 않고 사나이가 두 계집 두는 것이 옳지 아니하거늘, 우리나라는 여인을 낮게 아는 까닭 으로 여인이 남편을 두셋을 두면 큰 변으로 알고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되어도 개가도 못 가게 하되, 사나이는 장가든 후에 의례히 첩 두기를 시작하여 칠팔 명씩 첩을 두는 사람이 흔이 있고 지금 세상에는 첩을 두지 아니한 사람은 몇 명이 없어 첩을 아니 두는 사람은 사나히가 아니라 하여 못생긴 사람으로 돌리니 첩을 두는 까닭으로 패가망신하 는 사람이 많이 있고 집안이 불화하여 그 집이 망하고야 말고, 첩의 소생으로 난 자식은 입명이라 지목하여 선천과 후천을 가리는 폐단이 우리나라에 어떠하였느뇨?..."


위 글에서는 첩을 두는 폐단을 가장 먼저 지적하고 이어서 세 가지의 폐단을 더 지적하고 있다. 우선, 여자를 가르치지 않는 폐단을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여인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다. 그리고 아들만 아는‘남아선호사상’과 여자를 우습게 여기는 폐단을 지적한다.


사실상 이러한 폐단은 조선시대 이래 있어 왔던 잘못된 유교 덕목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교를 사람 지배하는 방편으로만 삼았기 때문 이다. 이 잘못된 관습은 오랜 기간에 걸쳐 학습이 돼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뿐만 아니라 여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모습으로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실제로 양반가에서는 소실을 두는 일이 당연시 됐고, 첩을 두는 일이 오히려 남성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첩을 두는 폐단은 조강지처나 첩을 가리지 않고 양쪽 모 두를 불쌍한 지경에 이르게 하는 악습이었다. 전설의 전도부인 전삼덕도 남편의 첩살이로 인한 외롭고 힘겨운 삶속에서 복음을 받아들여 헌신된 삶을 살게 되었다.  


조선시대 내내 기나긴 질곡으로 이어져 온 첩을 두는 문제에 대해, 1884년 근대적 개혁을 추진했던 갑신개화파의 정령(政令)도, 1894년 갑오개혁의 법령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갑오개혁의 경우,‘적 실과 첩에 모두 아들이 없는 경우에 한하여 양자를 허가할 것’이라는 규정을 두어 암암리에 축첩제도를 인정하고 있는 인상마저 준다. 결 국 1915년의 총독부 통첩에 의해 첩의 입적신고를 금지하면서부터 일부일처제가 법률상으로 확립됐다.


19세기 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축첩에 대한 반응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초기 한국 선교를 담당하고 있던 미국 복음주의계 선교사의 성향의 영향이 컸다. 그들은 서구의 개인 윤리, 특히 일부일 처제를 크게 강조했다. 이를 어긴다는 것은 곧 십계명의 제 7계를 어 기는 일로 규정하고 사실상‘준 교리화’했다. 이것은 혁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가정과 여성문제를 혁신하는 기틀이 됐고 기독교적인 도덕 성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1907년 대부흥운동의 물결 속에서 시작된 회개 운동 중 가장 많이 회개한 죄가 바로 축첩과 간음이었다. 


교회는 이를 악덕으로 여겨 첩을 둔 사람은 교회에 들이지 않았고, 기왕에 교인이 된 사람 중에서 이런 일이 드러나면 내쫓기도 했다. 1910년 새문안 교회에서 노병상이라는 사람이 축첩을 했다는 이유로 출교시켰고, 남편을 버리고 다니는 여자를 자기 집에 투숙시켜 동침 한 유호준을 여섯 달 동안 처벌했다는 기록이 있다. 남양교회 홍종익의 경우, 교인으로서 첩 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 소실을 스스로 내보내기도 했다. 


 1910년 동대문 교회가 지교회로 개척한 각심사교회에서도 같은 일 이 일어났다. 당시 각심사란 곳은 사찰은 흔적뿐이고 무당촌으로 유 명했다. 특히 그곳 사람들은 거의가 첩을 한둘 이상 두고 있었다. 각 심사로 파송된 김종우 목사는 열심히 기도하며 진지하게 이들을 권면 했다. 그의 열심 덕분에 이전 생활을 청산하고 몸과 마음을 온전히 주께 헌신하는 사람이 많이 나왔다. 그 중에 송신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동리에 송신묵이라는 형제는 본래 그 동리에 유력한 신사요, 또 첩이 둘이 있었는데 그는 예수를 믿은 후에도 교우와 나의 많은 권고 가 많았으되 오히려 주저하고 첩을 내보낼 용기가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한번은 그를 붙잡고 같이 열정의 기도를 드린 후에 여러 가지 말로 권고하였더니, 그는 자기의 죄악을 슬피 자복하고 애통하던 중 첩 둘을 다 내보냈다. 그리고 그 몸과 마음을 천국사업에 바치기로 작정 하고 오늘까지 주의 일에 충성한 사역자가 되었다. 그 때 그 형제 한 사람이 회개함으로 각심사교회가 크게 은혜를 받게 되었다. 또 근처 중계리와 창동 두 곳에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그 후 각심사 교회에서 는 전도사 세 사람이 나왔는데 그들은 다 지금까지 주의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 (『승리의 생활』, 1927)


송신묵은 이후 본처 전도사가 되어 돌아와 전도 일에 헌신했다.


