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한국에살다


1930년대 한국교회의 교권이 서북교회를 중심으로 확립되자 이에 대응하는 교회 내의 대항 세력들이 나타났고, 그것은 교회 개혁의 에너지로, 그리고 결국은 분열의 위기로 치달았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서북계가 교권을 잡고 있는 수도권의 경성노회에서 경중노회가 갈라진 사건, 감리회의 유형기 목사가 주도한 아빙돈 단권주석 번역에 장로회 목사들이 참여하여 총회의 단죄를 받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적극신앙단 역시 서울지역의 기독교 인사들이 대거 참여해 서북의 교권에 대항한 단체이며, 서북의 보수적 신학에 대해 진보적 신학을 주창한 운동이었다. 


YMCA 총무 신흥우가 1932년 비서북계의 진보적 목사들을 모아 조직한 단체가 적극신앙단이었다. 당시 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과 그에 대칭되는 비서북계 단체로 이승만이 조직한 동지회가 있었다. 신흥우는 YMCA를 통해 이승만과 관계가 깊었기 때문에, 적극신앙단은 동지회 계보의 단체로 조직됐다. 


서북의 장로회를 중심으로 보수주의 신학은 큰 영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1925년 국제선교협의회 회장 존 모트가 한국을 방문했다. 신흥우는 존 모트의 강연에 큰 영향을 받았고, 토착적인 기독교 운동의 필요하고 민족주의적 역량의 결집이 요청되는 시대라는 생각에 그 이듬해인 1926년 2월 YMCA 에서 기독교연구회를 발족시켰다. 서울지역의 감리회 지도자들이 주축이 돼 기독교의 민중화, 생활의 간소화, 산업 기관 신설, 조선적 교회의 설립을 목표로 내걸었다. 신흥우와 홍종숙, 박희도, 박동완, 김활란, 유각경, 홍병덕 등 7인이 중앙위원으로 참여했다. 


신흥우는 예루살렘 선교대회에서 중요한 안건이었던 기독교 신앙 의 토착화를 한국교회의 상황 속에서 이루어 보려 했다. 그리고 이것을 초교파적인 신앙운동단체를 구성해 추진해 나가기로 하고 1932년 6월에 적극신앙단을 조직하게 된 것이다. 신흥우, 정춘수, 유억겸, 신공숙, 김인영, 박연서, 엄재희, 김태영, 최거덕, 전필순, 최석주, 권영식, 홍병덕, 박용희, 김영섭 등 장로회와 감리회를 포괄하는 인사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적극신앙단은 5개 조의 신앙선언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자연과 역사와 예수와 경험 속에 계시되는 하느님을 믿는다’,‘하느님과 하나 되어 악과 싸우는 것을 믿는다’,‘남녀평등이 실시되어 완전한 자유를 얻어야 한다’,‘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개인의 성취욕이 사회에 대한 공헌욕으로 변환되어야 함을 믿는다’,‘사회가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공평과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21개조의 실천 강령도 채택했다. 


이 선언이 발표되자 그 내용이 공산주의와 유사하다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신흥우는 자신이 추구하는 운동은 공산주의와 다르며 근본적으로 민족주의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밝히고, 공산주의의 하부조직처럼 YMCA의 전국 조직을 동원해 적극신앙단의 회원을 모집했다. 


그러나 가장 큰 어려움은 밖으로부터의 공격이 아니라 YMCA 안에 서 일어난 반발이었다. 윤치호, 양주삼, 김정식 등이 적극신앙단에 대해 우려 섞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적극신앙단이 비밀조직의 형태를 띠고 있고, 조직원들만의 내향적인 성격임에도 자신들을 진보적이고 애국적인 지도자라고 내세우며, 교회와 기관이 보수화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각 기관에 자기 계파의 사람들을 들여보내려 할 뿐 아니라, 그 집회가 비밀리에 이루어지고 있고 감리회 연회와 장로회 총회를 장악하려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흥사단계의 김정식이 감리회와 장로회에 적극신앙단을 고발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감리회 연회는 적극신앙단이 공적 조직이 아니고 사적 조직이므로 교회가 이를 치리하기 어렵다는 공식 의견을 냈다. 하지만 장로회 총회는 적극신앙단에 가입한 장로회 목사 박용희, 권영식, 전필순, 함태 영, 최석주 등 5인에 대해 탈퇴를 권고하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치리 할 것을 결의했다. 


적극신앙단에 대한 공격이 커져가던 중, 신흥우는 YMCA 내부의 공격으로 총무직에서 사퇴하게 된다. 그리고 때마침 이혼하여 혼자가 된 박인덕과 스캔들까지 발생, 더욱 곤란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신흥우의 사퇴로 적극신앙단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감리회 목사들은 스스로 단체에서 물러났지만, 장로회 목사들의 경우는 서북에 대한 깊은 반발을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적극신앙단에 대한 단죄에 강하게 반발했다. 전필순은 [기독신보]를 예수교서회에서 분리시켜 자영으로 운영하게 하는 것으로 교권에 대항하였고, 김영주 목사는 창세기의 모세 저작을 부인하는 학설을 기고했으며, 김춘배 목사는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평등권을 주장하면서 보수신앙에 도전했다. 


또한, 서울 지역 반서북 경향의 목사들인 함태영, 전필순, 최석주, 권영식, 이석진 목사 등은 서북계의 경성노회에 대항해 1936년 경중노회 설립을 시도하게 된다. 총회는 이를 강하게 치리하려 했지만, 김인서 등 교계 안팎의 중재 노력으로 1937년 경중노회의 분립이 이루어지고, 장로회는 가까스로 분열의 위기를 넘기게 된다. 


적극신앙단 운동은 민족주의적 기독교의 심화, 토착적 조선적 기독교의 수립 그리고 사회적 공헌과 대중의 생활 향상을 도모한 운동이 다. 하지만 교단의 근본적인 보수성과 교권의 위력, 그리고 민족주의 내의 파벌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좌절하고 만다. 그러나 이 진보적 실험 정신은 보수 일색이었던 한국교회에 에큐메니칼 정신을 구현하려 했던 중요한 경험으로 남아 있다.

일제말기 한국기독교 지도자들 사이에서 친일의 경향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은 교단총회가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면서부터였다. 신사참배에 굴복한다는 것은 천황의‘충량한 신민(臣民)’으로 길들여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친일적 기독교 지도자들은 일제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교회와 민족을 등지고 만 것이다. 


당시 친일적 기독교 지도자들은 유행처럼 ‘일본적 기독교’를 내세웠다.‘일본적 기독교’는 근대 일본에서 나온 특수한 개념이다. 즉 아라히토가미(現人神)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근대 일본에서 국가의 모든 영역은 이 국체(천황)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고, 종교는 국민 교화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마치 종교의 중심에 궁극적인 존재가 있는 것 같이, 종교를 포함한 전체 일본의 중심에는 국체로서의 천황이 존재하고 있었다. 요컨대‘일본적 기독교’란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근대 일본에서, 황국신민으로서의 일본인이라는 자기의식을 바탕에 둔 기독교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적 기독교는 천황제 일본의 패권적 야심과 결탁하여 폭력과 전쟁에 협력, 가담하고, 그리고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수용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기독교 지도자들의 친일은, 한편으로는 민족 주체성을 저버리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 역시 등지는 것일 수밖에 없다. 


장로회는 신사참배를 가결한 이듬해인 1939년 9월 총회에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을 결성하고, 일제의‘국책 수행에 협력’할 것을 다짐했다. 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이듬해 ‘총회 중앙상치위원회’를 조직하고 정인과(鄭仁果) 목사가 총간사가 됐다. 중앙상치위원회는‘장로회 지도요강’을 발표하고, 실천방책으로 신사참배, 동방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등을 규정했다. 그리고 헌법, 교리, 의식 등을 일본적 기독교로 전환하고, 찬미가 등 기독교 서적 출판물을‘국체의 본의에 기초해서 당국의 지도를 준수하고 국책에 순응’하도록 개정했다. 이는 교회가 그 본질까지 변질돼 일본의 정책에 충실히 따르는 황국신민 교화기관으로 전락하고 있었음을 의미 한다. 


장로회의 변질은 구체적인 부일협력으로 이어진다. 1941년 8월 상 치위원회는 전시체제 협력성명 및 전투기 헌납을 결의하고 정인과를 회장으로 한‘조선예수교장로교도 애국기 헌납 기성회’를 조직했다. 그리하여 이듬해 2월에 비행기 한 대와 기관총 대금 15만 317원 50전을 헌납했다. 심지어 각 노회 교역자들을‘부여신궁 조성 근로봉사’ 에 동원하기도 했다. 신궁을 조성하는데 목사들에게 노역을 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장로회의 친일행각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1943 년 5월 5일 상치위원회가 총회를 무단으로 해체하고‘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을 설립한 일이다. 다음은 이 교단이 채택한 실천요목이다.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실천요목

국가에의 봉공

   1) 대동아전쟁 목적 완수에 협력함과 동시에 사상의 완벽을 기할 것. 

   2) 시국의 진전에 즉응하여 제 교회 및 제 단체를 전시체제화하여 국가적 요청에 부응할 것. 

   3) 징병의무 및 정신을 높이 강조하여 신도에게 철저하게 할 것. 

   4) 후방 봉공의 목적으로 다음 사항을 장려할 것. 

      (1) 황군 상이 장병 및 유가족의 위문 

      (2) 군사원호 사업 

      (3) 국민저축의 실시 

      (4) 귀금철류의 헌납 

      (5) 전시 생활지도와 절약운동 

      (6) 전시 근로봉사

      (7) 매월 정액의 국방헌금 

      (8) 신사참배 및 전승기원의 독려

황민으로서의 단련

   5) 각 신도의 가정마다 다이마(일본식 부적: 필자주)를 모셔두고 황도정신을 철저히 할 것. 

   6) 국체의 본의에 기초하여 충군애국의 정신과 경신숭조의 정신을 함양할 것.

   7) 우리나라(일본: 필자주)의 순풍미속을 존중하고 강직한 기풍을 길러 끈기 있는 의지를 단련할 것. 

   8) 신도의 황민으로서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황국 고전 및 국체의 본의에 관한 지도 교본을 편찬할 것.  

   9) 각 곳에 모임을 만들어 교사(목사) 및 신도의 단련에 힘쓰고 특 히 황국문화의 연구지도를 꾀할 것.

교회의 혁신

  10) 기독교 교사(목사)로서의 교양을 높이고 솔선수범하여 세상의 사표가 되는 열매를 거두기 위해 다음 사항을 실시할 것.

      (1) 현 교사의 신학적 재교육

      (2) 교사양성 기관의 정비

  11) 일본기독교를 확립하기 위해 특히 전문가로서 일본교학의 연 찬에 노력하고 일본적 신학을 수립시킬 것.

  12) 말세 심판 재림 등은 물질적 해석을 고쳐 그것을 종교적 심령 적으로 해석할 것.

  13)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비기독교적 유대사상을 시정하기 위해 적당한 해석교본을 편찬할 것.

  14) 전시에 있는 반도 교화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신앙부흥 및 전 도진흥의 구체적 방법을 강구할 것.

  15) 신도필휴·신찬미가·기도문 및 예전요의 등을 편찬할 것.

  16) 국어(일본어: 필자주) 상용을 극력 장려할 것.

  17) 예배당은 신축 또는 개축할 경우 일본적 양식을 고려할 것.

  18) 예배 혹은 집회 양식에 대하여는 연구를 진행하여 될 수 있는 한 일본적 풍습을 채용할 것.

