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한국에 살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와 정착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사회 문화 전반 에 걸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흔적은 정신, 문화, 물리적 측면 곳곳에 남아 있다. 건축도 예외가 아니다. 기독교의 전래와 성장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한국 건축문화의 근간을 흔드는 큰 영향들이, 한반도 전역에 걸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근대시기 급변하는 한국 상황 속에서 눈에 띄는 물리적 환경의 변화 가 나타났고, 평온한 우리의 자연 경관에 세워지는 건축물들에서 그 변 화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한국에서 전개된 건축의 근대화는, 실용주의 성리학에 기반을 둔 수원성의 축조과정이나, 개화운동에 기반을 둔 외래 문물과 건축의 도입 등에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 들어온 외래 건축으로는 일본을 통한 관공서, 금융시설 등의 건축과 천주교에 의한 성당 등의 건축, 외국인 상인들에 의한 호텔 및 공장 등의 건축, 그 리고 기독교에 의한 교회, 학교, 병원, 주택 등의 건축을 들 수 있다.
기독교에서 지은 건축물들은, 서양의 건축문화를 순수한 형태로 도 입하면서 미국 등의 선교사와 한국교회가 함께 건축의 주체가 돼 지어졌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기독교 건축의 남다른 특징은 또 있다. 사실, 일본 정부에 의해 지어진 건축물에는 변형된 서양건축(和洋式 建築)이 제국주의적 양태로 나타나 있다. 옛 서울역, 한국은행 본관 등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기독교 건축은 민간에 의해 선택 적으로 한국적 토착화와 더불어 한양절충식, 서양식, 근대주의 건축 등 다양한 표현으로 나타났다. 한양 절충식으로 지어진 강화성공회성당, 강화온수리성공회성당, 청주성공회성당 등은 지금도 남아 있다. 이것은 한국 건축을 통해 한국의 고유성을 드러내고, 또 서양식 건축을 지을 경우에도 정동감리교회, 승동교회, 대구제일교회, 청주제일 교회, 경북안동교회 등에서 볼 수 있듯 고딕양식을 주제로 선택함으로써, 일본 정부에 의해 이루어진 제국주의적 양식을 반대하는 입장 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 건축에 있어 먼저 교회 건축을 살펴보자. 교회 건축은 서울 을 비롯한 각 지역선교 거점인 지방도시에까지 폭넓게 확장돼 나갔다. 서울의 새문안교회, 정동교회, 승동교회, 연동교회, 서울 안동교회를 비롯하여, 대구읍교회, 부산 초량교회, 군산 구암교회, 전주 서문교회, 목포 양동교회, 청주읍교회, 안동교회, 광주 양림교회, 순천 중앙교회 등과 북한 지역의 솔내교회, 평양 장대현교회, 선천읍교회, 강계읍교회, 선천남교회, 재령읍교회, 평양 창동교회, 원산교회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역에 교회가 지어졌다. 이처럼 수많은 교회가 지어짐으로써, 지역사회에 큰 문화적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과 소망을 가져다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이러한 대규모 건축행위를 통해 한국 교인을 단결하게 하고, 또 미국인 선교사나 한국인 목사의 지도에 따라 교회건축에 참여 한 한국 교인의 정신과 기술이 서양인과 의사소통을 하는 장을 형성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대규모의 교회 건축은 하나의 역사적 과정이었으며, 우리는 이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겨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기독교 학교건축의 경우는, 기독교 정신과 서양의 제도화 된 교육을 담당하는 그릇으로서 뿐만 아니라 그 건축적 규모와 양식과 기술에 있어서, 그것이 한국 근대건축에 미친 영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 학교 건축은 초등과정, 중등과정, 고등과정을 포함하면 전 국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서울의 배제학당, 이화학당, 경신학교, 정 신여학교, 배화학당,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교 등과 대구의 계성학교, 신명학교, 전주의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목포의 정명여학교, 광 주의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청주의 청남학교, 안동의 계명학교, 순천 의 매산학교, 북한 지역의 평양 숭실학교, 선천 보성여학교, 재령 명신학교, 선천 신성학교, 강계 영실학교 등이 기독교에 의해 지어졌다. 그 리고 일본 제국 정부에 의해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교육령이 발효된 이 후에는, 각 거점선교지의 성경학교와 유치원 등 다변화된 교육기관으로 확장되면서 다양한 교육의 양태를 보여 준다. 기독교는 이를 통해 식민 지 한국의 미래 동량을 배출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건축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초기에는 한양절충식의 건축양식을 사용하면서 친한국적인 토착화를 표현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대구 계성학교 아담스관, 대구 계성학교 맥퍼스관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제 2차와 제 3차 조선교육령이 발동한 이후에는, 규모 적인 측면을 해결하기 위해 기술적 차원에서 서양의 고딕양식과 조지 안 양식이 주로 채택됐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학교 건물로는 대구 계성학교의 헨더스관과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관, 스팀슨관, 아펠젤러 관이 지금도 남아 있고, 조지안 양식으로는 서울 정신여고의 세브란스관(구관), 순천 매산중학교 매산관, 광주 수피아여고 윈스브로우관, 청주 퍼디기념성경학교 등이 현존한다.
