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한국에 살다

삼문출판사(三文出版社, The Trilingual Press)는 한국 선교에서 출 판과 인쇄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인식한 미북감리회 선교부가 1889년 9월 배재학당 내에 설치한 인쇄소를 겸한 출판기관이다. 선교사들이 처음에 The Trilingual Press라고 붙인 이름을, 김양선은 삼음(三音)출 판사, 이호운은 삼국어(三國語)출판사, 백낙준은 삼문(三文)출판사로 각각 번역했는데, 대체로 백낙준 번역인 삼문출판사를 채택했다. 당 시 한국 내에 존재했던 인쇄시설은 정부 소유인 박문국(博文局) 인쇄 시설 뿐이었다. 삼문출판란 국문, 한문, 영문 등 세 가지 언어로 출판 할 수 있다는 뜻이며, 1900년 인쇄소 시설을 확장하고 감리교출판사 (Korea Methodist Publishing House)로 이름을 바꿨다. 운영은 감리회에서 했지만 장로회에서 발행하는 인쇄도 담당했으며, 1889년에는 장·감 선교사들이 문서선교를 논의하다가 다음 해에 조선성교서회 를 설립하게 된다.
삼문출판사는, 배재학당 당장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아편설라) 선교사가 현대식 인쇄소를 설치한 뒤 문서선교 사업을 위해 중국 푸저우에서 교육과 문서선교 사업을 하고 있던 올링거(Franklin Ohlinger, 무림길) 선교사를 조선으로 초빙하면서 시작됐다. 올링거는 1887년 12월 내한, 중국으로부터 인쇄기기와 활자를 도입해 배재학당 내에 삼문출판사를 창립하는 한편, 교육과 문서선교 사업을 펼쳐 나 갔다.
배재학당 건물은 르네상스식 붉은 벽돌집으로 한국 최초의 양옥이 었다. 학생들에게 고학(苦學) 겸 무실역행(務實力行)의 인격을 심어 주기 위해 지하실에 공업부를 설치하고 일을 시켰다. 처음에는 붓 만 드는 일과 구두 짓는 일을 했으나 실패했고, 인쇄소를 설치한 후 학생들에게 식자, 조판, 인쇄는 물론 제본까지 맡게 한 후 그 이름을 삼문 출판사라고 한 것이다. 올링거는 1892년 The Korean Repository란 영문 한국학 연구지를 창간하여 삼문출판사에서 펴내기 시작했다.
올링거가 자녀들을 잃고 양화진 묘지에 묻은 채 1893년 한국을 떠나게 되자, 헐버트(Homer B. Hulbert, 할보)가 삼문출판사 운영 의 책임을 지고 문서선교 사업을 주관했다. 헐버트는 The Korean Repository의 인쇄와 운영도 맡아 하면서, 이를 통해 한국의 역사, 풍속, 언어 등에 관한 자신의 연구 논문들을 발표했다. 1899년 The Korean Repository가 폐간된 뒤, 헐버트는 The Korea Review를 창간 해 1901년부터 1906년까지 발행했다. 이 때 연재하던 것을 기초로 한 국사에 대한 방대한 저술인 The History of Korea(1905), The Passing of Korea(1906, 대한제국 멸망사)가 발간됐다. 헐버트는“삼문출판사 의 목적이 한국에 있는 외국인과 한국인 사이에 기독교 문헌을 널리 보급하는 데 있음”을 확인하고, 인쇄물이 깨끗하고 질이 좋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인쇄기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한글과 한문영어 의 활자도 바꾸려 했다. 그는 삼문출판사에 부임한 지 9개월 만에 전도지와 종교서적 총 5만2천여 권, 1백8십만여 면을 인쇄 반포했으며, 운영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 올렸다.
1894년 헐버트는 금화 300달러를 들여 세 가지 형태의 한글 자모 (字母)와 활자제조기를 구입했다. 이때부터 삼문출판사는 한글 활 자를 지속적으로 일본에 공급할 수 있게 됐고, 인쇄기기 공급기지 로서 서울에 있는 다른 두 인쇄업체에 종이와 다른 자재를 보급하 게 됐다. 삼문출판사의 인쇄시설은 아펜젤러와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 등 주한 선교사들이 1893년 성서 번역을 본격화 하면서 이루어지는 각종 인쇄 사업을 지원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1896년에 제본기가 도입돼 제본소도 설립했는데, 삼문출판사가 보 유한 외국 제본기는 당시 유일한 것이었다. 제본소는 초기에 벙커 (Dalziel. A. Bunker, 방거)가 관리했다. 헐버트는 인쇄시설을 확충했 을 뿐만 아니라 종로에다 대동서시라는 감리교 서점을 차리고 삼문출판사에서 발간한 서적을 전국에 보급하는 데 힘을 쏟았다.
1897년부터는 벙커가 삼문출판사의 운영을 맡았다. 벙커는 일본에 새로운 자모를 발주하고 신약성서와 다른 책들을 28,000부나 인쇄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1898년에는 콥(George C. Cobb)이 운영을 맡았다. 콥이 건강 관계로 미국으로 떠나자 1900년 초 아펜젤러와 스웨어러(Wilbur. C. Swearer, 서원보)가 자원해서 임시 관리인으로 임명받 았다. 1900년 8월엔 베크(S. A. Beck, 백서암)가 삼문출판사의 책임자 가 됐다. 베크는 미국의 협력자로부터 기증받은 5,000달러를 재원으 로 인쇄시설을 크게 확충했다. 또한 장로교 선교부로부터 2천원을 빌려 시설을 확충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감리교 연회에서는 이름을 삼문출판사에서 감리교출판사로 바꿨다.
감리교출판사는 1902년 정동 선교부 기지에 현대식 2층 벽돌 사옥을 마련했다. 감리교출판사에서 인쇄되는 문서들 중에는 장로교의 것도 많아서 1906년경부터 감리회와 장로회 그리고 조선성교서회 등 교파연합출판사로 개편할 계획을 세우고 빈턴을 미국에 파견했지만, 미북장로회의 불참으로 성사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1909년 경 감리교 출판사는 내외적 여건의 변화로 폐쇄된다.
삼문출판사는 한국의 문서선교와 문화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지 금과 같은 출판사 기능보다는‘인쇄’에 더 역점이 주어졌다. 삼문출 판사에서 간행한 출판물은 크게 네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는 초기 전도용문서이고, 둘째는 기독교 신문과 잡지를 포함한 정기 간행물이다. The Korean Repository, The Korea Review, The Korea Methodist, The Korea Mission Field 등의 영문 잡지와「독립신문」, 「협성회보」,「경성신문」,「매일신문」,「조선크리스도인회보」등 의 신문이 그것이다.「독립신문」은 한국 최초의 민간 한글 신문이고, 「협성회보」는 배재학당 학우회지이다.「경성신문」은 최초의 상업 신문이고,「매일신문」은 한국 최초의 민간 일간 신문이다.
그리고 셋째는 일반서적과 기독교 학교의 교과서이다. 1890년에 국 한문 혼용으로『배재학당 규칙』을 발행했고, 1896년에는 배재학당 성 경 교과서인『복음요사(福音要史)』,『의회통상규칙』등과 일반 교양 서적으로 헐버트의『대한역사』,『사민필지』등을 펴냈다. 마지막으 로는 성경과 찬송가를 포함한 기독교 문서이다. 삼문출판사는 이렇게 기독교 복음뿐만 아니라 근대 문명의 전파에 막대한 기여를 한 것이다.
성공회는 1889년 한국에 선교를 시작한 이후 1891년 영국해군에서 기증받은 인쇄기로 인쇄소를 설치하고 맥길의『구세요역(救世要譯)』, 『예수세상구주』,『조만민광(朝萬民光)』을 인쇄, 발행하였다.
잡지 언론 선구자 차상찬(車相瓚)은 1936년에 펴낸“조선 신문 발달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특히 유의할 것은 그때 그 세 신문(독립신문, 경성신문, 매일신문 - 필자 주)이 모두 순조선신문인 것과 계통이 미국의 계통으로 발행소가 전부 배재학당 내에 있었던 것이니, 그 신문들이 비록 수명은 길지 못하고 또 주간한 인물이 대개 미국계 기독교인이니만치 그 지 면에 기독교 냄새를 많이 피운 것이 사실이나 예의 미국풍의 독립 자 주주의와 자유 평등사상을 많이 조선사람에게 그 영향을 많이 끼치고 또 한글 보급에도 공헌이 퍽 많았었다. 그리고 오늘의 배재학교는 일 개 교육기관에 불과하지마는 그 시대에는 그곳이 독립당들의 근거지 가 되고 언론의 발원소가 되었기 때문에 한말 정당사나 조선신문사를 쓰는 사람은 누구나 그곳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삼문출판사는 우리나라 출판문화 사업뿐만 아니라 정치, 경 제, 문화, 종교 등에 큰 업적을 남겼다.
(사진 - [위] 서울 정동 배재학당 구내에 설치되었던 삼문출판사 / [아래] 삼문출판사에서 인쇄한 「조선크리스도인회보」와 「독립신문」 )



구한말인 1884년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고종의 윤허 아래 이전 가톨릭 선교사들에 비해 윤택한 상황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초기 선교활동이 평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 다. 오랫동안 지속돼 온 한국의 가톨릭 박해와, 그 박해의 인식론적 근거가 되는 위정척사론(爲政斥邪論), 그리고 미국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친미파들이 득세하면서 기존 수구세력들이 갖게 된 위기의식 등 이 맞물려 구한말 한국사회에서도 크고 작은 박해가 끊임없이 일어나 게 됐다.