(사진 - 가정잡지 / 1960년 7월 19일 축첩 반대 플래카드를 펼쳐 들고 서울 종로로 나선 전국 여성단체연합회 회원들의 시위 행진 모습.)


af3849f3d0f02.jpg

 

ceaf900f393a4.jpg


"여전도인은 별명이 하나 있습니다.‘걸네(걸래)’라고요 참 누가 하 셨는지 잘하셨습니다. 그 책임은 참 그러합디다. 아는 집에서 기도하고, 초상나면 염쟁이 노릇하고 또 순산하는 분에게는 산파가 되어주고 경성을 포위하여 삼사십리씩 나가서 촌 교회가서 가정학이라는 것은 가정아해 기르는 것, 성경국문들을 가르치고, 혼인집, 장사집, 낙 심한 집을 두루 다니는 책임이 '걸네'와 같습니다."


위의 글은 경성의 전도부인 정마리아가 1930년 1월 1일자「기독신보」에 게재한 글이다. 당시 전도부인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그렇게 살아갔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러니 걸네 없는 집안은 깨끗지 못합니다. 珠蓮花閣(주연화각)으 로 잘 지었어도 그 집을 잘 소제하려면 청결한 걸네가 요긴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희망은 여기 있습니다.‘마음이 청결하는 자는 하나 님을 볼 것이라고’예수께서 말씀하신 것같이 이 불결한 세상에서 성결한데 이르기까지 악전고투하다가 승리하여서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을 것과 우리 형제들이 死線에 서게 되는 것은 모든 승리의 희망 된 것만큼 내 희망입니다."


바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도부인이란 선교초기에 선교사들의 지휘를 받아 시골에 나가 성 경책과 전도책자를 팔면서 전도하던 여성 사역자를 일컫는다. 남성은 권서(勸書)인 혹은 매서인(賣書人)이라 불렀다. 초기 전도부인의 전도 활동은 크게 대도시와 시골의 전도활동으로 나뉜다. 도시의 전도부인들은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고 필요한 지역에서는 교육을 권면했다. 교육은 여자 교인들에게 읽는 것을 가르치는 일과 교리문답을 반복해 서 연습시키는 일이었다. 전도부인이 이해하고 있는 수준에서 성경을 설명했다. 이러한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선교사 부인의 철저한 감독 과 조언을 받았다. 때로는 도시에서 전도 활동을 하던 전도부인이 시 골로 내려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역교회에 가서 교회의 여자들을 돌보고, 교회를 순회하면서 여자 성도들의 상황과 필요를 조사하 고 최선을 다해 가르치고 권면하는 일을 했다. 전도부인의 역할과 중요성은 점점 늘어났다. 


초기 선교사들의 보고서에는 어김없이 전도부인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전도부인 전삼덕에 대하여 에디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의 신실한 전삼덕은 좋은 집을 버리고 이 황량한 곳에 와서 훌륭한 전도인으로, 교사로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서너 명의 여자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그의 노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인도되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복음은 여성들로 하여금 억압된 상황에 대한 깨달음 과 동시에 정확한 자기 인식을 갖게 해 주었다. 한국 여성들에게 있어 서 기독교 복음은 억압된 삶을 벗어나 배움에 대한 열정을 갖게 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사는데 주저하지 않게 했다. 전도부인으로 자신의 삶을 헌신한 여성들의 사회적 배경과 입교 동기를 보면 이같은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0110e9468ff72.png


12명의 전도부인들의 입교 동기를 살펴보면 남편의 축첩이나 외도, 시집의 박대 또는 주변의 권고로 믿은 경우, 스스로 믿은 경우이다. 그리고 대부분 과부라는 점에서, 경제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여성이었으며 전근대 가부장적 사회의 억압아래에 있었다는 사실에 서 이들의 입교 동기를 찾을 수 있다. 공통적으로 고통과 핍박을 받고 있었으며, 심지어 생명의 위협에까지 노출되어 있었다. 동대문교회의 전도부인 마르다의 경우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초기 전도부인들이 생명의 위협까지도 감수하면서 전도부인이 된 이유는 바로 복음에서 비롯된 자유와 해방이었다. 전도부인 김세지는 다음과 같은 말로 해방감을 표현했다.  


"우리 조선에 보내시고 여러 천년 동안 자유 없이 남자의 압박 아래 이름 없이 살던 우리 조선여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의 밝은 빛을 전파하여 여자의 자유와 그 본분을 널리 가르쳐 깨닫게 하는 동시에 나의 무식한 것을 깨뜨려 주게 하시고..."


한국 여성들에게 있어서 복음의 열매는 자유와 해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유와 해방의 열매는 곧 핍박으로 이어졌다. 전도부인 김덕 선은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예수를 믿은 지 4년이 되던 해에, 남편이 온갖 핍박을 다하며 예수를 못 믿게 하다가 끝끝내 듣지 않으니까 나중에는 나의 손목을 끊어 버리겠다고 하며 칼을 들고 내게 달려들어 손목을 쳐서 피를 말 할 수 없이 많이 흘렸으되, 나는 조금도 남편을 원망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위하여 기도하였으며, 가장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무릎 끓고 그 가 회개하기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복음으로부터 온 자유와 해방의 열매는 죽음조차 두렵지 않은 견고한 믿음으로 이어졌다. 초기 복음을 받아들인 여성들은 더 이상 이전 의 인간답지 못한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온전한 삶을 살게 된 기독교 여성들은 더욱더 헌신된 삶으로 자신을 드리게 됐다. 그것이 바로 전도부인의 삶이었다. 다시 김세지의 이야기다.


