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한국에살다


(사진 - 전밀라 목사)


1955년 3월 13일에는 한국 감리회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 여성운동사에 기록될 만한 일이 일어났다. 한국인 여성 목사 2명이 배출됐기 때문이다. 서울 정동제일교회서 진행 중이던 중부연회 마지막 날에 류형기 감독의 집례로 다른 남성 목회자 8명과 함께 전밀라(全密羅, 1907-1985), 명화용(明和蓉) 두 전도사가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당시 전밀라는 인천 창영교회에서 부목사로 시무하고 있었고 명화용은 화성군 부곡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 이들은 1953년에 준회원으로 허입 됐으며 매년 자격 및 과정고시를 거처 2년 만에 정식목사 안수를 받았다. 


전밀라와 명화용의 목회는 수년 전부터 시작됐다. 전밀라 목사의 경우, 1936년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했지만 목회는 1년 앞선 1935년부터 원주지방 순회전도사로 시작했다. 이후 원주제일교회, 서울 남산 교회, 인천 갈월교회 등에서 꾸준히 목회를 해왔다. 그녀가 목사 안수를 받았을 때의 나이는 47세였다. 명화용 목사는 36세 때인 1949년에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지방 부곡교회를 맡아 시무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먼저 여자목사제도를 채택하고 여자 목사를 배출 한 교회는 감리회이다. 물론 구세군이 부부가 함께 사관으로 훈련받고 임명되는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여성 성직자나 한국인 여성으로서 최초의 여성 성직자 배출은 구세군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구세군을 기준으로 본다면 한국에 여성 성직자가 들어온 것은 구세군 한국개전의 해인 1908년으로 훨씬 거슬러 올라가며 첫 한국인 여성 성직자의 배출 역시 그렇다. 하지만 여성이 단독으로 성직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1930년대로, 감리회의 여선교사들이 목사안수를 받으면서 한국에서 여성이 단독으로 성직자가 되는 것이 가능해졌다. 


1930년 기독교조선감리회를 구성하고 단일 교회로 출발한 감리회는, 1931년 5월 발행된 「교리와 장정」에서 교직자의 자격에 “남녀의 구별은 없음”이란 문구를 명시함으로써 여자 목사제도를 승인했으며, 실제로 그해 6월 14일 제1회 연합연회에서 한국에서 활동하던 베어 (Blanshe R. Bair, 배의례)를 비롯한 14명의 여선교사들이 양주삼 총 리사에게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1932년 3월에는 아펜젤러(A. R. Appenzeller, 아편설라4)등 10명의 여선교사들이, 1937년 에는 스미드(Euline E. Smith, 시율인)가 목사안수를 받았다. 


감리회의 교직자 자격은 출발 초기부터 여성에게 열려 있었다. 그러나 해방 전에는 여선교사들만이 목사안수를 받았을 뿐 한국인 여자 목사는 배출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해방 전까지도 남존여비의 전통적 풍습을 탈피하지 못한 한국의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다. 제도가 갖추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 사회는 한국인 여성이 목사가 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회적 통념은 여전히 부정적 이었다. 남성 목회자와 똑같은 조건에서 똑같은 수고를 하고 있음에도 여성 목회자들에게는 ‘서리 교역자’, ‘협동 회원’이란 명칭이 고작 이었다. 감리교 목회자로 정당한 권리와 주장을 펼 수 있는 정식‘연회원’자격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여성 목회자들이 현장에서 겪는 고초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여성 목회자라는 이유로 받는 소외감과 시련이 늘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1955년에 여성 목사를 안수한 기독교대한감리회와 달리, 다른 교단들에서는 여성 목사의 안수가 오랫동안 허용되지 않았다. 감리회보다 우세한 교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보수적인 신앙 전통을 견지하고 있던 장로회의 경우 폐쇄적인 입장을 오랫동안 고수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경우 1956년에 여성 장로제도를 채택하고 1974년에 이르러서야 여성목사가 허용됐으며, 1977년 한국 최초의 맹인 여목사 양정신이 목사 안수를 받아 비로소 여성목사가 배출됐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은 이보다 한참 늦은 1995년부터 여성 목사 안수를 허용하여, 1996년 여성목사가 배출됐다.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은 2003년 4월에 여성목사를 허용했고,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는 2004년 6월 23일에 여성 목사와 장로 안수를 허용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백석)은 2012년 4월 여성 목사를 최초로 배출했다. 이외에도 하나님의성회(순복음)과 일부 군소교단 및 초교파 교단에서 여성 목사 안수를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개혁), 침례회에서는 아직도 여성 목사 안수를 허용하고 있지 않다. 


전밀라와 명화용을 시작으로 이 땅에 배출된 여성목회자가 대한민 국 전체 목사 가운데 차지하는 비율은 5%를 넘지 않는다. 여전히 목사는 여성의 금기지역이라는 통념이 한국 사회에 남아 있고, 최초의 여성목사가 배출된 후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목회 현장의 보이지 않는 장벽은 여전히 그 힘을 잃지 않고 있다.


아무튼 두 목사의 안수를 계기로 굳게 닫혔던 한국인 여성 목사 배출의 문이 열리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1955년 7월 19일 제15회 여선교회 전국대회가 정동제일교회에서 있었다. 개회 예배 중에 성만찬 예식이 거행됐는데, 여선교사 쿠퍼, 올리버, 스미스 목사와 함께 전밀라와 명화용 두 한국인 여성 목사가 집례를 했다. 이 때 한국 감리회 여성들은 처음으로 한국인 여성 목사의 손에서 떡과 포도주를 받아 먹었다.  


(사진 - 1930년 기독교조선감리회 연합연회에서 양주삼 총리사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미국인 여성선교사들 / 전밀라와 명화용 두 여성 목사 안수식 거행 장면[1955년])


(사진 - 공주 우유급식소의 부엌 풍경. 우유 급식은 저소득층 아동 복지 사업의 시초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봄에, Baby Show가 마련되었다. 이것은 사업의 풍성함을 가져왔다.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엄마들이 왔다.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1000 여명의 엄마들이 아기들을 데리고 왔다. 말끔한 옷을 입혀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신체검사는 하루 종일 진행되었다. 수백 명의 아기 들이 밤까지 찾아왔다. 마침내 아무도 실망하지 않았다. 일본 인형가게가 동이 났고 900여개의 인형이 전부 팔렸다. 이런 것들이 아이들 에게 주어졌다. 물론 이것은 단지 제스추어에 불과할 뿐이었고 엄밀히 말하자면 사업은 파산이었다. 반대로 광고는 아주 잘되었다."


위의 이야기는 1930년대 태화복지관에서 있었던 베이비 쇼, 즉 ‘우량아 선발대회’의 모습이다. 이렇듯 베이비 쇼가 마련되기까지 선교사들의 한국 유아들에 대한 노력이 적지 않았다.


「동아일보」1926년 8월 24일자에 보도된 1921년부터 1925년까지 의 서울의 5세미만 사망률을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통계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인 유아 사망률이 49.6%, 일본인 사망률이 35.9%로 나타나 있다. 사망원인은 소화기 병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고, 그 다음이 호흡기 병, 신경계 병 순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소아(小兒)의 병들은 먹지 못하여 생기는 영양 결핍에서 비롯된 것 이었다. 


선교사들의 유아복지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인 1920년대 까지 유아들에 대한 이렇다 할 프로그램이 없었다. 베이비클리닉과 같은 유아복 지사업을 통해 공주지역 엄 마와 아이들의 기본적인 필 요를 채워나간다 하더라도 영양부족이나 질병으로 사망하는 유아들은 어찌할 도 리가 없었다. 태화사회복지관 로젠버거 선교사의 1930년 보고서는 영 양결핍으로 인한 유아 사망률의 심각성을 잘 알 수 있다. 


"지난 7년간 아동사업을 해온 결과, 우리 아이들도 잘만 먹이면 6개 월까지 완벽하게 성장함을 알 수 있었다. 한국에서 아동 사망률이 대단히 높은데 1~2살짜리 아기들이 특히 많다. 바로 그 시기가 아이 성 장의 기초가 되는 때이다.… 또한 한국에서는 10살 미만 아이들이 조 사율(早死率)이 50%에 이르고 있다. 그러니 어째서 이렇게 많이 죽는지 살펴봐야하지 않겠는가? 미국과 비교하면, 한국에서는 무려 75% 의 손실을 입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아이들의 영양상태가 아주 심각하다는 것인데, 아이들이 우유로 양육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주의 마렌 보딩 선교사 역시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이 문제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녀는 보고서에서 “3살 이하 아기에게 하루에 1~2병의 우유를 먹일 수 있다면 그들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다. 


우유가 서양 사람에게는 익숙한 음식이었지만,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서 ‘소젖’을 먹는 다는 것은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유를 먹기 시작한 것은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부터였다. 한국사람이 우유를 처음 마시는 장면은 1893년 닥터 홀이 평양에 머무는 동안 있었던 에피소드에 등장한다. 어느 날 저녁 닥터 홀은 여인숙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여관에 있던 조선인 손님들은 그가 마시는 것이 술은 확실히 아닌 것 같은데 무엇인지 궁금해 했다. 더 이상 호기심을 참지 못한 손님들은 그게 뭔지 맛 좀 보자고 했다. 홀은 이때가 조선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한잔씩 주었다. 조선은 차를 잘 마시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차를 마시지 않았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이 새로운 마실 것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홍차 외에도 가지고 있던 연유에 설탕을 타서 그들에게 주었다. 그들은 우유를 맛있게 받아 마셨다. 그런데 소젖으로 만든 것이라고 하였더니 금방 역겨워했 다. 그러면서 “에이 더럽다! 소젖을 어찌 사람이 먹는단 말인가? 우리 는 그런 것은 마시지 않아!”라고 하면서 이구동성으로 항의를 하였다. 사람이므로 동물의 젖인 소젖을 먹는다는 것은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유급식을 위해서는 우유부엌(Milk kitchen)이 꼭 필요했다. 이를 위해 부엌을 갖춘 건물이 필요했지만 진료소 한 칸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우유부엌은 우유병과 우유병 꼭지를 청결하게 유지하기 위 한 소독시설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우유급식이 시작될 당시 하루에 100병의 우유를 준비해야했던 바쁜 장소였다. 


"이전부터(1925년) 몇몇 아기들을 위한 우유를 준비했었지만, 나의 정식 우유급식소는 새로 증축된 곳에서 1926년 6월에 문을 열었다. 이 사업부서는 내게 많은 부담 뿐 아니라 많은 즐거움을 주었다." 


