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한국에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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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이전
홀트 아동복지회(Holt Children’s Service)는 1955년 6월 미국인 자선사업가 홀트(H. Holt)가 6.25전쟁으로 인한 전쟁고아와 혼혈고아 8 명을 입양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를 계기로 홀트는 이듬해 3월 내한해 구세군대한본영 안에 별도의 사무실을 두고 고아들에 대한 입양업무를 시작했다. 홀트 아동복지회의 설립목적은 첫째, 전쟁고아의 수용 보호 배치 및 해외입양, 둘째, 정신박약아 또는 지체 불구아동 수용 보호 및 특수 교육에 있었다. 홀트 아동복지회는 그 창설정신 자체가 기독교에 근거하고 있었고, 국내외 각 기독교 단체 및 교회기관과의 상호협력을 통해 사업을 전개해 왔다.
사실 한국에 기독교적 정신에 입각한 고아원이 처음 생긴 것은 1885년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가 입국한 직후부터 였다. 언더우드는 1886년 2월 12일 미국공사관 공사관 대리 푸크 중위 귀하(H.E. Lieut. C.C. Foulk Charge d'affaires U.S. Legation)에게 보낸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고아원의 설립 이유를 설명했다.
"서울에 있는 고아들과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다른 여러 큰 도시와 마찬가지로 서울에 는 이러한 부류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그 숫자를 어떻게든 줄여보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램입니다. 이것을 위해 저희는, 외국의 다른 큰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아원이나 일종의 노동자 숙소를 개원하고 운영해 나갈 것을 제안 드립니다. 그 곳에서 글을 읽는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한글과 한문을 쓰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었을 때는 자립할 수 있도록 직업교육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아이들은 한국인의 양식을 따라 음식을 먹고, 의복을 입게 될 것이며, 쾌적하고 편안한 방을 제공받게 될 것입니다. 한국인 교사가 고용돼 아이들에게 한국말로 가르칠 것이고 가능하면 영어도 가르치고 싶습니다."
언더우드가 고아원을 설립하고자 했던 궁극적 목적은, 이러한 노력을 통해 비행과 부도덕에 물들어버릴 수 있었던 사람들이 이웃 사회 와 국가에 유익함을 줄 수 있는 올바른 시민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1886년 6월, 10명의 고아들을 모아 ‘예수학당’이라는 고아원을 시작했다. 초기 학생 중에는 훗날 한국의 저명한 독립운동가와 정치가가 된 우사 김규식이 포함돼 있었으며, 나중에 경신학교로 발전하면서 도산 안창호도 이 학교에서 수학했다.
6.25 전쟁 후 전국에 전쟁고아를 위한 고아원이 급속하게 늘어나게 된다. 정부도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교회가 앞장 서서 이일을 도맡아 했다. 감리회 총리원은 고아원 보조를 위해 따로 미국 감리교회에 기금을 요청 했다. 1953년 고아원 사업을 위한 2만 불의 보조금이 따로 들어왔다. 중앙협의회 구제위원회에서는 우선 5천불(약 120만환)을 각 고아원에 원아비 례로 분배함과 동시에, 27개소 고아원에 원아 1명당 약 4백환 정도의 기준으로 1만환에서 156,000환의 현금을 보조했다.
고아원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전도부인이었던 어윤희이다. 어윤희는 신사참배와 중일전쟁으로 일제가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개성 유지 한철호와 오기환의 도움을 얻어 고려정에 ‘유린보육원’이라는 고아원을 설립했다. 이때 그녀의 나이 57세였다. 그녀는 부유한 집 딸로 자라나 열여섯에 시집을 갔지만, 3일 만에 남편은 동학군으로 집을 나갔고 얼마 지나 전사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남편이 죽은 지 2년 만에 친정아버지가 별세해 과부에 고아가 되고 말았다. 57세의 나이에, 신혼 3일만에 깨져 버린 가정의 꿈을 고아원에서 실현하게 된 것이다.
얼마 안 있어 조국은 광복을 맞았다. 하지만 곧이어 터진 6.25전쟁으로 남쪽으로 피난을 내려와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되자, 미 감리교회 여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마포구 서강에 다시 유린보육원을 설립했 다. 고아들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남달랐다.
"할머니는 밤에도 주무시지 못하셨지요. 제일 어린 아이 아홉명을 한방에서 데리고 계셨는데 몇 번이고 자다 일어나 아이들을 돌봐 주셨습니다."
어윤희는 훗날 나이팅게일상과 인권옹호 공로표창을 받았고, 죽는 날까지 아이들과 함께 지내다가 1961년 11월 18일,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뒀다.
전쟁 후 늘어난 고아원 운영은 재정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1954년 1월 6일부터 3일 동안, 대전 유성온천에서 감리교의 감독이하 이향신, 송정률, 김광우, 채핀 (Anna B. Chaffin, 채부인), 레어드(Esther J. Laird, 라애시덕) 등이 모여 사회사업자 수양회를 가졌다. 고아원 운영에 있어서 전문지식의 절실함을 깨달아 학술적으로 서로 배우고자 하는 자리였다. 또, 동지로서 서로 위로하고 과거의 경험을 서로 나누는 시간도 갖기 위해서 였다. 같은 해, 고아원 예산을 비롯한 중앙협의회의 방대한 예산이 통과됐다.
감리회가 고아원을 설립 운영한 목적은 무엇보다, 의지 없는 고아들을 먹이고 입혀서 그들의 생명을 살려주는데 있었다. 유리걸식하다 가 운명이 어디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고아들을 데려다 부모처럼 돌봐 주고, 그 인생을 잘 살려 장성하게 한다는 것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값지고 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앞서도 이야기한 바와 같이, 홀트 아동복지회도 같은 목적과 정신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고아원 운영을 넘어서 부모를 잃은 아동들이 새로운 부모를 찾아 살아 갈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홀트 아동복지회의 입양 사업은 한국 고아사업의 주축이 됐으며, 지금도 입양 뿐 아니라 아동상담, 미혼모상담, 위탁 양육보호사업, 특수 교육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기독교 방송은 한국최초의 민영방송인 CBS와 선교전문방송인 극동방송, 그리고 아세아방송이 있었다. 그 중 가장 먼저 출발한 CBS는 1954년 12월 15일 개국했다. CBS는 국제선교협의회(IMC)가 한국기독교연합회(NCCK)에 기독교 방송 설립을 의뢰함으로써 시작된 것이다.
한국기독교연합회는 그 산하에 음영위원회를 구성, 기독교 방송 국을 설립할 준비를 해 나갔다. 이를 위해 국제선교협의회는 디캠프 (Otto E. DeCamp, 감의도)를 방송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했다. 그는 곧바로 한국에 방송국을 설립할 수 있는 제반 준비를 시작했다. 이후 CBS가 한국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많은 기관에서 지원을 했다.
CBS는 한국 최초의 민영방송으로 한국방송 역사에 새 장을 열었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4·19 혁명이었다. CBS는 당시 공영방송이 적극적으로 보도하지 않았던 4·19 혁명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객관적인 보도를 해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후 CBS는 정권을 유지 하기 위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로막는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논설을 통해 국영 방송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국민적 인 찬사를 받기도 했다. 정치와 시사에 관한 성실한 보도는 민영방송이자 기독교 방송인 CBS가 감당해야 하는 또 다른 차원의 선교적 과제였다.
이러한 CBS의 언론 활동에 대한 정부의 탄압도 많았다. 시사 뉴스 자체를 보도할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하거나 광고 수수료를 받지 못하게 하는 방법 등을 주로 사용했다. CBS는 이처럼 언론이 정권의 간섭과 탄압을 받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기독교 언론으로서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언론 그 자체로서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도 다른 방송사들에게 심각한 도전을 주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현대적인 의미 에서 언론의 전반적인 역할을 CBS의 역사를 통해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성과를 찾아볼 수도 있다.
CBS는 기독교 방송으로서의 정체성도 잘 감당해 나갔다. CBS의 설 립 목적 자체가 기독교 선교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성경을 함께 나 누며 예배를 드리는 프로그램은 물론, 한국 기독교의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소개함으로써 한국 기독교의 내용을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었다.
CBS는 이와 동시에 당시로서는 새롭게 시도한 수준 높은 교양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사회 전반의 문화 발전을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특히 교양 프로그램 편성에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지금 CBS는 TV 방송과 두 개 채널의 라디오 방송을 내보내고 있으며, 시청자와 청취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CBS에 이어 두 번째의 민간 방송이자 선교전문 방송인 극동방송이 1956년 12월 23일 개국했다. 극동방송은 한국이 지니고 있는 지정학적 특성을 활용해 처음부터 대외 방송을 통한 북방선교에 목적을 두었고 이를 위해 총력을 기울여 왔다.
