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CCK, 백년의 발자취


초기 내한선교사들의 에큐메니칼 운동

 

한국의 기독교 선교는 미북감리회 매클레이 선교사의 방한(1884)과 미북장로회 알렌 선교사의 미공사관 공의 자격 입국(1884) 이래, 안수 받은 선교사인 미북장로회의 언더우드, 미북감리회의 아펜젤러가 내한(1885)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호주장로회(1889), 영국성공회(1890), 미남장로회(1892), 미남감리회(1895), 캐나다장로회(1898)가 순차적으로 한국선교를 개시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성결교회로 발전하는 동양선교회(1907)를 비롯해 구세군(1908), 오순절교회(1928), 복음교회(1935) 등의 선교가 이루어졌다.

 

침례교는 1895년 미국 침례교 계통의 선교단체인 엘라딩 기념선교회(Ella Thing Memorial Mission)가 충남 공주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선교회가 1901년 사업을 중단하게 되자, 1889년부터 한국 순회선교회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캐나다인 독립선교사 펜윅이 그 조직을 이어받게 되었다. 보다 체계적인 선교회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한 펜윅은 1906년 대한기독교회(大韓基督敎會)라는 독자적인 교회조직을 수립하게 되는데, 바로 이 교회가 오늘 한국 침례교회의 모체가 된다.

 

선교 초기, 이러한 다국적, 다교파의 기독교 선교지형은 선교현장에서의 경쟁과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지만, 이내 불필요한 경쟁을 극복하고 협력과 일치를 위해 구체적으로 노력하자는 각성과 공감이 전향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각 교파 선교회 간의 제휴와 협력, 일치의 노력

 

각 교파 선교회 간의 제휴와 협력, 일치의 노력은 장로교 선교회에서 우선적으로 이루어졌다. 1889년 미북장로회와 호주장로회 간에 ‘장로교선교부연합공의회’(United Council of Presbyterian Missions)를 시작으로, 1892년 미남장로회 한국선교 개시 이후인 1893년을 기해 ‘장로교회 치리기구 준행 선교부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가 조직되었다.

 

이후 1898년, 네 개의 내한선교회(미국 남북장로회, 호주장로회, 캐나다장로회)가 참여한 ‘장로교선교부공의회’가 조직되었으며, 1901년부터는 한국인 교회지도자들도 공의회 회원으로 참여한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1901-1907)가 시작되었다. [장로교의 공의회 시대는 1893년부터 1900년까지의 ‘선교사공의회 시기’(제1기), 1901년부터 1906년까지의 ‘합동공의회 시기’(제2기)로 나뉜다, 차재명 편,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권』 조선기독교창문사, 1928.145.] 이 조직은 1907년 한국 최초의 장로교 단일조직인 독노회가 조직되기 전까지 한국장로교회의 치리적 최고기구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네 개 장로회 선교부의 연합과 일치는 이후 전개되는 한국 기독교 연합운동의 기초를 제공했다.

 

☞ 장로회선교사공의회 소속 선교사들이 ‘하나의 한국교회’ 조직을 목적으로 1897년 서울에서 선교사 회의를 열었다. [출처 : 기독공보]


이렇게 장로회 선교부들간의 일치와 협력이 전개되는 동안, 비록 장로교와 감리교에 국한되기는 했지만, 교파를 넘어선 선교협력과 일치의 모색도 병행되었다. 미국 북감리회와 남감리회의 선교부가 장로회 네 개 선교부와 연합사업에 동참하면서 1905년 3월 19일 ‘재한복음주의선교부통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조직하였다. 이 공의회는 단순한 협의체를 넘어서서 교회의 완전한 통합, 단일교회 수립을 목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일치와 단일교회 수립을 향한 노력은 교리적인 차원이 아닌 정치적인 차원, 바로 각 교파 본국 선교본부의 비협조, 일부 내한선교사들의 반대,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여력과 열의 부족 등으로 인해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재한복음주의선교부통합공의회’는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가 출범하는 1912년, 공의체제(General Council)에서 연합체(Federal Council)로 그 성격이 변화되었다.

