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한국에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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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이전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먼저 1959년 한국사회의 대화문화 형성을 위해‘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회’라는 모임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59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강원룡 목사는, 일부 보수 성향 목 회자들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단지 감리회 장로라는 이유만으로 그 의 독재를 지지하고, 또 기독교 근본주의가 다른 종교와 갈등을 일으 키는 것을 보면서, 빈민계몽 및 타 종교와의 교류가 우선이라는 생각 에 이 모임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출발이다. 15 명의 인원으로 출발한 초창기에는 회비 1백 원을 가지고 와서 70원짜 리 국밥을 먹으며 광범위한 사회문제를 놓고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이것은 독일의 아카데미 운동이나 외국의 대화운동이 국내에 소개되 기도 전에 독자적으로 시작한 모임이었다.
모임을 주도했던 강원룡 목사는 북간도 용정의 은진중학을 졸업한 후 일본 메이지학원 영문학부에서 공부한 다음(1940), 간도와 북만주 그리고 회령 등지에서 교육사업, 농촌사업, 사회사업 등에 전념했다. 8·15해방 후에는 신학공부에 뜻을 두고 한국신학대학(1948), 캐나다 매니토바대학(1954), 미국 유니언신학대학(1956), 뉴스쿨대학원(1957) 에서 공부했으며, 1962년에는 매니토바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 를 받았다. 또한 해방직후에는 서울에서 육영사업에 종사하면서 한국 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 총무, 한국기독교연합회(NCCK) 청년국 간 사를 역임했고, 1949년부터는 김재준 목사의 뒤를 이어 서울 경동교 회에서 목회하기도 했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회가 크리스찬 아카데미로 발전하게 된 계 기는 1962년 강원룡 목사 와 에버하르트 뮬러(Eberhard Müller) 박사 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뮬러 박사는 독일 아카데미 운동의 창시자 였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회의 활동에 관한 얘기를 들은 뮬러 박 사는 이 일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줄 것을 약속했다. 이때 강원룡 목사 는 한국에서의 아카데미운동에 대한 뮬러 박사와의 대담 내용을 이렇 게 술회했다.
"나는 우리나라의 모든 사회적인 정황이 서독이나 유럽, 일본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또 뮬러 박사는 자기들의 원조는 전 혀 무조건이라는 것과 어디까지나 한국의 아카데미 운동은 한국의 실 정에 맞는 한국의 프로그램이어야 하며 한국인 지도자에 의해 운영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서독의 아카데미 운동은 제2차 대전 후 일어나서 지금까지 독일 사 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쟁 포로의 몸에서 석방돼 폐허가 된 조 국에 돌아온 뮬러 박사는 절망적인 혼란 상태를 눈으로 보고 슬픔에 시달렸다. 그는 조국 독일이 정치적 실패 이전에 정신적 바탕이 병들 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대화를 통한 협조의 정신이 부 족했다. 그래서 우선 대화의 광장을 마련하고 서로 대화를 하는 운동 부터 일으켜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옛날 희랍의 철학자 들이 아테네 교외‘아카데모스’의 숲속에서 서로 대화를 해가며 진리 를 탐구하던 그 정신을 현대의 정황 속에서 살려보려는 뜻에서, 이 운 동의 이름을 아카데미 운동이라고 불렀다. 뮬러 박사의 원조제의를 들은 강원용 목사는 이미 회원이 60명쯤 된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 회를 YMCA에 소집해서 의견을 타진했고, 그 원조를 승낙하기로 결정 했다. 그 결과 1965년 5월 한국 크리스찬 아카데미가 정식으로 출발하 면서 본격적인 아카데미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1965년 이후 크리스찬 아카데미가 주력했던 활동 가운데 하나는 형제 교회들 간의 에큐메니칼운동과 다른 종교와의 대화였다. 그 실례 로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며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하는 형제 교회들인 로마 가톨릭 교회, 성 공회, 그리고 다른 종교인 불교의 성직자들과‘한국 제종교의 공동과제’라는 이름의 토론회를 가졌다. 성공회와의 부활절 연합예배 참석 하고, 석가탄신일에 사찰에 축전을 보내는 등의 활동도 했다.
또 강원룡 목사는 보수성향의 부유층과 빈민층 사이에 끼어있는 이 른바‘진보적인 중산층’의 교육에 주안점을 두었고, 그 일환으로 미 국에서 공부한 페미니즘을 여대생들에게 교육시켰다. 이곳에서 교육 받은 여성들은 훗날 NGO 활동 및 정계 진출로 두각을 나타내는데, 문 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신낙균과 국무총리를 지낸 한명숙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강원룡 목사가 대통령 직선제와 박정희 대통령의 하야를 촉 구하는 민주회복국민선언, 3·1 민주주의 구국선언에 서명한 인사인 탓에 자연스레 유신체제에 비판적인 기독교계 진보인사들이 많이 찾 아왔고, 이로 인해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요람이 됐다.
1977년에는 유신 독재체제의 억압으로 고통 받는 여성노동자들 의 이야기를 다뤘다는 이유로 크리스찬 아카데미 출판국에서 발행하 던 월간지 《대화》가 폐간됐고, 1979년에는‘크리스찬 아카데미 사 건’으로 인해 큰 시련을 겪어야 했다.‘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이란, 1979년 3월 크리스찬 아카데미 농촌사회 간사 이우재 등 간사 6명과 한양대 교수 정창렬이‘불법서적’을 탐독하고 교육생들에게 계급의식 을 조장했으며,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비밀 서클을 만들었다는 혐의로 구속 기소된 사건이다. 조사과정에서 당시 중앙정보부는 구속 된 7명 이외에도 이들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 크리스찬 아카데미 관련 자들, 교육생들을 불법적으로 연행하고 가족들을 가택에 연금했으며, 각종 고문을 통해 사건을 조작했다. 사건은 세상에 공표됐지만, 구속 된 사람들에 대한 면회는 차단됐다. 그런 상태에서 ‘크리스챤 아카데미 대책위원회’와 각계 인사들은 성명서, 청원서를 통해 이 사건이 고 문과 강압에 의해 조작되고 왜곡됐다고 주장하면서, 반공을 명분으로 크리스찬 아카데미 활동에 타 격을 주려는 당국의 의도에 항 의했다. 이 과정에서 구속자 가족들에 대한 감시와 불법 연 금이 계속되면서 정신적, 신체 적 인권침해가 자행됐고, 청원 한 서람들이 중앙정보부에 연 행되기도 했다. 결국 한 달 이 상의 수사과정을 거친 후‘용 공서클 적발’로 공식 발표된 이 사건은 고문에 의해 강제 진술된 것임이 확인됐다. 그리 고 항소심에서는‘용공서클’ 혐의에 대해서 무죄 판결이 내 려졌다.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2000년 5월 창립 35주년을 맞아 명칭을 ‘대화문화 아카데미’로 변경하고 일부 조직을 새롭게 개편했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은 1976년 12월 23일에 조직된 ‘한국 기독교산업문제연구원’과 1978년 1월에 설립된 ‘한국기독교학술원’이 발전적 해체를 한 후 양 기관이 통합해 1979년 2월 21일 발족한 초교파적 연합기관이다. 설립자는 김관석 목사이며, 초대 원장은 조승혁 목사, 부원장은 김용복 박사가 맡았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사업목적은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정의롭고 민주적인 한국사회의 건설에 기여하는 것이었으며, 사업내용은 기독교에 대한 조사연구, 한국의 산업사회 문제에 관한 조사 및 연구, 조사된 자료의 분석과 연구 협의, 노동 상담 활동, 통일 관련 사업, 각종 출판사업 등으로, 산업사회의 전반적 문제 속에서 기독교 선교가 담당해야 할 역할을 연구, 규명하는 것이다. 특히 1982년에는 한국 기독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한국교회 100년 종합조사연구를 실시, 한국 개신교회의 내외면적 실태와 그 정확한 통계를 분석해 새 좌표를 제시했고, 아울러 비기독교인의 교회및 기독교인에 대한 생각에 대한 대규모 여론조사를 실시 해 한국사회 속에서의 교회의 위치를 정확히 가늠해 본 뒤 이들을 체계적인 보고서로 작성해 출판했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은 기독교대한감리회,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한국기독교장로회 등의 교단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등의 후원을 받고 있으며, 국제적으로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아시아기독교협회(CCA), 독일교회, 미국감리교 세계선교부, 영국교회 등과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
1923년 임시정부 의열단원으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뒤 일 경과 교전 중 순국한 김상옥 의사는, 1903년에 동대문교회에서 기독 교에 입문해 1906년부터 동대문교회 부설‘신군야학’에 다니며 지적 허기를 달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상옥은 동대문교회 청년들과 시국토론을 하면서 항일 민족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3.1운동 직 후 동대문교회 영국인 여선교사 피어슨의 집에서 청년부 학생들과 항 일운동 조직인‘혁신단’을 결성했다. 혁신단의 주요활동은 지하신문 인‘혁신공보’를 발행해 조선인들의 독립열망과 투쟁정신을 고취시카 는 일이었다.
우리나라 야학은 1906년 함경남도 함흥의 보성야학으로부터 시작 된 것으로 보고 있다. 1907년 동아일보 보도에서는, 마산 유지 옥기환 이 설립한 마산노동야학을 최초의 야학이라고 하기도 한다. 일제치하 의 야학은 식민지 교육에 대한 민족 교육 수호와 식민지 지배에서 민 족해방을 이루기 위한 구국 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초기에는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삼았으나, 3.1운동 이후에 는 비장한 현실 인식과 함께 노동문제, 농민문제에 관심을 가진 지식 인들에 의해 야학이 많이 설립됐다. 이와 같은 맥락의 야학이 교회 안 에서는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서울에서는 동 대문교회 안에 설립된‘신군야학’에 김상옥 의사가 1906년부터 다닌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이전이 아닐까 한다.
동대문교회는 1890년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고, 그 때문에 소외돼 살아가던 한국 민중을 향한 선교사들의 열정으로 세워졌다. 120년 동 안 동대문교회는‘동대문 안’이라는 서울 안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서 울 밖을 향하는 교회였다. 동대문교회는 신군(信軍)야학과 직장여성 을 위한 야학인 대성학원을 운영했다. 대성학원에서는 기본 과목과 침선 등 실제 생활에 필요한 가사 과목을 가르쳤다. 이것이 동대문 직 업학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동대문교회뿐 아니라 지역의 여려 교회에서도 1920년대부터 야학 을 설립, 운영했다. 동아일보에 보도된 내용을 통해 살펴보면, 1921년 가을부터 평양부 사창동 교회에서는 매일 저녁 7시부터 100여명의 학 생들이 모여 일어, 기술, 한문, 성경 등을 배웠으며, 대전 대동리교회 (대전제일감리교회)에서도 1922년부터 야학을 신설하고 연령의 제한 을 두지 않고 조선문, 산술, 한문, 일어 등 초등교육 수준의 교육을 실 시했다. 신천에서도 1919년부터 교장 김태연과 이맹영 선생 등이 80 여명의 학생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함흥중앙교회에서는 1920년 부터, 안주 예수교회에서는 1921년 10월부터 20여명의 학생을 모아 가르쳤다.
해방 이후 야학은 잠시 단절됐다가, 1950년대 말부터 교육 소외계 층인 이농민과 도시빈민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지식 청년과 사회사업 가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진행됐고, 특히 정부의 민족 재건운동과 더 불어 확대됐다. 1960, 70년대에는 경제개발 과정에서 파생된 대도시 빈민촌, 소공장 밀집지역을 중심으로 천막학교, 교회 부설학교 형식 의 야학을 쉽게 볼 수 있었다.