1926년 6월에 정식 우유 급식소를 열었던 것이다. 이것이 한국에 서는 처음으로 시도된 우유급식소였다. 우유급식소를 열기 1년 전부 터 이미 공주지역 아기들에게 우유를 공급하고 있었다. 이제는 버젓하게 건물을 가진‘밀크스테이션’을 열었던 것이다. 


"우리는 120명의 사랑스러운 등록된 아기들이 있다. 30명에서 40명 사이의 아기들이 주중에 클리닉을 방문하고 있다. 우리의 우유급식소 아기들은 일주일에 한 두 번의 방문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만일 한 달 동안 클리닉에 오는데 어려움이 있다면 그들은 다른 간호사나 나의 방문을 받는다. 지난 해 동안 한국의 전체 사망률 35%와 비교해 볼 때, 우리의 복지를 받는 유아 사망률은 5%였다. 우리의 사업이 지불 한 것 아닐까?"


공주에서 시작된 유아복지사업과 밀크스테이션은 다른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제물포에서는 1924년 공주와 같은 해에 시작되었으며, 해주 의 경우 1928년 5월에 19명의 엄마와 아기가 참석한 가운데 “Mother and Babies Welfare”가 처음 시작되었다. 서울 태화복지관에 도 1928년 우유급식소가 로젠버거(Elma T. Rosenberger)에 의해 설치 되었다. 


유아복지사업의 종류는 다양했다. 건강아기 진료소, 산전사역, 가정방문, 학교건강검진, 위생강연, 자모회, 무료목욕소, 우유-음식 소, 1년에 한번 간호사들을 위한 건강학원, 예방접종, Out-patient obstetrical, 육아법에 관한 간호와 교육, 1년에 한번 베이비 주일 등이 있었다. 


다음은 1938년에 펴낸『Fifty Years of Light』에“Public Health and Child Welfare Work In Seoul”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글이다. 


"유아복지 사업은 한국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마치 매우 작은 시작으로부터 자라난 씨앗처럼... 사업이 시작되었던 15년 전, ‘Public Health’라는 단어조차 알려지지 않았었다. 지금은 잡지나 신 문 전면을 장식할 정도이다. 그리고 정기적인 건강 프로그램이 라디오를 타고 흐른다."


(사진 -  대전제일교회에서 설립한 유아복지시설인 대전영아원[1939년] / 해방 후 재건된 대전영아원의 모습)


(사진 - 윤심덕)


동아일보 1926년 8월 5일자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극작가 금우진과 성악가 윤심덕이 下關(하관)을 떠나 부산으로 향 하던 關釜聯絡船(관부연락선) 德壽丸(도꾸주마루)이 대마도 앞을 지 날 무렵 서로 껴안고 현해탄에 몸을 던져 情死 (정사)하다."


두 사람은 극작가 김우진과 소프라노 윤심덕(尹心德, 1897~1926)이었다. 당시 국내의 모든 신문은 두 사람의 선상 실종을 ‘조선 최초의 선상(船上) 정사(情死)’로 대서특필했다. 당대의 ‘엄친아’와 조선 최고의 소프라노였던‘스타’가 함께 죽은 것에 대한 해석은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윤심덕이 실종된 직후, 그녀가 마지막으로 취입한 노래가 유성기에 실려 곳곳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苦海)에/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헝가리의 민족 작곡가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다뉴브강의 잔물 결’에 가사를 붙인 노래 ‘사(死)의 찬미’는 당시 조선인들이 두 사람의 죽음에서 받은 연상(聯想)과 결합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역사비평」 1992년 여름호는 ‘식민지 근대화와 신여성’을 기획을 통해, 김명순, 나혜석, 최승희, 윤심덕 등 대표적인 신여성들의 삶과 예술을 재조명하는 한편, 우리 역사 속에서의 ‘신여성’의 위상을 평 가하고자 했다. 이 기획에서 ‘최초의 여류’로 꼽혔던 신여성들은 대개의 경우 당시 여성에게 가해졌던 봉건적 굴레를 벗어나려고 한 점 에서는 선각자적인 면을 보여 주었지만, 일부 여성은 서양문화를 거의 맹목적이다시피 추종하면서 일제의 식민지 체제에 대해서는 현실안주 또는 현실순응적인 면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현실에 대한 두 가지 대립되는 가치기 준을 안고 있는 근대화 지상주의자의 면모를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한편, 최초의 여류성악가 윤심덕에 대해 노동은 교수는 ‘식민지 근대화와 신여성 : 최초의 여가수 윤심덕-허무 주의의 비가-’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윤심덕이 살다간 1897년에서 1926년은 국권회복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이라는 한 축과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한 축을 이루고 있는데 더 큰 역사를 이룰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회와 일제의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페시미즘의 극치로 살다 갔다”고 비판했다. 


윤심덕에 대한 분분한 역사적 평가는 뒤로하고, 그녀와 기독교와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을 배경으로 자라났다. 


이두현이 1966년에 쓴『한국신극사연구』는 윤심덕의 기독교 배경을 “기독교 가정의 둘째딸로 태어난 윤심덕의 집안은 아버지가 가계 점원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고 전도사인 어머니가 외국인 병원에 서 사무원으로 일하는 등 경제적으로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일찍이 감리회 신자가 된 인연으로 로제타 홀(Rosetta S. Hall, 허을)이 운영하는 평양의 광혜여원에서 전도 부인 겸 간호 보조원으로 일했다. 윤심덕 4남매는 교회의 보호와 가르침 아래 기독교문화 속에서 자라났다. 


윤심덕은 열한살에 진남포 삼숭학교에 입학해 박인덕, 김일엽과 단짝 친구로 지냈다. 1932년 7월호「삼천리」(제4권 제7호)에 실린 ‘佳 人春秋(가인춘추)’에서 박인덕은“서당을 그만두고 진남포에 처음 생긴 三崇學校(삼숭학교)에 윤심덕, 김일엽, 윤성덕 등과 책보를 끼고 어깨동무해서 나란히 다녔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여기서 윤성덕은 심덕의 동생이다. 


공교롭게도 훗날, 윤성덕을 뺀 세 여인 모두 시대의 통념을 깨는 삶을 살게 된다. 박인덕은 청년 부호 김운호와 결혼했다가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자 조선 최초로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했고, 김일엽 은 네 차례 결혼에 실패한 뒤 수덕사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됐다. 


윤심덕이 열네 살 되던 해에 집안이 진남포에서 평양으로 이사하자, 그녀도 평양 숭의여학교로 전학했다. 평양에 이주한 이후 그녀의 모친과 홀의 인연으로 홀은 윤심덕의 후견인이 됐다. 윤심덕은 숭의여학교를 졸업 한 후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 에 편입했다. 숭의여학교는 총 독부에서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학교가 아니어서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면 인가받은 학교에서 2년 간 더 공부해야 했다. 의사가 되는 게 어떻겠느냐는 홀의 권유와 지원으로 평양여고보에서 공부하면서 의학을 해보려고도 했지만, 의사가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음을 깨닫고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편입하여 교사가 됐다. 후에 총독부 관비유학생으로 성악가로서의 꿈을 향해 나아갔다. 


그녀의 동생 윤성덕의 이력은 심덕과 좀 다르다. 3.1운동 때 이화학 당의 학생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했고, 1920년 6월에는 이화학당 교사, 학생 홍애스더, 김함라, 윤성덕, 김폴린, 김애은, 김신도 등으로 구성 된 ‘이화 7인전도대’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지방을 순회하면서 낮에는 농민들에게 전도지를 돌리고, 밤에는 교회나 학교건물에서 전도 강연회를 했다. 그 후 윤성덕은 성악공부를 위해 미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이화여자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932년 2월호 「삼천리」 는 두 자매에 대한 소식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윤성덕씨! 세상 사람의 기억에 아직도 새로울 성악가 윤심덕 여사 의 동생으로 일찌기 그 학교 음악과를 마친 뒤 미국으로 건너가서 여 러 해 공부하다가 귀국하여 지금 모교에 교편을 잡고 있는데 활발한 그 성격, 드물게 보이는 미모, 천품을 타고난 미성으로 그 학교의 총 애를 받고 있는 중이다. 양의 나이도 아직 30 전임으로 전도양양한 이화 꽃동산의 일꾼이라 할 것이다."


윤심덕은 죽기 수개월 전인 1925년 12월 31일, 일본 이토(日東)레코드 회사와 전속계약을 맺고 우리말로 된 가요 7곡을 최초로 취입했다. 


윤심덕은 조선여성으로는 유교적 풍토 속에서‘성악 공부는 기생 짓, 그림은 환쟁이, 연극은 광대’로 업신여김 받던 시대에 등장한 최초의 소프라노이며 각광을 받던 미모의 음악가였다. 1931년「동광」 6월 호에 실린‘半島 樂壇人 漫評 (반도 악단인 만평)’이라는 문예평론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과 악단의 기원에 대해서 다음 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여류가수! 故 윤심덕양이 생각난다. 확실히 그는 훌륭한 천품을 가 졌다. 그러나 종말의「사의 찬미」만은 계획적「취입」이었는지는 모르나 음악가로서의 선곡도 작가도 아니었다. 찬미 못할 것을 남기고 간 것이 유감이다. 그리고 반도 악단의 형태를 개괄적으로 간단히 한 마디 하고 싶다. 악단의 기원-서양음악의 유입을 멀리 耶穌敎(야소교)의 수입에서 시작하였다고 볼 것이다."


(사진 - <사의 찬미> 가사지)


(그림 - 박수근, <교회풍경>, 1956)

(그림 - 박수근, <교회가 있는 풍경>, 1960)


기독교 미술

기독교미술은 기독교적인 것, 다시 말해서 성경의 내용이나 기독교 적인 사건을 주제나 소재로 삼는 미술이다.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기독교 미술은 작가가 기독교적인 정신이나 신앙의 체험으로 하는 미술 행위까지 포함한다. 기독교 미술가들이 작품을 통해 드러낸 자신들의 ‘신앙심’은 한국기독교 미술을 발전시켰다.


한국에서 처음 서양의 기법인 유화로 성화를 그린 미술가는 천주교 인 장발(張勃, 1901-2001)이었다. 그는 동경미술학교 재학 중 뉴욕으로 유학, 1925년에 콜롬비아대학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했다. 그 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서울 명동성당 안 벽면에 있는 ‘십사종도’ 가 있다. 1926년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이 작품에는 14명의 인물이 나 온다. 예수의 제자 12명 중 예수를 배신한 가룟 유다를 빼고 그 대신 맛디아를 넣었으며, 사도 바울과 바나바도 그려 넣었다. 