 

‘재한복음주의선교부연합공의회’는 기독교 선교의 효율성과 수월성을 극대화하며 교파 간 연합을 진작키 위해 정기적인 회의를 개최하며, 선교지역분할, 성서번역(성서공회), 문서출판(기독교서회), 연합 찬송가와 정기간행물 발간(『기독신보』, The Korea Mission Field), 교육과 으료분야의 협력(숭실학교, 세브란스병원 등) 등을 통해 각 교파 기독교의 역량을 통합해 한국사회의 근대화와 복음 선교의 수준과 영향력을 한층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참고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1권』 2019, 8-11]

재한복음주의선교부연합공의회는 한국 기독교의 첫 교파연합기구였다. 그러나 이는 선교사들만의 협의체였다. 1916년 본 공의회에서는 한국인 교회지도자들의 참여가 필요함을 결의했고, 1917년 6월 21일 평양에서 장로회 대표 네 명, 남북감리회 대표 일곱 명, 이상 11인의 위원이 모여 장ㆍ감 협의체를 조직하기로 합의했다. 이를 통해 이듬해 3월 26일 경성YMCA회관에서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The Korean Church Federal Council, KCFC)가 창립되었다.

 

본 창립 협의회에서 회장 김필수 목사(장로교), 부회장 노블 선교사(북감리회), 서기 오기선 목사(남감리회), 부서기 함태영 목사(장로교)가 임명되었다. (『朝鮮耶蘇敎長監聯合協議會 第一回會錄』, 1918.1.)

 

본 협의회는 ‘조선예수교장로회’, ‘북감리회 조선연회’, ‘남감리회 조선연회’ 이상 세 개의 교파 대표들로 구성되었으며, 본 협의회의 창립 목적과 권한은 다음과 같이 명시되었다.


“두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정신을 증진케 하며 친목하는 정의(情誼)를 돈독케 함. 양 교회가 홀로 행하기 어려운(難) 일이 있는 경우에는 합력하여 행하기를 힘써 도모함. 두 교회가 교역상 경력과 지식을 서로 교환하여 그리스도의 사업을 확장함에 도움이 있게 함.”

“본 회는 두 교회의 신경과 정치와 예배모범 등 일에 대하여서는 관섭치 못함.”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는 기존의 선교사 중심의 선교부공의회의 차원을 넘어서서 한국인 교회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 개신교의 두 교파인 장로회와 감리회가 교회차원에서 조직한 첫 협의체였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참고로 1918년, 제1회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 회의록 중 회장인 김필수 목사의 서언은 아래와 같다.

 

緖言(셔언)

主(쥬) 그리스도의 祝福(축복)ᄒᆞ심이 今日(금일)조선교회에 와셔 成就(성ᄎᆔ)됨을 眞誠感謝(진셩감샤)ᄒᆞ노라

一天父(텬부)의 衆子(붓ᄋᆞ)를 一救主(구쥬)의 肢軆(지테)로써 敎派(교파)를 分立(분립)ᄒᆞᆷ은 但時機(다만시긔)와 場所(쟝소)에 依(의)하야 形式(형식)에 不過(불과)ᄒᆞ거ᄂᆞᆯ ᄯᅡ라셔 精神界(정신계)ᄭᆞ지 影響(영향)이 혹 잇슨즉 瓦相間(서로ᄉᆞ이)에 所感(소감)이 不無(업지못)ᄒᆞ더니 現今(현금)에 長老監理兩敎會(쟝로감리량교회)가 此(이)ᄅᆞᆯ 顧念(고념)ᄒᆞ야 一軆的聯合機關(톄뎍련합긔관)을 組織(조직)ᄒᆞ니 卽張監聯合協議會(곳쟝감련합협의회)가 是也(이거시)라

主(쥬)의 祝禱(츅도) 「彼等(뎌희)로 ᄒᆞ야곰 다 一(하나)이 되게ᄒᆞ샤 父(아바지)ᄭᅴ셔 我內(내안)에게시고 我(내)가 父(아바지) 內」(안)에 在(잇)ᄂᆞᆫ 것 ᄀᆞᆺ치 彼等(뎌희)도 我等(우리)의 內(안)에 在(잇)게ᄒᆞ샤 世上(셰상)이 父(아바지)ᄭᅴ셔 我(나)ᄅᆞᆯ ᄂᆡ신거슬 信(밋)게 ᄒᆞᄋᆞᆸ소셔」(요 17장 廿一)ᄒᆞ신 此(이) 聖訓(셩훈)의 恩惠(은혜)와 平康(평강)이 本會中(본회즁)에 恒在(항샹잇슬지)어다. 아멘.