이처럼 기독교 학교 건축에서 고딕 양식 등을 채택한 것은 이후 한국의 독립적 재원으로 설립된 중앙학원과 고려대학교의 초기 건축에서도 고딕양식을 채용하면서 한국적 축조기술로 이어지는 데에도 영향을 미 쳤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 학교 건축은 선교를 목적으로 세워진 교육시설을 짓는 일이었지만, 일본인 공립학교와는 그 표현 양식과 건축개념에 있어 확연한 차이를 보였으며, 나아가 한국인이 독립적으로 설립한 많은 사립학교에도 같은 철학을 갖도록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셋째로 기독교 병원은 사실 한국인들에게 의료행위를 통해 선교를 할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고, 따라서 주된 기능은 의료 행위에 있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목적은, 한국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하는 형식 에 있어서 치료를 통한 감흥을 이끌어 내고, 이를 통해 보다 깊이 있는 교감을 갖게 하는 데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건축적 양식은 기독교 학교건축과 마찬가지로 초기엔 한양절충식 으로 접근함으로써 한국인에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청주 던컨 기념병원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일제 강점기 조선의료령에 따라 일정한 규모 이상의 시설을 갖추기 위한 서양 건축양식의 기독교 병원들이 각 선교 거점지역에 건축됐으며, 이 병원들이 오늘날까지 그 전통을 이어오는 주요 의료기관으로 성장했다.
기독교 병원은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 대구 동산병원, 전주 예수병 원, 목포 프렌치 기념병원, 광주 그래함 기념병원, 청주 던컨 기념병원, 안동 성소병원, 순천 알렉산더병원, 북한지역의 선천 미동병원, 평양 연 합기독병원 등 각 지역마다 세워졌다. 복잡하고 세밀한 건축적 설계가 필요한 병원건축을 통해 지역사회에 건축적 영향을 지대하게 미친 것이 사실이고, 또 외래 진료뿐만 아니라 의료 선교사들의 순회 진료 행위를 통해 한국 기독교 성장의 바탕이 된 것 역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선교사들이 살았던 주택의 경우는, 초기에는 한국의 전통가옥을 매입해 서양인의 생활에 맞게 변형해 사용하던 방법과, 처음부터 서양식 주택을 짓고 서양식 생활방식을 직접 도입한 방법으로 나눌 수 있다. 각 지방에 대한 기독교 선교를 위해 한국의 전통가옥을 개조해 사용하다가 한양절충식 복합주택을 건축했다. 이렇게 지어진 청주 포사이드기념 주택, 대구 스윗처 주택, 청주 밀러 주택 등이 아직 남아 있다. 1930년대에 들어서서는 전 세계적인 근대 건축의 경향 이 한국에도 들어온다. 하지만 이러한 양식을 따르는 건축행위는 일 본 건축가와 소수의 한국인 건축가들이 주도했고, 선교사들은 서양의 건축양식, 즉 조지안 양식, 고딕양식, 미국 식민지 양식 등을 따라 주택을 건축함으로써 시대적 흐름의 한 축을 이어갔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남아 있는 광주 윌슨 주택, 서울 연지동 선교사 주택 등이 이러 한 흐름을 보여 준다.
이런 경향은 서울에서 언더우드 주택을 비롯한 대부분의 선교사 주택에서 나타나고, 대구의 스윗처 주택, 블레어 주택 등에서도 볼 수 있다. 다만, 평양의 마펫 주택은 한국 전통양식으로 건축해 오랫동안 사용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거생활을 어떻게 건축적으 로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아주 중요하다. 따라 서 서양 선교사가 한국 기독교에 미친 주생활 문화는, 우리 주생활 문화의 관성이 지속적인 유전인자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매우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기독교가 한국 근대건축에 미친 영향은, 우리를 둘러싼 외적 환경인 일본 제국주의의 강제 속에서도 한국인으로서의 정신과 문화와 생활을 유지하고 또 한국인의 민족적 지속력을 확보하는 데 매우 지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진 - [위] 성공회 강화읍교회[1900년 경] / [아래] 평양 기홀병원)


한국 조정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경계하며 러시아에 대해 근접한 태도를 보이게 되자, 일본은 그 배후에 명성황후가 있다고 보고 황후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주도 속에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데 성공했다. 미우라는 일본군을 동원 하여 궁궐을 포위하고 일본에서 건너온 자객들을 풀어 황후를 시해했다. 이것이 을미사변이다.
미국 공사 알렌(Horace N. Allen, 안련)은 조선이 근대화되기 위해 서는 청나라를 꺾은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알렌은 이런 생각으로 조선 정부와 일본 사이의 신뢰관계를 위한 중재자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알렌과 조선 정부의 신뢰를 배신하고 을미사변을 일으킨 것이다.
