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CCK, 백년의 발자취


한국기독교연합회는 해방공간 좌우분열기에 기본적으로 반공적 입장을 취했으며,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뉴욕의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siionary Council, IMC)와 국제문제교회위원회에 북한의 남침을 알리고 미국 및 국제종교기구들의 긴급도움을 요청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세계교회협의회가 “한국 상황과 세계질서에 대한 성명”(Statement on the Korean Situation and World Order)을 발표할 수 있었다.

 

6ㆍ25전쟁 막바지엔 북진통일 기원대회가 개최되었는데, 한국기독교연합회(총무 유호준) 주최로 인천과 청주, 광주 등지에서 열린 이 집회에서는 교회의 휴전반대 입장을 세계교회와 미국 대통령 등에게 알리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6ㆍ25전쟁 이후 문선명, 박태선, 나운몽 등 새로운 신앙운동이 일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비주의에 경도되자 1955년 7월 한국기독교연합회는 통일과 전도관을 “사이비한 신앙운동”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이렇게 전쟁 직후 새로운 신앙운동의 영향을 염려해 성명서를 낸 것은 연합회 창설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국기독교연합회는 교회와 국가 관계에 있어서도 이승만 정부와 긴밀한 밀착과 긴장관계를 형성했다. 1952년 실시된 제2대 대통령 및 제3대 부통령 선거에서 한국기독교연합회는 기독교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권연호, 김종대, 안창기 등 각 교파 대표들로 구성된 위원들을 선임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지지했다. 이들은 전국 3,500여 교회에 위원회를 조직, 선거 운동을 지원키로 한 후 “기독교인의 대통령” 이승만에 표를 던질 것을 호소했다.

 

이승만 정부 수립 초기에 전국 각급 학교에서 태극기배례를 시행하였는데, 다수 초등학생의 국기배례거부운동이 일어나 집단 퇴학과 고초를 겪는 사건들이 발생했는데, 이에 대해 한국기독교연합회는 적극적으로 대응, ‘국기배례거부운동’을 전개했으며, 마침내 국기배례를 주목례(注目禮)로 변경하는 성과를 내며 한국교회의 신앙적 입장을 신생 정부에 개진하고 대변하여 정책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1950년대는 한국교회가 한국기독교연합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에큐메니칼 운동의 참가 여부를 놓고 커다란 갈등과 분열을 겪은 시기이기도 했다.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 창립총회(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참석하고 돌아온 김관식 목사가 한국장로교의 세계교회협의회 가입을 제안하자 이에 반대하는 보수진영이 ‘교리의 위반’과 ‘용공’을 문제삼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이에 대한 한국교회의 갈등과 논쟁은 1954년 제2차 세계교회협의회 총회(미국 에반스톤) 이후 격화되었고, 장로교 에큐메니칼 진영(연동측)과 복음주의협의회 진영(승동측)이 나뉘어져, 마침내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과 ‘합동’ 측으로 커다란 분열을 겪게 되었다. 당시 미 북장로회와 남장로회, 호주장로회는 세계교회협의회에 가입해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있던 선교부들은 ‘통합’ 측에 합류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러한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교회 내 견해 차이는 이후 성결교의 분열에도 영향을 미쳐 한국기독교연합회와 복음주의협의회라는 두 연합기관의 탈퇴문제가 성결교 분열의 쟁점이 되었다. 해방공간의 극심한 좌우분열과 6ㆍ25전쟁이라는 민족사적 비극을 통해 내재화된 공포와 증오(트라우마)는 한국교회를 신앙적으로 보다 보수화하고, 이념적으로 반공에 함몰되게 했다. 이로인해 한국기독교연합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에큐메니칼운동도 신학적, 이념적 의심과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마침내 교회분열의 아픔까지 이어졌다.

 

1950년대의 한국기독교연합회는 해방직후 친일청산의 기회를 상실한 채 친기독교 정부의 수립과정에서 ‘교회와 국가’의 밀월 관계를 형성하며 반공적, 보수적 기독교연합기구의 정체성을 수립해 나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6ㆍ25전쟁의 참상을 거치며 한국기독교연합회의 에큐메니칼운동은 그 신학적 개방성에 대한 경계와 용공 시비에 휘말리며 한국교회 내에서 진보적 운동으로 인식되는 이중 구조에 놓이게 되었다.

 

【참고】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3권, 17-18쪽

“불행하게도 해방 후 한국교회는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으며, 교직자는 민중의 사표가 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민중의 적으로 지탄받아 왔다. … 교단의 사분오열로 일어난 피투성이의 강단싸움, 법정소송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구제보따리를 둘러싼 추문, 딸라의 농락과 굴종으로 일어나는 비열한 교권싸움, 타락한 성직자의 부정부패정권 참여, 자숙을 모르는 친일파와 모리배의 교권 장악 등등” 【“사설”, 「크리스챤」, 1961년 6월 19일자】


1961년 4ㆍ19 민주항쟁 직후, 한 교계언론의 한국교회 진단의 글이다. 4ㆍ19의 경험은 지난 이승만 정권 기간 권력과 물질에 현혹, 중독되어 있던 한국교회에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일시적인 각성을 불러 일으켰다.

 

1960년 3월 15일 정ㆍ부통령 선거는 이승만 정권의 부패를 여실히 드러내며 마침내 4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몇몇 교계 인사들의 각성과 교회 정화에 대한 요구와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이러한 전환기 속에서 한국기독교연합회는 4월 22일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문을 제출했다. 그 내용은 “민주국가 건설과 사회정의 수립에 역행했던 여러 사실과 부정선거를 통해 국민의 기본권이 박탈당한 사실”에 대한 지적이었으며, 또 “3ㆍ15 부정선거는 국민의 주권을 유린한 처사”이고, “자연발생적인 마산의 시위를 유혈사태로 이끈 정부의 시책”은 잘못되었다는 비판이었다.