1918년 5월 京城(경성)에서 金弼秀(김필수)


【참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1권』 2019, 10-11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Korean National Christian Council, KNCC) 창립하다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의 창설 이후에도 선교사들의 독자적인 연합기구인 재한복음주의선교사연합공의회는 병존했다. 장감연합협의회에서는 1922년 10월 26일 제6회 회의에서 두 연합기구의 통합 건에 대해 의논했으며, 이듬해 3월 장감연합협의회를 해산하고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Korean National Christian Council, KNCC)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1924년 9월 24일, 서울의 새문안교회에서 첫 창립회의가 열렸고, 초대회장에 차재명 목사가 선출되었다. 본 공의회의 회원으로는 한국교회의 각 교파와 선교부, 기독교연합기관과 단체들이 참여함으로써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구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연합공의회 폐지약속을 지키지 않고 별도의 선교부 연합공의회를 존속시켰다.


[제1회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임원 명단]

      회장 : 車載明(차재명)

      부회장 : 金鍾宇(김종우)

      서기 : 洪淳倬(홍순탁)

      부서기 : 洪鍾弼(홍종필)

      회계 : 金聖鐸(김성탁)

      통계서기 : 吳華英(오화영)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를 계승하다.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의 재정이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 인수인계 되었었으며(【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12회 회의록, 67-73쪽】),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제4회 총회 회의록부터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의 뒤를 잇는다고 밝혔다.

 

“연혁 : 본회의 전신인 장감연합협의회는 1918년 3월 26일에 경성[서울]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내에서 제1회로 개회하여 1922년 10월 26일에 신문내예배당[새문안교회]에서 제6회까지 모였었다. 그리고 1924년부터는 협회를 예수교연합공의회로 변경조직하게 되었는데 협의회 회장과 서기의 성명은 왼쪽과 같다.”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1권】 143쪽


# 창립회의록의 부재, 공의회 규칙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창립회록은 안타깝게도 현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연합공의회 창립 초기에 확정된 규칙은 1924년 당시 연합공의회 설립을 보도한 「기독신보」의 1923년 10월 10일자 기사와 1979년 전택부가 편집한 『한국에큐메니칼 운동사』의 부록에 소개된 1924년 공의회 규칙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출범 이전에 창립 교단인 조선예수교장로회가 1923년 제12회 총회를 통해서 보고한 규칙의 전문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12회 회의록, 67-73쪽】



 



# 에큐메니칼 연대와 협력을 목적으로 함

 

위를 통해 확인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규칙에서는 공의회의 출범의 목적과 권한을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뎨일쟝 뎨이됴, 본회의 목뎍

一. 협동ᄒᆞ야 복음을 선젼ᄒᆞᆷ.

二. 협동ᄒᆞ야 샤회도덕의 향상을 도모ᄒᆞᆷ.

三. 협동ᄒᆞ야 긔독교 문화를 보급케ᄒᆞᆷ.

뎨이쟝 뎨ᄉᆞ됴

본회의 권한은 연합 각 단톄의 뎨의(提議)를 밧어 처리ᄒᆞ며 본회에서 결의ᄒᆞᆫ 바는 연합 각 단톄에 맛겨 실ᄒᆡᆼ케 ᄒᆞᆷ.(신경과 정치와 레ᄇᆡ 모범과 규측은 간여치 못ᄒᆞᆷ)


위의 목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전의 장감연합협의회의 단순한 친목과 협력의 차원을 넘어서서 에큐메니칼 연대와 협력을 통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명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복음선전”, “사회도덕의 향상”, “기독교 문화의 보급”이다. 이는 KNCC가 그 출범과 더불어 기독교연합기구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처음으로 구체화하고 명시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 아닐 수 없다.

 

# 각자의 신경, 정치, 예배의식, 규칙 등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못함

 

아울러 본 회의 권한에서 회원교파와 단체 간의 신경, 정치, 예배의식, 규칙 등에 대해서는 상호 간섭하지 못함을 명시하고 있다.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출범 당시 참가한 회원교파와 단체들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조선미감리회, 조선 남감리회, 장로회 네 단체(미 남북, 호주, 캐나다 선교회), 감리회 두 단체(미감리, 남감리 선교회), 영국 성서공회, 조선기독교청년회 등이었다.