 

한편 장로회보다 먼저 일제에 순응했던 감리회의 경우, 1939년 새로 선출된 정춘수(鄭春洙) 감독이 취임하면서 친일양상이 뚜렷하게 표출됐다. 그 해 10월 양주삼 전 총리사의 제안으로 일본감리회와의 합동이 논의돼 1940년 9월에는 양국 교단대표가 합동결의까지 하게 된다. 이어 총리원 이사회에서는‘혁신안’을 마련해 발표했다. 혁신안은 민주주의, 자유주의 배격, 일본정신의 함양, 일본감리회와의 합동, 일본적 복음 천명 등을 규정하고 있다. 심지어 개교회의 애국반 활동 강화와‘교도로 하여금 지원병에 다수 참가하게 할 것’까지 규정하고 있다. 이어 1941년 3월에는 기존의 감리교 3개 연회를 해산하 고 일본의 교단 규칙을 따른 새 교단 규칙을 마련해 ‘기독교조선감리교단’을 조직했다. 그리고 이 새 교단은 그해 10월에 다음과 같은 ‘종교보국 5개항’을 결의하여 실천에 옮겼다.


1) 전시대응 교역자 강습회를 10월 28일부터 4일간 개최.

2) 각 교구 대표자 부여신궁 조성 노력봉사의 건.

3) 각 교회당 또는 부속 건물을 해당 지역의 집회 및 피난소, 작업 장으로 제공하고 교우들이 자진 협력할 것.

4) 각 교회 소유의 철문과 철책 등을 헌납할 것.

5) 지방별로 동계 사경회를 전후하여 전시대응 강연 또는 좌담회 를 개최할 것.


감리회의 친일양상은 교파합동으로 이어졌다. 당시의 교파합동이란 순수한 의미에서의 교회일치운동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일본 예속화 및 일제의 기독교 통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래서 한때 감리회 측이 장로회 경기노회 부노회장 전필순(全 弼淳) 목사를 포섭, 경기노회와 함께 혁신교단을 조직하고 전필순을 교단 통리로 추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기노회와 감리회의 내부 반 발 때문에 혁신교단은 해체되고 감리회은 원래대로 환원했다. 


교파합동이 결렬되자, 감리회는 1943년 8월‘일본기독교 조선감리 교단’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해 10월 교단 총회에서 정춘수가 통리에 재선돼 다시 교단의 실권을 장악하자, 1944년 3월 3일 교단 상임위원 회를 열고 다음과 같은‘애국기 헌납 및 교회병합 실시에 관한 건’을 결의했다. 


결의사항

   1) 애국기 헌납 현재 시국에서 전선에 비행기를 한 대라도 많이 보내야 할 이때 에 본 교단은 조속히 다음과 같이 애국기를 헌납한다.

      (1) 애국기(감리교단호) 3대

      (2) 애국기 헌납자금 예산액 21만원

      (3) 이 자금은 신도의 헌금 전액과 본 교단 소속 교회의 병합에 의한 폐지 교회의 부동산을 처분하여 그 대금의 일부로써 이 에 충당한다.

   2) 교회 병합 실시

      (1) 본 교단 실시사항 6항에 의하여 인접교회의 병합을 단행하여 미약한 교회의 강화를 도모함과 동시에 폐지된 교회의 부동 산은 이를 처분하여 애국기 헌납금 및 교단 운영자금으로 삼을 것.

      (2) 교회 병합 실시는 각 교구별로 이것을 정리하여 오는 4월 이내에 병합 수속을 취한다.

      (3) 병합실시 지역은 평양·해주·경성·인천·진남포·원산· 강경·강릉 등 수개 이상 교회가 같은 도시 안에 있는 것은 이를 병합할 것. 


이 결의는‘교회병합 실시 명세표’를 기초로 교회병합에 의해서 폐지될 교회를 명시하고 있다. 지역별로 평양 6개처, 진남포와 원산 각 2개처, 해주, 개성, 인천 각 3개처, 강릉, 강경 각 1개처, 경성 13개처로 총 34개처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그해 5월부터는 예배에서 구약 성서와 신약성서의 묵시록을 사용하지 말 것과, 예배 시간을 단축하여 주 1회만 회집하고 나머지는 근로시간을 늘리도록 통고하고 있다. 


군소교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940년 11월 조선구세군도 그 명 칭을 조선구세단으로 바꾸고, 일본구세단과 긴밀히 협력하며 ‘순일 본적 지도이념’및 기구를 확립할 것을 선언했다. 조선성공회도 1940년 12월 일본정신에 의한 보편적 성향을 표방하고 새출발을 다짐했다. 이와 함께 군소교단 중 동아기독교, 성결교회, 안식교는 재림사상 등 교리상의 이유로 1943년에 강제 해산명령을 받았다. 


한국기독교의 친일양상은 천황제 일본의 패권적 야심과 결탁해 일 제의 침략전쟁에 가담하고, 겨레와 교인들을 전쟁동원에 내몰고, 신앙의 가치를 훼손하는 등 교회와 민족을 배신하는 행위였다. 그 행위 의 결과, 한국기독교의 모든 교단은 1945년 7월‘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폐합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잠깐이지만 ‘한국기독교’라는 이름은 역사상에서 사라졌다.

한국 기독교 안에는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 사라져가는 겨레의 얼을 지키기 위한 다양한 모습이 남겨져 있다. 반대로 일제에 협력하는 굴절된 모습 역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런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서 작은 실천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을 심어준 이야기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를 한서 남궁억 선생을 통해서 볼 수 있다. 강원도 홍천의 작은 마을에서 조용하게 일어난 일이다. 


남궁억은 18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스물한 살에 관립 영어학원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웠다. 그리고 통역관으로 관직에 올라, 후에 칠곡 부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남궁억은 독립협회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황성신문」사장, 대한협회 회장을 지내며 충군애국과 국권회복을 위한 정치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그러나 한일합병 이후 이러한 정치적 활동에 한계를 느끼게 됐고, 때마침 악화된 건강 때문에 1918년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로 내려왔다. 


남궁억은 이곳 보리울(모곡)에 학교와 교회를 세워 새로운 차원의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인근 마을에서까지 많은 아이들이 학교로 몰려 왔다. 남궁억은 이들에게 성경과 영어, 산술,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다. 또한 노래와 시를 지어 아이들이 부를 수 있도록 직접 하모니카를 연주하며 가르쳐 주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조선의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조선이야기』와 역사책 『동사략』을 썼다. 


1922년에는 조국의 찬가‘봄 돌아와 밭 갈 때가 곧 온다’를 만들어 부르게 함으로써 민족의 가슴에 새로운 소망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이 노래는 애국성이 농후하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금지곡이 된 첫 번째 찬송가가 됐다. 이것이 바로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다.


남궁억이 무엇보다 심혈을 기울인 것은‘무궁화’가꾸기였다. 남궁억은 손수 무궁화를 가꿔 무궁화 동산을 조성하는 한편, 무궁화 묘목을 생산해 전국에 배급했다. 또한 우리나라 꽃 무궁화를 통해 민족 정신을 앙양하기 위해 무궁화와 관련된 자수를 직접 도안했고, 무궁화 창가와 무궁화 시를 지어 널리 전파시켰다. 이런 일들은 매우 은밀하게 진행됐다. 일제는 이 움직임을 포착하고 단서를 찾던 중, 춘천 여자관 지하실에서 결성된 십자가당이 남궁억의 무궁화 운동과 연관이 있음을 확인했다.


십자가당은 감리회 동부연회를 중심으로 남궁억의 무궁화운동의 지방 확산을 위해 결성된 것이기도 했다. 홍천, 춘천 지역에서 진행되는 불온운동의 냄새를 맡은 일본 경찰이 모곡학교를 급습, 교사들을 연행했다. 이에 따라 이일과 관련된 감리회 동부연회 인물들이 속속 체포됐다. 일제는 큰 건수라도 잡은 양, 시베리아에서 온 유자훈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이 사건을 사상 사건으로 몰고 갔다. 일제는 피의자 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하는 한편, 무궁화 묘목 8만주를 불살라버리고 모곡학교는 공립학교로 강제 편입시켰다. 이 사건은 예심을 거쳐 남궁억, 유자훈, 김복동, 남천우 등 네 사람만 정식 재판에 기소하는 것으로 축소되었다. 1935년 1월 경성지방 법원에서 유자훈과 남천우는 징역 1년 6 월, 김복동은 징역 6월을 선고받았고, 남궁억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러나 남궁억은 이때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심한 병을 앓다가 1939년 4월 5일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남궁억은 일제하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 지성인으로 암울한 민족적 상황에서 절망에 빠져 있던 민족의 마음속에 무궁한 희망의 씨앗을 심어 넣으려 노력했다. 새 생명의 열매를 내다봤던 남궁억의 생명 의지는,‘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실과나무 밑에 묻어서 거름이 되게 하라’는 유언으로 죽는 순간까지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언을 기리듯, 그의 기일인 4월 5일은 해방 이후 식목일로 지정돼 전 국민이 나무를 심는 운동으로 이어졌다. 


남궁억이 일제 경찰에 체포돼 받은 심문조서에는 무궁화와 조선민족에 대한 그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문:‘무궁화 동산’이라는 창가는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가?

답: 무궁화는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꽃이고, 꽃 자체가 꽃 중에서 가 장 고운 것처럼 조선민족도 번창하라는 것을 노래 부른 것이다.

문:‘무궁화 삼천리’는 어떤가?

답: 그 노래도‘무궁화 동산’과 마찬가지 의미인데,‘무궁화 동 산’은 무궁화만을 찬미한 것이지만‘무궁화 삼천리’는 조선민족과 조선의 산야를 찬미하고 그것을 자랑으로 한 노래이다.  


남궁억에게 있어서 무궁화를 전국에 배급해 꽃피게 하는 일은 조선 민족의 생명이 온 겨레에 찬란하게 피어나는 것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궁억은 무궁화를 지극정성으로 재배했다. 


문: 학교에서 많은 무궁화를 재배하고 있는데, 그 동기는 무엇인 가?

답: 무궁화는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국화이므 로, 그 꽃을 재배하여 많 이 보급시켜 놓으면 자연 민족적 감정 이 달라질 것은 이치의 당연이므로, 그 목적 아래 재배하여 보급하 는 것은 사실이다.


이와 같이 남궁억의 무궁화에 대한 사랑은 지극했다. 그는 ‘무궁화는 조선 민족을 표징하는 국화이므로 자국의 국화를 장려하여 민족 사상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이 나쁘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무궁화는 뿌리가 강하고 꽃은 이삼 개월 동안 피어 있어서 조선민족을 대표하고 있으니 조선민족도 이 무궁화처럼 영구히 번창하리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또한 조선도 세계 강국에 비견할만큼 훌륭하고 고유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하면서,“나라의 비참한 처지를 생각하면, 나 혼자 마루에 앉아 앞 산을 보며 이 조선민족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는 생각이 나면 혼자서도 우는 정도이니, 예배당에서는 물론 어디에서도 이야기하다가는 반드시 눈물이 나게 된다”고 했다.“다만 푸른 하늘을 쳐다보면서 눈물을 흘릴 뿐으로 하늘이 이 민족을 구제해 줄 기회를 기대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남궁억의 무궁화, 무궁화 동산, 그리고 그가 흘리는 눈물 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신사참배 강요의 과정

한국의 기독교사를 통틀어 가장 참혹한 수난의 시기를 꼽으라면, 신사참배를 강요당하던 시기를 꼽아야 할 것 같다. 신사참배 문제의 출발점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시작된 일본의 천황제 국가론이 다. 천황제 국가론은 대일본제국 헌법이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 世一系: 천황의 혈통이 한 번도 끊어짐 없이 이어져 왔다는 설)의 천 황이 이를 통치한다’(제1조),‘천황은 신성(神聖)하여 침범하여서는 아니된다’(제3조)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천황신성론(天皇神聖論) 에 기초하고 있다. 메이지 정부는 메이지유신 초기에 천황신성론을 바탕으로 국가신도(國家神道)를 국가종교로 확립하려 했으나, 국내외 의 반발과 국민계층간의 갈등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이를 우회해 ‘신사비종교론’(神社非宗敎論)을 표방했다.