황후의 죽음을 보고받은 고종은 신변에 큰 위협을 느꼈고, 복수를 해주는 사람에게 자신의 상투를 잘라 짚신을 삼아 주겠다는 한탄을 할 만큼 비통에 잠겼다. 게다가 고종은 아내를 죽인 일본인들에게 포 위된 채 경복궁 안에 연금된 처지였다. 그의 신변에 어떤 일이 닥칠지 알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때 고종의 청을 받은 미국 공사 실의 주선으로 애비슨(Oliver R. Avison, 어비신),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 게일 (James S. Gale),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헐버트(Homer B. Hulbert, 할보), 존스(George H. Jones, 조원시)는 매일 저녁 왕의 서 재 겸 집무실인 집옥재(集玉齋) 가까운 건물에서 미국 군사고문 윌리 엄 다이(William M. Dye) 장군과 함께 거의 7주 동안 교대로 권총을 차고 고종의 침소 근처에서 야간 경비를 서기도 했다. 고종은 일본인 들이 자신을 노리고 있지만 서양인들이 보호해 준다면 쉽지 않을 것 이라 여겨 미국 공사 실에게 선교사들의 입궐을 요청했다. 왕의 요청 을 접한 선교사들은 을미사변 직후 일어난 동정심에서만이 아니라, 이것이 왕실에서 그간 베풀어 준 호의에 보답하고 조선에 대한 그들 의 우의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아스(Lillias S. Underwood)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남편이나 우리나 모두 국왕에 대한 봉사가 즐거웠다. 우리는 가장 높은 사람에게서부터 가장 낮은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친구임을, 또 정의로운 지배자임을 입증하는 것이 기뻤다. 특히 우리 가 기뻤던 것은, 복음의 전파를 금지하는 법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불충하다고(disloyal) 불렸던 사람들이 이제는 임금에게 가장 충성하는 사람들임을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고종의 친미, 친러파 신하들과 소수의 서양 선교사들이 죽음의 공포로부터 왕을 해방시키고자 왕의‘이어(移御)’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기지만 실패하고 마는 사건이 일어나고 만다. 이 사건이 1895년 11월 28일에 일어난 이른바‘춘생문 사건(春生門事件)’이다. 춘생문은 경복궁 북동쪽에 위치한 문으로, 경복궁 서쪽으로 나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고종은 친일 내각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으며, 그들의 시선을 두렵게 의식했다. 따라서 고종은 귓속말과 몸짓, 혹은 언더우드의 손 에 몰래 작은 메모지를 쥐어주는 방법을 통해 자신의 뜻과 계획을 전 달했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 고종은 독살 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껴 삶은 계란이나 깡통 채로 들여와 그의 눈앞에서 직접 개봉된 농축우유 외에 궁에서 제공하는 음식은 일체 먹지 않았다.
그러자 명성황후와 특히 가까웠던 러시아 공사의 부인과 릴리아스 는 고종을 위해 번갈아 가면서 음식을 장만했다. 두 사람이 마련한 음 식은 큰 양철통에 넣어져 단단한 미국 자물쇠로 잠긴 채 매일 고종에 게 배달됐다. 음식이 담긴 양철통은 입궐하는 관리 편으로 보냈지만 열쇠는 반드시 언더우드가 매일 직접 가지고 가서 고종에게 전해 주었다. 그리고 애비슨은 음식에 독이 들어있지는 않은지 살폈다.
고종은 경복궁에서 탈출해 자신이 신뢰하는 미국과 러시아의 공사 관이 밀집된 정동 지역으로 가고 싶어 했다. 고종의 이러한 탈출 의지를 처음 접한 사람이 바로 언더우드였다. 고종은 언더우드에게 자신 의 은밀한 탈출의지(意志)를 기록한‘밀지(密旨, Tiny Note)’를 손바닥 에 전했다. 그리고 이런 메시지는 정동에 모여있던 외국인들에게 비 밀리에 전해졌다.
정동에서는 경복궁에 갇힌 고종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을 은밀히 수립해 결국 1895년 11월 28일 자정을 기해 왕을 탈출시키고자 했다. 거 사 당일 윤웅렬은 아들 윤치호에게“오늘 밤 충성파 인물들이 경복궁을 침입하여 국왕을 구출, 해방시키겠다. 친일 내각 수중에 갇혀 있는 국왕을 보호하기 위해 습격하며, 외국 공사들에게 이 사실을 통고하기 바란다”는 말을 전했다. 윤치호는 즉시 미국과 러시아 공사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외국인을 동원해 경복궁으로 입궐하여 국왕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해 줄 것을 당부했다.
윤치호의 보고를 받은 실 공사와 알렌은 즉시 국왕을 보호하기 위한 대비책으로 언더우드에게 입궐을 요청했다. 언더우드, 애비슨, 헐 버트 3인의 일행은 경복궁에 도착해 침전 건청궁의 곤녕각으로 달려 갔다. 국왕은 무사했고, 도착을 알리자 즉시 반갑게 맞아 주었다. 고종은 왕의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도 밤새 자신을 경호해 줄 것을 그들 에게 당부하면서, 침전 근처에 있는 다이 장군과 다른 두 명의 장교들 은 숙소에서 대기할 것을 요청했다.