 

한국기독교연합회는 4월 23일 민족에 호소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전국을 휩쓴 청소년 학도들의 평화적 시위는 3ㆍ1운동에 필적하는 역사적 사건”이며, “기독교 학교는 기독교 교육의 정신에 입각하여 앞으로 더욱더 학행일치의 진정한 교육을 실시할 것”이며, “평화적 시위를 보장하고, 3ㆍ15 부정선거는 공정한 재선거로 실시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반성은 철저하지 못했고, 이러한 각성의 분위기는 교회 전반으로 확산되지 못했다.

 

그러한 과도기적 상황 속에서 1961년 5ㆍ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한국기독교연합회는 이를 ‘군사혁명’이라 명명하며 위태로운 나라를 ‘공산침략에서 구출’하고 부정부패로부터 “재건하기 위한 부득이한 처사”라는 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 조속한 민정이양을 촉구하기는 했지만, 반공과 친미를 앞세운 쿠데타 세력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한경직, 김활란 등 교회 지도자들은 쿠데타 직후인 6월 하순 “혁명정부의 국제적 지지”를 얻기 위해 미주지역을 방문했다.

 

쿠데타 직후 한국교회의 지지 속에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1963년 12월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이내 한국교회와 박정희 정권과의 갈등이 불거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다수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국교정상화를 서둘러 타결하고자 했다. 1965년 박정희는 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한일협정에 조인했다. 강신명, 강원용, 김재준, 한경직 등 215명 교회 지도자들은 7월 영락교회에서 구국기도회를 열고 한일협정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비준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반대운동 자체는 큰 결실을 보지 못했다. 비록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과정은 한국교회가 국가권력을 상대로 교파를 초월한 연대를 통해 비판적 사회참여를 시도한 중요한 역사적 경험이 되었다.

 

한국기독교연합회는 1969년 2월 28일 경동교회에서 개최된 제22회 총회에서 ‘한국기독교연합회’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로 변경하는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은 삼선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을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삼선개헌 반대 입장 성명을 9월에 발표했다. 김재준, 함석헌, 박형규 등 에큐메니칼 진영의 교회 지도자들은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에 참여하여 개헌반대운동에 앞장섰다(김재준은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이에 반해 김준권, 김윤찬, 김장환 등 보수 기독교계 인사들과 급조된 ‘대한기독교연합회’라는 단체 등에서 박정희의 삼선개헌 시도를 지지했다(「교회연합신보」, 1969년 9월 14일자).

 

1969년 삼선개헌에 대한 기독교계의 찬반논쟁은 정교분리를 표방하며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는 보수진영과 민주주의와 사회변혁을 주장하는 진보진영이 선명히 나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의 등장 이후 기독교계에 생긴 큰 변화로써 1970년대 이후 교회의 양극화를 예고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1969년 한국기독교연합회는 헌장 개정에 들어갔다. 1924년 한국NCC가 조직된 이래 1969년까지의 헌장정신과 기구조직은 IMC의 영향과 그 정신에 따라 작성된 것이었다. 가령 회원단체는 국내의 각 교파만 아니라 국내의 각 선교부 및 기독교단체로 규정된 것을 비롯해 그 기능도 ‘선교’에 역점을 두었지, 에큐메니칼 운동은 차순위였다. 그러나 1948년 창설된 WCC의 회원구성 원칙을 참고함으로써 ‘선교’와 ‘에큐메니칼 운동’ 양 측면을 균형있게 강조하게 되었다. 그 변화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 명칭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로 바꾸었다. 이는 1948년 창설된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여향이었다. 둘째 제1장 총칙 제1조를 WCC의 정신을 그대로 채용했다. 즉 “본회는 성서에서 가르친 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성부ㆍ성자ㆍ성신의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고 이에 응답하려고 하는 한국에 있는 교회들이 모여 친교와 연구, 협의를 나누는 단체이다”라고 명기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이전에는 없던 것이었다. 셋째 회원구성을 국내의 각 교파에 국한 시켰다. 이것도 WCC의 회원 구성을 참고한 것이다. 물론 NCC는 WCC의 산하단체나 예속기구가 아니었고, WCC의 구성 유형에 구애받지 않는 주체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회원구성의 변화로 인해 결과적으로 기존 회원단체였던 각 교파 선교부나 기독교단체들, 평신도 단체들은 제외되고, 국내의 교파들만 남게 되었다. 1970년도 헌장 세칙에 기재된 가입교파의 회원은 예장(통합), 감리교, 기장, 구세군, 성공회, 복음교회였다. 넷째, 조직의 목적과 기능의 내용이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토대로 국내 및 국제교회 간에 친교와 연합운동을 전개한다. ② 교회간의 연합정신을 발휘해 그리스도의 복음전도를 도모한다. ③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사랑으로 교회와 사회와 국가 및 국제적으로 봉사한다. ④ 본회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든 사업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증언자가 된다. 그러나 주목되는 점은 이러한 내용을 열거하기 전에 “본회는 아래와 같은 에큐메니칼 정신을 구현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명시함으로써 기존의‘선교’ 중심이 아닌 ‘에큐메니칼 운동’의 균형을 모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기독교대백과사전 제16권」, 기독교문사, 1985, 1097.】

 

이렇게 196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기독교연합회’는 박정희의 5ㆍ16 쿠데타를 지지했지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로 이름을 바꾼 직후에는 박정희 ‘삼선개헌’을 반대했다. 이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비로소 기독교 신앙의 양심과 사회적 책임의 문제에 있어서 선교중심, 호교적 태도를 초월해 민족적, 사회적, 공동체적인 고민과 결단을 전향적으로 모색하게 된 역사의 전환점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1970년대 이후 전개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새로운 진로는 비록 꽃길이 아닌 가시밭길이었지만, 한국현대사에서 기독교가 감당해야 할 마땅한 역할이 무엇인지를 증명해 보여준 전환적 시대의 개막이었다.