1970년 4월 10일자 잡지「기독교세계」는 동대문교회 직업소년학교 개교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 직업소년학교는 동대문교회 청장년회가 주동이 돼 설립, 운영한 교회의 지역사회 봉사 사업의 하나였다. 대상 자를 동대문 경찰서 소년계에 의뢰해 모집했다. 우선 동대문 지역의 불우청소년 60명이 입학해 중학교 1학년 과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건학 목적은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기독교의 사랑을 바탕으로 봉사정 신을 함양하고 민주시민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초 중등교육과 아울러 기술교육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동대문 지역은 1905년부터 동대문 상권으로 유명했다. 1905년 종 로 5가에 광장시장이 형성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1970년대에는 악취 풍기는 청계천변에 무허가 판자촌들이 다닥다닥 늘어서서 서울 도심지 일대에 빈민굴을 이루고 있었다. 이 판자촌 일 대에는 2층짜리 소규모 피복 공장들이 즐비하게 자라잡고 있었다. 조 영래의『전태일 평전』에 나타난 1970년 당시 각 시장별 노동자 분 포를 보면, 동화시장에는 160개 작업장에 4,800명, 통일상가와 그 근 접 건물에는 200여 작업장에 8,000명, 평화시장과 신평화시장을 합쳐 500여개 공장에 1만 4,000명 정도의 종업원이 있었다. 종업원인‘시 다’들 대부분은 가난해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12~15살의 소녀들 이었다. 기술을 배워 집안을 도와보겠다는 생각으로 상경했지만, 지 역과 사회에서 소외된 그들을 위해 직업학교를 세웠던 것이다.
해방 이후의 대표적인 기독교 의료기관으로는 서울의 세브란스병 원 및 의과대학과 원주기독병원, 전주 예수병원, 광주 기독병원, 대구 동산병원 그리고 부산의 일신기독병원을 들 수 있다.
먼저 세브란스병원과 의대의 활동을 살펴보자. 해방 이후 국내 의 과대학에서 일본인 교수들이 떠난 뒤, 그 빈자리를 메운 것은 세브란 스의 교수들이었다. 윤일선(서울대 총장), 심호섭(서울대 의대 학장), 고병간(경북대 및 연세대 총장), 이세규, 장경, 정일천 등이 서울대로 자리를 옮겼다. 이용설이 군정청 보건후생부장으로 활약했고, 건국 후 보건부 장관으로 구영숙, 최재유, 오한영, 오원선 등이 활약하는 등 정부로 진출한 경우도 많았다. 세브란스는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보건의료체계 형성에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세브란스의 학생들도 해방 직후 전재민 구호사업에 열심이었다. 세 브란스 학도대가 결성돼 서울역에 도착하는 빈사의 애국지사, 강제노 역에 혹사당한 징용자, 이역만리를 헤매던 유랑민들에 대한 구호사업 을 펼쳤다. 그들은 헌신적으로 진료, 취사, 청소, 그리고 서울역 주변 질서유지에 힘썼다. 이러한 열성적 봉사로 전국 학도대를 선도했고, 이에 따라 학도대 본부가 세브란스에 설치됐다. 이 사업은 후에 재외 동포구제회에 인계됐다.
세브란스의 학생들은 신탁통치 반대운동에도 나섰다. 찬탁과 반탁 운동이 충돌하면서 몇몇 학생들이 크게 다치기도 했는데, 당시 2학년 함영훈은 흉부 관통상을, 이근배는 두부외상을 당했다. 학생회장 김 덕순과 2학년생 윤석우의 군중 연설은 유명했다고 한다. 당시의 지도 적 인물로는 세브란스의 김덕순, 양재모, 임평기, 박일호 등이 있었 고, 다른 대학의 학생들로는 김중찬(경성의전), 이동원(연희전문), 이 철승(보성전문), 채문식(경성문리대) 등이 있었다. 세브란스 학생들의 지도적 역할은 경찰이 연합학생본부였던 세브란스를 포위하고 29명 을 체포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6·25전쟁 때에도 세브란스는 구호의료에 적극 나섰다. 전쟁발발 당일 세브란스병원 의사들은 수도육군병원에 진료 협력 차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채 그대로 군과 합류해 대전, 김천, 대구, 울산 등지에 서, 그리고 9·28 수복 후에는 서울에서 군 부상자들을 진료했다. 또 남쪽으로 피난한 세브란스의 의료인들은 거제도 구호병원, 청도 구호 병원, 원주 구호병원 등에 참여해 어려운 가운데서도 군과 피난민들 을 도왔다.
세브란스의 기독교적 봉사정신은 교수들의 기독의사회 운동으로 이어졌다. 1965년 기독의사회가 창립됐을 때 임의선(회장), 이명수(부 회장), 이삼열(총무) 등 임원진은 대부분 세브란스 출신이었다. 기독 의사회의 정신은 고통분담, 영육구원 등 생활 전체와 진료를 통해 그 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이었다. 세브란스 학생들 역시 농촌 의료 봉사활동을 통해 기독교 정신을 구현했다. 의료봉사는 보통 계 몽사업과 여름성경학교 운영 등과 함께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세브란 스의 의료선교의 전통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런 봉사정신은 1963 년 콜레라 방역 때도 훌륭히 드러났다.
세브란스 졸업생 이영춘의 농촌의학에 대한 연구와 봉사는 유명하 다. 군산 개정에 농촌위생연구소를 설립하고 농민들을 위한 진료와 위생 연구에 평생 헌신한 것이다. 이 사업은 다시 졸업생 김경식이 계 승했다. 다른 한편 양재모를 중심으로 한 예방의학교실은 한국의 가 족계획사업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그 분야에 크게 공헌했다. 해부학 교실의 시신기증운동도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지금까지도 확 산되고 있다.
원주 기독병원은 미국 감리회 선교부와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부에 의해 1959년 11월 50병상 규모로 개원했다. 이어서 1960년에는 교육수 련병원으로 인가를 받았고, 90병상으로 병원 규모를 늘인 1963년에는 결핵관을 준공하면서 국내 최초로 의무기록제를 실시했다. 또 1966년 과 1972년에는 각각 140병상과 220병상으로 확대돼 강원도를 대표하 는 의료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원주기독병원은 1976년 연세대학교와 합병돼 1983년부터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부속 원주기독병원으로 거듭났다. 그 사이인 1980년에는 400병상으로 확장하는 한편 외래진 료실을 준공했다. 원주기독병원에서는 1990년 강원도내 최초의 시험 관 아기가 탄생했고, 또 국내 최초로 자궁강내 인공수정아가 태어나 기도 했다.
1902년 미남장로회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전주 예수병원은 1954 년 4층 건물을 신축하면서 크게 확장됐다. 거의 150명을 수용할 수 있 도록 병상이 늘어난 것이다. 이 병원은 특히 인턴 제도를 특성화해 의 과대학을 졸업했지만 임상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훈련시켰다. 1961년 16명의 의사가 이 훈련을 받았다. 이 병원은 언제나 복음 전파에 강조 점을 두었다. 1961년의 경우, 병원에 온 3,062명의 환자 가운데 538 명이 예수를 영접했다. 그 해 병원 의료진은 27군데의 복음전도여행 에 동참했다. 이 의료선교로 1,546명이 마을에서 치료를 받았고, 225 명이 예수를 영접했다. 전주예수병원의 외과 수술은 계속해서 정부의 인정을 받았다. 종양치료와 아울러 새로운 치료 방법인 코발트60 방 사선 측정기 사용은 한국 의료계의 선봉이었다.
같은 기간 광주 기독병원은 입원 병실의 침대 수가 75석에서 약 200석으로 늘어났다. 80석 규모의 요양 병동이 미군에서 지원하는 물자와 UNKRA(유엔한국구호기구)의 지원금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1957년에는 미남장로회 여전도회가 커다란 엑스레이 장비와 기본적 인 의료기기들을 구입하는데 사용하라고 막대한 자금을 기부했다. 광 주 기독병원은 특히 자선사업에 역점을 두었다. 1961년 병원이 환자를 돌본 연일 수는 62,071일이었는데, 그 중 28,000일은 완전히 무료였 고, 30,000일은 일부 면제였다. 광주 기독병원은 한국의 다른 어떤 병 원보다 더 많은 폐결핵 환자들을 입원과 가정 방문을 통해 치료했다.
1899년 미북장로회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대구 동산병원은 1947 년 제7대 병원장으로 취임한 마펫(Howard F. Moffett, 마포화열) 선 교사의 헌신적인 활동을 통해 크게 성장했다. 그는 30년 동안 재직하 면서 의료선진화를 위해 최신 장비를 도입하고, 의사들을 미국 등 의 료 선진국에 유학 보내 유능한 의료 인력으로 육성하는 한편, 병원의 건물을 현대식으로 증개축해 종합의료원의 면모를 갖추게 만들었다. 동산병원은 1980년 의과대학을 설립해 1982년 계명대학교 동산의료 원이 됐고, 의과대학과 간호대학, 동산병원과 경주동산병원을 산하에 둔 의료원 체제로 성장했다. 현재는 네팔, 카자흐스탄, 방글라데시 등 지에서 의료선교를 통해 사랑의 인술을 실천하고 있기도 하다.
부산의 일신기독병원은 호주장로회 선교사 매켄지(James N. McKenzie, 매견시) 가문의 두 딸 헬렌(Helen, 매혜란)과 캐더린 (Catherine, 매혜영)에 의해 1952년 설립됐다. 당시 6·25전쟁으로 인 해 부산에는 수많은 피난민과 빈곤한 이들이 모여들었으나, 의료기관 은 턱없이 부족했다. 바로 그 때 호주선교사 두 자매가 산부인과 환 자들을 진료하기 위한 일신부인병원으로 개원한 것이다. 초대 원장은 헬렌이었다. 일신부인병원은 1956년 75 병상의 건물을 지었고, 1962 년에는 정부에 의해 조산원 수습기관으로 인정받았다. 또 1968년에 는 소아과가 신설됐고, 109병상으로 규모가 확장됐다. 1974년에는 서 독의 원조 기금으로 155병상으로 건물을 증축했다. 이듬해인 1975년 에는 내과, 외과, 마취과, 진단방사선과, 임상병리과를 새로 열었다. 1982년에는 명칭을 일신기독병원으로 변경했다.
일신기독병원은 1950년대부터 선진화된 의술에 사랑과 관심으로 여성과 산모와 갓난아기의 생명을 구해 왔다. 또 1970년대와 80년대 에는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었던 농어촌(대저, 철마, 다대 등)을 중 심으로 매주 2회 직접 무의촌 방문 진료를 계속했다. 이와 같은 진료 체계로 무료 진료가 많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호주 선교부 는 맥켄지 재단(McKenzie Foundation)을 만들어 강력하게 후원했다. 1952년 이후 2008년까지 일신 기독병원에서는 총 25만 명의 아기가 태어났다. 해방 이후 많은 환자와 산모들이 모여들었지만 전국 어느 병원에 비해서도 낮은 모성 사망률과 높은 출생아 수를 자랑하고 있다.
월남한 가톨릭 교회의 교인들이 곧바로 남한 교회들로 편입된 것과는 달리, 기독교인들(개신교인들)은 북한 출신만으로 구성된 교회들을 신속히 조직해 나갔다. 1945년 말 한경직 목사(평남, 영락교회)와 김재준 목사(함북, 경동교회)는 군정청의 도움을 받아 서울시내 40개소에 달하는 천리교(天理敎) 재단을 접수하고, 교회설립에 착수했다. 1947년 8월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월남해 서울에 거주하던 목회자 20여 명이 영락교회에서 ‘이북신도 대표회’(회장 한경직)를 발족시키고 미북장로회 선교부로부터 지원을 받으면서, ‘월남인 교회’의 설립 작업은 폭발적으로 진전됐다. 한편 황해도에서 월남한 이승길, 오문환, 이삼성 목사 등은 옹진군과 연평도, 백령도를 중심으로 교회를 개척 해 1948년 5월 ‘황남노회’를 창립했고, 인천지방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감리회의 경우 전쟁 중 월남한 45명을 포함해 해방 후 전쟁 발발 전까지 최소한 69명의 북한 출신 교역자가 남한으로 내려와 있 었다.