자정 쯤 한발의 소총소리가 울리고 뒤이어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렸다. 총소리에 놀란 다이 장군과 선교사들은 벌떡 일어나 권총을 빼들고 국왕 침전으로 달려갔다. 국왕은 선교사 일행을 보더니 안도감을 보이면서 선교사들의 손을 잡고 밤새도록 함께 있자고 말했다. 선교 사 일행은 고종을 옆에서 지키며 구조대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던 구조대가 경복궁으로 진입하는 와중에 중충원 의관인 안경 수가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이 사실을 알려 버렸고, 호위대장 이진호 가 변심해 군부대신 어윤중에게 밀고, 결국 이도철 등 10여명이 현장 에서 체포되고 나머지는 도주하면서 국왕 구출작전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거사가 실패로 끝나자 친일내각의 김홍집 총리는 여러 각료들과 함께 국왕을 찾아와 국왕을 좀 더 안전한 곳으로 모셔 가려 했다. 김홍집이 고종의 손을 잡고 끌어당기자 국왕은 애비슨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고, 군부대신 어윤중이 왕세자를 잡자 왕세자는 언더우드의 손을 잡고 늘어졌다. 애비슨과 언더우드 일행이 꼼짝 않고 서있자 김홍집 일행은 고종과 왕세자로부터 선교사들 떼어 놓기 위해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소득 없이 돌아갔다. 선교사들은 옆방에서 밤새 교대로 불침번을 서기로 결정했다.
춘생문 사건이 실패하자 체포된 관련 주모자들은 사형에서 태 100대, 징역 3년 등의 처벌을 받았고,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 중이던 을미사변 관련 주모자들은 증거불충분으로 전원 석방됐다. 정동파 인사들 은 재빨리 미국과 러시아 공사관 혹은 선교자 집으로 피신했고, 일제 는 이‘국왕탈취사건’에 서양인이 관련되어 있음을 적극적으로 선전 했다.
비록 춘생문 사건은 실패했지만, 황후시해 이후 발생한 일본 및 친 일세력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인 저항의 움직임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이후 ‘아관파천’으로 이어져 나름의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그 리고 개신교 선교사들은 경복궁에서 고종을 지키며 일본에 대항했는데, 이는 훗날 헐버트가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에 파견되고, 언더우드 의 아들(Horace H. Underwood, 원한경)이 3·1운동 이후 일제가 저지른 제암리 학살 사건 등을 전 세계에 알리며 규탄한 것을 비롯, 선교사들이 직접적으로 한국 민족운동에 뛰어들게 되는 밑거름이 됐다.
(사진 - [위] 고종의 서재로 사용되었던 집옥재.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이 곳에 유폐되었다. / 을미사변의 현장인 건청궁 곤녕각)


헤이그 밀사 사건은 헐버트(Homer B. Hulbert, 할보)와 상동파가 구체적으로 계획한 일이었다. 헐버트는 육영공원(영어학교) 교사로 1886년 7월 한국에 왔다가 1891년 12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귀국한 뒤 오하이오 주 퍼트남 군사아카데미에서 교사를 하고 있던 헐버트는, 1892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온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아편 설라)의 권유를 받고 한국 선교사로 다시 오게 된다. 미북감리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1893년 9월에 다시 내한, 동대문교회 담임을 맡았다. 그는 또 미북감리회에서 운영하는 삼문출판사 운영의 책임을 맡아 문서선교를 주관했다. The Korean Repository란 영문 한국학 연 구지 인쇄와 운영도 맡아, 이를 통해 한국의 역사, 풍속, 언어 등에 관 한 자신의 연구 논문들을 발표하기도 했다.
헐버트는 한국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대한제국 말기에 고종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고 활동했다. 그의 구체적인 정치 참여는 1895년 11월 28일 일어난 국왕탈취 미수사건‘춘 생문 사건’을 통해 이루어졌다.
한국의 정치 문제를 깊이 이해하고 있던 헐버트는, 당시 교회가 상 류층 청년 지사들을 수렴할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이 유능한 청 년들에게 근대적인 사회개혁 의식을 고취시키려 했다. 이를 통해 자 연스럽게 기독교의 복음을 접목하고자 모색한 것이 바로 YMCA운동 이었다. YMCA를 한국에도 설치해 청년들의 의식을 개조하고, 이들을 미래의 지도자로 양성하려 한 것이다.
YMCA운동을 사회운동의 성격을 띤 청년운동으로 발전시키려 했던 헐버트의 입장은, 이 운동을 순수 신앙운동으로 만들고자 한 언더우 드의 입장과 긴장 관계를 형성해 초창기 YMCA운동에 혼돈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YMCA운동은 헐버트의 입장으로 방향을 잡게 됐 고, 헐버트는 YMCA 창설의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그는 1903년 한국 YMCA(황성기독청년회) 초대 회장에 선출됐다. 여기에 전덕기, 이상재, 신흥우, 최남선, 윤치호, 김규식, 조만식 등이 적극 참여했다.