고학으로 미술을 공부한 박수근(朴壽根, 1914-1965)도 빼 놓을 수 없다. 박수근은 자신을 가리켜‘동양화가’라고 이 야기한 바 있다. 또한 사람들 은 그를 ‘민족의 화가’, ‘향토의 화가’, ‘서민적인 체취의 화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박수근의 회화에는 그리스도나 십자가, 사도 등의 기독교적 요소가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회화에서 성경적 가치관을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예술을 포함한 인생의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홍종명(洪種鳴, 1922-2004)은 그리스도를 주제로 일련의 초상화를 그렸다. 반 추상적인 기법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내면의 신앙 세계를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선교사로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집안 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홍재연은 정진학교 교감이자 유성리감리교회 장로로 평양에서 알려진 인사였다. 유년시절 소풍가서 보았던 능의 퇴색한 색깔로 그림을 그렸다. 황갈색, 적갈색 바탕 위에 그리스도를 표현했으며, 꽃이나 새, 물고


기나 인물을 소재로 향토적 풍물을 화면에 담았다. 홍종명은 광성고보를 졸업 한 1941년 미술 수업을 위해 일본으로 갔다. 그의 아버지가 “아들이 ‘환쟁이’가 되는 것을 완강히 반대해 처음엔 경도고등공예학교에 들어가 합격증을 집으로 부치고는 동경제국미술학교에 들어가 고향에서 두고두고 마음에 다짐했던 서양화를 공부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림 때문이 아니라, 그 배후에 존재하는 하나님 때문에 자주 캔버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에게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전통적인 먹붓 및 채색으로 사실적인 성화를 그린 화가는 이당 김은호(金殷鎬, 1892-1979)였다. 이당은 본래 세필화의 대가로서 순종 황제의 어전을 그렸던 궁중 화가였다. 어려서부터 서울 안국동 교회에 출석했고, 서화 미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삼일 운동 때 독립신문을 돌리다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일본인 서 양화가들이 한국인 미술 지망생들에게 인물화, 수채화, 유화 등을 가르칠 당시, 한국 최초의 미술교육기관인 경성서화미술원(京城書畵美 術院)을 통해 전통 화법을 배웠다. 그의 작품‘부활 후’는 한국화가로서 그가 그린 첫 성화였다. 이 작품은 1924년의 3회 조선미술전람회 (朝鮮美術展覽會)에서 수상한 작품이다. 부활 직후 그리스도와 함께 좌우에 베드로와 야고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를 그린 3폭 병풍 형태였다. 이 작품은 또 1938년 미국 플레밍출판사에서 출판한「Each with His Own Brush」라는 ‘제 3세계’미술 작품집 에 수록돼 한국을 대표하는 토착성화로 알려졌다. 이당은 이 작품을 기독교청년회에 기증, 서울 YMCA 현관에 걸려 있지만, 1950년 한국 전쟁 때 건물과 함께 소실되고 말았다. 1960년대에 들어서 기독교청 년회관을 다시 세우려는 운동이 전개됐고, 그 실무를 맡은 전택부(全 澤鳧) 총무는 이당에게 그림을 부탁했다. 이당은「Each with His Own Brush」에 실린 그림 사진을 바탕으로 30년 전에 그렸던 그림을 다시 그렸다. 이번에는 양쪽의 제자들은 빼고 그리스도만 그렸다. 이 그림을 일컬어‘황색 그리스도’(Yellow Christ) 혹은 ‘붓다 그리스도’ (Buddha Christ)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전체적으로 그림의 색깔이 아시아 색깔인 황토색(혹은 금색)으로 이루어졌고, 그리스도의 모습에 서 전통 불상(佛像)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 1914-2001)은 7세 때 장티푸스로 청각 을 잃고 이당화숙에서 김은호에게 그림을 배웠다. 6개월 만에 <널뛰기>(1931)로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입선한 후, 연 5회 입선과 연 4회 특선을 기록했다. 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나 그가 대표적인 성화를 그린 시기는 개신교 신앙인이었을 때였다. 신윤복을 연상케 하는 풍속화의 대가였던 그는 정확한 묘사력과 힘에 넘치는 달필로 많은 성화를 그렸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예수는 갓을 쓴 모습이다. 후에 김기창이 그리스도의 일생을 다룬 성화 연작을 완성한 것은 결코 하루아침의 우연한 착상이 아니다. 신앙심이 두터운 어머니 한윤명 여사의 손에 이끌려서 개성 북부 예배당에 드나들던 유년기의 김기창은 유연 주일학교에서 주일마다 나누어 주는 아름다운 성화 카드에서 예사롭지 않게 받은 감동을 이미 가슴 깊이 간직했던 것이다. 그는 그 시절 이미 그런 성화를 그리리라는 마음을 먹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김기창은 이당에게 사사를 받은, 신윤복을 닮은 풍속화의 대가였다. 이당은 애석하게도 기독교적인 작품을 많이 창작하지 못했지만, 김기창은 자신감 넘치는 선을 사용하여 많은 작품들을 만들어 냈다. 이당은 대상 인물을 재해석하지 않은 반면, 김기창은 성경의 인물들과 배경을 재구성하여 한국적 화면을 창조했다. 

(그림 - 운보 김기창 '예수의 생애' 시리즈 중 <아기예수의 탄생>) 


김기창과 더불어 기독교 역사화를 종래의 관념산수(觀念山水)나 실경(實景)을 토대로 하여 풍속화로 제작한 사람이 혜촌(惠村) 김학수 (金學洙, 1919-2009 )이다. 그의 그림‘성탄’은 민족적인 향수를 통 한 우리 조상들의 생활과 풍물에 성경적 내용을 나타낸 것이었다. 한국적 토양과 풍물과 더불어 표현되고 있는 한국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 하나하나에서 살아 숨 쉬는 공간들이 서서히 확산돼 가고 있다. 옹기종기 마을 집들이 있고, 언덕을 넘어 들판과 산천들이 아련히 펼쳐 지면서, 구름과 안개 속에 한국적 정취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이런 풍경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있다. 그는 인물화로서 예수의 생애를 부각시키기보다는, 한국 민족의 역사 적 풍물 속에 많은 군중과 더불어 있는 예수를 그렸다. 채창완 화백은, 혜촌의 그림이 ‘한국’이란 컨텍스트 속에서‘예수 사건’을 그대로 옮겨 놓으려 했으며 그것이 바로 미술과 기독교의 ‘토착화’실험이 었다고 말한다. 

(그림 - 혜촌 김학수의 한국교회사 기록화, <평양 남산현교회>, 1998) 


기독교 문학

기독교문학이란 기독교 미술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문학을 말한다. 기독교 사상을 가진 기독교인이 창작한 작품과, 겉으로는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나 속으로는 기독교의 사상과 가치관을 포함하고 있는 작품이 있다. 즉 기독교와 문학의 윤리를 함께 실은 문학이 기독교 문학인 것이다.  


‘기독교 문학’이란 개념은 낭만주의 이후에 생겨났으며, 타문학에 대해 기독교 문학이라는 하나의 대립적인 개념으로 쓰였다. 낭만주의 이래 모든 세대는 현대문학에 포용되어 있는 기독교의 본질에 관하여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기독교 문학은 문학의 순수한 정신과 사명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기독교적 주제와 명제를 다른 주제와 명제로 대치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의 이러한 대결은, 문학을 희랍 사상과 로마정신에 나타난 숭고한 문학에로 복귀시키려는 의도와 직 결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복음이 전해지는 것과 함께 다양한 장르의 기독교 문학 활동이 펼쳐졌다. 기록상으로는 1948년‘감람문학회’라는 기독교 문학인 모임이 결성된 바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활동을 중단했다 가 1954년 서울에서 전영택, 조향록, 임인수 등을 중심으로‘기독교 문학인클럽’을 조직했다. 첫 사업으로 1955년『한국기독교문학선집』을 펴냈다. 여기에 김재준의 ‘고통의 문학과 영혼불멸’이라는 평론을 비롯하여, 전영택·임영빈·김말봉·박계주·임옥인·이종환·강소 천·박두진·박목월·윤영춘·오신혜·이상로·임인수·박화목·김 도성·석용원·김경수·황금찬·윤혜성·주택익·이보라·조향록· 이주원·김형식·정하은·이대몽 등 당시에 기독교문학 활동을 하던 이들의 작품과, 작고시인 윤동주, 장정심의 시가 실렸다.『한국기 독교문학선집』에 이어 임인수의『땅에 쓴 글씨』가 출간됐고, 1956년 3월 15일에는‘미신을 지양하고 미망의 지식을 순화하는 과제를 담 당하기 위해 현대문화를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겠다’는 취지로 계간지 「기독교 문화」가 창간됐다. 하지만 이후 10여년 남짓 기독 교 문학인들은 별다른 활동 없이 서울 종로2가 화신백화점 뒷골목 전원 다방에 모여 문학토론이나 의견을 교환하곤 했다. 그러다가 1965년 박두진, 이상로 등을 중심으로 동인지『기독교 시단』이 나왔고, 1966 년에는‘한국크리스챤문학가협회’가 조직된다. 


이 글에서는 앞에 열거한 문인 모두를 살펴볼 수 없기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기독교 문학인과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전영택(田榮澤, 1894-1968)

전영택은 진남포 삼숭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2년 일본 도쿄 아오야마(靑山)학원 고등부 문과와 동대학 문학부를 1918년 졸업한 후 다시 동교 신학부에 편입했다. 그리고 이때, 한국 최초 순수 문예지 「창조」의 동인으로 참가한다.「창조」는 1919년 2월 1일 일본에 유학 중인 기독교인 문학가 5인, 즉 김동인, 주요한, 전영택, 김환, 최승만 에 의해 도쿄에서 창간됐다가 1921년 5월 30일 폐간됐다. 「창조」는 특정한 사상이나 노선을 따르지 않고 동인들의 작품을 제한 없이 실어내는 순수문예지였다.「창조」는 당시 문학계에 휘몰아치던 계몽사상의 고취를 지양하고 예술적 문학을 다룸으로써 본격적으로 현대 단편소설과 서정(抒情)이 깃든 문학작품을 소개했다. 전영택은 창간호에 처녀작‘혜선(惠善)의 사(死)’를 발표했다.


이후 전영택은 1930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그 곳에서 흥사단에 가입하면서 독립운동에도 적극 가담한다. 1932년 미국 퍼시픽신학교를 수료하고 귀국해 기독교 문서인「새사람」을 발간했다. 이용도, 이호빈 목사의 예수교회 운동에도 관여하여 기관지「예수」의 편집과 발행을 돕기도 했다.


