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한국에 살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이후, 북한에 대한 남한의 입장은 대화나 협상의 대상이 아닌‘쳐부수어야 할’적이었다. 이러한 견해는 기독교회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 한국교회 통일론은 북한 주민의 해방이라는‘자유십자군’(自由十字軍) 의식이 지배적이었다. 북한은 사탄이 지배하는 지역이며, 학정과 굶주림 속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을 속히 구원해야 한다는 반공통일론(反共統一論)의 기독교 버전인 것이다. 이때까지 기독교 안에서 통일문제에 대해 진보와 보수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7·4 공동성명(1972)의 발표는 기독교회가 분단체제에 순응하여 통일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성찰하지 못했다는 반성과 함께, 통일문제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환기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NCCK)는 그해 10월에‘통일 및 사회정의 기독교 협의회’를 조직했다. 여기서 진보적 기독교인의 통일에 대한 입장을 표명 했다. 첫째로는 진정한 민주화 없이는 평화적 통일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인식이었다. 즉 우리 사회의 민주화, 자유와 인권, 사회정의가 이루어져야 북한과의 평화적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지금까지 정부주도의 통일논의에서 탈피해 통일논의를 다변화해야 하고 그 통일논의의 주체는 민중이 돼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따라 70년대 한국 기독교의 진보적 인사들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폭압적 독재정치에 맞서 끈질긴 저항을 시도했다. 하지만, 유신체제는 조국근대화와 국가안보의 논리로 민주화운동을 탄압했다. 이에 유신체제의 종말을 염원하던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민주화를 위해서는 국가안보 논리의 근거가 되는 분단을 해소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 기독교가 통일문제에 조직적이며 운동적으로 접근하기 까지는 그로부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1979년 10·26사태로 인해 유신의 종말은 도래했지만, 민주화의 봄 은 오지 않았다. 오히려 12·12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유신체제보다 더 폭압적인 수단을 동원했다. 급기야 80년 5·18 광 주 민주화운동을 잔인하게 진압하기도 했다. 광주 민주화운동은 국제 사회가 한국의 인권문제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세계교회협의회 (WCC) 등 기독교 국제기구와 교류를 맺어 왔던 한국 기독교는, 신군부에 의해 자행되고 있던 반인권적 반민주적 폭력을 전 세계에 고발 하고 근절시키기 위해 세계교회와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특히 신군부의 정치적 슬로건은 유신체제의 국가안보 논리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세계교회와의 연대사업은 한국의 통일문제로 직결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 기독교가 통일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은, 1981년 6월 서울 아카데미하우스에서‘죄의 고백과 새로운 책임’이라는 주제로 열린 ‘제4차 한독교회협의회’부터였다. 이후 해외에서 해외 교 포 기독교인과 북한 측과의 만남이 비엔나(1981. 11)와 헬싱키(1982. 12)에서 차례로 이루어지는 한편, 국내에서는 1983년 NCCK에‘통일 문제협의회’가 설치됐다. 하지만, 통일문제협의회는 정권의 방해 공작으로 제대로 개최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민족통일을 위한 교과서를 연구하던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13명이 경찰의 기습단속으로 연행됐다. 이런 국내사정으로 인해 한국 기독교는 정권의 간섭을 받지 않는 세계교회 및 해외교포 교회와의 연대를 통해 통일 문제에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한국기독교와 세계교회는 반인권이고 반민주적인 한국 상황의 핵심이자 세계평화의 위협의 원인이 한반도의 분단에 있음을 인식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기독교가 세계교회와의 연대를 통해 통일운동의 방향을 구체화하는 계기가 된 것은, 1984년 10월 29일부터 11월 2일까지 도쿄 근교의 도잔소(東山莊, 일본YMCA동맹)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의 국제문제위원회(CCIA)가 주최한‘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정의에 관한 협의회’, 이른바‘도잔소협의회’였다. 이 협의회는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정의를 위해 과거 수십 년 동안 에큐메니칼운동이 깊은 관심을 가져온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협의회를 주최한 WCC 국제문제 위원회는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일본기독교교회협의회(NCCJ),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및 한국의 WCC 회원교회들과 면밀하게 논의를 진행해 나갔다. 당초에는 북한 교회와 중국 교회도 초청됐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정치상황이나, 또한 공산 주의가 지배하는 북한에 교회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갖고 있던 한국 기독교의 일반적인 인식을 고려하면, 북한 교회와 중국 교회의 참가 자체가 한국 기독교 대표들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이 됐다. 결국 북한 교회와 중국 교회는 불참의사를 밝혔고, 남북 기독교의 역사적 만남은 그 뒤로 미뤄지게 됐다. 


이 협의회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문제를 한국 기독교가 세계교회와 더불어 공론화한 최초의 국제회의로, 한국기독교의 통일운동에 커 다란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 협의회의 결과로 제출된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전망-도잔소협 의회의 보고와 건의안’, 이른바 ‘도잔소 보고서’는 한국 기독교가 다음과 같이 통일운동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첫째, 정의와 평화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함께 이루어져야할 과제이다. 둘째, 분단을 극복하고 신뢰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남북 교회간의 만남과 대화가 중요하다. 셋째,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는 세계교회의 보다 폭넓은 참여가 필요하다. 특히 통일운동에 있어서 남북 기독교의 만남의 문제는, 분단의 장벽이 가로막혀 있는 현실적인 제약을 고려해 볼 때, 세계교회의 협력이 절실한 문제였다. 따라서 남북 기독교인의 만남에 있어서 한국 기독교인에 비해 현실적으로 접근 가능성이 더 높은 해외교포교회에 큰 사명감을 주기도 했다. 


이런 인식을 토대로, 1985년 3월에 모인 NCCK 제34차 총회에서는 ‘한국교회 평화통일 선언’이 채택되었다. 이 선언은“평화의 염원은 약한 자, 가난한 자, 눌린 자, 곧 민중이 가장 깊이 탄식하고 갈망하는 민중의 현실”이라고 천명했다. 따라서 민중이 통일운동의 주체로 서야 하고 한국사회의 변혁과 통 일의 성취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규정했다. 예장 통합측은 1986년 제37회 총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 를 채택했는데, 여기서는 화해라는 관점에서 평화적 통일에 대한 사명을 언급하고 있다. 


이윽고 1988년 2월 29일, NCCK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일명‘88선언’)을 채택한다. 이 선언은 먼저 분단체제 안에서 상대방에 대해 증오와 적개심을 품었던 일이 죄악임을 고백했다. 또한 7·4공동성명의 자주, 평화, 민족적 대단결의 3대 정신에 인도주의와 민주적 참여의 두 가지 원칙을 추가했다. 이 다섯 가지 원칙은 1960년 이후 기독교 진보적 인사들의 통일논의가 집약된 것이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평화 체제의 수립과 그것을 주변국이 보장 한다는 전제 아래 미군철수와 군비축소를 주장한 점이었다. 당시에는 미군 철수 문제는 북한의 주장과 일치한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그럼에도 이 선언은 한국사회에서 통일논의를 이끌어 냈다는 평가를 받는 중요한 문서가 됐다. 


그러나 보수적인 기독교회는 이 선언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한국개신교교단협의회,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등은 성명을 발표하고 이의를 제기했다. ‘88선언’에서 주장하는 바, 민족주의적 낙관론, 통 일지상주의, 남한사회의 분단 책임론, 미군철수, 에큐메니칼 진영의 일방주의 등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고 거세게 반발한 것이다. 반공 논 리와 안보 논리에 익숙해 있던 보수적인 기독교회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반발이었을 것이다. 