 

【참고】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2권, 19-22쪽

1969년 한국기독교연합회(Korean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KNCC) 총회에서 결의한 바대로 1970년 총회에서부터 공식적으로 기구의 명칭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 NCCK)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는 단순한 명칭 변경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변화의 결과 기구의 회원은 국내 교파 교회만으로 한정되었지만 기구의 목적은 기존의 기독교 선교에 역점을 두었던 차원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이 균형감 있게 강조되면서 오히려 확장되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헌장

[제1조] 본회는 성서에서 가르친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성부ㆍ성자ㆍ성신의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고 이에 응답하려고 하는 한국에 있는 교회들이 모여 친교와 연구, 협의를 하는 단체이다.

[제4조] 본회는 아래와 같은 에큐메니칼 정신을 구현함을 목적으로 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토대로 국내 및 국제교회간에 친교와 연합운동을 한다.

2. 교회간에 연합정신을 발휘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전도를 도모한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사랑으로 교회와 사회와 국가 및 국제적으로 봉사 사업을 한다.

4. 본회는 그리스도인으로써 모든 사업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증언자가 된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시절부터 한국NCC에 미치던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IMC)의 정신적 영향력이 축소되고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의 영향력이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1968년 WCC 제4차 웁살라 총회에서 정점을 이룬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이 한국에 깊이 수용되었음을 알리는 일이기도 하였다.

 

1969년 12월 17일, 한국기독교회관이 완공되었다. 한국기독교회관의 건축은 다양한 기독교 기관들이 모여 있을 번듯한 공간의 필요성이 오랫동안 제기되어 온 결과였다. 미연합장로회가 소유하고 있던 500여 평의 대지에 지하 1층을 포함한 11층의 건물로 건축된 한국기독교회관은 당시 삼일빌딩, 조흥은행 본점과 함께 서울의 3대 고층 빌딩이었다. 건축 당시 교계 언론의 반응은 지나치게 호화로운 건물이라는 비판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1970년대를 지나며 한국기독교회관은 한국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재야의 메카’라는 세간의 평가를 받았으며 한국기독교회관이 위치한 종로 “5가”는 한국기독교 에큐메니칼 운동세력의 대명사가 되었다.

 

“지난 70년대를 거치며 기독교회관은 반체제운동과 인권운동의 상징 혹은 메카로서의 이미지를 굳혀갔다. … 그래서 언제부턴가 기독교회관은 그 정식 명칭보다는 「종로5가」 혹은 그냥 「5가」라는 별칭으로 더 잘 통하고 있다.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 이제 운동권내에서 뚜렷하게 솟아오른 하나의 「세력」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별 저항감 없이 통용되는 「5가권」이란 말은 기독교회관을 중심으로 형성된 개신교의 사회참여 세력을 가리키고 있다.” 【“재야의 메카, 기독교회관”, 『월간조선』 7권 6호, 1986.6., 335.】

 

이런 평가를 받게 된 것은 한국기독교회관에는 NCCK, 기독교방송,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한국기독학생총연맹, 한국교회엿어연합회 등의 연합기관과 대한예수교장로회, 한국기독교장로회 등의 교단이 입주해 있었으며 이 기관들이 한국의 민주화ㆍ인권운동에 적극적으로 적극적으로 동참했기 때문이다. 또한 2층의 강당에서 주로 개최되었던 종교 예식 형태의 “고난받는 이들을 위한 목요기도회”는 군사독재기 내내 정기적으로 모일 수 있는 유일한 시국집회였다. 이런 특징들로 인해 한국기독교회관은 한국 에큐메니칼 사회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1969년 KNCC가 NCCK로의 전환이 결정되고 동시에 한국기독교회관이 완공된 것은 1970년대 한국기독교 사회운동의 새로운 전기와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참고】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6권, 15-17쪽

이미 한국기독교는 1960년대 후반 새로운 선교영역을 개척해 나가며 사회참여적 에큐메니칼 운동을 시작하였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1968년 산업전도가 산업선교로 활동 방향을 전환하였고, 같은 해 9월 연세대학교 도시문제연구소 내에 도시선교위원회가 설치되면서 도시빈민선교가 시작되었다. 1969년 출범한 한국기독학생총연맹은 ‘학생사회개발단’ 운동을 시작하며 새로운 기독청년운동의 지평을 열었다. 학생사회개발단의 기본정신은 다음과 같았다.


“기독학생으로서 ‘예수의 생애’에 동참하는 자라면 우리는 오늘날 희생적인 사랑과 행동의 결단을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하는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 혁명 과정에 참여하기 위한 결단이며 정의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이란 값비싼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50주년 기념사업회,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50년사』, 다락원, 1998, 245.】

 

산업선교, 도시빈민선교, 그리고 변화된 기독청년운동은 흐름은 정부 당국과 갈등을 빚었다. 주민조직이론에 기반을 둔 도시선교위원회의 제1차 실무자 훈련프로그램은 훈련생들이 연행되고 훈련지역의 판자촌이 강제 철거되면서 중단되었다. 이런 갈등은 유신체제 성립 이후로 더욱 첨예해져갔다.

 

1973년 ‘남산부활절연합예배’ 사건으로 도시빈민선교기관인 수도권 특수지역선교위원회의 주요인물들이 구속되는 어려움을 겪었고, KSCF는 1974년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으로 괴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한국기독교 사회운동의 전체적인 지향을 민주화 인권에 집중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NCCK는 1973년 4월 ‘오늘의 구원’ 협의회를 개최하고 한국에서의 사회적 구원을 “1) 모든 사람이 각종의 불의의 세력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 2)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엄과 자아를 회복하는 것, 3)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사업에 동참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되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실제적인 문제 중 하나를 “한국에 있어서 민주주의의 형성”을 꼽았다.