 

# 회의록의 유실, 1929년 ‘대회’와 제5회 총회와의 관계

 

당시의 회의록에는 1924년부터 1931년까지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1932년부터 1937년까지는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라고 개칭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 명칭의 변경이며 조직 변경 같은 변화는 없었다. 현재 조선예수교(기독교)연합공의회 회의록 중에서 제1회(1924년), 제3회(1926년), 제5회(1928년) 총회 회의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1929년 총회 직전에 존 모트 방문으로 ‘대회’가 열렸고, 이 대회가 제5회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1권】 15쪽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1925년 제2회 총회 때 감리교 선교부의 로라 에드워즈(Laura Emma Edwards, 애도시), 감리교 선교부의 앨리스 아펜젤러(Alice R. Appenzeller, 아편설라, ‘미스 아편셜나’)와 앨시어 월터(Althea J. Walter, 우왈태, 진아주머니, ‘미스 월터’) 등 3명의 여성 선교사가 총대로 참여하였다.

 

한국 여성은 1927년 이후부터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 1927년 제4회 총회 때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대표로 유각경이 최초로 참가 
  • 1928년 제5회 총회 때에는 부서기로 활동 
  • 1929년 제6회 총회에는 김활란이 유각경의 뒤를 이어서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대표로 참가하여 서기가 되었다.


그렇지만 유각경과 김활란이 교회의 대표로 참가한 것이 아니라 초교파 기독교 기관의 대표로 참가했다는 점에서 당시 한국교회 안에서의 여성 지도력은 한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서 여성의 지위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를 통해서 향상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1930년 제7회 총회에서 헌법 제3장의 제7조 ‘회원’에 관한 조항에서 “단 각 연합단체에서 대표를 선정할 시에 남녀평신도 중으로도 택함을 득함”이라는 표현을 삽입하도록 헌법을 개정하면서 여성의 활동을 보장하였다.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1권】 260, 268쪽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1권】 260쪽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1권】 268쪽

#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예루살렘 대회 참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1928년 국제선교협의회 예루살렘 대회에 대표를 파송하였다. 이 대회는 한국교회가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에 명실공히 참가한 첫 번째 대회였다는 데 그 의미가 깊다고 본다. 원래 10명을 예상했지만 6명(양주삼, 신흥우, 김활란, 정인과, 윌리엄 노블, 사무엘 모펫)으로 장로교 2명, 감리교 4명이었다.

 

# 농촌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대표들은 예루살렘 대회를 통해서 농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대회 참가 이후 귀국길에 농촌선교의 모범사례 답사를 위해 농업국가로 유명한 덴마크를 방문했다. 약소국 덴마크 농촌운동의 성공 사례는 당시 식민지였던 한국의 교회지도자의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도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예루살렘 대회에 참가했던 대표들은 귀국한 뒤 각자가 소속한 단체와 교파에 농촌부를 설치하고 농촌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의 한국기독교여자청년회연합회, 장로교회, 감리교회가 농촌운동을 시작하였고, 연합기구로서 농촌사업협동위원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이후에 일제의 방해로 위축되다가 폐쇄되면서 좌절되었다. 한국교회의 농촌운동은 식민정부의 억압, 다른 한편으로는 농촌선교를 포함한 사회선교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결국 용두사미격으로 끝나고 말았다.

“기독교가 사회적 봉사를 실행하기 위하여 양로원, 병원 등을 설립하기로 권면할 것이며 … 공장에서 노동자와 같이 일하며,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공장과 셋집을 준비하며, 기타 전도사업에 필요한 일들을 권면할 것.”

 

위의 글은 조선장감연합협의회가 1920년 4차 총회에서 두 교파의 공통된 사회선교의 의지를 피력한 내용 중 일부이다. 이렇게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기구를 통해 교파와 교회 중심적 선교의 한계를 극복하고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과 실천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을 교파 간 연대와 연합운동을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천명하고 있다.

 

더욱이 3ㆍ1운동 이후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 다양한 사상적 흐름이 유입되면서 교회 내 학생 청년들이 반기독교운동에 가담하는 과정을 겪으며, 한국기독교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실천에 대한 도전과 자극을 받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도 조직 내에 사회부를 두고 각 교파와 기독교 단체들의 사업을 지원했으며, 1932년 제9회 회의에서 「사회신조」를 발표함으로써 더욱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의 방향을 설정하게 되었다. 그 내용을 현대어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류를 형제로 믿으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사회의 기초적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일절(一切)의 유물교육, 유물사상, 계급적 투쟁, 혁명수단에 의한 사회개조와 반동적 강압에 반대하고, 더 나아가 기독교 전도와 교육 및 사회사업을 확장하여 그리스도 속죄의 은사를 받고 갱생된 인격자로 사회의 중견이 되어 사회조직 중에 기독교 정신이 활약케 하고 모든 재산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수탁물(受託物)로 알아 하나님과 사람을 위하여 공헌할 것으로 믿는 이들이다. 이상의 이상에 근거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인류의 권리와 기회평균(機會平均)