"죄악에서 죽을 것을 면케 하여 구원의 도를 알게 하셨으며, 또 나로 하여금 나 일신만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나의 아는 것과 배운바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의 도를 많은 남녀에게 전파하게 하여, 이로 인하 여 주의 말씀을 듣고 믿기로 작정한 남녀의 수효가 수천에 이르게 된 것은 첫째로,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돌리고 둘째로는 세상 사람들에게까지 이를 자랑하여도 과도한 자랑이 아닐 줄 아는 바이다."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데 더하여, 아는 것과 배운 것을 전파하는 일까지 하게 된 것이다. 복음의 힘은 억압받고 있던 여성들의 삶의 터 전이 그야말로 ‘온 천하’가 되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사진 - 한국교회 초기 전도부인들. [중앙이 전삼덕 전도부인] / 선교사와 성경공부 중인 전도부인들) 

48a3f0fcc813f.jpg


a9fa5c1f33e53.jpg

(사진 - 1920년대 원산지역에서 활동한 전도부인들)

 

19세기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왔을 당시 선교사들의 눈에 비친 한국 여성들의 지위는 공통적으로 한국의 남성에 비해 열등한 존재 로 인식되었다. 19세기『은둔의 나라 한국』을 쓴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는 한국 여성을‘이름이 없는 존재’라고 불렀다. 조선 여자 의 지위는 향락과 노동의 도구라고까지 말한 바 있다. 여성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은 것은, 집안에 갇혀 사는 여인을 부를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성들에게 이름이 생긴 것은 그나마 장옷이라도 걸치고 나들이를 시 작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이것은 부유한 계층의 경우였고, 대부분의 경우는 이름이 없었다. 


미북감리회 선교사 존스(George H. Jones, 조원시)는‘한국 여성 의 지위’(The Status of Woman in Korea)라는 논문에서 한국 여성의 열등적 지위의 원인을 이원론적인 음양설에서 찾아 설명하기도 했다. 또한 189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 입국하여 활동했던 무스(Jacob R. Moose, 무야곱)는『1900년, 조선에 살다』에서, 한국 소녀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불공평하게 태어났으며, 아들로 태어나지 못했으므로 ‘섭섭이’라는 이름을 갖기도 한다고 쓰고 있다. 흔히 말하는‘살림 밑천’으로, 놀 때도 일하러 갈 때도 항상 아기를 업고 있었으며, 심지 어는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 등교할 때도 아기를 업고 등교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조선 여인들은 남성들에게 있어서는‘지각이 없는 존재’였으며,“조선에서 여인에게 내려지는 지독한 멸시만큼 슬프고 통탄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조선 여인들의 처지를 동정했다. 조선시대의 여성 은 한마디로 말해 의무만이 있었고 권리와 자유는 없었던 것이다. 


조선 여인들에게 이름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서구 문물과 교육이 들어오면서부터 생겨났다. 1906년 6월 13일자「제국신문」에 ‘여하무명(女何無名)’이라는 글이 실렸다.


"한국 여자들은 성만 있고 이름 없어 이 부인 김 소사니 부인 칭호 좋지만은 허다한 이부인에 허다한 김 소사를 그 뉘라서 분별할까. 이 전 역사 상고하니 유명한 부인들은 이름 없는 부인 없고 지금 세계 어 느 나라 이름 없는 부인 있나. 시대가 변천하야 여자사회 발동할 제 이름 없이 못 되리니 여 학도들은 자연이 있을 터요. 부인협회 여자 성 없고는 못될지니 이름 짓기 시작하오. 여자 이름 처음이라 듣기에 이상하나 별호같이 통용하면 자연 습관 무방이오. 이름을 짓더라도 당자 이름 괴이하니 순순하게 자호같이 일일이 시행하면 그 아니 좋겠는가, 이름 없는 여자들은 귀신도 수치 되네. 우리나라 여자들도 남 같이 이름 지어 사람노릇 하야보세" 


한말, 한국 여성은 두 가지 커다란 변화의 기로에 서있었다. 첫째 는, ‘인간’인 여성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과, 둘째는 ‘한국 여성’으로 자리를 찾는 것이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기독교 선교는 한편으로는 남성과의 관계에서 여성의 지위를 회복시키는 일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습된 여성의 지위, 특히 양반계층의 여성의 신분 적 우월감과 천민계층 여성의 비속감을 타파함으로써 같은 여성으로 서 인권을 소유하게 한다는 목적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초기 한 국 기독교의 여성 선교는 단순한 '교인 만들기'가 아니었다. 복음을 들 은 여성들이 자신의 억압된 위치와 능력을 확인할 것과,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기독교적 인간 이해의 틀 안에서 자기 자리 를 찾아가는 운동이어야 했다. 억압의 인식을 벗어버리고자 대문을 박차고 장옷을 벗어 던지며 세상 속으로 첫 걸음을 내디딘 여성들이 있었다. 