보수적인 기독교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통일운동은 계속 됐다. 1988년 4월 WCC와 CCA 국제문제위원회의 협력 아래 NCCK가 주최로 인천에서 열린 ‘세계기독교 한반도 평화협의회’참석자들은, NCCK 의 ‘88선언’에 동의하면서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UN 차원에서의 노력을 요청하는 한편, 남북간의 긴장완화를 위해 군사훈련의 중지와 핵무기의 제거 등을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시급한 과제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통일논의는 소위 ‘7·7선언’(1988. 7. 7)이라 는 정부의 통일정책 공표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한국 기독교의 통일운동은 민간차원의 남북 교류에도 물꼬를 텄다. ‘도잔소협의회’를 주최한 WCC 국제문제위원회(CCIA)는 1986년 9월에 스위스에서 열린 제1차 글리온회의를 통해 남북 기독교인의 만남을 주선하고, 그 결과 이 회의에서 분단이후 처음으로 남북 기독교인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어 88년 11월에 열린 제2차 글리온회의에서 다시 한 번 남북의 기독교인이 상봉했고, 남북 기독교 대표는 공동으로 ‘글리온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광복 50년이 되는 1995년을‘통일의 희년(禧年)’으로 선포하고, 매년 8·15 직전 주일을 공동기도일로 지키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또한 7·4공동성명의 ‘조국통일 3대원칙’을 재확인하고, 한반도의 통일주체가 남북의 민중임을 확인하면서, 민족 당사자간의 신뢰 구축과 긴장 완화를 위한 군비감축 등을 촉구했다. 이 선언은 민간차원에서 발표된 최초의 남북 공동선언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1989년 3월에 문익환 목사가 전격적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문 목사는 봉수교회의 부활절 예배에 참석하고 김일성을 만나 남북의 통일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1992년 1월에는 NCCK 총무 권호경 목사와 박경서 박사가 조선기독교도연맹의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하고 김일성을 면담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1992년 NCCK총회에 북한 측 대 표단이 참석하기로 합의하고 이를 위해 판문점에서 회담을 가지면서 참석이 확정됐지만, 막판 한국 정부의 개입으로 성사되지는 못했다. 


이어 ‘글리온 선언’에서 합의한 1995년 통일 희년을 앞두고, 한국 기독교회는 1993년 8월 15일 서울 독립문에서 임진각으로 이어지는 길 위에서 6만 5천여 명의 기독교인과 시민이 참여한 남북 인간띠잇기 행사를 개최했다. 이것은 민중을 통일의 주체로 내세운 한국 기독교 통일운동의 상징적인 행사였다. 


한국기독교의 통일운동은 주로 진보적 기독교 인사들과 NCCK 회 원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따라서 분단체제에 대한 책임 소재, 감상적 통일지상주의, 통일논의 일방주의, 북한체제에 대한 온정주의 등으로 압축되는 보수적 기독교회의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 통일의 주체가 민중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 점, 세계교회와의 협력을 통해 통일에 대한 주변국의 인식을 환기시킨 점 등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 11월 30일, 서울 평화시장 앞길에서 22살의 한 청년이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화염에 휩싸인 채 쓰러지는 순간까지 청년이 외쳤던 두 마디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였다.


전태일의 분신사건은 열악한 노동현실을 넘어, 그동안 지속되던 박정희 정부의 억압 통치와 수출 위주 성장 정책의 문제점을 드러내며, 민주화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로 인해 지식인, 학생 등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고 인권이 유린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인권운동을 한국교회의 구체적인 과제의 하나로 인식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1973년 11월 23~24일에 서울 장충동 분도회관에서‘신앙과 인권’ 이란 주제로 인권문제 협의회를 가졌다. 이 협의회 참석자들은, 앞서 있었던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1973.04.22)과 서울 문리대 학생시위 사건(1973.10.02) 등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의 확산 속에서 늘어나고 있는 인권 침해에 주목했고, 인권 신장을 위해서는 교회 내에서 인권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룰 수 있는 상설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모아, 상설기구의 설치를 NCCK 실행위원회에 건의하기로 결정했다. 1972년 12월 10일에 열린 NCCK 실행위원회는 인권문제를 다루는 상설기구인 인권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허락하고 회칙을 마련했다.


1974년 5월 4일. 위원장 이해영 목사, 부위원장 이태영 박사, 서기 홍충남 신부를 임원으로 선임하고,‘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성서적 신앙’에 의거해‘인권의 유린을 방지 또는 제거하는 책임’을 수행할 인 권위원회가 창설됨으로써, 한국 기독교는 본격적으로 세상에 들어가 인권운동을 시작한다. 


인권위원회가 조직된 후 가장 시급했던 문제는 남산 부활절 연합 예배 사건으로 구속된 박형규 목사 등에 대한 대책과, 전국민주청년 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표명하고 대책 활 동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민청학련을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단체로 규정하고 수사에 들어간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5월 27일 54명을 1 차로 구속 기소하면서, 이 사건을 ‘몇몇 불순학생들이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전국적 봉기를 획책해 오면서’그 과정에서 인민혁명당(인혁당)계 지하 공산세력, 재일조선인총연맹(조총련) 계열, 용공불순세력, 반정부인사, 기독교인 중 일부의 반정부세력 등과 결탁하여 공산정권을 수립하려 했던 국가변란기도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구속자들 중에는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에서 활동하던 기독학생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회장 서창석을 비롯하여 간부 전원과 실무자였던 이직형, 안재웅, 정상복 등 모두 26명이 투옥돼 당시 기독 학생운동이 최대의 시련에 봉착한 상태였다. 


당국은 민청학련 사건을 ‘자생적 공산주의자’에 의한 반정부 용공운동으로 규정하여 관련자들에게 최고 사형에서 무기징역, 15~20년의 장기 징역을 구형했다. 그러나 6월14일부터 시작된 비상군법회의 공판에서 관련자들이 수사과정중에 있었던 고문과 사건 조작의 실태를 밝히면서 그 불법성과 잔혹성이 백일하에 드러났고, 박정희 정부는 국내외적인 비난과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1974년 7월 18일을 시작으로 감리회, 예수교장로회, 기독교장로회, 성결교회, 복음교회 등의 젊은 목회자들이 서울 연지동 기독교회관 2층 소예배실에 매주 목요일 10시에 모여,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옥에서 고난을 받고 있는 이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자는 의미로 ‘구속 된 자들과 함께 드리는 목요 정기기도회’(이하 목요기도회)를 시작했다. 모임 시간에서 알 수 있듯, 목요기도회는 어떤 조직이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일반인들을 상대로 만든 단체가 아니라, 목회자들이 순수한 마음을 담아 기도하는 모임으로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는 15~20명 가량의 목화자들이 참석했던 기도회에 구속자 가족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탄력을 받아 모임시간이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로 정례화됐 고, 삽시간에 수백명 규모로 늘어나 모임 장소가 소예배실에서 대예배실로 옮겨야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이 기도회에 모여 연대했던 구속자 가족들은 나중에 구속자가족협의회를 조직했고, 초대 회장에 윤보선 전대통령의 부인이었던 공덕귀 여사가 추대됐다.) 


당시 목요기도회라는‘기도의 공간’은 인권 문제와 관련하여 공개 적으로 기도하고 호소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구속자 가족, 교역자, 평신도 및 비신자들까지도 한 자리에 모여 고난의 현장을 보고하고, 그 해결을 위해 기도하며 공동의 노력을 기울일 것을 다짐하는 연대와 결단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처럼 목요기도회가 당국이 조작한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고 민주 회복과 인권회복을 부르짖는 통로로 활용되자, 당국은 노골적으로 목요기도회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정부의 압력으로 인해 기독교회관은 물론, 개교회들 역시 목요기도회를 위한 장소 제공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결국 구속자들의 집과 인권위원회 사무실 등에서 드려지던 목요기도회는 1975년 5월 13일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가 선포되면서 일시 중단됐다가, 수도권 선교자금 사건을 계기로 5월 30일부터 공판이 있는 아침마다 목요기도회의 정신을 이어받은‘구속 성직자를 위한 기도회’로 다시 열리게 됐다. 그러다 수도권선교자금 사건의 1심이 끝난 후인 9월 18일부터 다시 목요기도회로 변경됐다가,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이 발생한 후 NCCK가 조직한 선교자유대책위원회가 공식적인 기도회의 주최자 역할을 하게 되면서 5월 3일부터는 금요일로 요일을 변경해 기독교회관에서 기도회를 이어갔다. 기도회가 열리는 요일을 금요일로 변경한 것은 재판이 주로 토요일이어서 재판 전날 기도회를 갖던 전례를 따른 것인데, 이때부터 계속해서 이어지던 금요기도회는 1990년 대 이후 민주화와 함께 자연스럽게 중단됐다. 


70-80년대 목요기도 회는 ‘구속된 자들과 함께 드리는 목요정기기도회’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이 땅에서 억눌린 자와 고난당하는 자들이 먼저 찾아와 한국 교회와 하나가 돼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유식한 자와 무식한 자, 기독교 신자와 비신자’ 모두가 진한 아픔으로 함께 울기도 하고, 그 아픔을 뚫고 솟는 기쁨으로 얼싸안고 춤을 추기도 했던 교회사적 전기를 마련한 기도의 축제였다.