2. 인류 및 민족의 무차별 대우

3. 혼인의 신성함과 정조(貞操)에 남녀동등 책임

4. 아동의 인격존중과 소년노동의 금지

5. 여자의 교육 및 지위 개선

6. 공창 폐지 및 금주 촉진

7. 노동자 교육 및 노동시간 축소

8. 생산 및 소비에 관한 협동조합의 장려

9. 용인(傭人), 피용인(被傭人) 간에 협동조합기관의 설치

10. 소득세 및 상속세의 고율적 누진법 제정

11. 최저임금법, 소작법, 사회보험법의 제정

12. 일요일 공휴법의 제정 및 보건에 관한 입법과 시설(施設)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채택한 「사회신조」는 1928년 일본기독교연맹의 「사회신조」와 유사하지만, 당대 한국사회의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을 표명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당시 반기독교운동을 전개하던 사회주의 진영의 혁명론에 대해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인간의 평등과 인권, 여성과 아동,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를 중심으로 구체적인 해법과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특별히 공창폐지, 노동환경 개선, 협동조합, 세금, 임금, 소작법, 사회보험, 일요일 공휴일 보장 등의 구체적인 대안과 방법론 등을 제시함으로써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사회개혁과 변화의 구체적인 실천을 모색하고자 했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3ㆍ1운동 이후 한국사회와 교계에서 활발히 전개되던 농촌운동, 절제운동, 기독교진흥운동, 기독교학생운동 등의 다양한 사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YMCA, YWCA, 감리교와 장로교의 사회운동기관들을 조율하며, 복음전도 사업 이외의 당대 사회현안에 대한 구체적 대응과 대안 모색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아울러 1926년 일제당국이 종교를 통제하기 위해 ‘종교법안’을 발의했을 때에도 한국교회와 기독교단체들을 대표해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주체성을 보호하기 위한 적극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정체성은 일제말기 해산의 아픔을 겪고, 한동안 역사가 단절되었지만, 해방이후 새롭게 재건된 이후에도 그 정신과 목적을 계승하며 한국사회의 근대화와 민주화, 인권과 통일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사회운동을 가능케 한 역사적,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참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1권』 2019, 12-14.

당시 한국교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당연히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을 주도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교회는 내적으로 갈등이 점차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장로교회는 내부적으로 보수와 진보의 갈등을 겪었으며 이러한 갈등은 ‘아빙돈 주석사건’으로 인하여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간의 갈등으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로교회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하였다. 1933년 장로교에서 공의회에 헌법 개정안을 제안하였는데, 그 내용은 공의회의 회원을 교파 단체로만 할 것이며, 각 교파 단체의 대표를 최다 5인으로 축소하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이 제안에 대해서 공의회는 1933년 제10회 총회에서 논의하였는데 당시 규칙부에서는 아래와 같이 보고하였다.

 

규측부위원 보고

본부결의상항을 여좌히 보고함

一, 본부조직, 부장 강병주, 서기 라시산

二, 장로회 총회에서 제의한 본 공의회를 교파단체로 하자는 것은, 세계련합공의회규측이 비교파 단체로 가입케 한것이오며 우리 공의회도 세계련합공의회와 관계를 맷는 이상 비교파 단체를 가입한 것이 임이 잘된줄 아오며

三, 장로회 총회에서 규측 제7조를 개정하야 대표자수를 5인으로 축소하자는 것은 5인만으로는 너무나 소수인고로 장감양교파에서는 각 10인식으로 하고 각 선교회의 각 단체에서는 반수를 감하되 3인은 2인으로하고 1인은 그냥 1인 그대로 함이 가한줄 아나이다.


 

이상의 보고 역시 본 규칙이 통과되기까지 1년간 유안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장로회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자신들의 제안이 부결되었다고 판단하였고, 곧바로 1934년 9월 장로교 제23회 총회에 그것을 보고하였다.

 

공의회는 1934년 제11회 총회에서 1년간 유안되었던 규칙부 보고를 채용하고 가결하였으며, 사실상 장로교의 제안이 부결된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로교회는 1935년 제24회 총회에서 “평북로회장의 련합공의회 해소건은 기각하고 평서로회장의 헌의한 련합공의회 탈퇴건에 대하야는 본 총회로서는 탈퇴함이 가하오며”라고 결의한 것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4회 회의록】 52쪽

 

이로써 1934년 제11회 총회에 다섯 명의 대표만 파송했던 장로교는 1935년 이후에는 대표를 아예 보내지 않았다.

