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한국에 살다
(사진 - 서울 종로 향정동에 개원한 중앙유치원, 1916년)
유아교육으로서 유치원 교육에 대한 중요성은 개화기에 형성된 학회의 기관지나 학보를 통해 소개되면서부터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1906년「태극학보」에서 ‘가정교육’, ‘녀ᄌᆞ교육’, 1908년 「호남학회월보」에서‘가정학설’이라는 제목으로 유아교육문제를 다루면서 조기교육의 필요성과 가정교육, 그리고 유아교육 방법까지 제시하였다.
근대식 유치원의 실질적인 설립은 개항과 더불어 들어온 서구문화 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조선시대 교육을 관장했던 예조가 학무아문(學務衙門)→학부(1885)→학부관제개정(1907)의 변화를 거치면서 학부 관제에 ‘보통교육 및 유치원에 관한 사항(제4조 제2항)’이라는 유치원 교육과 관련된 부서와 법규가 신설되었다.
가장 먼저 세워진 유치원은 1897년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자녀를 위해 개항지인 부산에 설립한 부산유치원이다. 이 유치원이 조선에 설립된 근대 서구식 유치원의 효시로 기술되고 있다. 이후에도 일본인들은 개항지 원산에 1907년에 원산유치원을 설립하였다.
한편, 1913년 한국인 유아들만을 위한 것으로 경성에 ‘경성유치원’이 설립되었다. 경성유치원은 일제 식민지 동화교육 정책에 따른 교육목적과 내용을 위해 친일파 한국인들에 의해 세웠다. 처음에 유치원 입학 자격은 창설자의 자녀에 한하여 주어졌다. 1913년 3월 8일 자 「매일신보」를 보자.
"경성유치원을 설립키 위하여 민병석(閔丙奭), 조중응(趙重應), 京城 府尹, 유혁로(柳爀魯), 한상용(韓相龍), 조진태(趙鎭泰), 백완혁(白完 爀), 안순환(安淳煥), 백인기(白寅基), 예종석(芮宗錫) 등은 설립자 대 표회를 개최하고 설립방침과 유지방법을 론의하였으며 규칙을 원안 대로 통과시키고 교사가 신축될 때까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내의 1 실을 차용 4월 1일부터 개학키로 결정한다."
유치원 설립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것은 기독교계였다. 1914년 이화유치원이, 1916년에 중앙유치원이 설립되었다. 이화유치원은 선교사 브라운리(C.G. Brownlee)가 부인병원이었던 보구여관 자리에 16명의 유아를 모아놓고 교육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이화학당장이었던 프레이(E. Frey)가 1912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갔을 때 유아교육에 관심이 있던 브라운리를 만나 한국에 와서 유치원 교사로 일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15년부터는 유치원 교사 양성을 위해 이화유치원 사범과를 부설 운영하였다. 이화유치원에서는 1933년 에는 『유희창가집』과 『어린이학원』을 발행하였다.
1933년 「삼천리」 4월호 방인근(方仁根)의 일기에 이화유치원 졸업식 이야기가 나오기에 실어본다.
"3월 14일 (火曜日) 曇
오늘 둘째 아이 희성이가 이화유치원을 졸업한다고 하여 나는 유치 원으로 갔다. 어린이들은 나와서 그 동안 배운 노래를 하고 춤을 추었다. 교장은 졸업생에게 고별사를 하였다. 눈물겹게 서로 떠날 것을 말 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웃으며 들었다. 자꾸 웃으며 선생을 쳐다보았다. 그들에게는 이별이니 슬픔이 없고 오직 기쁘고 웃음이 있을 뿐 이다. 나는 그것을 보고 울면서 웃었다."
이후, 이화학당은 1935년 신촌의 신교사로 옮겨갔지만 이화보육학교는 그대로 정동에 남아 신입원아를 모집했다. 이화유치원 다음으로 한국인의 유아교육을 목적으로 설립된 사립유치원이 중앙유치원이다. 중앙유치원은 1916년 9월 20일 정동교회 부속유치원으로 원아 25명을 데리고 개원하였다. 교육목적은 다음과 같다.
"장래의 조선을 위하여 잘 싸울 용사를 양성하는 기관을 세워 국민 의 앞길을 열어 줌을 목적으로 하며, 취미 있는 방법, 쉬운 교육과정, 부드러운 사람으로 원아들을 가르치며, 규칙적인 유치원 생활로 원아 들을 건실한 사회인으로 양성하는 것이다."
(사진 - 서울 정동계몽유치원 졸업식, 1913년)
중앙유치원 원장은 정동유치원 원장인 프라이가 겸하였고, 원장 대리인은 브라운리로 대부분 선교사들이었다. 그러나 실제 설립의 주체는 박희도, 장락도, 유양호 등 3인이다. 중앙유치원은 1919년 3.1운동으로 박희도와 김창준 목사가 체포 투옥됨에 따라 운영난을 겪었으나 1920년 5월에 다시 열어 활기찬 수업을 재개하였다. 1921년 10월에는 한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유치원을 만들기 위하여 사립중앙유치원 후원회 총회가 윤치호, 장두현, 민대식, 김성수, 홍증식 등 150여명의 발기로 명월관에서 개최되었다.
이후에도 기독교계 유치원의 설립은 계속되어 1926년까지 전국적으로 101개에 달하는 유치원이 세워졌다. 유치원 설립 증가로 교사 수급을 위한 유치원 사범과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1915년 이화학당에 유치원 사범과가 설치되었다. 1922년에는 박희도에 의해 중앙유치원 내에 유치원 사범과가 설립되었고, 1928년 9월 인가를 얻어 중앙보육학교로 독립하였다. 이화유치원 사범과를 시작으로 1930년까지 설치된 유치원사범과를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사진 - 천안읍교회 유치원, 1930년대)
(사진 - 평양 산정현교회 주일학교 모습, 1915년)
(사진 - 선교초기 농촌교회 주일학교의 모습, KMF, 1920년 5월호)
교회사에 있어 주일학교가 등장한 것은 18세기 영국 산업혁명 시대의 일이다. 산업혁명 때 어린이들은 새로 개발된 공장에서 장시간 노동을 해야 했고, 교육이나 도덕적인 훈련을 받을 기회도 없었으며, 질병에 걸리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사회적 구조 속에서 현대의 주일학교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존 웨슬리(John Wesley)의 복음 사역과 로버트 레이크스(Robert Raikes)의 주일학교 운동은 영국 사회에 강력한 빛을 비추는 역할을 했으며, 세계의 다른 나라들까지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서 주일학교(현재 교회학교, 또는 주일교회학교라고도 한다)가 처음 시작된 것은 1888년 1월 미북감리회 스크랜턴 대부인(Mary F. Scranton)이 이화학당에서 여학생 12명, 부인 3명, 여선교사 4명이 모인 때부터이다. 1888년 3월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아 편설라)는 베델예배당(현 정동제일교회)에서 배재학당 학생 14명과 영어 주일학교를 시작했다. 주일학교 운동에 남달리 큰 공헌을 한 이는 미북감리회 매티 노블(Mattie W. Noble)이다. 매티 노블은 남편 노블 (William. A. Noble, 노보을)을 따라 평양, 영변, 해주, 경성, 평양, 진남포, 수원, 인천 지방을 돌면서 주일학교 전문 교육가로서 주일학교를 세우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892년 10월 매티 노블은 정동교회에서 청년 주일학교를 조직했고, 1893년 9월 아현교회로 옮겨 부인반 주일학교를 조직하고 유년주일학교를 설립했다. 한국 최초의 유년주일학교가 설립된 것이다. 스크랜턴 대부인과 아펜젤러가 시작한 주일학교는 배재와 이화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1897년에는 평양에 다섯 개의 주일학교가 있었고, 1898년부터 인쇄된 공과 교재가 사용됐다. 1905년 재한개신교선교부공의회(Federal Council of Missions)가 조직된 후에는 공과를 장·감 연합으로 편집, 발행했다.
매티 노블은 또,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교육을 실시한 후 1903년 유년주일학교를 설립했다. 5세부터 15세까지 학생 수가 200여 명, 교사가 20여 명이나 됐다. 1911년 4월에는 영아부를 신설했으며, 그 해에 115명의 영아가 등록했다. 남산현교회 주일학교는『만국통일공과』를 한국에서 처음으로 사용했고, 역시 처음으로 어린이들을 나이와 학력에 따라 분반해 가르쳤다.