신사비종교론’은, 천황과 천황조상신에 대한 숭배의식을 국가적 행사로 전환했으므로 이에 대한 숭배는 국민의례이지 종교가 아니라는 논리이다. 그런데 천황을 정치적 의미의 국가원수로서가 아니라 천손강림(天孫降臨)에 의한 신성불가침의‘아라히토가미’(現人神: 살아있는 신)로서 숭배했던 점, 또 황실의 조상신‘아마테라스 오오미 카미’(天照大神)가 하사했다 하여 천황의 상징이 된 3종의 신기(三神 器)를 숭배하는 점 등을 볼 때, 신도의 종교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것을 아무리‘국가행사’또는‘국민의례’라 부르더라도, 기독교인에게는 명백한 우상숭배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던 내한 선교사들은, ‘신사비종교론’이 결국에는 천황숭배와 직결된다는 점을 간파하고 일찍부터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3·1운동이 다소 소강상태에 접어든 그 해 9월, 내한 선교부 연합회는 조선총독에게 진정서를 보내,‘신사에 참 배하는 비기독교인 대다수가 천황을 신 또는 신과 같은 지고자(至高 者)라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신사에 국왕에 대해 존경을 표하는 것을 넘어서는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신사불참배의 의사를 명확히 했다.


이윽고 일제와 마찰이 빗어졌다. 1925년 조선신궁 진좌제(鎭座祭)에 서울지역 기독교계 학교들이 불참한 것이다. 진좌제는 일본 천황가의 위패를 조선신궁에 안치하는 행사로, 조선총독부로서는 위신이 걸린 중요한 행사였다. 그런데 기독교계 학교가 대거 불참한 것은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총독부의 반응은 의외였다.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국민의례이지 종교행위가 아니지만, 강요에 의한 참배는 효과를 거두기 어려우므로 양해(諒解)를 구하되 분규가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동아일보』1925년 10월 15일자 인터뷰)고 한 것 이다. 1925년까지만 해도 일본 본토에서조차 군국주의적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아직 확립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총독부로서도 3·1운동 이 후 점차 격화되고 있는 사회주의운동, 노동운동, 민족해방투쟁 등에 부심하고 있던 까닭에, 신사참배 문제를 둘러싸고 기독교계와 불화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이쇼(大正)시대가 지나고 쇼와(昭和)시대가 시작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천황에게 절대적 권력을 다시 이양해야 한다는 군부의 ‘황도파’(皇道派)가 득세하면서 이른바 ‘쇼와유신’(昭和維新)이 주창됐다. 더욱이 만주사변(1931) 이후‘신사비종교론’으로 포장된  황숭배의식은 군국주의와 결합하기 시작했고, 신사참배에 대한 총독 부의 정책은 강경 일변도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1932년 1월 14일  남 광주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가‘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만주 사변에 대한 기원제에 참가하지 않거나 혹은 회합에는 참가하더라도 신사에 참배하지 않은 것에 대해’ 학무당국의 엄중한 주의가 내려 다. 이 일은 기독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의 시작이었다. 


이윽고 신사참배 문제의 기로가 되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평양의 기독교계 학교장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사건은 1935년 11월 14일 평남지역 공사립중등학교장 회의에서 발생했다. 평남도지사는 회의 참석차 소집된 학교장들에게 학교 장회의에 앞서 신사참배를 하라고 요구했다. 이 때 숭실전문과 숭실 학교의 학교장을 겸임하고 있던 매큔(George S. McCune, 윤산온), 숭의여학교 교장 스눅(Velma L. Snook, 선우리)의 대리인 정익성(鄭益 成), 안식교의 순안의명학교 교장 리(Howard M. Lee, 이희만) 등 기독교계 학교장들은 도지사의 신사참배 요구를 거부했다. 평남도지사의 회유와 협박이 몇 차례 있었지만, 매큔 선교사의 완곡하지만 단호한 거부로 무산됐다. 사건은 장로회 내한 선교부 선교사회와 총독부의 힘겨루기로 옮겨갔다. 일제는 여러 통로를 통해 이들 학교장의 해임은 물론 학교를 폐쇄하겠다고 협박해 왔다. 그러나 매큔은 신사참배가 신앙의 양심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밝히고, 신사참배 강요에 굴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갈등이 해를 넘기면서 수차례 신문에 보도되는 등 사태의 추이는 한국사회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결국 매큔과 스눅이 학교장에서 파면되는 것으로 사건의 막은 내렸지만, 이후 노골적으로 조여 오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한국기독교에 기나긴 형극(荊棘)의 길이 됐다. 


신사참배 강요와 굴복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총독부는‘황국신민서사’(皇國臣 民誓詞: 황국신민으로서의 맹세)를 제정해 학교, 관공서, 은행, 회사, 공장 등의 조례시간이나 회합시간에 이를 제창하도록 했다. 또「조선 교육령」 제3차 개정(1938. 3)에서는, 학교의 이름과 교육과정 등을 일본 본국과 같게 하고, 한국어와 한글의 사용을 전면적으로 금지시켰다. 본격적인 ‘황국신민화 정책’의 시작인 것이다.  


황국신민화 정책의 핵심은 한국인을 일본 천황의‘충량한 신민(臣 民)’, 즉 충성스럽고 신하된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충량한 신민은 천황을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할 뿐 아니라, 천황의 조상신도 숭배해야 했다. 요컨대 신사참배로써 한국인을 천황의 ‘충량한 신민’으로 길들이는 것이다. 나아가 황국신민화 정책은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목적을 갖고 있었다. 첫째, 천황과 국가를 신성화함으로써 모든 도덕적 가치를 이에 귀속시키고 어떤 이념이나 가치체계도 한국인으로부터 빼앗으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권력행사를 무제한적으로 확대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둘째, 한국인을 일본의 배타적인 국수주의에 동화, 흡수시킴으로써 한국인의 독자적인 민족정체성을 없애려는 것이었다. 셋째, 한국인을 일본 의 침략전쟁에 동원하여 한국의 자원과 한국인의 노동력은 물론,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무한 착취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총독부의 입장에서 보면, 황국신민화 정책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기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상숭배를 금지하고 있는 기독교는 교리적으로 신사참배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천황의‘충량한 신민’으로 길들이기 위한 신사참배에 기독교가 거부감을 갖고 있으니, 기독교가 황국신민화 정책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총독부 경무국의 자체 보고서(1938)에서도, ‘예수교도는 시국에 대해 매우 냉담함 태도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신사참배를 비롯한 일련의 국가 행사에 참가하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의 계명에 어긋난다고 하여 이를 기꺼워하지 않는다. 이들은 또 예수를 만왕의 왕으로 내세워 불경죄 혐의로 처벌되는 경우, 또는 그릇된 평화관에 사로잡혀 반전(反 戰) 언사를 함부로 하는 등의 사안이 곳에 따라 발생하여 후방 국민의 정신적 결속을 문란케 하는 사태를 야기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즈음부터 기독교인에게 신사참배, 황거요배, 국기에 대한 경례 등 공권력을 동원한 물리적 강요가 점점 커져 갔다. 총독부 경찰자료 에 의하면, 1937년 말부터 1938년 4월까지‘불경죄(4건) 17명, 보안법 위반(5건) 5명, 구류(3건) 3명, 행정검속(5건) 7명’등 신사참배에 불 응하여 체포된 기독교인은 총 17건에 32명에 달하고 있었다. 공권력 행사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의 끈질긴 저항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 다. 그래서 총독부는 기독교에 대한 특단의 조처가 필요했고,‘기독 교에 대한 지도대책’(1938. 2)을 다음과 같이 수립했다.


1. 시국인식을 철저히 하기 위하여 예수교 교역자 좌담회를 개최하고 지도계몽을 노력하여, 이를 통하여 일반 교도의 계몽을 담당하게 할 것. 

2. 시국인식 철저를 위한 지도 및 시설

1) 교회당에는 될 수 있는 한 국기게양탑을 건설하게 할 것, 건설하 지 않는 경우라 하더라도, 축제일 또는 이유 있는 경우에는 국기 를 게양하게 할 것.

2) 예수교의 국기에 대한 경례, 동방요배, 국가 봉창,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 등을 실시하게 할 것. 아울러 전승 축하회, 출정 황군 의 환송영 등 국가적 행사에는 적극적으로 참가를 종용할 것. 

3) 학교의 신사참배는 국민교육상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일반 예 수교도의 신사참배에 대하여는 지방의 실정에 참작하여 우선 예 수교도의 신사에 대한 관념을 이해시켜 강제로 함이 없이 실효 를 거두도록 지도할 것. 

4) 서력 연호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경우 외에는 될 수 있는 한 사용하지 않도록 습관을 붙일 것.

3. 외국인 선교사에 대하여는 선교사의 자각을 기다릴 것.

4. 찬미가·기도문·설교 등으로 그 내용이 불온한 것에 대하여는 출 판물의 검열 및 임감(臨監) 등에 의하여 엄중 단속할 것.

5. 당국의 지도 실시 때에 이에 순응하지 않는 예수교도에게 부득이한 경우 관계 법규(행정집행령, 경찰범 처벌규칙 기타)를 활용하여 합 법적으로 조치할 것.

6. 국체에 적합한 예수교의 신건설운동에 대하여는 그 내용을 엄밀히 검토하여 목적이 순진하고 장래 성과가 예상되는 것에 대하여는 이 때 적극적으로 원조하여 줄 것.


이‘지도대책’을 강행하기 위해 총독부 경무국은 각 도를 순회하 며 시국좌담회와 교역자 좌담회를 개최해 기독교를 압박했다. 반복적 이고 지속적인 강요와 압박에, 기독교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 다. 먼저 1938년 2월 전국에서 교세가 가장 큰 노회 중 하나인 평북노 회가 신사를 참배하기로 가결한 것이다. 당시 평북노회는 헌병 보조 원 출신의 김일선(金一善) 목사와, 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 때 총회장이었던 홍택기(洪澤麒) 목사가 이끌고 있었다. 평북노회는 출 석회원 116명의‘전원찬성’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한편 총독부로부터 신사참배에 대한 지속적인 압박을 받아오고 있 던 감리회는 결국 1938년 9월 3일 총리사 양주삼 목사의 명의로 신사 참배를 거행한다는 성명서를 총독부에 통고했다. 그리고 그 해 10월 5 일 열린 제3차 연회에서는, 별도로 애국일을 실시하고 연회에 참석한 대표 및 교역자와 감리회 소속 학교 학생 약 7천명이 총리사 양주삼 목사의 지휘 하에 배재중학교 교정에 집합해 국가봉창, 황거요배, 황 국신민서사 제창, 황군의 무운장구의 기도 등을 행하고, 총독부를 방 문해 만세를 봉창한 후 시가를 행해 조선신궁에 참배했다. 