1905년에 접어들어 가츠라-테프트 밀약(1905. 7), 영일동맹 체결 (1905. 8), 포츠머스 조약 등으로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이 구체화돼 갔 다. 이에 한국 정부는 미국의 도움으로 이런 일본의 획책에서 벗어나 고자 미국 정부에 밀사를 파송키로 했고, 고종의 신임을 받던 헐버트 가 밀사로 임명됐다. 헐버트 의 밀사 정보를 입수한 일본 은 떠나기 전날 그에게 미국 행을 포기할 것을 종용하면 서 포기의 대가로 막대한 경 제적 혜택을 주겠다고 제안 했다. 그러나 헐버트는 1905년 10월 중순경 비밀리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려 하고 있으며 이는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력에 의해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과 미국이 한미수호조약에 따라 한국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는 고종의 친서를 품 고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가 워싱턴에 도착하는 날(11. 27)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으 로 만들려는 계획을 서둘러서 을사늑약을 체결, 외교권을 박탈했다. 미국은 가츠라-테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인하는 입장 을 취하고 있었으며 일본의 을사늑약 전문도 이미 와 있었다. 이로 인 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려는 헐버트의 수차례에 걸친 시도는 끝내 무산됐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일본을 거스르면서 한국 문제에 관계하 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미수호조약이 미국의 국익 앞에서 휴지조각이 돼버린 것이다. 다음은 헐버트의 미국 정부에 대한 기록 이다.
워싱턴 밀사 활동에 실패한 그는 1906년 6월 다시 한국으로 향하던 중,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이를 고종과 YMCA 회 원들에게 전했다. 전덕기 목사는 고종에게 친서를 받아 YMCA 회원의 중심인 상동파와 함께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헤이그 밀사 파견을 모의 했다. 고종은 일본의 한국 강탈을 세계에 호소하고 열강의 공동 보호 를 구하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 이준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로 파견했다. 헐버트는 헤이그 밀사보다 먼저 헤이그로 가서(1907. 4) 이들 세 밀사들의 활동을 도왔다.
이같은 헐버트의 적극적인 정치참여 태도는“민중과 관련된 모든 것이 정치적이다. 한 나라의 종교는 정치에 대해 분명한 관계를 갖는 다”는 그의 소신에 따른 것이다. 일본이 헐버트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는 1907년 5월 8일 본국의 소환 형식으로 한국을 떠 나야만 했다. 헐버트의 한국사 책 The Passing of Korea는, 을사늑약 이후 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짐에 따라 세계만방에 이 조약의 부당 함을 알리기 위해 저술된 것이다.
상동파는 상동교회 담임목사였던 전덕기를 중심으로 형성된 민족 운동가들을 가리킨다. 정동교회가 엘리트 선교 전통을 갖고 있었던 반면, 상동교회는 미북감리회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시란돈) 이 설립한 교회로 한국 감리교회의 민중 선교 전통을 세운 교회다. 그 리고 스크랜턴의 뒤를 이어 상동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전덕기는 근대 민족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전덕기는 1904년 상동청년 학원을 설립했는데, 그 설립 목적을 “하나님 공경하는 참 도로써 근 본을 삼아 청년으로 말하여도 벼슬이나 월급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세상에 참 유익한 일꾼이 되기를 작정하자는 데 있다”라 고 밝히고 있다. 이후 이 모임은 구연영, 양기탁, 주시경, 이승만, 이 상설, 이준, 박용만, 이필주, 김진호, 주시경, 최재학, 이동휘, 이회영, 이시영 등으로 이른바 상동파라는 민족운동 세력으로 발전해 적극적 으로 민족 교육을 주도해 나갔다.
전덕기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무효 투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감리교 청년회인 엡웟회 전국연합회를 소집했다. 당시 평안도 진남포 엡웟회 총무였던 김구와 이준, 이동녕, 조성환 등 청년 지사들도 전국 각지에서 상동교회로 모였다. 이들은 정치집회 성격을 띤 기도회를 개최했는데, 이때 기도회를 주도한 전 덕기, 김구, 이동녕, 조성환 등은 기도회를 마친 다음 궁궐로 나아가 도끼를 메고‘조약 반대 상소’를 올렸다. 비록 일본 헌병대에 의해 해 산당해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이들의 상소는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상동청년회의 애국정신도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나아가 전덕기와 정순만은 평안도 교인들과 더불어 을사 5적 암살을 모의하 기도 했으나, 모든 계획이 일제 경찰에 의해 사전 감지돼 실패하고 말 았다. 김구는 그의 자서전『백범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이때에 나는 진남포 엡웟청년회의 총무로서 대표의 임무를 띠고 경 성대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대회는 상동교회에서 열렸는데 표면은 교 회 사업을 의논한다 하나 속살은 순전히 애국운동의 회의였다. 의병 을 일으킨 것이 구(舊)사상의 애국운동이라면 우리 예수교인은 신(新) 사상의 애국운동이라 할 것이다."
이후 전덕기 목사는 미국에서 일시 귀국했던 안창호와 함께 1907년 4월 상동파를 중심으로 항일 비밀 결사 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한다. 그 는 105인 사건에 연루돼 갖은 고문을 받고 감옥에 갖힌 뒤 병을 얻게 된다. 나중에 병보석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고문후유증은 계속돼 결 국 출옥 후 2년 만인 1914년 39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민중들이 상동교회로 구름같이 모여들었는데, 그 장 례 행렬이 10리가 넘게 이어질 정도였다.