1960년대 한국이 세계경제체제에 적극적으로 편입돼 급속한 산업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율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는 남성과 비교하여 낮게 평가되는 하위직업, 미숙련 단순 노동직에 집중됐고, 대부분의 여성들은 저임금 노동자로 동원됐다. 저임금 노동자로 동원된 여성들은 주로 시골 작은 도시나 농촌출신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공장이나 하류 서비스업, 식모살이에 흡수됐다. 이러한 상황을 1977년 8월호 『월간 대화』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지금 농촌은 돈의 화신이 들린 것 같다. 열대여섯 살 고사리 손들이 돈을 벌겠다고 도시로 나간다. 식모살이로 공장으로 말이다."


식모살이를 하는 소녀들은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하루 평균 15시간을 일했다. 깨어 있을 때는 언제나 일감을 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휴식 없는 노동 속에 침모, 찬모, 세탁모 등 팔방미인의 역할을 떠맡아야 했다. 일요일도 없고 공휴일도 없었다. 어쩌다 도난사고라도 나면 의심의 대상이 됐고, 심하면 성인 남성의 성적 추행의 위협까지 견뎌야 했다. 인간적 멸시와 천대는 당연한 이치로 통했다. 


버스 여차장들의 경우, 종일 매연가스를 마시며 노동을 해야 하는 조건 속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 삥땅 문제로 인한 몸수색, 계수기 문제, 합숙 문제, 승객들의 반말과 야유 속에서 비참한 삶을 살아가야 했다. 이들의 문제는 1970년대 들어서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1953년 6월 10일 출범한 한국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에서는 이들의 지위 향상을 위한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우선 생활연구부에서는 당시 경멸적 의미로 불리던 ‘식모’라는 호칭을 바꾸기 위해 새 이름을 현상공모했다. 그 결과 ‘돕는 이’라는 이름이 채택됐다. 또한 그들에게 휴일제와 월급제를 실시하자는 캠페인을 벌였다. 버스 여차장의 경우, ‘안내양’으로 불러주고 그들이 노고를 덜어 주며 친절을 베풀자는 운동을 벌였다. 아울러 여신도회 서울연합회에서는 여차장 합숙소를 정기적으로 방문해 교양강좌와 취미지도, 놀이지도를 하기도 했고, 여차장들의 복지향상을 위해 아예 전담 전도사를 파송했다. 이러한 여신도회의 활동과 여타 여성단체의 활동은, 버스회사들로 하여금 안내양들의 복지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자극체가 됐다. 


그런데 이러한 활동은 인도주의적 봉사일 뿐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근본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는 사회 구조적인 인식이 절실했다. 여신도회가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보다 비판적으로 접근하게 된 것은 1975년을 전후한 시기였다. 1976년 총회를 준비하면서 민중여성에게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근로여성, 농촌여성, 빈민여성, 교회여성, 부유층 여성 문제를 분류, 분석하고 그에 대한 활동 방안을 모색했다. 


청계천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근로여성을 위한 프로그램이 작동됐다. 1977년 청계천은 협신피혁 노동자 민종진의 죽음으로 거센 노동 항쟁을 하고 있었다. 정부는 전태일의 어머니(이소선)와 장기표를 구속하는 등 노동 운동을 탄압했다. 노동자들은 방황하고 있었고 전태일의 동생 전태삼만이 외롭게 싸우고 있었다. 이 무렵, 여신회도회 사회부장 정숙자가 노조의 지도급 여성들을 만나기 위해 전태삼을 만났다. 당시 정숙자는 베다니교육원 원장 서리를 겸하면서 근로여성 모임을 만들어 돌보기 시작했다.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야학으로 운영됐다. 기장 여신도회 야학은 보기 드물게 주로 어머니들 또는 주부들에 의해 운영됐는데, 야학을 불온시하는 당국의 감시망을 피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평화시장 주변의 여성근로자 70여명이 참가했으며, 특성에 따라 10명에서 20명에 이르는 5개의 작은 그룹으로 나누어져 각각 주 1회의 모임을 가졌다. 야학 운영방식은 토론을 통해 결정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개선돼 갔다. 


베다니 평신도교육원 1979년 보고서에 나타난 야학의 구조와 교육 내용을 보면, 그 성격을 알 수 있다. 목적은 “근로여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답게 살도록 하자”는데 있었으며, 교육 내용은 가정학, 여성학, 인격수양, 한문공부와 신문 읽기, 영어공부 등이었다. 여신도회 사회부장 정숙자에 의하면, 여기에서 훈련받은 근로여성들이 훗날 노조운동을 이끄는 지도자로 성장했으며, 전태일 회관 건립을 추진하는 주요 인물들이 됐다. 


1970년대 교회여성단체들은 이처럼 여성 근로자들을 위해 봉사하면서도 노동투쟁에는 비교적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여성 근로자의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 시작한 사건이 바로 1978년에 있었던 ‘동일방직’여성 근로자 투쟁이다. 똥물을 먹으면서도 끝내 노동자 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은 어린 여공들의 처절한 투쟁이 준 충격과 감 동 때문이었다. 


인천 산업선교회 조화순 목사가 동일방직 여성 근로자를 찾은 것은 1966년 10월 30일이었다.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는 숨 막히는 작업장에 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일하는 여성 근로자와 함께 노동을 하면서 인간 의식과 민주노조 의식을 고취시켰다. 1978년 2월 21일 민주노조를 와해하려는 어용노조와 회사측이 여성 근로자들을 똥범벅으로 만드는 이른바,‘똥물세례사건’을 저질렀다. 다음날 아침에는 “산업선교 물러가라, 때려잡자 조화순”이라고 쓴 현수막이 붙여졌고, 산업선교는 빨갱이 단체로 매도됐다. 126명이 해고를 당했고, 해고된 여공들은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이 사건은 교회와 사회 양심세력들을 충격과 분노에 휩싸이게 했다. 기장 여신도회는 여성 노동자들을 위해 지원금을 마련해 농성현장을 방문했다. 이와 동시에‘똥물세례’를 알리는 전단지를 만들어 전국에 있는 지회에 배포했다. 여성 근로자들에 대한 지원과 연대의식이 급속하게 파급됐다. 동일방직 사건 해결을 촉구하는 진정서를 국무총리와 동일방직 사장 앞으로 보내는 한편, 사건의 대책을 강구하자는 건의문을 교회여성연합회에 발송했다. 4월 1일에는 교회 여성 단체 대표 간담회가 구성돼 14개 교회 여성단체들이 모금운동에 나섰으며, 5월 22일에는 동일방직 사장에게, 23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에게 사건의 공동해결을 제의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이것은 1970년대 교회 여성단체들의 민주화운동이 양심수들에 대한 영치금 활동과 석방 대책에 머물렀던 것을 감안할 때,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동일방직 사태에 이어 여성단체들의 분노를 일으킨 또 하나의 사건 은 ‘YH사건’이었다. YH란 창업자인 장용호(張龍虎)씨의 영어 이니셜을 따서 이름붙인 가발 및 의류회사이다. 1979년 8월 9일 YH에 근무하는 여성노동자 170여명이 회사 측의 폐업에 반대하며 신민당사에서 이틀 동안 농성 투쟁을 벌였다. 그들의 농성은 야당인 신민당을 비롯하여 종교계, 재야단체,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당국의 강압책에 의해 끝내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경찰은 이른바 ‘101호 작전’으로 신민당사를 습격했다. 여공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폭행에 짓밟혔다. 농성장은 순식간에 유혈사태로 치달았다.‘101호 작전’은 정확히 23분 만에 끝났다. YH 노동조합원들은 모두 연행됐고, 국회의원 및 당원 30여명, 취재기자 12명, 그리고 수십명의 노동자들이 부상을 당했으며, 노동조합 상집위원 김경숙이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그리고 배후 혐의로 영등포 도시산업 선교회의 인명진 목사,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문동환, 서경석, 이문영, 고은 등 5명이 구속되었다. 