평론가들은 그의 문학적 성격이 초기에는 자연주의적 성향을 보이다가 중기 이후로는 인도주의적이며 사실주의적 경향을 보인다고 평가하고 있다. 대표 작품으로 ‘화수분(1925)’과‘소(1948)’가 있다. 사실주의적 수법을 사용하여 따뜻한 인간애와 비극적 삶의 아픔을 그렸다. 


(사진 - 전영택, <하늘을 바라보는 여인>(1958) 표지. 이 책에는 <화수분>을 포함해 14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박두진(朴斗鎭, 1916-1998)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난 박두진 시인은 1939년 「문장」지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가장 기본적이며 제일의적인 인생문제의 해답을 기독교에서 찾으려 했다. 기독교 사상가인 선다씽 의 영향을 받으 며 성결교회의 청교도적인 생활신조에 심취했다. 시는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힘을 지닌 것으로 하나님의 가장 큰 은총 중에 하나라는 자각을 했고, 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신념을 굳혔다. 서울 근교의 산을 오르내리며 기도와 명상으로 문학수업을 쌓았고, 이를 통해 초기의 시세계를 펼쳤다. ‘향연’,‘묘지송(1936)’,‘낙엽송 (1939)’,‘의(蟻)’,‘들국화(1940)’등이 그것이다.  


1950년 전쟁을 체험한 후 발표한‘오도(午禱)’는 인간고와 원죄의 실체를 투시하면서 하나님께 죄의 속량을 절규하며 간구하는 ‘임리 (淋漓)한 상흔(傷痕)’의 기록이다. 


"타오르는 목을 축여 물을 주시고/피 흘린 상처마자 만져주시고/기 진한 숨을 다시/불어넣어 주시는/당신은 나의 힘/당신은 나의 주/당 신은 나의 생명/당신은 나의 모두"


땡볕이 내리 쬐는 광명의 광야에서 피투성이가 돼 스스로를 속죄의 제물로 바치는 가열(苛烈)한 비원(悲願)의 현장에서 신에 대한 강한 긍정과 은총을 표현하고 있다.


주요한(朱曜翰, 1900-1979)

주요한은 「창조」창간호에 시 ‘불놀이’를 발표했는데, 이것이 한국 문학사에 있어서 최초의 자유시로 기록돼 있다. 1925년에는 방인근이 주도한「조선 문단지」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에는 문학에서 발을 떼고 사업에만 전념하다가, 1954년 「동광」의 후신인 「새벽」을 창간하여 편집과 발행의 책임을 맡았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 장면 내각이 들어서면서 부흥부 장관, 상공부 장관에 취임했으나 바로 5.16으로 인해 2년 동안 가택 연금 신세가 된다. 연금된 상태에서 쓴 것이『안도산전서』이다.  


그의 문학 활동은 해방 후 거의 중단됐다. 그러나‘불놀이’,‘아침 처녀(1924)’,‘빗소리(1924)’등의 시에서 느낄 수 있는 민요적이며 서정적인 분위기는 한국 문학사에 있어서 낭만시의 첫 장을 장식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김동리(金東里, 1913-1995)

김동리는 17세까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가 도중에 불교와 유교에 심취했다. 그가 쓴 기독교 소설의 대표작으로 『사반의 십자가』와 『무녀도』가 있다.『사반의 십자가』는 영혼과 육체의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예수의 십자가 좌우에 매달린 강도 중 한명인‘사반’이라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로마 통치하의 유대 독립혈맹단으로 잡혀 예수의 십자가 옆에 달려 죽게 된 사반은 영혼보다는 현실을 중요시하고 있다. 사반은 소리친다.“먼저 네 자신을 구하고 나서 남을 구하라”고.『무녀도』는 1936년에 쓴 단편으로 한국의 초기교회와 샤머니즘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이야기는 집을 나가 방랑을 하다가 기독교인이 돼 돌아온 욱이가 무당인 어머니 모화를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김동리는 샤머니즘적 입장에서 작품을 다루고 있으나 한국교회 초기에 자주 벌어진 갈등이었으므로 기독교 문학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장정심(1898~)

장정심은 1929년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여선교회 사업부에 근무하면서 문서 사업과 전도활동을 했다. 기독교 여류시인으로서 신학교 시절인 1927년 「청년」지에 ‘기도실’,‘병상의 눈을 밟으면서’,‘주의 궁궐’,‘아버지의 분묘’를 발표했고,「백합」 지에 ‘이 잔을 받으셔요’등을 발표했다. 1933년에 첫 시집『주의 승리』가 나왔고, 이듬해에『금선(琴線)』이 나왔다. 그의 시는 민족의식과 종교 윤리의식이 강하면서도 서정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해 준다.


"높은 줄 낮은 줄/가는 줄 굵은 줄/금선은 나의 생명과 한 가지 조선 의 정을 노래하려오/찰라의 인상/오늘의 감상/내일의 명상/기쁨의 노래/햇빛과 달 빛 아래/슬픔과 즐거움이/심금의 헤치고 나오면서/조선 의 강산이 그립다 하오"


이후에도 문학 활동뿐 아니라 여성운동과 선교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 일제 말기 건강이 악화돼 6.25전쟁 전에 별세하였다.  


윤동주(尹東柱, 1917-1945)

우리는 영원한 청춘시인 윤동주를 잊을 수 없다. 윤동주의‘십자가’를 감상하며 글을 마무리 하려한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敎會堂) 꼭대기

십자가(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鐘)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幸福)한 예수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十字架)가 허락(許諾)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사진 - 윤동주와 그의 유고시집)

(사진 - 절제운동 강연회 모습, 대구, 1933)


1931년 신정 찬송가 230장에 임배세가 작사 작곡한 ‘금주가’가 실렸다.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마라. 건강 지력 손상하니 천치 될까 두렵다.

패가망신 될 독주는 빚도 내서 마시면서 자녀 교육 위하여는 일전 한 푼 안 쓰려네.

전국 술값 다 합하여 곳곳마다 학교 세워 자녀 수양 늘 시키면 동서 문명 잘 빛내리,


천부 주신 네 재능과 부모님께 받은 귀체, 술의 독기 받지 말고 국 가 위해 일할지라.

아, 마시지 말라 그 술, 아 보지도 말라 그 술,

조선사회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있느니라"


한국인이 마시는 술은 처음에는 습관의 문제였지만, 일제시기에 이르면 민족의 암울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잊으려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상황이 그렇다 할지라도 술로 세월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절제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것만이 민족의 살길이었다. 따라서 초기 한국 기독교의 절제운동은 신자들의 절제와 사회개혁을 위한 신앙운동이었다.


미북감리회는 일찍이 1903년 금주를 포함한 절제와 사회개혁을 위한 지침을 마련했고, 1910년대에는 미북감리회와 미남감리회가 연합으로 교회법에 따라 연회 안에 ‘절제와 사회개량 위원’,‘금주위원’ 또는 ‘절제와 사회봉사부위원’을 두고 금주·단연 운동을 전개했다. 수원 지방의 여선교사로 부임했던 밀러(Lula A. Miller, 미라)이 1912년 중등학교 이상의 남녀학교에서 금주논문을 현상모집했는데, 이화학당 재학생이던 황애덕이 일등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구세군은 1910년 10월호 「구세신문」에 ‘단음ᄒᆞᆷ이 가ᄒᆞᆷ’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대개 술이라하는 음식은 항상 재앙과 패망과 죄악과 형벌을 이루는 바, 대단히 좋지 못한 물건”이라고 밝힌 것을 시작으로, 1930년 대까지 금주·금연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장로회도 금주·금연·절제운동을 전개했다. 1912년 평양, 황주 기타 각 지에서 계연회(戒煙會)를 조직하고 대전(代錢)을 모아 전도인을 각지에 파견 하였는가 하면, 1919년 10월 4일 평양에서 제8회 총회가 열렸을 때 아편사용을 제한하는 내용을 다루었고, 1917년부터는 아예 주일학교에서 장유년(壯幼年) 절제공과공부를 실시했다.(전국 주일학교‘장감연합공의회’) 1924년 함남노회에서는 누룩장사를 하는 교인에 대하여 치리할 것을 논의했다.(1924년 총회록 26항) 1929년에는 미북감리회 연회에 절제회 협동 청원으로 미성년자 ‘끽연음주(喫煙飮酒) 금지’법안을 제출할 때 장로회 총회의 명의를 빌려 주었다. (1929년 총회록 45항) 그러다가 1932 년 5월 5일, 장로회 중심의 초교파적 단체인‘조선기독교절제회’가 창립됐다. 


감리회는 1920년대부터 보다 조직적으로 금주 금연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22년 미북감리회‘금주위원회’에서는 조선총독부를 대상으로 미성년자 금주, 금연 및 공창 폐지 청원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선교본부에 금주 운동 전담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 이듬해인 1923년 5월에 미국의 절제운동 지도자 틴링(C. I. Tinling)을 초빙해 전국 교회와 기독교 학교에서 순회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러한 금주 운동 분위기에 힘입어 우리나라에서 여자기독교절제 회가 조직된 것은 1923년 9월이었다. 감리회와 장로회의 여선교사들을 중심으로‘기독교여자금주회’라는 여자절제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1년 후인 1924년 8월 28일에는, 한국 여성들을 중심으로 초교파 여성 연합 운동기구‘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연합회’가 결성되기에 이른다. 틴링 강연에 통역으로 참여했던 이화여학교 교사 손메례(孫 袂禮, 본명 李貞圭)가 창설 작업을 주도했다. 그는 초대 순회총무로 봉직하면서 절제 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선출된 임원은 회장 유각경(兪珏卿), 부회 장김선(金善), 총무 손메례, 서기 문인순(文仁 順) 등이었다.


절제회는 금주·금연을 널리 알리기 위해 순회총무를 두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순회강연을 하는 한편, 지방에 절제회 지회를 설립하는데 주력했다. 순회 총무였던 손메례는 재임하던 이화학교를 그만두고 이 일에만 전념했다. 전국적으로 강연회를 열었고, 290곳에 절제회를 조직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지방을 순회하는 과정에서 눈물겨운 일 도 많았지만, 이 절제운동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금주와 금연에 참여 하는 결실을 얻었다.


평안북도 정주 강연 때의 일이다. 구장(區長)이 담뱃대를 꺾어 내놓고 “42년 동안 국가와 사회에 죄인 노릇을 하였으나 이제부터는 기독교 신자가 되어 금주금연운동으로 이웃을 잘 살게 지도하겠다”고 다짐했다.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도 금주·금연을 다짐한 사람이 60명 이었으며, 부녀자들은 머리에 쓴 수건을 벗고 다리(月子)를 풀어 한데 모아 교육 사업에 바치기도 했다. 