월남 인구의 상당수는 20대의 청년들이었다. 1946년 8월에 황은균 목사를 중심으로 김병섭, 김두영, 김형식, 우경천, 김봉서 등 장로회 청년들이 모여‘기독교 청년면려회 서북연합회’(서북CE)를 발족시키고, 각 도별로 면려회를 조직해 나갔다. 1950년 1월에는 서북CE 회장이던 김윤실 목사의 건의로 이북신도 대표회에 청년부를 신설하는 등, 이북신도 대표회와의 관계를 보다 긴밀하게 만들었고, 1951년 1월에는 부산에서 조직을 더욱 확대해 ‘북한CE’창립총회를 가졌다.
YMCA의 경우, 해방 후 재건된 북한지역 4개 지부의 간부와 회원의 상당수가 1948년을 전후하여 월남했다. 1951년 부산에서‘대한YMCA 전시대책위원회’가 결성됐을 때, 9개 시(市) 청년회 중에는 북진시 재 건 혹은 창설됐던 4개의 ‘망명 YMCA’들이 포함돼 있었다.
1946년 말에 조직된 ‘신인회’(新人會)는 북한출신 학생들이 주도한 대표적인 학생 조직이었다. 1948년 4월 결성된 ‘대한기독학생전국연합회’(KSCF)는 회장 남병현 등 신인회 회원들이 주축을 이뤄 YMCA, YWCA의 학생운동과 함께 양대 세력을 형성했다. 1946년 1월에는 처음부터 청년과 학생이 많은 것이 특징이었던 영락교회 내에 ‘베다니 학생회’가 구성됐고, 1949년에는 여학생회와 합쳐 ‘영락교회 대학생회’가 발족됐다.
월남기독교인 청년들은 적극적으로 반공운동에 나섰다. 그 중에서도 기독교 청년면려회 서북연합회(서북CE)와 영락교회 청년회 및 대학생회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서북CE의 창립 자체가 북한에서 반공 적인 ‘기독교자유당’을 결성했다가 체포를 피해 월남한 청년들에 의해 주도됐기 때문에, 그들이 반공에 적극적인 것은 당연했다. 서북CE 는 각 도별로 지부를 구성하고 공산당 박멸에 나섰다. 이들은 1947년 3월 공산당을 부수기 위한 별동대로 ‘대동강 동지회’를 구성했는데, 부회장인 강종철이 재건 서북청년회 감찰부장을 역임하고, 조직부장인 이창복이 서북청년회 남선파견대에 가담했다가 피살되는 등, 주로 서북청년회와 협조하면서 무력투쟁도 불사했다. 대동강 동지회 회원들은 정부 수립 직후 육군사관학교 8기로 대거 입교하기도 했다. 서 북CE는 1951년부터‘북한CE’로 조직을 확대하여 북한실정 보고 강연회, 월남 반공청년 환영회, 휴전 반대운동 등의 반공운동을 계속했다. 창립 당시 회원 수가 229명에 달했던 영락교회 청년회도 서북청년단의 발족을 주도하고 반탁운동, 기독교 민주동맹 창립대회장 습격 등 반공건국을 위한 활동에 나섰다. 또 서북청년회의 전신인‘평안청년 회’의 주된 집회 장소는 정동제일교회와 YMCA였다.
해방 이후 한국 기독교의 놀라운 성장은 월남 기독교인들의 활약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이북신도 대표회에 의해 설립된 교회들은 오늘날 거 의 모두 대형 교회로 성장했다. 영락교회는 20년 가까이 한국 최대 규모의 교회였으며, 1965년 이미 재적 1만 명을 돌파했다. 감리회의 광림교회(김선도, 평북)와 장로회의 충현교회(김창인, 평북) 역시 월남인들이 한국 기독교의 성장을 주도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들이다. 이외에도 감리회의 금란교회(김홍도, 평북)와 부천제일교회(최기석, 황해), 장로회의 소망교회(곽선희, 황해), 노량진교회(임인식, 중국 봉천), 구파발교회(임종헌, 평남), 송학대교회(방관덕, 평북), 사랑교회 (김중석, 평남), 성결교회의 신길교회(이낙현, 평북), 신촌교회(정진경, 평남) 등이 월남 교역자들에 의해 대형교회로 성장한 사례들이다. 조용기 목사의 장모로서 그와 더불어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세계 최대 의 교회로 성장시킨 최자실 목사 역시 황해도 출신으로 1946년 월남 했다.
이러한 사례는 지방에서도 발견된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전에 정착한 월남 기독교인의 수는 대략 5천 명 내외로 추정된다. 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1952년 12월 24일 밤, 대전 YMCA 주최로 대전역 광장에서 열린 성탄예배를 보기 위해 모인 신자의 수는 1만 여명으로, 이들 대부분은 월남한 교인들이었다. 북한에서 끊임없는 차별을 당하다가 월남한 피난 신도들은, 새로운 정착지에서 북한 교회의 신앙 전통을 복원, 재현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리고 그들은 대전 기독교 교회의 풍부한 동력이 됐다. 해방 이전 종교적 소수세력에 불과했던 대전지역 기독교 사회는, 월남 신도들의 급증과 그들의 열성적인 전도활동을 통해 도약의 계기를 맞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을 주도한 것이 바로 월남한 목회자들이었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진행된 교회 설립 붐을 타고 대전지역의 교회들에 자리를 잡은 북한출신 교역자들은, 경쟁적인 전도활동을 통해 교회의 외형을 늘이면서, 지역 교회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먼저 장로회의 경우부터 살펴본다면, 1950년대 대전 노회 회원들 가운데 북한 출신 목사들의 비율은 거의 절반에 달했다. 1954년 12월 대전노회의 목사 회원은 모두 16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8명(50%)이 월남자였던 것이다. 더욱이 대전 시내에 위치해 있으면서 제법 규모가 큰(노회에 내는 분담금 기준) 7개 교회 가운데 중앙교회(양화석, 경북)를 제외한 나머지 6개(85%) 교회의 담임목사는 모두 북한 출신이었다. 그리고 이 비율은 노회의 임원 구성에서도 좁혀지지 않는다. 1955년 8회 대전노회의 임원 6명 가운데 회계(임일준, 충남)와 부회계(양화석, 경북)를 제외한 회장(백응수, 평북) 이하 4명(66%) 은 북한 출신 목회자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대부분의 임원이 교체 되는 1956년에도 변하지 않고 이어졌다.
월남 교인과 목사들의 영향력은 개교회 차원에서도 감지된다. 대 전의 대표적 장로교회인 제일교회의 담임은 김만제 목사였는데, 그는 원래 충남 공주 출신이지만 함흥에서 목회하다가 해방 이후 월남 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앞서 살폈듯이 해방 이후 제일교회의 급격한 성장은 피난민들이 가세(加勢)한 때문이었다. 또 전쟁 이후 중앙교회(대전에서 두 번째 규모)의 400명 교인 대부분도 월남자들이었다. 그런데다가 규모 면에서 3위와 4위의 인동교회(백인석-백낙봉)와 동부교회(방병덕-이광수-최용문)는 잇따라아 월남 목회자들이 시무한 교회로 잘 알려져 있다. 동부교회의 경우 전임자와 후임자는 서로를 잘 아는 처지였다. 또 계창봉 목사(평북 강계 출신)의 서부교회는 1·4 후퇴 후 피난민들로만 출발한 교회였다.
감리회 역시 월남 교인과 목회자의 존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1951년 제일교회 목사로 부임해 20년 이상 대전지역 감리회의 대표적인 인물로 활동했던 이형재 목사는 함남 함주 출신으로 만주에서 월남한 바 있고, 1958년 대전감리교신학교 교장에 취임한 이호운 목사 역시 평남 강동 출신으로 1945년 9월 평양에서 남하했다. 또 대전의 두 번째 감리교회인 선화교회는 전후 피난민들에 의해 급성장한 교회로, 역시 개성 출신의 조창혁 목사가 목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전의 세 번 째 감리교회인 남부교회는 강원도 원성 출신으로 평안도에서 월남한 황덕주 목사가 초대 목사를 지냈고, 1950년대 유성교회를 잇따라 담임한 이진호(평남 평원), 김영국(황해 안악) 목사 또한 북한 출신들이었다.
한국교회는 해방 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작용했다. 한국은 일제로부터 독립한 뒤 기독교에 우호적인 미군정과 제1공화국 시기를 거쳤다. 이 때문에 기독교 에 유리한 정책이 시행됐고, 사회적인 분위기도 기독교에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미국은 세계를 주도하는 국가였기 때문에, 지식인들에게 기독교는 사회의 주류로 진출하는 하나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기독교가 성장한 데에는 전반적인 정치 사회적 불안정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기독교는 6·25전쟁의 후유증과 가난, 정치적 혼란으로 불안해하던 한국인들에게 종교적 위안과 정신적인 안식처를 제공해 주었다. 1960년대 들어와 본격적인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수많은 농촌 인구가 도시로 유입됐는데, 이들에게 교회는 제2의 고향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이와 더불어, 한국교회의 성장을 이야기할 때 전도운동을 빼놓을 수 없다. 해방 후 한국교회에는 전 민족을 복음화시켜 한국을 제2의 이스라엘로, 한국인을 거룩한 백성(聖民)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소명 의식이 싹텄다. 한국교회는 민족복음화가 한국의 당면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열쇠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민족복음화 운동은 해방 후부터 1980년대 까지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역사적 흐름이었다.
1950년대는 세계적인 부흥사들이 자주 내한해 대형 부흥집회를 열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밥 피어스(Bob Pierce)와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을 들 수 있다. 금세기 최고의 부흥사였던 빌리 그래함은 전쟁이 한참이던 1952년 내한해 집회를 인도했고, 전쟁 후인 1956년에 도 한국을 방문했다. 밥 피어스도 1949년부터 몇 차례 한국을 방문해 전도 집회를 인도했다.
이들의 집회는 한국인들에게 큰 감격과 은혜를 안겼다. 이승만 정부는 이러한 외국 부흥사들의 전도 집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교회는 자체적으로 이같은 대형부흥집회를 인도할 만한 여건이나 노하우, 인물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오히려 한국교회는 이 시기에 내부적 역량을 키울 여력도 없이, 일제시대부터 안고 왔던 여러 신학적인 문제와 교권 갈등, WCC 가입문제 등으로 미 증유의 분열로 치닫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각 교파별로 내부정리가 필요했는데, 편 가르기라는 성숙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볼 수 있다.
1960년대 한국교회는 크게 성장했다. 이 시기 한국교회는 전도에 내적인 힘을 모을 수 있었으며, 50년대의 위기를 수습하고 새로운 도약을 다졌다. 1960년대의 가장 대표적인 민족복음화운동은 1965년에 있었던 전국복음화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당시 분열된 교회를 전도라는 대의명분 아래 연합하게 만들었다.
전국복음화운동은 김활란 박사가 주도했다. 1964년 10월 16일, 김활란 박사의 주동으로 이화여자 대학교에서 75명의 교계 지도자들이 회합을 갖고, 종합적이고 적극적인 민족복음화 방안을 검토했다. 이후 이 모임은 거듭 회합을 갖고 운동 표어를 ‘3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로 정했다. 이 운동에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한국 교회가 참여했다.