(사진 - [위] 상동교회 / [아래] 헤이그 특사,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나면서 청나라가 병자호란 이후 한국에 미치던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은 소멸 됐다. 독립협회는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자주독립을 염원하는 애국청년들이 주도해 결성한 단체이다. 독립협회는 독립문을 건립하고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등 조선이 자주적 시민국가로 자라나기를 바라는 염원을 표현하였다. 독립문은 청나라 사신들이 당도하면 우리나라의 대신들이 나가 맞던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것으로, 청나라로부터의 자주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준다.
독립협회는 갑신정변을 주도한 서재필과 초대 주미한국공사의 비서관인 이상재, 주한미국공사관의 통역관 윤치호 등 인이 주축이 돼 설립했다. 1896년 4월 7일부터는 순한글의 독립신문을 발간해 자주의지를 표명했고, 1896년 11월에는 영은문 옆의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축한 뒤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개선문 형태의 독립문을 건립했다.
독립협회에는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외에도 안경수, 이완용 등 정부 요인들이 다수 참여했다.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가 시작될 때 회장은 안경수, 위원장은 이완용, 그리고 위원은 이상재, 김가진 등 8명이 각각 맡았다. 남궁억, 송응빈 등 10명은 간사원, 그리고 서재필은 고문에 취임했다.
회장인 서재필은 민중들에게 민주주의 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연설을 많이 했다. 서구에서 유입된 자유민권사상과 시민의 천부적 권리 등을 강조함으로써 근대적 시민사회로 나아가는 길을 열기 위해 노력했다. 1897년 월에는 황태자가 직접 쓴 독립관이란 현판을 걸었고, 이로써 독립협회의 세력은 더욱 커지게 됐다. 그해 7월에는 간사원을 폐지하고 한규설, 박정양 등 고위 관리들이 대거 참여하는 위원으로 통합을 단행, 외연을 확대했다.
하지만 아관파천 사건이 일어난 뒤 협회 내의 친러파들이 움츠러들었고, 일부 위원들이 정부의 실정을 공격하는 발언들을 잇따라 토해내자, 고위 관료 출신 위원들은 협회활동에 많은 부담을 느낀 나머지 소극적으로 변했다. 회장이 이완용을 거쳐 윤치호에게 넘어가고, 부회장에 이상재가 취임한 뒤에는 독립협회의 주도권이 신진 개화세력에게 넘어갔다. 더붙어 배재학당의 협성회와 광무협회 등 학생회원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독립협회는 신진 개화 민권단체로 진화한다.
독립협회는 민족주의를 고양하고 남침하는 러시아세력을 배척하여 국가의 이권을 보호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면서, 영토수호를 위한 활동과 민권신장을 위한 계몽활동에 주력했다. 그러면서 독립협회의 정치적 입장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러시아에 대한 경계에서 반일사상으로 굳어져 갔다. 협회는 근본적인 자주정신을 요청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자주적 의식이 없어 청, 러시아, 일본과 같은 외세가 조선을 넘보게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1898년 2윌에 회원들은 러시아의 영향력을 조정에서 줄이라는 상소를 이상재, 이건호를 통해 제출했고 월에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한국의 자주권을 확립하라는 공개장을 외무대신에게 발송했다.
1898년 여름에는 부패한 관리틀을 일소하라는 시폐상소문을 올렸고, 의정부 참정 조병식에게는 사직권면서를 발송했다. 두 번째 시폐 상소는 이용익에게 행해졌다. 그리고 회원들을 동원하여 인화문 앞에서 연좌데모를 벌였다. 다수의 회원들과 수많은 학생들이 데모에 참여했기 때문에 마침내 고종은 그 요구를 수용하게 된다.
협회는 민중의 참정권에 관심을 기울였다. 만민공동회를 열면서 윤치호, 박정양 등 고위 관료 출신 외에 박성춘과 같은 백정 대표도 연설을 하게 했으며, 관민협의회를 구성해 일반 민중들이 정부시책에 참여하게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헌의육조와 같은 국정개선안을 재택하고 이를 정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만민공동회는 정부가 이런 건의를 수용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공동회를 해산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1차 만민공동회 직후부터 독립협회를 타도하기 위한 음모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우선 독립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고종을 폐위시키고 윤치호나 서재필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려 한다는 것이다. 조병식, 한규설 등 수구파 대신들을 중심으로 황국협회가 조직됐고, 이들은 전국의 보부상들을 모아 독립협회가 왕실을 타도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그리고 1898년 10 월 보부상 300명을 동원해 정동에 있는 본부를 습격했다.
1898년 11월 5일에 독립협회 회원들에 대한 일제 검거가 시작됐다. 이상재를 비롯한 14 명이 체포되고 윤치호 등 다른 간부들은 피신했다. 그러자 만민공동회가 다시 열려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이 이루어지고 고종도 이를 수용할 의지를 보일 무렵, 보부상 천 명이 동원돼 만민공동회를 습격했다. 그리고 박영효와 서재필을 귀국 시키라는 중추원의 탄원이 정부에 전달되자 공화정을 위한 쿠데타의 의심을 품은 정부는 독립협회에 해산명령을 내리게 된다. 독립협회와 횡국협회의 투쟁은 한동안 지속되며 두 달여 동안 거리에서 혈전을 벌였다. 이로 인해 김덕구 등 독립협회 회원들이 죽고 100여 명이 부상당했다.