1970년대 노동운동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유신체제를 뿌리째 흔들어 놓았던 이 사건은 어린 노동자 김경숙의 목숨을 앗아가면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교회의 대응과 저항은 거셌다. NCC 인권위원회는 조남기 위원장을 비롯하여 이우정 등 5명으로 YH 조사단을 구성하고 신민당과 사태 수습을 의논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를 비롯한 각 교단의 빗발치는 성명과 교회 청년들의 항의 농성, 그리고 NCCK 산업선교대책위원회 구성 등 적극적인 대응을 통해 정부와 언론의 왜곡 비방을 규탄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기장 여신도회 이우정은 여성근로자의 억울함과 아픔에 분노하며 대책위원회 공동의장을 맡아 밤낮으로 현장을 뛰어다녔다. 


이처럼 기독교 여성들은 1970년대 말, 여성노동자들의 노동투쟁과 연계하기 시작해 성금보내기, 성명서, 진정서 보내기 등의 활동을 펼쳤으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정의라는 측면에서 ‘분배 문제’와 ‘경제 정의 문제’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60년대 한국 내 대학 캠퍼스에서 시작된 반미감정은 1970년대와 80년대에 급속히 커져 대학생 뿐 아니라 국민들에게까지 번져나갔다. 반미감정의 주된 원인은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원에 있었다. 군사독재의 정치상황 속에서 외국인의 특권을 마다하고 고난의 길을 자처하며 한국 민중들과 혹독한 시련을 함께 한 선교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고난당하는 청년학생들과 노동자, 지성인들의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아파하면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바로‘월요모임’의 구성원들인 선교사들이었다. ‘월요모임’은 독재 정권의 탄압 아래 고초를 겪던 한국인 동료들을 지켜본 선교사 10여 명이“방관자로 남아 있을 수 없다”면서 매주 월요일 모임을 가지며 시작되었다. 


‘월요모임’의 기원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970년대 초에 ‘50인 위원회’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본다. 회원 50명이 거의 미국인이었다. 이들이 모인 목적은 억압적인 정부와 미 정부 간의 공개적인 연합에 반대하는 데 있었다고 한다. 처음 이들이 주로 했던 일은 한국 민중들이 겪고 있던 인권 탄압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고, 이 사실을 편지로 고향에 알리는 것이 전부였지만, 점차 외신 기자들을 통해 한국의 상황을 해외에 알리는 것으로 확대됐다.


모인 사람들 중에는 서울대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던 평화봉사단 자원봉사자인 에드 베이커, 남부 장로교 선교사인 데이비드 로즈 (David E. Ross)와 엘렌 로스(Ellen F. Ross) 부부, 감리회 선교사 오글(George E. Ogle, 오명걸), 장로회 선교사 허브 화이트와 매지 화이트 부부, 그리고 수 라이스와 랜디 라이스 부부가 있었고, 페이문과 그레고리 파이도 있었다. 연세대학교에서 사회 윤리를 가르치고 있던 제라드 브레덴스타인 교수 역시 이 모임에서 활동했으며, 그가 쓴 한국연구에 특화된 소책자 『기독교와 사회정의』는 50인 모임의 후속모 임인 ‘월요모임’의 최초 공식 문서였다. 


한국에 대한 지식은 문동환 목사로부터 배웠다. 모임은 감시를 피 하기 위해 회원의 집을 돌아다니면서 모였다. 회원의 자격은 외국인이면 누구나 참석이 가능했다. 그래서 미국, 캐나다, 프랑스, 벨기에, 독일, 오스트리아, 아일랜드, 이탈리아 등 국적이 다양해졌다. 선교사들이 월요모임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이유는, 외국인으로 독재 권력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상황에서 구체적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방법을 찾는데 연대하며 나 갈 수 있는 토대가 됐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들은 무력감을 느꼈다. 선교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매주 월요일 모여 고통을 당하고 있는 한국의 혹독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사실을 고향에 편지로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국내외 언론 매체에 대한 엄격한 감시와 검열 속에서 월요모임을 통해서 드나드는 정보는 그야말로 한 가닥의 숨통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실제로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한국 국민들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외신기자들 대부분이 한국 정부와 대사관의 소식통에 주로 의존하고 있었다. 


상황은 외신기자들이 월요모임 회원들을 만나면서 달라졌다. 선교사들은 대사관 직원이 모르거나 알려주지 않으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외신기자들은 국제 교회조직의 대표와 인권단체 사람들이 매주 월요모임에서 공유했던 방대한 정보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월요모임은 1970년대 중반 핵심적인 국제적 소통로가 됐다. 


정치범 목록, 고문에 관한 보고서 및 민주화 선언문 등과 같은 편지와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한국 밖으로 몸소 밀반출했다. 적어도 70년 대 중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 60개 이상의 사실 보고서를 써서 한국에 있는 여러 선교사 모임에 배포했다. 사실 보고서(Fact sheet)와 정보다발은 한국 사람들이 쓴 진술서와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 「가디언」, 일본 언론 등에서 발췌한 해외기사들을 포함시켰다. 그 정보다발을 가능한 눈에 띄지 않게 평범한 갈색 봉투에 넣은 다음, 연 합 감리회, 장로회, 캐나다 및 다른 나라 출신 선교사들에게 배포했다. 


박정권은 중앙정보부와 몇 사람만이 알고 있던 고문 사실이 어떻게 유출돼 외국 언론에 보도됐는지 알 턱이 없었다. 그러나 결국 이를 알아챈 독재 정권은 월요모임 회원 중 두 명을 추방 했다. 다른 회원들 역시 추방의 위협에 시달렸다. 회원 중 세 명은 자 신들의 한국인 남편이 고문과 투옥을 당함으로써 고통을 받았으며, 월요모임의 모든 회원들은 각양각색으로 통제와 감시를 받았다. 


월요모임이 ‘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밝힌 것은 그야말로 중대한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1975년 4월 인혁당 사건 관계자 여덟 명이 무고로 처형됐다. 월요모임의 오글 박사는 이들의 부인들의 요청에 따라 조사에 착수했다. 그 여덟 사람들이 실제 음모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이유로 선택됐다는 문서를 작성해 발표했다. 


월요모임은 광주민주화운동 때도 여지없이 기지를 발휘했다. 당시 광주에 머물고 있던 포프(Marion Pope, 방매륜)는 광주민주화 운동 진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광주 학살은 이제 한국의 5천 년 역사에서 한 축으로 생각되고 있어 요. 그런 끔찍한 비극이 ‘진보하고 문명화된’ 현대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아요. 만일 제 눈으로 그 광경을 보지 않았다면, 저 역시 여전히 믿지 않았을 거예요."


월요모임 회원이었던 린다 존스는 1975년 시카고로 돌아가 곧바로 ‘아시아교회 인권위원회’를 설립했다. 그녀는 다른 월요모임 회원들 및 한국의 지도자들과 계속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면서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알리고 한국의 민주화투쟁을 지지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아시아교회 인권위원회의 월간지「아시아 인권수호」에 인권투쟁 일지를 계속 실었다. 이 소식지는 한국의 운동권에서 직접 전달된 세계에서 가장 최신의 소식통이었다.「아시아 인권수호」1980년 1, 2월호의 표제는‘한국: 어떤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다’였다.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과 새로운 계엄정부, 그리고 또 다시 재갈 물린 한국 언론 등에 대하여 상세히 보도했다. 1980년 4월 호 ‘긴급’뉴스에서는 한국역사에서 가장 끔직한 고문을 감독한 전두환에 대해 독자들에게 알렸다. 또한 학살에 대한 세부적인 사실들이 서서히 폭로됐다. 사람들은 자신이 목격하고 들은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해외 언론은 학살에 대해 더 자세히 보도했다. 한국 언론 에서는 광주에 대한 소식들이 모두 통제됐기 때문에, 아시아교회인 권위원회에서 린다가 했던 역할은 대단한 것이었다. 끝으로 월요모임 선교사들에 대한 함세웅 신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들은 한국의 인권소식을 국제사회에 알리며 구원자의 역할을 다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인간해방에 있음을 깨달은 이들은, 억울한 죄목으로 목숨을 잃은 인혁당의 여덟 분의 죽음에서 십자가상 예수의 죽음을 확인한 실존의 체험자들이었습니다. 역사 와 현실의 사건 속에서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을 감지한 이들은 참으로 창조적 신앙인들입니다."   『시대를 지킨 양심』 발간사 중

해방을 맞을 당시 이미 대다수의 개신교 신자들은 일제 강점기부터 생겨난 반공주의로 기울어져 있었다. 또한 ‘정교분리’를 천과옥조처럼 여기고 있던 기독교 지도자들이 해방 이후에는 새로운 국가 건설 에 이바지한다는 명분으로 정치에 깊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한국 기독교의 정치개입은 감리회 장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 되면서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기독교가 국교가 아닌 나라에서, 제헌국회를 개회하면서 회순에도 없는 기도로 시작했고 대통령 취임식 역시 기독교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후로 기독교는 정부로부터 교단을 가리지 않고 특혜를 받았고, 권력의 맛에 한껏 심취했다. 