한국 장로회의 주일학교는 1907년 5월 5일 서울 연동교회에서 소아 회로 시작됐다. 연동교회 소아회는 장년 교인 수가 7백여 명이던 1914년에 주일학교 학생 수가 9백여 명에 달하기도 했다.
1893년 9월 감리회 선교부는 한국 교회가 필요로 하는 교리서와 주일학교 서적을 출판하기 위해 주일학교연합회를 조직한다. 이는 초교파적 연합체가 아니라 한국 감리회 산하 각 교회 안에 있는 주일학교들의 연합체로, 정보교환, 교재출판, 상호협조 등을 목적으로 조직된 것이다.
1905년 재한개신교선교부공의회는 블레어(William N. Blair, 방 위량), 매티 노블 등 8인의 선교사로 주일학교위원회를 조직하는데, 1911년부터는 한국인이 위원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감리회의 현순, 윤치호, 한석원, 홍병선, 장로회의 남궁혁이 그들이었다. 1911년 4월에 있었던 세계주일학교연합회 동양 담당자 브라운(Frank L. Brown) 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보다 큰 규모의 주일학교위원회를 구성하게 됐다. 이 주일학교위원회가 오늘의 대한기독교교육협회의 모체이다. 주일학교위원회는『만국주일공과』와『성경강론월보』등 주일학교 성서 교재를 발간했다. 윤치호는 1907년 5월 로마에서 열린 제5회 세계주일학교대회에 처음으로 참석, 강연을 하기도 했으며, 실행위원으로 선출됐다. 윤치호, 이승만, 신흥우 등이 세계주일학교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한국 교회 주일하교 운동을 소개했다.
(사진 - 서울 창경궁에서 개최한 전국주일학교 대회. 언더우드 선교사가 연설하고 있다. 1913년)
1921년 11월 2-9일 종로 YMCA 회관과 태화여자관에서 열린 제1회 전국주일학교대회에는 1,300여 명이 모여 성황을 이뤘다. 이 대회의 결과로 1922년 11월 1일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탄생했다. 조선주일학 교연합회 총무 한석원 목사는 하기학교 보급에 기여했다. 1922년에는 정동교회 교사 5명, 학생 100명이 참가하는 여름성경학교를 처음으로 시작했다. 한국교회의 어린이 여름성경학교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전국주일학교대회는 매 4년마다 열렸는데, 제2회는 1925년 서울 에서, 제3회는 1929년 평양에서, 제4회는 1933년 대구에서 열려 주일학교 지도자 양성과 교회 교육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 노력했다.
전국주일학교대회를 열 때마다 가극 ‘열세집’을 공연하고 단심가 (丹心歌)를 부르며, 13도 민족의 단합과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정기를 전파했다. 또한 1925년 1월부터「쥬일학교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했고, 1926년 3월 1일부터는 기독교 어린이 잡지「아희생활」(한국 최초의 어린이 잡지는 1920년 12월에 감리교 한석원 목사가 발간한「새동무」이다)을 발행했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1944년 4월 1일(통권 218호) 폐간을 당하고 말았다. 어린이 잡지 발간 등을 통하여 우리나라 어린 이 운동의 선봉에 서기도 했던 것이다.
제3회 전국주일학교 대회가 1929년 평양에서 열렸을 때, 주일학교 배가운동을 결의하고 이후 4년간 주일학교 진흥운동을 전개했는데, 이것이 기독교교육 진흥운동의 시작이다. 1930년 1월부터 월간「종교 교육」(현「기독교교육」)을 발간하고, 1933년에는 8월 29일을 주일학교진흥주일(현 기독교교육진흥주일)로 제정했다.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장로회 중심으로 운영되는 것에 불만을 품은 감리회는 1928년 감리회 종교교육협회를 만들다. 그리고 이것이 발전돼 1930년 감리교 총리원에 교육국을 설치, 독자적인 교회 교육을 해 나갔다. 1934년 장로회도 교육부를 신설하고 자체적인 공과를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주일학교연합회의 기능이 약화됐다. 조선 주일학교연합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1938년 6월 21일의 임시총회를 마지막으로 해방이 되기까지 중단된다. 그리고 해방 후인 1947년 1월 14일, 일제 말의 후유증을 안고 상당히 복잡했던 교계 상황 속에서 재건총회(제1회 총회)를 열어 새롭게 출발했다. 초창기 장로회와 감리회의 연합회였던 조선주일학교연합회에 이때부터 성결교회가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된다.
(사진 - 선교 초기 주일학교의 모습)
1948년에는 이름을 조선주일학교연합회에서 대한기독교교육협회로 개칭했다. 이것은 명칭뿐만 아니라, 기존의 어린이 중심의 주일학교 운동에서 벗어나 청·장년 교육 등으로 범위가 확대됐음을 뜻한다. 더 나아가 교회 중심의 주일학교뿐만 아니라 가정과 학교, 사회 교육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기독교 교육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1956년 커리큘럼 제정위원회에서 2년 만에 완성한 계단공과를 가입교단(장로회, 감리회, 성결교) 전체가 공동교재로 사용하기로 결의 했다. 1959년에는 한국기독교장로회가 대한교육협회에 가입, 4개 교단 연합체가 형성됐다. 1959년 제1회 전국기독교교육대회를 가진 이후 2-4년마다 한 번씩 정기적으로 대회를 열어 오고 있으며,. 1960년부터는 매년 어린이 여름성경학교 지도자강습회를 개최해 주일학교 부흥에 기여하고 있다.
한국의 주일학교 운동은 유년주일학교뿐만 아니라 중고등부, 대학 청년부, 장년부까지 확산돼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성서와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한국 교회의 성장과 부흥에 있어서 일익을 감당했 다. 하지만 현재 한국 교회의 주일학교는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한국 교회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청되는 상황인 것이다. 한국교회는 주일학교로 인해 시작되고 발전도 주일학교로 말미암았다.
(사진 - 성결교회 경성지역 주일학교 연합운동회, 1925년)
(사진 - 강원 고성지역 주일학교 연합행상, 1930년 5월, 기독신보)
(사진 - 한국교회의 주일학교 운동은 아동, 청소년 뿐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소중한 배움과 친교의 기회를 제공했다.)
크리스마스실은 결핵 환자를 위한 모금운동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결핵 크리스마스 실’이라고 불렀다. 한국에서 크리스마스실을 처음 고안하여 발행한 사람은 미북감리회 의료선교사 셔우드 홀 (Sherwood Hall, 하락)이었다. 그는 부친 윌리엄 홀(William J. Hall, 하락/홀)과 모친 로제타 홀(Rosetta S. Hall, 허을)의 뒤를 이어 한국 의료선교사가 됐다. 그는 특히 결핵을 전공하여 한국의 결핵환자를 위해 헌신했고, 1928년 10월27일에는 해주에 한국 최초의 현대식 전문 결핵요양원을 설립, 운영하기도 했다.
그가 크리스마스실을 고안한 것은 1931년으로, 이때 그는 안식년으로 미국에 머물고 있었다. 미국 결핵협회의 비셀(Emily P.Bissell)을 만나 그 방법을 배웠다. 1932년 한국에 오자마자 당시 일제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실 발행 작업에 들어갔다. 마침내 1933년 한복 입은 자매와 소나무로 도안한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실이 발행됐다. 첫 해 크리스마스 실 판매로 얻은 수익은 350원이었고, 전액 결핵환자를 수용하고 있던 각 의료기관에 지급됐다. 평양연합기독병원에 50원, 여주 성안나병원에 50원, 함흥 제혜병원에 50원,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75원, 해주 구세요양원에 75원을 각각 지급했고, 연구 및 홍보활동비로 50원을 사용했다.
크리스마스 실 발행으로 얻은 수익이 전액 결핵환자에게 쓰이면서 우리나라 결핵환자 수는 점차 줄어들게 됐다.