최초 여의사 박에스더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부터 이야기를 해 보자. 박에스더 의 본래 이름은 김점동이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서 세례를 받고 에스더라는 이름을 지니기 시작했다. 그는 열 살 때 아버지에 이끌려 이화학당에 들어갔다.


"...내가 열 살적에 아버지는 나를 스크랜턴 부인에게 데려다 주었다. 아주 추운 때였는데 부인이 나를 스토브 가까이 오라고 하셨다. 나는 스토브라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 서양 부인이 나를 그 속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줄 알고 겁먹었지만 아름답고 친절한 얼 굴을 보고 그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 당시 학당에는 나 말고 세 명의 여자 아이가 있었다. 그때 나는 밥 먹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도 몰랐다."


공부를 하면서 특히 좋아한 과목은 영어와 오르간이었다. 영어실력 이 뛰어 났던 에스더는 정동에 있는 여성 병원 보구여관에서 로제타 홀(Rosetta S. Hall, 허을)을 도와 일하기 시작했다. 홀의 소망이 ‘여 성이 여성을’ 진료하는 것이었으므로 보구여관 안에 의학반을 만들어 기초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에스더도 그 반에 들어가 공부하게 됐다. 


1893년 열여섯 살이 된 에스더는 자신보다 신분이 낮았던 박유산이 라는 믿음 좋은 청년과 서양식으로 혼례를 올렸다. 이때부터 박에스더가 되었다. 남편 박유산은 홀의 남편 제임스 홀(William J. Hall, 하 락/홀)의 조수였던 터라 일찍부터 의식이 깨어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을 희생하며 아내가 사회활동과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했다. 그들은 1894년 5월 홀 부부가 평양 개척선교사로 갈 때 동행했다. 


1894년의 평양은 그야말 로 아수라장이었다. 청일전 쟁으로 난리가 나 사람들은 피난을 갔고, 설상가상으로 전염병이 돌아 부상자들과 병자들을 돌보던 제임스 홀 이 그만 열병에 걸리고 말았 다. 치료를 위해 서울로 옮겼으나 회복되지 못하고 1894년 11월 24일 아내 로제타의 무릎에서 운명을 달리 했다. 양화진에 묘 를 마련하여 안장한 후 로제타와 한 살짜리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 하락)은 귀국길에 올랐다. 뱃속에 둘째 아이를 잉태한 상태였다. 귀국하면서 에스더 부부를 데리고 갔다. 에스더가 미국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에스더는 로제타 홀의 주선으로 1895년 2월 뉴욕 리버티 공립학교 에 입학해 공부하면서 뉴욕 유아병원 간호사로 의료 실습을 하기 시 작했다. 의대에 들어간 것은 1896년 10월이었다. 후에 존스 홉킨즈 대 학이 된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이었다. 로제타 홀은 의학공부를 하는 에스더를 미국에 남겨두고 아들 셔우드 홀과 새로 태어난 딸 에디스 홀을 데리고 1898년 11월 다시 내한해 의료활동을 벌였다. 에스더의 남편 박유산은 아내가 공부하는 동안 로제타 홀의 친정인 셔우드 농 장에서 일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그러나 아내의 졸업과 귀 국을 두 달 앞두고 급성 폐결핵에 걸려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숨을 거 두고 말았다. 남편을 타국 땅에 묻은 슬픔을 뒤로한 채, 에스더는 당당히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어 1900년 고국 땅을 밟았다.‘한국 여 성이 한국 여성’을 진료하는 시대를 연 것이다. 


귀국 후 에스더는 보구여관과 평양 기홀병원에서 여성을 위한 진 료활동을 벌였다. 평양맹아학교와 간호사 양성원, 그리고 전도부인을 양성하는 여자성경학원 교수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헌신하기를 10년, 그의 몸은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다. 남편과 같은 폐결핵이었다. 결국 1910년 4월 13일, 34세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사진 - The Korea Mission Field 표지에 소개된 박에스더)

a761d2f8c7ea2.jpg


이화학당 한국인 최초 교사 이경숙 

이경숙은 이화학당 최초의 한국인 교사이며,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시란돈)의 부인 W, B. 스크랜턴의 양녀였다. 이경숙은 1851 년 충남 홍주에서 가난한 선비의 딸로 태어났다. 1869년 18세의 나이 에 청상과부가 돼 가난한 친정집 살림을 도우며 어려운 생활을 해야 만 했다. 1888년 37세의 나이에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올라와 삼촌댁 에 머물면서 바느질과 빨래 등 허드렛일로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이러한 삶은 그녀가 인생을 비관하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동대문 밖 여 승방에 가서 머리를 깎고 중노릇이나 해야겠다는 마음을 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친척집에 바느질을 하러 갔다가 그 집 남편 이 미국 여선교사의 한글 선생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때 친척을 통해 서양 선교사를 소개 받은 것이다. 그가 바로 W. B. 스크랜턴이었 다. 이경숙은 W. B. 스크랜턴의 사랑에 감격했다. 