신사참배에 끈질기게 저항하고 있던 장로회의 총회가 다가오자, 총 독부와 경찰당국은 보다 치밀한 사전준비에 착수했다. 평양노회는 산 정현교회에서 열린 제34회 정기노회(1938. 3)는, 황은(皇恩)의 무궁하 심을 감사하는 심익현(沈益鉉) 목사의 기도로 개회됐다. 이어 둘째 날 에는 일본기독교회 사이와이쵸(幸町)교회 나가다(永田) 목사를 초청 해 애국예배를 드렸다. 이 예배시간에 황거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일장기 게양 등을 거행함으로써 신사참배를 제외한 총독부의 요구를 거의 모두 수용하고 말았다. 장로회에서 가장 교세가 강한 평북노회 와 평양노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거나 또는 총독부 방침에 순응하는 자세를 대내외적으로 표명하자, 다른 노회에도 그 영향력이 미쳤다. 그 해 8월말까지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했던 것이 다. 


총독부는 이 여세를 몰아 장로회 총회에서도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각 지역의 경찰서장은 총회에 앞서 23개 노회에서 총대로 선출된 노회대표들에게 다음과 같은 3개 조건 중 하 나를 택하도록 강요했다. 


① 총회에 참석하여 신사참배 찬성을 동의할 것

② 신사참배 문제가 상정되면 침묵을 지킬 것

③ 앞의 두 조항을 실행할 의사가 없으면 총대를 사퇴하고 출석하 지 말 것


이 세 가지 요구에 모두 불응하는 사람은 예비검속과 그에 이은 구 금으로 아예 총회장에 나갈 수 없도록 했다.‘예비검속’이란 치안유 지법(1925년 제정) 등에 기초해서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범 죄를 저지를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수사기관으로 연행해 심문 조사 하고 구금하는 악법이었다. 당시 평양노회 부노회장 주기철 목사를 비롯하여 증경 총회장 김선두 목사 등 신사참배에 적극적으로 반대해 온 교회지도자들은 예비검속이라는 명목으로 수감됐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외국인이라서 외교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 때 문에 예비검속으로 구금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장로회 총회가 개최되 기 2주전, 평양경찰서장은 평양에 있는 장로회 선교사들을 경찰서로 불러 모아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가 통과될 것이니 어떤 식 으로든 방해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경고했다. 그리고 총회 하루 전인 9 월 8일에도 선교사 총대 30여 명을 모두 평양경찰서로 불러 총회에서 채택될 성명서를 미리 읽어주고, 선교사들은 아무런 발언도 하지 말 라고 명령했다. 만약 이를 방해할 때에는 한국에서의 선교사업을 계 속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매우 단호한 경고도 있었다. 


1938년 9월 9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가 평양 서문밖교 회에서 개회됐다. 신사참배 문제가 논의된 것은 둘째 날인 9월 10일 이었다. 총회 회의장 밖에는 정사복 경찰 수백 명이 포위하고 있었 고, 회의장 양 측면에는 칼을 찬 정복경찰들이 도열해 있었다. 강대 상 앞좌석에 평남 도경찰국장 및 경찰 고위간부들이 자리를 하고 있 었고, 총대들 옆에는 총대들의 관할 경찰서 소속 사복경찰들이 포진 해 있었다. 이윽고 평양노회장 박응률 목사가 평양, 평서, 안주 3개 노회 총대 32명을 대표하여 신사참배를 찬성하는 긴급동의를 제출했 다. 이 발의에 대해 평서노회장 박임현(朴臨鉉) 목사와 안주노회장 길 인섭(吉仁燮) 목사의 동의와 재청이 있었다. 이 때 블레어(William N. Blair, 방위량)가 일어나 신사참배를 반대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뒤이어 2~3명의 선교사가 교대로 일어나 반대의견을 표명했다. 회의 장이 순간 소란스러워지자 도열해 있던 경관들이 앞으로 나와,“미리 서로 얘기한 것처럼 조선인 대표가 국민으로서의 국가에 대한 충성을 피력하기 위해 신사참배 결의를 제안하는데, 국적이 다른 선교사측에 서 이를 저지하는 행동으로 나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선교사들 을 위협했다. 이어 총회장 홍택기 목사가“이 안건이 가하면 예라고 대답하십시오”라고 묻자, 동의 재청자 몇몇이“예”라고 대답했고, 회 의에 참석한 한국인 총대 159명은 침묵을 지켰다. 홍택기가‘부’를 묻 지 않고 동의안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하자, 블레어를 위시하여 선교사 들이 차례로‘불법’임을 외쳤다. 이에 평양노회 이승길 목사가“선교 사 형님들은 발언을 자제하고 자리에 앉으시오”라고 선교사들을 제지 했다. 헌트(Bruce F. Hunt, 한부선)가“나는 선교사 자격으로 이 자리 에 참석한 것이 아니라 총대의 자격으로 발언한 것이오”라고 맞받았지 만, 경찰이 헌트 및 몇몇 선교사를 강압으로 퇴장시키자 선교사들은 전원 퇴장했다. 이어 서기 곽진근(郭鎭根) 목사가 신사참배 성명서를 낭독했다. 


"우리는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의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본뜻을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한다. 그러므 로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하여 열심히 행하고 나아가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아래 후방의 황국신민으로서 열과 성을 다하기로 결의한다."  -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성명서 낭독 후, 평양노회 총대 심익현(沈益鉉) 목사가 신사참배 결 의를 즉시 실행에 옮기기 위해 총회 임원과 각 노회장이 장로회를 대 표하여 평양신사에 참배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부총회장 김길창(金 吉昌) 목사가 앞장서서 총회 임원 및 노회장 23명을 데리고 평양신사 에 참배했다. 


이로써 당시 전체 개신교인 40만 명 중 70%에 해당하는 28만 명의 조선예수교장로회는, 폭압적이고 집요한 신사참배 강요에 상당히 오 랜 기간 끈질기게 이어 온 항거를 접고 마침내 굴복했다. 총독부측은 ‘실로 특수한 분위기를 가진 조선의 기독교 가운데서 자라난 사람들 이지만, 국가 비상시를 만나서는 역시 일본인으로서의 본래 모습으 로 돌아서서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번 총회의 결의에서 현실 로 실증될 수 있는 바였다. 이제야 기독교 최후의 아성은 무너진 것이다’라고 환호작약(歡呼雀躍)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

한국기독교에서 교세가 큰 장로회와 감리회 두 교단이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했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인 전체가 신사참배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평북노회가 장로회 지방노회로서 가장 먼저 신사참배를 결의(1938. 2)했을 때,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들과 학생들은 크게 분노 했다. 평북노회소속 신학생 장홍련(張弘璉)은,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것은 온당치 못하다며 평북노회장 김일선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신학교 교정의 기념식수를 베어버렸다. 평양경찰서는 이 사건이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신속히 박형룡, 김인준 등 교수 2명과 신학생 7명을 검거, 구금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혐의점과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구속자 전원 석방으로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 했다.


하지만 신사참배 문제는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폐교로까지 이어졌다. 1938년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결의될 것으로 예측되던 상황에서, 당시 평양신학교 교장 대리 클라크(Charles A. Clark, 곽안련)는 신사참배 결의의 추이를 살피며 개학을 총회 이후로 연기해 놓고 있었다. 평양신학교 이사장 블레어, 교장 로버츠(Stacy L. Roberts, 라부열) 등 평양의 유력 선교사들은 모두, 신사참배 문제에 강경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결국 제27회 장로회 총회(1939. 9. 10) 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학교 측은 개학을 무기한 연기했다. 6개월 동안 휴교 상태였던 평양신학교는 1939년 3월 13일 47명의 졸업생에 게 졸업증을 수여하는 것으로 마지막 졸업식을 거행하고 자진 폐교했다. 


한편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목회자 및 교인 개개인의 거부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됐다. 첫째는 일제당국 및 유력한 인사에게 신사참배 강요를 중지해 달 라는 청원운동이었고, 또 하나는 총독부 당국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고 다른 목회자나 교인들에게도 이를 확산시키는 운동이었다. 


평양노회에서 신사참배 강요금지 청원운동을 했던 인물은 박관준(朴寬俊) 장로와 총회장을 역임했던 김선두(金善斗) 목사였다. 먼저 박 장로는 총독과 평남도지사에게,‘한국기독교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라. 무고히 검속되어 있는 한국기독교인들을 곧 석방 하라’는 내용의 청원서와 경고문을 보내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경고하다가 여러 차례 경찰에 끌려가 취조를 받았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는 효력이 없다고 여긴 박 장로는 신사참배에 함께 항거해 온 최봉석(崔鳳錫, 일명‘최권능’) 목사와 안이숙(安利淑) 선생을 만난 자리 에서,‘중앙정부에 운동을 위해 가고 싶다’고 청원운동의 뜻을 내비쳤다. 마침 신사참배 거부로 선천 보성여학교 교사직을 사퇴한 바 있는 안이숙 선생이 통역으로 동행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들은 1939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일본신학교에 재학중이던 박 장로의 아들 박영창(朴永昌)과 함께 일본 기독교 지도자 및 일본 정계 인사들과의 면담을 시도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제74회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 회의장에 방청객으로 들어가 종교법안 제정 반대, 신사참배 강요 철폐 및 구속된 기독교인 석방,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국교 창립에 관한 건의 등을 담은 건의서를 회의장 단상을 향해 투척했다. 이 사건으로 이들은 현장에서 체포됐고, 도쿄경시청에 40일간 구금됐다가 한국으로 회송됐다. 박영창은 중국으로 망명하고, 박관준 장로는 그 이후로도 끈질기게 신사참배 항거운동을 전개하다 가 옥고를 치렀으며, 결국 1945년 3월 13일에 순교했다. 


박관준 장로와는 별도로 증경총회장 김선두 목사(서문밖교회)의 청원운동도 있었다. 3·1운동 당시 총회장으로서 평양지역 만세시위운 동을 주도해 옥고를 치렀던 김 목사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1938년 봄 경찰에 체포됐다. 그 때 도쿄문리학교 유학생 김두영(金斗英)이 평양노회 하기 사경회 강사로 잠시 귀국해 있었는데, 김목사는 그의 도움으로 병보석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김두영이 일본 정계 요로와 인연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김 목사는, 도쿄에서 신사참배 강요 금지 청원운동을 벌일 계획을 세웠다. 1938년 8월 도쿄에 도착한 김 목사와 김두영은, 김두영이 도쿄 후시미쵸(富士見町)교회에서의 인연으로 친분을 맺게 된 일본 정계 실력자 3인을 만나, 한국 기독교가 총독부의 신사참배 강요로 수난을 당하고 있다고 호소하고 신사참배 강요 금지를 위해 노력해 줄 것을 요청했다. 김 목사와 김두영의 노력으로 일본 정계 요로들은 미나미 조선총독과 면담해 총독부가 신사참배를 강압적으로 추진하지 않도록 중재했다. 하지만 김 목사가 총회가 열리는 평양으로 가기 위해 열차를 탔을 때, 경찰이 열차에서 김 목사를 체포, 개성에서 하차시켜 구금해 버렸다. 어쩔 수 없이 김두영 혼자 신사참배 부결을 이끌어 내 보려고 총회 장소인 서문밖교회로 갔지만, 서문밖교회는 이미 경찰에 의해 봉쇄돼 있어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청원운동과 달리 적극적으로 신사참배에 항거하고, 더 나아가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신도들과의 연대를 형성한 운동도 있었다. 평양에서 는 산정현교회를 중심으로 신사참배 항거운동이 전개됐다. 한국 기독 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1938년, 평소부터 ‘일사각오’의 마음으로 신사참배에 항거하고 있던 주기철 목사(산정 현교회)는 그 해 이미 몇 차례의 검속과 석방을 반복했다. 주 목사가 구금된 동안에는 번하이슬(Charles F. Bernheisel, 편하설)이 산정현 교회의 강단을 맡았고, 교인들 역시 대부분 굳건히 신사참배에 불응 하고 있었다. 1939년 1월말 주 목사가 석방되자,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경찰의 극악무도한 고문에도 신앙의 자세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주 목사에 감동했고, 주 목사 또한 자신이 교회를 비운 사이에도 굳건하 게 믿음을 지키고 있는 교인들을 보고 안도했다. 주 목사의 귀환 이후 산정현교회는 자연스럽게 신사참배 항거의 구심점으로 자리매김 했 다. 