 

이어 1973년 11월 인권문제협의회를 개최하고 인권선언을 채택하는 한편 인권신장을 위한 상설기구를 둘 것을 NCCK 실행위원회에 건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1974년 5월 4일, NCCK 인권위원회가 창설되었다.

 

인권위원회 창설 이후 NCCK는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는 인권위원회를 중심으로 교회와사회위원회, 선교위원회, 선교자유수호위원회 등이 한국의 재야와 학생 민주화운동가들을 정부의 탄압에서 보호하면서 동시에 한국 정부에 대한 국제여론의 악화를 야기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를 지나는 동안 NCCK의 인권의제는 종교의 자유에서 출발하여 불편부당한 재판, 언론의 자유, 신체의 자유, 재소자에 대한 인간적인 대우, 노동권 등으로 지속적으로 확장되어갔다. 각종 자유권의 유보를 당연시하며 돌진적 산업화를 추구하던 유신정부와의 정면 대결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권을 신장하고 국민의 안녕과 복지를 향상하며 사회정의를 수립하고 세계 평화에 공헌하는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정권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기의 정치적 권력을 영구화하기 위해 국민의 소리에 귀를 막고 신앙적 양심의 호소를 외면할 때 우리의 협력을 거부할 뿐 아니라 그러한 정권에 대항해야 할 책임을 하나님 앞에서 절감한다.” 【“성명서 – 최근 정부 요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발언에 관하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74년 11월 16일 발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제27차 총회 부록』, 7.】

 

NCCK 관계자들은 1970년대 내내 상시적인 미행, 연금, 강제 연행과 강제 여행, 또는 과도한 세금 물리기(정부는 1978년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 조지송 목사의 700만원짜리 아파트에 1,600만원이 세금을 부과했다) 등의 형식으로 고초를 겪었다. 또한 기독교 사회운동 진영은 당시로서는 사회적 사형선고에 해당하는 ‘빨갱이 낙인’에 시달려야 했다. 1976년부터 빈민선교와 산업선교에 대한 용공시비가 보수적 교계를 넘어 정부와 여당의 주도 아래 확산되었다. 정보기관은 빈민선교를 이끌던 박형규 목사에 대한 ‘빨갱이 만들기’를 집요하게 시도하였고, 도시산업선교회에 대한 용공시비는 동일방직사건, YH사건 등과 맞물려 정부의 공식적인 특별조사까지 진행되었다.

 

정부 특별조사반은 일부 도시산업선교회 목사들이 불법적인 투쟁방법을 쓰도록 교사 선동하였고 의식화를 통해 유신체제를 부인하고 있으며 인권운동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불법행위의 실체를 은페하고 있다고 지적하였지만 도시산업선교회가 용공단체라는 증거는 찾지 못했으며 용공단체는 아니라고 밝혔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70년대 민주화운동 II』, 1610.】

 

한국기독교 에큐메니칼 사회운동에 대한 용공시비의 대응 논리는 “우리야말로 진정한 반공”이라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에큐메니칼 진영에게도 반공은 강고한 한계로 남아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공주의의 틀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던 NCCK 역시 민주화운동가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면서도 ‘빨갱이’로 낙인찍힌 이들에 대한 보호에는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다.

 

【참고】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6권, 17-19쪽

1970년대는 한국의 인권운동이 출발한 시기로 한국의 인권운동은 종교 영역에서 먼저 시작되었다는 독특성을 가진다. 그리고 한국 인권운동의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 NCCK 인권위원회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창립이었다.


“한국 인권운동의 효시는 1974년 4월 11일 창립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라 할 수 있다. … 유신체제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국사회의 인권운동은 비록 정치적 자유나 자유권과 같은 기본적 수준의 인권담론을 내세우며 활동했지만 당시 이런 기초적 인권조차 국가폭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던 상황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했었다. 개신교와 천주교를 중심으로 전개된 인권운동은 또한 당시 민주화운동의 활로이기도 하였다.” 【정정훈, 『인권과 인권들』, 그린비, 2014, 47-48.】

 

해방 이후 미군정이 한국을 점령한 이유를 ‘인권과 종교상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남한 점령 태평양 주둔 미군사령관 포고 제1호, “조선인민에게 고함”, 1945년 9월 7일 발표]이라고 밝힌 이후, 인권은 한국 정치세력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 이승만 정권은 북한과의 대결 속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대외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인권을 이용했다. 따라서 이승만 정권의 인권은 곧 반공을 의미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부터 매년 12월 유엔인권선언일을 기념하는 인권주간 행사를 진행한 이승만정권은 유엔인권선언의 기본정신을 살리는 길은 “오직 자유의 적을 발본색원하는데 일로매진”하는 것이라 주장[“10일은 인권공동선언일”, 「조선일보」 1953년 12월 10일자]하였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획득한 박정희 정권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인권을 내세우면서 반쿠데타 세력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박정희 정권은 인권을 경제성장, 조국근대화, 반공이라는 세 가지 차원으로 설명하면서 경제성장과 근대화를 자유권적 인권에서 생존권적 인권으로 발전하기 위한 조치라고 주장하였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5개년계획 역시 생존권적 인권과 강하게 연결되었다. 【이정은, 「해방 후 인권담론의 형성과 제도화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148-152.】

 

특히 박정희 정권은 통치권자가 베풀어주는 일종의 자비로 한국의 고유한 인권적 법질서를 주장[「인권연보」 1963, 16-18.]하면서 ‘인간이기 때문에 존엄한 가치를 지닌다’는 인권사상의 기본 이해가 부재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한국 민주주의의 파괴를 의미했던 유신헌법 제정 역시 “진정한 자유와 민주와 평화와 번영의 토대 위에서 온 민족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지닌 바 인간으로서의 존귀한 권리를 마음껏 누려가면서 평화통일을 이룩할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이점이 바로 세계인권선언을 우리의 실정에 맞게 알맞게 구현하기 위한 것”으로 선전될 지경이었다. 【“인권주간을 맞는 소회”, 「경향신문」 1972년 12월 9일자.】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1970년대 중반까지 국가권력이 인권담론을 독점했기 때문에 인권이라는 가치가 지닌 저항성이 전혀 발현되지 못했던 것이다.