더구나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당시 사람들이 가톨릭과 기독교를 구분하지 못해서, 서양 선교사들이란 모두 사악한 학문(邪學)을 전하는 귀신(鬼子)이요, 그들이 믿는 종교는 신구교 합하여 모두 천주학 (天主學)으로 통칭하며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천주교 박해 때와는 달리 정부가 열강들과 조약을 맺으면서 종전(從前)과 같은 유혈(流血)의 참화(慘禍)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선교사들과 한국 권서인들이 전도하러 가는 도처에서 유숙이 허락되지 않거나, 돌을 던지고 욕(毁言)을 하는 등의 일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그런 와중에 기독교를 향한 큰 규모의 박해가 발생하게 되는데, 첫 번째 주목해야 하는 것은 1888년 일어난 소위‘영아소동’으로 불리는 반기독교 운동이다. 영아소동이란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학교, 고아 원, 병원 등에서 아이를 유괴하여 눈을 도려내고 실험대상으로 쓴다 는 유언비어가 퍼져 흥분한 군중들이 교회, 외국인 사택, 학교, 병원 등을 공격한 사건이다. 이는 앞선 1870년 중국에서 거센 반기독교운 동으로 선교사 및 외국 공사관 직원 20명과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살해당한 ‘천진교안(天津敎案)’때와 똑같은 유형의 유언비어가 한국 사회에도 퍼진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친미파의 득세로 자신들의 위치가 불안해진 기존 수구세력이 이런 소문을 퍼뜨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영아소동’당시 퍼진 유언비어의 내용이 중국 천진에서 일어난 반기독교 운동 당시 산동에 퍼진 유언비어와 상당히 흡사한 것을 볼 때, 이는 한국에서 정치적 이득을 보려는 이들이 중국의 반기독교 운동을 모방하여 유발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유언비어를 듣고 흥분한 군중들은 외국 인을 위협하고 학교, 병원 등을 공격했다. 결국 정동에 있던 이화학당 이 큰 피해를 입었고, 각국 공사관들은 자국 선교사들에게 외부 출입을 금할 것을 지시하였다.
두 번째로 살펴보아야 하는 사건은 1900년 가을에 일어난 ‘도륙밀지사건(屠戮密旨事件)’이다. 1900년 11월(양력) 어느 날, 전국 방방곡곡의 향교에 고종 황제의 밀지가 암암리에 도착한다. 그 밀지에는 친 러파 세력으로 알려진 정부 관료 이용익과 김영준이 자신들의 이름으로 배서를 하고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고 있었는데, 황제의 명령인 즉 “음력 10월 15일(양력 12월 6일)에 일제히 전국의 선교사와 기독교인들을 도륙하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황해도 해주를 여행 중이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 선교사는 11월 20일에 한국인 조력자를 통해 우연히 이 밀지를 손에 넣었고, 즉시 서울에 있는 선교본부에 전보를 쳐 이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만약 이 밀지가 사실이라면 전보 기사들이나 관료들이 자신 의 전보를 중간에서 가로채 파기할 수도 있다고 우려한 언더우드는, 한국인들이 해독 가능한 한국어나 영어가 아닌, 선교사들만 읽을 수 있었던 라틴어로 전보를 치기로 결심한다. 전보를 받은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는 즉시 미국 공사관으로 달려갔다. 미국 공사 알렌(Horace N. Allen, 안련)은 그 전보를 들고 바로 입궐하여 외무대신 박제순과 고종을 만나 자초지종을 물었다. 사실을 알아본 즉, 고종황제는 그런 밀지를 내린 적이 없었고, 이용익과 김영준도 그런 날조된 밀지에 자신들의 이름이 들어간 것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리고 며칠 후 조선 정부는 전국에‘훈령철회서’를 배포하여 앞서 전달된 도륙밀지가 날조된 것임을 강조하고 혹시 있을지 모를 도륙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정부와 서구 영사관들의 노력으로 비록 대규모 도륙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작은 소요들이 일어나 기독교인들이 구타 당하고 관에 잡혀가는 사건들이 1900년 겨울에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도륙밀지 날조 사건’이 일어난 원인은 바로, 같은 해 여름 중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의화단 사건’의 영향에서 찾을 수 있다. 의화단사건이란 1899년부터 1900년 여름까지 중국의 산동, 산서지방 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규모 반기독교운동으로, 선교사 230여명과 중국 기독교인 4만여 명이 살해된 사건이다. 이때 많은 선교사와 중국 기독교인들이 한국으로 피난을 왔고, 서구 열강들은 자국민 보호를 앞세워 8개국 연합군을 조직하여 의화단을 지지한 청나라 정부와 전쟁을 벌였는데, 이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이후 돌이킬 수 없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때 중국의 의화단을 모방한 반기독교 운동들이 1900년 여름부터 한국에서도 일어나는데, 그 주도세력은 동학과 활빈당이었다. 여름부터 전국 각지에서 한국 기독교인들과 서구 선교사들이 구타당하고 교회가 파괴되고 기독교 가옥들이 불타는 사건이 발생했고, 서구 언론 들은 한국에서도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다고 대서특필하며 법석을 떨 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전국에‘도륙밀지’가 배포되자 선교사들은 그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고 공포에 떨게 됐고, 그 배후 세력으로 동학 과 활빈당을 지목했다.‘영아소동’이 수구세력의 주도로 벌어진 반기독교 운동이었다면,‘도륙밀지사건’은 일반 대중에 의한 반기독교 운동이었다. 하지만 동학과 활빈당의 이러한 반기독교 운동은 이후 한 국이 국권을 상실하면서 그 열기를 잃어갔고, 항일운동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워 나갔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1920년대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한 반기독교 운동이다. 1920년대 초, 사상적 조류로서 한국에 들어온 사회주의는 처음에는 이론적, 사상적으로 반종교의 기치를 내세웠다. 그러 나 1925년 반기독교운동이 실력행사로 드러나는데, 1925년 10월 21 일부터 28일까지 개최된 ‘제2회 조선주일학교대회’방해운동에서였 다. 약 3천여 명이 모인 장로교·감리교 연합 주일학교대회에 맞춰 사회주의 계파인‘한양청년연맹’은 10월 25일과 26일에 서울 인사동에 서 반기독교대회와 반기독교강연회를 개최하려 했다. 그런데 마침 주 일학교대회에 참석차 서울에 와 있던 기독교인들이 그 광고판을 보 고 흥분해 강연회장 앞에 쇄도하여 일대혼잡을 이루고, 이에 경찰이 와서 광고판을 내리게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반기독교강연회 는 일본 경찰에 의해 금지됐지만, 이로 인해 기독교가 일제와 유착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고 반기독교운동의 좋은 선전 자료가 되기도 했다.
이후 신흥청년동맹이 1925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기해 반기독교대회를 소집했고, 1926년 1월에는 한양청년연맹이 그해 크리스마스를 ‘반기독데이’로 지정했다. 그리고 1925년 후반부터 1926년 초까지 전국에 걸쳐 사회주의 사상 단체나 청년 단체들은 기독교 비판을 주 제로 한 강연회, 연설회를 가졌다. 또한 미신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김익두와 같은 부흥사들을“고등무당”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집회를 방 해하는 일들이 잇따라 일어났다. 그러나 1926년 11월 사회주의운동은 종래의 계급주의노선으로부터 방향을 선회하여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제휴하며 기독교를 일단 민족주의 세력으로 간주하게 됐다. 이 로써‘반기독교노선’은‘제휴기독교노선’으로 전환됐고, 사회주의 계열의 반기독교 운동은 종식됐다. 기독교 민족주의자인 박동완, 유억겸 등이 민족협동전선 논의에 참여했고, 1927년 2월 민족연합체인 ‘신간회’가 출범하고 YMCA 총무를 지낸 이상재가 이 신간회의 회장을 맡으면서, 사회주의자들의 기독교에 대한 배척운동은 공식적으로 철회됐다.
구한말에 경험한 반기독교운동은 기독교가 아직 한국인의 종교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던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1920년대 반기독교운동에서 알 수 있듯, 기독교가 점차 민족주의 운동에 적극 참여 하며 한국인 안에 서고 한국의 종교로 받아들여지자, 거센 반기독교 감정은 점차 수그러져 갔다. 그리고 이후 다시는 그런 대규모 반기독교 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기독교는 한국의 종교로서 자신이 담 당한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나갔다.
(사진 - 선교학교의 운영과 관련한 내한선교사들과 한국인들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동아일보> 만평, 1925년 7월 1일자.)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와서 전개한 선교 활동을 통해 한국 사회의 신분질서를 해소시켰다는 점은, 한국의 전반적인 사회변화에 있어서 상징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기독교 선교의 축은 병원을 중심으로 의료 사업을 전개하는 동시에 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교육사업, 그리고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전도 사업이었다. 한국 사회에서의 신분질서 해소는 기독교 선교의 세 가지 영역에서 모두 나타난 현상이다.
한국에서 처음 시도된 선교 사업은 의료선교였다. 의과의사였던 알 렌(Horace N. Allen, 안련)은 가장 먼저 한국에 정착한 선교사로 당시 서양 의술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특히 알렌은 한국에 정 착한 직후에 발생한 갑신정변으로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심각한 부 상을 입은 정치가 민영익을 치료하여 서양 의술의 효력을 한국에 널 리 선전할 기회를 얻었다. 이를 통해 알렌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을 설립하고 그 안에 의학교도 함께 개설했다.
제중원은 가난한 사람들을 진료하기 위해, 그리고 서양 의학을 한국인에게 전수하기 위해 설립됐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제중원은 모든 계층의 한국인들에게 의료 혜택을 제공했다. 특히 남성 의사가 여 성 환자를 진료할 수 없는 상황에 따라, 여성 의료 선교사를 확보해 부인병원을 개설하기도 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의학 또는 위생 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었다. 한국에서 기독교를 통한 신분질서의 해소는 바로 이곳에서부터 시작됐다.