극동방송은 중국, 인도, 일본 등지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던 복음 주의동맹선교회(The Evangelical Alliance Mission)를 통해 설립됐다. 복음주의동맹선교회는 한국전쟁을 통해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한국에서의 방송 선교 가능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복음주의동맹선교회는 당시 일본에 주재하고 있었던 선교사들을 조사단으로 한국에 파견했다. 한국을 다녀간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북방선교가 가능할 뿐 아니라 매우 중요하다고 보고했고, 복음주의동맹선교회는 한국에서의 사역을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1953년 2월 선교사 가필드(William R. Garfield, 갈 필도)와 와트슨(Tom Watson)이 내한했다. 북한과 중국, 시베리아까지 이르는 강력한 전파를 송출하기 위해 바닷가인 인천을 선택해 안테나를 세웠다. 극동방송은 방송 허가 자체가 취소된 일, 돌풍으로 안테나가 도괴돼 방송자체가 불가능했던 일, 세칭 구원파와 관련된 문제로 한국 교계에서 존립자체가 곤란했던 일 등을 경험하며 많은 위기를 맞았지만, 북방선교 전문 방송이라는 특수한 사명을 가지고 강인한 생존력으로 방송선교에 힘써 왔다.
아세아방송은 1973년 6월 30일 개국했다. 선교방송으로는 세계 최대의 가청지역을 확보하고 있는 FEBC(Far East Broadcasting Company)가 창설의 주역이었다. FEBC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통해 전파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했던 브로거(John C. Broger)와 보우먼 (Robert Bowman)이 설립했다.
중국 상해에 방송국을 세우고자 했던 FEBC는 당시 중국이 국공내 전에 휩싸여 있던 상황에서 장소를 필리핀으로 옮겨 1948년 6월 첫 방송을 시작했다.
FEBC는 공산주의의 위협을 받는 아시아를 기독교 신앙으로 지키겠다는 의지가 투철했으며, 이를 위해 1952년 오키나와에 방송국을 설립하고 대중공 송신소인 KSBU를 세웠다. 그러나 이후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던 일본 당국의 요구로 방송시설의 한국이전을 검토 하게 된 것이다.
제주에 자리잡은 아세아방송은 국내는 물론 일본, 중국, 러시아를 대상으로 전파를 통한 복음 선교에 전력하고 있다. FEBC는 1977년부터 TEAM 선교회와 함께 공동운영하는 형식으로 극동방송을 인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세아방송과 극동방송의 성과는 최근 공산권이 개방되면서 수많은 증언들을 통해 알려지게 됐으며, 1995년 6월에 하바로프스크 극동 방송이 설립되기에 이른다. 1990년대 들어서는 유선방송이 보편화되면서 CTS(1995)와 CBS-TV(2002) 등 영상 방송국도 설립됐다.
해방 이후에 창간된 대표적인 기독교 잡지로는 1952년 대한기독교 서회에서 창간한 어린이 잡지 「새벗」, 여성들을 위해 1954년 창간된 「새가정」,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위해 1957년 창간된 「기독교사상」이 있다. 그 가운데「기독교사상」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애독하는 진보적이고 지성적인 개신교 잡지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평신도를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교양지로는 초교파적인 「신앙세계」와 1967년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창간한 「신앙계」를 들 수 있다. 1980년대에는 두란노서원에서 발행한 교양잡지 「빛과 소금」이 많은 인기를 누렸다.
1961년 창간된「기독교교육」은 대한기독교교육협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잡지로, 교회학교 교사를 비롯한 교회교육과 관련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1976년 창간된「월간 목회」는 목회자들을 위한 전문잡지로 인기를 얻었고,「목회와 신학」역시 교역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1982년부터 발행된「현대종교」는 기독교 관련 신흥종교와 이단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전문 잡지로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근거로 발행되고 있다.
김교신이 창간한「성서조선」의 동인 중 한 사람인 송두용이 1946 년 1월 창간한 「영단」은 「숨은살림」으로, 1955년 「성서인생」으로, 그리고 다시 「성서신앙」으로, 1973년 「성서신애」로 이어오며 「성서조선」의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성서조선」의 계보를 이어가는 기독교 잡지로 1946년 11월 노평구가 창간한 「성서연구」가 오래도록 간행됐다. 같은 맥락에서 이용도의 「예수」를 이어가는 예수교회 공의회의 기관지로「예수」가 1984년에 뒤늦게 속간됐으나 계속 이어지지는 못했다.
특히 1970-80년대 반독재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정부에 의해 강제로 폐간되거나 정간된 진보적인 잡지도 있었다. 1970년 김재준이 창간한 「제3일」은 박정희 독재에 항거하는 역할을 감당하다가 1974년 정부로부터 폐간 명령을 받았다. 1951년 안병무가 창간한 「야성」은 1969년「현존」으로 이어졌지만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폐간됐다. 「현존」은 고난 받는 민중의 현장에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는 생각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신학자를 위한 신학이 아닌 생활인의 신학, 사회변혁의 신학을 지향하며 군사독재와 싸웠다. 앞서 소개한「기독교사상」은 전두환 정부시절인 1982년 북한선교를 주제로 삼았다는 이유로 6개월 간 정간되기도 했다.
한국기독교연합회는 1964년 겨울 <에큐메니칼>지를 창간해 에큐 메니칼운동을 이끌었으며, 1967년에 <NCC회보>로 이름을 바꿨다가 1970년부터는 <교회와 세계>라는 이름으로 발행하고 있다. <한길>은 1956년 6월 한길사에서 창간한 평신도 신앙 지침서로 계속 간행되고 있다. <월간 성광>은 건전한 기독교적 인격함양과 정보교환을 목적으 로 부녀자들과 소년소녀 신앙지도, 성경공부, 가정예배, 설교, 간증 등을 실으면서 현재까지 간행되고 있다.
지금은 발간되지 않고 있지만 기독교 언론의 역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도 있다. <복된 말씀>은 1953년 6월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에 의해 창간돼 목회 현장에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1980년 문공부의 등록 취소로 폐간됐다. 1961년 3월 기독교 통신강좌를 실시했던 한국루터교회에서 수료생들의 요청으로 창간한 <새생명>은, 기독교 문화 교양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1979년 7·8월 합본호를 끝으로 폐간됐다. 이처럼 기독교 잡지는 각각의 시대의 상황에 맞게 등장하거나 사라지면서 지금까지도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다.
보수 기독교는 1980년대 중반까지 독재정권과 결탁하고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해 침묵해 왔다. 그러나 사회 곳곳에 정치, 경제, 사회적 모순들이 끊임없이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일단의 문제들에 대해 계속해서 침묵만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1980년대 중반 이후 보수적 기독교계 안에서도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적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참여하려는 집단적 움직임이 발생했다. 그동안 민족복음화와 교회의 성장을 목표로 설정하고 유지해 온 보수 기독교계에서 사회참여를 새로운 목표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신학적 정당성이 확보돼야 했다. 시대적 요청인 사회참여에 대한 부담을 느끼면서도 진보적 신학과 급진적 사회과학에 동의할 수 없었던 일부 보수적 기독교인들에게 대안이 되어 준 것은‘하나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로잔 언약’이었다.
1970년대 이후 외국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견해가 한국에 소개됐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주재권이 실현되는 영역이라고 정의했고,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세계와 미래를 포함하는 모든 시간 속에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통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에 동참하는 일이 곧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일하는 것이 될 수 있었다. 이는 복음전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불러 일으켰다.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경적인 가치관이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1986년 창간된 『대학기독신문』의 창간사는, “다양한 소외계층의 현장에 그리스도인들이 성육신하여 선교”하는 것이 “복음의 육화”,“하나님 나라의 균형 있는 실현”이라고 정의 했다. 또,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제1회 세계복음화 국제대회에서 채택된 ‘로잔 언약’역시 복음전파와 사회정치적 개입 모두가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규정하며 이렇게 단언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이 두 가지를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여겨, 하나를 받아들이면 다른 하나를 거부했던 점을 회개한다. 사람들과의 화해가 하나님과의 화해는 아니고, 사회적 활동이 복음전도는 아니고, 정치적 해방이 구원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는 복음전도와 사회적 정치적 참여가 모두 기독교인의 두 가지 의무라고 단언한다."