셔우드 홀은 1893년 11월1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평양 개척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884년 11월24일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별세하자, 한 살배기 아기였던 셔우드는 모친 로제타 홀과 본국으로 돌아갔다. 로제타 홀은 배속에 딸아이를 잉태한 상태였다. 이때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가 될 박에스더와 그녀의 남편 박유산이 동행했다. 박에스더 부부를 의학 공부를 하도록 미국에 남겨둔 채, 로제타 홀은 만 네 살이 된 셔우드와 새로 태어난 세 살짜리 에디스 마가렛과 함께 1897년 다시 내한해 서울에 잠시 머문 후, 남편 윌리엄 홀이 사역하던 평양으로 갔다. 에디스는 평 양에 도착하자마자 1898년 5월 23 일 이질에 걸려 가족의 품을 떠났 다. 셔우드 홀은 1900년 평양에 외국인학교가 생겼을 때 첫 입학생으 로 1908년까지 공부하고 1911년 본국 매사츄세츠 주의 마운트 허몬 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에 졸업했다. 다시 오하이오주에 있는 마운 트 유니온대학에 진학해 1919년 졸 업하고, 캐나다 토론토 의과대학을 1923년에 졸업했다. 졸업 후 1926년 4월 19일 부모의 뒤를 이어 내한 선교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셔우드 홀이 결핵에 관심을 가지게 된 데는 특별한 배경이 있다. 1884년 부친 사후 본국으로 귀국할 때 동행했던 박에스더와 그녀의 남편 박유산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스더가 미국에서 우리나라 여성으로는 최초로 서양의학을 공부하는 동안 그녀의 남편은 6년 동안 노동을 하며 아내의 공부를 뒷바라지했지만, 졸업과 귀국을 두 달 남짓 앞둔 1900년 4월 28일 급성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에스더는 남편을 볼티모어에 묻고 홀로 귀국길에 올랐다. 한국 최초의 여자 의사로 조선으로 돌아온 에스더는 로제타 홀의 의료사업을 도왔다. 의료 활동을 시작한 지 10개월 동안 3천 여 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았다. 또한 서울의 보구여관을 맡아 ‘한국여성이 한국여성을’ 진료하는 시대를 열었다. 셔우드 홀 가족은 그녀를 무척 좋아했다. 에스더는 10년 남짓 몸도 사리지 않고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살았지만 결국 몸져 눕고 말았다. 병명은 그녀의 남편과 같은 폐결핵이었다. 그녀는 1910년 4월13일 34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죽음을 지켜본 17세 셔우드 홀의 심정은 다음과 같았다.
"나에게 있어 에스더의 죽음은 충격이었다. 가장 황금기의 인생을 맞고 있었던 에스더, 그녀를 이 세상에서 빼앗아갔고 그녀가 사랑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병, 나는 이 병을 퇴치하는데 앞장서기로 결심했다. 나는 반드시 폐결핵 전문의사가 되어 조선에 돌아올 것과 결핵 요양원을 세우기로 굳게 맹세했다. 이 맹세를 실천하기 위해 4년 전 닥터 하아디가 내 마음에 깊이 새겨 준 말을 수없이 되새겼다. 높은 이상과 고상한 동기도 영적인 힘이 없다면 실천하기에 미흡하다." 『닥터 홀의 ‘조선회상'』에서
1984년 11월, 91세인 셔우드 홀과 88세인 그의 아내 메리안 홀이 대한결핵협회의 초청을 받아 그토록 그리워하던 한국 땅을 방문했다. 사실 대한결핵협회에서는 그 때까지 셔우드 홀의 사진을 현관에 걸어 놓고 있긴 했지만, 그들이 생존해 있는지 별세했는지, 영국인인지 캐나다인인지 미국인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닥터 홀의 조선 회상』이 발간되면서 알게 됐고, 이것이 홀 부부를 공식 초청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기뻤다. 자신이 태어나고 헌신했던 모 국을 찾는 심정이었다. 초로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제 2의 모국인 한국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입고 갈만한 양복 한 벌이 없었다. 수십 년 동안 양복 한 벌을 해 입지 못했던 것이다. 주위의 몇몇 사람들이 돈을 모아 양복 한 벌을 맞추어 주었다. 메리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옷을 빌리기로 했다. 곳곳에서 옷이 도착했다. 잊지 못할 88세 아름다운 노인의 패션쇼가 벌어졌다.
1991년 4월 5일, 셔우드 홀은 9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몸은 한줌의 재가 돼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 에디스가 묻힌 양화진 묘지에 안장 됐다. 그로부터 5개월 후인 9월 19일 그의 아내 메리안 홀도 남편의 뒤를 이었다. 역시 가족과 합장됐다.
고려대의과대학의 연원은 1928년 9월 4일에 문을 연 경성여자의 학강습소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성여자의학 강습소는 동대문 볼드윈 진료소에서 진료활동을 벌이다 평양으로 갔던 로제타 홀(Rosetta S. Hall, 허을)에 의해 세워졌다. 1917년 평양에서 돌아온 홀은 1923년부터 1926년까지 동대문 부인병원 병원장을 지냈다.
로제타 홀이 한국 선교활동을 하면서 지녔던 꿈은‘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의료 활동’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의 젊은 여성들에게 의사가 되도록 설득하고 다녔다. 박에스더를 한국 최초 여의사로 키운 이도 로제타 홀이다. 열악한 조선의 의료와 위생을 개선하는 것이 바로 조선여성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라고 하면서 여자 의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결과, 1913년 9월부터 의학교는 아니지만 평양 광혜여원 부속으로 여성 의학반을 개설했고, 1918년에는 조선총독부 의원부속 의학강 습소(후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여학생 청강을 허락받아 과정을 수료 한 3명의 조선 여성이 총독부의 의료면허증을 받았다. 그러나 이마저도 1925년 2월부터는 허락되지 않아 국내에서의 여의사 양성이 막다른 벽에 부딪히게 됐다. 조선여자의과대학의 설립에 대한 로제타 홀의 열망은 그녀의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 하락)의 『조선회상』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여자의과대학의 설립은 어머니의 사업 중 가장 기념할만한 것으로 손꼽을 수 있다. 이것은 조선의 여성들이 자기 나라에서 기독교 정신으로 의사가 될 수 있는 훈련을 받아 의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동족의 여성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일이었다. 조선인들은 이미 이와 같은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으므로 선교사들과 동포들의 협조로 어떻게든 꿈을 실현하고자 계획하고 있다. 어머니는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기쁨으로 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 중이었다."
그녀의 여자의학전문학교를 향한 꿈은 1928년 9월 4일에 이루어졌다. 로제타 홀을 중심으로 몇 명의 여의사, 치과(여)의사, (여)약제사 등 십 수 명이 중심이 돼 두 번의 회합 끝에 1928년 5월 14일 서울시내 명월관에서 조선 유지 윤치호, 신홍우 등 60명이 모여 여자의학전문 학교 창립을 발기하고, 5월 18일 창립총회를 열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4일부터 입학생을 받아 의학 수업을 시작하였다.
첫 해 입학생은 15명이었으나 1931년 봄 졸업식에는 6명이 남아 졸 업했고 총독부에서 실시한 의사시험에 전원 합격했다. 이곳에서는 1938년까지 28명의 여의사가 배출됐다. 1932년 로제타 홀이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한국을 떠나게 되자 여의사 길영희에게 운영권을 위임 했고, 길영희는 1938년 전남 순천 김종익씨의 기부로 재단을 만든 후, 정부로부터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인가를 받아 의학교육을 본 궤도에 올려놓았다.
그러다가 1942년 개인에게 양도된 후 남녀공학으로 개편되면서 수도의과대학(1957년~1967년), 우석대학교 의과대학(1968년~1970년)을 거쳐, 1971년 고려대 재단으로 인수돼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이 됐다.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는 여자의학교의 효시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동대문 부인병원은 이화여자대학 부속병원으로 발전했다.