기독교 여성들의 절제운동은 일제의 암울한 시기를 겪으면서 점차 민족운동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다. 3.1운동 후 침체된 우리 민족에 게 민족적 활기를 불어넣어 준 것이 민중계몽운동이었다. 절제운동은 이러한 민중계몽운동의 성격을 띠면서 전국적으로 전개돼 나갔다. 특히 술은 민족의 정신을 흐리게 하고 국혼을 파괴하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초대 총무 손메례는 이점을 강조했다. 


"술은 사실 탄환 없는 대포와 같은데 도리어 용기를 준다고 믿게 하였다. 여러 해 동안 연구한 결과 지금은 그 비밀을 알았다. 그러니 우 리는 금주하고 금주운동을 철저히 하여 조선을 살리자. 조선의 금주 운동은 모든 운동 중에 가장 큰 운동이다. 육을 살리는 운동이며 죽어 가는 조선을 살리는 운동이다. 여러분은 때때로 왜 금주운동을 잊어 버리는가?"


손메례가 말했듯이 절제는 조선을 살리는 문제였다. 정신을 살리고 육을 살리는 운동이었다. 특히 이 운동의 주요대상이 미래를 살아야 할 자라나는 청소년이었다. 이것이 손메례가 이 운동을 위해 이화학교를 사임하면서까지 전력으로 헌신하게 된 동기였다. 


손메례에 이어 절제회 총무를 맡은 사람은 이효덕 전도사였다. 이효덕은 전국 교회에 절제회를 조직할 것을 권했다. “절제회를 조직 하지 못하는 교회는 아예 교회 축에 들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절제운동은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다. 창립 당시 6개 지회 회원 1,508명이었던 것이, 1928년에는 53개의 지회에 회원수가 3,217명에 이르렀다. 1934년에는 116개 지회, 3,530명의 회원으로 더욱 확대됐다. 1933년에 는 아예 어릴 적부터 절제교육을 시킬 필요성을 인식하고 ‘영아절제회’를 조직했다. 


이효덕의 절제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일제시대부터 일본 인이 거주하던 곳에 조성되기 시작한 공창 폐지운동이었다. 일제시대 성매매의 특징은 정부의 철저한 관리·감독을 받는 ‘공창’ 형태로 운영됐다는 점이다. 일본 정부는 외부와 격리된 지역에 성매매 업자들을 모아놓고 그곳에서만 성을 팔게 했고, 여기에 세금을 부과했다. 수천 명의 여성들이 성매매 산업에 빠져든 것은 ‘가난’때문이었다.


"한번은 평안북도 회천읍으로 강연을 가던 길에 하루를 여관에서 묵은 적이 있었다. 그곳은 운전수들 지정 여관이었다. 그 당시 운전수들은 선호하는 직업으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여관분위기는 사뭇 시끌벅적했다. 밤이 깊어지자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되었다. 내가 묵고 있던 방 옆방에서 남녀가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얘기인 즉은, 한 운전수가 한 술집 여인을 강제로 취하려는 수작 이었던 것이다. 화가 난 남자는 여인을 때리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그 처자는 속치마바람으로 도망쳐 버렸다."


술집에서 일하는 여인일지라도 정조를 지키려는 지조만 있으면 자기 몸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청소년들의 정조관을 깨우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때부터 이효덕은 여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에서 이것을 강조하였다. 이효덕은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공창폐지운동을 전개했다. 


기독교 여성들이 중심이 돼 벌였던 절제운동은, 지금까지도 금주· 금연은 물론, 자녀의 절제교육 등 한국 기독교인이 지켜야 하는 덕목으로 자리를 잡고 있을 정도로 상당한 성과를 얻었다. 이 후 절제회는 이효덕 총무에 이어 장정심(張貞心)을 순회총무로 맞아 북간도와 남만주 일대에 지회를 설립했다. 당시 회원 수는 6만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해방 이후의 절제 운동은 고아와 불량한 길로 빠지는 거리의 소녀들에게 복지의 터를 마련해주는 ‘소녀 절제관’과, 감옥에서 형을 마치고 나오는 오갈 데 없는 여인들에게 보호와 갱생의 기회를 제공하는 ‘애우관’ 등을 설립, 운영하기도 했다. 또한 세계여자기독교절제연합회 파견 총무 황애덕은 6.25전쟁으로 인한 전쟁 유가족에게 직장을 제공하고 희망원 등을 설치한 바 있다.


(사진 - 절제운동 캠페인 가두행진, 충남 공주, 1930년대)


(사진 - 최용신 선생)


1930년대 스물여섯 살의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최용신(1909-1935) 에게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그녀는 일제 강점기 감리교 전도사이자 교육자였으며, 경기도 화성군 샘골(현재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서 봉사한 농촌운동가였다. 심훈의 소설『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상록수』는 1935년 동아일보사가 주최한‘창간 15주년기념 장편소 설 특별공모’당선작으로, 그해 9월10일부터 1936년 2월 15일까지 연재됐다. 1870년대에 일어난 러시아 지식인들의 브나로드 운동을 사상 적 바탕으로 한 이 소설은, 일제에 의해 수탈당한 1930년대 한국농촌의 참상을 보여주면서, 그 어려움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농촌계몽 운동을 실천하는 양심적 지식인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심훈이 장편소설 공모에 응모했을 때, 그의 부모는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에 낙향해 살고 있었다. 그의 사촌인 심재영은 경성 농고를 졸업한 후 그 곳에서 동네 청년들과 함께 농촌계몽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 무렵, 농촌계몽운동가인 최용신의 장례식을 사회장으로 치루는 모습과 그녀의 업적이 신문에 크게 보도됐다. 심훈은 최용신과 관련된 내용들을 기록하기 위해 직접 안산시 본오동 샘골을 세 차례 정도 방문하고, 이를 바탕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 박동혁의 모델은 조카 심재영과 최용신의 실제 약혼자 김학준이다.


최용신은 1909년 8월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최창희(崔 昌熙)의 2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10세 되던 1918년 두남학교에 입학해 2년 간 다니다가 원산의 루시여자보통학교로 전학했으며, 1928 년 같은 계열인 루시여자고등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생활이 안정된 교사가 되라는 친지들의 강권에도 불구하고, 최용신은 1928년 경성에 있는 협성여자신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학교가 남학교와 통 합하면서 학제가 4년제로 변경되는데, 이 학교가 바로 현 감리교신학 대학의 전신인 협성신학교이다. 


이 시절 교수로 재직 중이던 독립운동가이자 농촌운동가인 황에스더(1892~1971)와의 만남은 최용신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 황에스더로 부터 깊은 감화를 받은 최용신은 자 신의 이상인 농촌운동을 실현해야겠 다는 의지를 굳히고, 협성신학교에 다니면서 첫해에는 황해도 수안 용 현리로, 이듬해에는 포항 옥마동으 로 농촌계몽운동을 나갔다. 이 시기 농촌계몽운동은 주로 언론사와 기독 교단체가 중심이 돼 활발하게 추진 되고 있었다. 1929년 조선일보사의 문자보급운동, 1931년 동아일보사의 브나로드운동이 전자에 속하고, YMCA와 YWCA 등이 농촌지도부를 조직해 농촌운동에 관여한 것은 후자의 예라고 할 수 있다. 


1931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의 파견교사로 샘골에서 농촌운동을 시작한 최용신의 활동이 처음부터 열매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최용신은 어려서 천연두를 앓아 그 흔적이 남아 있었고, 샘골 사람들에게 그녀는‘곰보 신여성’으로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감리교 전도사인 그녀는 마을 사람들의 경멸을 무릅쓰고 지역 교회 건물을 빌려서 예수의 사랑을 전하며 학교를 개설하고 성경, 수예, 한글, 집안 살림, 재봉 등 실용성이 있는 과목들을 가르치기 시작 했다.


가난과 무지 때문에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농사일을 거들게 하던 학부모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최용신의 영향으로 점차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배움의 가치를 존중하게 된 것이다. 날로 학생들이 늘어나고 교육의 효과가 검증되자 제대로 된 학교를 만들자는 최용신의 제안에 주민들도 호응했다. 독립운동가인 황에스더를 껄끄러워한 일본 경찰의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마음 유지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1932년 5월 강습소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자녀들의 배움을 위해 몇 년이나 걸려서 모은 귀한 돈 300원 중 150원으로 건축을 시작했다. 덕분에 1933년 1월 15일 강습소 낙성식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 일제는 재학생 110명 중 50명을 강제로 수업을 못 받게 하는 등 야학을 약하게 만들려는 의도로 탄압을 했으나, 최용신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학문을 가르치는 방법으로 이를 극복해 냈다. 그러나 최용신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설상가상으로 매달 들어오던 YWCA의 보조금마저 30원에서 2년 만에 15원으로 삭감됐다. 최용신은 보조 선생에게 최소한의 사례를 해 왔으나 그것마저도 쉽지 않았다. 또 음으로 양으로 힘이 되어 준 황동우도 진학 문제로 사임을 하고 만다.


이렇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겨운 상황이 계속되면서, 현재의 지식으로는 부족함을 느낀 최용신은 1934년 3월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샘골 사람들은 최용신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일본에 가고자 했을 때도 최용신의 결정을 존중해 주었으며,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에도 교류를 계속했다. 하지만 최용신은 유학하는 동안 각기병에 걸려 공부를 마치지 못한 채 돌아왔다. 그때도 샘골 사람들은 일하지 않고 누워만 있어도 좋으니 마을로 다시 돌아와 달라고 간청했다. 샘골로 돌아온 최용신은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학생들은 최용신이 학교로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를 받았다. 사람들은 좋다는 약은 모두 구해 정성껏 최용신을 간호했다. 이에 최용신도 차츰 건강을 회복하여 전과 같이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녀의 건강은 차츰 회복됐지만, 반갑지 않은 소식이 다시 찾아왔다. YWCA가 재정난으로 더 이상 샘골교회를 돕지 못한다는 소식과 함께, 1934년 10월에는 보조금을 완전히 끊는다고 최후통첩을 한 것이다. 반갑지 않은 소식이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인지 병세가 다시 악화돼 갔다. 결국 그녀는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과로와 장중첩증(장이 꼬이는 병)으로 1935년 강습소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 채 사망했다. 자신이 가르치던 샘골 강습소가 보이는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과 함께.