무엇보다 제중원에서는 양반이나 일부 부유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 심지어 천민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모두가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한국 사회의 신분질서 해소를 향한 출발점이 됐다. 특히 한국인 의료진을 양성해 의료 수혜의 대상을 확대하고, 동 시에 기독교 의료사업의 주도권을 한국인에게 이양하고자 하는 과정 에서 신분질서가 해소되는 극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당시 한국에서는, 지역적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양반과 상 민, 그리고 천민의 신분 구별이 엄격했다. 특히 서울에는 신분계층에 따른 집단 거주지가 형성돼 있었을 정도로 철저하게 신분이 구분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 관자골에는 천민 중에서도 가장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던 백정들의 마을이 있었다. 백정 마을에 사는 한 아이가 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병으로 누워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선교사 무어(Samuel F. Moore, 모삼열)는 당시 고종의 어의이기도 했던 애비슨(Oliver R. Avison, 어비신)을 대동하고 백정마을을 방문했다. 난생 처음 의료 혜택을 받은 백정은 이에 감동했고 건강도 되찾았다.
이 백정은 아들이 계속 교회에 다닐 수 있도록 격려하는 한편, 본인 자신도 용기를 내 교회에 나왔다. 처음에는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의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무어의 의지 는 강고했고, 이에 자 신을 얻은 백정은 더욱 열심히 전도했을 뿐만 아니라, 특정 계 급 해방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백정의 아들은 세브란스 의 학교에 입학하여 한국인 최초의 의사 7인 중 한 사람이 됐다. 그의 이름은 박서양으로, 당시 가장 뛰어난 의사로서의 실력을 자랑하고 있 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장로가 되었다. 백정이 의사가 되는 일과 장로로 장립받는 일은 당시의 상황 에서는 기적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기독교가 한국의 사회변화와 신분질서 해소를 위해 애썼던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다음으로,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교육 사업에 많은 공헌을 했다.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과 사생아로 태어난 버려진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처음에 는 이러한 아이들을 돌보기 위한 고아원 형태의 학당을 설립했다. 그 리고 한국의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남녀 학당이 설립되었다. 이러 한 기관에서는 출신에 따른 차별이 없었다. 따라서 초기에는 이러한 아이들이 교육을 받고 사회에 진출하여 사회변화의 주체가 되는 일도 많았다.
무엇보다 근대 교육체계가 전무했던 한국에 학교를 세우고 어린 학생들을 모아 교육하는 활동을 통해, 양반의 자제가 아닌 일반 백성의 아이들이 새로운 교육을 받고 중학교를 거쳐 대학교로 진학할 수 있는 교육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교육 사업을 통한 한국의 사회 변화는, 제도적인 차원에서부터 인성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결국 교육 사업은 한국에서 사 회 변화의 주역들을 양성해 배출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는 한국 사 회의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영향력 발휘하며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분야는 교회를 통한 전도 사업이다. 초창기의 전도는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하며, 주일학교를 지도하고, 예배당을 스스로 짓고, 특히 교회가 위치한 주변 지역에 큰 관심을 갖고 사람들을 돌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를 통해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 가면서 새로운 교회 문화를 창출해 나갔다.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새로운 신앙 공동체의 형성 과정에서 한국 사회의 신분 차별의 벽이 크게 해소되는 일이 나타났다.
또한 교회에서는 일찍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해 교인들에게 가르쳤 으며, 찬송가를 편찬해서 많은 노래를 가르치고 불렀다. 특히 대한기독교서회를 설립해 각종 신앙서적을 발간하고 보급했다. 이를 통해 독서문화가 전 계층으로 확대됐고, 서양식 음률이 보급됐다. 한글의 사용을 원칙적으로 준수했기 때문에 한글의 발전에도 커다란 공헌을 했다. 이로써 한문을 중심으로 하는 양반 중심의 문화적 특혜의 벽이 서서히 무너져 갔다. 이러한 문서 사업은 보다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기 위해 철저하게 한글을 중심으로 전개됐는데, 이는 이미 훈민정음을 통해 민간에 알려진 언문이라는 문자체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 능한 일이었다.
교회는 또 청년운동을 전개했다. 주로 YMCA와 YWCA를 중심으로 전개된 청년사업은, 청년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규정하고 이에 해당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대대적인 문화운동으로 전개돼 나갔다. 특히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 활동을 통해, 사회 변화의 주역인 청년 들을 각성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사회 전반에서 획기적 인 변화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처럼 교회는 사회의 제도를 바꾸는 정책적인 차원은 물론, 무엇보다 사람들의 의식 변화를 통해 서서히, 그 리고 꾸준하게 사회변화를 이끌어 갔다.
YMCA의 설립 이면에는, 선교사들이 청년회의 창설을 발의하기도 전에 먼저 150여명의 한국 청년들이 청년회의 창설을 요구했다는 사 실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청년운동의 조직적 전개 과정에서 나타난 청년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청년운동은 당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전개되는 일이었으며, 여기에 참여했던 청년들은 물론, 이들과 관련된 사람들 대부분은 한 국의 사회변화를 통한 신분질서의 해소 과정을 몸소 실천했다. 기독교를 통한 한국 사회의 신분질서 해소는 한국에서 새로운 사회문화를 창출해 낸 기본적인 배경이었던 것이다.
(사진 - 백정 출신 기독교인으로 종각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개막연설을 맡은 박성춘 장로[승동교회] / 박성춘의 아들로 세브란스의전 제1회 졸업생으로 한국인 첫 세브란스의전 교수가 되었던 독립운동가 박서양. 에비슨 의사와 함께 외과수술에 참여한 박서양의 모습.)



조선성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는 초기 한국 기독교의 문서선교를 담당하기 위해 세워진 연합기관이다. 1889년 10월 서울 정동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 선교사 자택에서 열린 장·감 선교사 모임에서 헤론(John W. Heron, 혜론)이 문서선교 기관을 제안했다. 언더우드는 토론토 문서선교회, 미국 문서선교회, 런던 문서선교 회에 재정 지원을 요청했고, 이들의 재정 지원을 받아 1890년 6월25 일 서울 정동 언더우드 선교사 자택에서 The Korean Religious Track Society가 설립됐다. 설립위원장은 올링거(Franklin Ohlinger, 무림길)가 맡았다.
설립 과정에서 헤론은 기안의 공, 언더우드는 외국 선교회의 재정 원조의 공, 그리고 올링거는 조직의 공을 각각 세운 것이다. 위원으로는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아편설라), 언더우드, 베어드 (Willam. M. Baird, 배위량), 존스(George H. Johns, 조원시), 헤론, 마펫(Samuel A. Moffet, 마포삼열), 벙커(Dalziel. A. Bunker, 방거), 기퍼드(Daniel. L. Gifford), 게일(James. S. Gale, 기일), 레이놀즈 (William. D. Reynolds, 이눌서) 등의 선교사가 참여하였다. 초대 임원 진은 회장 올링거, 부회장 헐버트, 연락 간사 언더우드, 서기 스크랜턴(William. B. Scanton, 시란돈), 회계 펜윅(Malcolm C. Fenwick, 편 위익)이었고, 초기의 실제 사무는 빈턴(C. C. Vinton, 빈돈)이 맡았으 며, 빈턴의 집이 사무실이었다. 1891 1월 The Korean Religious Track Society의 한국 명칭을 조선성교서회(朝鮮聖敎書會)로 정했다.
감리회와 장로회의 연합사업으로 시작된 조선성교서회는 문서선교 와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설립 목적은‘조선어로 기독교 서적과 전도지, 정기간행물의 잡지류를 발행해 전국에 보급하는 것’이었다. 조선성교서회는 당시 문서선교를 위해 출판 업무를 수행했던 심양문광 서원과 삼문출판사와 함께 복음전파의 한 축을 담당했다.
조선성교서회에서 1890년 처음으로 발행한 책은 언더우드가 번역 한“성교촬리(聖敎撮理)”였다. 다음으로는 모펫의“장원량우상론(張 袁兩友相論)”이 출간됐다. 1892년에는 한국 최초의 노래집이자 찬송 가인 감리교의『찬미가』를 발행했고, 1893년엔“구셰진젼”,“구셰 진주”등의 전도교리 문서를 펴냈다. 조선성교서회는 1893년에 7종, 1894년에 한국 최초의 번역 소설인“인가귀도”등 12종, 1895년에는 게일이 번역한“천로역정”을 각각 발행했으며, 1896년에는 20여 종의 간행물이 나왔다. 1897년에 노병선의“파혹진션론”과 한국 최초의 한 영·영한사전인“한영뎐”을 발행했고, 1899년엔 한국 최초의 생리학 교과서인“젼톄공용문답”을 발행했다. 이후 1911년부터 1940년까지 총 46,334,519부의 책을 발간했고, 924,930,616쪽을 인쇄했다고 한다.
1893년에는 서적 판매소를 전국 세 곳으로 확장해 서울은 빈턴, 평 양은 마펫, 부산은 베어드가 각각 관리를 맡았다. 1897년 국호가 대한 제국으로 바뀜에 따라‘대한성교서회’로 개칭했다가 1915년에는 조 선예수교서회로 이름을 바꿨 다. 또 1939년 조선기독교서회로, 그리고 1948년 8월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다시 문을 열면서 이름을 재단법인 대한기독교서회로 바꾼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00년부터는 최초의 공식 사무실을 성서공회 건물 안에 설치하고, 독자 건물을 위한 모금운동 착수했다. 그 결과 1906년에는 종로 2가의 낡은 건물을 매입해 대한성교서회의 자체 건물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09년 2월에는 한국인 이용균(이모세) 씨를 판매부장으로 채용했다. 1910년에 본윅(Gerald W. Bonwick, 반우거) 총무가 취임하면서 새로 운 건물을 계획, 1911년 6월에 2층 양옥 건물을 완공했다. 구세군 선교 사로 2년간 활동한 바 있는 본윅은 조선성교서회의 총무로 임명받아 27년간 일하면서 조선예수교서회의 기본 조직을 갖추고, 탁월한 사업가적 기질을 발휘하며 조선예수교서회를 든든하게 세웠다. 전국의 교 회와 기관들의 관심과 협력을 얻기 위해 1912년부터 매년 1월 셋째 주 일을 서회 주일로 정해 기도와 헌금을 하도록 총회적으로 결정하기도 했다.