이경숙이 W. B. 스크랜턴 집에 들어가 살기 시작한 것은 39세 때였다. 그녀는 집안일 뿐 아니라 이화학당 일도 함께 하였다. 이 때 로드와일러(Lousia C. Rothweiler)도 이화학당에서 스크랜턴 부인과 함께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로드와일러가 다른 지역으로 잠시 사역을 나가 있을 때면 이경숙이 그 빈자리를 대신했다. 이경숙은 이화학당에서 한글과 한문을 가르쳤으며, 서양인 여자를 구경하러 오는 조 선 여인들의 안내를 맡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 이경숙은 서양 선교사들의 신임을 얻게 됐고, 드디어 1890년 9월 정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드루실라(Drusilla)라는 이름도 얻을 수 있었다. 


이화학당에서 만난 로드와일러와 이경숙은 W. B. 스크랜턴이 잠 시 귀국한 사이, 사역을 함께 했다. 그런데 이경숙에게 있어서 로드와일러는 여러 모로 부담스러운 게 많았다. 로드와일러는 독일계 미국 인 교육자로 W. B. 스크랜턴보다 20년 정도 젊었다. 그녀는 부드럽고 온화한 W. B. 스크랜턴과는 달리, 학교의 일을 철저하게 규칙에 따라 수행하는 조직적이고 명철한 면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로드와일러의 올곧은 성품을 견디지 못한 이경숙은 이화학당을 떠나 이리저리 방황 하다가 W. B. 스크랜턴이 다시 돌아온 뒤 다시 합류한다. 


이경숙은 다시 돌아온 W. B. 스크랜턴과 서울과 경기이남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부인으로 활동했다. 1909년 10월 8일 W. B. 스크랜턴이 별세한 후에는 수원지방의 전도부인이 돼 수원 종로교회 여선교회 사업과 교회에서 설립한 삼일여학교의 교육사업을 관장했다. 이경숙으로 인해 2명에 불과했던 학생 수가 20명으로 늘어났으며, 정신이상 의 40대 여인과 무녀를 기도로 고치는 기적이 일어나 ‘귀신 쫓는 여인’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60세가 되던 1911년 이경숙은 일선에서 은퇴하고 상동교회 안에 있는 조그마한 방에서 살다가 1930년 1월 9일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경숙은 불우했던‘이름 없는 여인’에서 환경을 극복하고 한국인 최초의 여성 교사가 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은 W. B. 스크랜턴을 통해 얻은 복음의 힘이었다.  (사진 - 이화학당 교사들과 학생들[1901년])

752620b22c574.jpg


한국인 최초의 미국 대학 문학사 하란사  

"두 가지 가정 일에 대한 불평이 타당하다고 인정할지라도 다음 사실만은 꼭 알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정규 고등 학교 졸업생이 그저 요리나 바느질하는 법을 알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한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그 학교들의 목 적과 방향은 슬기로운 어머니, 충실한 아내 및 개화된 가정 주부가 될 수 있는 신여성(New type of woman)을 배출하는 것이지 요리사나 간호원 침모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1911년 당시 이화학당 대학과 교수이자 기숙사 사감으로 있던 하란사가 영문으로 발행되는 선교잡지 The Korea Mission Field(Vol.7, No.12, 1911. 12)에 기고한 글의 일부이다. 


이 글은 이 잡지 7월호에 윤치호가 "기술교육의 필요성"(A Plea for Industrial Training)이란 글을 발표하면서 한국에서의 여성교육을 비판하는 중에, “新학교 학생들은 요리하는 법을 모른다. 바느질하는 법, 옷감을 자르고 빨고 다리미질하는 법도 모르며, 어떤 때엔 시어머니에게도 순종치 않으며, 대체로 집안 살림하는 법을 모른다”는 식 의 주장을 한 것에 대한 반박을 하고자 쓴 것이다.


하란사는 우리나라 초기 여성교육의 역사에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인물로 눈길을 끈다. 그는 1875년 평양의 김해 김씨 집안에서 태어나, 인천 별감으로 있던 하상기의 후처가 됐다. 이화학당이 여성을 위한 신교육을 한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교사로 있던 프라이(Lulu E. Frey, 부라이)를 찾아갔다. 처음에는 기혼이라는 이유로 수차례 거절을 당 했으나 굽히지 않고 청해 입학할 수 있었다.나중에 가서 조혼이 공 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재학생의 결혼을 금했지만, 초기에는 기혼여성도 이화학당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란사는 그 중에도 열성적인 학생이었다. 하란사라는 이름은 이화 학당 시절 란사(낸시)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서양식으로 남편의 성을 따라 지은 것이다. 남편이 고위 세무직 공무원에 오른 후, 하란사는 1년간 일 본 동경의 경응의숙에서 유학할 기회를 갖는다. 그 후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미 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 시 소재의 웨슬 리언대학에 입학해 1906년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조선 최초의 여자 유학생이자 여자 미국 학사가 된 것이다. 웨슬리언 대학교는 감리교 재단의 대학으로서 미 국 전역에 걸쳐 있는데, 그 가운데 하란사가 수학한 오하이오 주 웨슬리언 대학교는 1842년에 건립된, 교양 교육이 유명한 학교이다.