2009년 3월 13일 “한국교회의 회복, ‘순교적 영성’에서 찾아야”라는 주제로 종교교회에서 미래목회포럼이 열렸다. 이날 감신대 이덕주 교수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영성’에 대해 발제하면서“진정한 순교적 영성이란 박해자에 대한 증오를 넘어선 사랑의 영성”임을 강조 했다. 이 교수는 “순교자들의 생애를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외부로부터 오는 박해와 탄압 이전에 이미 평소에 ‘순교자적인’ 삶을 살았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평소 삶에서 눈물과 땀으로 표현되는 ‘백색 순교’를 실천하던 신앙인들이 마지막 순간 피를 흘리는 ‘적색 순교’ 즉, 피흘림의 순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예를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 주기철 목사에게서 확 인할 수 있었다.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1938년부터 수 차례 검속을 통해 고문과 악형을 당하다 1944년 4월 옥중순교했다. 그가 이처럼 검속과 석방을 반복한 것은 일제가 그에게 타협과 훼절의 기회를 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변절하지 않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주기철 목사가 회유와 협박, 고문과 악형을 받으면서도 신앙의 지조를 끝까지 지키도록 만든 순교적 신앙의 동기가 박해자에 대한 증오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주기철 목사는 자신의 설교에서 “절대의 순종은 오직 사랑에서 비롯된다”라고 말하곤 했다. 주님을 위해 큰 곤욕을 당한 자들은 마지못해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 에 감격하여 기쁨으로 순교할 수 있었으며, 주기철 목사는 그런 기쁜 마음과 ‘단 마음’으로 자진해서 당한 고난을 높이 평가했고 그런 고난 은 사랑의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개신교가 전래되기 전, 이미 한국 역사 속에서 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첫 번째 영세교인인 이승훈이 1801년 신유박해 때 여러 천주교우들과 순교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 역사속에서 죽음을 무릎 쓰고 신앙을 지키려했던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개신교에서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인물은 로버트 토마스 목사이다.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 때에 대동강변에서 죽음을 당했다. 최초의 한국어 성서를 번역할 때 중국에 와 있던 선교사를 도왔던 백홍준은, 매서인으로 성서를 보급하고 선교사들을 안내하는 일을 하다가 1892 년 체포돼 옥중에서 고난을 겪다가 1893년에 옥에서 순교함으로써 실질적인 한국교회의 순교자가 됐다. 1910년 105인 사건이 일어나 수많은 기독교 애국지사들이 체포돼 고문과 형고를 치르다가 사망하기도 했고, 전덕기 목사는 그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또한 1919년 3.1 운동으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체포됐고 그 중에 일부는 사망했는데 특히 수원의 제암리, 수촌 화수리 교회의 교인들이 많이 희생됐다.
이후 한국교회의 순교 역사는 주로 세 시기로 구분된다. 첫번째는 1930년대에 일어났다. 만주 일대의 일본군과 한인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그 곳에 파송된 한국인 사역자들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만 주 선교는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시작되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를 약탈당한 한인들이 땅을 찾아 만주로 가서 광활한 황 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하면서 한인교회를 개척하게 됐다. 한국교회는 만주의 한인 선교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고, 여러 명의 사역자와 선 교사를 파송했다.
먼저, 1931년 만주에서 한인 선교를 하던 헨더슨(Lloyd P. Henderson, 현대선)이 일본군에게 참혹하게 죽음을 당했다. 1935년에는 장로회에서 파송한 한경희 목사가 공산당에게 살해당했다. 같은 시기 동아기독교의 손상열 목사가 일본군에게 죽음을 당했고, 역시 동아기독교의 김영진, 김영국 목사는 간도 지역에서 공산당에게 살해 당했다. 이밖에도 만주에서는 김상준, 안성찬, 이창희, 유영학, 이형태 등이 공산당이나 일본군에게 죽음을 당했다. 시베리아 지역에서도 감리회의 김영학 목사, 김태덕 전도사 그리고 동아기독교의 박노기, 김희서, 전영태, 최응선 등이 죽음을 당했다.
두 번째 시기에는 일제시대 말기로,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죽음으로 신앙의 절개를 지킨 이들이 있었다. 일제는 식민지 말기로 갈수록 ‘내선일체’를 내세워 조선을 일본에 동화시키고 조선을 군수기지로 삼아 아시아와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획책했다. 또한 정신적인 동화를 내세워 국민의례라고 하여 신사삼배를 강요하였다.
이에 선교사들은 신사참배를 단순한 국민의례가 아닌 종교행위로 우상숭배라고 규정했고, 1937년 미북장로회와 미남장로회의 학교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1938년부터는 신사참배를 거부 하거나 반대한 이들을 검거하여 투옥하고 고문하기 시작했다. 장로회의 최봉석, 주기철 등이 옥중에서 순교했고, 김선두, 이기선, 채정민, 고흥봉, 한상동, 주남선, 손양원, 양동근 목사등 수 백명이 투옥돼 고초를 당했다. 감리회에서도 이영한 목사가 해주 감옥에서 순교했고, 강종근 목사, 권언호 목사가 서대문 감옥에서 순교했으며, 최인규 전도사는 대전 감옥에서 순교했다.
성결교회는 특유의 재림 신앙을 강조해 피해가 더욱 극심했다. 1943년에 전체 교역자가 수감됐고 박봉진 목사, 김연 목사등이 순교 했다. 동아기독교의 전치규 목사, 안식교의 최태현 목사, 청주의 허성도 목사, 경남의 최상림 목사, 목포의 박연세 목사, 김창옥 장로 등도 죽음을 당했다.
세 번째 시기의 순교는 한국 전쟁 기간에 벌어졌다. 1945년에 맞이한 광복의 기쁨도 잠시, 남북이 분단돼어 이념 대립이 양극으로 치닫는 와중에 북한에서는 공산정권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자유주의를 수호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와 순교가 잇따랐다. 1947년 이정심 목사가 순교했고 김화식, 안석준, 김형수, 김길수, 김인준, 김철훈, 배덕영, 현병찬, 최택규 등이 순교하거나 실종됐다.
1950년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기독교인의 순교는 더욱 많아졌다. 이성휘, 신석구, 박융률, 석옥린, 문병록, 조석훈, 이정순, 오덕삼, 전기찬, 강축수 등이 체포돼 학살당했다. 순교자들은 전쟁 중에 더욱 늘어나 조희렴, 권의봉, 박경구, 김익주, 한사연, 김홍식, 정일선, 김의근, 조춘일, 김영윤, 김영범, 김익두, 서기훈, 송정근, 강운영, 강승남, 김인실, 변천식, 최갑은, 김광범 목 사 등이 죽음을 맞이했다.
남한에서도 1948년 제주 4.3 사건 와중에 이도종 목사가 사망 했고, 1949년 모슬포교회 허성재 장로가 공산당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여순 사건으로 김병준 장로, 윤형근 형제, 김창일 전도사,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송동인, 송동 신도 살해당했다.
호남에서는 김주현 목사, 김성원, 이재규, 김종한, 안덕윤, 김병구, 김병엽, 임종헌, 원창권, 김종인, 김방호 목사와 이마태, 오병길, 이광년, 박병근, 정재련, 주삼식 전도사, 정태인, 최명길 목사, 나옥매 전 도사, 김수현, 배영석, 김정복, 조상학, 손양원, 박석현, 백남용, 이용선 목사 등이 순교했다. 논산의 병천성결교회에서는 66명의 교인들이 사살됐고, 전라도의 원당교회. 신관, 해성, 법성포, 염산, 야월리, 복길, 영암, 구림, 상월, 임자교회에서도 많은 교인들이 죽음을 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서울 지역에서는 김응락 장로를 비롯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살됐고 남궁혁, 송창근, 김유순, 양주삼, 이건, 박현명, 최태용 목사 등이 납북돼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이름 모를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죽음을 당했을 것이 다.
위에 열거한 순교자들에 대해‘순교’냐, 순국’이냐는 의견이 분분 할 수 있다. 그 경계선이 모호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이덕주 교수는, 종교적 저항과 정치적 저항의 혼재로 종교적 동기 외에 정치적 배경이 강하게 반영된 한국교회 순교의 특징에서 찾고 있다. 조선후기 천주교인들의 순교도 그러했지만, 구한말 이후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개신교회의 수난과 순교 역시 정치적인 배경과 동기에 서 진행된 경우가 많아, 기독교인들의 저항이 단순히 종교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정치적 투쟁의 성격을 띠게 됐으며, 결국 정치적 탄압 의 희생물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일제말기 순수 신앙적인 동기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종교인들을 정부당국이‘보안법’,‘치안유지 법’같은 정치적 법률을 적용하여 반체제 정치범으로 체포하고 재판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일제 강점기 한국교회의 ‘순교’는 민족적 저항의 의미를 지닌‘순국’의 의미까지 포함하게 됐다고 이덕주 교수는 설명한다.