1916년에 조선예수교서회의 영어 명칭을 The Korean Religious Book and Track Society로 바꿨다가 1919년에는 The Christian Literature Society of Korea로 다시 변경했다. 이 영문 이름은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대한성교서회가 출간한 책들 가운데 한국 교회 전체에 종요한 영향을 미친 것을 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한성교서회는 주한 외국 선교사들의 영문 잡지인「한국선교현장」(The Korea Mission Field)를 위탁 발행했다. 이 잡지를 통해 당시 한국의 현실과 한국학(선교사들의 한국 문화와 역사 등)을 해외 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
둘째, 대한예수교서회는 1915년부터 한국 교회 유일의 주간지인 「기독신보」(基督申報)를 발행했다.「기독신보」는 감리교의「죠션 크리스도인회보」와 장로교의「그리스도신문」이 합쳐져 장감 연합으 로 발행한 신문이다. 대한예수교서회는「기독신보」를 통해 일제강점기 중 교회의 사회·문화적 입장을 대변했다.
셋째, 대한예수교서회는 주일학교 공과와 찬송가를 발행했고, 이를 통해 한국 교회의 교회교육과 교회일치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대한성교서회가 출판과 관련된 공헌만 한 것은 아니다. 문화적 사업에도 많은 공헌을 했다. 독립협회 사건 후 개화파 인물들이 투옥되었을 때, 대한성교서회는 성서공회와 협력하여“옥중전도문고(The Prison Library)”를 만들어 옥중 인사들이 회심하는 데 도움을 줬다. 이를 통해 이상재, 이승만, 유성준, 김정식, 안국선, 김린, 이원긍, 남 궁억 등 10여 명의 개화파 인사들이 기독교인이 되게 한 것이다. 교역 자 문고를 만들었으며,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월력과 선교사수첩을 만 들었다. 또 조선예수교서회는 설립 초기 종교 출판이라는 제한된 벽을 넘어 일반 교양, 위생, 계몽, 어린이, 어학, 역사 등에 대한 책을 출 판, 민족 개화와 문화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1924년에 스와인하트(Martin. L. Swinehart, 서로득)가 건축비 모 금 운동을 펼친 뒤, 1926년에는 상하이에서 활동 중이던 군(C. A. Gunn)이 새 건물 설계해 5층의 현대식 건물을 신축했다. 이 건물에 는 기독교 주요 기관들이 입주했다. 1924년 체계적인 도서 출판을 위 해 편집부를 신설하고 편집부원에 클라크(William. M. Clark, 강운림), 하디(Robert. A. Hardie, 하리영) 목사, 보조원에 김필수, 오천영, 최 성현, 김태원 목사를 임명했다. 1928년 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아 32 명의 이사 중 김필수, 최재학, 전필순, 장락도, 김인영, 차재명 등 6 명의 한국인이 이사로 참여했다. 또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들이 번역 한 940쪽 분량의 한국 교회 최초의 종합사전『성경사전』을 발행했다.
1940년에는 창립 50주년 기념식을 YMCA 대강당과 체육관에서 가 졌다. 40년동안 조선예수교서회는 700여 종의 서적을 발행해 4,470만 권을 판매했으며, 단편 전도지 2,800만 매를 발행했다.
1942년 5월에는 일제가 조선기독교서회의 재산을 적산(敵産)으로 선언하고, 관리인을 파송해 한국인 직원들을 해고해 버렸다. 이로 인해 출판 사업이 중단되고, 비품과 기물들을 약탈당했다. 1948년 3월에 해 방 후 최초의 정식 이사회를 개최하여 이사장에 남궁혁, 부이사장에 아 펜젤러(Alice. R. Appenzeller, 아편설라4), 총무에 김춘배, 협동총무에 프레이저(Edward J. O. Fraser, 배례두)를 임명했다. 1946년부터 장로 교, 감리교, 성결교의 찬송가 통일을 위한 합동연구위원회를 조직하고, 1949년 세 교파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합동찬송가를 발행했다.
1952년 1월엔 아동 잡지「새벗」을 창간하고 편집위원으로 최석주, 전택부, 표재환, 강소천, 이희제가 참여했다. 이 잡지를 통해 어린이 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줄 수 있었다. 1957년 8월에는 월간「기독교사상」을 창간, 오늘날까지‘한국 기독교의 양심과 지성의 상징’역할을 하고 있다. 1975년 이후부터 해외교회의 원조에서 벗어나 자립의 길 에 들어섰으며, 이윤 창출이 어려운 신학서적 출판을 꺼리는 출판 풍토 속에서 수준 높은 신학서적을 출간하고 건강한 평신도 육성을 위 한 서적 발간에 주력하고 있다.
(사진 - 1890년 창립 이후 종로에 문을 연 "예수교서회" 매장 모습 / 1910-20년대에 사용한 조선예수교서회의 신축사옥)


한국의 근대화를 이야기할 때,‘기독교청년회’(YMCA)와‘여자기 독교청년회’(YWCA)를 빼 놓을 수 없다. 이 두 단체는 기독교 청년운동 단체로서 한국 근대사 곳곳에 족적을 남기며 한국 근대화에 한 몫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청년회(YMCA. National Council of the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s)는 원래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이 1844년에 결성한 단체로, 지역 기독교청년회가 세계 각국에 설치되면서 확장됐다. 여자기독교청년회(YWCA. Young Women’s Christian Association) 역시 19세 기 중반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영국에서 사회참여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드러낸 근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전통에 따라 결성됐으며, 이 후 세계 각 지역으로 확대됐다.
하지만, 이 두 단체가 한국에 들어온 시기는 다소 차이가 있다. YMCA는 선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됐다. 미북장로회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와 미북감리회의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아편설라)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상류 지식층 지도자와 청년들에게 전도하려는 목적으로 교회와는 별개의 기독교 기관을 만 들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당시 한국 사회에 남아 있던 신분제의 잔재로 인해서 상류층 인사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그들 이 참여할 수 있는 기관과 장소를 마련하여 복음을 전하고자 한 것이다.
이들은 1899년 미국에 있는 기독교청년회 국제위원회에 기독교청 년회관 건축비 보조 청원서를 한국 청년 150명의 진정서와 함께 제출 했다. 국제위원회는 전문 간사를 파송해 조사보고를 받은 후 1901년 9월 질레트(Philip L. Gillett, 길례태)를 창설 간사로 한국에 파송했다. 한국에 들어온 질레트는 배재학당 안에 기독학생회를 만들고, 1903년 3월에는 국내 선교사들과 영·미·불·독·일·중 등 각국 외교관, 은행가 실업가 등으로 청년회관 건립을 위한 자문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1903년 10월 28일에는 정동의 공동서적실에서‘황성기독교청년회’의 창립총회를 열었다.
창립총회에는 5개국 37명의 창설회원이 모였으며, 초대 회장에 헐 버트(Homer B. Hulbert, 할보), 초대 총무로 질레트를 선출했다. 그런 데 창립 이듬해에 이상재, 김정식, 남궁억, 유성준, 윤치호 등 독립협 회 관계 인사들이 가입했다. 이에 따라, 단순히 상류 지식층 지도자와 청년들을 전도하기 위한 기독교 기관을 추구했던 YMCA의 역할에 변 화가 생겼다. 이들의 가입으로 YMCA는 독립협회 운동의 계승자 역할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YMCA는 단순히 기독교 청년운동에 머물지 않고 독립협회 운동의 계승자로서의 역할도 잘 감당해 냈다. 또한 1905년 을사늑약 후 일본으로 유학 간 청년들을 위해 재일본 한국 YMCA를 창설하는 등 해외로도 활동영역을 넓혀 나갔다. 1908년에는 현재 서울 YMCA가 자리 잡고 있는 종로2가에 3층짜리 현대식 건물을 준공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리고 1910년 한일합병으로 전국민이 비통해 있을 때, 학생들의 연합하령회 등을 개최하여 민족정신 함양과 국민계몽으 로 광복을 기약하고 다짐하는 한편, 학생청년조직을 강화해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일본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YMCA 의 활동을 주시한 일본은 기독교 세력의 위험성을 인식하게 됐고, 이 것은 결국 기독교인들과 학생들이 데라우찌 총독을 죽이려고 했다는 조작극을 통해 이른바 ‘105인 사건’을 일으키게 만든 원인이 됐다. 이에 더하여 일제는 일부 YMCA 지도자들과 회원들을 매수,‘유신회’라는 친일단체를 만들어 YMCA를 손에 넣으려 시도하다가 실패하는 사건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 일본의 탄압으로 대부분의 YMCA 지도자가 검거되거나 해외 망명길에 오르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압박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한국YMCA는 일본의 식민지배 아래에서 애국계몽운동의 선봉으로 자리매김했다. 1914년 국내의 여러 YMCA들을 규합해 조선기독교 청년회전국연합회를 조직 한 한국 YMCA는, 1919년 3.1운동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러니 이후 이어진 일제의 문화통치기에는 그 조직망을 전국적으로 갖추어 한국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청년들을 계몽시켜 문명 향상을 꾀하고 기독교 정신을 심는 것을 목적으로 월간지 〈청년(靑年)〉을 1921년부터 발행했고, 평양 YMCA 총무 조만식을 중심으로 물산장려운동과 금주·단연·절제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또한 농민협동조합, 소비조합, 저축조합, 야학 등을 세워 농민의 생활 향상, 의식개발, 단결력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 비록 일제 말기의 탄압과 회유 등으로 서울 YMCA를 제외하고는 모두 폐쇄됐지만, 8·15 해방 후 재건운동을 활발히 펼쳐나갔다.
1955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으로 개칭한 한국 YMCA는 오늘날에도 선교사업을 비롯한 사회교육사업, 농촌사업, 국제교류활동, 체육사업, 출판사업, 지도력개발사업, 캠프 야외활동을 통해 건전한 시민사회 형성에 힘 쓰고 있다.