이런 분위기는 1975년 아시아선교협의회의 서울선언, 1983년 국제 복음주의연맹 결의문 등으로 이어졌다. 1986년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발표한 ‘현 시국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제언’은 한국의 보수적 기독교 지식인들이 당시 상황과 관련하여 발표한 최초의 집단적 의사표시였다. 이 성명서 역시 같은 맥락 속에서 “모든 영역 안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포괄적 개혁운동”을 일으킬 것임을 밝히고 있다.
1980년 세계복음화대회가 한국에서 성대하게 치러진 후, 보수적 성향의 기독학생들 중 일부는 세계복음화대회의 규모와 영향력보다 그것이 가능했던 조건들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게 됐다. 광주 민주화운동에서 보였듯이 모든 형태의 민주화운동을 전두환 정권이 탄압하고 있으며 작은 규모의 모임조차도 거의 허용되지 않는 폭압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이런 대규모의 집회가 가능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는 보수교회의 청년들에게 정체성 혼란을 가져왔다.
이런 과정 속에서 복음주의권의 학생들은 1981년부터 대학원생들을 중심으로 경제학, 과학, 문학 연구모임을 가져 오다가 1984년 8월 ‘기독교학문연구회’를 창립하고 기독교적 세계관 운동을 펼쳐나가게 된다. 그러나 1986년 서울대 오월제 기간에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예수 대행진 행사를 거행하던 중 기독교인을 비난하는 학생들에 의해 행사가 중단되고 쫓겨나는 일이 발생했다. 더욱이 같은 시간 서울대의 다른 장소에서 발생한 한 학생의 분신자살은 불의한 사회현실 속 에서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던 청년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들은 같은 해 ‘기독교학문연구회’를 기반으로 ‘기독교문화연구회’를 발족시키면서, 한국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제기되는 문제를 갖고 사회 변혁을 위한 복음주의적 실천 대안을 모색했다. 이들은 초기에는 세미나 위주로 새로운 복음주의 신학을 공부하다가, 학습 위주의 운동을 넘어서는 실천적 차원에서 야학 개설, 빈민촌의 기초 공동체와 탁아소 운영, 농활, 공활 등을 통해 현장에 접근했다.
한편 1980년대 중반 이후 사회참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선교 단체는 한국기독학생총회(IVF)였다. 1987년 9월 IVF 간사회는 ‘오늘을 사는 기독 대학생의 신앙 고백과 결의’를 선언함으로써 일부 선교 단체와 신학생들의 사회 참여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결국 IVF 총무 고직한과 기독교문화 연구회의 유옥, 『대학기독신문』의 이종철의 주도로 1987년 11월 20일 공정 선거 감시와 민주 정부 수립을 위한 ‘복음주의 청년 학생 협의회’가 발족돼 1987년 12월 활동을 전개했다. 여기에는 복음주의 학생들 2천여 명 이상이 참여했다. 선거 후에는 역할을 다한 공정선거감시단이 해산되고, 1988년 3월 1일 ‘복음주의 청년연합’이 창립됐다. 복음주의 청년연합은 과거 민족사의 격동기에 개인 내면의 신앙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해 하나님과 역사 앞 에 참회한다고 고백했다.
1989년 11월 4일 창립대회를 열고 활동을 시작한 ‘경제정의실천 시민운동연합’은,‘시민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자’는 기치로 사회 정치적 부정부패 해소, 건전한 시민의식의 고양, 빈부격차 해소, 건전한 생산 활동의 활성화 등을 목적으로 설립된 시민단체였다. 이 과정에서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이 단체의 중심이 됐고 복음주의 청년들도 출범에 관여했는데, 이는 구체적인 사회참여의 방법을 고심 중이던 보수적 기독교인들에게 경실련이 하나의 대안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기독학생들이 경실련과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사회참여에 뚜렷한 족적을 보인 복음주의 지식인 이만열이 박철수, 고왕인, 이문식 등을 서경석 목사에게 소개한 것이 그 계기가 됐다. 경실련의 창립과 보조를 맞춘 기독학생들은 이보다 한 달 빠른 10월 남서울교회에서 250여 명이 모여 경실련 기독청년학생 협의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1990년 2월 안기부는 기독교문화 연구회를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로 규정하며 ‘기문노련 사건’을 조작해 10명을 구속하고 17명을 수배 했다. 이유는 ‘노동자, 농민 등에게 의식화 교육을 시켜 체제를 전복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획책했다’는 것이었다. 기독교문화연구회 측은 항소 이유서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기문연은 1980년대 제5공화국의 고도성장의 그늘에서 점점 더 빈 부격차로 인한 상대적 빈곤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던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이 땅의 민중들의 절박한 삶과 이들의 생존권적 요구를 안 정이라는 이름 아래 철저히 압살을 자행했던 정치적·경제적 억압상황 하에서 탄생했다. … 진정한 보수적 복음영성과 민족사적 지평에 서 이웃사랑의 실천, 즉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땅에서는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참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형성이 우리의 꿈 이었고, 한국 교회의 한 부분으로서 교회를 쇄신하고 민족의 현실 가운데에서 민중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복음의 전면적인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확보되자 이만열이 “이제 나의 때는 지났다”고 생각하며 학문에 전념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을 이어받은 듯 12월에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그의 오랜 동지인 손봉호의 주도로 김인수, 이만열, 장기려, 원호택, 이장규, 강영안 등의 참여 속에서 발 족했다. 그 후 기윤실은 좋은교사운동, 기독법률가회, 공명선거운동, 국정감사모니터 시민연대, 공의정치 실천연대, 교회개혁 실천연대, 놀이미디어 교육센터, 크리스천 라이프센터, 대한민국 교육봉사단 등 다양한 운동을 만들어 내며 보수 기독교 사회참여의 한 모델이 되고 있다.
1934년 디트리히 본회퍼는 파노아에서 열린 에큐메니칼 총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평화를 위한 협의회가 필요함을 주장했다.
"어떻게 평화가 이루어질 것인가? 누가 우리를 평화의 길로 불러내 이 세상이 그 말을 경청하고, 경청하지 않을 수 없게 할 것인가? …… 오직 전 세계에 있는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교회가 하나로 연합해 대규모 에큐메니칼 협의회를 갖고 함께 외칠 수 있을 때에라야, 이 세상이 못마땅해 하면서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손들의 손에서 무기를 놓게 하고 전쟁을 금하게 하며 갈등으로 휩싸인 세계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평화를 선포하는 것에 대하여 기뻐하게 될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 1982년 세계개혁교회총연맹(WARC)이‘평화와 정의를 위한 계약’을 촉구하고, 1983년 세계교회협의회(WCC) 벤쿠버 총회에서 세계교회의 대표들이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을 향한 상호간의 책임을 지기 위한 계약과정’이 교회의 역사적 소명이기 때문에 WCC 프로그램의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결의하면서, 비로소 1934년 본회퍼의 주장이 실현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WCC는 1975년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5차 총회에서 세계교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의제로‘정의롭고(공평하며), 참여를 보장하며 지속 가능한 사회(JPSS: Just, Participatory and Sustainable Society)’를 다룸으로써, 교회의 사회 참여에 있어 일대 방향 전환을 예고했다. 이후 JPSS운동은 사회 정치적 구조악과 자연파괴에 대해 저항해 왔으며 이런 흐름이 뱅쿠버 총회로 이어져‘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JPIC: Justice, Peace, and Integrity of Creation)’으로 발전한 것이다. 유엔의 ‘세계환경개발위원회’가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개념을 보고서에 포함시킨 것이 1987년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정치 경제적 불평등과 구조적인 악, 환경 파괴의 문제, 핵무기의 위협, 식량과 자원의 고갈 등을 포함하는 총체적 모순 앞에서 교회가 인류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고민한 것이 얼마나 앞선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1992년 리오데자네이루에서 유엔 환경개발회의(지구 건강회복을 위한 세계 정상 회담)가 열리고 국제사회가 환경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해 나가기로 협약을 맺기까지의 과정에서, JPIC 세계대회가 갖는 위치 역시 앞으로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1988년 하노버에서 열린 WCC 실행위원회는 JPIC 세계대회를 1990 년 3월 5일부터 13일까지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서울이 개최지로 결정된 것이 지니는 의미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고 순교적 희생을 겪어 온 한국교회의 선교 역사를 생각할 때, 세계교회가 정의와 평화, 생태의 문제를 논의하고 실천하기 위한 광장이 한국에 마련되는 것은 역사적으로 정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 분단과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등장한 심각한 빈부격차, 환경오염 등이 첨예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공간이기 바로 한반도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반도에서는 JPIC가 논의하려는 모든 문제가 압축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의 시는 WCC 신학위원회의 선언문 2차 초안에 등장하는 것으로, 이 시를 쓴 작가는 서울의 빈곤 지역에 살고 있던 12살 소녀였다.