한국에 전래된 기독교는 다양한 신학과 교리적 배경을 지닌 교파형 교회였다. 그러다가 1905년 장로회 4개 선교부, 감리회 2개 선교부가 협의체를 형성하면서‘재한개신교선교부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결성했다. 이 공의회의 목적은 선교 사업에 있어 협력을 기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한국에서 유일한 하나의 개신교 교회를 조직하는’것이었다. 한국에서 교파를 초월한 하나의 교회를 설립하려는 의도였기에 선교사들도 호응을 했지만,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인해 성사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1924년 9월 24일 새문안교회에서 ‘조선예수교연합공의 회(Korea National Christian Council)’가 창설됐다. 이것은 선교사 중심의 ‘재한개신교선교부연합공의회’와 한국교회가 주체인 ‘조선예수 교장감연합협의회’가 통합해 창설된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인 연합기관으로, 초대회장에 차재명(車載明) 목사가 선출됐다. 창립총회에서 채택된 규칙이 밝히고 있는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협동하야 복음을 선전함
2) 협동하야 사회도덕의 향상을 도모함
3) 협동하야 기독교 문화를 보급케 함
창립당시 여기에 참여했던 한국교회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조선미북감리회, 조선미남감리회였고, 외국 선교부는 미북장로회, 미남장로회, 호주장로회, 캐나다연합장로회, 미북감리회, 미남감리회였으며, 기독교기관으로는 대영성서공회와, 조선기독교청년회(YMCA)가 참여 했다. 실질적으로 오늘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모체라 할 수 있는 이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처음에는 11개 단체 대표들로 조직됐다. 이후 1931년 ‘조선 기독교연합공의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 후 1937년 해산될 당시에는 11개 회원 단체 외에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 조선예수교서회,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재일본 캐나다장로회선교회,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 등도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었다.
한편, 한국교회는 20세기 초부터 다양한 세계 에큐메니칼 모임에 참가하고 있었다. 특히 현대 선교운동과 교회일치운동의 전환점이 된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에 윤치호가 비공식 자격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이 대회는‘계속위원회’를 구성했고, 후에 국제선교협의회로 발전했다. 이러한 세계적인 상황 속에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국제 선교협의회의 산하 기구인 국가단위의 에큐메니칼 조직이 된 것이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회원대표 규정에 따라 한국교회 대표의 수가 선교사의 수를 넘어서게 됐고, 이에 따서 한국교회 교인들이 공의회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런 상황이 되자 선교사들은 폐지하기로 했던‘재한개신교선교부연합공의회’를 존속시키면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와는 별도의 협의체를 계속 유지해 나갔다. 이제 한국인 주도의‘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비록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이전에 선교사들이 주도했던 각종 사업에 참여하면서 선교사 의존 시대를 벗어나 한국인이 주체가 되는 한국교회 형성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러나 일제 말,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폐쇄됐고, 이후‘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라는 친일단체로 변모했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1945년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통합되고 말았다.
해방과 더불어 국가와 교회의 재건 작업이 진행됐다. 일제 말 통폐 합됐던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은 해체됐고, 1946년 가을에 교파연합운동 기구인‘조선기독교연합회’가 조직됐다. 조선기독교연합회는 1948 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한국기독교연합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한국기독교연합회는 1948년 8월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세계교 회협의회(WCC) 창립총회에 대표를 파송,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운동에 참여했다. 또한 해방 이후 직면한 전쟁과 분단 등 연속적인 국가적 혼란 속에서, 한국기독교연합회는 이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내는 물론 국제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61년 국제선교협의회는 세계교회협의회와 합병해 세계교회협의회 의 산하기구인‘세계선교와 전도 위원회’가 된다. 여기에는 선교와 교회는 분리될 수 없으며 교회가 광의의 선교의 주체가 돼 한다는 두 가지 전제가 깔려 있었다. 이런 변화에 따라 한국에서도 한국기독교연합회 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로 변화됐고, 이에 따라 회원은 교단으로 국한됐다. 기구의 성격이 기독교 협의회에서 교회 협의회로 바뀐 것이다. 이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인권, 민주화, 통일 등 국가의 문제들을 선교의 과제로 삼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한국 기독교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등 일제 치하에서 저지른 잘못에 대한 철저한 회개 없이 이승만 정권과 유착했다. 4·19학생혁명 이후 한국 교회는 예언자적 사명을 망각하고 있었음을 반성하는 계기를 맞았지만, 1961년에는 5·16군사 쿠데타를 지지했다.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은 처음으로 한국교회의 청년들을 정치 현장으로 불러냈다. 이후 한국교회는 삼선개헌에 대한 찬반으로 크게 양분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은 1971년 위수령과 비상사태를 선포한 데 이어 10월에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개헌을 강행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유신 반대운동을 내란음모 사건으로 확대해 가혹하게 탄압했다. 1974년 4월 정부가 개헌운동을 막기 위해 조작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은 그런 탄압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1,024명이 조사를 받았고, 이중 183명이 사형 및 무기 징역을 포함한 실형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소속 교단들과 교회들의 저항이 일어났다. 그 일환으로 이 해 7월11일부터 소장파 목사들과 구속자 가족들, 평신도들이 참여하는 ‘목요기도회’가 시작됐다. 또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74년 5월 4일 인권위원회를 창립해 한국사회의 인권을 대변하는 역할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기독교교회연합회 소속 교단의 청년회 대표들은 1976년 1월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Ecumenical Youth Council)를 창립했다. 이후 한국기독교청년연합회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 까지 기독교 민주화 운동의 전위 역할을 담당했다.
1975년 5월부터 이른바 ‘긴급조치 9호’(1979. 10.26까지) 시대가 시작됐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76년 1월15일‘목요기도회’를 부활시켰고, 이것은 유신 치하에서 꺼지지 않는 횃불이 됐다. 한편 박정희 정권은 한국에 종교의 자유가 있음을 보이기 위해 기독교 대형집회를 이용했다. 1973년의‘빌리 그래함 한국전도대회’, 대학생선교회(CCC)가 주최한‘엑스플로 74’,‘77 민족복음화 대성회’등은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성대하게 치러졌다. 정권의 지원을 받는 보수적인 종교인들은, 주로 민주화 운동을 용공으로 비난하거나 국가조찬기도 회를 통해 정권에 접근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했고, 군사정권의 정치적 지지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는 1980년 5월의 광주항쟁 이후 전두환 정권의 가혹한 탄압에 대항하여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한국기독교의 통일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 통일논의는 고착상태에 놓여 있었다. 정부의 간섭으로 통일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82년 2월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를 특별위원회로 설치하기로 결의, 통일문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1985년 3월까지 정부의 공권력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통일 관련 활동을 강력하게 탄압했다. 하지만, 1985년 3월 제34차 총회에서‘한국교회 평화 통일 선언’을 채택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통일운동이 본격화됐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은 1988년 2월 29일 열린 제37차 총회에서 채택한 것 이다. 88선언은 조국의 통일문제를 두고 고민해 온 한국기독교교회 협의회가 회원 교회들의 의견을 수렴해 통일에 대한 고백적인 내용을 담아 남북한 우리 민족과 온 세계 앞에 내놓은 것이다. 88선언은 한국 기독교계가 그동안 진행시켜 온 통일 논의를 처음으로 종합 정리 한 것으로, 이제까지 진행된 통일운동의 성과를 보여주는 동시에 앞으로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기독교 통일운동의 한 척도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대단한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다. 이 선언을 통해 한국 기독교계는 물론 우리 사회의 통일 논의가 본격화될 수 있었다.
일제시대 한국교회에는 각 교파를 대표하는 신학잡지가 있었다. 장로회의「신학지남」(1918), 감리회의「신학세계」(1916), 성결교회의 「활천」(1922)이 그것이다. 이 잡지들은 소속 교파의 신학적 지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교파 잡지 이외에도 사람들의 이 목을 집중시키는 개인잡지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최태용의 「천래지성」(1925)과「영과 진리」(1929), 김교신의「성서조선」(1927), 김인서의「신앙생활」(1932)을 들 수 있다.
최태용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의 전신인 수원농림학교에 다닐 때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새벽마다 산속의 새벽기도회를 다녀오는 친구의 뒤를 밟았다가 예수를 믿게 됐다는 것이다. 이후 최태용은 “복음을 위하여 네 몸을 바쳐라”는 음성을 듣고 전도자로 헌신했다고 한다.
그 후 교회 안에 머무르던 그의 신앙에 전환점을 가져다 준 이는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였다. 일본에 유학중이던 20대 초반의 청년 최태용은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 속에서 무교회주의에 심취했다. 그는 우치무라의 저서를 굶주린 사람처럼 탐독했다. 자신이 우치무라 안에 있고 우치무라가 자신 안에 있는 것 같은 상태에서 우치무라의 가르침이“마음의 바닥까지 울리는 것을 경험”했다고 한다. 최태용은 우치무라를“위대한 사도”라고 부를 정도로 경외했으며, 그에게 배울 수 있었던 것을 무한히 감사했다. 우치무라의 영향 아래서 최태용의‘교회도취’신앙은 무교회주의 신앙으로 변했다.