하란사는 1911년 이화학당의 대학과 교수이자 기숙사 사감으로 등용됐다. 1916년에는 미국 감리회 4년 총회에 참석하면서 미주지역 순회강연을 했는데, 그때 모금한 돈으로 1918년 정동제일교회에 한국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하기도 했다.  (사진 - 하란사)

73c275ce12511.jpg


dac620c1030f3.jpg

(사진 - 언더우드 선교사가 펴낸 첫 영한사전인 <한영자전>)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한글과의 만남으로 시작됐다. 어느 나라든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들어가서 처음 해야 할 일은 그 땅 사람들 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그런 후에 선교사들은 토착 교인들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 경전인 성서를 비롯한 기독교 문서들을 선교지 토착언어로 번역, 출판, 보급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선교 사역을 시작한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우선 한국어를 배워야 했다. 그러나 당시 선 교사들이 한글을 배울 수 있는 교과서는 충분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프랑스 선교사들이 편찬했던『한불자전』이나 로스로스(John Ross, 나약한)가 출판했던『한국어 첫걸음』Corean Primer 정도를 참조할 수 있었지만,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이 한 계를 극복하기 위해 초기 한국 선교사들은 한글 어휘를 수집하고 정리해 한국어와 관련된 다양한 사전을 출판했고, 한글의 체계를 연구 해 한글 문법서를 만들어 냈다. 비교적 한국어 실력이 탁월했던 언더우드와 게일 등이 이 작업을 주도했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는 1889년 문법책과 사 전을 완성한 후,『한영문법』Introduction to the Korea Spoken Language과『한영자전』,『영한자전』을 간행했고, 게일(James S. Gale, 기일)은 1893년 서울에서『사과지남』Korean Grammatical Forms을 발간한 데 이어, 이미 간행된 여러 사전을 참고하고 자신이 수집한 어휘를 기초로 하여 1897년에 『한영대자전』을 발간했다. 이 때 베어드(Willam. M. Baird, 배위량)의 부인 애니 베어드(Annie A. L. A. Baird, 안애리)는『한글입문서』Fifty Helps for the Begginner in the Use of the Korean Language를 발간해 한국어를 배우는 표준 교과서로 사용될 수 있게 했다. 물론 여기에는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채용한 한국인 어학선생들의 도움이 크게 작용했다. 


선교사들은 어학선생을 고용하여 한국어를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의 고유문화와 전통, 종교와 역사를 접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서 한글은 자연스럽게‘기독교 언어’로 자리를 잡게 됐다. 미북장로회 선교부는 1893년 1월“모든 문서는 한문을 섞지 않고 순전히 한글로 인쇄한다”는 방침을 채택했다. 이로써 한자가 배제된 순한글 문서들 이 기독교를 통해 세상에 반포됐다. 아펜젤러(Henrry G. Appenzeller, 아편설라)의 미북감리회 선교부도 1888년 배재학당 안에 한글 자모를 구비한 활판소를 차리고 성서와 찬송가를 비롯하여《텬로력뎡》,《쟝 원량우상론》,《셩교촬리》등 각종 기독교 한글 문서를 출판했다. 나 아가 미북감리회 기관지 <죠션크리스도인회보>(1897)와 미북장로회 기관지 <그리스도신문>(1897), 배재학당 학생회 기관지 <협성회회보 >(1898)와 <매일신문>(1898) 등 순한글 신문을 비롯하여 한글 보급운 동에 크게 기여한 독립협회 기관지 <독립신문>(1896)도 이곳 배재학당 활판소에서 인쇄했다. 


이처럼 선교사들이 한글을‘선교 언어’(mission language)로 채택 해 성서와 기독교 문서, 신문들을 발행함으로써 기독교 복음은 짧은 기간에 전국, 전 계층으로 확산됐다. 그 결과 기독교가 한글에 도움을 받은 것에 못지않게 한글도 기독교에 큰 덕을 입었다.


한글은 기독교를 만나는 순간,“4백년 긴 잠을 자다가 마치 자명종 소리에 놀라 깨어나듯 이제 일어나”그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세종대왕 창제이후 4백년 넘게 한자를 숭상하는 수구보수 세력에 의 해 억압당하면서‘잊혀진’글로 남아 있다가, 기독교를 만나 비로소 그 우수성과 효율성을 맘껏 발휘하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무시당해왔던 한글의 가치를 재발견해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기독교는 한글 해방운동의 공로자로 인정받아 마땅하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할 당시부터‘나랏 말삼’(國語)이었다. 그 런데 한글은 창제 이후 4백 년 동안 한문을 숭상하는 사대주의 봉건세력 때문에 나라와 민족의 글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기독교 선교가 이루어지면서 비로소‘나라 글’(國文)로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기독교와 한글은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상생(相生의) 관계를 맺으며 그 역할과 기능을 맘껏 발휘했다. 