한국교회는 1965년을 ‘전국복음화운동의 해’로 정하고, 전국적으로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각 교파는 자신이 갖고 있는 특색과 장점을 살려 어떻게 해서든지 영혼을 구하는데 전력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그렇지만 전국부흥운동의 핵심은 대중 전도집회였다. 당시 집회를 성공적으로 이끈 이는 중국인 부흥사 조세광(趙世光) 목사였다. 당시 한 국의 부흥집회는 반공과 복음화라는 두 가지 주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중국에 형제를 두고 온 조세광 목사의 설교는 한국인들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전국복음화운동에는 연인원 백만명 이상이 참여했고, 이 기간에 한국교회는 기독교인의 비율을 전체 인구의 10%대 로 올리는 역사적인 경험을 한다.
민족복음화운동은 1970-80년대에 절정에 달했다. 70년대의 대형 집회는 1973년에 있었던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로 그 포문을 열었다. 이후 1974년의 ‘엑스플로 74’와 1977년의 ‘민족복음화 대성회’가 연이어 개최됐다. 이러한 대형부흥집회는 1980년의 ‘세계복음화 대성회’, 1984년 한국기독교 100주년 선교대회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한국교회는 대규모 집회의 강사로 빌리 그래함을 초청했는데, 여기에는 한경직 목사가 깊이 개입했다. 일찍이 한경직은 한국 전도집회에서 빌리 그래함의 설교를 통역한 적이 있었다. 빌리 그래함 집회 때부터 여의도 광장이 대형집회의 단골 장소로 이용됐다. 당시 여의도는 막 개발이 시작되고 있었다.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는 1973년 5월 16일부터 전국의 지방도시에서 순차적으로 시작됐고, 1973년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는 서울 여의도에서 대대적인 집회가 열렸다. 빌리 그래함은 서울 집회만 인도했다. 그는 전형적인 전도집회 설교, 즉 예수를 영접하라는 단순한 내용의 설교를 했고, 김장환은 이를 능숙하게 통역해 냈다. 빌리 그래함 집회에 늘 동행했던 죠지 버브리 쉐어(George Beverly Shea)는 찬양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마지막 집회에는 100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했다. 국가안보와 반공에 대한 이해관계를 한국교회와 같이 한 우리 정부는 이 집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 다음해에는 ‘엑스플로 74’가 개최됐다. 엑스플로 74는 약 일주 일 동안 여의도 광장에서 함께 먹고 자며 전도훈련을 받는 집회였다. 첫날 개막 예배에 136만 명이 참석했고, 연인원 655만 명이 참석했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기록이었다. 이 집회에서 30만 명 이상이 등록을 해 전도훈련을 받았다. 이 대회는 한국 대학생선교회 (CCC)의 대표였던 김준곤 목사가 주도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예수의 꿈을 꾸고 인류구원의 환상을 보며 한 손에는 복음을 다른 한 손에는 사랑을 들고 지구촌 구석구석을 누비는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오래전부터 민족복음화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1977년에는 ‘민족복음화 대성회’가 열렸다. 이 집회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70주년을 기념한 것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한국교회 부흥운동과 성령운동의 역사적 기점으로 기념 됐다. 주제는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 한국인에 의해서, 오직 성령으로!’였다. 이 집회의 가장 큰 특징은 준비에서 진행, 재원 마련, 강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이 중심이었다는 점이다. 대형 집회의 주도권이 점점 한국교회로 옮겨온 것이다. 당시 집회를 주관한 사람은 신현균 목사였다. 그는 이성봉 목사를 계승하면서 1960년대 혜성처럼 등장한 부흥사로, 점차 대형집회의 중요 강사로 자리잡아 갔다. 1980년대에도 민족복음화의 성격을 지닌 대형집회는 계속됐다.
민족복음화 운동을 통해 한국교회는 급성장했다. 한때는 1천 2백만의 기독교인을 이야기할 때도 있었다. 교회가 선교를 해야 한다는 것은 예수의 지상명령이자 교회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요소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예수의 선교 명령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민족복음화 운동은 민족주의적인 요소도 갖고 있었다. 1960년대 한국교회는 신자들에게 한국이 기독교 국가가 돼 세계를 영적으로 주도해야 한다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오랜 식민지 경험과 민족상잔의 비극으로 깊은 실의에 빠져 있던 한국 민족에게 이러한 소명의식은 새로운 목적의식과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1960년대 한국인들에게는, 기독교가 정신적 공황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 됐던 것이 다.
그러나 70년대 몇몇 대규모 전도 집회는 전도운동이라는 순수한 목적이외에도, 유신헌법(1972)에 대한 기독교인의 반대운동(남산 부활 절연합예배 사건 등)을 무마하고 박정희 정권을 옹호하려 했다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엑스플로 74’(1974. 8)가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 대회는 한국대학생선교회(Campus Crusade for Christ, 이하 CCC) 대표 김준곤 목사가 주도했다. 김준곤은 ‘대통령 조찬기도회’를 창설(1966)했고, 73년의 조찬기도회에서 ‘10월 유신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기어이 성공시켜야겠다’(『교회연합신보』1973년 5월 6일자)고 유신체제 출범을 축복한 적도 있었다. 이런 정황 가운데‘엑스플로 74’는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폭넓은 배려와 편의를 제공받으며 성황리에 치러졌다. 유신정권으로서는 CCC와 김준곤 목사를 듬직한 우군으로 여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긴급조치 4호 발효(1974. 4. 3)로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발생해 천여 명이 영장 없이 체포되고 253명이 구속되는 등 비상한 상황에서, 기독청년과 학생들을 감성적 신앙으로 사로잡아 역 사의식을 무마하려 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다.(『기독교사상』 74년 10월호) 심지어 대회 주강사 빌 브라이트(William R. Bright)는, “한국에는 종교탄압이란 없다. 단지 정치적 억압이 있을 뿐이며,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가 하면,“투옥된 사람들은 관여하지 말아야 할 일에 관여돼 있다. 미국을 포함해서 세계 어느 나라도 한 국만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사회의 비상한 시국을 염두에 둔다면, 빌 브라이트의 발언은 국제적인 기독교 지도자로서 공공연히 언급하기에는 매우 부적절한 것이었다. 이 집회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이런 몇 가지 이유로 인해 대규모 전도집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낳게 했다.
《공동번역》성서의 출간 배경은 먼저 1957년 5월 기독교의 성서학자들이 모여 새로운 성서를 번역하기로 결의하고 성서번역위원회를 구성한데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복음동지회’라는 모임을 통해 1961 년 <마태의 복음서>를 번역했다. 이것은 현대어 성서번역의 징검다리 가 됐을 뿐만 아니라, 당시 대한성서공회를 크게 자극하는 일이었다.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 이래 여러 방면에서 현대적인 개혁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서를 자국어로 번역하여 사제들은 물론 신도들에게도 읽게 하도록 한 일이었다. 이에 따라 세계 각국의 가톨릭교회에서 성서 번역운동이 일어나게 됐다. 여기에 더해서 기독교회와 가톨릭교회가 공동으로 번역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장려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세계성서공회연합회(United Bible Society: UBS, 세계 각처에 있는 성서공회의 연합체로 본부는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 있음)와 로마 교황청 성서위원회 사이 에 성서 공동번역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게 됐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도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공동번역 사 업이 진행됐다. 1968년 1월에 기독교회와 가톨릭교회의 공동번역위원회가 조직됐고, 같은 해 2월 15일 김정준, 정용섭, 배제민, 문익환, 선종완을 중심으로 먼저 <구약성서> 번역위원회가 활동에 들어갔다. 1969년 초부터는 가톨릭교회 측에서 백민관, 허창덕, 김창렬이, 기독 교회 측에서는 김진만, 이근섭, 박창환이 <신약성서>번역위원으로 참여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모두 번역하기 시작했다.
번역위원회는 두 가지의 기본 원칙을 설정했다. 첫째, 세계성서공 회연합회와 바티칸에서 합의한 원칙을 꼭 따르며, 둘째, 번역을 한 텍스트 원본으로는 구약성서의 경우는 루돌프 키텔(Rudolph Kittel)이 편찬한 히브리어 성경 마소라 본문(Masoretic Text in Biblia Hebraica, 1937년 3차 에디션)을, 신약성서의 경우는 세계성서공회연합회(UBS) 가 출판한 그리스어 신약성서(The Greek New Testament, 1966년 1차 에디션)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세부적으로는, 축자적(逐字的) 번역이나 형식적인 일치를 추구하는 번역을 피하기로 하고, 내용의 ‘역동적 동등성’을 취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성서를 읽는 사람이 원문과 같은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힘 써 보기로 했다. 특히 고유명사를 어떻게 표기하느냐에 있어서는, 기독교회와 가톨릭교회가 교과서에서 쓰는 명칭을 따르기로 했고, 위의 두 경우에 속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원어의 발음을 채택하기로 했다.
이렇게 작업을 진행한 결과, 1971년 4월 〈신약성서〉가 출판됐고, 이어 1977년 부활절을 기해 <구약성서> 1,997쪽, 외경 328쪽, <신약 성서> 505쪽을 포함하는 하는 총 2,420쪽의 방대한 분량의 번역을 완료,《공동번역》성서라는 이름으로 간행하게 됐다. 그 뒤로 달라진 한글 맞춤법을 반영하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몇 가지 오류를 수정한 내용을 담은 개정판이 1999년에 나왔다.
《공동번역》성서는 1977년 대한성서공회를 통해 출판된 이래, 가 톨릭교회, 정교회 그리고 성공회를 비롯한 소수의 기독교에서만 사용 되다가, 지금은 성공회와 정교회에서만 《공동번역》성서를 사용하고 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1984년 선교 200주년을 맞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분도출판사)를 내놓았고, 2005년 대림절을 기해 천주교《성경》(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을 전면 채택했다. 그러니까《공동번역》성서는 현재 가톨릭교회와 기독교회 어느 쪽에서 도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공동번역》성서는 천주교와 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번역했다는 점, 그리고 현대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알기 쉬운 우리말로 번역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녔다고 해야 할 것이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교계의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종래 사용해 오던 《개역》성경의 뒤를 잇는 새로운 번역 성경을 준비해 달라는 요구를 하게 됐다. 그리고 여기에 부응해 《표준새번역》성경의 번역 작업이 시작됐다.
번역 원칙은 《개역》성경의 수정이나 교정이 아닌, 전적으로 새로운 번역을 하되,《개역》성경의 보수적인 정신과 한국 교회의 전통을 존중한다는 것이었다. 구약 번역자들은 독일성서공회에서 출판한 히브리어 구약전서 <비블리아 헤브라이카 슈투트가르텐시아>(1967/77 년)에 실려 있는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을, 그리고 신약 번역자들은 그리스어 신약성서(The Greek New Testament, 1983년 3차 에디션)를 텍스트로 사용했다.
《표준새번역》성경은 1993년 1월 대한성서공회에서 출간됐다. 각 교단의 신학자 16명으로 구성된 번역진이 10여 년에 걸쳐 성경을 새롭게 번역한 것이었다. 정식 명칭이《성경전서 표준새번역》이었던 이 새로운 성경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개역》과는 달리 현대어로 번역됐다는 데 있었다. 쉬운 말로 번역됐다는 것도 또 하나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원문의 뜻을 잘 전달해 보려는 노력도 돋보인다. 번역된 본문이지만 번역 어투를 없애고 아주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문의 뜻을 올바로 전달하고 자 했던 것이다.