"울 엄마 이름은 걱정이래요 / 여름이면 물 걱정 / 겨울이면 연탄 걱 정 / 일년 내내 쌀 걱정 // 낮이면 살 걱정 / 밤이면 애들 걱정 / 밤낮 으로 걱정 걱정 // 울 엄마 이름은 걱정이구요 / 울 아빠 이름은 주정 이래요 / 내 이름은 눈물과 한숨이지요"
1990년 3월 5일 저녁 8시, 천명이 훌쩍 넘는 수의 세계교회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개회식을 가지면서 시작된 JPIC 서울대회는 선언문 제2차 초안을 통해 이 대회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홍수와 무지개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이는 곧 우리가 한편으로는 생명에 대한 위협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을 위한 계약을 맺기 위해 서울에 모인 이유인 것입니다."
대회의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 대회에 참가 한 사람들은 세계 상황에 대한 공동인식을 갖지 못했다. 어떤 학자는 서울 세계대회를 놓고 “난파”라는 표현을 쓰기까지 했다. ‘서울대회 가 충분한 합의능력을 보여 주지 못했다, 해방신학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하지만 이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말 그대로 전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극단적으로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현실의 문제를 같은 입장에서 바라보고, 해석 하고, 또 논의를 통해 하나의 합의점에 이른다는 것은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회는 하나의 계약을 체결했고, 이 계약에는 다음의 네 가지 구체적 책무들이 포함됐다.
- 정의로운 세계질서와 외채 부담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행동해 야 할 구체적 책무
- 모든 국가들과 사람들의 안전과 폭력 없는 문화를 위해 행동해야 할 구체적 책무
- 모든 생명을 주의 깊게 보호하며 고통을 나누고 지구의 대기권을 보존하기 위해 행동해야 할 구체적 책무
- 모든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국가적 차원과 국제적 차원에서 인종주의와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행동해야 할 구체적 책무
이 대회의 신학적 입장은 최종 채택된 신학문서의 10가지 확언 (Affirmation)을 통해 더욱 분명히 밝혀졌다.
1. 모든 권력 행사는 하나님께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2.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의 편에 서신다.
3. 모든 인종과 민족은 평등한 가치를 가진다.
4. 남성과 여성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되었다.
5. 진리가 자유로운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는 기초이다.
6.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 영구적인 평화의 유일한 토대는 정의이다.
7.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사랑하신다.
8. 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9. 젊은 세대의 존엄성과 헌신을 존중해야한다.
10. 인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 확언들은 JPIC 신학의 핵심을 이루는 것으로, 이 대 회가 인종차별, 여성 억압, 제 3세계의 부채, 생태적 지구 위기, 세계 군사화와 핵무장 등의 문제를 신학적인 것으로 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대회기간 내내 제3세계 교회 지도자들의 분노가 울려 퍼졌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종차별에 시달려온 흑인 목사, 땅을 잃은 호주 원주민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내놓았다. 이 대회의 중요한 안건으로 올라온 문제들은 거의 모두가 서구 강대국에 의해 야기된 것들이었으며, 서구 사회의 기독교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오늘날의 강대국들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는다면 오늘의 세계가 마주하고 있는 위기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회개는 모든 교회에게 요청되는 것이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평화의 사도로서 부름 받은 책임을 다하지 못했으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십자가를 지는 일을 회피해 온 죄를 고백해야 했다.
따라서 최종 채택된 메시지는 먼저 죄책고백으로 시작했다.“지금 은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그리고 우리 서로 맺은 언약을 확인할 때 입니다. 역사상 이 시기는 특별한 때입니다. 불의, 전쟁, 창조질서의 파괴에 의해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위협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약을 깨트렸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제공된 기회를 알고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합니다”나아가 메시지의 4번째 항목에서는, 세계교회가 “한국인의 통일을 위한 투쟁에 동참하여 1995 년 희년을 위한 그들의 간구와 기도를 지원할 것”을 다짐했다.
JPIC 서울대회의 정신과 운동은 각 분야에 파급돼 기독교 시민운동, 기독교 환경운동 등에 영향을 미쳤지만, 교회의 대형화가 가장 우선되는 가치로 여겨지는 한국교회의 내부로는 충분히 파고들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남기고 있다.
"기독교인 국회의원이 한 사람도 없는 세상을 생각해보라. 매일같이 일어나는 교계의 대소사, 교인들의 대소사의 처리와 해결을 청탁하기 위하여 얼마나 막막할 것인가는 정치에 냉담을 가장하는 자칭 성직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이승만 정권기에 등장한 「기독신보」의 논설이다. 지금의 눈으로 본다면 황당한 논설이지만,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에서는 이런 논설이 충분히 가능했다. 미군정에서 이승만의 제1공화국에 이르는 시기에 기독교는 국교에 준하는 지위를 누렸기 때문이다.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명시돼 있었을지는 몰라도, 정책적인 면에서 종교의 평등은 보장되지 않았다. 이 시기 기독교는 다양한 방식으로 특혜를 누렸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접수된 부동산들을 쉽게 교회 부지로 받을 수 있었고, 외국에서 들어오는 각종 원조 물자들을 우선 배정받았으며, 형목과 군목제도에 있어서도 독점적 지위를 누렸다. 그리고 국영방송을 통해 전도를 할 수 있었으며, 국가의 예식을 기독교화 했고, 기독교 교리에 위배되는 교과서의 내용도 시정할 수 있었다. 중요한 사회적 쟁점이 생길 때 마다 기독교 측의 요구는 거의 예외 없이 수용됐다. 뿐만 아니라,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일제에 의해 제정된 ‘사찰령’과 ‘경학원 규정’, ‘향교 재산관리 규정’등을 유지하며 불교와 유교를 탄압함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정부의 특혜는 더욱 뚜렷이 드러나 보였다. 정치권 인사들과의 결탁도 공공연해, 이기붕은 1956년경 감리회 총리원에 100만 환을 감리사들의 여행 경비로 기증했고, 총리원 건물의 건축에도 관여해 광화문에 요지를 얻을 수 있도록 주선했다. YMCA도 이승만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국회의원 세비의 5%를 YMCA 회관건축을 위한 기금으로 지원받을 수 있었다.