최태용은 일본에서 귀국한 후 1925년 6월 경성 성북동의 한 작은 초가에서 개인 잡지인「천래지성(天來之聲)」을 창간했다. 개인잡지로서는 김교신보다는 2년(단독발행을 고려하면 5년), 김인서보다는 7년 가까이 앞선 것이다. 처음에는 인쇄본으로 발행되다가 제4호부터 등 사판으로 전환했다.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컸다.
「천래지성」의 핵심적인 메시지는‘신앙혁명’이었다. 그에게 있어 개인의 신앙에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가 가장 중요한 관건이었다. 교회의 부흥이나 전도는 신앙에 생명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조선 기독교인이 교회를 떠나서 신앙을 생각할 수 없는 1단계의 신앙수준에 머무르고 있다고 보고, 영과 진리에 사는 2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외쳤다.
「천래지성」의 또 다른 교회사적 의의를 찾자면 그것은 독립전도이 다. 여기에 서양 기독교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최태용의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최태용은 조선인은“남의 것을 거저 받아 이것을 치욕으로 아는 마음이 없다”고 비판하면서, 조선교회는 경제적으로 서양선교사에게서 독립해야 하고 신학적으로도 조선인의 신학을 배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천래지성」을 통해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400-500명의 독자를 기대했지만, 독자는 수 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천래지성」은 2년 만인 1927년 5월호(제24호)로 폐 간되고 말았다. 그러나 최태용은 1년 6개월의 침묵을 깨고 1929년 1월 이름을 「영과 진리」로 바꾸어 다시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천래지성」과「영과 진리」의 구독자는 50명에도 미치지 못했으나, 그 영향력은 발행부수를 훨씬 뛰어넘었다. 다른 곳에서는 들어보기 힘든 신학적 주장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나타난 것이다. 최태용은 이들 잡지를 통해 한국교회의 신앙적 각성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또한 역사비평학적 관점을 견지하면서 문자 안에 갇혀 고착화된 한국교회의 성서주의를 비판했다.
최태용에 이어 개인으로 잡지를 낸 이가 김교신이다. 김교신은 1927년 7월 일본에서 만난 그의 동료 정상훈, 함석헌, 양인성, 송두용, 류석동 등 6명과「성서조선」을 창간했다. 제 15호 까지는 정상훈의 노력이 컸고, 제 16호부터는 김교신이 단독으로 발행했다. 그는 1930년 5월부터「성서조선」의 주필로 집필, 교정, 인쇄, 우송 등 사무 일체를 책임졌다. 「성서조선」은 1942년 폐간될 때까지 15년 동안 조선 무교회주의 입장을 대변하는 신앙잡지로 발행됐다. 독자는 최대 300명 정 도로 추산된다.
「성서조선」에는 성서를 통해 조선인을 다시 세우려는 김교신의 열 의가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성서만이 기독교의 진리를 담고 있는 최고 가치이며, 성서만이 조선을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보았다. 그에게 성서 와 조선은 화학적으로 융합되어 있는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민족혼과 성서 라는 두 축을 놓지 않았던 그의 신앙적 입장은 결국 1942년에 ‘성서조선사건’으로 터져나왔다. 그는 겨울 뒤에 따뜻한 봄이 오는 것을 보면서 부활의 소망을 보았다. 또한 혹독한 겨울 속에서도 끝 까지 살아남은 연못 속의 개구리를 통해 조선인은 결국 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다는 민족적 희망을 가졌다. 혹독한 겨울은 일본의 통치를 상징했다.
"봄 비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틈의 빙괴(氷塊)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랫만에 친구 와군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담 속을 구부려 찾았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세 마리 담 꼬리에 부유(浮遊)하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작은 담수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 은 까닭인 듯.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 (潭底)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다닌다. 아, 전멸(全滅)은 면했나 보다!"
이 글로 김교신과 그의 동지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성서조선 사건은 일제의 수난 속에서도 죽지 않았던 한국 기독교의 예언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다음으로 김인서의「신앙생활」에 대해 살펴보자. 김인서는 1930년대 초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1960년대 초까지 장로교 안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특히 한국 장로교 역사에 문서 활동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복음주의적 신앙을 대표하면서 동시에 민족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 두 영역을 사상적으로 결합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김인서의 민족주의 이해는 한국 개신교의 종교적 민족주의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김인서는 1930년 신학교 3학년 초에 평양신학교 기관지인「신학 지남」편집을 돕게 되면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앞서 살펴본 우치무라의 제자였던 최태용과 김교신과는 신학적 입장이 달랐다. 그는 「신학지남」편집 경험을 바탕으로 1932년 개인 전도 잡지인「신앙 생활」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신앙생활」은 순한문성경을 읽을 수 있는 성경학원 정도의 평신도를 기준으로 삼았다. 처음 1,200부로 시작하여 폐간 때까지 선금 (先金) 3,700부를 발간했는데 당시 유가지(有價誌) 중에서 최고 부수였다.「신앙생활」은 1941년 폐간됐다가 해방 후인 1952년 복간됐고, 1956년에 종간됐다.
김인서의 사상은 한마디로‘복음주의적 민족주의’라 할 수 있다. 민족주의가 배타적이고 부정적으로 제한될 위험의 요소를 제거하려 한 것이다. 그는 일제에 대한 투쟁과 저항, 그리고 부정은 자신을 투쟁의 주체로만 인식하여 자신의 창조적이며 긍정적인 존재 위상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김인서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Christ, Corea, Church’세 가지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즉 하늘을 나타내고 한국은 땅, 그리고 교회는 인간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는「신앙생활」창간 호에서 “「신앙생활」의 삼대 강령”을 복음주의(福音主義), 영화주의(靈 化主義), 인화주의(人和主義)라고 밝히고 있다. 삼대 강령에서 말하는 복음은 하나님의 것, 영화운동은 지상, 즉 세계가 신적인 것으로 변모 하는 것, 셋째는 사람들 사이의 평화를 의미한다. 그는 자신의 독특한 교회사론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도 이 세 가지 요소를 활용한 다. 그것은 성령, 지역, 인물로, 이 세 요소가 기독교 역사의 핵심 요 소라고 본 것이다. 성령께서 지역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선택된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이상의 세 요소를 분석해 보면 하늘(天)은 만물의 주체로서 역사 와 우주를 섭리하는 실체이다. 그리고 세계, 땅(地)은 객체 또는 대상으로서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역사의 장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사람 (人)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아 세계를 변화시키는 도구이며 매개이며 방법이 된다. 그의 민족구원론도 마찬가지로 삼분적 요소로 설명 된다. 그것은 복음, 민족, 교회로, 하나님의 복음이 교회를 통해 민족을 구원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그의 선교사상 역시 삼분법적으로 설명된다. 그의 선교론은 복음, 아시아와 세계, 조선 기독교인이다. 즉 선교란 복음이 조선의 기독교인을 통하여 아시아와 세계로 전파되 어 아시아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김인서의 복음주의적 민족 이해는 민족의 현 존재와 가치를 재발견하게 했다. 단지 일제에 종속된 피압박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은 민족으로 신적인 역사 섭리의 도구로 확인된다. 아 울러 한민족은 이 피압박의 경험 때문에 침략자 일본과는 달리 아시아에서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민족으로 인식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는 종교적 역사 해석이 보여준 뛰어난 지평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는 일제하 한국교회의 시대 인식의 훌륭한 성과로 기억된다.
그의 사상의 틀은 천, 지, 인이라는 동양적 삼재의 틀 속에서 기독교를 복음, 세계, 교회의 구속사적 운동으로 인식하는 역동적이면서도 토착화된 인식의 틀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의 틀은 그의 사상 전체를 통괄하는 일반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다만 김인서는 사회운동과 민족운동 계보의 교회 내 침투에 대항하여 그 운동 세력을 비판했다. 그런 이유로 한국교회의 사회선교는 최소화되었을 뿐 아니라, 김인서가 지적한 대로 복음주의의 전통과 사회선교 또는 정치신학의 융합이 거의 없어져 버린 것은 한국교회의 과제가 됐다.