《표준새번역》의 또 다른 특징은 《개역》이 ‘여호와’라고 하고, 《공동번역》이‘야훼’라고 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네 글자’ (YHWH)를 ‘주’(主)로 번역했다는 점이다. 구약의 마소라 본문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네 글자를‘주’(아도나이)라고 읽어 왔고, 기원전 3세기부터 번역되기 시작한 그리스어‘칠십인역’이 이 이름을 ‘주’(퀴리오스)라고 번역한 이래, 신약의 사도들이 신약을 기록할 때도 그 이름을 ‘주’(퀴리오스)라고 적었고, 제롬의 라틴어 번역‘불가타’ 역시 이 이름을 ‘주’(도미누스)라고 했다. 또한 루터의‘독일 어역’도 이 이름을 ‘주’(헤르)라고 했으며, 대다수의 영어 성서가 이 이름을‘주’(로드)라고 해 왔으므로, 우리말《개역》의 신약성서도 ‘주’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히브리어 본문의 전통과 세계 교회의 오 랜 전통과 우리말《개역》신약성서의 전통을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 한 이름 네 글자(YHWH)를‘주’라고 번역한 것이다.
《표준새번역》이 《개역》과 다른 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대어로 번역됐다. 종결어미 ‘하시니라’ ‘하시더라’ ‘된지 라’‘이러라’등이 없어졌다. ‘가라사대’ ‘發明하다’ ‘發行하다’ ‘不 平하다’와 같은 고어도 사라졌다.
둘째, 쉬운 말로 번역됐다. ‘개동시(開東時)’(창 44:3)는 ‘동이 틀 무렵에’로, ‘半日耕地段(반일경지단)’(삼상 14:14)은 ‘반나절에 갈아 엎을만한 들판’으로, ‘지로(指路)하다’(행 1:16)는 ‘안내(案內)하다’로 고쳤다.
셋째, 우리말답게 번역됐다. 무엇보다 번역어투와 비문(非文)을 없애려 했다.《개역》에 흔히 나오는‘두려워 말라’(민 21:34)와 같은 비문은 ‘두려워하지 말아라’로 고쳐졌다. 「개역」 아모스 5장 20절의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와 같은 무의미한 번역은 없어졌다. 이 구절이《표준 새번역》에서는 ‘주의 날은 어둡고 빛이라고는 없다. 캄캄해서, 한 줄기 불빛도 없다’라고 번역됐다.
넷째, 성차별 표현을 없앴다. 여성 경시 표현을 모두 없애버린 것이다. 《개역》에서 흔히 보는‘계집’,‘어미’같은 표현이 사라졌다. 또 《개역》에서는 남성이 여성에게 반말을 쓰지만《표준새번역》에서는 서로 존대말을 쓰도록 했다. 특히 룻기에서 룻과 보아스가 서로 존댓말을 쓰도록 번역했다. 성차별 표현과 함께 장애인 차별 표현을 없앴다는 것도《표준새번역》의 특징 중 하나이다. 예를 들면, ‘문둥병’은 ‘나병’또는 ‘악성 피부병’으로, ‘소경’은 ‘맹인’으로 고쳤다.
장로회의 분열
1907년 최초의 독립노회를 조직하고, 1912년 총회를 창립한 조선예 수교장로회는 오랫동안 단일 교회를 유지해 왔다. 물론 일제 말기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1943)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1945)으로 흡수 통합되면서, 교단의 정체성이 심각하게 훼손됐다. 장로회의 기본적 치리기구인 노회(Presbytery)가‘공중분해’돼버린 것이다. 1945년 해방은 기독교인들에게 잃었던 나라와 신앙의 자유를 동시에 되찾는 감격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일제 말기에‘공중분해’돼버린 교회의 올바른 모습을 회복하고 재건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그러나 장로회는 이 과정에서 몇 차례의 분열을 겪게 된다.
장로회 최초의 분열이 일어난 곳은 부산경남지역을 지경으로 한 경남노회였다. 부산경남지역은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남부 중심지였다. 해방이 되고 노회를 재건할 당시, 경남노회 안에는 세 부류가 있었다. 한상동, 주남선 목사로 대표되는 소수의 ‘출옥성도’들, 적극적으로 친일에 가담했던 김길창 등 일부 목사들, 그리고 일제의 강요에 못 이 겨 소극적 순응으로 일관했던 대다수 사람들이었다.
노회의 재건에는 출옥성도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제47회 경남 노회 정기노회(1945. 12)에서 출옥성도인 주남선 목사가 노회장으로 추대되면서 과거 청산이 시대적 과제로 떠올랐다. 이 때 한상동 목사가 박윤선, 주남선 등과 힘을 합쳐 경남노회 산하에 새로운 신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당시 경기노회 산하에 조선신학교가 있었지만, 이 신학교는 신사참배를 허용했고 신학적으로도 자유로운 색채를 띠고 있었다. 보수적인 신학노선에 서 있던 당시의 많은 교역자들이 조선신 학교를 못마땅해 하던 차에, 한상동이 신사참배 문제로 자진 폐교한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계승을 표방하면서 새로운 신학교의 설립을 추진한 것이다. 1946년 9월 20일 부산진에 있는 학교의 교실 하나를 빌려 박윤선을 교장서리로 추대하여 고려신학교가 개교했다. 이에 따라 경남노회와 고려신학교가 출옥성도와 신사참배 항거자들의 중심축이 되는 듯 했다.
그런데 제48회 경남노회 정기노회(1946. 12)에서 친일행각으로 널리 알려진 김길창이 노회장으로 당선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김길창은 고려신학교를 비판하면서 인준을 취소하고 신학생 추천을 금지 시켰다. 노회장 김길창의 갑작스런 조치에 한상동이 반발해 노회탈퇴를 선언했고, 한상동을 지지하는 소속 교회들이 노회 결의에 항거하고 한상동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자 경남노회는 임시노회(1947. 3)를 열고 노회장 김길창 이하 임원 전체를 사퇴시키고 출옥성도 중심의 교회 재건안을 결의했다. 이에 한상동은 탈퇴를 번복하여 노회에 복귀했고 고려신학교를 재인준하면서 노회와 신학교의 관계도 정상이 되는 듯 했다.
그러나 문제의 발단은 의외의 사건에서 일어났다. 제50회 경남노회 정기노회(1948. 12)에서 노회 도중 한 사람이 일어나 일제 말에 신사 참배를 했다고 참회를 했다. 이 때 한상동이 신사참배 동원의 책임자인 김길창의 목사직 면직을 제안했다. 제명 위기에 처한 김길창은 자기 세력을 규합하여 별도의 노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경남노회는 두 개로 분열됐고, 분열된 두 노회는 제35회 총회(1949. 4)에 각기 대표를 파견했다. 총회는 일단 기존 경남노회의 대표성을 인정했지만, 헌트(Bruce F. Hunt, 한부선) 등 미북장로회에서 분열한 메이첸파 선교사들과의 관계를 정리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전권 위원회를 구성해 경남노회 분열문제를 처리하고자 했다. 전권위원들은 분열된 노회를 억지로 통합하기 보다는 노회를 3등분하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러자 출옥성도 중심의 기존 경남노회는 총회가 김길창 측의 노회를 지지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총회의 3등분 해결책을 비판하면서 스스로를‘경남법통노회’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총회와 ‘경남법통노회’는 날카롭게 대립한다.
1951년 부산에서 열린 제36회 계속총회(한국전쟁으로 정회)가 ‘경남법통노회’측이 파송한 대의원의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자, 이들은 이듬해 9월 진주 성남교회에서 독자적인 총회를 조직했다. 오늘날 ‘고신파’라고 부르는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의 탄생이다. 장로회가 신사참배 문제를 깔끔히 청산하지 못한 결과, 교단이 분열되고 만 것 이다.
하지만 이듬해 기존 총회 지도자들은 분열된 교단을 다시 합쳐야 한다는 뜻을 모아, 고신교단과의 재결합을 위해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1) 기존의 총회가 이미 1946년 남부총회에서 신사참배 취소를 결의했지만 한 번 더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하겠으며, 2) 장로회신학교와 고려신학교를 다시 합치되 박형룡 목사를 부(副)교장으로 하겠으며 고려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를 총회가 인정하겠다’는 제안이었다. 이 제안에 대해 고신교단은 총회가 먼저 ‘고려신학교 측을 잘라낸 것은 과오였다’는 내용을 성명서로 발표하라고 요구했다.
이어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이원영(李源永)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됐다. 이원영은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한 출옥성도였고, 신실한 목회자로서 교계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대다수 총대들은 고신교단 분열의 일차적 원인이 신사참배문제에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이번 총회 기간에 가장 먼저 그 죄를 깊이 뉘우쳐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원영이 총회장으로 선출된 제39회 총회에서‘제27회 총회(1938)에 서 결의한 신사참배 결의는 하나님 앞에 계명을 범한 것임을 자각하고 이 결의를 취소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고신교단과의 분열은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즈음, 장로회는 또 한 번의 분열로 치닫고 있었다. 문제의 중심에는 조선신학교가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신학교는 평양신학교(1938. 9)가 신사참배로 자진 폐교한 후, 목사 양성을 위한 신학교가 없는 상황에서 김재준, 송창근, 채필근 목사 등이 중심이 돼, 1940년 총회 인준 신학교로 출발했다.
해방이 되자 장로회의 유일한 신학교였던 까닭에 1946년 제32회 남부총회는 조선신학교의 직영을 인준했다. 그러나 김재준 목사의 신학적 성향에 비판적인 입장에 있던 사람들은 조선신학교의 교육에 지속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마침내 보수적인 학생들의 반발이 일어났다. 재학생 51명이 김재준의 신앙과 성경관에 불만을 품고 1947년 제33회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한 것이다. 이에 총회 는 8인의 조사위원을 선정하여 조사하기로 하고, 김재준과 그의 신학적 동반자였던 송창근이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이에 대해 김재준은 자신의 성경관과 신학적 입장을 담은 진술서를 총회에 제출했다. 김재준의 ‘신앙은 보수, 신학은 자유’라는 논리는 조사위원들이 쉽게 반박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 박형룡은 김재준의 신학적 진술을 앞장서서 비판하기도 했다.
이 무렵 서울에서는 새로운 신학교 건립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박형룡을 교장으로 한 장로회신학교를 만들었다. 1948년 6월 장로회신학교가 정식으로 개교하자 1949년 제35회 총회에서 장로회신학교를 총회 직영 신학교로 인준했다. 그 결과 총회 산하에 두 개의 직영신학교를 두게 된 것이다. 그런데 1951년 제36회 계속총회에서 조선신학교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선신학교의 직영을 취소했다. 문제는 여기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1952년 제37회 총회에서 김재준의 목사직 면직안과 함께 캐 나다장로회 소속 스코트(William Scott, 서고도) 선교사의 본국송환을 결의했다. 더구나 조선신학교 출신 교역자의 불채용안이 통과되됐다. 김재준 목사가 속했던 경기노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듬해인 1953년 제38회 총회에서는 그의 목사직 면직이 재확인됐다. 상황이 돌이 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자, 같은 해 6월 김재준을 지지하는 조선신학교 측은 조선신학교 강당에서 ‘법통 제38회 총회’를 열고 ‘복음의 자유, 신앙양심의 자유, 자립자조의 정신, 세계교회 정신’을 표방하는 새로운 교단을 창립했다. 조선신학교와 오랫동안 친분을 맺어온 캐나 다연합장로회 선교부가 이를 지지했다. 이듬해 교단 명칭을 ‘대한기독교장로회’로 개칭했다. 오늘날‘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의 탄생이었다. 장로교는 신학적 노선의 문제로 또 한 번의 분열을 겪게 된 것 이다.