선교사들에 의해 추진된 YMCA 결성과는 달리, YWCA는 김활란, 김필례, 유각경 등 기독교인 여성 지식인들에 의해 일제강점기인 1922년 결성됐다. 일본에 유학 중이던 김필례는 동경 YWCA가 경영 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다가 YWCA의 이념과 사업을 몸소 체험한 뒤 1916년 귀국, 1921년 YWCA 창설을 위해 선교사들과 여성 지도자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아펜젤러의 소개로 김활란을 만났다. 이후 신의경, 유각경을 포함한 교육받은 여성들이 같은 목적으로 모여 YWCA연합 회를 조직하기 위한 모임을 가졌고, 1922년 3월 27일 남녀 유지 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성여자교육협회에서 제1차 한국 YWCA 발기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그해 4월 북경 청화대학에서 열린 세계기독학생연맹 (WSCF) 총회에 참석한 김활란(감리교 여성대표), 김필례(장로교 여성 대표)는 일본의 식민지배하에 있는 우리나라 YWCA가 일본 YWCA 동맹의 허가 없이는 조직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이에 따라 이들 은 일본 YWCA 총무 가와이 미치코를 만나 조선에 YWCA가 설립될 경우 세계 YWCA에 단독 가입할 것을 승인받는 동시에, 한국의 단독가입동의서를 첨부해 준다는 약속을 받아 돌아왔다. 그 결과, 비록 일제 치하임에도 YWCA가 조선 단독으로 창설되는 기틀이 마련됐고, 한국 YWCA는 처음부터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 YWCA와의 유대 속에서 식민지 일본 YWCA의 한 지부가 아닌 독립된 조선 YWCA로서의 회원 자격을 갖고 출발할 수 있었다.
이렇게‘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라는 명칭으로 시작된 YWCA는 강 연회, 성경공부, 야학 운영을 통해 여성을 각성시키는 활동부터 시작하여, 문맹퇴치 운동, 국산품 장려 운동이나 금주·금연 운동, 공 창 폐지 운동, 조혼 폐지 운동 등으로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소설 『상록수』에 나오는 주인공 채영신의 모델인 최용신이 YWCA 운동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의 군국주의와 내선일체 정책이 강화됨에 따라 사회운동 단체들에 대한 탄압 또한 강화돼, 해방 이후 다 시 활동을 재개하는 1946년까지 한국 YWCA 역시 그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시대적인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들 기독교 청년단체의 다양 한 운동이 한국의 근대화에 끼친 공헌은 적지 않다. 선교사들이 상류 지식층 지도자와 청년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설립한 기독교 청년단체 YMCA는, 단순한 기독교단체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적 요구에 따라 애국계몽을 기치로 내세워 한국 전역으로 그 조직이 확대되면서 기독교 정신과 근대적 사상을 한국 전역에 뿌리내리게 했고, 이를 통해 건전한 시민사회의 건설을 꿈꾸게 했다. 그리고 한국 YWCA는 기독교 정 신으로 어둠 속에 있던 여성을 일깨웠을 뿐만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 청소년에 대한 인식 변화를 통해 한국 근대화의 한 축을 담당해 냈다.
(사진 - [위] 초기 YMCA 회관 전경 / [아래] YWCA 하령회에서의 초기 멤버들[1924])


조선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가 사업을 펼쳐 나 가는 데 있어서 근거가 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청년개인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며, 그 청년들을 연합하여 하나로 묶기를 추 구한다”는 파리선언이었고, 또 하나는 정신적, 지적, 사교적, 신체 적 요소를 모두 전인적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사중목적사업(four fold program)이다. 체육사업 역시 그 일환이었다. 한국 YMCA는 사업목표부터기 지덕체의 균형 잡힌 인간형성에 있었던 것이다. 1905년 신흥 사에서 열린 YMCA 운동회에서 YMCA 부총무 김정식은 운동회의 목 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청년회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이는 덕육, 지육, 체육이다. 소위 이것을 삼육이라 한다. 사람이 사람이 되는 것은 도덕이 있고, 지식이 있고, 신체가 건강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들 세 가지 중 하나가 없다면 인격이 추락되어 버린다. 인격이 추락되면 세 계나 우리나라는 물론 가족이나 사회도 존재할 수 없다."
YMCA가 회원들에게 지도한 스포츠는 야구, 농구, 축구, 유도, 검 도, 육상, 체조 등이었다. 이 중 야구는 정확한 년도에 관해서는 논란 이 있지만, 조선 YMCA 총무 질레트(Phillip L. Gillett, 길례태)에 의해 1904년과 1905년 사이에 처음 소개됐다. 질레트가 내한하면서부터 야 구를 한국에 도입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단지 개인의 여가활동을 위해 야구장비들을 챙겨왔다가, 몇 년 뒤 한국 사람들이 야구에 흥미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야구를 가르치는 것이 YMCA활동 에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당연히, YMCA가 야구를 시작 했을 때의 야구 수준은 동네야구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모든 것이 정비되지 않은 상태로, 유니폼 등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선수는 조선 옷에 짚으로 만든 조선 신발을 신고 나왔다. 하나의 배트를 교대로 사용하였고, 내야는 장갑, 외야는 맨손으로, 주자가 없을 때에는 투수의 투구에 대하여 포수는 정확하게 잡으려 하지 않고 아픈 것이 손해라고 생각하여 가능한 한 공을 흘려보내서 백네트를 이용하였다."
하지만 YMCA야구단은 시합을 통해 실력을 배양했다. 그중에서도 YMCA의 허성은“실로 조선인 야구의 아버지, 육성의 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사람이며, 황성군의 투수로서 활약하고 명선수로서 이름을 날렸던”사람이다. 그는 휘문의숙, 오성학교 학생들에게 야구를 지도하며 야구 보급에 힘썼다. 한국 최초의 야구시합은 1906년 3월15일 YMCA와 독일어 학교인 덕어학교 사이에 벌어졌다.
한국에 야구가 정착하기까지 YMCA의 역할은 두드러졌다. YMCA 에서는 야구, 배구, 농구, 축구 등을 가르쳤고, 한국 최초의 축구 공개 시합도 YMCA와 대한체육구락부 사이에서 벌어졌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에 구기운동이 도입되는 데 있어서 YMCA가 미친 영향이 매우 선 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당시의 축구는 발공, 경구, 척구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선수의 수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골대조차 없 이 경기가 펼쳐졌지만, 무엇이든 처음은 미약한 법이다.
1906년에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체육단체인 대한체육구락부가 창립됐다. 대한체육구락부의 주된 활동은 축구와 관련된 경기를 개회하는 일이었다. 이 시기에 회동구락부, 대동체육부 등의 단체들도 결성 됐고, 이 시기에 도입된 근대 스포츠 종목은 YMCA가 지도한 축구, 야 구, 농구, 유도, 검도, 육상, 체조 등이었으며, 이외에도 테니스, 스케이트, 수영, 사이클, 승마, 사격 등이 있었다. 이때 도입된 근대 스포츠 종목의 절반 이상이 YMCA가 도입해서 지도한 종목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YMCA는 근대 스포츠를 도입해 보급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확장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출발은 YMCA가 사회단체로는 처음으로 1905년 5월 22일 신흥사에서 체육보급의 시초인 운동회를 개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운동회가 1896년 허치슨(W. F. Hutchison)에 의해 영어학교에서 개최된 이후 1910년까지 YMCA를 제외하고도 다양한 운동회들이 열렸는데, 구한말의 운동회 는 대체적으로 다음의 네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학생이 아닌 일 반인들에게도 체육을 보급하고 체육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둘째, 체육행사뿐 아니라 놀이, 오락과 연설회 등의 활동이 함께 어우러진 축제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셋째, 교육적 기능을 담당했고, 넷째, 군사훈련적 경기가 포함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전에 는 각 학교들이 주최하는 오락과 놀이 중심의 체육행사가 진행돼 오 다가 1905년 이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주권침탈이 노골화면 서 종래의 오락과 유희 중심이었던 운동 종목이 점차 군사적 색채가 강한 종목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운동회가 민족적 위기라 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된 것이었다.
이런 중에 YMCA는 1905년 신흥사를 시작으로, 1906년 6월에는 흥 천사에서, 1907년 5월에는 훈련원에서, 1909년 5월에는 삼선평에서 큰 규모의 운동회를 개최했는데, 여전히 육상, 축구, 야구 등 근대 스포츠와 놀이적 요소가 강한 전통놀이가 주된 종목이었다. 하지만 운동회를 마친 이후에는 만찬이 이어졌다. 이렇게 볼 때 그 규모는 알 수 없지만 YMCA의 연합운동회가 체육대회이면서도 회원들 사이의 친교의 장이라는 기능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민족적 각성을 한 청년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안 정적인 식민 지배를 꿈꾸는 일본에게는 위험요소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일본은‘운동회가 위험풍조를 나타내고 있다’는 학부차관 타와라 마고이치(俵孫一)의 경고에 따라 1910년부터 연합운동회를 폐지했 다. 당시 운동회가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적 성격을 조선 지배의 커다란 장애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운동회가 유희 에 탐닉하게 하며 (학)부형으로 하여금 예기하지 않았던 비용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당하게 함과 같은 일이 있다고 하면 교육의 보급과 장려에 도리어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이유를 내결었다.
이렇게 운동회들에 대한 일본의 단속이 있었음에도 YMCA 이외 의 단체들은 여전히 운동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일본이 유독 YMCA 의 연합운동회만을 폐지한 이유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스포츠에 대 한 지식이 거의 없던 조선인들에게 근대스포츠를 알리고 가르쳤던 YMCA의 노력이 스포츠사뿐 아니라 민족사적으로도 얼마나 중요한지를 증명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YMCA뿐 아니라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의 마라톤 코치가 조선적 기독교를 열망했던 김교신이었다는 사례 등에서 볼 수 있듯, 한국 기독교는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의 근대 스포츠 도입과 스포츠를 통한 민족의식 함양에 영향을 미쳐왔던 것이다.