기독교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적 지형을 유지하고 각종 혜택을 지속적으로 누리기 위해서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가장 눈에 띠는 방식은 직접 정치 일선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서는 아예 조선예수교장로회, 기독교청년회, 기독교도연맹, 한국기독교연합회(NCCK) 등 교단 또는 단체의 대표로 출마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 중 8명이 당선됐다. 2대 선거에서도 기독교청년회, 대한기독교침례회의 대표 2명이 당선됐다. 미 군정기와 이승만 정권기에 공직자들의 종교별 비율은, 비정상적이라고 말할 만큼 개신교의 비중이 높았다. 1946년 당시 미군정 최고위직에 임명된 한국인 50명 중 35명이 기독교 신자였다. 0.52%에 불과했던 기독교 인구 비율을 생각하면 이는 확실히 놀라운 수준이다. 제헌국회 198명 중에는 목사가 13명 포함돼 있었고, 초대 내각의 21개 부서장 가운데에는 최소한 9명의 기독교신자(그 중 2명은 목사)가 포함돼 있었다. 자유당 정권기에 정부 요직을 살펴보면 기독교가 약 40%를 차지하고, 장관만 따지면 47.4%에 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직적인 선거개입도 있었다. 1948년 5·10 선거에서부터 기독교 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이승만을 열렬히 지지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1952년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서부터는 아예 NCCK의 주도아래 ‘기독교 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해 도, 군, 개교회 단위까지 하위조직을 갖추고 조직적인 이승만 지지운동을 벌였다. 1954년 총선에서도 역시 NCCK 주최로 선거대책위원회를 개최하고 선거구별로 대책위원회를 구성, 입후보자에 대한 공인제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1956년에 이르면‘교회가 정치단체가 돼서는 안된다’,‘교회가 어느 정당에 편승하거나 이용돼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표면적으로는 교회 단체와 기관들의 선거운동단체 조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개인자격으로‘정부통령 선거추진 기독교도 중앙위원회’가 구성돼 이승만과 이기붕에 대한 지지를 이어 나갔다. 이 위원회의 위원장 1인과 부위원장 2인은 모두 NCCK의 주요 직책에 있던 사람들로, 결과적으로 여전히 NCCK는 기독교의 연합기구로서 선거운동에 깊이 관여 하고 있었다. 감리회의 경우 이승만과 이기풍이 모두 감리회 신자라는 이유로 선거운동에 더욱 몰입하였다. 정동제일교회는 이승만을 장로로 선임하고 ‘삼선출마 호소문’을 보내기로 했고, 중부연회는 ‘이승만 박사 재출마요청 성명’을 발표하기로 하는 등 이승만을 향한 감리회의 순정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정치인, 고위관료와의 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NCCK는 헌법공포일인 1948년 7월 17일 국회의원 전원을 불러 정동제일교회에서 ‘국회의원 환영회’를 열었다. 1952년 8월 19일에는 ‘기독교인 정치협의회’를 결성해 기독교인의 의사를 정치에 반영시키기로 결정하는 등 NCCK는 정치인들과의 교류 면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행보를 보여 주었다. 1952년 6월 25일에는 자유당 소속 39명의 기독교 신자 의원이 모여 원내 교섭단체로 활동하는 것을 목표로 ‘국회의원 신우회’를 만든 일이 있었는데, 이런 사례를 반영한 것인지 기독공보는 1954년 사설을 통해 기독교 신자 국회의원들에게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해 교회발전을 도모할 것을, 1958년에는 기독교 신자 의원들의 당선을 보 도하면서 기독교의 발전이나 자유에 관련된 일에는 힘을 합치고 각각의 정당에서도 개신교의 입장을 위해 일해 줄 것을 요구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1960년의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사회의 목소리가 높을 때에도 기독교계에는 사회의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기류가 흘렀다. 정동제일교회는 이승만 장로와 이기붕 권사에게 당선 축하 전보를 발송하고 3월 마지막 주일예배를‘정부통령 당선 및 이 대통령 생신 축하예배’로 드리기로 했다. 이승만 정부에서 공보처장 을 지냈던 김활란은 4·19 직후 서울시내 대학 총장들의 모임에서 “4·19 사건은 우리가 교육을 잘못시켜 발생한 일이니, 우리 모두 이승만 대통령께 사과하러 가자”고 말할 정도였다. 기독교계와 이승만 정권 사이의 밀월관계 때문에 4·19 이후 한국 사회의 분위기는 반기독교적으로 흘렀고, 감리회 총회원과 NCCK는 사과 성명을 낼 수밖에 없었다. 4·19 이후 기독교계에서는 자괴감이 서린 탄식이 나왔다. 다음은 1961년 「크리스챤」에 실린 사설이다.
"불행하게도 해방 후 한국교회는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으며 민중 의 사표가 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민중의 적으로 지탄받아 왔었다. … 교단의 사분오열로 일어난 피투성이의 강단싸움, 법정 소송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구제보따리를 둘러싼 추문, 딸라의 농락과 굴종으로 일어나는 비열한 교권싸움, 타락한 성직자의 부정부패정권에 참여, 자숙을 모르는 친일파와 모리배의 교권 장악 등등"
겉으로 보기에는 기독교 전체가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활발하게 참여했고, 많은 특혜를 누린 것처럼 보이며 또 사실이지 만,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기독교 내부의 갈등도 감지할 수 있다. 안창호가 창립한 흥사단과 이승만의 동지회는 일제 강점 기부터 우파 민족주의 운동과 기독교 교회 내부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을 벌이던 사이였다. 흥사단은 서북지역 출신, 장로회 신자들의 강세가 두드러지는 편이었고, 반면 동지회는 경기, 충청 지방에 세력기반을 둔 감리회 신자들이 다수를 이루는 단체였다. 미군정 시기에는, 흥사단계 인사들과 동지 회계 인사들은 흥사단계가 주도권을 잡은 채로 협조관계를 이루는 듯 했지만,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면서 양 세력은 경쟁관계로 복귀하고 말았다. 미군정 시기와 4.19 민주화운동에서부터 5.16 군사 쿠데타 사이의 시기에 북한 출신 기독교인들이 정부에 활발하게 참여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승만 정권기에는 이들의 참여 비율이 매우 저조하게 나타난다. 이는 이승만의 각료 임명 성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승만은 각료 임명에 인맥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동지회계와 미국에서 알게 된 사람들을 중용했다. 이기붕, 윤치영, 임영신, 임병직, 허정, 장기영, 김현철, 이원순 등은 미국에서 이승만과 관계를 맺은 사람들로 이들 중 이북 출신은 전혀 없었다. 결국 흥사단계는 반이승만 세력으로 집결하게 됐고, 민주당이 창당될 때에는 한민당과 민국당을 계승하는 구파에 맞서는 신파의 핵심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가혹한 고통을 안겨 주었다. 참전군인 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삶의 터전을 잃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전쟁 난민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1951년 8월 정부가 집계한 피난민은 약 380만 명, 전쟁 중 가옥과 재산을 잃은 전재민은 모두 402만 명이었다. 1951년 당시 남한의 전체 인구가 2,100만 명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남한 인구의 절반이 구호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나 민간 부문은 그런 상황에 적절히 대응할 여력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정부 및 외국 민간단체의 대규모 원조가 시작됐다.
외국의 민간 원조 단체들은 대부분 서양의 교회 및 기독교 구호단체들이었다. 미국의 교회 지도자들은 한국교회의 긴박한 요청에 가장 먼저 반응했다. 1950년 10월 한국 구호를 협의하기 위해 세계교회협의회(WCC), 국제선교협의회(IMC), 기독교세계봉사회(CWS) 등 대표적인 국제 기독교 기구 대표들이 뉴욕에 모였다. 이 모임에서 참석자 들은 한국 구호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기독교 구호위원회를 설립하기로 결의했다.
1951년 2월 미국의 기독교세계봉사회 한국 구호 책임자로 아펜젤러(Henry D. Appenzeller, 아편설라)가 내한, 부산에서 기독교의 구호활동을 감독하기 시작했다. 1953년에 내한한 세계교회협의회의 난민구호 책임자 리즈(Elfan Rees)는 한국교회 대표들과 선교사, 그리고 외원단체 책임자들과 광범위하게 접촉한 후 한국 방문 보고서를 작성 했다. 한국인 중 절반이 구호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본 그는 구호활동 을 확대하는 것이 세계교회들의 ‘도덕적 의무’라고 호소했다.
이 시기에 내한한 구호단체들은 전재민 응급구호, 고아원 운영과 해외 입양, 전쟁 미망인 원조, 주택복구, 보건의료, 교육, 지역사회 개발 등의 사업을 전개했다. 외국의 교회와 구호 단체들은 어느 단체보 다도 더 활발히 한국교회에 많은 구호금품이나 구호 활동가를 보냈다. 40여 개에 달한 이 단체들은 민간 구호단체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미국 가톨릭구제위원회와 미국 기독교교회협의회 산하 기독교세계봉 사회가 그 중심이었다. 기독교세계봉사회는 미국 기독교교회협의회 에 속한 35개 교파의 구호활동을 주관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서방국가의 교회와 단체가 보내는 구호품도 전달해 주었으며, 세계교회협의 회, 루터교 세계구제회 등의 활동을 대행했다.
외원단체들은 1952년 외국 민간단체연합회(KAVA)를 결성했다. 다수의 외원단체들은 선교단체들이거나 종교적 배경을 지니고 있었으며, 활동 목적을 원조와 선교에 두고 있었다. 1958년 11월까지 10개국에서 온 59개의 외원단체들이 외국 민간단체연합회에 가입했는데, 그 가운데 28개는 사회사업을 하면서도 선교활동을 더 우선시했다. 나머지 31개 단체는 주로 교육, 건강, 사회복지, 구호 및 사회개발에 관심을 가졌다. 한국에 구호단체를 보낸 기독교 교파는 장로회, 침례회, 나사렛교회, 메노나이트, 퀘이커, 동양선교회, 감리회, 안식교, 유니테리언교회, 루터교, 가톨릭 등 다양했다. 기독교 외원단체들은 고아, 아동, 미망인, 피난민을 위한 응급 구호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나, 결핵 퇴치와 상이용사 재활 같은 활동도 펼쳤다. 이 시기의 구호활동은 규모나 내용면에서 한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값지고 요긴했으며, 규모도 컸다.
외국교회의 대대적인 지원으로 한국교회는 역사상 최고의 사회사업 시대를 맞았다. 이 시기에 외국 기독교 외원단체들을 통해 전개된 구호 및 복구 활동은 한국교회 초기에 선교사와 한국 기독교인들이 행한 교육과 의료 활동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1950년대 교회는 점차 봉사의 폭을 넓히면서 사회보호 기능을 담당했다.