 

반면 민간의 지식인들은 그들의 저항적 정신의 근거를 ‘민권’으로 표현했다. 한국에서 민권 개념은 구한말 국가의 위기 속에서 보급되었다. 당시 개화지식인들은 민권을 강조하여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하였고, 민권을 ‘개인적 권리가 아닌 애국적 의무’와 연계시켰다. 이들에게 개인의 권리를 의미하는 인권은 오히려 국가적 위기를 가중시키는 위험 요소로 인식되었다. 【전상숙, “한말 ‘민권’ 인식을 통해 본 한국 사회의 ‘개인’과 ‘사회’ 인식에 대한 원형적 고찰”, 「한국정치외교사논총」 33(2), 2012.2, 5-33 참조.】

 

이러한 인식은 해방 이후로도 「사상계」 계열의 지식인들에게 이어졌다. 한국의 저항적 지식인들은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개인이 아닌 민족 그리고 민족의 실체인 민중을 권리의 주체로 파악하고 있었다.

 

문지영은 장준하가 ‘개인의 자유에 대한 무의식’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장준하는 일관되게 개인이 아닌 민족, 그리고 민족세력의 실체인 민중을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 보고 있었고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화된 후기에 이르러서는 민족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문지영은 한국의 대표적인 자유민주주의자였던 장준하가 인권의 제한을 전제로 하는 민권에 강조점을 두고 있었던 이유를 “제3세계인 한국의 자유주의가 서구의 자유주의에 비해 갖는 특성으로 자유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적 규정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문지영, 「한국에서의 자유주의 : 정부수립 후 1970년대까지 그 양면적 전개와 성격에 관한 연구」, 서강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129-140.】

 

1970년대 중반 한국의 인권운동이 기독교계 종교기관들에 의해 출발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헌법의 민주주의적 가치를 완전히 파괴한 유신헌법의 출현 이후, 정치적 자유를 추구하는 민간의 지식인들과 동일한 지향을 가지면서도 천부인권설에 기반한 권리와 신학을 공유하고 있던 가톨릭과 개신교가 인권을 저항의 이념으로 삼는 새로운 운동을 촉발시켰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1970년대 NCCK의 모습은 한국기독교의 에큐메니칼 운동과 민주화ㆍ인권운동의 주요 자료일 뿐 아니라 파괴된 민주주의의 폐허 위에서 인권이 어떻게 우리 사회의 도덕적 지향점으로 되살아났는지를 탐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참고】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6권, 20-21쪽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피살사건 이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정권 장악에 나서자 민주화를 갈망하는 운동이 각계각층에서 일어났다. 1980년 5월 광주 민주항쟁을 폭력으로 진압한 전두환 세력은 정권을 찬탈한 이후에도 사회 모든 부문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민주화세력에 대한 탄압을 지속했다.

 

NCCK는 5ㆍ18 민주항쟁 당시 군부의 탄압과 다수의 기독교계 재야인사들의 연행으로 인해 5ㆍ18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거나 진상규명에 나서지 못한 오점을 남겼다. 【『한국교회 인권운동 30년사』에 따르면 5ㆍ18민주항쟁에 대한 NCCK 인권위원회의 초기 대응은 ‘역사의 오점’으로 표현되고 있다. 조이제, 『한국교회 인권운동 30년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2003, 171.】

 

그러나 1984년 6월 인권문제전국협의회에서 인권위에 “광주사태 진상조사위원회 구성”을 건의하면서 비로소 진상조사 사업에 착수할 수 있었고, 그 결과 3권에 이르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출간할 수 있었다.

 

또 NCCK 차원에서 5ㆍ18 진상규명의 전면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인권위원회의 전 위원장들인 박형규와 조남기를 공동의장으로 조직된 ‘전국기독자민주쟁취대회’는 1985년 4월 26일 “5월 광주민중항쟁기념위원회”를 구성해 진상규명에 노력했다. 그해 NCCK는 5ㆍ18문제에 대한 유일한 성명서인 “광주의거 5주년에 즈음한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NCCK의 5ㆍ18민주항쟁에 대한 인식이 당시 재야, 청년학생, 유가족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손승호, “5ㆍ18민주화운동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53호, 2020. 참조】

 

5ㆍ18 광주민주항쟁 이후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기독교청년협의회 회원 김의기가 한국기독교회관에서 투신했으며, 신촌로터리에서 기독인 노동자 김종태가 분신했다. 또 민주화운동을 하던 감리교 임기윤 목사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관련해 계엄합동수사단에 연행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기도 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III』, 244.】

 

박정희 정권하인 1970년대부터 인권, 민주화 운동을 전개해 온 한국 기독교의 에큐메니칼 사회운동진영은 1980년에도 그 연장선상에서 전두환 정권과 다시 충돌했다. 민주화운동청년엲바, 해직교수협의회, 민주언론운동협의회 등의 단체가 결성되면서 민주화운동이 본격화된 시점은 1983년말 이후부터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NCCK 인권위원회,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K),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도시산업선교회와 같이 1970년대 이래 꾸준히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운동을 벌여온 단체들을 비롯해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이하 목정평), 기독교농민회, 기독노동자연맹, 기독여민회 등의 부문별 단체들이 속속 결성되어 1980년대 중반 이후 통일운동, 민주시민운동, 대안교육운동, 청년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등 기독교 사회운동의 외연을 다양하게 넓혀갔다.