(사진 - [위] 초기의 황성기독교청년회 회관 전경 / [아래] YMCA 야구단 초기 멤버)



한국에 온 선교사 가운데 한국의 역사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선교사들은 많이 있었지만, 꾸준한 연구를 통해 한국의 역사를 책으로 남긴 선교사는 게일(J. S. Gale, 기일)과 헐버트(H. B. Hulbert, 흘법)였다. 게일과 헐버트가 한국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자료를 찾아 공부하기 시작한 시기는 한국인들조차도 한국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적었던 시절이었다. 대부분 중국의 역사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었으며 한국의 자주적인 역사 서술에 대한 시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한국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정립한 신채호나 박은식의 경우 보다 시기적으로 앞서 있었다. 따라서 게일과 헐버트의 한국 역사 서 술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와서 한 일 가운데 한국의 역사를 올바로 정리할 수 있는 새로운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사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게일과 헐버트가 한국의 역사에 대대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00년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창립된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 에서 첫 번째 발표자로 선정되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 학회 는 가장 먼저 한국의 역사에 대한 연구 논문을 발표하기로 결정하고 여기에 가장 적합한 두 사람을 선정하였는데 그들이 바로 게일과 헐버트였다. 이 두 사람의 선교사가 선정된 것은 당시 누구보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다른 선교사들보다 탁월한 식견을 이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시 한국의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들을 고려하여 게일에게는 한국의 역사를 중국과 깊이 관련하여 서술하도록 요구하였고, 헐버트에는 한국의 고유한 점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역사를 검토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게일은 1900년 10월 24일“The Influence of China Upon Korea”라는 제목의 연구를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게일은 한국의 역사를 중국과 관련하여 B. C. 1122년부터 개관하였다. 그리고 당시 중국 인들이 ‘한국은 작은 중국이다’라고 표현하는 점을 들어 한국은 고대로부터 중국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 에 반해 헐버트는 11월 29일“Korean Survivals”라는 제목의 연구에 서 한국의 고유한 것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역사를 개관하였다. 그리고 천이백 만이 넘는 한국 사람들이 수천 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그 들만의 특별하고 독특한 유산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두 편의 논문은 많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헐버트의 발표가 끝난 후 당시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모였던 학회의 회원들은 한 국의 역사를 보는데 있어서 어떤 관점이 훨씬 더 의미가 있을 것인지에 대해 거침없는 토론을 하였다. 그리고 대체로 한국의 역사는 한국 의 고유한 특징들을 근거로 서술되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수렴되었다.
게일과 헐버트의 연구는 한국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한국 역사의 내용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우선 한국의 역사를 시작하는 시점이 다르다. 게일의 경우라면 중국이 한국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 비교적 확실한 기자에서부터 출발하지만, 헐버트의 경우에는 당연히 단군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한국의 문자 체 계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 게일은 설총이 이두를 발명한 것은 중국의 사상을 한국인들에게 잘 전달하기 위함이었으며 마찬가지로 한글 체 계가 있었지만 여전히 중국의 문자를 사용해왔기 때문에 한글을 사용 한다고 하더라도 한문 없이는 생각을 전달할 방법이 없다고 하였고, 헐버트는 설총의 이두를 통해 한국인들이 중국의 문자 체계에서 벗어 나 독창적인 한국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고 대중교육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평가하면서 이는 이후 한글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글자의 발명을 통해 완성되었다고 하였다. 헐버트는 한글만으로 모든 사상과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상반된 입장으로 한국의 역사 각 항목 하나하나가 서로 비교되고 평가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입장은 지금도 매우 유효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게일과 헐버트가 학회에서의 발표로 한 국의 역사에 대한 연구를 끝내지 않고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시켰으며 결국 두 사람 모두 체계적인 한국의 역사서를 서술하였다는 것이 다. 우선 게일과 헐버트의 역사 서술이 책으로 묶여지기 이전에는 각 각 잡지에 발표되었다. 게일은“A History of the Korea People” 이라는 제목으로 1924년 7월부터 1927년 9월까지 모두 37회에 걸쳐 The Korea Mission Field에 연재되었다. 게일의 글들은 리차드 러트 (Richard Rutt)라는 성공회 신부가 편집하여 James Scarth Gale and his History of the Korean People 라는 제목으로 한 권의 단행본으 로 묶여지게 되었다. 그리고 헐버트는“History of Korea”라는 제목으로 1901년 1월부터 1904년 12월까지 The Korea Review에 연재되었고, 1905년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이 헐버트의 책은 클라 렌스 윔즈(Clarence N. Weems가 정리하여 두 권의 단행본 Hulbert’s History of Korea Vol. Ⅰ. and Ⅱ. 으로 다시 출판하였다. 그리고 헐버트가 쓴 The Passing of Korea라는 책은 신복룡 교수가 번역하여 『대한제국멸망사』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게일과 헐버트는 선교사 가운데 한국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달랐던 선교사였다. 심지어 헐버트의 경우에는 한국의 독립을 위한 적 극적인 활동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기까지 하였다. 일제라고 하는 강력한 통제력이 커다란 압박으로 일상에 작용하던 시절 한국인 들은 다시 한국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서둘러 자 신들의 역사를 정립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역사와 관련하여 외국의 선교사들이 먼저 글을 쓰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당시 한국의 교회에서 한국의 역사가 나름 대로의 체계를 가지고 가르쳐지고 있었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그때 기독교는 한국의 역사를 널리 전하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한국의 역사와 관련하여 게일과 헐버트를 주목해야하는 이유는 그들이 한국의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역사를 서술하였다는 점 때문만 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연구는 그들이 한국에서 살아온 삶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역사를 안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바꾼다고 하는 점을 이 두 선교사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한국의 역사는 한국 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저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가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꾸준하게 연구하고 깊이 성찰 해야 하는 분야이다.
(사진 - [위] 헐버트 선교사와 그가 저술한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국립국어원 제공] / [아래] 게일 선교사와 그가 번역한 첫 한글 소설 <천로역정>)




1890년대와 1900년대 초 한국인들의 서양음악에 대한 이해는 거의 전무했다고 할 수 있다. 1923년 출판된 최초의 한글 음악통론『음악 대해』가 저술된 목적도, 당시 성가대원 및 교인들이 악보를 제대로 읽 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합창의 경우, 단선율만으 로 이루어진 노래를 따라 부르기에도 벅찬 한국인들에게, 4성부의 합창은 부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듣는 것조차도 힘든 일이었다. 평양 숭실학교의 교사로 시무하면서 한국최초의 성가대인 평양 장대현교회 성가대를 만든 모우리(Eli M. Mowry, 모의리)는, 한국에서의 합창 이 얼마나 정착되기 어려운 것인지를 이렇게 털어놓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한국인은 4부로 된 음악을 듣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한사람이 우리 학교의 4부 중창을 듣고 난 후, 한 사람만 노래하고 나머지는 가만히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사람은 30명으로 구성된 합창을 듣고 도망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창기 한국 교회음악은 서양 음악을 모르던 많 은 사람들을 음악가로 만들어 사회에 내보냈다. 서양 음악이 한국에 들어오는 통로가 선교사들이었으며, 서양음악을 배운 사람들이 풍금 소리, 찬송가 소리, 합창 소리에 매료되어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기 때 문이다. 근대 서양음악의 개척자이자 한국 교회음악의 선구자로 여겨 지는 김인식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에 음악을 배운다면 누구나 다 종교 분야에서 시작했다. 왜냐하면 당시에 음악은 대개 서양인 선교사를 통하여 들어왔기 때문이 다. 내가 음악을 배운 동기도 마찬가지다. … 풍금 치는 것이며 찬미하는 것을 몹시 흥미 있게 듣던 나머지 11살에 숭덕학교에 들어가서 창가를 열심히 하였다."
우리나라 근대음악의 효시로 여겨지는‘학도가’의 작곡가이기도 한 김인식은, 동학당 혐의로 체포된 삼촌이 예수교인이라는 구실로 그 혐의를 벗고 생명을 유지하게 된 것을 계기로 어린 나이에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에 나가면서 음악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고, 1897년 숭덕학교에서 창가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16세 때 부터는 숭실중학교에 들어가 더 체계적으로 음악을 공부하고 싶은 열 망으로 헌트(William B. Hunt, 한위렴)의 부인과 숭의여학교 교장 스눅(Velma L. Snook, 선우리)에게 성악을 배웠다.
김인식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재능은 탁월하였다. 어느 날 기숙사 동료 4명과 돈을 모아 한 선교사로부터 헌 풍금을 구입한 김인식은 너 무 열심히 연습을 한 나머지 기숙사 학생들의 항의로 기숙사에서 쫓겨나게 됐다. 비록 기숙사에서 쫓겨났지만, 그의 실력은 일취월장해 3학년이 되던 해에는 그의 오르간 연주 실력이 너무나 훌륭해서 교장이 그로 하여금 하급반 음악 시간을 담당해 가르치도록 할 정도의 수준에 이르게 됐다.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이에 그치지 않고 리 (Graham Lee, 이길성)에게서 코넷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바이올린도 독학으로 사흘만에 찬송가를 훌륭히 연주해 내는 정도가 돼 그래함 리를 위시한 많은 선교사들을 놀라게 했다.
김인식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재능은, 1907년 22세의 나이로 상경 해 교육자의 길을 걸으면서 한국 음악의 근대화에 한 몫을 담당하게 됨으로써 더욱 그 빛을 발하게 된다. 영어를 배워 미국으로 유학하겠다는 뜻을 버리고, 시대의 요구에 따라 한국 최초의 음악 교사로 일하게 된 것이다. 그는 황성기독청년회가 설립한 숭실청년학원 중학부를 가르치는 것을 시작으로 기호학교(현 중앙고교), 진명, 오성, 경신, 배재 등 여러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그리고 1909년 최초의 사설 음악전문 교육기관인 조양구락부(調陽 俱樂部)가 생기자 교사로 활동했으며, 그곳에서 이상준·홍난파 등을 가르쳤다. 조양구락부는 후에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轉習所)로 바뀌었는데, 표면상 정음(正音)을 바로잡아 국민의 입지에 도움을 주자 는 것을 발족동기로 내세웠지만, 사실은 나라를 빼앗긴 뒤 애국지사 들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만든 모임의 성격을 가진, 서양음악과 한국 전통음악을 가르친 최초의 음악기관이었다. 한편 이후에 그는 YMCA 에서 음악을 가르치면서 합창을 지도했으며, 종교교회에 본부를 둔 합창대를 만들기도 했다. 이 합창대가 처음 남성만의 합창으로 시작 하여 혼성합창대로 발전한 경성합창대이다. 경성합창대는 한국 합창 운동의 효시가 됐다.