지방인 대전에서도 기독교의 구호사업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전쟁 동안 ‘부산이 피난과 절망의 도시였다면 대전은 참화의 도시’였다. 전쟁이 나던 해 여름 미군기들은 대전역을 중심으로 1평방마일의 도심을 폭격했다. 많은 이들이 구덩이에 묻혔고, 시가지는 깨진 기와더미 투성이였다. 어디를 가나 피난민이 넘쳐났고, 과부와 고아 그리고 전상자들이 즐비했다. 대전에서의 기독교 구호사업은 먼저 대전 북쪽에 위치해 있던‘기독교연합봉사회’(the Union Christian Service)의 조직화된 종합적인 봉사활동으로 시작됐다. 기독교연합봉사회는 우선‘기독교 농민학원’을 개원했다. 전쟁 전의‘복음농민학교’를 복원한 것이었다. 임야 26정보와 전답 16정보 등 모두 42정보의 넓은 면적 위에 세워진 이 농민학원은 원생들에게 농업, 낙농업, 과수재배 방법을 정교하게 지도하면서 한국 농촌을 위한 지도자 양성에 나섰다. 원생들은 오전에는 예배와 학습, 오후에는 실습에 임했고, 생산된 작물은 3km 떨어진 대전의 시장에서 판매했다. 1956년 1기생을 배출한 농민학원의 한국 농촌 지도자 양성 프로그램은 1973 년까지 약 20년 동안 계속됐다. 또 1958년에는 여자농민학원도 문을 열었다. 교사진은 한국인 배민수 목사(원장)와 미북감리회 선교사 쇼윈거트(Dean L. Schowengerdt, 서인근), 그리고 미북장로회의 아담스(George J. Adams, 안두조), 루츠(Dexter N. Lutz, 유소), 킹스버리 (Paul A. Kingsbury, 김승배) 등으로 구성됐으며, 이들은 모두 농업전문가들이었다. 그 중 루츠는 월간잡지 《농민생활》을 발행, 한국 농 민들에 보급했다. 또 미북감리회 선교사 매튜(Gene E. Mattews, 마태 진)도 그 후 연합봉사회의 활동에 동참했다.
기독교연합봉사회의 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북장로 회 선교사 토리(Reuben A. Torrey Jr.)는 1953년 부인 맬러리(Janet Mallery)와 함께 내한해 대전에서 상이군인들에게 의수족(義手足)을 공급하고 직업 훈련(한국인 수족절단자 직업교도원)을 실시했다. 1954년 12월에는 감리교 선교사 레어드(Esther J. Laird, 라애시덕)에 의해 ‘결핵환자 요양원’도 시작됐다.‘감리교 해외구제위원회’가 자금을 지원한 이 사업은 경미한 결핵환자들을 6개월간 격리 요양시키는데 주안점을 두었고, 요양원의 월간 수용 인원은 40명이었다. 그 외에도 구세군이 5,000불의 자금으로 운영을 전담했던 고아원 ‘후생학원’과 쇼윈거트의 부인(Marjorie Schowengerdt)에 의해 시작된‘충남 영아원’도 봉사회의 중요한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 대전지역 감리회의 사회사업은 선교사들과 개교회 들에 의해 진행됐다. 감리교 선교사들 중 레어드와 올리버(Bessie O. Oliver, 오리부)는 ‘대전기독교사회관’을 통한 탁아복지사업과 소아진료를 담당했으며, 시미스터(Edith W. Simister, 심유덕)은 대전 ‘계명 협회’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스톡스(Arlen Stokes)는 모자관 사업에 종사했다. 대전지역의 감리교회들은 ‘대전육아원’(대전제일교회), ‘대성원’(이영진) 등의 고아원과 ‘자애원’(남부교회) 같은 월남민구호소를 운영했다.
그리고 대전 지역 장로교는 주로 대전노회(장로교의 지역교회협의 체) 사회사업부를 통해 세계기독교봉사회에서 들어오는 구호물자를 고아원과 양로원, 모자원 등에 지원했다. 구세군은 고아원인‘혜생 원’과 여성 직업보도를 위한 ‘보도원’을 운영했고,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대전 판암동에서 ‘버지니아 고아원’을 맡아 경영했다. 그 외 에 성결교 계통의‘루씨모자원’과 장로교 계통의 ‘대전 벧엘원’(김안 제), ‘성화원’(양화석), ‘성낙원’(이주철) 그리고 ‘피얼쓰영아원’(김효순)이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대전지역 기독교가 보여준 구호 및 사회사업은 고통 과 위기에 처한 시민들에게 심리적 안정감과 생존을 유지시켜 줄 수 있었다. 특히 대규모의 빈곤 가운데 사회복지의 개입 필요성이 증폭 되었음에도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제도가 전무한 가운데 이루어진 대전지역 기독교의 대규모 조직적인 봉사활동은, 사회적 영향력의 측 면에서 다른 종교는 물론 지역사회의 여타영역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차별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한국교회 안에서 신학을 한국화하려는 노력은 1960년대에 접어들 면서 생겨났다. 기독교 복음을 한국적 상황 속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토착화 신학이 등장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3세계 에서는 문화적 민족주의가 등장하는 가운데 자국의 민족 문화가 지닌 특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한국 신학계도 이러한 시대적 흐름의 영향을 받아 토착화 신학을 산출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한국 신학계에서 토착화 신학은 감리회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전개 되었다. 토착화 신학의 물꼬를 튼 유동식과 윤성범은 모두 감리교신 학대학 소속이었으며, 토착화 신학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신학자들도 대부분 감리회 출신이었다. 유동식은 1950년대 후반부터 신학의 한국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로고스 개념을 채택해 유대인들의 메시아(그리스도)를 이해했듯이 동양인은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 도(道)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고 토착화 신학의 방향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전경연은 기독교의 복음이 토착화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문화가 토착화된다고 하면서, 기독교가 동양에 전해지더라도 서구교회의 전통과 신앙고백을 이식하는 형식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두 신학자 사이에 논쟁이 지속되자 여러 신학자들이 나서 자신들의 입장을 개진했다. 교회사가인 이장식은 전경연의 입장을 비판했고, 철학자인 이규호도 유동식의 입장을 지지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윤성범과 박봉랑 사이에도 토착화 논쟁이 일어났다. 유동식과 전경연의 논쟁이 토착화의 필요성 내지 방법론을 둘러싼 다소 추상적인 논쟁인데 비하여, 윤성범과 박봉랑의 논쟁은 단군신화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윤성범은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환인, 환웅, 환검(단군)이 하나님이며 이러한 삼신사상은 동방교회 삼위일체론의 영향이라고 과감하게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박봉랑은 단군신화 속의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삼위일체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 민족 문화나 전통, 그리고 신화는 기독교의 계시와 단절돼 있으며, 성서만이‘기독교 계시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신학 잡지가 아니라 유명한 교양 잡지「사상계」를 통해 전개됐기 때문에 문화계와 학계의 큰 관심을 끌었다.
그 후 윤성범과 유동식은 각기 독자적인 방식으로 토착화 신학을 실험해 나갔다. 윤성범은『기독교와 한국 사상』(1964)에서 “감” “솜씨”“멋”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창안하여 한국적 신학 방법론의 틀을 제시했고, 1970년대에 들어서는“성(誠)의 신학”이라는 구체적인 토착화 신학을 내놓았다. 그는 성이라는 글자의 형성 원리와 뜻에 주목하면서, 이 용어는 말(言)과 이룸(成)의 종합으로서 토착화된 계시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유교의 경전에 등장하고 율곡이 그의 사상의 핵심 개념을 삼은 성은‘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요한복음의 성육신과 통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시도에 대해 장로교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이종성은 혼합주의라고 비판했으며, 김의환은 한국적 토착화를 모색하기 전에 먼저 ‘성서적 토착화’에 충실할 것을 권면했다.
유동식은 『한국종교와 기독교』(1965)에서 유, 불, 선 3교가 한국인의 심성에 끼친 영향을 말하면서 기독교의 토착화 방향을 제시했다. 1970년대의 유동식은 무교(巫敎) 연구에 집중하면서 무교야말로 한국 문화의 기층이며 유, 불, 선 3교만이 아니라 기독교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1980년대에 들어서 풍류(風流)가 한국사상의 원조이며 토착화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이른바 풍류신학을 제창했다. 윤성범과 유동식에 의해 시작된 토착화 신학의 작업은 역시 감리교신학대학 출신인 변선환에 의해 계승됐다. 변선환은 불교와의 대화를 통해 토착화 신학을 전개했다. 그러나 변선환은 종교간 대화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타 종교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함으로써 보수적인 교단 지도부에 의해 교수직과 목사직을 동시에 박탈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960년대의 한국 신학계가 토착화 논쟁을 낳았다면, 1970년대의 한국 신학계는 민중신학을 산출했다. 1970년대 이래 한국 기독교가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민중신학을 태동시킨 것이다. 한국교회에는 이미 1920년대에 기독교 사회주의자들과 사회복음 추종자들 사이에서, 사회구조로 인해 생기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신학적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1960년대 이후의 한국 상황을 더 정교한 이론 형태로 신학화 했다는 점에 특징이 있었다.