 

1981년 조직된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중심으로 1986년 3월 NCCK 시국대책위 산하 ‘민주헌법실현 범기독교추천위원회’의 직선제 개헌위한 서명운동에 대해 “현 시국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제언”(5월)이 발표됨으로써 그동안 침묵을 지켜온 복음주의권의 전향적인 사회참여 선언이 이루어졌다. 그 후 이들 복음주의권 기독교인들도 단식, 기도회, 성명발표, 시위, 농성 등의 민주화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으며, 1987년 6ㆍ10항쟁을 경험하면서 그러한 입장이 더욱 선명해지게 되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III』, 245-247.】

 

1980년대 중후반까지 신군부 정권의 공포정치가 지속되는 가운데 반독재투쟁의 열기가 점점 고조되었다. 1985년 2ㆍ12 총선을 계기로 불붙기 시작한 ‘군부통치 종식’과 ‘대통령 직선제’를 내세운 국민의 민주화 열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당시 목정평 소속 27명의 개헌서명을 시작으로 기장, 예감, 기감 3개 교단을 중심으로 한 시국성명 발표가 잇달았다. NCCK는 1985년 3월 17일 그 간의 개헌서명운동의 성과를 수렴해 1,050명의 서명자 명단을 공개했다[2차는 4월 26일에 2,748명을 공개했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편, 『개헌과 민주화운동』, 민중사, 1986, 39.】

 

이러한 개헌 열기를 타고 NCCK, EYCK, KSCF 등 기독교 연합기관들은 민주헌법쟁취운동, 개헌서명운동, KBS TV 시청료 거부운동, 고문반대운동 등 민주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김주한,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담론 분석”, 「대학과 선교」, 제26집, 2014, 184-185.】

 

그 결과 1987년은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보수와 진보를 불문하고 한국교회가 분연히 일어나 개헌과 대통령 직선제를 성취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6ㆍ10민주항쟁을 통해 기존의 변혁운동은 시민운동으로 전환되었으며 한국교회의 사회운동은 민중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받게 되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III』, 247, 254.】

 

1980년대 NCCK의 활동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바로 통일운동이 본격화 되었다는 점이다. 1972년 남북간에 체결된 “7ㆍ4공동성명” 이후 NCCK는 통일 및 사회정의기독교협의회를 창립했다. 그러나 1970년대 기독교의 통일논의는 교회전체보다는 통일문제에 열정적인 기독교인 개인 차원에서 전개되었다.

 

1988년 이전까지의 개인적 방북자로는 고려연구소장 양은식 박사(1976), 미 센트럴매소디스트대학 선우학원 교수, 미연합장로회 선교부 중동지역 총무 이승만 목사(1978), LA한인연합회 노의선 목사(1979), LA한인연합장로교회 김성락 목사(1981),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 이화선 목사(회장), 이영빈 목사 부부(1981),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 총무 최기환(1983) 등이 있었다. 이승만 목사와 노의선 목사는 조선기독교도련맹의 강량욱 목사와 면담하고 김성락 목사는 김일성과 오찬 및 면담을 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유나, “1980년대 방북자들과 기독교 남북대화”, 「기독교사상」, 2020년 7월호, 20-26.】

 

이후 1980년대 초부터 해외동포들 중 특히 기독교인들 간의 국제적 종교교류행사와 회의를 통해 북한과의 접촉이 모색되었다. 1981년 6월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 이화선 목사(회장)과 이영빈 목사 부부가 평양을 방문해 공동선언을 발표했고, 11월 북한과 해외 한인 기독인들과의 첫 접촉인 “제1차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교 신자간의 대화”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성사되었다. 이 모임에는 재미 강위조 목사, 재독 이영빈 목사와 북한의 고기준 목사 및 전금철 조평통 부위원장 등 수십명이 참석했다. 여기에서 자주통일, 평화적 통일, 이념을 초월한 민족적 단결원칙을 강조하는 선언문(일명 ‘비엔나선언’)이 발표되었다. 【이유나, “1980년대 방북자들과 기독교 남북대화”, 「기독교사상」, 2020년 7월호, 24-25.】

 

이렇게 시작된 해외에서의 ‘통일대화’는 1991년까지 유럽에서만 여섯 차례 개최되었다. 1981년 평양에서의 공동선언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이후부터 한반도 통일문제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영빈ㆍ김순환, 『통일과 기독교』, 고난함께, 1994.】

 

이후 1982년 12월 핀란드 헬싱키에 1) 미군철수ㆍ자주화의 실현, 2) 반독재ㆍ민주화 실현, 3) 통일 촉진 노력, 4) 전쟁반대ㆍ평화보장 등의 내용을 담은 〈헬싱키선언〉이 발표되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통일위원회 편, 『1980-2000 한국교회평화통일운동자료집』,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2000, 28.】

 

이러한 해외동포 기독교인들과 북한 기독교 대표자들 간의 대화는 남한교회의 기독교인들과 북한의 기독교인들이 직접적으로 소통하고 평화통일을 위해 만나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교류를 촉진하는 동인이 되었다. 【홍동근, 『비엔나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 북과 해외동포ㆍ기독자 간의 통일대화 10년의 회고』, 형상사, 1994.】

 