김인서는 보수적 복음주의 신앙의 입장에서 조선교회를 진단함과 동시에 교회의 일치와 연합, 사랑을 강조했다. 그러나 교회의 민족주의적 요소는 경계했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들에게는 송곳 같은 비 판을 날렸다.「성서조선」과 「영과 진리」가 「신앙생활」보다 먼저 전도 잡지로 발행되고 있었으나 김인서는 이를 조선교회의 잡지로 인 정하지 않았다. 김교신과 최태용이 정통 신앙에 서 있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개인잡지들은 모두 복음을 전하는 전도 잡지의 성격을 지녔다. 다만 신앙적 노선이 같지 않았기 때문에 잡지의 성격은 달랐다. 평신도가 부담 없이 읽기에는 김인서의「신앙생활」이 적당했다. 최태용의 「천래지성」,「영과 진리」는 신학적인 파격성을 띠었고「성서조선」은 성서제일주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 기독교는, 고종황제가 의료와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윤허 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소개됐다. 따라서 조선 기독교의 초기 30 년 동안에는, 왕실을 비롯하여 개화 지식인들과 백성들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 주었다. 이는 20세기 초 교회가 부흥기를 맞이하는데 좋 은 토양이 되었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기독교가 조선이 처한 당대 의 현실을 외면한 채 지양했던 내세적 신앙과 전통문화에 대한 몰이 해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1919년 3·1운동이라는 거족 적인 민족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사회주 의자들로부터 기독교가 본격적인 공격을 받기 시작한다.
사회주의의 기독교 비판에 앞서 식민지 조선에서 기독교에 대한 비 판이 사회적 의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1917년 11월 춘원 이광수(李光 洙, 1892.3.4.~1950.10.25)가「청춘」에 게재한“금일 조선야소교회의 결점”과 1918년 9월 6일부터 10월 19일까지「매일신보」에 연재한“신 생활론”에 의해서이다.
이광수가 1917년“금일 조선야소교회의 결점”에서 비판하는 대상 은 그 자신도 인정하고 있듯이‘야소교회’라기보다는‘야소교인’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조선야소교인’으로 그는 다음의 네 가지 결점을 비판한다.
"제일은 금일 조선야소교회는 계급적이외다.
제이는 교회지상주의외다.
제삼의 흠점(欠點)은 교역자의 무식함이외다.
제사의 흠점(欠點)은 미신적이요."
춘원 이광수가 기독교를 접한 것은 16세(1907) 때 명치학원(明治學 院)에 입학한 후였다. 그는 명치학원의 급우 야마사키 도시오(山崎俊 夫)의 권유로 톨스토이에 심취하게 되는데, 이때 전쟁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톨스토이의 반전론에 공감하며 국가주의를 앞세운 일본식 기독교로 인해 회의를 품었던 상태에서 신앙을 받아들였다고는 하나, 춘원 스스로가 기독교인이라고 말 했던 적은 없다. 그러나 그의 주요 작품 들인『무정』,『유정』,『사랑』,『흙』등 에는 기독교 사상이 나타나 있다. 그것은 아마도 남강 이승훈이나 도산 안창호 등 기독교계 인사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비평가들은 추측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기독교 비판은 자신의 실천 이념으로서의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한국교회를 비판한 것이었다. 춘원은 자신의 문학 속에 소개되는 기독교 본래의 순수한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원래 하나님의 일과 세상일의 구별이 있을 리가 없을 것이요. 인류 에 복리를 주는 사업은 다 하나님의 일일 것이외다. 목사, 전도사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반 하나님의 일을 각각 분담하는 것이니, 목사, 전도사도 기실은 하나님의 일의 일부를 담임함이요, 상 공업자나 학자나 기술자도 다 일부를 담당함이외다.
교인은 결코 일요일에 회당에 가서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만이 하나 님께 봉사함이 아니라 다른 육일에도 인류의 복리를 위하야 하는 사 업이 온통 하나님께 봉사하는 걱이외다. 차라리 육일간 봉사하다가 일요일에 안식한다 함이 지당할 것이외다. 농공상업이 어느 것이 하 나님의 일이 아니리까?"
다행히도 당시 일각에서는 그의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의 시비론 이전에도 감리교 내에서는 반성의 시각을 보이고 있었다. 1916년 감리교 기관지「신학세계」는‘금일 조선교회는 학식 상 어느 정도에 서있는가?’라는 사설을 게재하여 교역자의 무식함을 비판하였다. 장로교의 경우도 기관지「신학지남」에 1918년 당시 대표적인 한국인 목사 공위량의‘목사의 사상적 생활’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여기서 공위량은, 목사가 이웃에게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면 정진해야하며, 세계 장로교 목사들은 유식하다는 명예를 가지고 있는데,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장로교에서 솔선수범하여 다른 교파에 모범이 되도록 공부하자는 제안을 했다.
춘원 이광수의 한국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오늘을 사는 현대 크리스찬에게도 여전히 경종을 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약하기는 하지만 수도적 영성은 한국교회 영성운동의 한 축이다. 수도적 영성은 앞으로 더 관심을 가지고 계속 발굴해 한국교회의 중요한 자산으로 삼아야 할 부분이다. 수도자적 영성은 가난과 청빈, 기도와 노동, 구제, 독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실천적인 삶을 추구하면서, 기성교회와는 구별되는 영적 흐름을 보여주었다.
흔히 수도적 영성의 시작은 이세종(李世鐘, 1880-1942)으로 잡는다. 가장 분명한 수도적 영성의 흔적을 남기고 간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세종은 교회에서 교리나 신학을 배우기 전에 먼저 성경을 스스로 읽으면서 예수와 바울의 금욕적 삶, 하나님만을 향해 나아가는 헌신 된 삶에 매료됐다. 그는 프란체스코처럼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수도생활에 몰두했다. 헌 누더기 옷을 입고 쑥에 밀가루를 섞은 범벅을 먹으면서, 다른 책은 읽지 않고 오직 성경만을 읽었다고 전해진다.
수도적 삶을 추구하면서 부인과도 성적인 관계를 끊고 남매처럼 살았다. 부인 문순희는 이런 남편을 두 번이나 떠나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 버렸다. 그 때마다 이세종은 부인을 심방하면서 하나님을 떠나지 말라 권면하고, 다시 돌아오라고 말했다. 훗날 부인은 이세종과 마지막을 같이 했고, 그의 무덤을 3년이나 지켰다.
이세종이 추구한 삶은 수도자들이 추구했던 삶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그의 청빈은 어쩔 수 없는 가난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선택이었다. 이세종의 수도적 영성은 강순명 목사, 이현필 등으로 이어 진다.
강순명(姜順明, 1898-1959)은‘독신 전도단’을 조직했다. 여기에 참여한 이들은 결혼을 금기시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했다. 그는 장로 회에서 제명된 후, 초대교회로의 환원을 통해 교회의 일치를 추구했 던‘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활동한다. 그는 광주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회했으며, 6. 25 전쟁기에는 천혜(天惠) 경로원을 설립(1952), 노인 들을 돌보았다. 강순명도 일생을 수도적 영성을 추구하며 살았다.
이현필(李鉉弼, 1913-1964)은 동광원을 세운 사람으로, 이세종 때 문에 수도적 영성을 추구하게 됐다. 그는 스승의 소망을 어기고 결혼을 했다가 2년도 되지 않아 부인과 남매처럼 지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부인은 오랫동안 그를 몹시 원망했다고 한다. 음식도 수도의 중요한 요소였는데, 그는 저녁 한 끼만을 먹었다. 또 제자들에게는 탁발을 자주 시켰다. 이 때문에 제자들은 마을에서 거지처럼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그는 보통 맨발로 다녔기 때문에, 맨발의 성인으로 불렸다. 그가 세운 동광원은 공동 생활을 하면서 순결, 청빈, 순명, 사랑, 봉사, 노동을 서원하고 농업으로 자립생활을 하며, 기도, 성경공부, 구제 사업에 힘썼다. 이세종, 강순명, 이현필 등이 모두 전라남도 출신으로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것을 볼 때, 일제 시대 호남지방은 수도적 영성운동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세종과 비슷한 시기에 수도적 영성을 추구했던 또 다른 인물이 있다. 바로 김성실(金成實)이다. 지금까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그는, 최태용과 수원 농림학교 동창이다. 그는 당시 학생들과 산 속에 서 새벽기도를 드렸고, 이에 호기심을 느낀 최태용이 기독교를 믿게 된다. 김성실은 학교를 졸업한 후, 성 프란체스코의 신앙에 영향을 받아 걸식하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전도를 했고, 그를 본받아 출가해 걸식 표류한 이가 적지 않았다.