그러나 4·19, 5·16의 두 가지 정치적 격동을 거치면서 기독교는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기독교가 중심 세력이 아니었기 때문 이었다. 하지만 기독교에는 ‘반공’, ‘친미’라는 정치적 자산이 있었다.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권과 기독교는 ‘반공’, ‘친미’라는 동일한 정치적 지향점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 기독교와 박정희 군사정권과의 본격적인 관계는 1965년을 전 후로 한 한일수교회담 반대운동을 겪으면서 시작됐다. 1965년 7월 김재준, 한경직, 함석헌, 강신명, 강원용 등 기독교계 지도자 215명이 성 명을 발표해 한일수교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기독교의 비준반대운동은 대전, 군산, 전주, 이리, 광주, 부산 등 전국으로 확산됐다. 기독교계는 한일수교 반대운동을 통해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한국교회가 3·1운동 당시의 예언자적 목소리를 되찾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의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태도는 베트남 파병을 전후해 바뀌기 시작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미국의 우방 가운데 가장 먼저 대규모 베트남전쟁 파병을 결정했다. 전 사회적으로 반공 의식이 강했던 당시 상황에서 베트남 파병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없었다. 오히려 한국 기독교는 베트남 파병에 대해, 한국전쟁에서 우리 가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우리를 도와준 자유 우방을 돕는 것은 은혜를 되갚는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는 군목, 종군 등의 형식으로 참전 군인들의 참전동기와 반공의식을 더 높이는 데 한 몫을 했다. 이같은 베트남 참전에 대한 기독교계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의도와 일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군사정권 초기 다소 대립적인 관계에 있던 한국 기독교와 정권 사이에는 긴밀한 공감대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경목제도 도입 및 교도소 선교 등 기독교의 선교 활동에 대한 정권의 배려가 이어졌다.


하지만 한국기독교와 군사정권과의 유착이 본격화한 것은 국가 조찬기도회였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한국대학생선교회(Campus Crusader for Christ: 이하 CCC)’설립자 김준곤 목사였다. 김준곤 목사는, 미국 복음전도운동가 빌 브라이트 목사가 1951년에 설립한 국제 CCC의 한국지부를 1958년 11월에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설립했다. CCC의 지향점은‘반공과 복음주의’였고,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적 신학을 바탕으로 개인구원과 전도를 강조했다. CCC의 열성적인 전도는, 국내에 기독청년학생을 대상으로 한 운동이 정착되지 못한 상황에서 기독청년학생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복음주의를 한국기독교계에 확산시키는 주요한 역할을 했다.


CCC 운동이 어느 정도 정착하자, 김준곤 목사는 미국의 국가조찬 기도회를 모방한 조찬기도회를 한국에 도입하는 것을 구상했다. 미국의 국가조찬기도회는 1935년 시애틀에서 기독 실업인들이 시애틀 시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 기도회가 발전한 것으로, 그 성격 자체가 기독교를 매개로 재계와 정계가 자연스럽게 만나는 자 리였다. 김준곤 목사는 먼저 1963년과 64년에 미국 상하원의원 조찬 기도회에 참석하고, 1964년 미국에서 국가조찬기도회와 국회조찬기 도회를 주관하는‘국제기독교지도자협의회(International Christian Leadership)’총무 클리프턴 로빈슨과 미국 국회조찬기도회 지도목사 이자 국제CCC 이사인 하버슨 목사 등의 도움으로 한국에서도 국회조 찬기도회를 개최할 계획을 세웠다. 김준곤 목사는 공화당 의원 박현숙 장로와 정권의 실세였던 김종필 공화당 의장의 도움을 받아, 1965년 2월27일 김종필 의장, 김영삼 민중당 원내총무, 정일권 국무총리 등 20여 명의 국회의원 및 정치인이 참석한 가운데 국회조찬기도회를 열었다. 또한 국회조찬기도회를 정례화 시키기 위해, 여당 총무에 김종필, 야당 총무에 김영삼을 위촉해 기도회 조직을 구성했다. 


김준곤 목사는 국회조찬기도회에 머물지 않고 미국에서처럼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을 초청한 기도회를 구상했다. 국회조찬기도회 여당총무였던 김종필 의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뜻을 타진했고, 이윽고 1966년 3월8일 조선호텔에서 CCC의 주관으로 제1회 대통령조찬기도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한국에서 조찬기도회가 열릴 수 있도록 주 선한 로빈슨과 하버슨을 비롯한 미국 ICL 멤버 5명과 브라운 주한대사, 각국 외국사절, 이효상 국회의장과 정일권 국무총리 등 삼부요인, 김수환 추기경, 노기남 대주교, 한경직, 강신명, 유호준 목사와 길진경 NCC총무 와 김활란, 최태섭 경제인연합회 부회장 등 명실공히 정 부요인들과 가톨릭을 포함한 기독교 대표, 각계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그러나 정작‘대통령조찬기도회’의 주인공인 박정희 대통령 은 참석하지 못했다. 


대통령조찬기도회에 대해 기독교의 예배 정신에 역행하는 불순한 의도의 호화 정치쇼라는 『사상계』의 비판(노홍섭, 『사상계』, 1966. 4)이 있었지만, 교계 대부분은 이 기도회가 정치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인식을 드러내면서 기도회를 옹호하는 평가를 내렸다. 이어 김준곤 목사는 대통령이 참석하는 대통령조찬기도회를 열기 위해 다방면으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첫 기도회를 개최하고 그 이듬해는 열지 못했지만, 드디어 1968년 5월 1일 대통령이 참석한 대통령조찬기도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대통령조찬기도회는 매년 5월 1일에 정례적으로 열리게 됐다. 


대통령조찬기도회가 지속되면서, 개신교 지도자들의 비호 속에 박정희 대통령은 이 기도회를 대내외적으로 자신의 정권과 정책을 정당화시키고 국제적 여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끄는 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유신체제 출범(1972. 10) 후 처음 열린 1973년 제6회 기도회 때는 15개 국가에 초청장을 발송해 외국의 고위 지도자 50여 명을 참석하게 했고, 기도회 당일 저녁에는 국무총리가 외국인 참가자 들을 위한 만찬행사를 마련해 유신체제 출범을 선전하는 자리로 활용 했다. 한편으로 김준곤 목사는 이 기도회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과의 친분을 쌓아 이를 통해 상호 이익을 도모했다. 김준곤 목사가 주관한 엑스플로 74에 대한 정부의 지원 등이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이후 대통령조찬기도회는 1974년 8월 육영수 여사가 서거한 후 1975년에는 열리지 않았으며, 1976년 제 8회부터는 국가조찬기도회로 명칭을 바꾸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해방 후 자발적 운동으로 시작된 한국 기독청년운동은 분열의 시대에 일치를 향해 몸부림친다. 1948년 전국 16개의 전문대, 4년제 대학과 48개의 고등학교 기독학생 대표 128명, 그리고 여러 교단의 목회자, 기독교 연합기관과 YMCA, YWCA 지도자 등 총 150여 명은 서울 YMCA 강당에 모여 ‘대한기독학생회 전국연합회’(KSCF)를 창립했다. KSCF는 1950년부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청년국 간사인 강원룡 목사의 지도를 받으며 발전해 나갔다. 한편 1951년 부산 피난 시절에 황성수 변호사는 광복동교회를 중심으로 주일 낮 기독교 강좌를 개설하면서‘기독학생 신앙동지회’라는 이름의 새로운 학생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1953년 6월 장로회가‘기장’과‘예장’으로 분열되면서 두 세력은 두 번에 걸쳐 기독청년들을 놓고 대결하게 된다. 첫 번째는 1953년 부산 금정산 KSCF 총회 때로, 당시 예장 측은 기독학생운동이 강원룡 목사에 의해 주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파의 후보를 당선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두 번째는 1955년 8월 서울 난지도 KSCF 총회 때로, 전국 각지에서 모인 130여 명의 기독학생들이 정기총회를 위해 회원 등록 보고를 하려는 순간 황성수 변호사 계열의 기독학생 신앙 동지회 학생들이 퇴장했다. 결국 양 진영은 별도로 총회를 개최했고, 이 총회를 계기로 한국의 기독청년운동은 소위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진보진영에서는 민주화와 인권 운동을, 보수진영에서는 복음화운 동을 주도하게 된다. 