그러나 산정현교회 바깥의 사정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 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이후, 평양기독교계는 평양기독교친목회 등 친일파가 주도하고 있었다. 정도의 차이가 있었지만 신사참배에 항거하고 있던 교회와 목사들도 전방위적 압박과 회유에 하나둘씩 신사참배를 수용하거나, 아니면‘소극적 순응’또는‘도피성 유학’으로 흐르고 있었다. 주기철 목사와 같이 신사참배 항거운동에 뜻을 같이한 사람은 목회일선에서 은퇴한 채정민, 최봉석 목사와 평양 신학교 재학생 이인재(李仁宰) 전도사, 그리고 산정현교회에서 함께 사역 하던 방계성, 백인숙(白仁淑) 전도사 정도였다. 


주기철 목사를 굴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확인한 경찰 당국은 주 목사의 목사직 파면, 그리고 산정현교회의 폐쇄로 목표를 바꿨다. 먼저 목사 임면과 당회 시무정지 권한이 있는 평양노회를 조정하기 시 작했다.‘총회나 노회의 결의를 무시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목회자를 강단에 세우지 말라’고 평양노회에 물밑 작업을 한 것이다. 이어 평양노회가 정기노회(1939. 10)에서 주 목사에게 신사참배를 수용하라고 압박을 가했지만, 주 목사는 이에 불응했다. 그러자 경찰당국은 주일예배(1939. 10. 15) 때 산정현교회를 포위하고 주 목사가 설교를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주 목사는‘나의 설교권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하나님이 하지 말라 하시면 그만 둘 것이오. 내 설교권은 경찰서에서 받은 것이 아닌 즉 경찰서에서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소’라고 당당하게 설교를 했다. 그 날 이후 며칠 지나지 않아 주 목사는 경찰에 체포됐고, 이 설교는 산정현교회에서의 마지막 설교가 됐다. 


비록 주 목사가 체포됐지만 산정현교회는 신사참배 항거를 계속했다. 경찰 당국은 노회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목사뿐만 아니라 선교사도 설교를 하지 못하도록 조치해 놓았다. 그러나 산정현교회 당회나 번하이슬은 노회의 지시를 무시했다. 산정현교회 교인들이 경찰의 거듭된 폐쇄 포에도 흔들림 없이 신사참배 불응의 자세를 유지하자, 경찰 당국은 다시 노회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에 따라 남문밖교회에서 평양노회 임시노회(1939. 12)가 열렸다. 노회장 최지화 목사는 총회장이 발송한 경고 서한을 낭독하고‘우리 노회 안에 오직 한 교회만 목사와 함께 모든 교인들이 신사참배를 하라는 총회 장의 명령을 어기고 있다’고 서두를 꺼냈다. 이어 노회장은 총회장의 경고문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장로회 권징조례 19조에 의거, 주기철 목사의 면직을 선포하고 이인식(李仁植) 목사를 산정현교회 당회장으로 임명했다. 


경찰 당국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신사참배 항거의 상징인 산정현 교회를 폐쇄해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했다. 경찰 당국은 다시 평양노회에 압력을 가했다. 부활주일인 1940년 3월 24일, 노회장 최지 화 목사와 산정현교회 당회장에 선임된 이인식 목사, 그리고 7인의 전권위원들이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산정현교회를‘접수’하기 위해 산 정현교회로 갔다.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양재연 집사의 인도로, 부활 주일에 어울리지 않는 찬송 204장‘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반복해 부 르면서 그들의 예배 인도에 항거했다. 800여 교인들의‘찬송투쟁’으로 예배 개시가 불가능해지자, 경찰이 난입해 교인들의 찬송가를 빼 앗고 닥치는 대로 구타하며 교인들을 끌어냈고, 양재연(梁在演) 집사, 방계성 전도사, 박정익 장로, 오정모(吳貞模) 사모 등 남녀 교인 13명 을 연행했다. 이 날 노회 전권위원들은 경찰의 도움으로 교인들을 모 두 교회에서 내몬 뒤 문을 봉쇄하고 다음과 같은 공지문을 붙였다. 


“금번 형편에 의하여 당분간 산정현교회 집회를 정지함”

또한 노회 전권위원들은 오정모 사모까지 경찰에 구금된 상황에서 팔순이 넘은 노모를 비롯한 주 목사 가족들을 목사관에서 쫓아냈다. 목사관이 또 다른 형태 의 신사참배 항거의 상 징이 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는 경찰의 판단 때문이다. 교회 폐쇄로 예배당에 들어갈 수 없었던 교인들은 채정민 목사, 방계성 전도사, 이인재 전도사 등의 집을 돌며 주일예배를 드렸다. 교인 가정을 구역으로 나눠 백인숙 전도사와 오정모 사모가 심방하면서 신앙을 지도했다. 제도권 교회를 빼앗 긴 교인들이‘지하교회’를 형성해 신사참배에 항거하는 양상으로 전개된 것이다. 


이런 지하교회 형태의 신사참배 항거운동은, 처음에는 개인 차원 에서 시작돼 1939년 여름을 지나면서 지역 중심의 저항운동으로 전개 돼 나갔고, 1940년부터는 전국적인 연대운동의 양상으로 발전했는데, 산정현교회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여기에 원로 채정민, 최봉석 목사와 김의창 목사, 김윤선 전도사, 오윤선 전도사, 오정모 사모 등이 합류했고, 밀양의 이인재 전도사, 신의주에서 이광록, 선천에서 김지성, 이병희, 안이숙, 박신근, 정주에서 김형록, 개천에서 박관준 장로, 마산에서 이약신, 부산에서 김두석 등 전국 각지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목회자와 교인들이 평양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산정현교회 교인들과 연대하며‘지하교회’형태로 신사참배 반대 신앙을 지켰고, 노회나 기성교회로부터 견제를 받았지만 선교사들로부터는 암묵적 지지와 후원을 받았다. 


한편 1940년 4월 20일에서 21일까지 남북 및 만주의 신사참배 항거 운동 지도자들이 모여‘신사불참배 교회 및 신사불참배 노회 재건’을 맹세했다. 이는 기존 총회나 노회의 결의에 항거해 새로운 노회와 교 회를 건설하겠다는 획기적인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경찰 당국이 관련자들을 일거에 검거하는 바람에 결실을 얻지 못했다. 


총독부는 1940년 9월 20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있는 기독교인을 일제히 단속, 193명을 검거했다. 평양지역에서는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이 1941년 5월 15일에 이기선 목사 등 68명을 이전부터 경찰에 의해 예비검속 등으로 구금돼 있던 사람들과 묶어 이른바 ‘예수교도의 신사불참배 교회 재건운동사건’이라는 이름으로 구 속 수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2년 3월 12일 관련자 68명 가운데 35명을 기소하여 예심을 청구했는데, 8명은 기소유예로 풀려 나고 나머지 25명은 1945년 5월 18일 예심이 종결될 때까지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중에서 최봉석(최권능) 목사, 주기철 목사, 박관준 장로, 최상림 목사 등 4명은 옥중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신사참배 항거운동은 평양과 평북의 북쪽과 경남북 및 전남의 남 쪽, 그리고 만주에 걸쳐서 전국적으로 전개됐다. 총회 및 노회가 신사 참배를 결의하고 개별 교회에 이를 강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지하교회’를 형성해 신사불참배 교회 및 노회를 건설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 한 것이다. 그러나 경찰 당국의 끈질긴 탄압으로 항거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대부분이 투옥됨으로써, 신사불참배 운동은 그들이 원하는 방 향으로 전개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들이 신앙과 교회를 지키기 위 해‘일사각오’로 싸웠던 그 정신은 결코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일제하 한국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신앙과 함께 ‘민족독립’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항일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이 강화되는 가운데, 교회 지도자들은 친일양상으로 기울었지만 평신도 지도자들 중 많은 사람들은 반일적 성향을 잃지 않고 있었다. 특히 조직적인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로 수양동우회와 흥업구락부를 들 수 있다. 수양동우회는 안창호가 주도하는 흥사단의 국내조직으로, 주로 서북지역 장로회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흥업구락부는 이승만이 주도하는 동지회의 국내조직으로, 주로 기호지역의 감리회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3·1운동 직후 안창호는, 독립의 방책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독립전쟁을 개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열강 특히 미국에 한국독립의 지지를 청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둘 모두 현실적 가능성이 떨어진다. 독립전쟁을 반대하는 것은 독립을 반대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반드시 일으켜야 하지만, 독립전쟁의 목적은 전쟁개시 자체가 아니기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려면 군대의 훈련, 보급, 전술, 조직 등 독립전쟁을 위한 제반 준비가 갖춰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전쟁 준비론 또는 군사적 실력양성론을 주장한 것이다. 또한 외교 노선에 대해서도, 한국독립을 지지하는 유력한 열강으로는 미국을 꼽을 수 있는데, 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과정을 지켜본다면 미국이 한국독립에 적극적으로 호응할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다. 따라서 안창호의 견해를 종합하면, 독립전쟁이나 외교노선은 현실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실업의 진흥, 자본의 축적, 교육의 발전을 이뤄내는 것이 우선 해야 한다는, 말하자면‘독립준비론’이라고 할 수 있다. 안창호는 독립준비론을 확대할 목적으로 국내조직을 새롭게 조직했다. 그 결과 ‘수양동우회’가 등장한 것이다. 


수양동우회는, 신민회를 통해 안창호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서북지역 기독교인들과 흥사단 인맥의 합작으로 조직된 단체라고 할 수 있다. 한일합방 직전에 신민회의 운동노선을 논의하기 위해 중국 청도(靑島)의 지도부 회합에 참석한 안창호는, 지도부의 견해가 엇갈려 단일노선이 불발되자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흥사단’(1913.5)을 조직했다. 이어 3·1운동 발발 후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으로 재직하면서, 흥사단의 취지에 동의하는 동지를 규합해 중국과 일본, 러시아 연해주 지역까지 포함하는‘흥사단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1920.12)를 조직했다. 이 때 흥사단은 활동거점이 해외에만 있기 때문에, 흥사단 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한국 내에 흥사단 지부가 설립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에 따라 이광수, 김종덕, 박현환 등이 흥사단 국내지부 결성의 임무를 갖고 귀국하해 ‘수양동맹회’(1923.2)를 조직했다. 