다음은 최용신이 죽기 몇 달 전인 1934년 10월 30일 「여론지」에 기고한 글이다.


"여러분이시여! 곡식을 심으면 1년의 계가 되고 사람을 기르면 백년 의 계가 된다고 하였거든, 이 강산을 개척하고 이 겨레를 발전시킬 농촌의 어린이를 길러 주소서. 뜻있는이여! 우리 농촌의 아들과 딸의 눈물을 씻어주소서"


그녀의 장례는 염석주를 준비위원장으로 샘골교회와 학원이 연합해 사회장으로 치렀다. 장례일은 1월 25일이었다. 안홍팔이 최용신의 약력을, 목사 전재풍이 유언장을 낭독했으며, 영구는 친지와 아이들의 어깨로 발인했다. 최용신이 떠나는 길에는 강습소 학생 120여 명을 포함해 영구를 따르는 조객 1천여 명이 함께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최용신이 남긴 영향력은 매우 커서 그녀가 펼쳤던 문맹퇴치운동과 농촌생활 개선운동은 그녀의 사후에도 지속적으로 기념됐다.


1994년 11월 28일 안산시는 1931년 10월부터 1935년 1월까지 일본으로 유학 갔던 기간을 제외한 약 2년 9개월의 시간 동안 안산 샘골에서 헌신적인 애국운동을 펼쳤던 최용신을 독립운동유공자로 추서하는 청원을 했다. 그리고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는 뜻 깊은 날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 가면 2007년 11월 20일 개관한 최용신 기념관을 관람할 수 있다.


(사진 - 샘골부녀회원들과 함께 한 최용신 선생[맨 왼쪽])

(사진 - 감리교 대전교회의 엡웟청년회, 1935년)


1897년 12월 31일 정동교회 예배당에서‘여성을 교육하고 동등으로 대하는 것이 가하냐?’는 주제를 놓고 열띤 찬반 토론회가 열렸다. 찬성 측의 연사는 서재필과 조한규였고, 반대 측의 연사는 윤치호 와 김연규였다. 시대적으로 아직 여성들이 연사로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서재필은 남녀간 차별의 문제를 제기하고 남성과 여성 의 동등함을 말하면서, 여성도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윤치호는 창세기 3장을 예로 들어 인류의 타락이 하와로부터 시작됐음을 상기시키면서, 여성 교육은 타락만 조장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윤치호의 주장으로 토론 분위기가 반대편으로 기울어지자, 회중석에서 여성교인 한 명이 외쳤다. “하와가 비록 죄를 지었으나 마리 아가 아니었으면 예수께서 어찌 세상에 오셔서 죄를 대속하였으리오. 하와만 보지 말고 마리아도 보시오!” 이 토론회는 여성 교육과 남녀 평등에 대한 최초의 토론회였고, 이 토론회를 마련한 단체는 정동교회‘엡웟청년회’였다.


엡웟청년회(1897-1914, Epworth League)는 하류층 중심의 교회에서 이루어진 청년운동이다. 1889년에 미국에서 창설된 감리교 특유의 청년 단체로, ‘엡웟’은 요한 웨슬리의 출생지 이름이다. 경건한 신앙훈련, 교육활동, 선교활동, 사회봉사 등을 강령으로 한 청년 선교단체 엡웟청년회가 한국에도 조직된 것은 정동교회당이 건립되던 1897년의 일이다. 이 해 5월 5일 서울에서 열린 제 13차 감리교 한국선교 연회에서 조이스(I. W. Joyce)감독 주재 아래 청년회를 조직하기로 결 정하고 설립위원으로 제물포의 존스(George H. Johns, 조원시), 평양의 노블(William A. Noble, 노보을), 이화학당의 페인(Josephine O. Paine, 폐인) 등 3명을 임명했다. 제일 먼저 조직한 곳은 존스가 담임하고 있던 제물포 교회와 서울의 상동교회였다. 같은 해 9월8일자 「죠션크리스도인회보」에 따르면, 이 청년회는 1897년 9월 5일에 설립됐고, 회원 자격은 15-35세의 교인, 회원수는 44명이었다. 


상동 엡웟청년회는 조직되자마자 정치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들의 정치 운동은 독립협회의 개화 운동과 일맥상통하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1899년 1월에 전덕기, 이승만, 박용만, 정순만 등이 청년회의 이름으로 황위를 황태자에게 넘겨야 한다는 격문을 만들어 서울 장안에 뿌린 사건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이승만이 투옥됐다. 당시 상동교회 담임이었던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시란돈) 등 감리교 선교부는 교회의 비정치화 정책에 입각해 상동 엡웟청년회를 해산 시켰다. 그러나 당시 교회는 구국운동을 펼치기 쉬운 통로였기 때문에, 1903년 전덕기가 상동교 회의 담임(당시 전도사)을 맡으면서 상동 청년회는 다시 조직됐고, 그 이루에도 비정치화를 이유로 탄압받고 해산되기를 거듭했다. 


상동 청년회의 영향은 지방에까지 미쳐 지회가 조직됐고, 후일 관 서(서북)지역 출신들도 이 청년회에 참여하는 등 기호지역과 서북지역이 지역을 초월하여 연대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당시 상동 청년 회에 참여한 인사들은 크게 세 개의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정회원, 준회원, 후원자가 그것이다. 1903년을 기준으로 볼 때, 정회원 으로는 전덕기, 박승규, 최재학, 구연영(의병장), 김진호, 우덕순, 이필주, 최모성, 정재면 등이 있었고, 준회원은 다른 교회에 출석하는 인사들이었다. 이들 중에 이준(연동교회), 주시경(정동감리교회), 이동휘(강화도 거주), 김구 등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 청년회의 개방성을 잘 보여준다. 후원자들로는 민영환, 이상설, 이회영 등이 있었고,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에 청년회의 활동을 지원한 인사들에 대한 기사가 종종 실린 것을 볼 때 적지 않은 인사가 후원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동 청년회는 독립협회 해산 후 주권운동, 멕시코 이민자 문제 실 태조사(1905), 을사조약 반대 상소 운동(비회원 기독교인들도 참여, 1905) 등의 구국운동은 물론, 을사오적 암살을 모의(전덕기 주도)하기 도 했고, 상동 청년학원을 설립(1904)해 운영하는 등 교육사업도 해 나갔다. 또한 1907년에 비밀 결사인 신민회가 조직되는 인적 기반이 되기도 했다. 상동청년회는 당시 교회가 애국운동의 한 통로로 자리 매김하면서 지역(기호와 서북), 교파(장감), 심지어 종파(천도교와 대 종교)와 신분(상류와 중하류)을 초월한 구국운동의 장 역할을 했다. 


한편, 각 지역 감리회 안의 엡윗청년회는 1939년 일제의 압력으로 명칭을 공려회(共勵會)로 바꾸었다가, 해방 후에는 감리회 청년연합회(MYF)로 재건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감리회에 엡웟청년회가 있었다면, 장로회에서는‘기독청년면려회 (Christian Endeavor, 이하 면려청년회)’가 있었다. 본래 면려 운동은 국제기독청년면려회(International Society of Christian Endeavor)를 통해 초교파적으로 전개됐지만, 한국에서는 1900년대에 미북장로회 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됨으로써 장로교 청년운동의 성격을 갖게 되었 다. 


장로회의 전국적인 기독청년면려회가 조직된 배경에는, 3·1운동 이후 전국적인 청년회 조직과 활동의 활성화, 교회내부의 청년들의 양적 성장, 안동지역 앤더슨(Wallace J. Anderson, 안대선)의 면려회 조직 노력 등이 자리잡고 있다. 앤더슨 등의 면려회 조직 운동은 교회 청년들이 사회주의계열이나 민족주의 계열의 민족운동으로 기울어지지 않게 하려는 대응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면려회 운동은 당시 사회의 일반 청년운동의 흐름과 사회주의 확산에 대한 대응과 경계, 그리고 세계면려운동의 일환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었다. 


면려회는 앤더슨을 발행인으로 하는 기관지「眞生」(1925.9 월-1930.12)을 발간해 회원의 교양 함양에 힘썼다.「眞生」은 당시 사회적으로 공격받고 있던 기독교 신비주의와 미신성을 해명하는 글들 과, 당시 전개되고 있던 반기독교운동에 대한 견해, 그리고 기독교 사회주의적 입장의 글들을 다수 실었다. 특히 기독교에 대한 사회의 비 판을 통해 기독교의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한편, 사회문제와 장래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眞生」집필에는 신민회, 배제학당, 경신학 교, 정동교회, 동우회, 조선어학회, 흥사단, 기독신우회, 평양신학교, 적극신앙단, YMCA 등의 배경을 가진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면려회의 전국 지도부 구성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이들이 당시 기독교 민족운동의 거점이 됐던 수양동우회, 기독신우회, 적극신앙단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수양동우회에 적을 두고 동시에 면려회 조선연합회와 면려회 기관지에 참여하던 이들로는 정인과, 이대위, 최성곤, 이용설, 김윤경, 송창근, 전영택, 한치진, 이윤행, 이만규 등이 있었다. 또 기독신우회와 관련된 인사로는 정인과, 조병옥, 이대위, 유각경, 최석주, 전필순, 최성곤, 이용설, 채필근, 김우현, 전영택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1932년 신흥우를 중심으로 조직된던 적극신앙단 계열의 인사로는 전필순, 최석주, 홍병덕, 박용희, 이양섭 등이 있었다. 


1928년에 개최된 제1차 장로교청년수양회는 면려운동의 질적인 변화를 이루는 계기가 됐고, 그 변화는 지도부의 확대 개편과 면려운동사업의 확대로 나타났다. 이 시기 면려운동의 지도부는 세 계열의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임원, 기독교 민족운동의 구심점 중 하나였던 수양동우회 인물들, 그리고 경기 면려연합회를 중심으로 한 기호지역 인물들이 그것이다. 이들은 면려운동을 통해 개인의 신앙 확립과 인격개조 훈련, 그리고 나아가 사회개조까지 이루기를 원했다. 구체적인 사업으로는 계독사업의 강화와 농촌사업을 전개했다. 면려회가 주도한 계독사업은 금주, 금연, 소비절약 등을 아우르는 사업으로, 윤리, 신앙적 차원의 성격과 소극적 형태의 경제운동 성격도 갖고 있었다. 