 

김인서는 장로교회의 연합공의회 탈퇴를 지켜보는 가운데 한국교회의 유일한 연합기관의 운명이 다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연합공의회가 해소될 때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예상하며 통탄했다.

 

“직접영향은 公級會 경영중인 동경교회가 분열될 것이오 주일학교연합회도 장차 분립될지 모을것이며 장ㆍ감양파간의 파쟁은 일층노골화할 것이다. 연합파열의 책임이 장로교에 잇는가 감리교회에 잇는가 장ㆍ감양교회 속에 숨어 있는 政黨的某團某會의 ᄲᅮ리 깁흔 파쟁에서 양조(釀造)되는가 그 책임이 장로교회에 잇든지 감리교에 잇든지 某團係某會人의게 잇든지 불문하고 오십주년기념으로 장ㆍ감연합공의회를 ᄭᅢ여버린다면 조선 사람은 합할 수 없는 못된 민족이란 것을 천하 교회에 증명하고도 남음이 잇슬 것이다.”


장로교 총회의 탈퇴 결정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연합공의회를 교파들만의 모임으로 하기를 원했으며, 나아가 장로교총회의 규모에 비해 총대수가 적은 것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급기야 연합공의회의 탈퇴라는 극단에 이르게 된 것이다. 연합운동의 위기와 더불어 교파주의가 극성을 부린 것이다.

 

이후에 장로교에서는 1936년 제25회 장로교 총회에서 다시 공의회에 가입하자는 헌의가 있었으나 1년간 유안하였고, 1937년 제26회 장로교 총회에서 “작년에 유안하였던 연합공의회에 재가입건은 총회로써 불필요로 인정하고 탈퇴한지 불과 2년만에 다시 가입할수 없사오며(양주삼 씨의 설명을 듣고 토의한 후 가입하지 않기로 가결함)”라고 결정하면서 재가입의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6회 회의록】 61쪽

 

이후에도 공의회측은 교섭위원을 선정하여 장로교가 다시 공의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결국 장로교가 다시 공의회에 합류하지 못한 상황에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 서로 하나가 되어 일제의 압력에 저항해도 모자를 판에 서로 자신의 주장만 고수하다가 해산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1936년 도쿄에서 일본 군벌이 소위 2ㆍ26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때 한몫을 단단히 한 미나미 지로(南次郞)란 사람이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한반도를 중국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는 데 광분했다. 그는 우선 사이토 마고토 전 총독의 소위 문화정책을 내선일체와 국체명징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았고, 전임자 우가키 가스시게(宇垣一成) 총독의 소위 자력갱생의 경제정책을 대륙침략을 위한 식량과 군수물자 보급정책의 바탕으로 삼았다.

 

드디어 1937년 7월을 기하여 일본 관동군이 만주 노구교(蘆溝橋) 사건을 트집잡아 중일전쟁을 도발시켰다. 그해 10월 2일을 기하여 다시 미나미 총독은 한국민에게 소위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라는 것을 발표해 가지고 모든 학교와 사회단체와 교회 집회에까지 이를 강요했다. 1938년 2월에는 육군특별지원병 제도를 발표해서 한국 학생들과 청소년들을 강제로 전쟁에 징발했으며, 그해 8월에는 새로운 조선교육령을 발표하여 학교에서는 물론 일반 사회에서까지 우리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했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는 한국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했으며, 1940년 2월에는 소위 창씨개명(創氏改名)령을 내려 한국인이 모조리 일본인 성과 이름을 갖게 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는 〈동아일보〉ㆍ〈조선일보〉 두 신문을 폐간했으며, 러시아 공산당ㆍ이탈리아 흑의단(黑衣團)ㆍ독일 나치스당에 해당하는 ‘국민운동총연맹’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1941년 3월에는 사상범 예비구금령을 공포함으로써 소위 반일 친미분자ㆍ요시찰인ㆍ선교사들을 검거했다. 그해 12월에는 하와이 진주만을 불시 습격하여 미일전쟁을 도발했고, 1942년 10월에는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모조리 검거했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는 한국 민족에게는 실로 최악의 시기였다. 이때의 한국 교회사는 굴곡과 유린의 역사요, 순교와 배교의 사건이 엇갈린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연합공의회는 1936년 9월 22일 서울 예수교서회 회의실에서 제13회 총회를 소집했다. 이 총회에서 1938년 10월 중국 항저우에서 모이게 될 IMC선교대회에 한국 대표 7인을 파송할 것을 결의했으나 실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시국에 관하여 회장 양주삼 박사는 ‘본 회의 장래’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본회의 장래]

1918년 3월 경성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장감연합협의회를 처음으로 조직하였는데, 본인이 그 당시에 회원의 1인으로 참여하는 영광을 가졋엇습니다.