민중신학 태동의 사회적 배경을 제공한 것은 1970년대 한국의 정치 경제적 현실이었다. 당시 한국사회는 유신체제라고하는 군사독재와 급속한 산업화 정책이 낳은 경제적 모순으로 민중의 생존권과 인권이 위협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민중의 현실에 눈을 뜨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경험을 신학적으로 성찰해 내놓은 것이 민중신학이었다. 안병무와 서남동을 비롯하여 현영학, 김용복, 서광선 등 진보적 신학자들이 그 주축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참여해 해직되거나 투옥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당시 민중신학자들은 인접 분야의 활동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한국신학연구소,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한국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 등에 수시로 모여 민중을 주제로 함께 연구하고 논의했다.
서남동은 ‘부자와 가난한 자, 누르는 자와 눌린 자에 사이의 화해 는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하면서 민중을 신학의 중심 주제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그 후 서남동은 다양한 사회과학적 성서해석 방법을 수용 해 ‘성령론적 통시적 해석’이라는 독자적인 방법론을 제시했다. 요컨대 성서는 절대적인 표준이 아니라 하나의 전거(典據, reference)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남동은 민중신학의 과제를 기독교의 민중전통과 한국 민중전통의 합류에서 찾았다.
민중신학을 신학적으로 심화시킨 사람은 성서신학자인 안병무였다. 1975년 3월 1일 민주 인사들의 출옥을 기념하는 모임에서 안병무는 “민족 민중 교회”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는데, 여기서 그는 민족보다 더 근원적인 존재로서의 민중을 강조했다. 지배계급이 민족의 이름으로 민중을 끊임없이 수탈해 왔고, 이에 대항하여 민중운동이 끊임없이 지속돼 왔다는 것이다. 그 예가 바로 홍경래의 난, 동학혁명, 3·1운동, 4·19혁명이었다. 안병무의 이러한 주장은 세계 신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서남동과 안병무가 민중신학의 선구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동안 현영학은 민중의 몸의 언어인 탈춤에서 해학성과 같은 ‘종교적 비판적 초월성’을 찾았다. 김용복은 민중의 고난과 자기 해방의 이야기를 민중의 사회전기(社會傳記) 개념을 통해 해석하고자 했으며, 서광선은 무속신앙에서 민중신앙의 형태를 드러내는 작업을 했다.
민중신학이라는 용어는 1970년대 말 학술용어로 정착됐다. 1979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주최한 국제신학심포지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신학자들이 민중신학이라는 용어를 쓰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모은 단행본이 바로 『민중과 한국신학』(1982)이다. 이 책은 영어로도 출판돼 세계 신학계에 민중신학을 알리는데 기여했다.
1990년대 들어 민중신학의 열기는 급격히 퇴조했다. 민주화로 인한 군사정권의 퇴각과 시민운동의 부상으로 인해 민중신학의 의의가 급격히 상실되기 시작한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도 한국민중신학회와 민중신학연구소 등이 중심이 되어 민중신학의 맥을 잊고 있지만, 이전과 같은 사회적, 학문적 관심은 끌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민중신학은 한국 기독교인이 한국적 상황 속에서 주어진 고뇌를 창조적으로 신학화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박정희는 1963년 12월 대통령에 취임한 후, 일본의 자본을 통한 경제개발을 추진하기 위해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국교 정상화를 서둘러 타결하려 했다. 일본을 용서하기에는 때가 이른 데다가 협정의 내용도 굴욕적이라고 판단한 교회는, 한일국교 정상화 및 한일협정 비준 반대운동에 가담했다. 이것은 오랫동안 정치와 타협해 온 교회가 보인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박정희가 1965년 6월 반대를 무릅쓰고 한일협정에 조인하자, 강신명, 강원룡, 김재준, 한경직 등 215명 의 교회 지도자들은 7월 서울 영락교회에 모여 구국기도회를 열고, 이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은 정치·경제·문화·도덕 등 모든 분야에서 불순저열한 외세에의 예속을 배격하며, 온갖 형태의 독재와 모든 불의와 부정부패에 항거한다고 선언했다. 이를 계기 로 전국 각지의 교회에서 교파를 초월한 구국기도회가 열려 굴욕적인 한일협정 비준에 반대했다.
그리고 다시 박정희 정권이 1969년 삼선개헌을 시도하자 김재준, 함석헌, 박형규 등 에큐메니칼 진영의 교회 지도자들은 ‘삼선개헌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에 참여해 개헌반대운동에 앞장섰다. 김재준 목사가 범국민 투쟁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도 9월에 발표한 성명을 통해 개헌반대의 입장을 밝혔다. 반면 김윤찬, 김준곤, 김장환 등 보수 기독교계 인사들은 김재준의 개헌 반대 활동을 성직의 권위를 도용하는 일이라고 비판하면서, 대통령을 위해 기도할 것을 요청했다. 급조된 대한기독교연합회라는 단체도 성명을 통해 박정희의 ‘용단’을 환영하며 삼선개헌을 지지했다.
1972년 12월 유신헌법이 공포되고 박정희의 절대 권력과 장기집권을 보장하는 유신체제가 시작되자, 대부분의 교회는 적극적 혹은 묵시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기독교인도 있었다. 1973년의 남산 부활절연합예배 사건이나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남산 부활절예배 사건은, 1973년 4월 서울 남산의 야외음악당에서 부활절 예배를 드릴 때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전단지가 배포된 사건이다. 6월말 박형규와 한국기독학생총연맹 회원, 빈민선교 활동가들이 이 사건과 관련해 국가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구속 됐다. 이를 계기로 기도회와 가두시위가 등장했고, 서울대 학생 250여 명이 4·19기념탑 앞에서 자유민주체제의 확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인권 탄압 사례가 급증하자 NCCK는 1973년 11월 ‘인권선언’을 채 택했다. 인권 탄압의 해결에 기독교인들이 나설 것을 촉구한 이 선언은, 인권 확립을 위해 교회가 투쟁할 것을 다짐했다. 당시 마땅한 지원세력이 없던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이 선언은 큰 격려가 됐으며, 기독교가 비기독교인의 민주화운동과 만나 연대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 1974년 1월 긴급조치 1호와 2호가 선포되자 NCCK는 시국 기도 회를 갖고 긴급조치 철회와 유신체제 폐지 등을 요구했다. 이어서 민청학련 사건으로 정부의 인권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NCCK는 그 해 5 월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성서적 신앙’에 의거해 인권위원회를 창설 했다. 목요기도회가 시작됐고, 몇몇 교단의 총회에서도 시국선언문이 발표됐다. 1974년 9월 한국기독교장로회 제59회 총회가 선언서를 발표한 것을 비롯해서, 예장(통합) 제59회 총회가 시국선언문을 발표했으며, 기독교대한감리회 제12회 총회도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1974년 11월에는 한국교회의 진보적 신학자 66명이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성명’을 발표, 한국교회의 인권 민주화 운동을 신학적으로 정리하고 뒷받침해 주었다.
삼엄한 유신체제도 자유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교회의 입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천주교와 개신교 지도자들이 정치 지도자들과 함께 1976년 3월 1일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3·1절 기념미사에서 발표된 이 선언은 긴급조치 철폐, 유신헌법 철폐, 박정희 정권 퇴진 등을 요구했다. 유신정권은 이 사건을 정부 전복 선 동 사건으로 규정하고, 천주교의 함세웅, 문정현, 김승훈, 개신교의 함 석헌, 문익환, 안병무, 이우정 등 주동자 20명을 긴급조치 제 9호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이 사건은 주동자에 천주교와 개신교의 저명인사를 비롯해 서 김대중, 윤보선, 정일형 등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정치인 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내외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세계 에큐메니칼운동은 당시 한국의 진보적 교회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했다. 그 중 가장 큰 관심을 보인 기구는 세계교회협의회(WCC)였다. 그리고 WCC의 회원교회인 독일, 미국, 일본의 교회도 한국의 인권 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75년 4월에는 NCCK 총무 김관석과 조승혁, 박형규 등이 업무상 배임 혐의로 구속됐다. 이들의 구속 소식은 세계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WCC 세계 선교위원회는 1975년 11월 제네바에서 한국 문제에 관한 긴급 모임을 소집,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을 지원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여기서 세계교회를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과 연결시켜 주는 ‘한국 민주화 기독자동지회’가 결성됐다. 이 모임은 그 후 1980년대까지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강력한 지원자 역할을 했다.