1899년 월에는 중추원도 해산명령을 받았고, 독립협회 출신들도 체포당했다. 최정식은 사형당하고 이승만은 종신형을 받았다. 1901년 검거령이 다시 발동해 신흥우 등이 체포됐고 이완용은 조선협회가 정부를 전복하려 한다고 조작한 개혁당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이상재, 김정식, 이원긍, 유성준, 홍재기, 이승인 등이 체포돼 한성 감옥에서 옥살이를 했다. 이들은 모두 1904년에 석방됐는데, 이들이 옥살이를 하는 동안 한성감옥에서 회심히는 사건이 일어난다.
독립협회 출신 애국청년들이 감옥에 갇혔다는 이야기를 들은 벙커(Dalziel. A. Bunker, 방거),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 헐버트(Homer B. Hulbert 할보) 등은 이들을 방문해 위로를 전하고 이들에게 신약성서와 기독교서적을 전달했다. 이중 이승만이 가장 먼저 이 책들을 읽고 기독교로 회심했다. 그리고 이상재, 김정식 등 한성감옥에 갇힌 이들이 차례로 기독교로 회심했다. 형구를 쓰고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선교사들의 방문은 위로가 됐고, 성서공회에서 발간한 책들을 읽으면서 기독교 신앙을 절실하게 체험한 것이다. 이들은 회심 후 성서공회에 서신을 보내 감사의 뭇을 전하고, 옥중에서 겪은 고초와 신앙의 위로를 시문으로 남기기도 했다.
한성감옥 회심 사건은 한국의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형성되는 계기가 됐다. 이들은 출옥 후 독립협회 시절 가지고 있던 근대적 시민국가의 꿈을 상동청년학원에서 다시 이어가게 된다. 그리고 상동청년학원이 교회의 정치화를 우려한 선교사에 의해 해산된 후에는, 신민회로, 그리고 YMCA로 이어지는 기독교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큰흐름을형성하게된다.
(사진 - [위]독립협회의 독립문 기공식 장면[1896년 11월 21일 ) / [아래]완공된 독립문과 독립협회 사무실로 쓰인 옛 모화관)


1910년 국권피탈 이후 일제는 영구적으로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삼으려는 전략을 수립하게 된다.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해 토지를 일본으로 귀속시키려 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전 분야에 결친 일본 귀속 작업을 단행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독립을 향한 의지를 가진인물이나 단체들을 해체시켜 저항세력을 근절하려 하게 되는데, 그 대상으로 주목한 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되자 일제는 한국을 곧바로 식민지로 합병했고, 총통감부를 총독부로 바꿔 초대총독으로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취임한다.
105인 사건이란, 1910년 12월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철교 낙성식에 참가하기 위해 신의주로 갈 때 한국 기독교인들이 총독 암살을 기도했다는 내용의 날조된 사건이다. 일제는 1905년에 을사늑약을 체결한 후 1907년에는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고 보안법을 선포했다. 그리고 1908년에 사립학교령과 학회령을 발령하고 1909년 출판법, 1910년 집회결사금지법 등을 통해 한국의 모든 단체들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개방적 단체인 교회와 기독교학교들은 어쩔 수 없이 존속하게 했다.
그러던 중 1910년 안악사건이 발생했다. 안악사건은 안중근의 종제인 안명근이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자금을 모으던 중 그 사실이 발각되자 일제가 황해도 지역의 애국적 기독교인사 160명을 대거 검거한 사건이다. 그라고 한일합방에도 불구하고 서울YMCA가 굳건하게 버틸 뿐만 아니라 학생 하령회를 개최하여 학생, 청년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시거는 것을 보고 일제는 1911년 기독학생들을 일제 검거했다. 그러면서 검거자 수를 700여명까지 늘얀 후 이들에게 엉뚱한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즉 1910년 12월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철교낙성식에 갈때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권총을숨겨, 가는길에 암살하려 했지만 열차가 정차하지 않고 통과했고, 그 후 낙성식이 끝난 후 데라우치 총독이 선천에 와 맥륜 선교사와인사를 나눌 때 암살하려 했지만 역시 헌병들의 삼엄한 경계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피의자로 제포된 이들은 이승훈을 비롯해 안태국, 양기탁, 임지정, 유동열 등과 차 하령회 대회장인 윤치호, 양전백, 양준명 등 하령회 강사들었다. 이틀은 체포된 뒤 온갖 고문을 받았다. 죽장으로 맞는 것은 물론, 물고문과 손톱 발톱이 다 빠져나가는 고문을 한겨울에 받았던 것이다. 고문 기술자들이 오히려 지친 나머지 피의자들을 사흘 동안 단식시켰다. 먹을 것은 고사하고 물도 주지 않아 물을 달라는 호소가 줄을 이었다. 이런 고문으로인해 김근형과 정희순이 사망했다.