그 회는 제6회로 끗맛치고 1924년에 장감 양 교파 외에 각 선교사회와 기독교사업단체들을 포함하야 기독교연합공의회를조직하엿섯는데, 금번이 제13회로 모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금번 회집이 연합공의회로는 최종인 것 같으니, 그것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성지로 인함인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함인지 모르거니와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던지 이용하야 하나님의 뜻이 실행됨으로 인간의게 유익을 끼치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간에 본 공의회에서 대회 본부에 매년 미화 25불씩 부송하는 부담금이 잇는데, 1934년도부터 미납이라함으로 금년에 1935년과 1936년도까지 전부 납부한 것은 회계가 보고하려니와 본회가 대회에 대한 의무는 그것으로써 행하였습니다.

우리 공회로부터 다년간 전력하야 동경 등지에 유하는 조선인의게 선교하는 사업과 조선 내에서 신문지와 라듸오 방송국을 통하야 전도하는 등사를 어떠케하면 계속하며, 또 어떠케 하면 우리 각 교회 단체가 계속적으로 연합할는지 금번 이 총회에서 결정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여러 회원들께서 우으로 내려오는 지혜와 각자가 얻은 바 경험을 가지고 잘 처리하시와 실패 중에서 성공이 잇게 하시기를 빌고 바랍니다. 여러분의 건강을 위하야 기도하며 또 조선에 기독교 운동이 날노 진보되여 세상에 천국이 속히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1936년 9월 22일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회장 양주삼

 

이상 회장의 발언을 통하여 당시 상황과 교회 형편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으며, 그 뒤의 연합공의회의 역사를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양주삼 회장의 말과 같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성지로 인함인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함인지” 연합공의회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되자, 1938년 5월 8일 ‘조선기독교연합회’라는 새 단체가 등장하게 됐다. 이것은 국내의 일본인 교회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이 시국을 극복하자면 내선(內鮮)교회가 일치단결해야 된다”는 명분 아래 조직된 것이다. “본회는 기독교의 단결을 도모하고 상호협조하여 기독교 전도의 효과를 올려, 성실된 황국신민으로서 보국함을 목적으로 한다”라는 목적 조항을 포함한 11조로 된 간단한 회칙을 통과시킨 뒤, 위원장에 일본교회의 니와 세이지로(丹羽淸次郞), 부위원장에 아키쓰키(秋月)ㆍ정춘수(鄭春洙) 등이 당선되었다.

 

그 결과 한국 교회는 법적으로는 일본 교단 산하에 예속되었고, 이어 6월 7일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실행위원회는 “조선에 있는 기독교청년회는 연합단체로서 일본기독교청년회동맹에 가맹하는 동시에, 조선기독교청년회가 종래 가맹했던 세계기독교청년회동맹과 세계학생기독교연맹에서 탈퇴한다. 또한 이 청년회는 북미기독교청년회동맹과의 관계를 끊고, 금후 외국과의 관계는 전적으로 일본 기독교청년회동맹에서 이를 관장한다”는 것으로 낙착되고 말았다. 이는 비록 자발적인 결의인 양 형식화되었지만, 일제의 강압으로 된 것은 물론이며, 이로써 일제는 본래의 야욕을 완전히 이룬 셈이다.

 

그러나 이때 한국 교회가 외부 세계와 연락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일례를 들면 에든버러 계속위원회(Continuation Committee)는 몇 사람의 동양인을 연락위원으로 위촉한 바 있는데, 그중 한국인으로는 백낙준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다른 세계대회에 참석차 출국했다가 1937년 에든버러 회의와 옥스퍼드 회의에 한국 연락위원 자격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이 회는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회의로서 전 유럽 교회가 어떻게 하면 나치즘과 파시즘을 막아내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만약 세계 교회가 전체주의를 막아낼 만한 힘이 있었다면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것이 백낙준 박사의 솔직한 고백이다.