무엇보다 성서를 비롯한 모든 기독교 문서를 한글로 번역, 인쇄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한글은 어휘와 표기에서 중국어나 일본어는 물론이고 서양의 다른 어떤 언어에 전혀 뒤지지 않는 능력을 가진 뛰어난 언어인 것이 증명됐다. 특히 1911년 신구약 성서 전체가 한글로 번역 돼 총 2,174쪽에 94만여 자를 수록한《성경전서》한 권의 책으로 인쇄돼 나왔는데, 창제 이후 한글이 이처럼 풍부한 어휘와 활자로 자신 의 존재를 표현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사실 해방 직전까지 한글(한국어)을‘공공 언어’(public language) 로 사용한 곳은 교회뿐이었다. 일제 총독부가 1940년 이후 교회에서도 일본어로 설교하도록 지시를 내리기는 했지만, 일본어로 유창하게 설교를 할 수 있는 한국인 목사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 지시는 효력이 없었으며, 교인들은 여전히 한글 성서와 찬송가를 사용하여 예 배를 드릴 수 있었다. 또한 최현배가“우리말, 우리글 수호의 공을 기독교에 인정하여야 마땅하다”고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 강점기 한글을 지키려 애쓰다가 수난 받은 한글 운동가의 대부분이 기독교인 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맞서 한글을 수호하려는 어떤 시도도, 정치적 저항운동으로 해석돼 갖은 탄압과 박해를 받았다. 그 대표적 인 것이 1942년 일어난‘조선어학회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체포 돼 1943년 함흥 감옥에서 순국한 이윤재는 서울 안동교회 장로였고, 같이 투옥됐던 최현배는 새문안교회 집사, 김윤경은 정동교회 교인이 었다. 이 외에 1920년대부터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한글 연구와 한글 보급운동을 전개한 정인승과 정태진, 장지영, 이만규 등도 교회와 기독교 학교를 배경으로 활동했던 기독교인들이다. 


이윤재와 최현배, 김윤경 등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대항해 한글을 연구하고 지킨 기독교인 한글학자들은 주시경의 제자들이다. 주시경은 1890년대 다른 학생들처럼‘영어를 배워 출세하려고 ’아펜 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입학했지만, 학비를 벌기 위해 학당 내 활 판 인쇄소에서 일하다가‘나라 글’인 한글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한 후 평생을 한글 연구와 보급운동에 헌신한 근대 한글운동의 개척자이자 선구자이다. 그의 한글운동은 교회와 기독교를 배경으로 해서 이루어 졌다. 기독교 학교인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에는 정동교회 청년회 임 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보구여관 간호원양성학 교와 상동교회 부속 청년학원 교사로 근무하면서 본격적인 한글 연구 와 교육에 임했고, 상동교회 청년학회가 발행하는 순한글 <가뎡잡지> 편집을 맡아 자신의 연구 결과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주시경을 비롯한 기독교인 학자들의 한글 연구는 선교사들 이 먼저 연구한 결과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선교의 필요성에 따라 이루어진 선교사들의 한글 공부와 연구를 통해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 성이 증명되었고, 의식 있는 한국인들이 거기에 자극을 받아‘자기 나라 글’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된 것이다. 선교사들이 펴낸 한글 문법 책이나 어휘사전은 한글에 대한 과학 적 연구의 기초가 됐고, 선교사들이 영문 저술이나 논문을 통해 발표한 연구결과는 한글을 서방세계에 알리 는 창구가 됐다. 선교사들의 한글에 대한 평가는‘최상’이었다. 예를 들어 개척 선교사 언더우드는 한글을‘세계 2위의 문자’로 평가하기도 했다. 


신구약 성서 전체가 한글로 번역, 인쇄되어 나온 것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래‘한 권의’책 속에 가장 많은 어휘와 문장을 담은 것 으로, 한글로 모든 사상, 모든 사물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 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나아가 한글 성서와 기독교 문서를 통해 한글의 가치를 재발견한‘민족주의’학자들에 의해 한글의 과학적 연구와 실용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기독교 선교가 이루어지고 성서가 한글로 번역되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한글은 더 오 랜 세월을 깊은 잠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현배가“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의 거룩한 뜻이 기독교에서 실현된 것”이라 한 것이나, 전택부가“한글 성서는 한국 국어사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사건”이라 표현한 것은 정확했다.


이렇게 기독교 선교가 시작되면서‘길고도 깊은 잠’에서 깨어난 한 글은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장점을 십분 발휘해 봉건사회에 억눌리고 소외당했던 부녀자와 민중계층의 글로 다시 태어났다. 기독교는 글을 깨친 민중계층에 자의식과 능력 개발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고, 이로써 자유와 평등을 기반으로 한 시민사회가 건설될 수 있었다. 그 리고 기독교는 민족문화 말살정책을 펼쳤던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서 한글을 보듬고 지켜나가는 수호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많은 기독교 한글학자와 한글운동가들이‘나라 말’인 한글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고 그로 인해 많은 수난을 겪었다. 이들의 수고와 희생을 바탕으로 한 글은‘멸절의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렇게 기독교는 한글을 깨우고 갈고 닦아 지켜낸 공로자로서 교회사 뿐 아니라 한국 민족 사에 분명한 흔적을 남기게 됐다.  


(사진 - 주시경 선생)

cc12921d92c4b.jpg



780eeee83df4f.jpg


선교사들이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진 첫 번째 이유는 효과적인 선 교를 위한 방책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의 구체적인 상황을 연 구해 선교활동에 도움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부 선교사들 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 단계에까지 도달했고,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근대 한국학의 초석이 됐다. 