경성합창대의 놀라운 점 한 가지는 남녀 혼성의 합창대라는 것이 다. 여성이 대중 앞에서 노래한다는 것은 매우 새로운 일이었다. 최초의 성가대인 평양장대현교회의 성가대 역시 남성들로 이루어져 있 었다. 당시에는 가정집에서 여성의 노랫소리가 바깥으로 나가는 것 이 사회적 금기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은 집안에서조차 마 음 놓고 노래를 부를 수 없는 형편에 처해 있었다. 이런 시대에 특수 한 직업적 특성을 가진 기생을 제외한 여성이 마음 놓고 노래 부를 수 있는 공간은 교회가 거의 유일했다. 비록‘ㄱ’자 형태이거나 커튼으로 사이를 갈라 서로를 볼 수 없게 만든 형태의 교회였지만, 여성들은 남성들과 함께 공공의 장소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여성의 침묵 이 강요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집안에서조차 자신의 목소리를 내 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던 여성들이 비로소 노래하는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1886년 설립된 이화학당을 시작으로, 여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 에서 음악은 성경과 더불어 중요한 교과목으로 여겨졌다. 여학교들 이 생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에서 비교적 체계적으로 음악을 배 운 여학생들은, 성탄절과 같은 교회의 큰 절기를 기념하는 행사에 참 가한 대중 앞에서 노래하는 대표자로 나설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감리교에 속한 교회들이 1898년 12월 24일 저녁 정동교회에서 함 께 한 성탄전야 예배였다.‘육 칠 백 명의 남녀가 참가한 큰 규모의 모임’에서 이화학당의 여학생들이 대표로 예배 순서 중 예물을 드리는 시간에 영어가사의 찬미가를 노래했다.
"정동회당에서는 특별히 이십사일 밤에 형제와 자매들이 일제히 모 여 구세주의 탄일을 경축할 회당 종집 위의 등불을 가득히 달아놓고 문표와 예식을 만들어 절차 있게 행하였는데 … 이화학당 여학도들만 찬미가를 영어로 노래하고 예물로 분금하는 표를 적간하여 차례로 나누어 주고 … 이때에 남녀 중 모인 사람들이 합 육 칠 백 명이 되는데 모두 기쁜 마음으로 구세주 나심을 목도하고 만남같이 알더라."
여성이 공적인 자리에서 노래하는 자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초기 한국교회 여성들이 음악을 통해 강요된 침묵에서 벗어날 주요한 수단 을 찾았음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사진 - [위] 연희전문학교 김영환 교수의 음악수업 광경[1927] / [아래] 이화여전의 캠퍼스 이전 기념 찬송가 제창[1935])


격동의 한말 일제시대에 서구 종교인 기독교는, 민중의 생활중심지였던 장시(場市)를 통해 한국의 역사·문화적 환경 속으로 수용되면 서 민중의 지지를 얻는 종교로 정착돼 갔다. 장시는 선교사들이 선교 활동을 가장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였으며, 기독교의 급 속한 전파와 더불어 선교 거점으로 발전했다. 초기 내한 선교사들 역 시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면 주로 장시(場市)를 중심으로 한 장돌뱅이, 즉 보부상 혹은 장꾼들의 행로(行路)를 참고해 순회전도 여행을 해 나 갔다.
장시는 경제적인 기능 뿐 아니라, 각종 문물의 소개와 전파, 주민 상호간의 정보교환, 음식과 구경거리를 통한 오락기능 등 경제외적인 기능들도 상당부분 갖고 있었다. 신지식과 신문물라고는, 다른 지역 을 다녀 온 시장 상인이 전해주는 것이 유일했다. 이처럼 교통, 통신 이 발달되지 않은 전근대 사회에서 장시는 경제적 기능뿐 만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종교를 포괄하는 기능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의 장시는 19세기말 입국한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앙을 전도 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로 여겨졌을 것이다.
미북장로회 선교사 블레어(William N. Blair, 방위량)는“장터는 사 람들을 만나기 좋은 장소이며, 복음을 전하기 안성맞춤인 곳이다” 라고 했고, 마펫(Samuel A. Moffet, 마포삼열)이 1890년 10월 20일에 선교 본부의 엘린우드 박사에게 보는 편지에서도 전도 활동에 있어서 장시가 지닌 중요성에 대한 지적이 잘 나타나 있다.
"장날, 안악에 도착했습니다. 장터는 인근 전 고장에서 온 수천 명의 사람들로 무척 붐볐습니다. 매 닷새마다 이런 장터가 서며, 이렇게 장 이 서면 거리에서 전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한국 개신교의 첫 세례인과 처음 신앙공동체 역시 만주의 국제무역시장‘고려문’을 통해 수용됐다. 즉, 로스(John Ross, 나약한)가 조선 상인 백홍준, 이응찬을 무역장시 고려문에서 처음 만나『예수셩교젼셔』를 번역할 수 있었던 것이다.
"봉황성에서 나는 고려문이 열릴 때까지 엿새 동안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동안 나는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전도를 하고 성경책과 전 도책자를 팔았다. … 봉황성에서 나는 여러 명의 상인들에게서 초대 를 받았는데,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우리의 교리에 대하여 알고 싶다고 하면서 나에게 교회를 하나 세워달라고 하였다,"
1872년 매킨타이어 (John MacIntyre, 마륵 태)와 로스가 조선 상인 을 만남으로써 조선으 로 향하게 된 복음의 씨 앗은 상인들의 등짐에 실려 드디어 조선의 국 경무역 시장이며 의주 만상의 거점인‘의주’에 도착했다. 의주 남문 높다란 2층 누각에는 조선의 첫 관문이라는 뜻을 가진 ‘해동제일관 (海東第一關)’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말 그대로 조선의 국경 도 시이자, 중국으로 통하는 첫 고을이었다.『예수셩교젼셔』라는 성경을 번역한지 10년, 출판한지 5년 만에, 이미 한국은 복음의 문이 열려 수 만 권의 성경이 반포됨으로써 로스가 믿고 바랐던 ‘풍성한 수확’이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고 있었다.
반포사업의 주역은 한국인 개종자들과 상인 출신 권서(매서인)들이었다. 이들은 의주의 관문에서 시작되는 다섯 갈래의 큰 길을 이용하여 마을마다 성경을 짊어지고 들어가 복음의 씨를 뿌렸다. 다음 자료는 스톡스 선교사의 장터 전도 모습이다.
"4, 5명의 사역자들이 한 그룹을 이루어 시장이 서는 곳에 가서, 작 은 무리가 모일 수 있는 적당한 곳에 서서, 간단한 복음성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곧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 러면 성경구절을 몇 구절 읽고 짧은 설교를 한다. 쪽 복음서들을 팔고 전도지를 나누어 준 후에 개인적으로 전도를 한다."
구체적으로 장터에 세워진 초기교회는 어떤 것이 있는지 서울의 경우를 살펴보자.
1910년 이전에 세워진 서울의 감리교회 중에는 종교교회, 자교교회 (자골 교회), 수표교교회처럼 교회 이름의 끝 자가‘교(橋)’자인 경우 가 많다. 다리 옆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다리 옆에는 현방(顯房)이라 는 푸줏간이 있었다. 특히 현방은 소를 잡아 고기를 판매하는 곳으로, 고기를 매달아 판다고 하여‘현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공교롭게도 점포가 주로 다리 옆이었다. 푸줏간 일에 참여한 사람들은 백정이었 다. 백정은 천민 중의 천민이었다. 또한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사대 문 밖은 당연이 교회가 세워지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17세기 중엽 이후 서울의 인구 증가는 대단한 것이었다. 인조(仁祖) 26년(1648)에 95,569명이던 것이, 정조 원년(1777)에 이르면 197,957 명에 이르게 된다. 중인들은 중부인 청진동에 거처하고 있었고, 군교 들은 동대문과 광희문 사이, 그리고 이곳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던 왕십리에 많이 살았다. 사회의 밑바닥에서 호구(糊口)를 이어가 던 상인(常人), 천인들의 주거지역은 성벽 바로 밑 또는 성 밖의 변두리였다. 그들은 이런 곳에 수호 또는 수십 호씩 집단으로 거주했다. 또 가끔 지방에 큰 흉년이 들어 서울로 거지 노릇을 하러 온 사람들 중 일부가 사대문 밖이나 다리 밑에 움막집을 짓고 살았다. 청냉교회 (광희문교회)는 바로 그 곳에 세워진 것이다. 동대문 교회와 수구문교 회(청녕교회, 광희문교회)도 바로 그런 곳에 세워졌다.
이러한 조건 아래 교회가 세워지기는 지방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 다. 남부지역의 대표적 대 장시가 열렸던 전주 서문 밖 교회 역시 장 터에 세워진 교회였다. 이중환의『택리지』는 전주에 대해서,“전주는 여러 골짜기의 물이 들어와 관개함으로 땅이 기름지고, 물산이 풍부 하다. 또한 화물을 실은 배가 만경강을 왕래하여 추천(楸川)이나 어은 골까지 닿는다. 그리하여 전주는 경성과 다를 바 없는 큰 도시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말 일제기에는 더욱 상업활동이 번성하였다. 1899년 군산항이 개항되고 1910년 전주가 전라북도청 소재지가 되면 서 더욱 그랬다. 전주 서문교회가 세워진 이유도 그 입지 조건이 여행 객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었기 때문이고, 서문 밖에는 장이 이루어 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시는 모두 사대문 밖에 섰고 상인들과 장 인(匠人)들은 성문 밖에 거주했다. 이 때문에 초기 서문교회 교인들은 주로 평민·천민·상인들이었고, 초기의 개종자들은 장터나 인근 마을을 다니면서 전도했다.