 

해산되기 직전인 1937년까지 가맹된 회원 교파와 단체들은 조선야소교장로회, 기독교조선감리회, 북장로선교사회, 북감리선교사회, 남감리선교사회, 캐나다연합선교사회, 호장로선교사회, 재일본캐나다장로교선교사회, 영국성서공회, 조선기독교청년회,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조선예수교서회,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 등이었다. [『朝鮮耶蘇敎聯合公議會 第十四回會錄』, 1937.8-10. ; 전택부, 『한국에큐메니칼 운동사』, 251-252에서 재인용.]

 

【참고】 전택부, 『한국에큐메니칼 운동사』, 홍성사, 2017, 154-158쪽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과 함께 광복이 찾아왔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국교회는 무너진 교회 조직의 재건, 훼손된 신앙의 회복, 교회 내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에 씨름해야 했다.

 

해방 직후 한국 내에 유일하게 존재했던 교회조직은 1945년 7월 일본의 종교통합정책에 의해 강압적으로 만들어진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었다. 이 교단의 설립에 참여했던 교계지도자들은 해방 직후 남부대회를 개최(1945년 9월 8일, 새문안교회)하고 이 조직을 그대로 살려나가고자 했다.

 

이들은 첫째, 비록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이왕에 교파를 초월한 하나의 교단이 이루어진 만큼 그것을 존속시키는 것이 한국교회의 장래를 위해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둘째, 해방 직후의 정치적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기독교의 통합된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김양선, 『한국기독교해방10년사』,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국, 1956, 50-51.】

 

그러나 이 대회에 참가한 이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대표자들뿐이었다. 이뿐 아니라 이 모임은 개회 벽두부터 수십 명의 감리교 지도자들이 감리교회 재건을 선언하고 퇴장함으로써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1945년 11월 27-30일 서울의 정동제일교회에서 조선기독교남부대회가 다시 개최되었다. 이것이 실질적인 제1차 남부대회였다. 이 대회는 회장 김관식, 부회장 김영섭 등 임원진을 선출한 후 일제강점기 순교자에 대한 추도회를 가졌으며,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남부대회는 선교사 내한을 요청하고, 38도선 문제의 해결과 자주독립을 위해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진정하기로 하는 등 여러 가지 사업을 결의했다. 여기서 결의된 것 가운데 하나가 교회신문 「기독교공보」의 발행이었다. 이 신문은 1946년 1월 김춘배를 발행인 겸 편집부장으로 하여 주간신문으로 창간되었다.

 

남부대회는 안팎으로 도전과 난관에 직면했다. 1945년 9월 대회에서 퇴장했던 감리교 지도자들이 감리교 재건 선언을 하였고, 장로교에서도 기존의 장로교 체제로 환원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통일에 대한 여망 때문에 남한교회만의 조직인 남부대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일도 어려웠다. 해방 직후 월남한 이북 출신 교역자들도 남쪽 교회들만의 총회 구성을 반대하는 입장이어서 남부대회는 친일교단 잔존 세력의 모임이라는 비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1946년 4월 30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제2차 남부대회에서 참석자들은 “각 교파는 각자 성격대로 활동키로” 결의하였다. 【서정민, “일제말 ‘일본기독교조선교단’ 형성과정”,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16호, 2002년 2월, 94-98 ; 이덕주, “남부대회의 조직과 소멸”, 『한국기독교사연구』 30호, 1990. 25.】

 

기독교조선남부대회는 해체되었으나, 이를 주도했던 이들은 1937년에 해산되었던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 재건에 참여해 1946년 10월 9일 서울YMCA회관에서 조선기독교연합회에 참여하여 연합운동의 주도권을 잡았다. 【“기독교연합회 발족” 「大韓獨立新聞」, 1946년 10월 17일자 2면 ; “기독교 신교 각파 연합회의를 조직”, 「자유신문」, 1946년 10월 19일자 2면.】

 

조선기독교연합회에는 장로교ㆍ감리교ㆍ성결교ㆍ구세군ㆍ재입국한 각국 선교부, 대한성서공회, YMCA, YWCA를 비롯한 기독교 기관 등 당시 남한 기독교를 대표하던 거의 대부분의 단체들이 참여했다. 이 연합회의 초대 회장에 김관식, 총무 임영빈, 간사 엄요섭이 선출되었으며, 1937년 해산된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의 헌장을 그대로 채용했다. 조선기독교연합회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한국기독교연합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III』,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9, 16-18.】

 

【참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2권』 2019, 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