‘고신’과 ‘기장’이 분립했지만, 대부분의 장로교회는 여전히 기존 교단에 남아있었다. 그러나 장로회는 두 번의 분열이 있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큰 규모의 분열을 경험한다. 이 분열의 과정에는 세계 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이하 WCC) 가입문제, 박형룡 의 신학교 부지 불하사건, 경기노회 총대 사건 등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WCC 창립총회가 열렸다. 우리나라에서는 김관식 목사가 창립총회에 참석했다. 김 목사는 귀국 후 WCC 가입을 총회에 제안했고, 장로회 총회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보수 진영에서는 WCC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더욱이 한국 전쟁이 한창일 때 기독교인 국회의원 22명이 WCC가 공산주의를 용납 하는 기관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자, 더 많은 보수적인 목회자가 WCC 반대편에 서게 됐다. 특히 WCC가 창립되자, 미국 복음주의협의회(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이하 NAE)를 비롯한 각국의 보 수적 기독교단체는 1951년에 WCC에 대항할 기구로 세계복음주의연맹(World Evangelical Fellowship, 이하 WEF)을 결성했다. 한국에서는 1952년 박형룡, 정규오 등이 한국 복음주의협의회를 창설했고, 1955년에 WEF에 가입했다. 이들은 국제적인 연대를 형성하면서 장로회 안에서 WCC 탈퇴운동을 이끌었다.
WCC 가입문제가 조직적인 반대에 부딪히자, 1956년 제41차 총회에 서는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를 조직, 연구하여 보고하도록 결정했다. WCC 운동에 대한 찬성파와 반대파는 이미 분명히 갈라져 있었다. 연구위원회는 박형룡 등의 반대파 4인과 한경직 등의 찬성파 4인 등 모두 8명으로 구성됐다. 1년간의 연구위원회 활동 끝에 1957년 제42차 총회에 제출된 보고서는 이렇다 할 결론을 담지 못했다. 단지 WCC 의 교회 단일운동은 반대하고, 교회의 친선과 협력운동에 대해 선택 적으로 참가할 것을 제안했다.
그런데 이 무렵 WCC 찬성파와 반대파의 대립을 가중시키는 사건 이 발생했다. 1953년 휴전 후 총회는 신학교 건물을 남산 조선신궁터로 옮기고, 그 부지를 정부로부터 불하받으려 했다. 그런데 WCC 반대 파의 중심에 있던 박형룡이 총회 신학교의 교장으로서 학교의 부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측근에게 삼천만환이란 엄청난 돈을 사기당한 것이다. 박형룡은 스스로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기로 결정했고, 1958년 3월에 열린 이사회에서 그의 사표가 수리됐다. 하지만 WCC 반대파들은 박형룡이 사임해야 할 정도의 잘못은 없다고 두둔하면서 그의 사임에 반대했다. 이들은 오히려 박형룡의 사퇴는 보수신학의 후퇴를 불러오고 WCC와 같은 용공적 자유주의의 득세를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로회 분열의 보다 직접적인 계기는 경기노회 총대 사건이었다. 제72회 경기노회 정기노회(1959. 5)는 그 해 열릴 총회대표를 선출하게 되어 있었다. 이 무렵 경기노회는 WCC 찬성파와 반대파가 자 파 총대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과열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경기노회는 WCC 찬성파가 다수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이변이 없는 한 찬성파 총대가 더 많이 선출되리라 예상됐지만, 결과는 의외로 반대파의 압도적인 우위였다. 그러나 이 결과는 개표상의 착오로 일어난 것으로 드러나고, 찬성파는 6월에 임시노회를 열고 다시 총대를 선출해 찬성파가 총대의 다수를 차지했다.
1959년 9월 제44회 총회는 전국적 관심 속에서 개최됐다. 경기노회의 WCC 찬성파는 ‘임시노회 선출총대’의 명단을, 반대파는 ‘정기노회 선출총대’의 명단을 총회에 각각 제출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총회 는 경기노회 총대의 대표성을 인준하는 총회투표로 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찬성파 측이 더 많은 표를 얻어 임시노회 선출총대가 대표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반대파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다음 날에도 계속 문제를 제기했다. 그런데 당시 반대파에 속했던 총회장 노진현 목사는 총회임원들과 증경총회장과의 별도 회의를 거치면서 전날의 결정을 뒤엎는 해법을 내놓았다. 약 2개월 뒤인 11월 24일까지 정회하고, 그 동안 경기노회가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 해결 안은 전날의 결정을 번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동의안의 가부를 정확히 묻지 않고 가결을 선포했다. 이에 찬성파에 속했던 안광국 목사가 단상에 올라와 총회임원 불신임안을 낭독하고 가결되었음을 선언했다. WCC 찬성파는 그날 밤 상경하여 바로 다음날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속회했다. 반대파는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가결한 11월 24일에 승동교회에서 속회했다. 거의 비슷한 교세를 가진 두 개의 장로회가 각자 총회를 형성한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장로회의 재결합을 위해 ‘통합촉진위원회’ 가 결성돼 분열당사자 양측 모두에게 통합방안 제안했다. 그것은 ‘1)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는 75년간의 신앙전통을 지킨다 2) 총회의 평 화 통일을 위하여 WCC와 ICCC(NAE)를 탈퇴한다 3) 선교정책을 양측 이 협의하여 재추진한다’는 내용이었다. 미국 장로회 임원단이 11월 9일 내한해 먼저‘통합촉진위원회’와 만나고, 그 다음 ‘승동측’(승동교 회에서 총회를 가진 측)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동측’(연동교회에서 총회를 가진 측)과 만났다. 그리고 양측이 함께하는 연석회의를 연이 어 가졌다. 이 회의는 미국 연합장로회(이전의 북장로회) 선교부, 미남장로회 선교부, 호주장로회 선교부가 함께 주관했다. 연동과 승동 양측의 위원과 세 선교부 대표는 이듬해 1월 중순까지 여덟 차례 회의를 가지면서 분열된 장로교회의 화합을 모색했다. 그러나 1월 15일 양 측의 재통합 노력은 끝내 결렬되고 말았다.
승동측은 1960년 2월 13일 고신과 합동하여‘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합동)를 형성했지만, 합동과 고신은 1962년 11월 19일 또 다시 분열됐다. 한편 합동총회가 형성되고 며칠 뒤인 2월 17일, 연동측, 승동측, 중립측(총회 화평통합촉진위원회)에서 통합을 원하는 총대들과 세 선교부(미국 연합, 남, 그리고 호주 장로교)가 새문안교회에서 모여,‘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통합)를 개회했다. 통합총회는 대전 중앙교회와 서울 연동교회에서 모인 제44회 총회를 확인하고 그 모든 결의를 인수했다. 이로써 교세가 서로 비슷한‘통합’과‘합동’은 재통합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분열의 길로 가고 말았다.
감리회의 분열
해방 이후 감리회는 세 차례의 분열을 겪었다. 해방 직후 재건파와 복흥파의 분열, 1954년에 총리원과 호헌파의 분열, 1974년에 총리원과 갱신총회의 분열이 그것이다.
일제 말기 형성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임원들은 해방 직후 교단 명칭을 ‘조선기독교단’으로 바꾼 뒤 그 해 9월 8일 서울에서 남부 대회를 소집했다. 남부대회의 취지는 조선기독교단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것이었다. 조선기독교단은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인사들이 중심이 된 교단으로서, 이날 회의에 모였던 인사들이 대부분 그 주도자들이었다. 즉, 계속적으로 통합된 교단을 통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에 담긴 속뜻이었던 것이다.
이 때 이규갑 목사를 비롯한 수십 명의 감리회 인사들이 박차고 나와 버렸다. 조선기독교단을 용납할 수 없으며, 감리회를 따로 재건하겠다는 것이다. 이규갑 목사 등은 이 날 이후‘감리교회 재건중앙위원회’를 조직하고, 1946년 1월 동대문교회에서 연회를 개최하고 독자적인 신학교육을 재개했다. 흔히 ‘재건파’라고 불린 이들은, 일제 말기 대표적 친일목사 정춘수가 감독이 된 이후에 만들어진 제도 및 규정 일체를 부인했다. 재건파는 친일적 교회지도자들로부터 소외당했 던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다. 한편 감리회뿐 아니라 장로회, 성결교회 등에서도 독자적인 교단을 재건하자는 주장이 일기 시작하면서, 조선 기독교단은 오래지 않아 와해되고 말았다. 사태가 이렇게 진행되자, 조선기독교단을 유지해서 기득권을 누리려던 감리회의 친일인사들은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한편 조선기독교단에 적극 참여하는 사람들은 1946년 9월 수표교 교회에 모여 ‘조선감리회 복흥신도대회’를 따로 개최하고 재건파와 대립했다. 이들을 흔히 ‘복흥파’라고 부른다. 복흥파와 재건파의 대립은 상호 비방과 교회 쟁탈전으로 비화하기도 했다. 또한 재건파도 처음에는 감리회 내부에서 지지기반이 미약했지만, 북측 목회자들이 대거 남하하여 재건파에 가담하면서 어느 정도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재건파와 복흥파가 각각 연회와 총회를 열 어 감독을 선출하게 되자, 감리회는 완전히 둘로 갈라지게 됐다. 그러나 감리회 재건총회와 복흥총회의 분열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분 열이 시작된 지 4년만인 1949년 4월 29일, 기독교조선감리회 통합총회가 개최된 것이다. 문창모, 박현숙, 장세환 등의 평신도 청년지도자들 이 주도적으로 통합운동을 전개한 데 따른 것이었다.
1953년 감리회 총회는 류형기 감독의 임기 만료에 따라 새로운 감독을 선출해야 했다. 그런데 교단 내에서는 류형기를 다시 감독으로 추대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전후의 교회 복구를 위해 미국교회의 지원이 절실했는데, 류형기가 미국교회와의 관계가 돈독하기 때문에 감독으로서 적합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감독의 임기를 2년으로 규정하고 있는 헌법이 문제가 됐다. 류형기 지지파는 감독 임기를 4년으로 하자는 헌법개정안을 들고 나왔고, 한편에서는 헌법을 수호하자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총회가 이듬해로 연기되는데, 그 사이 교단 선교비가 잘못 투자되는 바람에 막대한 손해를 보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1954년 3월 총회에서 류형기가 총회원 절대 다수의 지지로 감독에 재선되자, 류형기 반대파들은 이에 반발하며 퇴장해 버렸다. 사태를 둘러싸고 헌법을 수호하자는 측(호헌파)은 감독 불신임을 주장했고, 류형기 지지파인 총리원 측은 호헌파 교직자들의 교직을 정지하거나 면직하는 방식으로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 갈등구도는 과거 재건파와 복흥파의 대립이 재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총리원 측은 주로 재건파 인물들인 반면 호헌파는 과거 복흥파에 속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북한지역 서부연회와 남한지역 중부연회의 대립이라는 지역갈등도 가미돼 있었다. 결국 호헌파는 이듬해 3월 천안제일교회에서 호헌감리회 전국대회를 개최해 김응태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했다. 감리회는 다시 호헌총회와 총리원으로 양분됐다. 그러나 워낙 물적, 인적 토대가 열악했던 호헌총회는 류형기 목사의 감독 임기가 끝난 후 1959년 연합연회를 열어, 김종필 목사를 감독으로 추대하면서 다시 하나로 합동했다.