선교사들이 한국을 학문적으로 연구해야 했던 이유는, 한국의 역사 와 문화, 그리고 생활 전통에서 쉽게 발견되는 표면적인 현상 너머에 또 다른 차원의 심오한 깊이와 무게가 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이 것이 선교라는 대전제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학문적 노력은, 한국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지 않은 시점에서 이루어진 것 이어서 더욱 의미가 있었다. 


선교사들의 한글 이해와 한국 역사 이해에 대해서는 다른 장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므로 서로 중복되는 내용은 제외하기로 하고, 여기 에서는 특별히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를 통해 활동한 선교사들의 한국 이해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는 대영왕립아시아학회(The Royal Asiatic Society of Great Britain and Ireland)를 본부로 한다. 대영왕립아시아 학회는 범세계적인 조직으로, 1824년 영국 왕 조지 4세가‘아시아의 과학, 문학, 그리고 예술을 진작시키는 일과 관련된 주제들을 탐구하기 위해’설립했다.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의 첫 모임은 1900년 6월 16일 토요일, 서울 유니온 클럽의 도서실에서 있었다. 참여한 사람들 중에는 일반 외 국인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들은 선교사였다. 이 학회는 창립 직후‘출판하지 않으면 사라진다!’는 모토 아래 수준 높은 잡지를 간행하기로 결의하고, Transactions of 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를 발간했다. 이 잡지에는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발간이 중단된 때까지 모두 30권 67편의 논문이 게재됐다. 이 논문들 가운데 선교사들의 연구를 중심으로 한국과 관련된 항목들 을 따라 선교사들의 한국 이해가 어느 지점까지 도달해 있었는지를 대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선교사들 가운데 게일(James S. Gale, 기일)과 헐버트(Homer B.l Hulbert, 할보), 존스(George H. Johns, 조원시), 트롤로프(Mark N. Trollope, 조마가)의 연구를 통해 한국의 종교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 자. 이들은 공통적으로 한국의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적 접근방법을 사용했다. 또한 한국의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 고조선 당시의 국 제적 역학관계를 성찰했다. 이 과정에서 유교나 불교, 그리고 샤머니즘이 한국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연구했다. 이 연구 는 오늘날의 종교 연구 방법에 버금가는 학문적 수준을 보여준다. 세부적으로는 한국 민간 종교의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서까지 역사적인 근원을 쫓아 설명해 내고 있다. 또 그런 점들이 구체적으로 중국이나 일본과는 얼마나 유사하고 얼마나 상이한지에 대해서도 분석하고 있 다. 이 부분은 한국의 종교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는 동시에, 지금도 여전히 한국 학자들이 학문적으로 검토하기에 적당한 논점을 보여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들은 한국에 대한 연구를 위해 방대한 분량의 한국 및 중국의 서 적들을 수집하여 따로 정리하고 보관했다. 그리고 이 자료들을 활용 하기 위해 별도의 도서관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렇게 수집된 것들이 한국학 관련 서양어 서지학 목록으로 정리되어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으며, 따라서 유용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트롤로프의 노력에 이어 이를 최종적으로 정리한 사람은 언더우드(Horace H. Underwood, 원한경)이었다. 이것이 A Partial Bibliography of Occidental Literature on Korea 라는 제목으로 1931 년 연희전문학교에서 출판됐다. 그리고 여기에 조금 더 보완된 것이 엘로드(J. McRee Elrod)에 의해 연세대학교에서 An Index to English Language Periodical Literature Published in Korea 1890 ~1940 라는 제목으로 1960년에 출판됐다. 이 자료들은 지금도 한국학 연구를 위 해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는 기초자료이다. 


한국에 대한 선교사들의 이러한 학문적 연구 성과는, 한글에 대한 연구는 물론 한국의 역사 자체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고, 한국의 종 교와 문화 전반으로 저변을 확대해 나갔다. 여기에는 한국의 시와 고 전 문학에서부터 한국의 민화와 화가들에 대한 소개, 한국의 전반적 인 예술분야 연구, 서울과 강화를 비롯한 한국의 도시들에 대한 연구, 한국의 선박과 건조 기술에 대한 연구, 한국의 갑옷과 무기 체계, 한 국 무덤의 양식, 한국의 천문학, 한국의 음식과 요리법, 한국의 동물 과 사냥 기술, 한국의 종, 한국의 과거제도, 한국의 결혼 풍습과 장례 문화, 한국의 의학과 약 제조 기술, 한국의 조류, 한국의 사찰과 사원, 한국의 지리와 지질, 식생, 금광, 기후, 도로체계, 생물학, 도자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항목들이 망라되어 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학문적인 노력을 통해 한국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려져 있던 내용들이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수준으로 소개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 발표된 논문들은 한국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일제 하 정치적인 위기 속에 있던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발굴해 한국에 관심을 가진 많은 학자들과 일반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이다. 지금도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는 한국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연구해 수록한 학술지를 발간하고 있으며, 각 종 세미나와 연구모임, 단행본 발간을 통해 한국학의 세계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러한 성과는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서양의 학문적 방법을 이용해 꾸준하게 한국의 역 사와 문화, 그리고 자연과 생태를 연구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사진 -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에서 간행한 한국학 연구 저널 표지. 이 저널의 표지에는 일제강점기에도 중앙에 태극문양이 오랫동안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