김성실은 이용도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용도에게서 부흥운동 의 영성뿐만 아니라 수도자적 영성도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용도는 교회 밖에서 추구되던 수도적 영성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금강산에는 김성실과 같은 수많은 수도적 영성가들이나 신비주의자들이 있었다. 1920-30년대 한국교회에는 이러한 영성운동이 한 지류(支流)로서 흘러가고 있었다. 김성실과 금강산에서 수도했던 이들은 북한 지역에서 수도적 영성을 대표했던 이들 이었다. 이처럼 한국의 수도적 영성의 중심지는 호남과 금강산 주변이었다.
수도자적 영성을 추구했던 이들 대부분이 프란체스코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이들 삶의 지향점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다. 일제시대 한국교회의 지형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수도적 영성은 기성교회에 대한 대안운동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철저한 수도자 적 삶을 살면서 평신도 수도 공동체를 지향했다. 사회와 교회 안에 머물렀던 일반 신자들과는 달리, 좁은 길을 선택하면서 예수를 믿는 신 앙 형태를 보여주었다.
수도적 영성가들은 신학보다는 성경을 통해 깨달은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세상의 물질주의적인 삶을 버리고 중세의 탁발수도사들처럼 살려고 했다. 이들은 색욕, 식욕, 물질적 욕구를 초월해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을 추구했다. 독신 추구, 검박한 생활, 소박한 음식,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은 이들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이들은 자연과 동물에 대한 무한한 경외감도 보여 준다. 또한 이들에게서는 특정 교파에 얽매이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
에든버러(1910)부터 레이크 모홍크(1921)까지
1910년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WMC)가 폐막되면서‘계속위원 회’는 국제선교대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nference)를 조직 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이 과제는 1차 세계대전(1914~18)으로 성사될 수 없었다. 1920년 존 모트(John R. Mott)와 올드햄(J. H. Oldham)을 주축으로‘계속위원회’는 국제선교대회를 설립할 계획을 수립했다.
1921년 10월 뉴욕주 레이크 모혼크(Lake Mohonk)에서‘국제선교 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가 창립됨으로써 에든버러 대회의 꿈이 실현됐다. 창립대회에는 14개국에서 61명이 참석했고, 피선교국 신생교회 대표는 7명이었다. 이 대회는 “선교정책을 결정하는 기구들은 각선교회, 각 선교본부, 그들이 속하는 각 교회, 피선교지의 각 교회”라고 명시했고, IMC의 회원들은 교회가 아니라 나라를 대표 하는 선교기구들(national missionary organizations)이라고 결정했다. 회장은 존 모트, 런던 본부 총무는 올드햄, 뉴욕 본부 총무는 완슈이스(A. L. Warnshuis)로 결정됐다.
IMC 창립 이후, 존 모트를 비롯한 임원들은 광범위한 세계여행을 통해 선교협력과 에큐메니칼운동의 대의를 확장했다. 전 세계적으로 교회연합 조직들이 활성화됐고 회원 국가들이 늘어 갔다. 1922년에 중국기독교협의회(National Christian Council)가 조직됐고, 일본 NCC는 1923년 조직과 동시에 IMC에 가입했다.
1921년 창립 당시 17개 회원국가로 출발했던 IMC는, 1948년에는 30 개의 국가 혹은 지역 교회연합회들이 가입해 있었고 이들 중 신생교회 회원들은 18개였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창립(1924)
한국 최초의 초교파적인 연합기구는 1918년에 탄생된‘장감연합 협의회’였다. 1922년 10월26일 열린 제6회 장감연합협의회는 NCC를 조직하기 위해 전문위원들을 위촉했고, 1923년 3월23일, 전문위원들 은 1924년 9월에‘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Korean National Christian Council)를 창립하기로 결의했다. 이 단체는 기존의 조선예수교장로 회, 남감리회, 미감리회, 4개의 장로교 선교회들과 2개의 감리교 선교 회들 외에도 영국성서공회, 조선기독교청년회 등 11개 단체로 결성됐 다. 창립총회는 1924년 9월 24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열렸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IMC에 가입하기까지의 준비작업(1924-1928)
한국교회는 예루살렘 선교대회를 바라보면서 두 가지 준비를 했다. 첫째는 1925년 12월 28-29일에 조선호텔에서 60명이 모여‘조선 기 독교계 대표자 회의’를 개최했다. 이 모임은 방한 예정인 존 모트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 참석자들은 YMCA, YWCA지도자들과 장감 양 교단의 대표자들이었다. 네 개의 분과 토의가 이루어졌으며 그 내용 은 다음과 같이 정리됐다.
제1분과: 오늘날 기독교회와 그 사업에 대한 조선청년의 태도
제2분과: 조선 기독교 사업에 대한 재평가
제3분과: 신앙의 힘
제4분과: 국제선교협의회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와의 관계
"학생과 청년실업 층에 사회주의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어서 그에 대 처할 기독교 문서 출판이 시급하다. 선교사들이 현지에 맞지 않는 선교방법을 사용하여 문제가 되고 있다. 한국인 지도자의 질을 향상시 켜야 한다. 신학교육과 기독교 교육이 중요하다. 국제선교협의회에 가입하고 예루살렘 선교대회에 9명의 대표를 파송하되 대부분을 한국인으로 한다."
두 번째로 한국교회는 IMC의 농촌 조사 사업에 협력했다. 국 제 YMCA 운동의 지도자이자 IMC의 회장이었던 존 모트는 1926년 에 저명한 사회학자이며 컬럼비아 대학 교수인 브룬너(Edmund de Schweinitz Brunner)를 한국으로 보내 이 사업에 착수했다. 브룬너는 YMCA에 본부를 두고 1년 동안 한국 농촌사회에 대한 최초의 사회 학적 조사를 실시했다. 한국이 조사대상으로 선정된 것은 한국교회의 농촌운동이 성공적이었고, 한국 YMCA 지도자들이 농촌조사를 의뢰 했기 때문이다. 이 조사보고서는 1926년 『한국농촌』(Rural Korea)이란 제목으로 발표됐고, 1928년 예루살렘 IMC에 연구문서로 보고됐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1927년 9월 20일 서울정동교회에서 제 4회 총회로 모여 예루살렘 선교대회 대표를 선출했다. 신흥우(조선 YMCA 전국회장), 양주삼(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회장), 김활란(이화 여전 학장), 노블(William A. Noble, 노보을), 정인과(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총무) 5명이 정식 대표가 됐고, 마펫(Samuel A. Moffet, 마포 삼열)은 자기 비용으로 참석하기로 했다.
예루살렘 선교대회(1928)
에딘버러 대회의 서구 중심적 낙관주의가 붕괴된 이후, 예루살렘 대회는 과거와는 달리 새로운 질적인 선교 이해에 접근했다. 선교의 목표로“하나님 나라”와“세계복음화론”이 대립하였다. 여기서 선교는 복음화와 사회개혁을 포함한다는‘총체적 접근’(comprehensive approach)이 최초로 제기됐다. 이 대회는 기독교 사명, 종교교육, 신생교회와 오래된 교회의 관계, 선교와 산업문제, 선교와 농촌문제, 유대인 선교문제 등 광범위한 이슈를 다뤘다.
신생교회의 참여도 크게 늘어났다. 에든버러에는 1346명 중 17명이 신생교회 출신으로 서구교회를 대표해서 참석했다. 그러나 예루살렘 대회는 50개국에서 231명이 참가했고 4분의 1(52명)이 신생교회의 NCC를 대표해서 참석했다.
이 대회에서 일본감리교 감독 우자키(Kogoro Uzaki)와 김활란의 논쟁은 유명하다. 우자키는 국제동맹에 모든 민족들이 참여하는 것은 인종관계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견해를 주장했는데, 김활란은 현재 국제동맹의 헌장은 피식민지 백성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에 우자키의 주장은 옳지 않다고 반박했다.
1928년 예루살렘 대회는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코의 하나님 나라 운 동과 중국의 5년 진흥운동에 큰 자극을 주었다. 한국에서는 이 대회의 영향으로 1928년 장로교 총회와 감리교 총회가 각각‘농촌부’를 설립 하여 농촌계몽운동에 착수했다. 한국교회는 한편으로 신학이 보수화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 에큐메니칼운동과 접촉하면서 사회 선교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