난지도 총회 이후인 1955년 10월 ‘세계기독학생운동’(WSCF) 간사 쵸탄(Kyaw Than)의 주선으로 KSCF는 YMCA, YWCA 대표들과 함께 명동 협의회를 갖고, 1957년 7월에 KSCM(Korean Student Christian Movement)을 창설했다. 그리고 이들 진보기독학생 진영은 WSCF의 ‘교회의 생명과 사명’(Life and Mission of the Church, LMC)이라는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LMC 프로그램은 ①성서의 계시와 교회의 역사로부터 얻는 교훈에 근거해 현세에 있어서 교회의 책임을 재고하며, ②현 학생 세대에게 교회의 선교에 대한 기초적인 동기를 새로이, 그리고 적절하게 이해시켜 그들이 교회의 선교 활동에 헌신하게 하며, ③오늘날 교회가 선교활동에 필요로 하는 새로운 역할을 학생들과 젊은 리더들에게 훈련시키고, ④그들이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찾도록 도우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결국 WSCF는 LMC 프로그램을 통해 선교의 근거지가 세계의 어느 특정 지역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 각자의 학생들이 교회에 속해 있고, 그 교회들은 세계를 향한 선교적 교두보로서 기능한다는 점을 깨 우쳐 주었다. WSCF는 한국 기독학생들에게 LMC 프로그램을 전해 주기 위해 1959년과 1960년 아시아 담당자 프랭크 엥겔(Frank Engel)과 미감리회의 학생사업 전문가 제임스 레이니(James T. Laney, 후에 주한미국대사)를 파송했다. 이들의 도움으로 진보 기독학생 진영은 대 학과 사회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실천하는 에큐메니칼운동의 실질적 전위대로서 훈련과 교육을 착실하게 진행해 나갔다. 


LMC 프로그램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것이 ‘한국 기독자교수협의회’(KCFC)를 형성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결국 진보 기독학생 진영은 LMC 프로그램을 통해서 다양한 한국의 진보 기독학생운동 단체들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했으며, 비로소 에큐메니칼 정신에 입각한 교육과 실천운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민주화운동의 기반을 갖추게 된 것이다. 


난지도 총회 이후 학생동지회의 황성수계는‘한국기독학생연맹 ’(IVF)과‘한국대학생선교회’(CCC) 운동으로 이어졌다. 한국 IVF는 1956년 한국의 복음주의 학생운동을 전개하라는 임무를 띠고 국제 IVF로부터 파송 받은 영국 유학생 이정윤이 학생신앙동지회 계열과 연합해 시작됐다. 1956년 8월 전국 대학생 300여 명이 부여에서 제1회 수련회를 가진 후, 서울을 중심으로 몇 대학들, 곧 서울대 사범대, 서울대 공대, 가톨릭대 등에서 성경공부와 아침기도회가 시작됐다. 시작될 때의 명칭은‘한국 복음주의 학생연맹’이었으나, 1959년부터는 한국기독학생연맹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어서 한국 CCC가 1958년 10월에 설립됐다. 초기 CCC는 사영리와 김준곤 목사의 설교를 통한 학원복음화운동에 집중했다. 이후 CCC는 1960년대 중반부터 그들의 역 할을 넓혀 한국 사회 전반에서 보다 복합적인 복음화운동을 시작했다. 


기독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은 대학 YMCA와 학생 YWCA, 그리고 KSCM 등의 진보기독학생 진영이 1964년 2월 12일 ‘일본 기독자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보냄으로 촉발됐다.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공식 입장을 천명한 것이다. 이때부터 진보기독학생들은 본격적으로 사회 문제를 자신들의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복음화운동은 1964년 12월 17개 교단의 대표들이 서울 YMCA 강당 에서‘전국 복음화운동위원회’를 조직하면서 시작됐다. 전국 복음화 운동은, 전국의 200만 신도가 ‘각개의 크리스천은 선교사’라는 자각을 갖고 ‘3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인도하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다. 전국 20여 개 주요 도시와 지역에 지구위원회를 두고 복음화운 동을 추진했다. 당시 전국 복음화운동은 1965년 말까지의 한시적 운동이었으나, 농어촌, 공장, 군부대, 학원 등 각 영역에서 3천만 동포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자는 비전을 심어주었다. 이 전국복음화운동은 몇 년 후 보수 진영 기독학생들에 의해 ‘민족복음화운동’으로 계승 됐다. 


한국사회와 교회가 3선 개헌을 화두로 요동치고 있을 때, 진보 기독학생 진영은 학생사회개발단(학사단) 프로그램을 통해서 새로운 운동방향을 수립했다. 학사단 운동은 1969년 한국기독학생회(KSCM)와 대학 YMCA연맹이 통합되면서 ‘한국을 새롭게’라는 표어를 내세우며 탄생한‘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의 첫 사업의 하나로, 한국 사회 의 구체적인 문제 현장에 하나님의 현존(現存)을 나타내려는 운동이었다. KSCF의 탄생을 위한 작업은 1968년 2월 각 진보 기독학생운동 단체와 기독자교수협의회, 그리고 NCCK 관계자들이 한국기독교운동 정책협의회를 진행하는 도중, KSCM과 학생 YMCA의 통합 의견을 모으는 데서 시작됐다. 학사단 운동은 진보 기독학생들이 현실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으며, 진보기독학생운동은 이 운동을 매개로 현실의 삶과 다소 유리됐던 한계를 극복해 나갔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69년 6월 23일자 「학사단 NEWS」에는 학사단의 발 족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 대학생들은 학문의 상아탑 아래서 창백한 얼굴과 수척한 몸으로써 진리를 탐구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대학생들이 사회를 등 지고 학문의 상아탑 아래서 진리만을 탐구하고 있을 수는 없다. … 오늘의 시대에는 대학에서 학문의 진리를 탐구하면서 그 학문의 진리가 오늘의 사회에 가치가 있는가 또는 그 진리가 오늘의 시대에 적용될 수 있는가를 시행해 보지 않고서는 그 진리를 앞으로 활용할 수가 없 다. 진리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는 언제나 동적인 것으로서 우리 의 삶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학사단은 운동의 첫 해는 문제파악을 위주로 한 접촉, 조사, 경험을 주요 활동으로 정한 문제 발굴의 해(1969년), 2차 년도는 운동을 실질 적으로 전개하고 사회의 여론 형성을 도모하는 문제 고발의 해(1970 년), 3차 년도는 발굴된 사회문제들의 해결을 위해서 기성 사회단체들 이나 교회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하는 자극제의 역할을 하기 위한 문제 해결의 해(1971년)로 선정하고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학사단의 활동은 교회와 사회, 그리고 대학가에 새로운 형태의 학생 선교운동 모델을 제시했고, 기독학생운동이 사회문제와 연결돼 활동하게 되는 운동의 심화 현상을 가져왔다. 기독학생들이 여러 소외지역을 찾아가 현장 경험을 갖게 함으로써 한국사회 현상에 대한 정확하고 현실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게 했고, 사회 현장에서 지역 주민과의 일체감을 느끼게 되면서 학문세계와 사회현장을 연결시키는 작용도 했다. 이에 따라 자선사업 형태의 봉사활동에서 사회와 인간개발 형태의 운동으로 전환이 시도됐고, 그 결과 교회와 학생운동체가 사회개혁활동에 집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더욱이 한국사회의 소외현장인 농촌, 도시, 빈민지대, 공업, 공단지대, 특수산업지역, 공해지역 등의 문제와 대면하고, 그 곳의 사람들과 함께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방안을 토론하는 과정에서, 진보적 기독청년들은 한국사회의 병리를 지역 주민 스스로 해결해 나가는 건전한 사회발전을 모색하게 됐다. 학사단 운동은 자신들의 기본 정신과 자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기독학생으로서 ‘예수의 생’에 동참하는 자라면 우리는 오늘날 희생 적인 사랑과 행동의 결단을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하는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 는 하나님의 역사 혁명 과정에 참여하기 위한 결단이며 정의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이란 값비싼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우리는 문제지역에 들어가 우리 자신이 문제를 해결 해 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한정된 역량을 생각하고 단지 그 속에 구체적으로 문제되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그 문제를 지역주민 스스로가 깨닫게 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보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그 들의 부정적인 사회에 대한 안목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주체로 이끄는 것이며 스스로 지도력을 배우고 그들의 목적을 위해 조직되도록 하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자만을 버리고 그들과 가장 가까운 동료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학사단 활동은 기독학생들의 사고를 획기적 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만들어 냈다. 이전까지 대학생이라는 선택 된 지식인으로서 살았던 자신을 넘어 민중들의 현장에 함께 참여하면 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사랑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느끼기 시작 했고, 빈민, 노동 등의 문제가 단순히 그 자체의 문제일 수 없고 정치, 경제, 사회적 여건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학사단 운동을 통해 기독학생들은 예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삶을 결단할 수 있었고, 현장 경험을 통한 신앙고백 속에서 새로운 기독학생 상을 정립하여 민중의 신학 정립, 대학 민주화, 사회정의 실현, 교회갱신 등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교회의 현 실에 대한 새삼스러운 성찰도 이루어졌다. 1971년 3월 21일 각 교회의 청년회, 대학생회가 중심이 돼 서울지구 교회청년협의회가 창립되는 데, 이 단체의 소식지인 교청회보 ‘광야의 소리’2호에 실린 ‘부활주 일을 맞는 우리의 자세’라는 글에서 청년들의 사회와 교회에 대한 솔직한 속내를 살펴볼 수 있다. 