독일의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 일행이 평양을 방문했던 같은 시기, 1981년 6월 8일부터 10일까지 서울 수유리 크리스천아카데미하우스에서 한국과 독일 교회 대표들이 “분단국에서의 그리스도 고백 – 죄책 고백과 새로운 책임”이란 주제로 한ㆍ독기독교교회협의회를 개최했다. 모임에 참석한 양국 교회 지도자들은 통일운동을 위한 양국 교회가 긴밀하게 협력하기로 했으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안에 통일문제 연구기관을 설립할 것”을 결의했다. 이 결의에 따라 1982년 9월 각 교단 대표와 통일문제 전문가들로 교회협의회 안에 통일문제연구위원회가 설립되었지만 통일 논의 확산을 우려한 정부 당국의 방해로 충분히 활동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NCCK는 세계교회협의회(WCC) 등과 연락을 취하며 통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남ㆍ북 기독자 회담을 준비해 나갔다. 【이덕주, 『이덕주 교수가 쉽게 쓴 한국교회 이야기』, 신앙과지성사, 2009, 350.】

 

1984년 10월 28일부터 11월 2일까지 WCC 국제위원회가 주관하여 동북아시아의 정의와 평화협의회(일명 ‘도잔소회의’)를 일본 YMCA 시설 도잔소에서 개최함으로써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에 주대한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 회의는 비록 북한 기독교 대표자들이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문제를 한국교회와 해외교회들이 연대해 본격적으로 협의한 최초의 회의였다. 도잔소회의의 결과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전망 : 도잔소 협의회 보고서와 건의안”이 채택되었다. 그 내용은 “분단극복과 평화통일은 화해복음의 실천 및 목표이며 한반도 평화통일은 남북교회의 공동과제이자 세계교회의 공동책임이라는 것”이었다. 【이유나, 『문익환의 통일론과 통일운동에 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128.】

 

1980년대에 이르러 반독재, 민주적 변혁이 민족통일의 과업과 불가분리의 관계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운동의 주체는 민중 스스로가 되어야 한다”는 신학적 주장은 한국교회의 통일을 위한 주체적 노력에 명분과 동기를 제공해 주었다. 【안병무, “한국통일문제의 성서적 조명”, 「한국기독교장로회회보」, 1981년 6월, 4-9. ; 주재용, “한국교회의 통일론”, 「기독교사상」, 1981년 6월, 32.】

 

NCCK는 1985년 2월 제34차 총회에서 “한국교회 평화통일 선언”을 채택하고 “평화의 염원은 약한 자, 가난한 자, 눌린 자, 곧 민중이 가장 깊이 탄식하고 갈망하는 민중의 현실”이라고 선언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제34차 총회, “한국교회 평화통일 선언”, 1985년 2월 28일】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86년 9월 스위스 글리온에서 남한 NCCK 대표 6명과 북한의 조선기독교도련맹 대표 5명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III』, 249.】

 

이는 비록 해외에서의 만남이었지만 남북한 교회 지도자들이 분단 이후 최초로 만났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녔다. 이후 19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이 NCCK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고, 같은 해 11월에는 제2차 글리온회의로 남북기독교 대표자들이 만났으며, 이들은 1995년을 희년으로 선포하고 평화적 통일에 앞장설 것을 결의했다. 【이유나, “1980년대 방북자들과 기독교 남북대화”, 26.】

 

또 1989년 3월에는 문익환 목사가 방북하여 김일성과 남북의 통일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눴으며, 1992년 1월에는 NCCK 권호경 총무와 남한교회 대표들이 조선기독교도련맹의 초청으로 방북하여 김일성을 면담하기도 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III』, 253.】

 

이러한 1988년 이후의 활발한 남북 교회의 민간교류와 통일논의는 남북대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정신적 토대를 제공하는 전환기적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참고】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8권, 19-22쪽

1980년부터 1987년까지는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새로운 국면의 시련기이자 암흑기와 같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절망의 그늘이 깊어질수록 새 시대에 대한 갈망과 도전은 더욱 응축되고 그 폭팔력이 내재되었다. 1987년 6ㆍ10민주항쟁과 19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이 만들어낸 역사적 성취와 변혁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이러한 역사의 예열(豫熱) 시대, 민주화와 통일을 향한 도약과 도전의 숨고르기를 위한 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 한국교회는 앞서 열거한 정치적, 민족적인 아젠더 만에 천착했던 것은 아니다. 1970년대 이전까지 수입신학, 외국신학의 소개 단계에 그쳤던 한국 신학계에 민중신학, 토착화신학, 통일신학, 여성신학 등 다양한 한국적 신학의 논의가 심화되고 한반도의 현실문제에 응답하는 학문적 노력을 경주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아울러 기존의 보수신학도 심리학과 역사학, 사회학 등의 간학문적 연구풍토를 새롭게 조성하고자 노력했다. 【박근원, 강병훈, 박영희, 백천기, 김소영, “특별좌담 : 80년대 한국교회, 무엇을 했나?”, 「기독교사상」, 1989년 12월호, 84.】

 

교회 차원에서는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1984-85)이 전개되어서 전국적으로 각종 기념대회와 행사를 치러 한국교회가 진보와 보수를 넘어 크게 협력했던 시기였으며, NCCK 60주년(1984)을 맞아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과거를 반성하고 새로운 정체성과 미래를 모색하는 전환기이기도 했다. 60주년을 맞은 NCCK는 새로운 선교신학과 실천의 과제로서 교회의 연합과 일치(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 통일찬송가 편찬 등), 민족통일운동과 민주화를 성취하는 것이 이 시대의 뜨거운 요구이며, 교회가 마땅히 담당해야 할 선교적 과제라는 인식을 새롭게 공유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박근원, 강병훈, 박영희, 백천기, 김소영, “특별좌담 : 80년대 한국교회, 무엇을 했나?”, 「기독교사상」, 1989년 12월호, 82-90.】

 

1987년 민주주의의 성취는 당시 한국교회도 진보와 보수를 떠나 보편적으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의 대세였다. 다만 1988년 NCCK의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이후 분단현실에 대한 역사인식의 차이와 이념적인 갈등으로 인해 더욱 선명해진 한국교회의 분화현상은 1980년대를 돌아봄에 있어 가장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1980년대 후반부터 촉발된 한국교회의 이념적, 신학적 분화는 1990년대에 이르러 더욱 심화, 첨예화 되어 갔다.