한편 신민회 이래 안창호의 서북지역 인맥은 대성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한‘대성학교 친목회’,‘동우구락부’등을 통해 이어지고 있었다. 안창호는 동우구락부와 수양동맹회는 흥사단과 그 이념과 목적이 같기 때문에 이광수에게 이 두 단체의 통합을 지시했고, 이광수의 적극적인 주도로‘수양동우회’(1926.1)가 결성된 것이다. 이후 수양동우회는 서북지역과 서울을 중심으로 그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서울의 주요한, 이용설, 김윤경, 이대위, 이윤제 등과 서북의 김동원, 백영엽, 정인과, 김성업, 김선량, 김항복, 김하현, 한승곤, 한승인 및 함북의 송창근 등이 주요 회원이었다. 그런데 수양동우회는 겉으로는 온건한 인격수양 및 친목단체를 표방했지만, 시실은 일종의 민족주의 비밀결사였다. 또한 기독교단체임을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그 회원들이 대부분 기독교인이고, 그 세력거점 또한 대부분 기독교 단체들 이었다. 예를 들면, 장로회 총회의 종교교육부, 장로회 청년조직인 기독교 청년면려회, 평양YMCA, 서북지방의 기독교계 학교 등이 세력 거점이었던 것이다. 즉 장로회계 민족운동 진영의 일부가 안창호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동우회가 일경에 포착된 것은 1937년 5월 기독교 청년면려회 서기 이양섭이 발송한 금주운동 인쇄물 때문이었다. 이 인쇄물에 들어있는 ‘멸망에 빠진 민족을 구출하는 기독교인의 역할’이라는 문구를 포착 한 경찰 당국이 이양섭을 취조한 결과, 그 배후에 이용설, 정인과, 이대위, 주요한, 류형기 등 동우회 인사들이 관련돼 있음이 발각된 것이 다. 경찰은 서울, 평양, 선천, 안악 등지의 관계자 181명을 치안유지법위반으로 검거해 42명을 기소했다. 이들은 1941년 10월 3심 공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이는 이들을 사상적으로 전향시켜 적극적인 친일세력으로 이용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한편 이상재, 신흥우 등 YMCA 지도부는 국제적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지속적으로 외교 및 국제활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일본 YMCA동맹의 우산에서 벗어나 세계 YMCA동맹에 단독으로 가입(1924.7)했고, 또한‘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1925.11)를 설립할 수 있었다. 이로써 YMCA는 일본의 방해를 받지 않고 국제사회에서 발언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된 것이다. 


워싱턴 회의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외교 독립노선을 견지하고 있던 이승만은, 3·1운동 직후 상해 임시정부의 임시 대통령에 선임됐다. 하지만, 임시정부 안에서의 활동이 여의치 않자 자신의 근거지인 하와이로 돌아가 자신의 친위단체인 ‘동지회’(1921.9)를 조직했다. 또한 국내 기반을 모색하던 중, 일찍부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신흥우에게 동지회의 국내지부 조직을 요청했다. 이에 신흥우는 이상재, 윤치호, 유성준 등 이승만과 친밀한 관계의 기독교 인사들을 규합해 ‘흥업구락부’(1925.3)를 조직했다. 흥업구락부의 주요 회원은 대부분 상류 지식인층에 속하는 기독교 유력자들이었기 때문에 국내의 기독교계와 문화단체에서 자기 세력을 키워 나갔다. 특히 1932년 신흥우에 의해 조직된 적극신앙단은 흥업구락부의 정신, 신앙운동적 성격을 띠었던 단체였다. 


이와 같이 비밀리에 활동을 전개하던 흥업구락부가 1938년에 경찰 당국에 포착됐다. 연희전문학교 좌익교수를 중심으로 ‘경제연구 회사건’관계자를 취조하던 중, 연희전문학교 부교장 유억겸의 방에서 동지회와의 연락을 취한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사건을 추적하던 경찰 당국은 조선기독교연합회 총무 구자옥의 자택에서 ‘흥업구락부원 명부’및‘흥업구락부 일기’를 발견했다. 이 사건으로 신흥우, 이건춘, 구자옥, 이관구, 최두선, 홍병덕, 정춘수 등 54명이 체포돼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일제는 이 사건 관련 인물들이 모 두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이들이었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이들을 사상전향시켜 일제의 협력자로 역이용하고자 했다. 결국 이들은 일제의 고문과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사상전향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일단 절개를 굽힌 이들은 일제의 각종 부일협력 활동 에 동원돼 철저히 이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친일행각은 단지 개인적인 굴욕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교회의 변질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됐다.

3·1운동은 그야말로 전 민족적이고 전 계층적인 독립운동인 동시에 한국역사에 있어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독립선언서에도 나타났듯, 3·1운동은 비폭력 평화시위를 표방하며 세계사적 시민운동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여기서는 3·1운동에서 기독교인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3·1운동의 배경과 준비과정

3·1운동의 배경은 무엇보다도 일제의 한국침략과 폭압적인 식민통치에 있었다. 일제는 1910년‘한국병합조약’을 통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한국 민중이 일제의 침략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을사늑약(1905) 이후, 항일 무장투쟁과 애국계몽운동을 통해 한국 민중은 줄기차게 국권 회복운동을 전개했다. 한국 민중의 저항을 경험한 일제는‘헌병경찰제’를 실시하는 등 폭압적 식민통치로 맞섰다. 헌병경찰제란 군 헌병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무력을 동원해 경찰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무단’(武斷)통치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식량과 원료를 대규모로 공출해 이 땅의 민중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거의 남아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에서 생산된 상품과 자본을 침투시켜 이 땅의 민생을 말살했다. 이로 인해 한국 민중이 겪는 경제적 궁핍은 심각한 지경이었다. 더 나아가 일제는 동화 주의(同化主義)에 입각해 교육, 사상, 종교 등 정신문화의 모든 분야에 걸쳐 한민족의 정신을 완전히 말살하고자 했다. 하지만, 일제의 강압적 종교정책은 오히려 종교인들의 불만과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기독교와 천도교 등 종교계가 3·1운동을 주도한 데에는 당시 합법적인 조직체가 종교계뿐이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일제의 종교 탄압정책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한편 1910년대에는 나라 안팎에서 한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이 축적되고 있었다. 국내는 무단통치로 인해 합법적 조직이 불가능한 상황이었 기 때문에, 비밀 결사에 의한 활동이 주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 활동한 비밀 결사 중‘조선국민회’,‘기성볼단’,‘송죽회’등은 서북지역(평안 남북도·황해도)의 기독교인이 중심이 된 비밀 결사였다. 서북지역의 기독교인은 이전에도‘105인 사건’의 신민회에서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국외에서는 망명한 애국지사들이 해외동포들을 규합해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활동에 들어가거나, 혹은 일제의 학정을 규탄하면서 해외의 여론을 환기(喚起)시키는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국내외의 애국지사들은 이러한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의 역량을 강화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거족적 독립운동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던 기회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 쯤 찾아왔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제창과 파리 강화회의 개최 등 국제 정세의 변화가 그것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자극을 받은 상해 신한청년당(대표 여운형)이 김규식(새문안교회 장로)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한 것이 3·1운동의 단초가 됐다. 김규식은 파리로 떠나기에 앞서“파리에 파 견되더라도 서구인들이 내가 누군지 알리가 없다.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해야 된다. 국내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라며 국내에서 독립 시위를 펼쳐 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따라 여운형이 간도로 건너가 촉매 역할을 함으로써 만주와 연해주, 미주지역 애국 지사들이 중심이 된 「무오독립선언」(1919.2.1)이 실현됐다. 


한편 와세다대학 재학생이던 이광수는 상해에서 동경으로 건너가 김규식의 파리 강화회의 파견 사실을 알렸다. 당시 동경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YMCA)은 한인유학생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곳을 통해 유학생들은 이미 윌슨의‘민족자결주의’와 미주지역 한인들의 독립운동 소식을 듣고 독립의식이 고취돼 있던 차였다. 한인 유학생들은 ‘조선청년 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이윽고 1919년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고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뒤 이 선언문을 재일본 각국 공사관, 일본 정 부 각 부 대신, 일본 국회, 언론사에 보내 독립을 선포했다. 이것이 바로「2·8 독립선언」이다. 


국내에서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의 종교단체에 의한 민족 대연 합전선이 이루어졌다. 먼저 상해에서 밀파된 선우혁은 기독교 교세가 강한 서북지역 기독교계 지도자를 만나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 소식을 전했다. 기독교계는 이 소식에 고무됐고, 이승훈 장로를 중심으로 서북지역과 서울에서 기독교의 독자적인 운동 계획을 세웠다. 한편 천도교는「2·8 독립선언」에 참가한 유학생 송계백으로부터 상해에서의 독립운동과 「2·8 독립선언」 소식을 전해 듣고 국내에서의 만세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기독교와 천도교가 각 각 독자적인 만세운동을 준비해 가던 상황에서, 양측은 서로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연합으로 거행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이윽고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전선에 합의하고, 나아가 불교까지 망라한 민족 대연합전선 이 이루어졌다. 3·1운동의 준비과정에서 기독교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 행했다. 이는 3·1운동 민족대표 48인(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 비서명 자 15인) 중 23인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3·1운동의 전개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는 천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운집했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가 설립한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 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로 시작되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은 탑골공원 인근 음식점 태화관(현재 인사동 태화빌딩)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했다. 이 선언서는 최남선이 초안을 잡고, 이광수가 교정한 것에 한용운이 ‘공약 3장’을 추가한 것이다. 이어 탑골공원의 학생 시민들은 손에 태극기를 들고‘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종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드디어 ‘십년의 침묵을 깨고’ 독립만세의 외침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울려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기독교인의 역할은, 다중적이고 다발적인 만세시위운동 참가, 임시정부 수립운동, 해외독립운동 등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먼저, 만세시위에 있어서 기독교인의 역할부터 살펴보 자. 3월 1일,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 평북 선천, 평북 의주, 평남 진남포, 평남 안주, 함남 원산 등지에서 만세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 났다. 평양에서는 길선주 목사(민족대표 33인)가 시무하는 장대현교회, 신홍식 목사(민족대표 33인)가 시무하는 남산현교회 및 평양시내 6개 교회의 기독교인과 기독학생 등 군중 천여 명이 기독교계 숭덕학교에 운집했다. 집회는 김선두 목사(서문밖교회, 장로회총회장)의 식사, 정일선 전도사(서문밖교회)의 선언서 낭독, 강규찬 목사(산정현교회)의 연설 등으로 진행됐다. 이어 도인권 목사와 윤원삼 장로가 만세 시위를 이끌었다. 평남 진남포에서는 신홍식 목사의 권유를 받은 기독교계 삼숭학교 교장 홍기황의 주도로 삼숭학교 학생 150여명과 기독교인을 비롯한 군중 5백여 명이 신흥감리교회에서 독립선언식을 갖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평북 선천에서는 양전백 목사(민족대표 33인)의 권유로 김지웅(신성학교 교사)이 시위운동을 준비했다. 기독교계 신성학교 학생 150여명과 기독교인을 비롯한 군중 5~6백 명이 운집한 가운데, 홍성익(신성학교 교사)이 독립선언서 낭독과 연설을 하고, 정상인(신성학교 교사)의 지휘로 만세시위를 벌였다. 평북 의주에서는 유여대 목사(민족대표 33인)가 의주 서부교회 인근 공터에서 기독교인 등 군중 수백명이 운집한 가운데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함남 원산에서는 정춘수 목사(민족대표 33인)의 권유로 곽명리 전도사, 이가순 등 기독교인의 주도로 악대를 동원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어 3월 3일 개성, 함흥, 황해도 사리원 등지에서 기독교인 주도의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이후 전국에 걸친 동시다발적인 시위운동으로 확대됐다. 