"솔직히 이야기 하자. 우리는 학원에서 도망쳐 나와 교회로 모여든 패잔병은 아닌가? 왜 교회운동이 학원내 운동보다 못한가? 우리는 아직도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데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은 언론규탄과 교련반대에 앞장서는 학원에 계신다. 사회정의 실현이야말로 바로 교회의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패잔병의 집단이요. 예수를 죽이는 로마병사의 집단이다."

1970년대 우리나라의 심각한 사회문제는 가난의 문제였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이 진행됐고, 그 결과 경제성장 프로젝트는 모든 것에 우선했다. 중화학공업 육성은 경제성장이란 미명하에 엄청난 공해물질을 뿜어내고 쏟아내고 있었다. 공해로 인해 주변 나무와 풀이 죽거나, 사람들에게서 피부병이나 신경통이 발생하는 등 다양한 문제가 일어났다. 


공해 문제에 제일 처음 관심을 가진 단체는 크리스챤 아카데미, YMCA, YWCA, 각 교단의 여신도회 등 기독교 단체였다. 공해에 대한 토론회를 열고 대안을 모색했다. 하지만 공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1982년 한국공해문제연구소(기독교환경운동연대의 전신)를 설립하면서부터이다. 독일 선교단체인 ‘세계를 위한 빵’에서는 환경운동에 써 달라며 한 해에 800만원을 보내왔다. 당시로서는 큰 돈이었고, 이 후원금을 기반으로 최초의 환경단체인 한국공해문제 연구소가 설립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한국의 환경운동은 한국교회가 시작한 셈이다.


한국교회는 1984년부터 6월 첫째주일을 ‘환경주일’로 정해 지키고 있다. 환경주일은 1990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연대하여 전교단으로 확대됐다. 또한 1985년 온산 공해병을 조사, 발표한 일은 놀라운 사건이었다. 온산공단 주변에서 시료를 채취해 일본으로 보내 일본 연구진의 도움으로 밝혀진 온산 공해병은 카드늄 중독이었다. 당시 전 일간지가 사설 등 많은 지면을 할애해 다루었고, 그로 인해 공해 문제는 사회문제로 확대됐다. 온산 공단 공해 사건은 한국사회의 환경운동에 불을 붙였다. 이어서 발생한 구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건은 대규모 반핵반전운동을 형성하게 만들었다. 그 중심에 한국공해문제연구소가 있었고, 한국교회를 견인하고 있었다. 체르노빌 원전 폭발은 연구진의 실수로 발생했고 유럽의 800만 명을 방사능에 피폭시켰다. 이 사건은 유럽 원전 정책에 있어 큰 전환점을 가져왔다. 대부분의 원전 국가들이 원전 신규 건설을 포기한 것이다. 


동강댐 백지화 운동과 지리산댐 백지화 운동은 정부가 국책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포기하는 초유의 결정이 내려졌다. 새만금 방조제 반대운동은 종교인들의 삼보일배로 이어졌다. 문규현신부, 수경스님, 김경일교무, 이희운목사 등 4대 종단 네 명의 성직자는 삼보일배로 새만금에서 서울 국회의사당까지 걸었고, 대단한 감동을 주었다. 갯벌은 농토의 100배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강물을 정화하는 신장과도 같고 바다 생태계의 90%가 어린 시절을 보내는 생명의 보고와도 같은 곳이다. 몇몇 대형교회들은 찬성기도회를 하는 등 적극적 지지를 보냈다. 아직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당시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생명을 지으시고 보전하시고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모든 생명이 제 숨을 평화롭게 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며 꿈이다. 하지만 그 직무를 가장 신성하게 담당해야 할 교회가 생명을 파괴하는 주동자가 돼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었다. 예수는 생명을 살리는 일과 평화로운 세상을 세우는 일을 당신의 중심 사역으로 삼았다. 예수가 평생 목숨 걸고 펼친 하나님 나라 운동은 생명과 평화의 나라 운동이다. 그러므로 생명평화적 가치는 예수의 중심 가치이고 기독교의 핵심이다. 


결국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인 생명과 평화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고통과 신음의 현장에 동참해 생명과 평화의 나라로 바꾸는 일이 기독교의 핵심교리이다. 예수는 늘 현장에 계셨고, 현장의 소리를 경청하셨다. 민중의 소리를 하나님의 소리로 들었던 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감탄하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처음 사명은 동산을 잘 돌보고 지키는 일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을 등지고 탐욕의 길을 따른 인간 삶의 결과, 모든 생명의 숙주인 자연생태계가 파국을 맞고 있다.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생태계의 미래는 없다. 아울러 인류의 미래도 없다.


미국의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 침공 이후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았다. 미국 부시정부는 노골적으로 김정일이 악의 축이라고 말하는 등 북한 침공의 빌미를 만들고 있었다. 한반도의 전쟁은 남북한 모두의 자멸을 의미한다.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여러 종교 진영과 뜻 있는 분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몇몇 사람들이 지리산에서 생명평화순례를 시작했다. 5년에 걸친 생명평화순례는 전국을 돌며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생명평화적 가치를 대중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놀라운 사건이었다. 실로 생명평화적 가치는 예수의 중심 가치였고 기독교의 핵심가치이다. 생명평화적 가치는 이웃 종교의 중심 가치이기도 하며, 시대적 가치이기도 하다. 결국 이 사회의 나아갈 길은 생명평화적 세계관에 있다. 이 논리는 그대로 생명평화운동으로 이어졌다. 


4대강 개발 사업은 많은 국민들의 반대에 불구하고 정부의 일방적인 강행으로 추진됐다. 강은 주변 모든 생명의 터전이다. 강을 초토화 시킬 4대강 개발 사업은 반드시 중단돼야 한다는 것이 생명평화진영의 생각이었다. 종교 환경단체들은 생명의 강 모시기 순례를 진행했다. 100일 동안 진행된 4대강 순례는 5대 종단의 성직자들이 함께 먹고, 자고, 걷고, 기도한 대장정이었다. 5개 종단이 함께, 하나의 사안을 가지고, 그 많은 시간을 먹고 자고 한 일은 세계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다. 이 일은 핵문제와 골프장 문제로 이어져 진행되고 있다. 특히 태안 원유유출 사고에 대한 한국교회의 관심은 각별했다. 참가자의 80%가 기독교도들이었고 전 교회가 생태적 회심을 구하며 동참했다. 한국교회 처음으로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이 공동으로 환경 선언을 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교회는 먹을거리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먹을거리의 오염은 결국 인간 양심의 오염이며, 현대문명의 오염이다. 먹을거리는 이익의 수단으로 전락해 더이상 그 안전성을 담보할 수 없게 됐다. 그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생협운동이다. 기독교환경운동연대는 한국교회와 더불어 생명밥상운동을 전개했다. 건강하고 안전한 먹을 거리를 구하여 소박하게 밥상을 차리고, 음식물 찌꺼기를 남기지 않는 생명평화운동이다. 상당히 좋은 반향을 일으켰고 도전을 주었다. 실제 밥상은 성만찬에 준한 가르침임을 자각하면서 밥상에 대한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유기농산물을 구입하면 유기농사꾼을 살리게 되며, 땅을 살리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그 땅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을 살리게 돼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건강하게 만든다. 


