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30일, 김의기 농촌분과위원장이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배포한 직후 기독교회관 6층에서 투신자결하였다. 이에 김의기 농촌분과위원장 영결예배가 6월 3일 서울대학병원 영안실에서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1982년 1월 19일부터 23일까지 제5차 한일교회협의회가 “재일한국인의 인권문제”라는 주제로 일본에서 개최되었다. 한국측에서는 김소영 총무를 비롯하여 인권위원 12명이, 일본측에서는 일본 NCC 대표 22명이 참석하여 일본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는 재일한국인의 인권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한열은 1987년 6ㆍ10대회를 앞두고 연세대에서 열린 ‘6ㆍ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 시위 도중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후두부를 맞아 혼수상태에 빠진 후 7월 5일 사망하였다. 이한열의 장례식은 1987년 7월 9일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최루탄 피격사건은 6월항쟁을 확산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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