면려회 조직은 1930년대 초 전필순, 최석주 등의 기호계열 인사들 이 적극신앙단에 가입하면서 탈퇴하는 등 약간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기독교계의 적극신앙단에 대한 발발과 혁신적 지도 이념 을‘파시즘 수용’이라고 보는 사상적인 견해 차이와 조선연합회 지도부내 주도권 장악과 당시 서북과 기호지역의 주도권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결국 1933년 총회에서 동우회계의 이대위를 총무로, 앤더슨을 협동총무로 위임하면서 면려청년회는 그 계통상 동우회계 인사 가 차지하게 되었다. 민경배는 면려회 운동을 YMCA와 대비되는 서북 교회 대세의 청년운동이었다고 평가한다. 


1930년대 청년운동으로서 면려운동은 장로회 내의 청년운동이었지만 신앙운동의 범주를 넘어서 적극적인 사회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사진 - 제1회 전국면려회, 1934년 9월, 평양 숭실학교)



(사진 - YMCA 함흥지역 농촌강습회를 마치고, 1923년, 맨 왼쪽이 월남 이상재 선생)


한국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도시인구가 농촌인구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 한국의 전통사회는 농촌사회였다. 기독교가 한국에 전파된 19세기말에는 인구의 95% 이상이 농촌에 거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선교도 도시 보다는 농촌을 중심으로 이루졌다. 1920년대에는 전체 교인의 73%가 농촌에 거주하고 있었다. 캐나다 독립 선교사인 펜윅(Malcolm C. Fenwick, 편위익)은 일찍이 농촌 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축우, 양돈, 양계, 과수 및 채소 재배를 가르쳤고, 서양에서 개량된 가축을 들여와 한국의 농촌에 보급하기도 했다. 


1920년대 초에는 한국에 공산주의 사상이 침투했다. 공산주의는 반일투쟁에 있어서 소작쟁의나 노동쟁의 등과 같은 과격한 방식으로 농촌 및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기독교계는 이런 과격 투쟁 노선을 취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독교 자체가 공산주의의 도전으로 공격을 받고 있는 형편이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기독교의 노력은 비폭력 노선의 기독교 농촌운동을 지향하게 됐다.


3.1운동이 일어난 후 한국 교회의 농촌운동은 활기를 띠 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선교 사 개인의 활동이었거나 간헐적으로 이루어지던 농촌운동 이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운동에는 YMCA가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다. YMCA는 1923년 약 3개월에 걸쳐 농촌 실태 조사를 한 뒤 3개 조항의 강령을 발표했다. ‘우리는 모든 농민들의 경제적 향상과 사회적 단결과 정신적 소생을 도모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총무 신흥우는 국제 위원회의 모트와 협의를 거쳐 전국에서 10개 지역을 선정해 미국에서 파송한 전문 간사를 파견하기로 했다. 한 해 2명씩 5년에 걸쳐 모두 10명을 농촌에 파견하기로 한 것이다. 더불어 10명의 한국인 간사도 확보해 농업전문가로 구성된 인력을 파견하기로 했다. 


1925년 드디어 에비슨(Gordon W. Avison, 어고돈)과 쉽(Fredereic T. Shipp, 심의섭)이 처음으로 한국 농촌에 전문 간사로 파견됐다. 이 때부터 한국 YMCA는 농촌부를 신설하고, 전국 6개 도시에서 농촌운동을 시작했다. 우선 문맹 퇴치를 위해 야학을 설치해 문자 보급에 앞장섰다. 그리고 신용협동조합, 저축조합, 농민 강습소, 고등농민학교, 시범농장, 양돈, 양계, 과수, 축산, 토지개량 등 농업 전분야에 걸친 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쳐 나갔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도 농촌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 사업을 펼쳤다. 미국 콜롬비아 대학의 브룬너(E. S. Brunner)교수가 내한해 1926년과 1927년에 걸쳐 한국 및 만주와 시베리아를 답사한 뒤 [한국농촌]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1928년에 열린 예루살렘 국제선교대회에 한국과 같은 농업국가에 있어서 농촌선교의 중요성을 알리는 보고서로 제출됐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실제로 신흥우, 정인과, 양주삼, 김활란, 노블(William A. Noble, 노보을), 마펫 (Samuel A. Moffet, 마포삼열)등 6인을 대표자로 예루살렘에 파견해 보고서를 제출하게 했다.


장로회의 농촌운동은 1928년 농촌부가 설치되면서 시작됐다. 정인과가 부장을, 전필순이 회계를 맡아, 예루살렘 대회의 결의 내용을 각 교회에 알리고, 각 노회 단위로 농촌부를 설치하는 한편, 농촌운동 기관지인「농민생활」을 출간해 농민 계몽에 앞장서기로 한 것이다. 「농민생활」은 이훈구, 채필근, 김상근 등이 출간을 담당했다.「농민생활」은 전성기에는 독자가 4천 6백명이나 됐으며, 연간 6만부 이상 판매되기도 했다. 1935년부터는 숭실전문의 농과에서 편집을 맡고 장로회 총회는 책의 판매만 주력하기로 했다. 


장로회 농촌부는 1930년부터 신용조합을 시작했다. 총회가 조합을 운영하고, 각 노회는 지부를 두어 회원을 모집하게 했다. 1932년부터는 이훈구 교수를 주축으로 농촌청년들에게 약 2개월간의 농사강습회를 열어 참여하게 했다. 


1935년부터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 온 배민수 목사가 농촌부 총무를 맡으면서 장로교 농촌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된다. 배민수 목사는 복음서의 하나님 나라 사상에 근거해 농촌운동과 신앙운동을 결합,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이상촌 운동인 예수촌 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따라서 그는 기존의 농사강습회에 신앙강습회를 결합시켰다. 유재기, 박학전, 김성원, 김상근 등이 배민수 목사를 도와 활동에 나섰다.


감리회의 농촌운동은 원래 1920년경에 선교를 기념해 시작했으나, 예루살렘 선교대회 이후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예루살렘과 덴마크를 시찰하고 온 양주삼은 『농민의 낙원인 정말』이라는 책을 출간했 고, 같이 덴마크를 방문한 김활란도 『한국의 부흥을 위한 농촌교육』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홍병선, 박인덕 등도 농촌운동에 투신했다. 그러나 들은 YMCA 회원 자격으로 농촌운동에 참여한 것이었다. 서울의 연희전문에서는 1929년 학교 구내 1만평의 토지를 활용해 덴마크식 고등농민학교를 개설하고 시범 농장을 운영했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도 농촌운동에 참여했다. 1929년 농촌전문가 클라크(Francis O. Clark, 구을락)를 초청해 초교파적인 강연회를 개최했고 농촌운동이 한 교파의 운동으로 한정되지 않도록 교파 연합사업으로 펼쳐 나갈 것을 요청했다. 또 1930년에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내에 농촌운동 본부를 두고 YMCA 연합회 협동농촌부와 협력을 시도했다. 농촌위원으로는, 윤산온, 신흥우, 정인과, 노블, 클라크, 루츠 (Dexter N. Lutz, 유소) 등이 선출돼 활동했다. 1931년부터는 각 교파와 선교부의 농업 전문가를 동원, 농업 전문 분야에 관한 강연을 개최 했다. 1933년부터는 농사개량, 요리법, 모범농장 설치, 보건운동, 농민문화운동, 농촌 청소년운동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장로회 내부에서는 채정민, 김인서와 같은 보수주의자들이 농촌운동은 교회가 할 일이 아니라며 농촌운동을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중일전쟁을 치르게 된 일본은, 한국을 일본의 군수기지로 전환시키고 전쟁 배후의 물자 및 인력 공급처로 이용하기 위해 한국내 의 모든 민족주의 운동을 척결하려 했다. 일본은 한국교회가 전개하는 농촌운동과 동일한 방식의 자력갱생운동을 실시해 기독교 농촌운 동을 말살하려 했다. 1937년의 수양동우회 사건, 1938년의 흥업구락부 사건 등을 통해 한국 내의 민족주의 운동을 탄압하던 일본은 1938 년에는 농우회 사건을 일으켜 농촌계몽 및 기독교 농촌운동에 참여하던 기독교 지도자들을 대거 검거하고 재판에 회부했다. 유재기, 박학전 등은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고초를 치렀다. 이로 인해 기독교 농촌 운동은 급격한 쇠퇴를 맞고 말았다.


(사진 -  YMCA농촌수양소[1928] / 광주YMCA를 중심으로 호남지역 농촌선교에 힘쓴 에비슨 농업학교 전경) 

(사진 - 신간회, 1927년)


6·10만세 운동이 발발한 이듬해인 1927년 2월 15일, 조직적이고 일원화된 민족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각계의 지도급 인사들이 총망라된 신간회가 조직됐다. 그동안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제각기 다른 방법과 주장으로 민족운동을 추진해 민족의 역량이 분산됐기에, 이를 통합하기 위한 단일 기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때 일제는 신간회를 합법적인 단체로 승인했다. 그 이면에는 한국인의 지하운동을 노출시켜 손쉽게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연대를 허용하면 내부에서 일어나는 대립과 반목으로 인해 민족운동이 분열, 약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고등 술책이 숨어 있었다. 


신간회의 태동 배경에는 민족운동 계열의 노선 갈등이 자리잡고 있다. 당시 민족주의 우파가 일제에 대해 타협적인 입장을 취한 반면, 민족주의 좌파는 투쟁 노선을 추구하고 있었다. 따라서 민족주의 좌파의 주도로 신간회가 설립된 것이다. 민족주의 좌파는 사회주의 계보와의 연합을 도모하고 있었고, 공산주의계도 6.10 만세사건 이후로 급격히 세력이 위축돼 다른 세력과의 협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주의 우파와 민족주의 좌파 사회주의, 그리고 공산 주의 계파 등 범항일운동 세력의 규합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1927년 1월 15일 신간회 조직 계획이 발표됐고, 2월15일에는 종로 YMCA 강당에서 발기대회가 열렸다. 신석구 조선일보 사장을 비롯해서 천도교계 권동진과 화요회계의 홍명희 등 각파를 대표하는 34인이 참가했다. 발기인으로는 조선일보계에서 신석우, 안재홍, 이승복, 한기악, 백관수, 김준연, 최선익, 이관용, 홍성희, 천도교계에서 박동진, 박동홍, 이종린, 이종목, 기독교계에서 이상재, 이승훈, 박동완, 조만식, 유억겸, 이갑성, 불교계에서 한용운, 유림계에서 김명동, 정재룡, 이정, 그리고 문일평, 신채호, 홍명희, 이순탁, 한위건, 장길상, 정태석, 김원순, 김탁, 이창섭, 장지영 등이 참여했다. 