피의자들은 대부분 날조된 자백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1912년 3월에 가서야 고문이 일단 끝났다. 강제에 의해 서명한 자백서로 주모자인과 가담자 120명이 재판에 회부 됐다. 재판 과정에서 피의자들의 항거가 시작됐다. 윤치호는 이 자백서가 고문으로 날조된 것임을 밝혔고, 뒤이어 양기탁, 유동열 등도 자백서가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제출된여러 증거물을 통해 기소의 부당성이 객관적으로 입증됐지만, 재판부는 1912년 10월 기소장이 발부된 500여명 중 17명만 무죄라고 선고하고 나머지 105명에게는 유죄를 선고했다. 105인 사건’ 이란 이름은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옥관빈을 비롯한 18명은년형을 선고받았고, 이덕환 등 39명은 6년형을, 그리고 오대영 등 42명은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에 전원은 선고에 불복하여 상고했다. 심에서 99명은 무죄로 석방됐고, 결국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임치정, 윤치호, 옥관빈 등 6명이 4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게 됐다.
일제는 105인 사건을 통해 기독교인들을 분쇄함으로써 식민 통치를 항구화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일제는 또 선교시들과 암잘사건을 연루시카려 하기도 했다. 맥륜, 마렛, 로버츠, 샤록스 등이 배후에 있다고 날조했을 뿐만아니라, 거사가 실패한 후에도 다시 기회가 올것이라며, 선교사들이 기독교인들을 선동했다고 한 것이다. 선교사들은, 기독교인들은 물론 선교사들이 암살 모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것을 강하게 부인하는 한편, 데라우치 총독에게 사건을 원천적으로 재조사 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YMCA의 부회장인 윤치호가 이 일에 연루돼 고통을 겪는 것을 해외 기독교 단체에 알렸다.
특히 YMCA의 총무 질레트(Phillip L. Gillett, 길례태)는 이 사건이 혹독한 고문을 통해 자백서를 쓰게 했다는 사설과 기독청년회의 하령회에서 학생들과 총독암살을 모의했다는 것은 완전히 날조된 것임을 복로했다. 질레트는 이 사실을 폭로한 대가로 추방당하고 말았다. 질레트는 중국 YMCA에서 활동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계속 도왔다. 105인 사건은 YMCA를 굴복시거고 선민회를 와해시키기 위한 공작이었던 것이다.
105인 사건에서 일제가 실제로 해산시키려던 것은 비밀애국단체인 신민회였다. 선민회는 대부흥운동이 교회를 휩쓸던 1907년 2월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애국독립단체이다. 그 뿌리는 상동교회에서 전덕기가 설립했던 상동청년학원에 있다. 안창호는 서북의 기독청년을 중심으로 독립을 추구하는 애국단체를 건립하려 하였다. 신민회의 강령은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의 고취, 독립을 향한 국민역량 축적, 교육기관 설립과 청소년교육 진흥, 각종 산업을 육성해 부패한 사상과인습을 타파하는 것과 유신한 국민을 육성해 자유문명국을 세우는 것이었다.
조직으로는 총감독, 총서기, 재무, 집행원 등을 두었다. 의결집행기관으로 중앙평의원을 두고 연통제를 이용해인 이상을 서로 알 수 없는 비밀조직을 결성했다. 전국적인 조직망은 물론, 해외까지 조직을 확대했다. 선교육 지식층, 서북의 상공인, 서북의 기독교 민족주의자, 상동감리교회 출신, 개선 유학 민족주의자, 양반 출신 정객과 관료 출신들이 주된 구성원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어서 기독교 항일단체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신민회 내에는 안창호가 주도하는 온건개혁세력과 이동휘가 주도 하는 무력항쟁파의 두 노선이 공존했다. 계몽적 입장에서는 실력양성과 교육활동을 강조했고, 민족산업 육성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무력항쟁을 주장하는 이동휘 노선이 힘을 얻게 됐다. 매국 친일인사의 암살과 무관학교 설립 등, 강력한 항일운동이 신민회 내부에서 힘을 얻게 되면서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은 자연스레 그 힘을 잃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1911년에 105인 사건이 터지면서 신민회의 실체가조금씩 드러나게 된다. 일제는 사실 신민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악사건을통해 알게됐고, 105인 사건을 일으켜·서북의 기독교인들을 대거 체포해 혹독한 고문을 통해 자백을 받아 냈다. 고문 끝에 전체 기소자 123명 중 57명이 신민회 회원인 것을 알아낸 것이다. 그러나 비밀조직인 데다가, 회원들도 서로를 잘 몰랐기 때문에 그 이상은 밝혀내지 못했다.
일제는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를 해체하려 했지만, 신민회의 정신은 오히려 더욱 강화돼 나갔다. 신민회에서 다뤘던 자주적 민주 · 민족국가의 수립이라는 이상은 계속 이어져 1919년 3.1운동으로 계승 됐고, 상해 임시정부의 정신적, 이념적 기반이 됐다. 임시정부를 통해 한국은 독립 후인 1948년 민주주의 공화정을 실시하고 사회적 기반이 든든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제헌헌법을 제정하게 된다. 이 제헌헌법의 정신이 바로 신민회에서 구체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은 이처럼 일제강점기 새로운 민족을 만들고자 한 신민회의 이상을 통해 구체화됨으로써 한국의 근대사에 기여했던 것이다.
<사진설명> 105인 사건 당시 일제 경찰에 연행 되는 신민회 회원들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