 

【참고】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8권, 22-24쪽

1990년대는 1987년 6ㆍ10민주항쟁과 19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이 만들어낸 역사적 성취와 변혁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자 노력한 시기였다. 88선언에 나타난 신학적, 신앙적 메시지는 이후 국내외 교회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특히 정부의 통일정책과 ‘6ㆍ15공동선언’(2000)에도 그정신이 반영됨으로 남과 북이 상생하는 통일정책의 근간이 되었다.

 

이 선언의 주요 내용은 
1) 분단 상황은 교회의 책임이며, 여기에 일조한 우리의 죄책을 고백, 
2) 희년을 선포하며, 
3) 1972년 7.4 공동성명을 지지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또 이 선언은 ‘자주’, ‘평화’, ‘사상ㆍ이념ㆍ제도 초월’이라는 3대 정신에 더해,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최대한 보장’하고 ‘민족 구성원 전체의 민주적 참여’라는 두 원칙을 추가하여 온전한 통일을 모색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선언은 이후 한국교회의 통일운동과 대북 교류사업에 역사적 전환을 가져왔다. 이후 해외 교회에서 그 신학적ㆍ신앙적 가치를 크게 인정받았으며, 특별히 후대에 이르러 ‘6ㆍ15 공동선언’에 반영돼 남과 북이 상생하는 통일 정책의 근간이 됐다. 【김태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지향하는 새로운 사회”, 「복음논단」, 제2집, 2018, 88.】

 

NCCK는 이외에도 1990년에 “세계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JPIC) 서울대회를 유치해 한국기독교의 대안적 선교와 사회운동의 보다 구체적인 방향과 이정표를 설정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990년 JPIC 서울대회 「최종문서」에서 확정된 “신학적 확언”의 내용은 “1. 우리는 모든 권력행사가 하나님께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고 확언한다. 2.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의 편에 서신다는 것을 확언한다. 3. 우리는 모든 인종과 민족의 평등한 가치를 확언한다. 4. 우리는 남성과 여성이 하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을 확언한다. 5. 우리는 진리가 자유로운 민중공동체의 토대임을 확언한다. 6.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확언한다. 7.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은 우주 전체의 근원과 유지자이다. 8. 우리는 땅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확언한다. 9. 우리는 젊은 세대의 존엄과 헌신을 확언한다. 10. 우리는 인권이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임을 확언한다.”로 정의와 인권, 평화와 창조세계 보전에 대한 구체적인 신학적 입장을 천명했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편, 『정의ㆍ평화ㆍ창조질서의 보전 세계대회 자료집』, 민중사, 1990, 145-171.】

 

1993년에는 NCCK 주최로 “8ㆍ15남북인간띠잇기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 행사는 서울 독립문에서 임진각으로 이어지는 통일로에서 22개 교파, 890개 교회와 55개 사회단체에서 6만 5천여명의 시민이 참여한 가운데 실시되었으며, 평화통일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보여주는 행사이자 민중을 통일의 주체로 내세운 기독교 통일운동의 상징적 행사였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III』, 253. ; 정병준, “한국기독교와 민주화운동”, 김흥수ㆍ서정민 편, 『한국기독교사 탐구』, 대한기독교서회, 2011, 272-273.】

 

NCCK는 1994년 창립 70주년을 맞아 “21세기 에큐메니칼 신학선언”과 1995년 “평화통일 희년선언”을 통해 이러한 정의ㆍ평화ㆍ생명의 정신을 한국의 역사적 현장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신학적 근거와 실천과제를 밝혔다.

 

NCCK는 1994년 70주년을 맞이하여 “21세기 에큐메니칼 신학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서는 “그동안 한국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교회의 분열과 신학적 논쟁에 급급해 왔음을 반성하는 한편, 급변하는 시대가 주는 위기에 적극적으로 대결함으로써 민족과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을 약속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도록 요청받고 있다”고 고백했다. 이어 이 선언문에서 결의를 통해 “첫째, 성서의 희년정신에 입각하여 평화적 통일을 이루기 위한 에큐메니칼 연대를 강화할 것이며, 둘째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장애인, 소수자 등의 인권을 중심한 사회선교는 지속적이고도 더욱 광범위하게 추진하고, 셋째 모든 종류의 성차별은 극복되어야 하며, 넷째 국가권력과 방송통신의 유착을 통한 여론조작과 문화제국주의, 탈윤리 현상에 대해 극복하고, 다섯째 인구의 급증과 식량난, 생태계의 파괴에 대해 우려하며 소유가 아닌 존재에 가치를 두는 세계관과 인간중심의 구원론에서 우주 중심의 구원으로 신학적 전환을 모색하며, 여섯째, 한국사회가 다원적 사회임을 인식, 과거 선조들의 3.1운동에서 보였던 에큐메니칼 전통이 복원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사회 향한 예언자적 사명감당 : NCC 70년을 돌아본다”, 「기독교신문」, 1994년 10월 2일자 7면.】

 

이러한 세계와 사회를 향한 NCCK의 사회운동과 선교 노력은 1990년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고, 활발히 계승, 모색되고 있다.

 

【참고】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12권, 22-24쪽

[2023년 10월 11일] 성명서 -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 관련 긴급성명

【제72회 총회 자료집】 424-425


한일화해와평화플랫폼 공동기자회견문 ‘이태원 참사를 애도하며, 한반도 무력대결 즉각 중단하라’

【제72회 총회 자료집】 407-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