자원순환을 그 토대로 하는 초록가게운동, 창조신앙을 토대로 한 녹색교회운동, 지구온난화 억제를 위한 대중교통 이용하기 운동, 에너지 절약운동과 대안에너지 시설 확충, 사막화 방지를 위한 은총의 숲 조성사업(몽골, 북한), 생태목회자 세미나 등등 다양한 방식의 생명평화운동이 전개돼 왔다. 


기독교는 시대의 어려운 시기마다 깊은 성찰과 고민을 통해 입장을 선언했다. 1973년엔 반독재민주화선언을 했다. 박정희정권의 유신 헌법공포는 장기집권의 수단이었기에, 독재와 맞서 민주화를 선언한 것이다. 이 선언은 독재와 맞서 싸우는 민주진영에 큰 힘을 제공했다. 온갖 구속과 고문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투쟁할 수 있었다. 또한 한국교회는 1988년 평화통일선언을 했고, 이 선언은 노태우 정부와 그 뒤로 이어지는 정부의 통일정책의 중심이 됐다. 그리고 2010년에는 생명평화선언을 했다. 기독교 사회선교 진영은 그 중심 가치를 생명평화에 두고 있으며, 생명평화 담론을 형성하는 일과 교회를 생명 평화적 가치기반 위에 세우는 일을 하고 있다. 생명평화적 가치는 기독교적 가치임과 동시에 시대적 가치이다. 생명평화적 가치에 동의하 는 모든 세력과 연대하여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를 넘어 인간이 지구생명과 소통하고 공존하는 길을 공동으로 모색해야 한다.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는 한국사회와 교회, 그리고 대학의 변혁을 시도하려는 개혁적인 그리스도인 교수들의 단체이다. 이 협의회가 다룬 주제와 그 내용, 선언문과 탄원서 등을 살펴보면, 이 협의회가 단순히 친목이나 학술적 연구의 공유와 발전을 위한 단체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협의회는 기독학생운동, 도시산업선교, 인권운동 등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한국현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의 조직은 YMCA와 YWCA 산하 클럽활동들의 지도교수들을 중심으로 1958년 가을에 시작됐다. 이후 KSCM도 기독자 교수 모임을 시도해 지도위원을 선임하기 시작했다. 이후 이 조직들은 학생들을 지도하면서‘기독교 신앙과 학문의 관계’,‘비기독교 대학에서의 기독교 간증’등의 문제를 다뤘다. 1960년대에는 ‘대학세계’를 연구 주제로 내세우고, 대학공동체의 한 부분인 대학교수들이 기독학생운동에 참여하도록 학생들을 독려했다. 한국기독자교 수협의회의 모임은, 기독학생운동을 담당하던 단체들이 가지고 있었던 ‘어떻게 교수와 학생, 교직원들이 함께 대학 내에서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의 현존을 체험할 것인가’하는 고민에서 시작된 셈이다. 1963년 제1차 협의회가 온양에서 한국학생기독교운동협의회(KSCC) 주최로 열린 이후, 여러 차례의 모임을 통해 1966년 제4회 협의회 기간에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창립총회가 열려 초대회장에 서남동 교수를 선출하면서 정식으로 출범했다. 당시 협의회 간사를 맡았던 정상복 목사는 협의회의 시작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의 시작은 세 가지 동인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한국학생기독교운동의 한 부문으로 시작했고, 국제 에큐메니칼운동을 통한 새로운 사상의 유입과 흐름을 같이 하면서 시작됐으며, 한국사회와 교회의 변혁을 위한 대학 기독 지성인들의 개혁의지가 조직적으로 결집하면서 시작됐다고 생각합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독자교수협의회는, 기독학생운동과 긴밀한 연계를 맺으며 자신들의 신학적 사고를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받는 동시에, 기독학생운동의 이념적 근거를 제공해 주는 중요한 토대가 됐다. 협의회는 유신정권의 독재가 진행되면서 점차 저항적 성격이 강화됐고, 사실상 이 시기 교수들의 조직적 활동을 이끄는 대표적인 조직이었다. 협의회의 성격이 변화된 것은, 1963년 “대학에서의 인간형성”, 1964년 “기독자 대학인의 사명”, 1965년 “한국의 근대화와 대학의 책임”등이었던 협의회 주제들이 1972년“대학의 자율화와 기독자 교수의 사명”, 1975년 “한국의 현실과 기독자 교수”등으로 대학 내의 문제들에서 사회전반을 향한 정치적 의사표현을 포함하는 주제들로 변화된 것에서 살펴볼 수 있다. 결국 협의회는 이어지는 군사 독재정권 하에서 한국의 민주화, 인권, 통일 운동 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서남동, 문동환, 김동길, 안병무, 이문영, 김용준, 서광선, 한완상, 이우정 등 이 시기의 주요 참여 교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더라도, 기독자교수협의회가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교수라는 직업의 특성상 학술발표와 강연을 주된 활동으로 삼았지만, 유신이라는 독특한 정치사회적 상황 아래에서 성명서나 진정서를 통해 직접적인 정치활동도 전개했다. 


기독자교수협의회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71년부터이다. 그 전까지는 매년 한차례의 협의회를 갖는 수준이었던 것이, 조금 더 자주 정기적인 활동을 하는 것으로 변화된 것이다. 제일 먼저 한 사업은 월례강좌로, 1년 동안‘기독자의 정체성’이라는 주제로 각 분야의 교수들이 발제하고 함께 토론하는 자리를 가졌다. 강좌를 마친 후에는 함께 저녁식사를 했는데, 이것은 나중에 교수들의 해직사태 이후 각 가정의 월례회로 이어졌다. 활동에 필요한 자금은 미국 연합고등교육재단에 현영학 교수와 서광선 교수가 신청한 프로젝트비와 회비로 충당했고, 협의회를 개최할 때에는 각 대학의 총장들이 협력해 주었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에서 유신체제 아래 첫 번째 학생 데모가 발생했고, 이때 KSCF의 학생들이 다수 구속됐다. 기독자교수협의회는 12월 3일 “구속학생 석방을 위한 진정서”를 대통령과 관계부처 장관 에게 발송하면서 조직적으로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움직임에 관계하기 시작했다. 이후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또 다시 김동길 교수와 김찬국 교수, KSCF 실무자와 학생들이 대거 구속되면서 석방운동에 매진했고, 석방 환영회가 새문안교회에서 열렸을 때에는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가 중앙정보부에서 당한 의문의 죽음과 관련, 사인을 밝힐 것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976년 유신체제에 저항하던 많은 교수들이 재임용에서 탈락되는 사건이 발생 했다. 여기에는 기독자교수 협의회를 해체시키려는 당시 정권의 의도가 반영돼 있었다. 협의회는 학생운동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교회, 학생운동 단체와도 연대하고 있었고, 국제적인 네트워크도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군사독재정권을 유지하는 데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 당시 지성인 비판조직이 협의회 이외에는 뚜렷이 존재하지 않았고, 비기독교인 교수들과도 연대하며 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위협적으로 여겨졌다. 그런 상황 속에서 기독자교수협의회는 1978 년 해직교수협의회 결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고, 양 협의회의 회원 상당수가 중복되고 있었다. 해직교수협의회의 결성은, 지식인들의 저 항운동이 대학사회를 벗어난 조건 아래에서도 계속되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었고, 교수들의 양심에 근거한 운동이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전개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해직 이후 문동환 교수가 이문영, 안병무, 서남동, 이우정 교수,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고난 받는 사람들의 교회의 새로운 모델이 된 갈릴리교회가 설립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