감리회는 1970년대에 다시 분열했다. 1959년 교단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호헌파는 과거 북한지역 서부연회 세력인 성화파와 교단 주도권을 두고 다투었다. 다툼이 격화되자 이를 방관할 수 없다고 여긴 사람들이 ‘정동파’를 형성했다. 이 세 개의 파벌로 인해 감리교단은 큰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1970년 중부연회 감독선거 결과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이탈하여 1971년 3월 인천 숭의교회에서 독자적인 경기 연회를 조직하랬다. 경기연회는 1975년에 연합총회를 개최하고 독자적인 교단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4년 제12회 총회에서 감독 선출을 둘러싸고 또 한 차례 내홍을 겪어야 했다. 이 때 알력의 축은 호헌파와 옛 서부연회 세력이었다. 이 과정에서 호헌파 출신이 감독으로 선출되자 총회 장에서 퇴장한 총대들은, 종교교회에서‘기독교대한감리회’(갱신)라는 이름으로 독자적인 총회를 열고 감독을 선출했다. 총회가 분열되자 일부 교회들과 주한 감리교 선교사들은 중립을 선언했다. 이렇게 해 감리회는 총리원 측(옛 호헌파)과 이에 대립하는 갱신총회, 연합총회, 그리고 중립파로 나뉘게 됐다. 총리원에 대립하는 3개파는 1975년 11월 통합선언문을 발표하여 총회를 열고 통합했다. 이윽고 1978년 총리원 측과 통합총회도 재통합됨으로써 감리회는 단일교단으로 재출 발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감리회는 장로회와 마찬가지로 분열의 아픔을 겪었다. 세 번에 걸친 분열의 주된 원인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갈등과 교단 주도권을 둘러싼 다툼이었다. 하지만 장로회와 달리 감리회의 분열원인은 신학적 노선의 차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완전한 결별로 치닫지 않고 결국 하나로 재통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신천지 교인을 거부합니다”대부분의 교회 앞에는 이와 같은 문구를 적은 작은 포스터가 붙어 있다. 신천지가 한국교회에 얼마나 큰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지난 2012년 9월 3일에는 문선명 총재가 92세의 나이로 사망함으로써 통일교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통일교의 후계 구도가 어떻게 전개될지 가 지금 세인의 관심사다. 이외에도 한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이단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있다.
광복을 맞이한 후 한국교회는 급성장했다. 미군이 한국을 통치하게 되면서 기독교 성장에 유리한 조건들이 조성됐다. 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잔혹한 6·25전쟁은, 한국인들에게 죽음 이후의 삶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기복신앙도 급속도로 심화됐다. 1960년대에는 급격한 산업화로 농촌인구가 도시로 대거 유입됐는데, 교회는 이들을 결속시키고 정서적인 안식처를 제공하는 대안 공동체가 됐다. 이 시기 한국교회는 모든 역량을 민족복음화에 쏟아 부었다. 한국을 복음화시켜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것이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의 꿈이었다.
문제는 활기를 띠며 성장하는 종교시장에 수많은 기독교계 신흥 종 파들도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발생한 신흥 종파들의 특징은 창설자를 재림주나 메시아, 보혜사 등으로 신격화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한결같이 계시나 신비체험인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는 한국교회 이단의 신비주의적인 면을 잘 보여준다. 성경은 한 마디로 이들 교주들의 신격화를 증명하는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그들은 성경 말씀을 본문의 맥락 속에서 해석하지 않고, 자신의 신비체험이나 계시를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했다. 때문에 성경은 오용 되거나 왜곡될 수 밖에 없었다.
기독교계 신흥종파 창설자들의 개인적 신비체험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훼손함으로써 정통 기독론에 심각한 위해를 주었다. 이들은 예수의 구원사역이 자신들에 의해 완성된다고 주장했다. 이들 종파 중 다수는 시한부 종말론을 외쳤다. 그리고 그 구원의 대상자는 14만 4천으로 제한돼 있었기 때문에 추종자들에게는 맹신이 요구됐다. 추 종자들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될 지상천국과 새로운 하늘 나라를 꿈꿨다. 다시 말해서, 종교의 기복적인 요소가 이들 종파들의 발전에 중요한 버팀목이 됐던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계 신흥종파들은 입신이나 신비체험을 통한 개인적 계시를 바탕으로 시작됐다가, 결국 에는 정통 기독교의 성경론과 기독론, 그리고 종말론까지 손상시키는 구도를 가지고 있었다.
해방 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신흥 종파에는 통일교, 전도관, 동방교 등이 있다. 시한부 종말론도 한국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다. 1960년대는 기독교에덴수도원, 동방교, 세일교단, 이삭교회 등이 종말론을 주장하며 번성했다. 1970년대 말에는 정명석의 애천교회가 종말론을 주장했으며, 하나님의 교회는 1988년 충남 연기군 소정면 전의산에서 재림을 준비했다. 시한부종말론은 1992년 10월 28일 휴거를 주장 했던 이장림의 다미선교 회에 의해 절정을 이루었다. 이 후유증으로 한국교회에서는 지금까지 실제적인 종말론 논의가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가장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이단은 통일교,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이다. 통일교는 1954년 문선명이 세웠다. 그는 성적 타락을 죄의 본질로 여기는 사상을『원리강론』에서 체계화 시켰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선악과가 아닌 성적 범죄와 연계시키는 것도 한국교회 이단의 중요한 특징인데, 이러한 주장은 1920년대의 ‘새 주’를 자처한 김성도에게서 유래했다. 그녀는 죄의 뿌리가 음란 이며, 예수는 한반도에 재림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진지한 성서해석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신앙체험을 통해 나온 것이다. 이러한 음란과 재림 모티브는 김성도 밑에서 신앙 생활을 한 적이 있는 김백문을 통해 문선명에게 이어졌고, 박태선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런 의미에서 김성도는 한국교회의 이단 계보 의 정점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통일교에서 가장 문제시되는 부분은 예수가 구원 사명을 다하지 못했으며, 이것을 문선명이 완성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통일교는 1960-70년대 반공논리로 미국과 한국 군사정권의 비호를 받았고, 군수 사업에 진출해 이득을 얻었다. 통일교에서 주장한 승공(勝共)운동은 박정희 정권과 통일교를 이어주는 끈이 됐다. 신흥 종파는 친정부 활동을 통해 국가적, 사회적 공인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정부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신들의 근거지를 개발하고 각종 허가를 얻기 위해 야당 정치인을 적극적으로 후원한다. 정치인도 이들과의 연대를 통해 각종 정치자금과 표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밀월 관계가 형성된다. 이것을 잘 이용한 것이 통일교였다. 통일교는 1980년대 말부터 승공운동을 통일운동으로 전환했고, 문선명은 고르바초프와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다.
문선명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2012년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통일교는 다른 신흥 종파와 달리 그 종교적 기반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통일교가 이미 교리적 체계를 착실히 다졌고, 교회도 조직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선명의 종교조직은, 여러 경제조직과 연계되면서 그 기반이 더욱 안정적인 구조를 형성했다. 통일교가 하나의 종파(sect)를 벗어나, 안정된 제도적 종교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 다. 그러나 통일교가 자신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는 한, 정통 기독교와의 갈등관계는 지속적될 가능성이 크다.
이만희가 1984년 세운 신천지(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는 오늘날 한국사회와 교회에 가장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종파다. 이만희는 자신을 보혜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만희는 전도관의 박태선과 장막성전의 유재열의 영향을 받았다. 박태선은 수십만의 인파를 몰고 다닌 부흥사이자, 전도관을 세운 신흥 종파의 교주였다. 1960~70년대 전도관은 신앙촌이라는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등, 그 기세와 인원 면에서 통일교를 압도했다. 장막성전은 1966년 호생기도원에서 분리 독립한 유재열이 만든 신흥 종파로서, 1969년 11월 1일 말세심판이 온다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말세의 피난처인 청계산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갔다. 그는 다니엘, 에스겔, 스가랴 등의 구약성서와 요한계시록을 집중적으로 인용하면서, 말세의 징조와 구원 및 심판에 관해 설교했다. 이에 박태선 전도관의 많은 신도들이 수긍해 들어왔고, 이만희도 이 장막성전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신천지를 세웠다.
신천지에서는 신자의 숫자가 14만 4천명이 될 때 자신들이 왕과 제사장이 된다며 포교에 열중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전도방식 때문에 한국교회가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있으며, 사회적인 물의도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비상식적인 전도방식으로 교회를 어지럽히고, 기성 신자들을 자신들의 교회로 끌어들이고 있다. 신천지를 예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교회 밖에서 진행되는 성경공부를 자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한국교회 이단 중 가장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앞으로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신흥 종파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안식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964년 시작된 하나님의 교회는 안산홍(1918-1985)을‘재림 그리스도’와‘(성령)하나님’으로 믿고, 장길자를 새 예루살렘의 어머니, 어머니 하나님으로 믿고 있다. 이들의 가장 큰 교리적 특징은 하나님은 어머니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구약의 절기 그 중에서도 유월절 준수를 구원과 연결시켜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통일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는 해외 선교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이는 최근 한국교회의 신흥 종파가 국제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교회는 사회참여를 통해 이미지 개선에도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정통 기독교에서 너무 벗어난 주장을 하고 있다. 때문에 한국교회는 기독교 신학을 변증하는 논리적, 신학적 작업을 충실히 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주위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본 결과, 한기총의 문화가 바뀌긴 어렵다고 판단했다. 한기총은 없어져야 한다는 게 결론이다. 지금 상태에 서 개혁은 힘들다. 해체 이후 대체 기관도 필요없다. 미국도 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기관은 없다." -2011.02.25. 손봉호 교수 오마이뉴스 인터뷰 中
4.19 혁명의 충격 속에서 냉혹한 자기반성과 함께 조심스러운 현실 참여를 모색해 오던 한국 기독교는 1964년 굴욕적인 한일회담 추진이 라는 민족적 위기 상황을 맞아 전 교회적으로 정치적 발언과 현실참 여를 시작했다.
이 운동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지는데, 그 하나는 1964년에 시작 된 굴욕적인 한일국교 정상화 반대운동 단계였고, 다른 하나는 65년 6월의 한일협정 비준 반대운동 단계이다. 하지만 이때 한국교회 전체 가 일치해서 비준 반대 운동을 전개한 것은 아니었다. 상당수의 목회자들이 침묵을 지키는가 하면, 때로는 적극적으로 교회의 정치 참여를 비난하고 나선 교계 인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내적 갈등과 분열에도 불구하고, 한일협정 반대운동은 한국교회의 대세적 흐름이었고, 교회는 대체로 하나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결과 기독교는 군사 정권에 대한 비판 세력으로,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며 인권, 민주 화 운동이라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1969년 박정희 정권이 영구집권을 위해 삼선개헌을 강행하 면서 기독교계에 중요한 변화가 생기게 된다. 삼선개헌을 반대하는 윤보선, 함석헌, 김재준, 이병린, 장준하, 김관석 등 기독교내 진보적 그룹은 김대중, 김영삼과 함께 삼선개헌에 분명한 반대 입장을 취한 반면, 한경직, 박형룡, 조용기, 김준곤, 김장환, 김윤찬 등 보수그룹 242명의 목회자들이 조직한 ‘대한기독교연합회’는 ‘3선 개헌 지지와 양심 자유선언을 위한 기독교 성직자 일동’의 명의로 “강력한 영도력을 지닌 지도체제를 바란다”는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
결국 삼선개헌을 기점으로 기독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를 중심으로 한 진보적 목소리와, 정권을 지지하는 대한기독교연합회 의 친정부적 목소리로 나뉘게 된 것이다.
이후 친정부적인 한국의 보수 기독교 세력은 군사정권 인사들과 밀월관계를 형성하면서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차원에서 국가와 교회간의 협력관계를 유지했는데, 1968년 5월 1일 시작된 대통령조찬기도회 가 이들의 밀접한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조찬기도회의 산파 역할을 맡았던 김준곤 목사가 설립한 한 국대학생선교회(Korea Campus Crusade for Christ, CCC)의 성장과정 은 이 두 세력의 공생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정부는 서울시 당국의 반 대에도 불구하고 전(前) 러시아대사관 부지 일부를 CCC에 제공했고, CCC는 대학생 선교를 통해 학생들의 정치적인 정열을 반공사상으로 돌리게 해 1960년에 있었던 학생혁명의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했 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1970년 한국 기독교의 보수세력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후원 아래 ‘민족복음화운동’, ‘반공 및 안보대회’, ‘빌리 그래험 전도대회’, ‘엑스폴러 74 집회’ 등 각종 대형 집회 및 행사를 통한 교회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정부와 보수기독교의 밀월관계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인 8월 6일. 정당성 없는 신군부를 위해 열린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가 방송을 통해 중계되면서 그 분명한 실체가 공개됐다.