3·1운동에 관한 총독부의 통계는 신뢰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총독부가 집계한 3월 한 달의 통계만 보더라도 848회의 만세시위가 열렸고, 연인원 60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 지혈사』(1920)에 의하면, 3월에서 5월까지 시위회수는 1천 5백여 회, 시위참가자는 연인원 2백만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기독교인의 참여 를 살펴보자. 기독교인의 참여 정도를 추측할 수 있는 3·1운동관련 기소피고인의 종교별 통계(3월 1일~5월 27일)를 보면, 총 7,835명의 기소피고인 가운데 기독교인은 22%에 해당하는 1,719명이고, 천도교 인은 15%에 해당하는 1,207명이다. 수형인의 종교별 통계(1919년 3월 1일~5월말)에도 총9,059명의 수형인 가운데 기독교인은 22.4%에 해당 하는 2,032명이고, 천도교인은 15%에 해당하는 1,363명인 것으로 집계돼 있다. 당시의 기독교 인구는 29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산되는 데, 이는 전체인구 1,600만 명의 약 1.8%에 해당한다. 반면 천도교인은 교인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자의 수가 100만 명(손병희의 법정 진 술) 정도였다. 이를 보면, 전체인구의 1.8%밖에 되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3·1운동에 참가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3·1운동에서 만세시위가 이처럼 전국적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선언서, 격문, 지하신문이 빠르게 유통됐기 때문이었다. 당시 언론은 극단적인 억압 아래에 놓여 있었다.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 및 잡지는 대부분 금지됐고, 총독부 관립신문과 일본인에 의한 신문과 잡지만 발행됐다. 또한 한국인이 해외에서 발행한 신문은 한국으로의 유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다. 더욱이 3·1운동이 발발하자 총독부는 국내에서의 전보나 통신은 물론이고, 일본에서 발행되는 신문 보도에 대해서도 통제와 검열을 실시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선언서가 배포되지 않았거나 주요 지역의 만세시위 소식이 알려지지 않았다 면, 3·1운동이 전국적인 만세시위로 확대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과 기독학생이 일경의 감시 속에서도 선언서, 격문, 지하신문의 복제 및 배포 활동을 수행했고, 이것이 만세시위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선언서 등의 배포에는 그대로 배포하는 경우, 등사해서 배포하는 경우(교회와 학교의 등사기 활용), 선언서와 함께 별도의 선전물을 제작해 배포하는 경우 등이 있었다. 


3·1운동에 기독교인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자, 일제는 기독교에 대 해 잔혹한 탄압을 가했다. ‘제암리교회 방화학살사건’의 만행은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사건이다. 이 이외에도 전국에서 기독교인에 대한 일상적인 탄압행위가 이어졌다. 사전 집회신고를 하고 교회에서 기도 회를 열어도 헌병들이 들이닥쳐 참석자들을 구타하고 기도회를 중지 시키곤 했다. 또한 거리의 불심검문에서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면 일단 구타하거나 연행하고,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하면 그냥 보내 주기도 했다. 심지어 평남 평원군 율두면의 경우는, 헌병대가 마을 주민들을 협박해 기독교인들을 마을에서 추방하도록 부추겼다. 결국 그 마을의 기독교인들은 헌병과 주민들을 피해 산으로 도피하기도 했다. 이런 탄압으로 인해 1919년 장로회 총회에 보고된 피해만 보더라도, 교회당 파괴 12동, 장로회 경영 학교 파괴 8곳, 사살된 신도 41명, 맞아 죽은 교인 6명, 체포된 교인 3,804 명이었다. 체포된 교인 중 목사와 장로 등 교회 지도자는 134명으로 당시 장로회 목사 장로의 13%에 달했다. 


다음으로, 기독교인들은 장기적 독립운동의 근간이 된 임시정부 수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3·1운동 직후, 김병조, 현순, 손정도, 이원익, 김인전(이상 목사), 서병호, 정인과, 조상섭, 여운홍(여운형의 동생) 등 기독교인이 상해로 망명하면서, 임시정부 수립에 적극적으로 가세했다. 이와 별도로 국내에서 있었던 임시정부 수립운동에도 기독교인이 관여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한성임시정부’ 이규갑 목사이다. 이규갑은 ‘한성임시정부’의 대표로 파견돼 상해 임시정부와의 통합작업에 관여했다. 이로써 상해 임시정부는 국내외의 민족 대표기관으로서 정통성을 갖게 됐다. 


한편, 만세시위운동이 소강국면으로 들어갈 즈음, 기독교인들은 시위운동에서 축적된 대중운동 역량을 발휘해 독자적인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 이러한 조직의 주된 목적은 상해 임시정부와 통신, 연락하고 국내에서 의연금을 모집해 상해로 전달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평양에서 결성된‘대한국민회’는 박승명(서문밖교회 조사, 평양신학교생), 김성탁(장대현교회 장로), 박인관(서문밖교회 장로, 평양신학교생), 고진한(숭실학교 교사), 박정익(숭의여학교 교사) 등이 주도한 비밀 결사이다.‘대한국민회’는 상해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어 비밀 연락기관으로 활동하면서, 한편으로는 각 지방에 지회를 결성해 나갔다.‘대한국민회’와 유사한 단체로 평양에서‘대한독립청년단’이라는 비밀 결사가 조직됐다. 대한독립청년단의 주역인 감리교 정진현 목사는 평남 강서군의 만세시위(3월 6일)를 주도하고 경찰의 감시를 피 해 상해로 망명한 인물이다. 정진현은 상해 임시정부의 요원으로 다시 국내로 잠입해 황보덕삼(평양신학교생)을 비롯한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임시정부의 교통부 관서지부를 조직, 상해로부터의 지령을 받아 국내 비밀 결사에게 전달하거나 국내의 정보를 상해로 보내 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안영식(감리회 전도사), 박종은(평양 신학교생), 박선주(감리회 전도사) 등 평양의 기독청년들로 대한독립 청년단을 조직했다. 대한독립청년단은 동지 규합, 비밀 출판, 자금 모집, 시위운동 주도 등의 역할을 했다. 즉, 관서지부와 대한독립청년단은 각각의 임무만 다를 뿐 동일한 비밀 결사였던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조만식 장로(오산학교 교장)가 서울과 중국(안동) 사이의 비밀 연락기관을 설치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조만식은 김병탁, 이정찬, 최영만 등 기독교인 동지들을 규합해 비밀 연락기관 설치에 착수했다. 그런데, 서울과 중국(안동)의 연락이나 통신은 경계가 엄중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임무였다. 그래서 서울에 위장 가구점을 차려 놓고, 가구를 중국 안동으로 운송하면서 정보의 교환이나 자금의 전달 임무를 수행했다. 특히, 조만식 라인은 의연금 모집을 위해 음악부를 조직, 순회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한편, 기독교인들은 한국 독립에 대한 국제 여론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외교활동은 그 성격상 재외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돼 나갔다. 먼저 ‘상해 한인교회’의 역할을 들 수 있다. 이 교회는 상해의 외국조계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간섭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까운 거리에 있던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 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3·1운동을 전후해 많은 기독교인이 교파를 불문하고 상해로 망명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상해의 외 국인 선교사들에게 한국에서의 독립운동과 일제의 학정을 알려 간접 적인 국제여론을 조성하는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기독교 회와 정치인들에게 편지를 보내 일제에 의한 학정 및 기독교 탄압을 고발하고, 한국인의 독립 염원 등을 알렸다. 이 운동의 결과로 미국 미네소타주 상원 의장을 비롯한 18명의 의원이 조선 독립에 우호적이라는 답신을 보내오기도 했다. 


미주에서도 활발한 움직임이 있었다. 3·1운동이 발발하자, 샌프란 시스코의 안창호는 상해의 현순 목사로부터 가장 먼저 만세시위 소식을 들었다. 안창호는 이승만, 정한경, 서재필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미주 한국인 조직인‘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는 이승만과 정한경을 파리로 파견할 것과 미국의 정관계, 교계, 각 사회단체와 교섭해 한국 독립에 대한 여론을 조성하기로 결의했다. 한편, 안창호는 재미 한국 인을 대표해서 임시정부 수립에 힘을 보태기 위해 4월초 상해로 향했다.


서재필은 4월 중순 필라델피아에서‘한국인 자유대회’를 개최했 다. 이 자리에는 재미 한국인뿐만 아니라 한국에 우호적인 목사와 대 학교수 등 미국인 150명이 참석했다. 이 대회를 통해 일본의 학정을 폭로하고,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미국 사회에 널리 알렸다. 서재필은 이어서‘한국통신부’(Korea Information Bureau)를 조직, 한국의 실 정을 구미 각국에 알리는 각종 선전 자료를 간행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또, 미국인 목사와 지식인, 정치가를 중심으로‘한국친우회’(The League of the Friends Korea)를 조직, 한국의 실정과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재미 한국인의 이러한 노력들이 어우러져, 3·1운동과 한국의 실상을 조사한 미국기독교연합회 동양문제위원회의『The Korea Situation』이 1919년 여름에 발간된다. 이 보고서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잔인한 탄압의 실상을 폭로했으며, 특히 일제의 한국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상세히 공개했다. 이 보고서로 인해 한국 독립문제에 대한 미국 교계 및 미국 사회의 관심이 높아지게 됐다. 그 결과 미국 의회에서도 한국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했다.『The Korea Situation』이 의회의 의사록에 게재됐고, 다년간 한국선교 경험이 있는 헐버트(Homer. B. Hulbert, 할보)를 증인으로 불러 역사적 관점에서 한국문제에 대해 증언할 것을 요청했다. 이 자리에서 헐버트는 조미수호통상조약(1882)에 주선 조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해 미국이 침묵한 것을 지적하고, 1905년 한일보호조약(을사늑약)은 당시 최고 통치권자인 고종황제의 인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자체가 불법이며, 1910년의 한국병합조약도 완전히 무효이기 때문에 일본의 한국 통치는 부당하다고 호소했다. 이에 상원의원 토마스(C. S. Thomas)와 스펜서(S. P. Spencer)는‘한국독립 지지안’을 발의, 의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함께 제출된 아일랜드 독립 지지안은 근소한 차이로 통과된 반면,‘한국독립 지지안’은 찬성 34, 반대 46, 기권 16으로 부결되고 말았다. 비록 미국 의회에서 통과되지는 못했지만,‘한국독립 지지안’이 발의된 것 자체가 재미 한국인들이 헌신 적으로 펼친 독립운동의 결과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3·1운동과 기독여성의 역할

3·1운동에서 기독여성들의 역할이 적지 않았음에도, 아직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부분이 많다. 따라서 특별히 3·1운동에 있어 기독여성들의 역할을 여기 소개하고자 한다. 3·1운동에서 기독여성의 역할은 준비단계에서의 역할, 만세시위에서의 역할, 임시정부 수립운동에서의 역할로 나누어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준비단계에서의 역할을 살펴보자. 상해 신한청년당의 밀지를 받은 장로교인 김순애(김규식 부인)는 선우혁과 함께 국내에 잠입, 국내 기독교계 지도자들에게 상해에서의 움직임을 전하고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을 종용했다. 김순애의 활동은 서울지역 기독교계가 만세시위에 가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한편, 동경여자친목회 대표였던 김마리아(동경여학원생)는 독립선언을 추진하고 있던 ‘조선청년독립단’에게 활동 자금을 제공함으로써「2·8독립선언」 탄생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바 있다. 김마리아는「2·8독립선언」을 국내에 상세하게 전하기 위해 황애스더(동경여의학교 학생)와 더불어 귀국길에 올랐다. 김마리아와 황애스더는 이화학당에서 박인덕(이화학당 교사), 신준려(이화학당 교사), 김활란(이화학당 교사), 손정순(이화전문 학생), 나혜석(동경여자미술학교 졸업생), 안숙자, 안병숙(중앙교회 교사) 등과 회합을 갖고 상해와 동경에서의 독립운동 소식을 전했다. 이들은 여성만의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기로 결의하는 한편, 이를 위해 이화, 정신, 배화학교 등 기독교계 여학생들에게 독립운동 궐기와 동맹 휴학을 권유하는 활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하지만 김마리아와 황애스더는 3·1운동 발발 직후 일경에 체포됐다. 