1980년 광주 민주항쟁을 폭력으로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세력은 사회 모든 부문을 통제하면서 민주화세력을 강하게 탄압했다. 이 때도 교회는 계속해서 사회참여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했다. NCCK 인권위원회, 한국기독청년협의회, 한국기독학생총연맹, 도시산업선 교회와 같이 1970년대 이래 꾸준히 민주화 및 인권운동을 벌여 온 단 체들 외에도,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기독교농민회, 기독노 동자연맹, 기독여민회 등의 부문별 단체들이 속속 결성돼 기독교 사 회운동의 외연을 넓혀 갔다. 현장 중심의 새로운 단체들의 등장은 기 독교 사회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이 단체들이 평화통일운동, 민주시민운동, 교육운동, 학생운동, 청년운 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등 다양한 기독교 사회운동을 주도 해 나갔다.
1970년대 민주화와 인권운동 과정에서 등장한 민중신학과 산업선교에 뿌리를 둔 민중교회가 나타난 것은 1984년 무렵이었다. 민중교회는 기독교 사회변혁운동의 한 축을 이루었다. 1989년 현재 한국민중교회운동연합에 소속된 민중교회의 수는 90개에 이르렀다. 해방 후 한동안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던 YMCA도 1970년대 이후 운동성을 회복하고 시민사회운동의 영역을 개척했다.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목협)는 교역자들에게 기독교 사회운동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목협은 1984년 7월 소수의 진보적 교역자들이, 교회와 사회 현상의 아픔을 분석, 진단, 처방하고 행동 통일을 모색한다는 취지아래 창립했다. 목협은 그 후 NCCK와 함께 기독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역할을 수행했다.
김명혁, 손봉호 등 보수적인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1981년 조직한 ‘한국복음주의협의회’도 1986년 5월‘현 시국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제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그동안 정교분리 원칙과 사회의 안정을 위해 가능하면 시국 문제에 침묵을 지켜 왔던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정치적 태도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 변화는 1987년 6월 항쟁을 겪으면서 좀 더 명백히 드러났다. 1987년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공정선거 감시와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복음주의청년학생협의회’가, 그리고 1988년 3월 ‘복음주의청년연합 회’등이 만들어진 것이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창립된 것도 이 시기였다.
196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가 시작됐다. 그러나 급격한 사회변화는 많은 사회적 모순을 낳고 있었다. 이에 따라 기독교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선교에 눈을 뜨고 있었다. 도시산업선교는 이런 맥락에서 출발했다.
한국에서 산업전도 활동이 시작된 것은, 1957년 3월 미국 연합장로교 해외선교부 아시아 산업전도 담당 헨리 존스 목사가 한국을 방문 한 것을 계기로, 예장(통합) 총회 전도부에‘산업전도위원회’가 설립되면서부터였다. 예장 총회는 1958년에 서울 영등포지역에서 산업전도 활동을 시작했다. 1957년 11월에 가톨릭도 ‘노동사회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가톨릭 노동자들의 전교활동’으로서 ‘가톨릭 노동청년회’를 조직했다. 이어 1961년에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인천에서, 대한성공회가 강원도 황지에서 산업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한국기독교장로회(1963), 구세군대한본영(1965), 기독교대한복음교회(1973)가 산업전도에 가담했다. 산업전도 초기에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통적 전도활동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예를 들어 평신도 신앙훈련, 산업인을 위한 예배, 성서연구, 문서전도, 여가선용 등의 활동 정도에 머물렀던 것이다. 일반적인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다분히 전통적인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 중반에 접어들어 산업전도 단체를 가진 각 교단 별로 전문적인 실무자들이 배출되면서, 산업전도의 내용과 형태가 변 하기 시작했다. 산업전도 실무자들은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1년 간 노동 현장에 취업해 공장 노동자들 사이에서 노동을 체험했다. 노 동 체험을 통해 산업전도 실무자들에게는 교회와 산업사회 사이에 괴리감이 있다는 인식과, 선교는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문제를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삶의 현장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 즉 임금문제, 작업환경, 노동조합, 산업평화, 부당해고 등에 대한 문제를 토의하고, 이를 성서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하게 됐다. 활동 내용도 전통적 전도 방법과 달리, 노동조합 지도자 훈련, 노동조합 조직 지원과 같은 형태로 자리를 잡아 갔다. 특히 노조 지도자 훈련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고, 평조합원을 대상으로 한‘노동학교’가 시작된 것은 중요한 진전 중의 하나였다. 명칭도 1968년부터 ‘산업전도’(Industrial Evangelism)에서 ‘도시산업선교’(Urban-Industrial Mission: UIM)로 바뀌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정치권력은 저임금을 바탕 으로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을 강력히 추진했고, 기업은 이러한 정책으로부터 큰 혜택을 받았다.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 비인간적인 대우, 그리고 살인적인 저임금에 고통을 받아야 했다. 노동자는 그야 말로 ‘기계처럼’일만 해야 했다. 결국 노동자들의 비인간적인 참상을 온몸으로 고발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사건(1970. 11. 13)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한국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노동 문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하 지만 정치권력은 노 동 현실을 개선하기는 커녕, 경제개발이라는 명분으로 정권안보 차원에서 노동자들의 비명을 원천적으로 차단 했다. 심지어 노동자 들의 입장에서 이를 대변하고 있던 산업선교 단체를 비방하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입장을 대변해야 할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 국노총)과 산업별 노동조합도 어용단체화 돼 있었기 때문에, 단위노조를 지원하는 산업선교 단체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한편 기성교회들은 고도의 교회성장을 구가하면서 정권 친화적인 경향을 노골화하고 있었다. 그래서 ‘산업전도’에서 ‘산업선교’로 바 뀐 이후로 기성교회는 이들의 활동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산업선교가 순수한 복음 전도는 등한히 하고 사회문제에 치중하 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인식이었다. 이에 대해 산업선교 실무자들은 WCC가 표방하는‘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바탕으로 ‘도시산업선교 신학’을 공고히 했다. 즉 기존의 ‘순수한 복음 전도’라는 것은 개인의 영적 구원에 극한된 것으로, 이는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양산하는 사회구조적 악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라고 보고, 개인의 삶 전체를 규정하는 사회구조적 악을 바로 잡을 때 비로소 ‘개인과 사회’, 그리고 ‘인간과 공동체’모두를 구원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보수적인 기성교회와 산업선교 사이의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갔다.
그렇기 때문에 7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독교 산업선교 단체들은 단위사업장의 노동조합 지부나 분회가 실질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 돼 버렸다. 정부나 사회, 나아가 기성교회로부터 관심을 받지 못했던 소외된 산업 노동자들, 특히 여성 노동자들을 교회가 산업선교를 통해 돌본 것은, 한국 기독교의 선교 역사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될 만한 일이었다.
산업선교가 노동자를 대변하는 활동을 하면 할수록, 정부의 산업 선교에 대한 비방과 탄압은 강도를 더해갔다. 정부는 산업선교 단체를, ‘계급투쟁을 조장하는 공산주의자들이 노동계에 침투한 것’이라 고 몰아세워 교회와 사회로부터 고립되도록 했다. 1978년 인천 도시 산업선교회에 가입한 동일방직 노조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산업선 교 단체는‘산업선교 신학선언’을 발표하고, 산업선교는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을 사회구조적 악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이를 복음서에서 말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교훈에 따라 바로잡으려는 선교활동이라고 천명했다. 각 산업선교 단체 및 기독교 여성단체들도 동일방직 사 건 긴급대책위원회를 조직해 이 문제에 적극 대처했다. 1979년 YH무역 사건이 발생하자, 정부는 사건의 책임을 산업선교 단체에 전가하 고 산업선교 관련자를 구속했다. 이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노동자들의 인권과 권익을 옹호하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순종해 야 할 하나님의 엄한 명령’이라면서 산업선교가 교회교역의 연장이라고 밝혔다. 1980년 예장통합 총회는 ‘산업사회를 위해서는 산업선교 가 불가피하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산업선교 활동은 1980년대에도 계속됐다. 그러나 노동자가 스스로 민주적인 노조를 건설하게 되면서, 산업선교 단체들의 기존의 활동들은 위축됐다. 하지만 이후로도 산업선교는 사회적 관심에서 소외된 외국인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