이 기도회는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에게 “여호수아와 같은 담 대한 믿음을 달라”는 한경직 목사의 기도와, “이 어려운 시기에 막중한 직책을 맡아서 사회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악을 제거해 주셔서 감 사합니다”라며 전두환의 업적이 후세에 남기를 바란다는 정진경 목사 의 기원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한기총은 1989년 한경직 목사 등 한국기독교의 보수적 성직자와 지도자들이, NCCK가 인권과 민주화운동에 치중한다고 비판하면서, 기독교의 복음중심을 지향하기 위해 결성한 것이다. 여기에 그동안 NCCK에 대응하던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와 NCCK의 일부 세력을 포함한 보수 세력들이 가세, 기독교 최대의 보수연합체로 재결성된 단체이다.
한기총은 같은 해 12월 28일 창립총회에서 발표한 창립 취지문을 통 해, “바라기는 모든 개신교 교단과 개신교 연합단체 및 교계 지도자들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 참여하여 연합과 일치를 이루어 교회 본 연의 사명을 다하는 데 일체가 될 것을 다짐한다”라며, 한국 교회의 분열을 극복한 통합된 단체 설립이 그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기총의 대표적 사업으로는 ‘사랑의 쌀 보내기 운동’, ‘해외 난민 보호 운동’, ‘북한 탈북자 돕기 운동’ 등이 있다. 90년대 들어 문민정부의 출 현과 보수교단들의 가입 등으로 70-80 년대에 비해 보수화 된 NCCK의 사업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은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NCCK의 역사가 오래된 데다, 1970년대와 1980년대 군부 독 재에 맞선 NCCK의 위상이 교회 안팎에서 워낙 높았기 때문에, 사회 적 발언에 있어서 한기총은 고작해야 NCCK가 정부를 비판하는 활동을 할 때에‘폭력 사태를 우려’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정도였다. 전국사편찬위원장인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한국기독교 보수세 력의 결집체인 한기총의 뿌리는 삼선개헌을 지지하던 대한기독교연합회라고 밝힌 바 있다.
2011년 1월 9일. 한기총의 금권선거와 관련된 전 한기총 대표회장 이광선 목사의 기자회견을 계기로 한기총을 해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를 위해 개혁교회네트워크, 교회개혁실천연대 등 총 16개 단체가 모여 ‘한기총 해체를 위한 기독인 네트워크’를 구성했고, 7월 26일에는 손봉호 고신대 석좌교수, 한완상 전 대한적십자 총 재, 이동원 지구촌교회 원로목사,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등 목사, 평신도 전문인 100인의 ‘한기총 해체선언’이 이어졌다.
그러나 한기총은 ‘반성도 회개도 없는 정상화’라는 비판에 개의치 않고 2011년 7월 7일 특별총회에서 마련한 일명 ‘7·7 개혁정관’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미봉책은 집행부가 10월 실행위원회를 열어 개혁정관을 폐기시켜버리면서 그 허 상을 드러냈고, 예장 통합과 고신, 백석, 대신, 기하성, 성결교 등이 한기총 집행부와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2012년 10월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 백석, 통합, 한영, 합신은 한기총을 탈퇴했고, 대신, 기성, 나성, 예성, 기침은 행정보류 상태로, 한기총은 예장 합동과 군소교단들의 집합체로 전락한 상태이다. 현재 한기총을 탈퇴한 예장통합 등 30개 교단과 9개 단체는 교회협의회와 한기총에 이어 ‘한국교회연합’이라는 새로운 연합기구를 설립한 상태 이다.
성차별주의에 대한 반대와 투쟁을‘페미니즘’이라고 말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여성신학은 페미니스트 신학이라고 해야 한다. 여성신학이라고 하면 여성만을 생각하게 되지만, 페미니스트는 성차별주의를 반대하고 양성의 평등이라는 목표에 진지하게 참여하는,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는 조선 말 근대화에 결정적 공헌을 했으며, 유교 가부장적 사회제도에 얽매인 여성의 사회적 해방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성서의 복음은 남녀가 평등한 존재임을 일깨워 주었고, 여성들도 성서를 읽으면서 한글을 배우게 됐으며, 선교 학교를 통한 교육의 기회 확대는 수많은 신여성들이 등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한국 기독교의 기초를 이루는 근본주의 신학은 신앙의 문제를 개인주의화 시켰고, 한국의 가부장적 유교 질서와 맞물려 교회 내 여성 억압의 이데올로기적 근거가 됐다.
근본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인해 한국교회 초기 여성들은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신앙적 경향을 가졌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을 현세적이기 보다는 내세적으로 보는 것, 둘째, 인간의 영혼을 중요하게 보고 육체를 경시하는 이원론적 경향, 셋째,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동경은 하나님을 남성적 이미지로 보는 것, 넷째, 축자영감설의 영향으로 성서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는 것 다섯째,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개인적, 사회적 고난에 대해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인내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 등이다.
한국교회를 발전, 부흥시키는 데에는 이름 없는 수많은 전도부인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다. 한국교회 초기, 사회적으로 활동한 여성들의 유형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전통 사회의 장벽을 뛰어 넘어 복음의 자유를 받아들인 유형이다. 이들은 가부장적 사회의 한계로부터 벗어나 한 인격체로서의 자신을 발견했다. 이경숙, 하란사, 전삼덕, 박에스더, 주룰루 등의 여성들이다. 둘째, 애국적 성향을 강하게 보인 유형이다. 일제의 압제로부터 독립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보이며 민족정신을 고취해 나간 여성들이다. 유관순, 김경희, 김마리아, 강기일, 차경신 등이 그들이다. 셋째, 교육, 자선사업, 선교, 사회 지도자 등으로서의 활동을 통해 사회 전반적 영역에서 활발히 노력한 유형이다. 방애인, 손메례, 왕재덕, 최나오미 등의 여성들이다.
초기 한국교회에서 여성들은 개별적으로나 단체적으로나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그 역할을 담당했지만,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교회 내에서 점차 주변부로 밀려나게 된다. 그 가장 구체적인 예가 여성들이 안수를 받는 데에서 배제되는 것이었다.
한국 여성신학은 서양 여성신학의 영향을 받아 시작됐다. 하지만 서양 여성신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한국의 상황과 씨름하며 독자적인 발전을 계속해 왔다. 여성신학은 서양을 중심으로 1960, 70년 대에 발전됐는데, 한국에서는 19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한국 여성신학은 여성으로서의 기본적 문제뿐 아니라, 분단국가라는 현실 앞에 민족적 과제를 지닌다는 자각으로 민족적 문제도 함께 추 구해 왔다.
한국 여성신학 운동 관련 단체(개신교)로는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한국여신학자협의회, 한국여성신학회, 기독교여성평화연구원, 아시아여성신학교육원, 여성교회, 기독여민회, 이화여자대학교 여성신학 연구소 등이 있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는 기독교대한감리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교한국루터회, 대한성공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등 6개 교단의 교회 여성들이 1967년 연합해서 시작했다. 한국교회 여성들의 결속력이 표출된 이 연합회는 교회일치와 연합, 사회 문제에 대한 대응과 여성인력 개발, 세계평화를 창립 목표로 내세웠다. 1975년‘세계 여성의 해’가 선포되면서, 세계 모든 나라의 여성들이 여성의 인간 회복을 위해 여성 의식화 교육을 진행했다. 여성 의식화 교육과 함께 여성신학적 성서 해석이 한국 교회에 들어오게 된다. 당시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을 지냈던 이우정, 장상 이화여대 교수 등 여성 신학자들은 물론, 박준서 연세대 교수, 민영진 감신대 교수 등 남성 신학자들도 여성들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 레티 러셀의『여성 해방의 신학』이 안상님에 의해 번역, 소개됐고, 로즈매리 류터와 엘리자베스 피오렌자가 소개되기도 했다. 조화순, 조용순, 박성자 목사 등이 갖고 있던 인권운동과 교회 현장 목회자로서의 경험이 합류돼 한국여신학자협의회가 태동했다. 1978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신학교 출신들의 재교육이 시급함을 깨닫고, 1979년 1월 22-23일 아카데미하우스에서‘교회의 민주화’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아시아교회여성연합회의 지원으로 열었다. 당시 회장이던 공덕귀와 서기 안상님의 역할이 컸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 다양한 활동 중 두드러진 것은, 일본 교회여성단체와의 연대를 통해 동남아시아지역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매춘, 기생관광의 심각성을 밝히고, 국제적으로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또한 원폭 피해자들의 현재적 참상을 알리며 일본정부의 전후 보상 문제를 촉구하고, 더 나아가 반전, 반핵의 평화운동을 추구하고 있다.
한국여신학자협의회는 1980년 4월 21일 기독교회관 대강당에서 창립됐다. 실무적인 준비는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총무가 맡았다. 한국여신학자협의회는 ‘여신학자들이 여성신학을 정립하고 확산함으로써 교회 선교에 이바지함과 동시에 평화와 정의의 사회를 이 땅위에 건설하는 데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초대 회장 박순경(朴淳敬)은 ‘여신학자’라는 개념을 학문적 영역뿐 아니라, 실천적 차원에서 활동하는 교회여성을 포함하는 포괄적 의미로 본다. 즉 “신학자라는 말은 새로운 사상적 추세에 따라 재규정할 필요가 있는데, 교역자, 선교교육 프로그램에 종사하는 실무자, 가정 살림에 종사하는 교회여성까지 포함하는 말”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초대 임원으로는, 회장 박순경, 부회장 박순금, 임춘복, 서기 이수영, 부서기 이현숙, 회계 이희수, 부회계 김화자, 기획위원장 최만자, 프 로그램위원장 안상님, 섭외위원장 김윤희, 재정위원장 강영자, 협동 총무 장상, 나선정, 이문우, 장석순, 이연옥이 선출됐다.
한국여신학자협의회는 한국 교회 내 여성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1980년 7월 14일 새문안교회에서 ‘여성과 한국교회’라 는 주제로 제1차 공개 강좌를 열었다. 한국여신학자협의회보 제1호를 1981년 4월 17일에 발행했으며, 12호까지 나오다가 「한국여성신학」으로 바뀌어 현재까지 제75호를 계간으로 발간했다. 한국여신학자협 의회는 1983년 제1차 여성신학 정립협의회를 제3세계신학자협의회의 지원으로 개최한 이후, 서양 여성들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아시아 여 성들과의 연대를 강조했고, 다음과 같은 과제를 채택해 수행하고 있다. 첫째, 여성신학 측면에서 성서 해석과 여성의 인간성 회복, 둘째, 교회 공동체의 민주화의 과제, 셋째, 민족분단의 문제와 통일의 과제, 넷째, 아시아교회 여성과의 연대 등이 그것이다.
한국여신학자협의회는 초교파적으로 운영된다. 통신교육, 정기 강 연회 등을 통해 여성신학을 교회여성들에게 알리고 보급하고 있다.
한국여성신학회는 1985년 한국기독교학회에 가입해 학문적 대화 를 이루고자 하는 목적으로 한국여신학자협의회의 결의를 통해 구성 됐다. 여성신학회의 회원들이 중심이 돼 『한국 여성의 경험』(1994), 『성서와 여성신학』(1995), 『교회와 여성신학』(1997), 『영성과 여성신학』(1999), 『성과 여성신학』(2001), 『다문화와 여성신학』(2005), 『미디어와 여성신학』(2012) 등의 연구집을 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