병원이 세워지는 곳이야말로 민중들이 운집하는 장소여야 했다. 최초의 서양식 병원(광혜원)을 연 의료 선교사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시란돈)은 민중을 향한 의료 사업을 통해 민중 전도에 힘쓴 선교사였다. 그는 보다 적극적으로 민중과 접촉하기 위해 1894년 궁 궐과 외국 공사관이 즐비한 정동을 떠나 남대문 근처의 빈민 지역인 상동으로 병원을 옮겼다. 병원을 옮기기 위해 그가 선교 본부에 보낸 보고서에는 이러한 그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병원이 성공하려면 가장 필수적인 것이 대중의 요구에 맞도록 번잡 한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동에 있는 남대문 병원은 제 판단 으로 본다면 여러 가지 면에서 유익합니다. 그 곳은 민중이 있는 곳인 반면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외국인 거주 지역입니다."
남대문안 상동은 시장 지역이었고, 따라서 상인과 노동 계층이 주 로 살고 있었다. 정동에 있는 시병원에도 양반 아닌 민중계층이 찾아 왔지만, 아무래도 지역적 환경이 민중에게 개방적이지는 못했다. 양 반 동네인 재동(북촌마을)에 있던 제중원이 조선후기 약국 밀집지역인 남대문안 구리개로 옮긴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으며, 역시 정동에 있던 감리교 여성병원 보구여관도 시장통인 동대문 안으로 옮겼다. 청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소민병원이 처음에는 탑동(일신여고 부 지) 언덕 꼭대기에 세워졌으나 환자가 기피하자, 결국 현재의 청주제 일교회가 세워진 청주시장통으로 진료소를 이전했던 것이나, 충남지 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공제의원이 영명학교가 위치한 산 위가 아닌 공주시장 한편에 세워진 것도 모두 비슷한 맥락이다. 이는 모두가 선교전략상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여 민중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시장 혹은 장시의 역할에 주목한 결과였다.
(사진 - [위] 1899년 장로교 아담스 선교사가 대구 시민들에게 전도하고 있다. / [아래] 자전거를 타고 전도여행 중인 감리교 스웨어러 선교사)


오늘날 가장 대표적인 이웃사랑 실천으로 인정받고 있는 구세군 자 선냄비가 한국에서 시작된 것은 1928년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1928년은 가뭄과 뒤늦은 홍수 피해로 많은 곳에서 양곡을 추수하지 못한 흉 년이었다. 당시 한국 구세군의 박준섭 사령관은 불우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두고 보기만 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따라서 구호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더욱 집중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박사령관 은 일제 당국과의 교섭을 통해 ‘성탄 자선냄비’를 이용해 대중 모금을 할 수 있다는 승인을 받
아 냈고, 크리스마스를 전후한 12월15일부터 31일까지 20개소에서 한국 최초의 자선냄비 모금을 시작했다.
모금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약 850원이 모였다. 이 돈으로 구세군 본영 근접한 건물에 급식소를 차려 매일 120명에서 130명에게 따뜻한 밥과 국을 무료로 제공했다. 지방에서도 모금활동이 펼쳐져 모금한 돈을 극도로 빈곤한 마을을 돕는데 사용했다.
1928년 시작된 자선냄비가 구세군 사회사업의 대표적인 사례로 여겨지고 있지만, 사 실 한국 구세군의 사회사업은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있어 왔 다. 1916년에 이미 사회복지시 설인 여자실업관이 설립된 것 을 감안하면, 구세군의 사회 사업은 그 이전에 시작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또한 1918년 1 월과 2월부터 구세군은 긴급 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구 호를 목적으로 ‘급식소 및 장작배급소’를 설치했다. 이곳에서는 여성과 아동들에게는 따뜻한 식사 와 쉴 공간을 무료로 제공했고, 남성들에게는 장작 패는 일을 하게 한 뒤 일정 분량의 일을 하면 숙소를 제공했다. 이 사업이 시작된 첫 주에만 559명에게 무료식사가 제공됐고, 400가정에 연료를 공급했다. 또한 43일에 걸친 긴급구호사업을 통해 1,186 가족, 2,536명에게 식품 과 연료를 제공했다.
구세군은 긴급한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구호사업에 앞장서곤 했다. 1922년 여름에는 일찍 시작된 무더위와 장마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다. 장마로 인해 곡식들의 피해가 커 가격이 폭등한 것은 물론이 고,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다. 특히 한반도 북부 지역의 피해는 더 욱 심해서, 한 마을에서 70명이 목숨을 잃고 마을 전체가 파괴되기도 했으며, 다른 마을에서는 천 호가 넘는 집들이 침수되고 수백 채가 떠 내려가기도 했다. 구세군은 피해 지역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조사해 다각도로 구호활동에 나섰고, 많은 한국인들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았다. 한 홍수 피해자가 보내온 편지의 내용을 보면, 구세군의 활동이 수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됐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감사하며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는 여러분의 노력이 더욱 커지 기를 바랍니다. 또 여러분 모두가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제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아이들의 목숨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1924년 11월에도 홍수가 난데다가 추위마저 일찍 찾아와 얼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등 긴급 구호활동이 필요해졌다. 구세군은 임시 구호활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 본영에서 이를 시작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공식적으로 일제 당국의 모금 허가를 받지는 못했지 만, 언론을 통한 광고가 효과를 발휘해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이어졌다. 이런 일화도 있었다. 경성 3영문의 노상섭 정위가 물건을 사러 상 점에 들어가 상점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상점 주인이 50원을 쾌 척하며 이렇게 말했다 .
"구세군 사령관의 편지를 신문에서 읽었는데, 조선의 가난한 사람을 도우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알게 돼 기쁩니다. 나는 4년 전에 이 사 업을 시작해 지금까지 성공을 했습니다. 내일 저녁 우리 친구들을 불러 기념잔치를 하려고 했는데, 이 편지를 읽고 나서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여기 잔치하려고 마련해 둔 50원을 드리니 구세군에서 나보다 더 잘 사용해 주기 바랍니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나서 준 사람들의 도움으로 구세군은 12월 초 경성 시내에서 1,000명에게 무료 급식을 제공하였고, 12월 26일에도 1,000명의 빈민에게 따뜻한 점심을 제공했다. 그리고 서대문정 일정 목 91번지에 빈민구제소를 설치할 수 있었다. 성탄절 다음날부터 밤 이면 빈민들이 와서 음식을 먹고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이 다. 첫날 이 구제소를 이용한 사람은 20여명에 불과했지만, 한 달이 지나서는 매일 150여명으로 늘어났다. 애초 50명 수용을 목표로 했던 구세군은 인접한 집 3채를 더 빌려 되도록 많은 사람이 숙식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구세군은 소년원(후생학원)과 소녀원(혜천원)도 운영했다. 그 중 후 생학원의 설립과정을 살펴보면 구세군의 사려 깊고 헌신적인 이웃사랑의 모습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
1918년 말 서울에는 수많은 소년 걸인들이 있었다. 그 중 한 소년 이 일본인 사업가 고바야시의 가게 밖에서 얼어 죽은 채 발견되는 일 이 발생했는데, 고바야시는 구세군을 찾아와 소년들이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하며 그 비용을 기부했다. 이를 계기로 구세군은 12월 31일 소년 걸인들을 위한 특별한 활동을 진행했다. 겨울철 추위가 매섭게 기승을 부리던 때에 소년단 활동대(Scouting Party)를 구성해 밤거리에서 추위에 떨며 노숙을 하고 있는 소년 걸인들을 찾아 나선 것이다.
첫 번째 수색에서는 두 세 명의 소년 밖에 찾아내지 못했지만, 이때 찾아낸 소년 중 한명이 탁월한 안내자 구 실을 해 주었다. 작은 구덩 이나 땅굴, 생선시장에 버려 진 생선상자, 양곡 시장 안의 쓰레기 더미, 낡은 쌀 포 대 등에서 발견된 소년들 중 에는 이미 거의 혼수상태에 빠진 경우도 있었다. 구세군 소년단의 헌신적인 수색작업 이 없었다면 얼어 죽었을지 도 모르는 이 소년들이 구세군 사관학교의 남는 방으로 안내됐다. 소년들은 이발을 하고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에서 오랫동 안 목욕을 즐겼다. 그동안 그들이 입고 있던 넝마조각 같은 옷들은 소각됐고, 목욕을 마치고 난 뒤에 깨끗한 옷을 받았다. 소년들 스스로도 서로를 보면서 새롭고 깨끗한 모습에 즐거워했다. 1919년 1월1일 새벽 2시30분, 이들은 따뜻하고 넓은 방에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소년들이 모여 서로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소년들 중에는 그 배후에 아이들을 감금 하고 구타하면서 도둑질과 구걸을 시키고 나아가 그렇게 얻은 수입마저 착취하는 어른들이 있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구세군은 아이들에게 글과 산수를 가르치고 매일의 양식을 얻을 수 있는 정직한 방법들을 알려주기로 결정하고, 곧바로 아이들에 대한 교육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사업을 더욱 효과적이고도 지속적으로 하 기 위해서는 소년들을 위한 영구적인 숙소와 작업장이 필요했고, 이 것이 1923년 12월3일‘후생학원’설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후생학원 개원식에서 사회를 맡은 신태빈 사령관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이 시설이 불행한 소년들에게 대단히 유익이 되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그리하여 예전에 걸인이었던 이 소년들이 악과 범죄로 다시 떠내려가는 대신에 매우 쓸모가 있고 근면 한 시민이 되도록 도울 것이며, 또한 이 시설과 그들이 태어난 이 나라의 자랑거리가 되도록 할 것입니다."
구세군은 일제 당국과 기타 기관들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돌봄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던 시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써 그 사회적 책임을 다해 왔다.
(사진 - [위] 서울 정동의 옛 구세군사관학교 전경 / [아래] 한국 최초의 구세군 자선냄비[광화문 광장, 1928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