3.1운동 이후 최대의 모임인 신간회의 조직은 초대 회장 이상재, 부회장 권동진과 중앙위원 37명, 그리고 총간사 홍명희를 중심으로 한 34명의 간사단으로 이루어졌으며, 10개의 산하 부서를 편성했다. 신간회는 당시 진행되고 있던 자치운동을 기회주의로 규정하고 철저히 규탄하는 한편, 한국인 착취기관의 철폐, 한국인에 대한 특수 취체법의 폐지, 교육차별의 금지, 한국어 교육의 실시, 과학사상 연구의 자유 등을 주장했다. 그리고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일본 경찰의 부당한 조치를 비난하는 민중대회를 개최하면서 이 운동을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확대시키려 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신간회 조직은 더욱 확대됐다. 지방 조직은 1927년 5월에 일본 동경 지부가 설립된 데 이어 7월에는 서울 지부가 설립됐으며, 이후 전국에 조직이 확산돼 141개소의 지방 지회가 개설 됐다. 전체 회원의 수는 39,410명에 이르렀다.‘자기 이름을 쓸 수 있는 사람’을 가입 조건으로 내세웠는데, 전문직과 교사 등도 가입했지만 노동자들과 농민, 그리고 상인계층이 가장 많았다. 원래 이름은 신한회 (新韓會)로 하려 했지만, 일제의 반대로 ‘고목(古木)에 신간(新幹)이 발생하였 다’는 의미의 신간회(新幹會)로 정했다. 운영 자금은 주로 천도교에서 부담했다. 


처음에는 민족주의 온건파가 주류였기 때문에 조직을 확대하고 전국망을 구 성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초대 지도부가 물러나고 다음 지도부가 들어 서면서 좌우익 연합전선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중앙 지도부를 장악한 허헌이 사회주의 투쟁 노선인 소작쟁의와 파업을 중요한 투쟁 방 법으로 내세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원래 신간회는 식민지 한국의 문제점을 전체적으로 시정하려는 계 획을 가지고 있었다. 고문폐지, 공개재판, 동양척식주식회사 폐지 및 일본인의 한국 이주 반대 등 식민정책의 시정과 아울러, 소작인의 부 역폐지와 경작권 확립, 최저임금제 실시와 8시간 노동권 확보, 조선어 교육 허용, 민간 교육 기관 허가제 폐지, 여성인신 매매 금지와 사회 적 양성평등 실시, 하층 계급의 신분 보장 등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허헌 중심의 사회주의 계열이 신간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그 투쟁 양상이 과격한 사회주의적 방식으로 전환됐다. 그런데 때마침 광주 학생운동이 일어났고, 일제의 탄압으로 신간회 내 좌파는 타격을 입는다. 그런데 이 무렵, 신간회 내 좌파는 좌우합작을 해소하라는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았고, 일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간회를 해산하려 했다. 결국 좌파는 강력한 투쟁 노선을 견지하기 위해 신간회의 해체를 주장하기에 이른다. 민족주의 우파는 해체를 막고 신간회를 주도적으로 운영하려 했지만, 사회주의계의 반대로 결국 해체의 길을 걷고 만다. 1931년 5월, 신간회는 민족 단일당의 소임을 감당하지 못하고 끝내 해산되고 말았다. 


이러한 분열은 일제가 의도한 바였다. 애초에 신간회 설립을 허용 한 이유가 민족주의 운동의 분열과 약화를 유도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의도가 맞아 떨어진 셈이다. 일제는 우선 활동이 활발한 지방의 조직부터 해체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편, 1927년 5월 27일에는 여성단체인 근우회(槿友會)가 신간회의 자매단체로 출범했다. 근우회는 신간회처럼 종교인, 비종교인, 민족 진영, 사회주의 진영 등을 망라한 범여성 단체였다. 근우회 조직의 목 적은 조선여성의 단결과 지위 향상을 도모하는데 있었다. 근우회는 실천 강령으로 여성에 대한 일체의 차별 철폐, 봉건적 미신과 인습 타 파, 조혼 방지와 결혼의 자유 획득, 인신매매 및 공창폐지, 농촌 부인의 경제적 이익, 여성 임금 차별 철폐와 산후 임금 지불, 여성 노동 자의 야근 폐지 및 위험 노동 금지 등을 내세웠다. 


근우회에는 YMCA 계열의 김활란, 홍에스더, 유각 경, 김필례, 언론계 출신의 황신덕, 최은희, 이현경과 사회주의 계열의 정칠성, 박 원희, 우봉운 등이 참여해 온건파로부터 과격 사회주 의자들까지 신간회와 동일 한 구성을 보여 주고 있었다. ‘무궁화 근’(槿)을 사용한 것은 한국 여성의 동우회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 이었다. 근우회에는 4개의 부서가 있었으며, 제 4회 대회 때까지 전국 70여개 지역과 동경, 오사 카 등지에 지회를 설치했다. 1929년 광주학생 운동 때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해 전국적인 여성 투쟁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1년 일제의 압력과 사회주의계와 민족주의계의 분열로 신간회가 해체되자, 근우회도 결국 같은 운명을 겪고 말았다.


(사진 - 근우회 발회식, 1927년 6월 17일)

(사진 - 일경에 의해 피검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간부들. [윗줄 가운데가 정신여학교 4회 졸업생, 회장 김마리아])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1919년에 조직돼 비밀 결사로 독립운동을 하던 단체이다. 그런데 내부 간부의 밀고로 인해, 1919년 11월 관련자 에 대한 전국적인 검거 선풍이 일어나, 대구에서 거대한 사건으로 취 급됐다. 이 단체에 직접 간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평소에 부정선인 취급을 받아오던 여성들까지도 속속 체포됐고, 주동급 인물 회장 김 마리아 등 9명이 중형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大韓民國愛國婦人會事件)’이다. 


"금일의 시세는 단독히 남자만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할 것이 아니 오, 부인이라고 수수방관하는 것은 우리 동포의 의무에 상반될 뿐 아 니라 남자에 대하야 큰 수치인 즉 우리 부인되는 사람도 애국부인회 를 조직하여서 조선독립을 위하야 열심히 노력하자"


이 글은 3.1운동 직후인 1919년 6월 한영신이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면서 주장한 것이다. 남자만 독립운동을 할 것이 아니라 여자도 동포의 의무를 다하자고 호소한 것이다. 이어 서울에서도 장로회와 감리회에 각각 연합 여성단체가 구성됐고, 독자적인 활동을 하다가 연합해 본부를 평양에 두고 주요 지방에 지회를 두는 등 비밀 결사조 직으로 활동했다. 


장로회의 경우, 한영신이 발기해 김보원, 김용복, 김신희 등이 모여 조직했다. 감리회에서는 1919년 3·1 운동 이후 민족의식이 고양 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해 국내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 하기 위한‘대조선독립 애국부인회’와, 투옥 인사 옥바라지를 위주로 하는 오현관, 오현주 자매의‘혈성부인회’등 여성들의 민족 운동 조직이 결성됐다. 이때 황애덕과 이효덕이 1913년부터 운영해온 비밀 결사 ‘송죽회’도 가세했다. 참여 여성들은 대부분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며, 2·8 독립 선언이나 3·1 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여성들이었다. 이에 따라 여성 단체 통합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일어 나면서 임시정부의 지도하에 ‘혈성부인회’와 ‘대조선독립 애국부인회’가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로 통합돼 회장은 오현주가 맡았다. 


그러나 오현주는 상해를 방문했던 남편 강낙원이 돌아와 독립운동 에서 손을 떼라고 권유함에 따라 회장직을 사임했다. 이무렵, 3·1 운동에 가담해 구속됐던 김마리아, 황애덕이 출옥해 대한민국 애국부인 회에 합류했다. 김마리아는 오현주와 정신여학교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에는 이들의 정신여학교 동창들이 대거 합류했다. 오현주가 갑작스럽게 조직에서 발을 떼자, 그해 10월 경 정신여학교 내에서 회합을 갖고 김마리아를 새 회장으로 선출하는 등 조직을 재정비했다.


당초 이들 당초 활동의 주된 목적은 독립운동자금 모금과 송금이었다. 이 후 김마리아가 조직을 재정비하면서 “대한민국 국헌을 확장” 하고“대한민국에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목적을 밝혔다. 이들이 펼친 주요 사업은 동지규합, 군자금 모집, 배일사상 고취, 결사대 및 독립운동요원 원조 등이었다. 회원모집은 주로 각 지회를 통하여 이루어졌는데, 모집원의 직책을 가진 전도부인들의 활약이 컸다. 후일 애국부인회 조직이 탄로나 일경에 체포되거나 조사받은 여성의 수가 106명에 달했다. 군자금은 회원들의 회비와 지방 유지들의 헌금으로 모아졌고, 상해 임시정부 요원인 김정목, 김순일, 김경선 등을 통해 임시정부에 전달됐다. 연합본부와 지회 임원 36명 중 직업이 밝혀진 17명을 보면, 7명이 교사였고 5명이 전도부인이었다. 이들을 통한 배일사상 고취는 상당한 성과를 이루어 냈다. 평균 연령이 32세의 중견 여성들로 남성 못지않은 조직과 활동력을 보여준 것이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그러나. 1919년 11월 오현주가 남편 강낙원 과 함께 대구의 조선인 경찰관 유근수에게 조직을 밀고해 발각되고 만다. 


"경성에 근거를 두고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대한청년 외교단 과 긴밀한 연락 하에 각지의 야소교도를 망라하여 조직된 대한 애국 부인회(별명 대한독립부인회)는 자금 수백원을 모집하여 상해 대한민 국 임시정부에 송부한 것이 발각되어 경성과 각지의 지부 관계자 44 명 중 오현주 이하 23명이 수회에 걸쳐 체포되다"  (고등경찰관계년표, 1919년 11월 28일)


이 때문에 김마리아를 비롯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인사들이 대구 형무소에 투옥됐고, 재판 끝에 관련자들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일본 경찰 보고서는 이 때 검거된 80명의 애국부인회 본부 회원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세브란스병원 관계자 29명

정신여학교 관계자 11명

동대문 내 부인병원 관계자 13명

기타 17명


검거 당시「동아일보」1920년 4월 23일자에 보도된 대한민국 애국 부인회 조직 및 형량은 다음과 같다.


이들과 관계된 병원과 학교가 모두 기독교계이고 또 이곳에 종사 한 직원이 모두 기독교인이었으므로, 주동했던 사람들 모두가 기독교 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으로 조직이 와해된 것은 물론, 관련 자 중 김마리아는 구금 중 고문으로 병을 얻었고, 또 다른 정신여학교 친구인 신의경의 어머니는 화병으로 사망하는 등 체포된 이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사진 - 김마리아 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