선배들의 활동과는 별개로, 기독교계 여학생들은 3·1운동을 비밀 리에 준비하던 YMCA 그룹과 연계하고 있었다. 특히 이화학당은 시내 여학생의 회합 및 통신 그리고 선언서 등의 복제와 배부를 위한 아 지트로 활용되고 있었다. 3월 1일, 이화학당(미북감리회), 정신여학교 (장로회), 배화여학교(미남감리회) 등의 서울지역 기독여학생들은, 비 록 수는 많지 않았지만, 앞장서서 만세시위운동에 가담했다. 만세시위에 가담한 것은 여학생뿐만이 아니었다. 세브란스병원의 간호사 10 여 명은 혹시 모를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의료품을 지참하고 3월 6일 서울 남대문 근처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처럼 학생들의 만세시위가 격렬해지자, 총독부는 서울 시내의 각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휴교령을 내리면 지방에서 상경한 학생들 이 귀향할 것이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만세시위가 진정될 것으로 판단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서울에서 만세시위를 경험한 여학생들은 오히려 고향에 돌아가 이를 적극적으로 알리면서 고향에서의 시위를 조직 하고 주도했다. 유관순(이화학당 학생)은 3월 1일과 3월 5일 서울에서 벌어진 학생 연합시위에 가담한 후,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인 천안 아우내로 돌아갔다. 하지만 아버지와 고향교회(매봉교회) 어른들에게 서울에서의 만세시위를 알리고 천안에서도 시위운동을 펼치자고 설 득했다. 이윽고 4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졌을 때, 그녀는 16살 어린 소녀의 몸으로 앞장서서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그 후, 유관순은 시위 주모자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순국했다. 


기독여성과 기독교계 여학생들에 의한 만세시위는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개성 호수돈여학교의 이경지, 이경채 자매는 안병숙으로부터 만세시위를 권유받고, 충교교회의 전도부인 어윤희에게 독립운동를 권유하고 찬동을 얻었다. 어윤희는 또한 다른 전도부인에게도 동 참을 권유하여 개성의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결국 3월 3일 호수돈여 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기독여성들이 삼삼오오 대열을 지어 ‘찬미가’,‘독립가’를 부르며 시위를 뻘였다. 개성 시내의 주민들도 여기에 크게 호응, 시위군중이 2천명으로 늘어나 밤늦게까지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부산에서는 일신여학교 교사 주경애가 3월 10일 같은 학교 교사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논의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준비에 들어갔다. 다음 날, 일신여학교의 교사와 학생 그리고 부산진교회 교인들이‘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켰다. 이 만세시위는 4월 3일, 4월 8일의 부산 만세시위로 이어져, 부산·경남지역에서 만세운동이 확대되는 데 기여했다. 경남 진주에서는 기독교계 배돈병원 간호사들이 인근 기독교계 광림학교 학생들과 연계해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장날 인파까지 합세해 시위군중이 약 2천명에 달했다. 특히 배돈병원은 부상자가 발생하면 응급으로 부상자를 치료하는 등 주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평양 숭의여학교, 대구 신명여학교, 목포 정명여학교,전주 기전여학교, 광주 수피아여학교 등 전국에 산재해 있는 기독여학생들이 지역의 만세시위를 이끌어내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이외에도 전국 각지의 기독교계 여학생과 기독 여성은 선언서를 복제해서 배포하는 일과 연락을 주고받는 일, 그리고 시위를 권유하고 선동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3·1운 동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해냈다. 


기독여성들은 임시정부 수립운동에도 직간접으로 기여했다. 먼저, 4월경 정신여학교 졸업생 오현주의 발의에 따라 오현관, 이정숙(세브란스병원 간호사), 장선희(정신여학교 교사), 이성완(배화여학교 교사) 등이 가담해 ‘혈성 애국부인회’가 조직됐다. 같은 무렵 김원경, 최숙자, 임득산(임시정부 통신원) 등을 중심으로‘대조선 독립애국부인회’가 조직됐다. 두 단체는 상해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합동, 명칭을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로 바꾸고 김영순(정신여학교 교사)과 대구 유인경(정신여학교 졸업, 남산정교회), 부산 백신영(정신여학교 졸업) 등이 가세해 전국적인 지부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회원을 대상으로 자금을 모금해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만세시위운동이 소강국면에 접어들 무렵, 3·1운동 초기에 수감된 김마리아와 황애스더가 출감했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두 사람의 출감을 기해 임원을 개선하고 조직을 재정비하기로 했다. 회장에 김 마리아, 부회장에 이혜경, 총무에 황애스더, 재무부장에 장선희, 서기에 김영순, 신의경, 결사대장에 백신영, 이성완, 그리고 적십자회 의 회장에 이정숙을 각각 선출했다. 이렇게 새로운 진용을 갖춘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개성, 인천, 대구, 부산, 전주, 군산, 전주, 함북 회령, 함북 성진, 함남, 정평 등 전국 각지 지부 결성에 박차를 가했다. 동지를 규합하려는 노력이 결실을 얻어 조직개편 2개월 만에 회원이 백여 명에 달했다. 또한 회원의 증가에 따라 재정수입도 늘어나, 그 중 6천 원을 임시정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기독여성의 비밀 결사도 조직됐다. 6월 하순 경 장로교 신도 한영신은 장로회 여신도들을 집으로 초대해 장로회 부인회의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 한편 같은 무렵 감리회에서도 박승 일의 발의에 의해 감리회 부인회의 비밀 결사가 조직됐다. 이후 두 부인회는 각각 몇 차례 의 밀회를 통해 구체 적인 활동방법을 모색 하던 중, 임시정부 요 원 김정목, 김순일 등 의 권유에 따라 합동을 결의했다. 이어 11 월 평양 지역의 장로교와 감리교 여신도에 의한‘대한애국부인회’가 결성됐다. 이 단체는 동지를 규합해 전국에 각 지회를 조직하고, 회원의 회비 외에 각 지방의 여성유지를 설득, 독립의연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펼쳤다. 그 결과 각지의 회원과 동지로부터 찬조금이 쇄도해 2천 4백여 원이 모금됐고, 이것을 임시정부 요원 김순일과 김정목을 통해 상해로 송금했다. 또한 밀파된 임시정부 요원의 은닉처를 제공하고 국내 다른 결사와의 연락기관으로 활약했다. 


당시의 사회적 여건으로 볼 때, 여성의 이러한 적극적인 활약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3·1운동에서 일반여성에 비해 기독여성의 활동이 두드러질 수 있었던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무단통치 아래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비밀 활동이 필수적인데, 기독교의 경우 여성 신도조직이 발달돼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장로회는 1898년에 여성신도회가 조직돼 1919년 즈음에는 전국 주요 지역에서 여신도연합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감리회 역시 1897년에 여신도회가 조직된 이래, 1918년까지는 전국 주요 지역에 여신도회가 조직 돼 있었다. 둘째, 근대 지식여성의 대부분이 기독교계 사립학교 출신 이라는 사실이다. 기독교계 여학교의 졸업생과 재학생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3·1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조선총독부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도 이유가 됐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자연히 기독교인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한국 기독교는 여성신도가 대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독여성의 항일의식은 일반여성의 그것보다 투철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기독여성은 일반여성보다 더 적극적으로 삼일운동에 참가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기독교 이상촌 운동은 일제시대 장로교 농촌운동에 기여한 배민수 목사의 예수촌 운동에서 시작됐다. 해방 후에는 김용기 장로의 가나안 농군학교, 성공회 대천덕 신부의 예수원, 그리고 김진홍 목 사가 주도한 두레마을 등으로 역사를 이어왔다. 


일제시대에 이상촌 운동을 시작한 배민수 목사는 충북 청주 출신으로, 구한국군 출신 의병장으로 활동하다가 일제에게 순국한 배창근의 아들이다. 1916년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했고, 재학 중 국민회라는 애국 단체를 조직해 항일투쟁을 하다가 일경에 발각돼 전원 체포된 후 1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출옥 후 3·1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참여해 만세 운 동을 주도하다가 다시 체포돼 또 1년 2개월간의 감옥 생활을 했다. 1928 년 숭실전문 문과를 졸업한 뒤 미국 시카고의 장로회 신학교인 맥코믹 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의 맥코믹 신학교는 초기 한국 선교사들이 공부를 하던 19세기 말과는 달리, 보수주의가 아닌 제노스나 매클루어 같은 온건 자유주의자들의 신학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배민수의 농촌운동 역시 이 영향을 받았다. 새로운 맥코믹의 전통에서 하나 님 나라를 이 땅의 역사 속에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 져 있었던 것이다.


배민수는 청년 시절 기독교 민족주의와 이를 성서적 기초에서 구현 하는 일, 다시 말해서 복음적 실천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열매가‘예수촌’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 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의 교훈을 실천한다는 것은, 예수를 본받아 자기 성취욕을 극복하고, 생명과 소유를 희생하고 헌신하는 일이었다. 지상 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예수촌’의 사명이라고 여긴 것이다. 


배민수는 전통적인 한국 장로회 신앙에 기반을 둔 인물이었기 때문에, 영원한 하늘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 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그 나라는 지상에서 복음이 요구하는 삶을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고 보았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자란 이 땅에서 가난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되, 자본주의 체제로 인해 극심한 경제적 불균형을 겪는 이들에게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했다. 배민수의 사상은 기독교적으로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재구성하는 것이었고, 아울러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비판하며 그 한계 를 넘어서는 자유주의적 세계관의 결합물이라 할 수 있었다. 


배민수는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장로회 농촌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1933년 미국 맥코믹신학교를 졸업한 뒤 이듬해 목사 안수를 받고 귀국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 재벌 여성 그린리프로부터 농촌운동을 위한 4천 달러의 지원금을 4년 동안 받기로 하고, 귀국해 장로회에 농촌부를 신설하고 농촌운동에 매진했다. 그러나 일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장로회 안에서는 보수주의자들이 농촌운동을 거세게 비판했고 밖으로는 일제의 검속이 이어져, 결국 배민수의 이상촌운동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가까스로 일제의 검거를 피한 배민수는 1938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4년에 걸쳐 1000여 차례의 한국소개 연설을 했으며, 프리스턴 신학교 연구과에 진학해 2년 간 공부했다. 해방 후에는 1957년에‘기독교 농민학원’을 설립했고, 1968년에는 일산에 삼애 농업기술학원을 설립, 농촌운동을 계속했다. 배민수의 ‘예수촌’에 이어 언급할 수 있는 기독교 농촌운동은 해방 후 세워진‘가나안 농군학교’이다. 1952년부터 사회운동가 강태국과 김용기 장로가 인구의 70%나 되는 농민들의 생활이 낙후된 것을 보고 이들의 생활 향상과 개선을 도모하기 위한 운동으로 시작한 것이 가나안농군학교이다. 


경기도 광주군 풍산리에서 황무지를 개간해 농지와 숲을 가꾼 뒤 가나안 농군학교가 문을 연 것은 1962년 2월이다. 교장은 김용기 장로, 교감은 김용기 장로의 장남 김종일이 맡았고, 차남 김범일이 훈육 주임을 맡았다. 이들은 솔선수범하는 교육을 통해 교육생들의 신뢰를 쌓아 나갔다. 농민들의 생활 전반적인 분야를 교육 내용으로 다뤘고, 졸업생들은 전국으로 흩어져 농촌생활의 지도자로서 모범을 보이기 시작했다. 1973년에는 강원도 신림면에 제2 가나안 농군학교가 설립 됐다. 이때부터 보다 적극적인 사회개조운동으로‘복민운동’을 전개 했다. ‘복민운동’이란 근로, 봉사, 희생의 정신을 목표로 삼아 악습, 미신, 나약, 나태, 퇴폐, 사치 등의 악을 일소하는 운동으로, 1973년 3 월 1일 ‘가나안복민회 전국대회’에서 김용기 장로가 회장으로 선출 되면서 시작됐다. 이 운동에 대한 교육을 받은 뒤 배출된 수 십 만 명 의 졸업생이 전국 농촌 지역에서 지도자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